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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캄푸치아 정부 수상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폴 포트
ប៉ុល ពត | Pol Pot


파일:Pol_Pot.jpg

본명
살롯 사(សាឡុត ស, Saloth Sar)
출생
1925년 5월 19일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인도차이나 연방 캄보디아 깜뽕톰주
쁘렉스버우
사망
1998년 4월 15일 (향년 73세)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캄보디아 왕국 우다르미언쩨이주
안롱뱅
국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파일:프랑스 국기.svg
캄보디아 제1왕국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민주 캄푸치아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학력
프놈펜 기술고등학교
프랑스 무선공학학교
신체
175cm, B형
정당
캄푸치아 공산당
종교
불교무종교 (무신론)
배우자
키우 폰나리(ខៀវ ពណ្ណារី, Khieu Ponnary) → 메이사[1]
서명
파일:Pol_Pot_signature.svg}}}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공산주의 입문
2.3. 베트남에서의 반미 투쟁
2.4. 쿠데타를 통한 집권
2.5. 집권
2.5.2. 대외 관계
2.6. 몰락
2.7. 최후
3. 기타
3.1. 남은 추종자들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폴 포트는 캄보디아독재자, 학살자로,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비서이자 정부 수상을 지냈다. 본명은 '살롯 사(សាឡុត ស, Saloth Sâr)'.[2] '폴 포트'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어 'Politique Potentielle' 또는 영어 'Political potential(정치적 가능성)'에서 따 왔다는 설이 있다.

이른바 '킬링필드'의 주도자로, 피비린내 나는 세계 근현대사에서도 최악의 학살자로 손 꼽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더구나 폴 포트가 집권하는 3년 6개월 동안 캄보디아의 인구는 750만 명에서 672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평균 수명은 14.5세[3]까지 떨어지는 등 캄보디아 국가 전체를 황폐화시키고 박살낸 최악의 독재자이자 학살자였다.

물론 당시 미국의 폭격, 내전, 베트남의 침공, 전쟁으로 인한 기아 등으로 죽은 사람도 수없이 많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지만 크메르 루주와 폴 포트의 악행은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것으로도 모자라 교육, 문화, 경제, 외교 등 모든 사회,인재 인프라의 씨를 박살 내다 못해 뿌리까지 뽑아 버렸으며 캄보디아를 사실상 석기 시대 수준까지 후퇴시켰다. 결국 폴 포트의 만행은 남은 국민의 미래까지 영영 짓밟아버려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캄보디아를 빈곤국으로 만든 원흉이 되버렸기에 폴 포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반드시 꼽히는 인물이다.

폴 포트는 집권 초기의 2년 동안 외부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베일 속의 인물로 지내다가 1977년 9월 27일에 프놈펜의 올림픽경기장에서 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4], 폴 포트가 이렇게 외부로의 노출을 꺼린 것은 비밀의 유지가 혁명의 기본원칙이라고 강조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폴 포트'라는 가명은 1970년 7월부터 썼다고 하며, 그 외에도 폴 포트는 '뿍(Pouk)', '하이(Hay)', '폴(Pol)', '87', '형님', '99', '뻼(Pem)' 등 수없이 많은 가명을 만들어서 그때그때 바꿔가며 활동했고, 본인의 신상정보를 철저히 숨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짜 정보까지 만들어 흘리기도 했다. 실제로 폴 포트의 자기 은폐가 어찌나 철저했냐면, 캄보디아의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폴 포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마저 '폴 포트'의 출생일과 본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캄보디아 공산당 총비서 살로트 사르'와 '폴 포트'가 동일 인물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심지어 그의 형과 누나마저 폴 포트의 직위를 1978년에 지방자치단체의 대형 식당에 남동생의 초상화가 걸린 것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5]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훗날 폴 포트로 알려지는 사(ស)[6]는 1925년 5월 1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어촌 마을인 쁘렉스버우(ព្រែកស្បូវ, Prek Sbauv, 현 캄보디아 깜뽕톰주에 위치)에서 9명의 자녀(아들 7명+딸 2명) 중 8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7] 살롯(សាឡុត)이라는 성은 나중에 붙은 것으로 어린 시절에는 성이 없었다. 아버지 역시 살롯 뻰으로 알려졌는데 이 이름은 훗날 프랑스가 식민정책으로 모든 크메르인들에게 성을 붙이면서 개명한 이름이다. 어머니의 개명 후 이름은 넴 속이다. 폴 포트의 가족은 중국계 혈통이 일부 혼재되었으나, 이들은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완전한 크메르인처럼 자랐다.

당시 살롯 사의 집안은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부농이었고[8] 여기에 사촌누나 메악이 시소와트 모니봉(ស៊ីសុវត្ថិ មុនីវង្ស) 왕자[9]의 첩으로 들어갔다. 모니봉이 1927년 왕위에 오르자 메악은 사실상 왕비가 되었고, 1930년에는 이복누나 로응이 모니봉의 다른 후궁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살롯 사의 가문은 잘 사는 집안을 떠나 왕족와 연결된 지배 계층 집안이었고 이 덕분에 살롯 사는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10]을 보냈다. 훗날 이 인간이 한 행보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배경이다.

어찌되었든 아버지 살롯 뻰은 살롯 사에게 서양식 고등교육을 시키기로 마음먹고 맏형 수옹과 같이 프놈펜으로 보낸 뒤 캄보디아 전통대로 여섯 살 때 왕실 불교사찰인 왓보뚬(វត្តបទុម)에 들어가 사미(沙彌, 동자승)로 교육받은 뒤 1935년 9월 가톨릭계 학교인 미셰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은 형편없었어서 원래 6년과정인 미셰학교를 유급해 43년에야 졸업했다. 살롯 사는 당시 캄보디아의 유일한 중등 교육기관인 시소와트 고등학교에 입학하려 했지만 낙방하였고, 운좋게도 막 신설된 깜뽕짬 근처의 프레아 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에도 성적은 제법 나아졌지만 바이올린과 축구, 농구를 좀 잘한다는 것 말고는 크게 특출나지 않았다. 당시 살롯 사는 예의 바르고 유머 감각이 있고 잘 웃는 데다가 '병아리 한 마리 해치지 못하는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고 한다.

