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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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성(城)은 '적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돌 따위로 높이 쌓아 만든 담. 또는 그런 담으로 둘러싼 구역'이다. 시대와 지역, 용도에 따라 축성 양식은 매우 다양하다.
2. 기능[편집]
성의 역할은 주로 높고 튼튼한 성벽을 통해 적이 도시로 진입할 수 있는 경로를 최소화시킴으로써 적들의 공격 루트를 한정시키는 억제 효과가 있었고, 또 방어하는 측 병사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전투 중 안정적인 엄폐물을 확보하게 해 줄 수 있는 여러 이점이 있었다.
성 중에서 궁전의 용도를 겸하는 성이 있는데 이를 궁성(宮城)이라 한다. 궁성에는 무장병력과 각종 군사장비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2.1. 공성전[편집]
공성전은 성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하는 전술적인 작전으로, 성벽을 넘어오는 공격부대와 성벽을 방어하는 수비부대 간의 전투로 이루진다. 공성전은 성의 수비군을 압도하여 성을 함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수성전은 공격군의 성벽 침투를 막고 성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의 성, 즉 같은 전장에서 서로 반대되는 전략적 목적을 가진 것이 공성전과 수성전인데, 공격 측 입장에서는 공성전이고 수비 측 입장에서는 수성전인 것이다. 공격군은 수비군의 성벽을 둘러싸고 수비군의 식량과 물품 공급을 차단하여 수비군이 기아와 목마름에 시달리게 만드는 전략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성문, 성벽, 요새 등을 파괴하거나 수비군을 압도하여 성을 점령해야 하는데, 공성전은 성을 지키기 위해 수비군들이 사용하는 방어 대책들[1] 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일반적으로 공격군이 수비군보다 수가 훨씬 많아야 공성전이 가능하다.
냉병기 시절 성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어서, 제대로 축조한 성에 식량이 충분하다면 성 내부에 전염병이라도 돌거나 공격 측이 정말 압도적인 양과 질의 병력으로 밀어버리지 않는 이상 공격해 온 적군이 먹을 게 없어져서 물러갈 때까지 방어해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적을 전투에서 섬멸하기 위해 요구되는 공격 측과 방어 측의 병력 비율을 3:1이라고 할 때, 성이 있는 경우 이 비율이 5:1에서 10:1까지도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 방어 측이 성 내부에 일정 규모의 기동성 좋은 부대를 갖추고 있는 경우, 공격자 측이 공격할 성을 완전히 둘러싸고 포위하지 않으면 난전 중 어느 구석에서 기어 나온 적군에게 뒤통수를 맞기가 십상이고, 포위했던 공격자가 물자가 다 떨어져 물러갈 때 모랄만땅 배만땅 채운 방어 측 기병에게 뒤통수 맞으며 갉아먹히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방어 측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방어 측 입장에서 특히 고난인 것은 식량 + 식수 조달 문제였는데, 아무리 많은 자원을 쟁여놓는다고 해도 일단 공성전이 시작되거든 인근 지역 사람들까지 다 성으로 몰리는 사태가 심심찮게 발생해서 식량과 식수를 조달하는 속도보다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빠른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식수의 경우 해자 역할을 하는 강 정도가 없는 한, 해자 주변에 있는 건 오염된 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방어 측의 내분[2] 첩자 문제, 방어 측의 비효율적인 병력 분산 등의 위험이 있었다.
성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병기를 제작하는 수법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런 방법은 병기 제작을 위해 상당한 노력과 자원이 들어가게 되며, 공성 과정에서 병력이 손실되게 마련이다. 손자병법에서도 이런 식으로 적의 성을 공격하는 것을 가장 하책으로 보았을 정도.[3] 애초에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게 가능했던 건 공략에 만 단위의 보병과 우수한 공병을 투입 가능했던 로마군이나 중동 제국, 중국군 정도였다. 대포가 나온 후에도 콘스탄티노플과 같은 우수한 설계로 지어진 초대형 성곽은 한 줌의 병력만이 지키고 있었는데도 공략하는데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정도. 자세한 내용은 공성전 문서 참조.
공성전 시 대형 공성포를 운반할 수 있는 참호를 수성 측 사거리 바깥부터 길게 뻗어 들어가며 만들고 거점에 공성포가 설치되는 시점에서 수성 측이 명예로운 항복을 할 수 있었다. 참호 못 파게 하는 유격부대와 이 유격부대를 처리하려는 유격부대 간의 전투가 주요한 공성전이 될 정도였으며, 이러한 내용의 예는 삼총사의 라 로셸 공방전 장면에서 나온다.
