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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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종교는 불교이다.
2. 생애[편집]
1939년 12월 5일 경상남도 사천군(現 사천시)에서 태어났다. 1956년 3월 대한조선공사에서 설립한 대한조선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해 1959년 졸업하였다.[2]
대한조선기술고등학교 졸업 후 1959년 6월 1일 대한조선공사에 조선 설계과 기능공으로 입사했다. 1963년 병역을 마치고 복직해 정밀기계 공구실에서 근무하던 중 절삭공구가 분실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절도죄의 누명을 쓰고 해고되었다. 1964년 9월 박정부 전국해원조합 조선공사지부 부지부장의 제안으로 상근 실무자인 상무(전문위원)으로 채용되었고, 노동법, 단체협상 등 각종 노조실무를 익혔다.
1965년 비정규직인 임시공 신분으로 대한조선공사에 복직되었다. 이때 여러 차별을 느꼈고,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 청년부장에 취임하면서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68년 11월 29일 국영기업이었던 대한조선공사가 민영화됨과 동시에 당시 극동해운 사장 남궁련에게 양도되었는데, 이때 임시공으로 일하던 근로자 1,175명 전원에게 해고예고통보를 했다. 이에 즉각 파업에 돌입했고, 파업 15일째부터는 집단 단식농성에 들어간 끝에 단식 3일 만에 '임시공 해고예고 철회와 처우개선'에 합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9년 대한조선공사 측에서는 '임시공 처우개선'이라는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았고, 그해 8월 1일 조합원 99%의 찬성으로 또 다시 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에서는 8월 19일 직장폐쇄를 단행해 노동위원회의 승인 없이 출입구를 봉쇄했다. 그럼에도 박인상 등 노동자들은 회사 정문 자물쇠를 부수고 공장 내로 들어가 파업을 지속했는데, 9월 18일 정부에서 사상 최초로 긴급조정권을 발동했다. 결국 조선공사지부 조합원들은 50일간의 파업을 풀었고, 이후 박인상 등을 비롯한 29명이 주거침입, 기물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1970년 3월 개정된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는 끝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1970년 가을 15명 규모의 선박엔진 수리를 전담하던 대평철공소에 입사했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전국금속노동조합 직할 영도철공분회의 사무장으로 노동운동에 다시 참여했다. 1976년에는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지역지부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이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부위원장,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 1996년 2월부터 2000년 2월까지 제16·17대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노사정위원회 공동의장 등을 지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제7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노동특별보좌역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그의 보좌관을 맡았던 사람이 전재수였다.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가 일어난 2003년, 차기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고 정계를 떠난다.
2022년 2월 2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지지 선언을 한 대한민국 헌정회원 중 316명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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