그렇게 1947년 살롯 사는 중학교 생활을 마친뒤 예전에 떨어졌던 시소와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살롯 사의 중학교 시절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정말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한다. 정말 아이러니한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 가운데 론 논이 있었는데 훗날 폴 포트 때문에 축출당하는 캄보디아 대통령 론 놀의 친형이다. 어찌되었든 살롯 사는 운좋게 입학은 했지만 48년 진학시험에는 떨어졌고 공업학교인 프놈펜 기술학교에 목공반으로 편입했다. 근데 이때도 재수가 터졌는지 당시 이 프놈펜 기술학교에서는 성적우수자 3명을 프랑스 대학에 국비유학생으로 보내주었는데 살롯 사가 편입한 그해에 갑자기 5명으로 대상이 늘었고 살롯 사는 과거 학교에서 쌓아둔 지식 등을 통해 49년 여름에 국비장학생에 선정돼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1949년 10월 사는 프랑스 파리의 프랑스무선공학학교(École Française de Radioélectricité, 지금의 EFREI)에 국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때 먼 친적이자 친분이 있던 시소와트 소모노퐁(ស៊ីសុវត្ថិ សុម៉ោនពង្)이 먼저 입학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살롯 사의 매형이자 전대왕인 모니봉 왕의 조카로의 후궁인 누나덕에 친분이 있었다. 소모노퐁의 도움으로 폴 포트는 파리의 부촌인 아미요 가에서 지방장관의 아들들과 같이 하숙했다. 이후 소모노퐁의 권유로 크메르학생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고 이과정에서 이엥 사리, 손 산, 키우 삼판 같은 훗날 크메르 루주 지도부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11월 켕반삭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다. 그리고 51년 중순쯤 공산당 세포조직인 마르크스클럽을 거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파리 시절 친구들 가운데 폴 포트와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훗날 크메르 루주에 의해 처형되는 서구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차이는 필명에서부터 나타났는데, 다른 동료들이 ‘자유 크메르’나 ‘크메르 노동자’ 같은 이름을 선호한 데 반해, 폴 포트는 ‘순수 캄보디아’ 같은 필명을 고집했다.

살롯 사는 세 차례나 낙제한 끝에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군의 탄압에 맞서 캄보디아 독립 운동이 시작되던 상태였는데, 이에 살롯 사는 형제인 살롯 차이(សាឡុត ឆ័យ, Saloth Chhay)를 따라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폴 포트로 알려지게 된다. 30대 초반에 폴 포트는 사립 학교에서 역사, 지리, 프랑스어 문학,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했는데, 교사로서의 폴 포트는 훌륭한 교사였다고 한다.

1956년에는 바칼로레아를 통과한 최초의 캄보디아 여성이었던 키우 폰나리(Khieu Ponnary, 1920~2003)와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2.2. 공산주의 입문[편집]


도시는 개조될 수 없지만 인간은 개조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 봐야 농사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 (People can be reformed, but not cities. By sweating to clear the land, sowing and harvesting crops, men will learn the real value of things.)[11]

필립 쇼트, 폴 포트 평전 pp.517

공산주의, 반외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베트남의 반불 저항 운동에 동참하며 여러가지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절 친구, 동료로서 이후 크메르 루주와 거리를 둔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잔혹한 성격이라든지 음흉한 면은 없었다고 하며 과묵하고 예의 바르며 수더분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이 시절은 조국을 생각하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구하자는 순수한 면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과의 충돌과 갈등으로 베트남과 손잡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한때 교사로 착실하게 지내던 적도 있지만 서서히 반왕정 활동을 하면서 시아누크 비밀경찰에게도 수배 대상이 되어 밀림으로 잠적했는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소수 원주민들과 친해지면서 이를 계기로 공동체 의식, 나아가 독자적인 공산주의 정신인 나라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2.3. 베트남에서의 반미 투쟁[편집]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 와중에 소수 원주민들이 주역이 된 공산당 분파인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 또는 크마에 끄라함·ខ្មែរក្រហម, 의미는 '붉은 크메르') 창설에 기여했다. 나아가 북베트남중국의 지원 아래 무력 저항으로 캄보디아 왕정에 맞섰다.

이 무렵 크메르 루주는 미미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으나 론 놀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에 맞서고자 여러 세력을 끌어들이려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 덕에 상당수 무기 지원 및 수를 급격히 늘어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베트콩을 지원하는 물자 운송로인 호치민 루트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났기 때문에 미군이 캄보디아에 마구잡이 폭격을 하면서 국경에서 많은 사망자를 내자 국경에 살던 많은 소수 원주민들이 분노하여 크메르 루주에 들어오면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2.4. 쿠데타를 통한 집권[편집]


우리는 어떤 외부 세력과도 연계되지 않은 깨끗한 승리를 거두었다. 민주 캄푸치아는 앞으로 고립을 택할 것이다.

