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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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昌
(? ~ 기원전 192년)
초한쟁패기 ~
전한 한고제 유방 때의 인물.
유방과 같은
패현 출신이다.
종형
주가(周苛)와 함께
진나라(秦) 사수군의 하급관직인 졸사
[1] 군수관련 문서 잡무를 보던 직책으로, 1년에 100석의 녹을 받아 백석졸사라고도 불렀다
를 지냈다. 유방이 패에서 봉기하고 사수군을 무찌르면서 주가와 함께 유방을 섬겼으며 직지(職志)를 맡았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지면서 중위(中尉)가 되었다.
한왕 4년 3월(기원전 203), 형양을 지키던 종형 주가가
초나라 패왕
항우(項羽)에게 붙잡혀 가마솥에 삶겨져 죽자
[2] 여담이지만 주가 역시 한 독설 했는지 자신을 회유하려는 항우에게 신나게 욕설을 퍼붓다가 삶겨 죽었다고 한다.
주가의 후임으로 어사대부를 지냈다.
[3] 비슷한 시기에 관영이 어사대부로 승진했는데, 뭐가 맞는지 불명이다. 혹은 두 명의 어사대부가 있었던 것일수도.
초한전쟁 중에는 내사(內史)로써 오창(敖倉)을 지키고, 통일 뒤에는 조나라
상국을 지내기도 했다.
[4] 본인은 척씨의 아들인 유여의가 봉해진 소국에 좌천 되는 것이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고조는 강직한 주창이 아니면 자기 사후에 여후의 손아귀에서 유여의를 지켜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조나라로 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같은 상국인 진희(한나라)를 고깝게 봤는데 과연 반란이 일어났고 한신도 여기에 연루되어 죽었다.
어사대부로써 제후들을 안정시킨 공로로 2천 8백 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 사람의 진정한 진가는
최강의 독설가. 동향인
소하,
조참도 멀리했다니 말해 무엇할까. 주창이 상주(상소)할 일이 있어 찾아갔다가 고조가 연회
[5]중이라 바로 달아나왔는데, 유방이 주창의 뒷덜미를 부여잡고
뒤에서 덮쳐서 파운딩 자세로 만든 후 "내가 누구같은 임금이냐!" 라고 묻자
"폐하께서는 걸주(桀紂, 걸왕과 주왕)와 같은 폭군이십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6] 그 두 왕은 각각 하나라와 상나라(은나라)의 마지막 왕들로 각각 상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에게 토벌당하게 된다. 그 두 왕은 수천년의 중국 역사에서 폭군이 등장할 때마다 '걸주와 같은'이라면서 비유되었다. 거의 폭군의 대명사처럼 불리우는 왕들이었던 것. 즉 저 말은 대기업 회장이나 대통령이 장난을 치자 빡친 비서나 직속 부하가 "넌 김정은 같은 새끼야"라고 한 거나 다름없다.
즉 주창은 유방 밑에 깔려서 욕을 퍼부었던 것. 그러나 상황를 보면 유방이 애초에 도망가는 사람을 냅다 붙잡고 발목을 후려서 넘어뜨리고 나서 한 소리라 어찌보면 욕먹어도 쌀 짓을 한것이니,
피장파장의 상황인지라 껄껄 웃어 넘겼다고 한다. 하지만 주창의 그런 독설을 더 두려워했다는 말도 있다. 이런 사건 뒤에 조나라 상국으로 봉해졌으니 좌천인사라고 생각할 만도 하다. 이때 주창은 숫제 "폐하가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쭉 곁에서 모신 절 어떻게 이제와서 제후한테 내쫓을 수가 있습니까"라며 엉엉 울면서 항의했는데, 유방은 "좌천인것도 알고 싫은 것도 이해하지만 너 말고는 맡길 사람이 없다."는 말로 보냈다고 한다.
황태자로서의 자리가 확고해지기 전 폐위될 위기에 처했던 황태자 유영을 내치지 못한 이유도 주창이 결사반대 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가히 대단할 따름.
[7] 여후가 주창에게 직접 감사를 표한 적이 있을 정도다. 추후 주창이 조나라 상국이 되어 조왕을 부르는 일에 응하지 않았을 때도 여후는 주창에게 그닥 해를 끼지지 않았다.
[8] 유방이 굳이 주창을 조나라 상국으로 보낸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쪽같은 성격의 그라면 척부인 모자가 죄도 없이 죽는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여후 또한 태자를 옹호한 그를 해치기 어려울 것이므로. 하지만 결국 여후는 본문처럼 세번이나 소환 시도가 좌절되자 주창을 먼저 소환한 뒤에 기어코 일을 벌인다.
말주변이 좋지 않고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음에도, "기, 기, 기어코 그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며 태자를 폐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다고 한다. '시, 시, 신은...' 같은 식으로 더듬으면서도 폐태자에 반대하는 모습에 유방이
웃겼는지 좋아하면서 결정을 물렀다고 한다.
[9] 上問其說,昌為人吃,又盛怒,曰:「臣口不能言,然臣期期知其不可。陛下雖欲廢太子,臣期期不奉詔。」上欣然而笑。”(<사기> ‘장승상열전’)
최후는 그래도 비교적 덜 불행했다. 계속
유여의의 밑에서 상국으로 있었으며, 고조가 죽고는
여후가 조왕 유여의를 소환했으나 그때마다 주창은 조왕의 병을 핑계로 불응했다. 세 번을 반복하자 고황후는 먼저 주창부터 소환해 질책하고는 조왕을 소환해 1달 만에 독살했다. 주창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3년 후에 죽었다. 시호는 도(悼). 그리고 주창을 조나라 상국으로 임명하도록 건의하고 어사대부가 된 조요는 주창 사후 5년 후에 괘씸죄로 파면되었다.(...)
당대의 독설가이긴 했지만, 나름 직언과 같은 말도 서슴지 않은데다가, 오히려 소하와 조참같이 중신들로부터도 그다지 가까이 어울리지는 못했으니, 그 여후의 눈에도 쓴소리하는 늙은이 하나쯤으로 여겨서인지 숙청당하지 않고 곱게 사망한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10] 이것은 유영의 폐태자에 극렬하게 반대한게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서는 여후도 주창에게 무릎을 꿇고 감사 표현을 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
독설로 적을 하도 많이 만들어서 여후처럼 왕권을 독식하려는 사람이 쓰기엔 최고의 장깃말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여후가 숙청한 사람 대부분은 신망이 높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능력자들인데. 주창은 능력에 대한 비판은 없지만, 인성관련해서는 아무도 좋아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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