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실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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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국정원의 조사 결과
2.1. 조사 결과에 대한 의문점
2.2. 김형욱 유족들의 반발
3. 김형욱의 최후에 대한 그 밖의 주장
3.1. 양계장 닭모이 설
3.2. 기타 설
4. 여담
5. 기타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79년 10월 7일에 전 중앙정보부김형욱실종된 사건.

어쨌든 당시 여러 인사들에 의해 각종 회유와 귀국 종용을 받은 김형욱은 앞서 언급된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1]으로부터 원고료로 거액을 준다는 말을 듣고서 그와 만나 돈과 원고를 교환했고 이후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2]

그리고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파리에 도착했고 호텔에서 6일 동안 머무르다 10월 7일 그곳에서 행방불명됐다.

그의 실종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공식적인 국가정보원의 조사 결과가 있으나 시원치 않은 구석이 있어 의문이 남아 있다.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미스테리로 방송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졌다.


2. 국정원의 조사 결과[편집]


2005년 5월 26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지시로 권총으로 암살당했다는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3]

참고로 진실위의 국정원 쪽 간사를 맡았던 사람이 나중에 국정원장이 되는 김만복 당시 기조실장이었는데 그는 이 사건의 조사를 자신했다고 한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에 의해 프랑스에서 연수 중이던 중정요원에 의해 납치, 살해당했다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정보부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김만복 실장은 김형욱을 살해한 요원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고 이미 그들에 대한 설득 작업도 진행 중이었다. 김만복은 "업보는 우리 세대가 짊어지고 가자"며 관련자들에게 인간적인 설득까지 했으며 결국 당사자들이 김만복에게 상당한 정도의 진상을 털어놓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제는 해당 사건 관련자들이 당시 그들에게 '작전'을 직접 지시했던 전 프랑스 공사 겸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 이상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는 것. 이상열이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4]

어쨌든 발표된 조사 결과를 요약하자면 대략적으로 이러했다.

79년 10월 1일, 이상열 공사가 한국으로 귀국하여 김재규 부장을 두 차례 만났으며 다음날 파리로 돌아갔다.[5]

당시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는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을 겸하고 있었다. 사건 수행은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던 A요원, B요원이 담당했다. 이들은 동유럽 출신 협력자 2명을 10만 달러에 고용했다. 김형욱 전 부장은 이상열 공사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공사는 전주를 소개시켜 주겠다며 10월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A요원과 협력자 2명이 나타나 이 공사의 승용차를 이용해 김형욱을 납치해서 파리 근교로 끌고 갔다. 협력자가 소련제 소음권총 7발을 발사해 살해했다. 살해한 시신은 낙엽으로 덮어두었다. 이상열 공사는 A요원에게 관저에서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는 김형욱 부장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소지품을 철저히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다. A요원이 귀국 후 10월 13일 직접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김재규는 직접 A요원을 불러 거액의 돈 봉투를 쥐어주며 앞으로의 근무나 생활의 편의를 봐주겠다고 약속했다. 10월 18일 이상열 공사도 은밀히 귀국해 김재규 부장에게 직접 보고하고 다음날 파리로 돌아갔다.


  • 진실위에서 당시 발표한 자세한 조사 결과는 다음 기사 링크에 잘 나와 있다.#

  • 김재규가 이상열에게 사건을 지시했고 이상열이 다시 현지 요원들에게 사건을 지시했으며 이후 이상열과 현지 요원이 사건의 결과를 김재규에게 보고했다는 흐름은 당시 중정에서 일하면서 이 일에 직간접적으로 엮인 모든 사람들이 일관되게 한 진술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 사건을 직접 수행했던 두 요원에 대한 일화도 전해지는데 불교 신자였던 A요원은 산에 오르다 사찰이 보이면 법당 앞으로 가서 절을 하며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살았다고 하며 천주교 신자였던 B요원 또한 종교 생활을 통해 정신적인 고통을 달랬다고 한다.[6]

  • 2020년 12월 15일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국정원과 진실위에서 조사하여 발표한 해당 내용을 토대로 방송했다.