2.2. 우회할 수 없는 이유[편집]
이렇게 보면 공격군이 그냥 성을 지나친 뒤 수도를 공격해 적의 수뇌부를 빨리 사로잡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성을 지나친다는 건 그 성을 지키는 병력들을 후방에 온전히 남겨둔다는 것인데, 이러면 성 안의 적이 빠져나와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이게 작은 성 한 두개면 모를까, 수천 수만 병사가 지키는 성이라면 그냥 지나치기엔 후방에 생길 위협이 너무 컸다.[4] 여기에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도 이 적들 때문에 위태로질 게 뻔했는데, 전쟁에서 보급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더군다나 성들은 대개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건 지형상 불가능하거나, 크나큰 시간과 인명, 보급이 손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경우 후자라 쳐도 통과해봐야 손실이 심하니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성을 점령하는 건 전쟁에서 사실상 필수적이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진주성 공략에 실패하고, 해전에서도 밀리는 바람에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만 삼국시대 당시에 요새를 공략하기보다 험난한 절벽을 넘어 촉한을 점령한 등애처럼, 반대 사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5][6] 또한, 국토가 작아 이동 거리가 짧고, 적들이 반응할 틈도 없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있다면 꼭 모든 성을 점령하지 않기도 했다. 이는 수 년에서 수십 년간 지리하게 이어지는 전쟁의 완전히 반대인 단기결전 사례인데, 대표적인 예로 청나라가 인조를 순식간에 사로잡아 굴복시킨 병자호란이 있다. 이때 청나라는 날랜 기병을 몰아 순식간에 한양과 남한산성까지 들이닥쳤는데, 만약 이때 인조가 선조처럼 파천에 성공했다면, 후방에 적들을 고스란히 남기고 들어온 청나라로선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전방의 성을 점령하고 보급선을 확보하며 전진하는 대신 그냥 진격해 들어간 것은 엄청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자칫 적에게 뒤를 털릴 수도 있는 위험한 전략임은 틀림 없어서, 제2차 여요전쟁 당시에 요나라 황제인 성종은 곽주성 하나만 함락시키고 재빨리 개경으로 진격했으나, 현종이 재빨리 나주로 몽진하는데 성공하면서 허탕만 치다가 양규에게 후방이 노출되어 패한 바 있다.
3. 어형[편집]
3.1. 한국어 어휘와 어원[편집]
현대 한국어에서 성은 포괄적으로 각종 야생동물이나 적의 침입에서 보호받기 위해 지어둔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일컫는다.
과거에는 '잣'이라고 하였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성'보다는 '잣'이 더 범용적으로 쓰였는지, '석보상절'에서는 "성(城)은 '잣'이라고 하는 말이다."라는 식으로 주석을 달았다. 그 외의 순우리말로는 재, 작(신라어), 홀, 구루, 책구루(忽, 溝漊 고구려어), 기, 긔(只, 己 백제어)가 있다. 그래서 한국 각지의 옛 고유어 지명을 보면 '재(또는 자, 고자 등)', '홀(미추홀, 매홀 등)', '기(또는 지, 노사지, 두잉지' 등)' 등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통해 해당 지역이 모두 삼국 시대에 성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참조링크 1참조링크 2
'성'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발달하여 용례가 비교적 다양하다. '성'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근대 이전 시대까지의 방어 시설을 의미하며, 아래의 성형 요새까지도 성에 포함시키곤 한다. 한편 콘크리트를 쓰기 시작한 근대식 요새(마지노선, 대공포탑 등)나 벙커, 토치카 등은 요새 정도로만 부르지, 성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일본서기에 나오는 한국 성(城)의 명칭들
촌(村 ; 스키)[7]
: 의류촌(意流村 ; 오루스키), 주류수기(州流須祇 ; 츠루스키). 두 촌은 백제의 주류성(周留城)이다. 일본서기엔 주모성(州柔城 ; 츠누사시)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 ; 츠츠키루노무레)이라고도 적혀있다.모라(牟羅 ; 무라):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 쿠레무라노사시). 구례산(久禮山 ; 쿠레무레[8]
)으로 부르기도 한다. 왜인 근강모야신의 어그로로 애꿎게 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 ; 쿠치하타키)등의 성이 함락되고 탁순국의 영토에 백제의 구례모라성이 세워진다. 신라에선 왕성을 건모라(健牟羅)라 불렀다고 한다.지(枳 ; 키): 이사지모라성(伊斯枳牟羅城 ; 이시키무라노사시)
성(城 ; 사시): 대성(大城)의 훈이 코니사시로 백제에서 대성을 부른 말인듯 하다. 코니는 건길지의 건과 같은 말로 크다는 뜻이다. 신라의 향가 혜성가에서 성(城)을 城叱이라 적고있다. 질(叱)은 말음의 ㅅ으로 성의 순우리말 '잣'을 적은 거라 보고 있다.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 이시부레치칸키)처럼 질은 'ㅅ'라고 읽는다.
