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균(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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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치과의사, 배우,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 1928년 11월 6일, 황해도에서 태어난 실향민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와서 서울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교회 성극에서 단역을 맡게 되면서 연극의 매력에 빠진 그는 중학생 때부터 배우의 길을 모색하지만 오디션에 떨어져 실패한다. 고등학생 때는 당시 최고의 배우이던 김승호를 찾아가,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김승호는 그에게 지금은 공부를 더하고 나중에 배우가 되어도 된다고 말하며 그를 돌려보냈다고. 신영균은 나중에 영화 마부에서 김승호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된다. 배우의 길이 좌절된 후 고등학생 때는 종로 YMCA를 다니면서 레슬링 선수를 했는데, 같은 도장에 다니는 친구의 아버지가 극단 청춘극장의 단장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고 인정을 받아 청춘극장의 배우가 된다. 고등학생이면서 청춘극장의 연극들에서 주연을 맡아 활약할 정도였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극단을 따라다니며 배우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극단이 트럭에 세트를 싣고 배우들과 배우 가족들까지 태우고 온갖 고생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그는 이런 삶을 2년 동안 하면서 '내가 이런 생활을 하다가는 가족들을 고생시키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로 진로를 변경한다. 1년 동안 독하게 공부한 그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지원해 합격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현재의 배우자를 만나고, 개인 병원을 개업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치과 치료를 받으러 온 연극배우 시절 동료들이 그에게 연기에 대한 열정을 다시 일으켰고 극구 반대하는 아내를 설득한 뒤 다시 연극무대에 섰다. 이어서 32살의 늦은 나이에 첫 영화[5] 에 출연해 지명도가 높아졌고 이어진 영화들이 대성공을 거두며 당대의 최고 영화배우가 되었다. 남성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 덕분에 주인공으로 감독들이나 제작자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아 다소 무리를 감수하면서도 다작을 하게 되었다고. 선이 굵은 미남형 얼굴에다 당대의 인기 배우로서는 드물게도 거의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연기자로 전향할 당시 부인에게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썼다는데, 서약서를 썼다고 다 그 내용대로 행동하지는 않으므로 원래 성품 자체가 강직한 성격인듯하다.
3. 연예계 생활[편집]
- 주로 60~70년대 영화에서 활동했던 배우다. 일본의 대배우 미후네 토시로를 모티브로 선이 굵은 남성적인 캐릭터를 내세웠기 때문에 사극이나 시대극, 혹은 가부장적인 남성 역할로 활동했는데,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이나 대원군 등의 역할로 유명했고,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공군을 소재로 한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그 외에도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 등으로 거의 300여 편에 달하는 영화에서 열연했던 다작 배우.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 3회 수상. 그러나 1978년 <화조>를 마지막으로 개인 사업과 정치 활동으로 인해 영화배우 은퇴 상태이다.
- 1950-1960년대 홍콩 최고의 여배우였던 임대(林黛, Linda Lin Dai, 1934년 12월 26일 ~ 1964년 7월 17일)[6] 가 1964년 갑작스레 자살했을 당시 신영균에게 고백한 사랑이 거절당하자 괴로워하다 죽음을 결심했다는 소문이 몇몇 미디어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무근이다. 임대와 신영균은 홍콩의 쇼 브라더스와 한국의 신필름의 합작 영화 달기에서 같이 연기했던 적이 있다. 다만 신영균은 촬영 중 린다이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4. 주요 출연작[편집]
5. 은퇴 이후[편집]
- 원로 영화배우 중 김지미와 더불어 배우 생활은 물론이고 개인 사업으로도 굉장히 성공한 인물이다. 1977년에는 명동의 랜드마크 격인 명보극장을 인수했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 하였다. 1991년에는 한국맥도날드의 한국 법인인 신맥을 설립하는 등 현금으로만 500억을 상회하는 개인 재산을 보유하고 있고[7][8][9] , 원로 배우 상당수가 그러했듯이 예총 회장을 거쳐 연예계 몫으로 신한국당, 한나라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두 차례 지내기도 했다. 다만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10]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통일민주당 박용만에 밀려 낙선하였다.
