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
최근 편집일시 : (♥ 0)
분류
1. 개요[편집]
진(秦)나라의 제31대 국군이자 제6대 왕이며 중화라는 인식을 처음 남긴 진(秦) 제국과 중화제국(中華帝國)의 첫 번째 황제(皇帝, Emperor)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으며, 황제라는 직위명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 스스로를 첫 번째 황제라는 뜻의 시황제로 자칭했는데, 진나라의 첫 황제라는 의미로 진시황제라 하기도 한다.
고대 중국의 6국[5] 을 멸망시켜 550여 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약 2,000년에 걸쳐 이어진 황제 중심 중앙집권제를 확립한[6]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중학교, 고등학교 세계사 시험에도 자주 나오는 인지도 높은 군주이다.
기나긴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대업을 이룬 인물이지만 평가는 많이 갈리는데, 이유는 진시황의 불로불사 집착 등 미신적 기행과 잘못된 통치로 인해 그가 죽고 불과 3년 정도 만에 통일된 진 제국이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기껏 중국을 통일해 놓고도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괴롭히다가 진나라의 멸망을 불러일으킨 폭군이라는 혹평이 주류였으나,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며 소수민족을 묶어두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된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재평가 흐름도 있다.[7] 대만에서도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이유로 진시황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물론 다른 시각으로 보는 층에선 여전히 엄격한 법치만 내세우다가 망한 폭군 인상이 더 크다.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시황제/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시황제/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분서갱유[편집]
자세한 내용은 분서갱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사상책을 불싸르고 유학자를 묻어버린 이 사건 덕분에, 전근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만세의 적 취급을 당했다.[8]
5. 용모[편집]
사마천의 《사기》에서 울료는 시황제의 용모를 가리켜 "코가 높고, 눈은 길게 찢어졌으며[9]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 같으며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를 하는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덤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 같은 자"라고 혹평했다.
중국 근대의 학자 곽말약은 그의 저서 《십비판서》(十批判書)에서 "시황제는 초상화와 달리 선천적인 병으로 인해 어렸을 때의 외모가 추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꺼렸으며, 특히 화려함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것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소질 있는 아이가 타고난 외모와 안 좋은 환경 때문에 비뚤어진 전형적 케이스"라고 주장했다. 유아기에 볼모였던 아버지는 진나라로 도망치고[10] 어머니 아래서 외면받고, 조나라에서 핍박받으며 비정상적이고 외롭게 자라고 진나라로 돌아가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탓에 건강한 인간 관계를 배우지 못했는데, 유년기와 사춘기의 굴곡진 인생이 그의 정신적인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줘서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 게 아닌가 하며, 무언가를 이루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중국 통일을 이루거나, 만리장성 축조와 황릉, 남월 정벌 등 큰 규모의 대업을 계획하게 된 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시황제의 비정상적인 외모와 말년에 보인 정신착란 증세가 사실 심각한 뇌 손상이 가져온 결과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수은은 장기 복용 시 신장과 뇌에 문제를 일으키며, 소량 섭취 시 피부 속의 흑색 색소과립을 포함한 세포를 죽여 일시적으로 희뽀얘지며 피부가 회춘한 듯이 팽팽해지는 효능이 있다. 시황제는 이를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믿게 되어 매일같이 수은을 마시고 발라서 결국 수은 중독에 이르렀으며, 거기에 수은은 금단 증상까지 있어서 결국 시황제는 수은을 더 많이, 더 자주 찾게 되었다.
이러한 수은 중독에 과로까지 더해 몸을 혹사시켰는데도, 50대 넘기 직전인 49세까지 살았다.[11] 젊을 때부터 착공한 진시황릉엔 다량의 수은을 붓고 출렁이는 은색 강을 조성했다고 한다. 죽어서도 수은과 함께 하고 있다.[12] 실제로 현재 진시황릉 주변의 토양 수은 농도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실제로 다량의 수은이 묻혔을 것으로 보고 있다.