2.1. 조사 결과에 대한 의문점[편집]


  •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동선 및 김형욱 살해 이전과 살해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주요 인물들의 진술이 일치하지만 정작 살해된 김형욱의 시체를 도대체 어떻게 처리했는 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진술이 매우 불분명하고 의문스럽다는 점이 큰 약점이다. 또한 김형욱의 최후 처리를 외국인에게 맡겼고 살해 후 시신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다는 점은 상당히 비상식적이다. 그리고 엄혹한 냉전 시대에 공산권인 동유럽의 협력자와 접촉하여 암살을 위해 그들을 돈으로 고용하였다는 점도 석연찮다.[7]

  • 이상열 전 공사는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개입 사실 자체는 시인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내 면담 조사는 노(No)라고 기록해 달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함구했다. 이상열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8]# 약 1년 뒤인 2006년 4월 3일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상열뿐만 아니라 다른 관련자들도 조사 도중 진술을 잘 하다가도 정작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입을 다물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 한편 10.26 사건 직후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국정원과 진실위의 해당 발표를 부인하였다. 10.26 사건 직후 김재규에 대한 변호 과정에서 김재규에게 '김형욱 실종 사건'에 대해 아는 바 있느냐고 수차례 질문했지만 늘 김재규는 늘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다는 것. 심지어 김재규는 김형욱이 실종되었다고 보도가 나온 그 즈음부터 유럽 출장을 가겠다고 보고서를 올린 부하 직원들에게 되려 '괜히 의심받을 짓을 하지 말고 출장지를 아시아 쪽으로 바꾸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이런 증언은 10.26 사건 직후 김재규의 국선 변호인을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의 증언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 참조. #

  • 또 10.26 사건 직후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에서 발표한 김재규에 대한 조사 보고서와 김재규에 대한 재판에서 김형욱 사건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도 석연찮다. 다시 말해, 내란을 모의한 죄목으로 기소된 김재규의 주요 범죄 혐의에 충분히 포함될 만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두환과 신군부의 집권 이후 중앙정보부가 안기부로 재편되면서 김재규 라인은 전부 좌천되거나 쫒겨났는데 국정원의 발표에서 김형욱 실종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된 인물이자 김재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이상열은 전두환 정부 내내 승승장구하면서 안기부의 고위직까지 올랐다는 점도 의문으로 남는다.

2.2. 김형욱 유족들의 반발[편집]


김형욱의 유족들은 이 조사 결과를 믿지 않았으며 결과조차도 매우 부실하다고 주장하였다. A요원과 B요원의 진술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기 때문. 사용한 총기는 분실했으며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 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부실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유족 측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첫째, 명색이 암살까지 했다는 요원이라는 사람들이 총기를 분실했다는 아마추어나 할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오히려 총기를 분해해서 여기저기 버려 증거를 인멸했다는 식의 진술이 차라리 요원들 본인에겐 더 유리하기 때문. 만약 분실한 총기가 제3자에 의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 둘째,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 두었다는 게 시신 처리 방법으로선 매우 부실하다. 일단 사체를 정말 낙엽으로 덮었다면 무풍지대가 아니고서야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 경찰도 사체는 찾을 수 없었으므로 낙엽으로 시신을 덮어두기만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 오죽하면 닭모이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질까 특히 살해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진술한 당시 중정 요원이 김형욱의 사체를 버린 장소가 생각나지 않는다며 진술을 회피했던 점도 석연치 않다. 사건 발생 당시 프랑스 경시청에서 미국과 프랑스 정보기관의 협조를 받아 4개월이나 수사했지만 낙엽에 덮여서 버려진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 셋째, 10월 9일에 파리를 떠나서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로 갔다는 미 국무부의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있는데 파리 근교에서 10월 7일에 죽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9]