- 2010년, 당시 500억 원 상당의 가치를 가진 명보극장과 제주특별자치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해 모처럼 영화계의 좌우합작을 이끌었고, 서울대에 발전기금으로 100억 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이순재, 심양홍 등 서울대 연극동아리 출신 후배들과 함께 '하얀 중립국'이라는 연극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모처럼 배우로서 존재감을 보였다.
- 2011년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 그 후 특별한 근황이 없다가 2015년에도 영화배우 후배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한 사진이 올라왔다.
- 2019년 11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욕심이 없다. 그저 마지막으로 가지고 갈 것은 40~50년 된 내 성경책 하나다. 가족들에겐 나중에 관 속에 이 성경책과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 2020년 TV조선에서 진행한 2020 트롯 어워즈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트롯 100년 심사위원 특별상의 시상자로 나와서 시상을 진행하였다. 구순이 넘은 몸에도 여전히 정정하였다.
- 2019년부터 공군작전사령부 주관 공중사격대회 시상식에서는 영화 '빨간 마후라'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공군 조종사들에게 영공방위의 자부심을 심어준 신영균을 기념하여 '신영균 특별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22년에는 신영균 본인이 직접 시상에 참여했는데, 구순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지팡이나 휠체어의 도움 없이 조종사와 직접 기념촬영에 임하는 등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
- 2023년부터 보훈부에서 건립을 추진중인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의 부지 제공을 위해 자신의 한강변 고덕동 땅 4000평 규모를 내놓는다고 밝혔다. 해당 부지는 이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 시절에 낚시를 즐기던 곳이 속해있는 부지라고 한다. 다만 해당 부지는 이미 그린벨트로 지정됐다 보니 다른 후보지와 면밀히 검토해서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
6. 선거 이력[편집]
7. 소속 정당[편집]
8. 둘러보기[편집]
[1] #[2] 평산 신씨 32세손 ◯균(均), ◯규(圭), ◯로(老), ◯곤(坤) 항렬이다. 현재 살아있는 평산 신씨 사이에서 항렬이 굉장히 높은 편에 속한다.[3] 입학 당시 한성상업학교 제1본과(3년제), 제2본과(5년제)로 병치되어 있었으나 1945년 11월 30일에 인문계로 변경되어 6년제 한성중학교로 전환되었고 신영균은 한성중학교라는 명칭으로 졸업했다. [4] 평창동 예능교회 창립 멤버이기도 하며, 현재의 직분은 은퇴장로이다.[5] 그의 공식적인 첫 영화는 1960년작 '과부'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948년 영화 검사와 여선생에 출연했다고 한다.[6] 임대 라는 예명은 영어 이름 린다의 중문 음차이다.[7] 신맥은 현재 맥도날드 본사에 매각한 상태. 매각 대금의 상당수는 기부했다.[8] 신영균의 수백억대 재산은 한주홀딩스라는 기업을 형성했으며, 현재는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업은 제주방송을 소유하고있다. [9] 신영균은 배우 생활을 하며 모든 돈을 착실하게 굴려 연예계 최고의 재력가에 등극하였지만 현역 시절 신영균보다 많은 돈을 벌었던 신성일은 낭비를 해서 그저 그런 부자가 되었다. 당시 신성일, 신영균, 최무룡 같은 1급 배우 뿐 아니라 악역을 주로 맡던 허장강, 트위스트 김 같은 2진급 조연 배우도 현재 가치로 연간 수십억을 벌던 때이다.[10] 1995년에 성동구 일부가 광진구로 분구되었고, 이듬해인 1996년 제15대 총선에 광진구 갑, 을 선거구로 분구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11] 현 광진구[12]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3]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4]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