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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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省
중국, 대만과 베트남에서의 제1급 행정구역. 대한민국의 도(道)에 해당한다.
2. 국가별[편집]
2.1. 중국/대만[편집]
중국의 각 성을 노래로 담은 동영상
중국의 성 제도는 금나라 때의 행상서성, 본격적으로는 원나라 때 등처행중서성(等處行中書省), 줄여서 행중서성(行中書省), 행성(行省)을 두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행(行)은 임시라는 뜻으로, 정식궁궐 외의 궁궐을 행궁(行宮)이라고 하는 것이나 승하한 왕에게 묘호, 시호를 붙이기 전까지 대행왕(大行王)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원래 성이란 중앙정부의 최고상급부서를 말하는 것으로, 당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고려시대 있었던 3성 6부제의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생각하면 된다. 이 행성을, 몽골 제국이 정복왕조로 중국을 점령한 뒤 전국에다가 중서성(상서성)의 파출기구이자 총독부, 도호부 같은 군정 및 민정기관으로 뿌린(...) 것이다. 한국사에서 여말선초 고려에 입성책동으로 명목적으로 설치된 원의 정동행성이 바로 이 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원나라가 축출되고 명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몽골의 잔재인 '제1급 행정단위 성'은 남아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청나라 초기에 18개 성이던 것이 말기에 들어서 청말 1884년 신강성, 1885년 대만성[1] , 1907년 동삼성을 설치하고 중화민국 시기 내몽골을 분할하여 3개 성(몽3성)을 설치하며 사천성에서 티베트인 지역을 분할하여 2개 성(장2성), 만주에 동북 3성을 더 세분화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1950년대에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져 동북지방의 면적이 작은 성을 최종적으로 청말의 3개로 통폐합하고 내몽골 지역의 몽삼성을 내몽골 자치구, 시캉성은 도로 쓰촨성, 일부는 티베트 자치구에 통합시켰으며 신장성은 신장위구르자치구로, 닝샤성은 닝샤 후이족 자치구로, 광시성은 광시 좡족 자치구로 변경되었다. 현대 중국의 행정구역 개편은 만주나 내몽골처럼 전통적으로 한족 왕조의 영토가 아니었던 곳이나 소수민족이 많이 살던 곳 위주로 단행했으며, 옛 명나라 영역 아래에 있었던 성들은 대체로 그대로 존속되었지만 중국의 소수민족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은 도로 재통합되어 자치구를 설치하는 등, 세부적인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 통치 성은 22개가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중화민국이 거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타이완 성까지 합쳐 23개이다.[2] 현재 중국의 성에 대해서는 중국/행정구역 문서로.
반면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 그리고 현재의 대만은 타이완 성 하나에 푸젠 성 극히 일부만을 실효 지배하고 있지만[3] , 명목상으로는 중국 대륙에 설정된 성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타이완 성과 푸젠 성의 실질적 기능을 없애고 중앙정부나 각 현으로 이관하여 현재 성은 실질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중국 성의 명칭은 간쑤성, 장쑤성이나 안후이성, 푸젠성처럼 중요한 두 도시 이름을 하나씩 따서 지은 것도 있고, 대부분은 자연적 경계선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구분한 것이 많다. 예를 들면 황허 남북을 기준으로 허난성과 허베이성, 둥팅 호 남북 기준으로 한 후베이성과 후난성, 장강 동서를 기준으로 한 장시성, 타이항 산맥 동서 기준으로 한 산둥성과 산시성.
성(城)과 혼동하는 사람이 제법 많이 있다.
2.2. 베트남[편집]
베트남의 성은 응우옌 왕조 때로부터 설치된 제1급 행정구역으로써 현 베트남 전국은 58개 성과 5개 중앙직할시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이 가장 넓은 응에안(Nghệ An) 성은 16,490㎢, 가장 좁은 박닌(Bắc Ninh) 성은 불과 823㎢이다.
3. 관련글[편집]
- 군현제
- 주현제
- 주(행정구역)
- 도(행정구역)
- 부(행정구역)
- 목(행정구역)
- 군(행정구역)
- 현(행정구역)
- 총독(중국)
- 순무(관직)
- 도독
- 성장
- 중서성(상서성)
- 3성 6부제
- 입성책동
- 정동행성
[1] 청일전쟁으로 일본 제국에 할양 형식으로 뺏긴다.[2] '대부분'인 이유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가 중국에서는 타이완 성의 일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3] 저장성 역시 극히 일부의 다천 군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었으나 중공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1955년 철수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