1975년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킨 후 승리연설에서 한 연설


이렇게 론 놀이 무능함만 보여주고[12] 특히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크메르 루주가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시아누크도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며 더욱 입지가 커졌다. 당시 사람들은 "론 놀이 얘기하면 부하들은 졸기 시작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무능했던 데다가 반공주의를 내세워 미군이 일으키는 학살을 방조하고 군부에서도 학살사건을 일으키며 민심이반을 더욱 부채질했다. 결국 1975년 4월 17일에 폴 포트가 론 놀 군부를 뒤엎으면서 크메르 루주 정권을 설립했다. 이른바 민주 캄푸치아의 탄생이었다. 론 놀은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론 놀의 수하들과 가족들을 잡아다 학살한 뒤 그냥 내다버리고,[13] 공산당을 장악하고 공무원 및 군부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다음 반외세 및 반자본주의를 기조로 소련이나 중공과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표명했으며 전 국민 머릿속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없애 공산주의로 무장된 투사로 기르려고 했다.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할 당시 깊은 산골의 농민 출신의 12~13세 소년들이 대부분이던 크메르 루주의 병사들은 ‘한 번도 돈을 본 적도 없었고, 자동차도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것 같았으며’, 돈에도 관심이 전혀 없어 미화 1만 달러가 든 보따리를 열어보고는 강물에 던져버렸으며, 생선 통조림통의 생선 사진을 보고 생선을 죽이는 독약으로 착각하는 순진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워낙 무표정하고 조용한 나머지 프놈펜에 있던 기자 디트 프란은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하자, 프놈펜에는 행복의 기운이 감돌아 젊은이들은 서로 얼싸안고 입을 맞췄으며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들은 크메르 루주의 프놈펜 점령이 '공포에 떨게 했던 로켓포 공격', 징병, '부패하고 지긋지긋한 이 정권'이 이제 끝났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프놈펜에 있는 모두에게 이전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최악의 비극이 닥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2.5. 집권[편집]


파일:1200px-Nicolae_Ceaușescu_with_Pol_Pot.jpg
1978년 5월 28~30일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폴 포트[14]

우리는 그동안의 투쟁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모든 것을 단절하고 전통은 사라질 것이다. 화폐와 경제체제가 사라져 국가가 국민들의 모든 것을 돌보는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캄보디아 건설을 위해 수도에 있던 3백만의 국민을 농촌으로 분산시켰다. 이제 농촌은 혁명의 전초 기지가 될 것이며 국민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될 여러 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1974년의 폴 포트 (출처 : Grant Evans & Kelvin Rowley 共著, `Red Brotherhood at War`)


역사상 이전에 없었던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한 모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국이나 베트남 모델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이엥 사리 민주 캄푸치아 부총리.


이제 우리는 공산주의를 실현할 백 퍼센트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중국을 앞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크메르 루주의 한 고위 간부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모든 인민은 농경 산업에 집중해야만 하며 나아가 위험이 되는 모든 요소, 대중 문화 및 퇴폐하고 위험한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은 필요 없다'라는 농업 중심의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정립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특히 공산주의 혁명의 선두자이자 폴 포트 본인의 롤모델인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다 못해 더 극단적인 방법으로 시행했다.[15] 폴 포트는 국가를 유토피아로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수백만 명을 죽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먼저 폴 포트는 인민들의 생활을 너무 안락하게 하거나 반동분자들을 더 강력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혁명은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자본주의의 산물인 도시로 보아 수도 프놈펜을 포함한 도시에 거주한 사람들[16]을 강제로 집단 농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강제로 이주당한 '새 사람'은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했다고 한다.

'누군가 좋은 것을 가지면 평등하지 않다'며 개인의 사유 재산과 시장 경제는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났고 이전에 있던 화폐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탄으로 폭파되고, 총 62개의 은행이 습격된 후 모든 화폐와 장부는 불태워졌으며, 상점 운영도 금지되어 모든 물건은 물물교환과 배급으로 얻는 원시적인 경제구조로 돌아간 데다가 외국과의 무역[17]은 전부 소멸되었고, 국가의 모든 영토는 국가와 집단 농장이 소유하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의 관점에서 볼 때 캄보디아는 '이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의 경제적 지배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한 술 더떠 크메르 루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물물교환조차 금지시켰고, 캄보디아 국민들이 가질 수 있던 '사유 재산'은 겨우 숟가락과 그릇 하나가 전부였다. 이렇게 캄보디아의 모든 국민들은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 빼고는[18] 완전히 평등하게 가난해졌고, 덕분에(?) 이 당시 캄보디아의 지니 계수는 약 0.15라는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수치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크메르 루주는 '이제까지의 2천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앙코르 제국보다 더 멋진 미래를 설계한다'는 명분으로 2천년 역사 동안 캄보디아에 전해진 모든 것들을 부인하며 1975년 4월을 모든 것이 무에서 시작된 0년으로 삼게 되었는데,[19] '0년' 이전 사회에 대한 기록된 기억이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책들을 대량으로 불사르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크메르 루주는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국민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일상에서 쓰는 단어를 바꾸었는데, 실제로 크메르 루주는 크메르어에 있던 화자의 계급과 사회적 지위를 정의하는 복잡한 체계를 모두 금지하고 사람들끼리는 단순히 '친구' 또는 '동지'를 의미하는 '밋(mitt)'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권장했으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단수형 '나'가 아닌 복수형 '우리'로 말하는 것이 권장되었으며,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도 각각 '포'/'메'로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거 어린이들은 자신의 친부를 '숙부/숙모'로 부르고 다른 사람을 '엄마/아빠'로 불러야 했다. 심지어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성별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폴 포트는 학교가 자본주의를 가르친다고 보아 전국에 있는 학교들을 모두 강제로 폐쇄시킨 것은 물론, 그나마 교육을 시킨다 해도 문학과 과학 등 '서구 문물'을 가르치는 것은 엄금되어 기본적인 문해력과 수학, '혁명적 가치'를 교육하는 것만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혁명적 가치' 교육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없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캄보디아의 악명 높은 뚜올 슬렝 교도소에서는 7 이상을 세는 방법조차 모르던 교도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캄보디아는 외국의 도움 하나 없이 자립해야 한다'는 이유로 캄보디아의 국경은 육상과 해상 관계없이 모두 봉쇄되었으며, 이동수단 보유도 금지되었고,[20] 국영 항공사였던 에어 캄보디아(Air Cambodge)도 완전히 폐쇄되었고 정기 국제항공편도 완전히 없어졌으며, 심지어 외국 대사관도 모두 폐쇄되고 대사관 직원들도 모두 쫓겨나면서 캄보디아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폴 포트 전기를 쓴 필립 쇼트(Philip Short, 1945~)의 말처럼 캄보디아에는 '현대 최초의 노예제국가'가 열린 것이었다.