  • 한편 김형욱은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스위스에도 방문했으며 이 당시에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우 화가 난 상태로 전화했다고 김형욱의 맏며느리가 주장했다.[10] 그리고 유족들은 국정원의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서울로 납치·송환되어 피살당했다거나 사우디로 끌려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파리에서 살해당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의 발표와 전직 중앙정보부 관계자의 직접적 증언을 인용한 언론 보도 사이에는 몇 가지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중앙정보부와 연관된 파리 현지 요원들이 권력의 고위 인사로부터 지시를 받았고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로 유인당했으며 이후 파리 근교에서 중정 소속의 요원 혹은 해당 요원의 고용인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살해 직후 김형욱의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다.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대략적인 몇 가지의 얼개는 일치하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사건 관계자들의 입을 열 방법이 아예 없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실종 사건에 깊이 개입되었을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이 세 사람은 김형욱의 실종으로부터 약 20여일 뒤 10.26 사건에 휘말려 둘은 그 당일에 죽고 한 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말이다.

3. 김형욱의 최후에 대한 그 밖의 주장[편집]



3.1. 양계장 닭모이 설[편집]


  • 2005년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이라고 밝힌 사람이 자신이 김형욱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 소속 공작원 출신이라고 밝힌 인물은 《시사저널》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건 직전에 박정희를 직접 만났고 중앙정보부의 지시 없이 조력자들의 도움만 받아서 스스로 사건을 수행했으며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 당일 김형욱을 마취시킨 뒤 반쯤 의식불명이 된 김형욱을 파리 근교까지 찾아가서 산 채로 머리부터 양계장 대형 믹서(해머밀)에 넣어 갈아 죽였다고 설명했다. 즉, 시신은 닭모이가 된 것. 이는 폐차장을 비롯한 다른 방법과는 다르게 시신의 흔적조차 찾기가 불가능한 방식이므로 일반인들 역시 이 설을 사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위에서 서술된 진실위의 조사 결과 발표 당시 시사저널과 이 내용을 인터뷰한 당사자가 중정 출신이 맞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 김경재도 자신의 저서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을 통해 위에 소개된 동일한 인물로부터 들은 동일한 내용을 주장했다. 다만 김경재는 시사저널 인터뷰보다 훨씬 자세한 주장을 했는데 해당 주장을 한 인물이 '조용박'이라는[11] 사람이고 코드명은 '천보산'이며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를 지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일본으로 밀항한 뒤 남파 교육을 받고 남파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남한에서 전향하여 다시 북파 공작원으로 활동했던 중정 요원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김형욱을 산 채로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목을 꺾고 마취제를 입에 집어넣은 뒤 양계장 믹서에 넣었으며 결정적으로 이 사건이 김재규 라인이 아니라 차지철 라인을 통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
    • 한편 이 사건을 오랫동안 추적하였으며 최초 시사저널 보도를 작성했던 주인공이자 현재 시사인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정희상은 이후에도 국정원과 진실위의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작성하였다.#1, #2 한편 정희상 기자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할 즈음 새로운 기사를 썼는데 양계장 닭모이설의 주인공인 조용박 씨가 2007년에 국정원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통장을 자신에게 확인시켜 줬으며 국정원은 왜 김형욱 암살과 무관하다던 조 씨에게 돈을 건넸던 것인지 의문이라는 것.# 그리고 여전히 정희상 기자는 국정원과 진실위의 당시 발표에 대해 큰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희상 기자의 저서 '팩트와 권력'에서 더욱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다.#
    • 남산의 부장들을 집필한 김충식 전 기자는 한 방송에 나와 '양계장 암살설'을 긍정하며 "정부의 입장으로 그걸 발표할 경우에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에서 일종의 부채를 공식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냥 사체를 낙엽에 파묻고 말았다라고 처리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 한편 MBC PD수첩2005년 5월 3일 방송분에서 위의 '양계장 닭모이 암살설'을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결론은 '그랬을 가능성이 낮다' 였다. 취재진은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했던 이모 씨와 함께 일본, 프랑스로 검증 차원의 동행취재를 수행했고 당시 프랑스에 중형 닭모이 기계가 보급되지 않았다는 점, 해당 인물이 프랑스와 파리의 지리나 정확한 살해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 '닭모이 암살설'은 신빙성이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인 2005년 7월 23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당시 실제 프랑스에 중형 닭모이 기계가 보급되고 있었다는 증언을 확인했으며[12] 시사저널 측에서도 PD수첩의 보도를 반박하는 장문의 기사를 냈고 PD수첩에서는 다시 시사저널에 대한 반박문을 내는 등 한동안 이런저런 논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결론이 제대로 나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