6. 암살 위협[편집]
10년 만에 전국의 여섯 국가를 멸망시키고, 가혹한 통치를 한 탓에 과거 6국 백성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고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나라 형가의 암살 미수와 형가의 친구 고점리, 훗날 한나라 개국 공신이 되는 젊은 시절의 장량 등이 있다. 이연걸 주연의 2002년 영화 <영웅 : 천하의 시작>도 보면 이 암살 시도를 모티브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시황제는 유난히 암살 위협을 많이 받은 황제였고 이 때문에 불로불사에 더 집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7. 여담[편집]
- 시호와 묘호가 없는 황제로 나름 유명하다. 흔히 불리는 시황제는 시호가 아니라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일 뿐이다.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면서 시호를 폐지했다. (죽은)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군주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시법), 철권 독재자인 시황제의 눈에는 매우 건방진 관행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예 시호를 없애버리고 황제의 대수만 표기하게 했다. 호해가 이세황제(二世皇帝)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13]
- 시황제의 시호가 없는 탓에, 선진·양한[14] (先秦兩漢) 시대 탁월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시황제와 한무제를 함께 일컬을 때 특이하게도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표현한다.[15] 어차피 진나라의 2세 황제 호해는 황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치세를 보냈고, 재위 기간도 짧아 따로 언급할 일이 적고 그 다음 군주인 자영 역시 한 달 조금 넘게 재위한 데다 아예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왕을 칭했다.[16] 따라서 시황제가 사실상 진나라의 유일한 황제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진황(秦皇)이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다. 물론 진황한무(秦皇漢武) 대신 진시한무(秦始漢武)라고 쓴 예도 옛 문헌을 검색해 보면 발견되긴 하지만 진황한무(秦皇漢武)가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 이상하게도 시황제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황후를 두지 않았다면 그것도 당시로서는 특이한 일이었을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 《사기집해》에는 이사가 17형을 폐하고 호해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명한 부소와 호해 이외에도 아들이 많았던 것이니 당연히 황후와 상당수의 후궁을 거느렸을 것이다. 다만 《사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릉에 대한 내용 중 이런 서술이 있다.
이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중, 자식이 없는 자를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皆令從死, 死者甚眾)
여기서 선제는 당연히 시황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진시황릉이나 그 인근에서도 황후나 후궁의 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에 후궁의 시신이 매장되었을 가능성, 또 하나는 저 기록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 시황제는 절대권력 확립에 집착해 모든 사무를 직접 처리했는데 하루에 처리한 공문이 죽간으로 120근 가량이었다고 한다. 여불위의 섭정과 노애의 쿠데타까지 겪은 경험 탓으로 추정된다.
- 폭군인 것 치고는 여불위를 제외하면 공신 숙청이 없는 편인데 의외로 진시황은 의심이 많았어도 숙청 자체는 그리 쉽게 단행하지 않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초기엔 여불위를 날려버린 본인의 정치력이 있고 후기엔 전국시대를 통일했다는 업적이 있으니 반기를 들 신하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하들 관련 문제가 두드러진 건 실제로 시황제 사후부터였다.
-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자랑스럽게 "우리는 단언컨대 진시황보다 강력하다."고 했으며, 1973년 7월 왕훙원과 장춘차오에게 "나 또한 진시황이다."라고 교시했다. 린뱌오의 몰락 이후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자신이 진시황이란 이유로 비판했다고 그를 부관참시하면서 린뱌오는 장제스처럼 공자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한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린뱌오 사망 이후 저우언라이의 권위가 상승한 것에 매우 불만이었던 문혁 극좌파는 신이 나서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위해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에 대한 4인방의 패악질은 오히려 중국 전역에 방광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저우언라이의 상황을 알리게 되었으며 4인방과 마오쩌둥에 대한 민심은 악화되고, 저우언라이의 인기가 올라가는 역효과로 이어졌다.
- 현대 한국에서는 시진핑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주석 집권 후 지배력을 강화하고 연임 제한을 폐지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헌법에 명시하는 바람에 시씨 성의 황제 또는 "진짜 시진핑 황제가 되었다."는 뜻. 이 표현은 연합뉴스에서도 쓰인 바 있다.[17]
- 정약용은 재물이나 땅 문서를 믿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할 때 진시황 이야기를 했다.
- 유능한 정복군주이면서 말년에 암군으로 타락했다는 점에서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와도 비슷한데 초반에 유능한 정복군주였다가 말년에 지나친 광신으로 피지배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하여 사후에 제국이 분열됐다는 점이 그러하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비슷한데 전국시대의 혼란으로 시달리던 자국을 통일한 점은 높이 평가받지만 이후에 엄청나게 타락하여 결국 자기 가문의 정권[20] 이 본인 사후 빨리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난세의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으로 평가받는 점이 유사하다.