그리고 폴 포트는 1976년 5월 13일에 민주 캄푸치아의 정부수상에 정식으로 오르게 되었는데,[21] 이런 일들의 결과는 알다시피 단순히 제 2의 대약진 운동의 재림 정도를 넘어선 세계사 최악의 비극 중 하나였다.

여담이지만, 크메르 루주 고위 수뇌부는 가족들을 전문성이 전혀 없는 요직에 앉히기까지 했는데, 대표적으로 국방장관 손 센[22]의 부인인 윤 얏(Yun Yat, 1934~1997)은 교육부 장관과 정보부 장관을 역임했고, 폴 포트의 아내 키우 폰나리의 여동생이자 부총리 이엥 사리의 부인이었던 이엥 티릿은 사회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이엥 사리의 딸 중 하나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병원의 원장이 된 데다가, 이엥 사리의 조카는 영어를 거의 못했음에도 라디오 프놈펜의 영어 번역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주 캄푸치아 치하에는 폴 포트의 조카들 중 일부도 외무부에서 일했다고 한다.[23]


2.5.1. 킬링필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킬링필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숙부, 저는 숙부의 순수했던 교사 시절이 그리워요.

폴 포트의 조카가 킬링필드에 경악한 뒤에 쓴 글.


이렇게 크메르 루주 정권이 괴상한 정책을 시행하여 론 놀 정권의 폐단을 청산하고 나라를 정상으로 되돌릴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자 민심이 이반하여 시위와 반발이 이어졌고, 결국 폴 포트는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취지의, 문자 그대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정책을 펼치게 되었고, 그 결과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최소 13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엄청난 사람들이 사망했다.

자세한 것은 킬링필드 항목 참조.

참고로 폴 포트는 킬링필드의 참극 속에서도 '캄보디아 혁명'이 '세계 혁명의 본보기'이며 '민주 캄푸치아는 혼란스러운 세계 한가운데 떠 있는 순결의 섬이자, 인류의 귀중한 본보기'라고 했으며, 당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학술자료에 따르면 나 우리는 세계 다른 국가에서 한 번도 시행한 적 없는 정책[24]을 실시하고 있으며, 그 덕분에 인류가 수백 년 동안 씨름해온 도시와 지방 간의 모순이 성공적으로 해소되고 있다는 말을 넘어 무려 전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고 칭찬하면서 우리를 따라 배우고 있다라고까지 적혀 있었다. 물론 이 발언들은 킬링필드의 참상들을 보면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망언 중의 망언에 불과하다. 거기다라 '라디오 프놈펜'은 '민주 캄푸치아가 제국주의를 무너뜨린다면 미국인을 비롯한 온 인류가 승리를 맛볼 것이다'며 허황된 자만심을 표출했다.


2.5.2. 대외 관계[편집]


집권 직후인 1975년 5월 12~15일에는 영해에서 미국 상선 마야궤호를 나포하면서 이에 미국이 구출 작전을 벌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이를 마치 미국을 이겼다는 투로 홍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 내 베트남 사람들까지 대거 학살 및 숙청하였고, 베트남을 선제 공격하도록 지시하여 베트남 마을 두 개를 박살내고 수많은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때 먼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베트남에 대한 역사적 반목과 폴 포트의 깊은 불신으로 인한 피해망상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또한 원래 역사적으로도 캄보디아인들은 베트남을 증오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악연이 깊은데 호찌민이 위치한 메콩강 일대 영토가 원래 캄보디아의 영토였는데 이를 참파를 병합한 베트남이 집어 삼켰으며, 베트남이 캄보디아의 내정에 간섭한것은 물론이고 캄보디아의 국체 전체를 집어삼킬뻔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태국도 강성했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이러한 이유로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실제로 폴 포트는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들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25], 1978년 8월에는 베트남을 침공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숫자상으로 우리는 1인당 베트남인 30명을 죽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베트남인 30명이 죽을 때 우리는 한 명만 죽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 계산이면 베트남인 6천만을 죽이려면 우리는 군인 2백만만 있으면 됩니다. 사실 이 정도여도 우리는 충분합니다. 베트남의 인구는 사실 5천만 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인 5천만 명을 궤멸하기 위해 우리는 군인 2백만 명만 있으면 되니까 우리에게는 6백만 명의 인구가 남습니다. 이렇게 투쟁방침을 공식화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는 1대 30이라는 목표를 무조건 채워야 합니다.


게다가 킬링필드 때문에 묻혔지만 론 놀 정권도 베트남 양민에 대한 학살을 자주 실행했다. 그럼에도 1979년 크메르 루주 정권이 붕괴되고,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당시 베트남군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캄푸치아 구국통일민족전선 등 캄보디아의 반 크메르루주 세력들에 의해 성립된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친베트남 정권이, 쫓겨난 크메르 루주 세력들의 반란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내내 캄보디아 국내에서 상당한 지지 세력을 유지했다는 것은, 민족 간 반목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얼마나 크메르 루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폴 포트는 계속 베트남을 자극하던 것도 모자라 무력으로 베트남을 선제공격했고, 이에 분노한 베트남은 베트남군과 크메르 루주의 극좌 노선에 반대하던 반 크메르루주 계열의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캄푸치아 구국통일민족전선 등과 연합하여 캄보디아를 침공하였다.


2.6. 몰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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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 17일, 캄보디아 정글에서 ABC 뉴스 팀과 인터뷰하는 폴 포트

1979년 1월 7일에 베트남군은 수도 프놈펜을 함락하면서 민주 캄푸치아 정권을 붕괴시켰고, 베트남군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반크메르 루주 공산 세력들의 주도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세워진다. 이때 정권을 잃고 쫓겨난 폴 포트와 키우 썸펀 등 크메르 루주 세력들은 밀림으로 들어가 캄보디아에 주둔한 베트남군과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부군에 맞서 저항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한동안 폴 포트의 사망설까지 돌 정도였다.