3.2. 기타 설[편집]


  • 1980년대에는 대한항공 특별기(화물기)편으로 청와대 지하실로 실려와 박정희가 직접 M1 카빈을 머리에 대고 쏴 처형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른바 '오작교 작전'이라는 것인데 이 주장은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 기자에게 프랑스어로 배달된 출처 불명의 문서가 일본 '주간문춘'과 프랑스 '르몽드'에 보도되었던 것이다.관련 기사 신상옥 감독의 1994년 영화 <증발>은 이 설을 따랐다.

  • 차지철의 대통령 경호실 주도로 납치해서 한국에 끌고 왔고 기절시킨 후 폐차장 폐차기에 넣어서 살해됐다는 설도 있다. 앞서 말한 문명자 기자가 세 다리 건너 들었다는 이야기로서 서울신문에 연재되던 문명자의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인데 메인 소스는 중앙정보부 요원이고 이걸 정일권 총리가 들었으며 문명자가 정일권에게 들었다고 한다. 문명자의 기록에 따르면 김형욱이 경복궁에서 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 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끌려갔고 '잘못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라고 빌었으나 폐차장 압착기 아래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것. 해당 내용은 문명자의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자세히 나온다. 이 설은 소설가 이병주의 '김형욱 최후의 날'이라는 르포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백무현 화백의 <만화 박정희>에서도 볼 수 있다.
    • 납치는 차지철의 주도가 아니라 김재규 중정부장이 주도했으며 혼수 상태인 김형욱을 스위스 취리히 발 대한항공기를 통해 서울로 공수해서 폐차장 폐차기에 산 채로 넣은 뒤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이는 당시 경찰 외사과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신동아 기자에 진술한 내용이다. 위의 내용과 사건의 얼개가 일치하지만 납치의 주도자가 차지철이 아니라 김재규였다는 점이 다르다.

  •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한 후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서 살해하였고 그 시체를 파리까지 옮긴 뒤 외교화물로 위장하여 한국으로 공수했다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들과는 다르게 이 설은 일본문예춘추에서만 보도된 외국발 설이다. 이 기사를 보도한 일본 기자는 한국의 어느 지위 높은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주장했다.

  • 카지노 마피아들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3] 이 설은 별다른 근거나 증언이 없어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를 받은 파리 현지의 조직폭력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중정 고위 간부 출신 인물의 주장을 월간조선이 받아서 보도한 것이다.

  • 김형욱이 최종적으로 행방불명이 된 곳은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설도 있다. 이는 2005년 5월 20일에 해제된 미국 국무부 비밀전문에 나온 내용인데 "김형욱은 한인 남성 한 명과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행적이 묘연하다"고 적혀 있다. 기존의 추정 실종 날짜인 10월 7일보다 이틀 뒤인 10월 9일이라고 특정된 것이다. 다만 이 내용은 일본 외무성이 파리 경찰을 상대로 이 사건에 대한 정보를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결과를 다시 주미 일본 대사관을 거쳐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고 국무부에서 다시 주한 미국 대사관에 내려보낸 자료라고 한다. 일단 전언이 네 단계이며 한국 중앙정보부와의 교차검증이 되지 않은 주장이라는 점이 약점이다.