8. 대중 문화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시황제/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같이보기[편집]
10. 둘러보기[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6-16 20:49:54에 나무위키 시황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음력으로는 1월이다. 당시 진나라에서 썼던 《전욱력》(顓頊曆)을 기준으로 이 달은 그레고리력 1월 27일부터 2월 24일까지 총 29일간이었다.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장양왕은) 시황을 진 소왕 48년 정월에 한단에서 낳았다. 生始皇以秦昭王四十八年正月, 生於邯鄲.[2] 《사기》의 원문은 "七月丙寅, 始皇崩於沙丘平臺."라 하여 음력 7월 병인일에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해 7월에는 병인일이 없었고 6월, 8월, 9월에 있었다. 9월 10일이라는 날짜는 병인일을 7월이 아닌 8월의 것으로 본 다음 그것을 양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중문 위키백과에서는 《홍범오행전》의 "六月乙丑"을 근거로 사망일을 7월 11일로 기록했다.[3] 음력 5월 26일 병오. 이 날에 장양왕이 죽었다.[4]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재위) 26년, (중략) 왕이 말하기를 "태 자는 떼고 황 자를 취하고, 상고의 제라는 이름을 가져다 '황제'라 부르고, 나머지는 논의와 같이 하라." 했다. 제를 내려 "좋다."라 명했다. 二十六年, … 王曰 "去泰, 著皇, 采上古帝位號, 號曰皇帝. 他如議." 制曰, "可."[5] 연, 조, 위, 제, 한, 초.[6] 물론 이후로도 전한 초기의 군국제나 서진의 팔왕, 청나라의 번왕 등 중앙집권제와 다른 체제가 돌아가기도 했지만, 어찌됐든 방향성 자체는 중앙집권제에 수렴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사실 이 중앙집권제도 결과적으론 진시황이 아닌 유방의 한나라가 다진거긴 하다만...[7] 《사기》도 <진시황 본기>만 번역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서 중국 최초의 평민 황제이자 사실상 중국의 정치 패러다임을 설립한 유방과 한나라가 오히려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다.[8] 다만 이 시대의 책들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시황제의 분서갱유보다 항우의 역할이 더 컸다는 말도 있다.[9] 진나라가 서융에서 시작된 나라인만큼, 화하족에 동화된 티베트계 견융족이라는 의견도 있다.[10] 이때가 장평대전 직후다.[11] 증조 할아버지 소양왕이 70세 넘게 장수한 걸로 보아, 중금속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그 유전을 받아 장수했을 가능성이 높다.[12] 출처 : 《사기》 <진시황 본기>.[13] 그러나 진나라가 멸망한 후 전한 시대에 시호를 부활시켰다. 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멸망 이후 쓰이지 않았던 묘호까지 부활시켰다. 황제라는 칭호는 이미 유용성이 입증됐다고 봐서 그대로 사용했다. 사실 진나라를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통일 제국에서 다시 전국시대로 회귀하려고 했던 복고주의자 항우도 초의제를 세우는 등 황제 칭호를 버리지는 않았다.[14] 중국의 전한과 후한 두 한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15]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당대의 황제인 한무제를 까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시황에 한무제를 덧씌운 정황이 있는 것도 이러한 표현의 원인이 된다. 실제로 《사기》의 진시황의 폭정 묘사는 한무제가 일으킨 대규모 토목 공사와 비슷하다.[16] 다만 후대인들이 영자영을 3세 황제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긴 하다.[17] 하지만 시황제의 시는 비로소 시(始, 중국식 발음은 권설음이 들어간 스<shǐ>)자인 반면 시진핑의 시(Xí)는 익힐 습(번체 習/간체 习)자의 중국 발음이다.[18] 당연하지만 이런 베트남 극우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중국 남부 지역은 현대 베트남인의 선조 격인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 민족만 살았던 게 아니라, 묘족이 속한 몽몐어족 계통 민족들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민족들, 그리고 태국인과 라오인, 좡족의 조상 민족인 크라다이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마구 뒤섞여서 살았다. 그래서 백번 양보해서 베트남 환빠들 말대로 중국 남부 전체가 베트남계 왕조의 치하에 있었다고 쳐도, 실상은 중앙집권화가 전혀 안 되어서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이 각자 다른 나라인양 따로국밥으로 노는 상황이었을 것이다.[19] 실제로 모토치카는 서장을 작성할 때 미나모토, 타이라 같이 자신의 성씨를 쓰는 곳에 하타(秦)라고 기입했다.(그러나 하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진시황의 후손이라는건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헤이안 시대 하타 요시토시(秦能俊)라는 인물이 그 선대가 하사받은 시나노의 땅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1156년 호겐의 난(保元の乱) 때 패배한 세력에 소속해있었기 때문에 토사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다른 학설로 "1221년의 죠큐의 난(承久の乱) 이후로 도망쳐왔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렇게 토사로 도망쳐온 요시토시는 토사에는 얼마 존재하지 않는 평야 지역이자 중심 지역이나 다름 없는 나가오카 군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의 성을 '소카베'(宗我部)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옆동네 카미 군(香美郡)에도 자신들의 성을 '소카베'라고 쓰는 일족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나가오카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쵸소카베(長宗我部), 카미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코소카베(香宗我部)라 부르게 되었다.[20] 진나라, 도요토미 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