이때 미국은 베트남을 막고자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이 때는 소련 견제와 헨리 키신저를 위시로 한 외교 정책에 의해 중국과 더 가까웠고 따라서 친중 포지션인 캄보디아를 밀어준 것. 미국의 이같은 개입은 지금까지도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이때의 지원으로 인해서인지 크메르 루주 민병이 M16 소총을 든 사진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조차 이를 비난할 자격도 없는 게, 이들 스스로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베트남의 불법 괴뢰정부라 보며 크메르 루주를 합법정권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한편 폴 포트는 권력에서 쫓겨난 후 얼마 안 있어 본인의 집권 무렵부터 정신분열증편집증에 시달려온 전처 키우 폰나리와 이혼하고는[26] 1985년 여름에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며 자기보다 37세나 어린 23세의 탄약 운반자 메아 손(Mea son, 1962~)와 재혼하고 다음해 봄에 메아 시타(Mea Shita, 1986~)라는 이름의 딸을 가졌는데, 폴 포트는 61세라는 비교적 고령에 자신이 처음으로 가진 자녀였던 시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27]

한편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의 민주 캄푸치아 정권은 캄보디아의 주도권을 잃었고 이후 캄보디아에서는 붕괴된 크메르 루주의 민주 캄푸치아를 대신해 친베트남 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성립된다. 한편 정글로 도망친 폴 포트는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 총지도자에서 물러났으나 실세로서 계속 막후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결국 부하들과 충돌했다. 1989년에 베트남군의 철수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자 시아누크의 민족통일전선(FUNCINPEC), 손 산의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F)과 함께 새 정부 구성을 논의코자 했다. 그러나 폴 포트는 옛날부터 함께 해 온 동료들보다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따 목[28] 총참모장을 의지했고 이후 1990년대에는 따 목이 폴 포트를 대신해서 간부들을 회의에 소집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베트남이 폴 포트 정권의 킬링필드 실상을 전 세계에 보도하면서 폴 포트와 그 세력에 대한 비난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들을 지원해준 미국과 중국도 같이 비난을 받으면서 점차 손을 떼기 시작한다. 결국 국제적인 여론과 UN의 개입으로 1993년에 시아누크 국왕을 군주로 한 캄보디아 왕국이 설립되었고 이에 굴복한 폴 포트와 그 측근들이 여전히 내전을 벌였기에 폴 포트 정권에 대한 비난은 더 커져 갔다.[29]

이런 장기전 아래 폴 포트파의 내분은 더욱 심해졌고, 1995년 부하들의 배신으로 폴 포트는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중국 원조를 착복한 배신자로 규탄 받은 이엥 사리는 1996년 숙청에 겁을 먹어서 병사 4천 명을 이끌고 투항했는데, 폴 포트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2.7. 최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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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폴 포트

그러던 중 1997년 6월 10일 밤에 폴 포트의 최측근이자 민주 캄푸치아의 국방부장인 손 센 일가가 참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손 센은 휴대전화로 캄보디아 정부의 훈 센과 은밀히 교섭을 했는데, 폴 포트가 이 사실을 알고 배신자라 하여 부하들에게 손 센 일가를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같은 날에 손 센과 다른 가족들 13명(미성년자 9명 포함. 이들 중에는 젖먹이 손자도 있었다고 한다.)을 모두 총살했다. 손 센은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으며, 이 날 총살된 시신들은 픽업 트럭으로 깔아뭉개졌다.

따 목은 폴 포트가 그의 오른팔이었던 손 센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1997년 7월 25일 돌연 손 센 일가 살해죄로 폴 포트를 구속해 인민 재판에 회부하여 종신형을 선고했고, 폴 포트는 모든 힘을 잃고 가택연금을 당했다. 재판 과정에서 폴 포트는 참으로 비굴하게도 부하들의 질책에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포트는 산 중턱에 있는 조잡한 헛간에 연금되었는데, 폴 포트의 후처와 경호원, 키우 썸펀의 아내가 폴 포트의 시중을 들었지만, 폴 포트는 이미 뇌졸중으로 왼쪽 몸이 마비되고, 심각한 심장병과 고혈압을 앓는 데다 암에 걸린 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기 반년 전인 1997년 10월에 한 인터뷰에서조차 그는 "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라,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는가. 내 양심은 깨끗하다.", ""75~78년의 통치기간 중 우리의 운동이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이는 베트남 침공으로부터 캄보디아와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었으며 나는 투쟁을 수행한 것이다."라며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죄를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했다. 게다가 폴 포트는 그밖에 정적에 대한 학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주장했고, '오랜 적인 베트남의 지배에서 캄보디아를 구했다'는 말도 남겼다. 그리고 폴 포트에게 악명 높았던 '뚜올 슬렝'을 물어 보자 그 고문소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아사 등을 포함한 대량학살은 모두 베트남과 친베트남 정부 측이 주도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또 폴 포트의 축출을 야기했던 손 센 가족 살해 사건에 대해 폴 포트는 자신이 처형을 명령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손 센과 그 가족만의 처단을 명령했을 뿐 어린애들까지 죽이라고 하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자료

그러던 중 1998년 4월 빌 클린턴 행정부가 폴 포트를 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할 방침을 밝혔고, 캄보디아 정부군의 공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간부 중에는 폴 포트를 미국에 인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폴 포트는 머리를 검게 염색한 상태였는데, 크메르 루주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는 중이었던 탓에 태국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던 때문이라고도 하나, 따 목이 폴 포트를 태국 난민캠프를 경유해서 미국에 넘길 요량으로 위장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폴 포트는 대단히 쇠약해져 있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폴 포트는 1998년 4월 16일에 구금장소로 이동할 것이 예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예정 날짜로부터 하루 전인 1998년 4월 15일에 폴 포트는 잠을 자는 중에 심장마비로 급사해버렸다.[30] 그러나 당시 정황이 석연치가 않아 온갖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전부 폴 포트에게 떠넘기려던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31]