  • 10.26 이전에 잠시 월북설이 돌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생존설로서 남미에 숨어 산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하지만 결국 2002년 미국 뉴저지의 한 공동묘지에 가족에 의해 가묘가 세워졌다.

이상의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히 증명된 바가 없다.김형욱 미스터리, 누구 말이 맞나


4. 여담[편집]


  • 김형욱 실종 사건에 대한 특종은 조선일보가 최초로 터뜨렸다. 1979년 10월 16일 1면에 실린 '김형욱씨 파리서 행방불명, 1주일 째 호텔에 안 나타나'라는 제목의 박스기사였다. #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가 나가자 대한민국의 여러 신문의 파리 특파원들이 김형욱의 호텔 숙소에 찾아가서 소지품들을 발견하였고 이후 며칠동안 여러 언론에서 계속해서 후속보도가 실렸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사건이 터지면서 김형욱 실종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5. 기타[편집]


  • 2020년 개봉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해 영화 중간에서 다루었다. 영화에선 실제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며 양계장 닭모이설을 정설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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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 병사(D), 아사(H), 의료사고(M), 실종(V), 자살(S), 교통사고(T), 기타(E), 의문사 및 경위 불명(?)





[1] 훗날 중앙정보부장 직무대행을 역임.[2] 김형욱과 친분이 있던 어느 여자 배우의 회유와 연락을 받고 파리로 갔다는 설이 있었으나 그때 파리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발견되며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3] 당시 발표는 내곡동 국가정보원 강당에서 김만복 기조실장과 진실위의 위원들이 공동 발표하는 기자회견 형식으로 이뤄졌다. 참고로 당시 진실위에서 사건 조사에 참여하였고 국정원과 함께 김형욱 실종 사건 발표도 담당했던 위원이 바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였는데 한 교수는 이후 저작물들과 연구서, 칼럼, 인터뷰 등을 통해 당시 진실위의 사건 조사 내용과 사건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 등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4] 이상열은 예전부터 김재규와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김재규가 과거 3사단 부사단장을 지낼 때 이상열이 그의 부관이었고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을 지낼 때도 함께 보안사에 근무했으며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와 이상열은 젊은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5] 진실위는 이상열 공사가 이때 김재규 부장에게 김형욱 살해 계획을 보고하고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 수령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6] 당시 발표에 따르면 A요원은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정보부를 그만두었고 B요원은 상당 기간 재직하며 고위 간부에 올랐다고 한다. A요원과 B요원이 종교에 의지하며 정신적인 고통을 견뎠다는 일화는 조사 결과 발표 당시 실제로 공개되었던 내용이다.[7] 하지만 김형욱을 정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로 판단하고 그를 제거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제거를 명령한 명령권자조차도 제거 대상의 생사를 모호하게 알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정권 차원에서는 김형욱의 생사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저 사회에 나타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고 명령권자가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면 그런 시도 자체가 살해 사주를 했다는 근거가 된다, 또 표적의 제거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하는 것 자체가 살해 동기나 살해범을 추론하는데 혼선을 줄 수 있다.[8] 국정원 후배들도 진실을 위해 이제 증언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정보기관 출신은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한다"며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9] 물론 이 보고서의 정보 소스가 일본 정부-주미 일본 대사관-미국 국무부-주한 미국 대사관이라는 4단계 전언이라는 점은 상당한 약점이다.[10] 이 주장대로면 실종 이전에도 이미 공작에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도망 다니는 와중에 화를 낼 일이라면 이런 공작 정도다.[11] 여러 기사를 미루어 보아 동일한 이름으로 소개되긴 하는데 해당 이름이 가명인지 실명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12] 그러나 해당 인물이 프랑스와 파리의 지리나 정확한 살해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반박되지 못했다.[13] 김진명은 자신의 소설에서 이 설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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