많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폴 포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옛 지도자와 연루될까 두려워 모른체 했는데, 옛 부하들은 외딴 시골에 폴 포트의 시체를 들고 가 폴 포트의 가족들과 옛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찌어가 보는 앞에서 폴 포트의 장례식을 불교풍으로 치렀다. 이때 폴 포트의 부하들도 폴 포트를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게 되었는지 이들은 옛 상관의 시신을 폐타이어, 쓰레기와 함께 화장해버렸다. 이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장례식이 놀랄 정도로 불결했다며 놀랐는데, 실제로 폴 포트를 가택연금시킨 따 목은 캄보디아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폴은 이제 끝났다. 권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소의 배설물에 불과하다. 아니, 폴은 소의 배설물만도 못하다. 적어도 소의 배설물은 거름으로는 쓸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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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트의 장례식
2007년 7월 3일에 촬영된 폴 포트의 묘지[32]
장례식에 참여한 폴 포트의 후처와 딸은 폴 포트에 대해 '세상이 뭐라고 말하든, 우리에게 있어서 그는 상냥한 남편이며, 아버지였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폴 포트의 묘지는 매장 한참 후에야 세워지게 되었고, 원래는 건물도 세워져 있었다지만 누군가가 파괴했다고 전해진다.

폴 포트의 사망 이후 키우 삼판 등을 비롯한 크메루 루주들은 내전에서 패배하고 1998년 12월 누온 찌어와 키우 삼판은 투항했으며, 1999년 3월 따 목 총참모장이 생포되면서 결국 모든 크메르 루주의 지도부 세력들은 체포되어 현재도 재판을 받고 있다. 2022년 현재 당시 크메르 루주 고위층은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 한 명만이 생존중이다.

한편, 폴 포트의 미망인은 1998년 10월에 폴 포트의 비서였던 텝 쿤날(Tep Khunnal)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간 후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폴 포트의 딸은 사 파차타(Sar Patchata)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딴 후 2014년에 시 비체카(Sy Vicheka)라는 캄보디아인 남성과 결혼한 후 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파차타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위해 자주 기도하고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에 아버지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33]

3. 기타[편집]


  • 크메르 루주 정권 내 서열 2위였던 누온 찌어 전 인민대표회의 상설회의 의장, 공산당 부서기[34]의 부인 킴 세인은 당시 폴 포트와 그의 측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손 센 국방부장 부인 등과 함께 건물 1층에 살고 남편(누온 찌어), 폴 포트, 이엥 사리, 키우 삼판이 3층에 살고 있었다. 근무 장소이기도 하고 숙박 장소이기도 했다. 폴 포트는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잠자는 곳을 때때로 바꾸고는 했다.

내가 맡은 일은 이들에게 하루 세 번의 식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밥 이외에 반찬은 두 종류뿐이고 간부 식사도 결코 사치하지 않도록 정해져 있었다. 남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식사를 나를 때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최고 간부 집단 식사뿐 아니라 외국에서 손님이 와 요리사가 요리할 때 입회하는 일도 했다. 요리사가 독을 넣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들을 노린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출처


  •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폴 포트는 겉보기에는 말투가 부드럽고 침착했으며, 말할 때에 다른 사람을 꾸짖는 일이 없었고, 잘 웃으며 따뜻하고 친절하며, 기품이 넘치는 '아주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폴 포트가 교사 시절이었을 적에 제자였던 사람은 심지어 폴 포트가 '정의와 정직을 사랑하고 부패를 미워하게끔 설명할 수 있는 분 같았습니다.'라고 술회했다.

  • 말년에 폴 포트가 외국 기자와 한 인터뷰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주로 기존에 알려져 있던 사실들을 폴 포트가 직접 반박하는 내용으로, 크메르 루주의 리더가 된 과정이나 비밀주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크메르 루주가 벌인 학살에 대해서는 실수로 칭하는 등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나, 모든 것이 베트남에 의한 캄보디아 복속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하며 베트남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공산주의자였으면서도 베트남을 물리치기 위해 자유진영 국가인 태국과도 손잡으려 했던 사실이나, 서방의 지원을 은밀히 받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좌익 계열에서도 좋은 취급을 못 받는데,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서방,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는다. 실제로 폴 포트는 미국과 손을 잡는 기회주의적 모습과 호화로운 생활, 덩샤오핑의 수정주의를 옹호했던 등의 이유로 아비마엘 구스만을 추종하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비판의 대상 중 하나가 되고 있다.#

  • 국민들에게는 맹물에 가까운 멀건 쌀죽만 먹게 한 주제에 정작 폴 포트 본인은 당시로서는 호화로운 음식이었던 사슴 및 멧돼지 고기, 신선한 과일, 브랜디, 중국산 술을 좋아했으며, 특히 코브라로 만든 수프를 굉장히 좋아해 뱀의 피를 컵에 담은 것과 같이 먹었다고 한다. 게다가 폴 포트를 위시한 크메르 루주 지도부는 너무 잘 먹은 나머지 오히려 집권 이전보다 살이 더 쪘다고 한다.[35]

  • 5살 때부터 9살 때까지 크메르 루주 치하를 겪으며 10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14살밖에 안 된 큰언니, 5살밖에 안 된 여동생을 잃은 과거를 겪은 캄보디아계 미국인 여성 인권 운동가 로웅 웅(Loung Ung, 1970~)은 2000년에 그 과거를 'First They Killed My Father'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출판된 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17년에는 안젤리나 졸리가 감독하여 넷플릭스에 배급한 단막극으로도 만들어졌으며, 한국에서는 '킬링필드, 어느 캄보디아 딸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2019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특히 이 책 속의 몇몇 장면들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 중 하나의 현장을 10살도 안 된 지극히 어린 나이에 가족을 4명이나 잃은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장면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참혹하게 다가온다.

  • 프랑스에는 지금도 폴 포트의 동생 및 친척들이 일부 살고 있다. 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부터 프랑스로 망명갔다고 하는데 친척이고 형제들이라도 자신의 주장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폴 포트의 모습을 보고는 기겁하고 프랑스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폴 포트가 죽을 당시 해외 언론들이 이들을 찾아가 인터뷰도 했었다. 다들 착잡한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 폴 포트의 동생은 형도 순수하던 시절이 있었다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보다 13년 먼저 태어난 형이었던 살롯 셍 역시 똑같은 말을 했다. 참고로 살롯 셍은 맨 위의 숙부의 만행에 경악하여 글을 남긴 조카의 아버지로, 왜 이 형이 오랫동안 알지를 못했냐면 폴 포트의 동생이 도저히 알려줄 수가 없었다고 했다. 형이 충격을 받을까봐. 그러나 끝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은 폴 포트의 형은 결국 무시무시한 만행을 저지른 동생을 원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 미국의 밀덕판 VS놀이라 할수 있는 프로그램 Deadliest Warrior에선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와 사담 후세인특수 공화국 수비대가 가상으로 맞붙는 에피소드가 나온 바 있다. 기습공격으로 5:5에서 2:1로 후세인을 몰아 붙이는 데 성공했지만 후세인의 훼이크에 낚여 사살당하며 패배한다. 링크

  • 기독교등 종교 진영에서 무신론 측의 비판에 대해, 종교인만이 사악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한 반론으로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무신론자 진영에서는, 이들 학살자의 교조화된 이데올로기가 결국 종교 교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박하긴 한다. 그럼 결국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도 그 자리를 대체할 세속 이념에 의해 '종교화'될 수 있으며, 특히 무신론에 입각해 종교인들을 탄압하고 살해한 사례는 무신론과 반종교주의 그 자체도 교조화되어 폭력의 명분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근데 이데올로기 자체가 종교라고 따지면 결국엔 무신론적 성격을 가진 유물론도 결국엔 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고, 결국엔 순환 논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 영국의 테너 가수 폴 포츠와 이름이 비슷해 외국에서도 간간히 조크로 엮이곤 한다.[36] 실제로 폴 포츠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한 영화 <원챈스>에도 폴 포트가 언급되었다. 당연히 폴 포츠 역시 폴 포트를 매우 증오한다.[37]

  • 미국의 하드코어 펑크 밴드 데드 케네디스의 노래 Holiday In Cambodia에 '폴 포트'를 반복해서 외치는 부분이 있다. 이 노래 자체가 허세부리는 미국 대학생이나 특권 의식을 뽐내는 여피족들을, 폴 포트 정권 하의 캄보디아에서 휴일을 보내게 해주겠다고 비판하는 노래이다.

  • 차지철은 폴 포트 정권의 킬링필드를 보고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도 죽였는데 100만 200만 탱크로 밀어버린다고 문제가 되겠냐는 망언을 하였다 한다.

  • 유튜브에 Sat Tee Touy (Look At The Owl)라고 검색하면 폴 포트를 찍은 영상이 나오며 이 노래가 나온다 예시 또한 킬링필드의 모습과 비슷한 사진에 크메르 쿠즈 군인의 군복을 합성한 영상도 있으며[38] 킬링필드와 전혀 관련이 없는 Among Us 의 캐릭터에다가 군복을 합성한영상 도 있다.

3.1. 남은 추종자들[편집]


캄보디아 내 소수민족들은 폴 포트를 추앙하는 이들이 꽤 있다. 캄보디아 안에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크메르 루주 시절 정치적 발언권이나 경제적 혜택을 주었기에 자발적으로 크메르 루주가 된 사례도 많았다. 그리고 축출되고도 크메르 루주가 밀림 속에서 10여 년에 이르는 내전을 벌였던 것도 이들의 지원과 지지가 컸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폴 포트가 죽어서 화장될 때 원주민들 중에서는 되려 슬피 울던 이들도 꽤 되었고 지금도 신성시하여 제사까지 지낸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캄보디아 소수민족들이 폴 포트를 추앙하는 건 시골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만 그렇고 소수민족이라도 도시에 거주하거나 태어났다면 똑같이 탄압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캄보디아 소수민족들 중에서도 폴 포트를 증오하는 이들과 폴 포트를 존경하는 이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캄보디아의 소수민족 젊은 세대들은 주류민족과 동화가 되든 동화를 거부하든간에 캄보디아의 경제가 성장할수록 추종하는 기성세대를 '저 꼰대들, 정신병원에 보내버려?' 또는 '미친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기나긴 독재를 행하고 있는 훈 센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바꾸며, 공통적으로 민주주의를 탄압한다는 비판을 받고, 좌익 진영에서는 특히 배신자로 인식되다 보니, 차라리 폴 포트는 죽는 순간까지 사상을 지켰다고 비교적 고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반면 오히려 크메르 루주가 미국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훈 센을 고평가하는 경우는 없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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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우와 이혼 후 재혼한 아내. 전처 키우 폰 나리와는 자식을 두지 못했고 메이사와는 딸 하나만 두었다.[2]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에서는 영어식으로 '샐로스 사르'라 표기했다. 크메르어 표기법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라 그의 본명은 '살로트 소르'#, '썰롯 써'#, '썰로 써'#, '살로스 사르'#, '살롯 사'#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기도 한다.[3] 중세 영국에서 흑사병이 창궐할 당시 영국인의 평균 수명이 17세 정도였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전체 인구 7명 중 최소 1명이 죽었다. 인구 자연증가분을 감안하면 7명 중 1명은 어디까지나 최소수치. 하루에 평균 630명이 죽은 꼴이다. 총인구대비 사망자를 따지면, 2021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대략 740만 명이 죽은 셈이다. 대구광역시(250만)와 부산광역시(350만), 그리고 대전광역시(150만)까지 통째로 증발, 또는 서울 인구의 3/4이 증발한 셈이다.이 정도 사망률이 나타나는 것은 조선시대의 경신대기근처럼 유례 없는 기상변화가 생겨 온 국민이 기아에 빠지거나, 6.25 전쟁처럼 전 국토가 포화에 휩싸이는 극단적인 상황 외엔 없다.[4] 이 날에 크메르 루주가 선전하던 '엉까'의 정체가 캄푸치아 공산당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참고로 이틀 뒤에 이 연설이 라디오로 중계될 때 폴 포트는 베이징으로 집권 기간 동안 유일한 공식 방문을 갔다.[5] 그러나 이 비밀주의는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는데, 베트남군의 침입 당시에도 상당수의 국토가 점령당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통보하지 않아 대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이는 베트남군의 진공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6] '하얀, 창백한'이라는 뜻으로, '상대적으로 밝은 피부 안색'을 나타낸다고 한다.[7] 폴 포트의 출생일이 1928년 3월 19일이라고 서술된 자료들도 있는데, 이는 당시 캄보디아인들이 학교 입학 연령에 맞춰 자녀의 출생 신고를 늦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8] 폴 포트의 아버지는 12헥타르의 땅과 버팔로 6마리를 소유했고, 약 20명으로 논을 경작했으며, 그의 농지의 연평균 수확량은 20명 이상의 가족을 기를 수 있는 6t 정도였다고 한다.[9] 당시 캄보디아를 식민 통치하던 프랑스가 명목상으로 내세운 국왕으로 한국으로 치면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이었던 영친왕과 유사하다. 참고로 이 모니봉 왕의 외손자이자 부계로 육촌 재종조손, 훗날 후임자가 다름아닌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다.[10] 이 시절에는 후궁인 이복누나와 자주 만났는데, 어린 소년이라 금남구역인 후궁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첫 경험도 16살 시절에 다른 후궁들과 경험한 것이었다고 한다.[11] 정작 실제로 폴 포트는 어릴 적에 학교에 다녀서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12] 실제로 론 놀은 부하들에게 뭔가 얘기를 하면 부하들이 항상 졸 정도였다고 한다.[13] 쿠데타 직후에만 론 놀 정권의 간부들 전부와 고위직들까지 합해 총 700명이 살해당했다.[14] 왼쪽부터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부인 엘레나 차우셰스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폴 포트, 민주 캄푸치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서열 5위) 키우 삼판이다. 참고로 이때 차우셰스쿠 부부는 민주 캄푸치아 정부의 초청으로 루마니아에 온 것이었다.[15] 유유상종이라고 마오쩌둥과 폴 포트 모두 농사에 대해 경험과 지식에 대해 문외한에 빈곤과는 거리가 먼 부농 출신이었다.[16] 그렇게 도시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크메르어로 '새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의 경계 대상이 되어 숲, 고지대, 늪처럼 가장 척박한 곳에서 가장 고강도의 육체 노동을 하며 가장 비참한 대우를 받아야 했으며, 물론 집중적으로 후술할 숙청과 고문의 대상이 되었다. 반대로 원래 농촌에 살던 '옛 사람'이라는 계층은 비교적으로 정치적 탄압이 적었다.[17] 다만 오래 전부터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중공과는 예외적으로 부분적인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때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이 중공으로 반출되었고, 중공에서 무기가 대량으로 들어왔는데, 무기는 잃어버린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 베트남과의 전쟁에 사용했다.[18] '기타' 문단 참조.[19] 참고로 캄보디아의 새해도 4월 중순에 시작한다.[20] 다만 사람들을 재배치하는 용도와 무기를 이송하는 용도로 트럭을 쓰는 것만은 허용되었다.[21] 그 이전까지 민주 캄푸치아의 정부수상은 시아누크 시절에 여러 번 수상을 역임한 펜 노스(Penn Nouth, 1908~1985.)였으나, 실제로 펜 노스는 실권은 전무하여 완전히 명목상의 수상에 불과했다. 물론 이 시기에 캄보디아의 공식적인 국가원수로 알려진 시아누크도 명목상의 국가원수에 불과했다.[22] Son Sen, 1930~1997. 크메르 루주의 비밀 경찰인 산테바르의 수장도 겸임했으며, 악명 높은 수용소 뚜올 슬렝의 운영을 모니터링하며 수용소에서의 심문 및 고문 설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23] 다만 적어도 윤 얏은 프놈펜에 있던 국립 교육학 연구소의 교수 출신이었으며, 이엥 티릿은 한 술 더 떠 캄보디아인 최초로 영문학 학위를 보유했던 인물이었다. 물론 둘 다 당대 여성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엄청난 엘리트였다.[24] 화폐와 시장 금지[25] 다만 이는 키우 삼판이 한 발언이라는 설도 있다.[26] 참고로 키우 폰나리는 1970년대 초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27] 참고로 폴 포트는 전처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28] Ta Mok, 1926~2006. 민주 캄푸치아 시절에 캄보디아군의 지도자였으며, 말기에는 공산당 제2부비서 겸 서열 3위였다.[29] 당시 이 내전때 세계 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도 큰 수난을 당했으며 당시 총격전으로 인한 총탄 자국과, 총알이 석조 조각에 박혀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현재까지 남아있다.[30] 이원복 교수 학습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걸로 돼 있으나, 작가 창작으로 보인다. 다만 죽기 전까지 끝까지 자신이 정당했다고 믿었던 그의 모습을 보면 나름 납득되는 해석이긴 하다.[31] 실제로 인터뷰를 하러 찾아갔다가 그가 죽은 직후 미망인과 대화한 기자 네이트 테이어에 따르면, 폴 포트 본인의 부탁으로 부인이 음독 자살을 도와준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32] 위에는 '폴 포트는 여기서 화장되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33] 다만 그녀는 아버지가 퇴진한 후에 태어나 아버지의 악행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감안해야만 할 것이다.[34] 참고로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뚜올 슬렝의 소장이자 누온 찌어의 부하였던 두치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폴 포트가 부재중일 시에는 누온 찌어가 폴 포트의 업무를 대행했으며, 폴 포트가 명령을 내리면 누온 찌어가 이 명령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했다고 한다.[35] 실제로 당시 이엥 사리는 UN 총회에 다녀오는 길에 무려 푸아그라와 스위스산 치즈를 구매해 캄보디아에 왔다고 한다.[36] 참고로 폴 포츠의 영어 스펠링은 Paul Potts이다.[37] 실제로 폴 포츠는 폴 포트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에 놀림감이 되었다고 한다.[38] 신 도라에몽 1기 6화의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