: 능비기부리(能備己富利) 배평(背評)이라고도 한다.[10] 기부리는 순우리말 고을의 옛말로 추정된다. 일본에서도 율령제 체제에서는 평(評), 군(郡)을 코호리(こほり)라하여 행정구역명으로 사용했다. 큰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금물현(今勿縣) → 기문현(己汶) 금물현은 큰물이라고 불렸고 건길지를 코키시 라고도 하니 큰벌 큰마을이라는 뜻이 맞겠다.[11]축족류성(筑足流城 ; 츠쿠소쿠로노사시) / 도구사기성(都久斯岐城 ; 츠쿠시키노사시): 축족류성과 도구사기성은 같은 성의 명칭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싸운 기록에서 나오는 성의 이름이다. 시키, 소쿠로가 성, 촌(村)을 뜻하는걸로 추정된다.수탉을 죽여라
한편 '요새'(要塞)라는 말은 군사적 시설에 한정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영어 'fortress'에 해당하는 번역어로 쓰는 경우가 많다. 방어 시설 중 어느 단계부터를 '요새'로 부르는지는 확실히 정해져있지는 않은 듯하다. 대개 근대 이후에 거주지의 기능과 분리된 방어 시설을 '요새'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
3.2. 유럽 제어의 어휘[편집]
한국어의 '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개념이 유럽에서는 크게 5가지로 구별될 수 있다. 중세사를 잘 아는 역자가 번역한 경우라면 이 다섯 개념을 비록 나무위키에 서술된 아래의 역어들과는 다르더라도 나름의 기준대로 제각각 구별되는 번역어를 채택하여 독자의 혼란을 방지하나, 이런 데에 무지한 자가 번역을 했을 경우 이들 중 몇 개 이상을 동의어로 제멋대로 여기고는 '성'이나 '성채'로 통일해서 번역하는 바람에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태를 초래한다.[12] 즉, 다음의 일곱 개념은 동의어가 아니고, 문학적 수사를 위해 바꿔쓸 수 있는 어휘들이 원칙적으로는[13] 아니다.
대중매체에서 이렇게 다양한 성 구조를 잘 표현한 예로는 레젠다리움의 곤돌린이 있는데, 곤돌린의 몰락에서 확인할수 있다.
3.2.1. castle[편집]

군주가 거주하는 요새화된 저택을 의미한다.
군주(또는 영주)가 거주하면서 주변의 장원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방어시설 겸 군주의 주거시설이다. 보통은 성 내부의 안뜰에 어느 정도까지는 성에서 거주하며 노동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민간인의 거주구역을 갖추지만, 도시마냥 대규모의 인구 거주 능력을 갖추지는 않았다. 농노들은 성 주변의 들판에 갖추어진 장원에 거주했으며, 유사시에는 성에 주둔하는 영주의 가신들이 출격하여 외적을 요격하거나, 농노들을 성 안에 불러들이고 성문을 닫아 농성했다.
봉건 영주들은 문자 그대로 지역 군벌이므로, 성관은 문자 그대로 군벌 소굴이다. 처음에는 유력한 전사가 개인의 안전을 위해 대충 지어둔 요새화 시설이, 해당 전사가 군벌화 되면서 좀더 요란한 거점으로 성장하고, 겸사겸사 방어력도 올라가더니, 나중에는 전사가 지주화 되면서 거주 기능과 통치 기능도 강화되어 장원의 중심 건물이자 영주의 거처이자 동시에 자체적인 요새 노릇을 하는 복합 시설이 되었고 이게 바로 캐슬이다. 보통 성으로 퉁쳐서 번역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성관(城館)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봉건 영주들의 군벌로서의 권력이 쇠퇴하고 단순 지주화 되면서, 즉, 왕권 신장에 따른 왕토 확장과 중앙 집권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요새로써의 기능이 필요 없어졌고, 왕들 또한 귀족들이 군벌로 기능하는 것을 억제할 목적으로 일부러 벽을 허물게 하는 등, 요새로써의 기능이 상실되어가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봉건 귀족의 성이 되었다.
근세 이후로 넘어가면서 중세시대의 요새화에서 탈피하여 지금 전형적인 유럽식 궁전의 모습을 띠게 되었는데, 주로 기존의 성을 개축하거나 완전히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주거용 건물들은 기존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 캐슬이나 슐로스, 샤토라고 불리는 경우가 잦다. 전혀 관계 없는 지역에 새로 지은 경우에도 왕족이 살거나 소유한 주거용 건물이라는 이유로 해당 명칭을 갖게 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중세 이전에 사용되던 이 단어의 원래 뜻은 요새화된 귀족의 저택을 의미하던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프랑스의 경우 왕실에서 귀족들의 성관에서 "성"으로써의 기능을 강제로 철거하도록 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성"관"이 되었는데, 따라서 이렇게 요새 기능이 상실된 영주의 거처를 성관의 프랑스어 표현인 "샤토"로 퉁쳐 부르기도 한다.
3.2.2. keep[편집]


3.2.3. fortress[편집]

- 요새(영어: Fortress/Stronghold, 독일어: Festung, 불어: Place forte)
단독적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오로지 군사 목적으로 요충지에 세워진 독립적인 방어 시설을 의미한다.
성(castle)과 달리 군주의 주거 시설이나 민간인의 주거구역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보통은 기사단등의 군사집단이나 상비군이 주둔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거주시설을 제외하면 무기고와 마구간 등의 군사시설로 가득 차 있었다. 'fort, fortress'의 'fort-'는 [강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fortis'에서 온 말로 음악에서 쓰는 포르테(forte)와 어원을 같이 한다. 요새를 일컫는 다른 말로 'stronghold'(스트롱홀드)가 있다. 이는 라틴어 어근에서 기원된 'fortress'와 달리 순수 게르만 제어를 어원으로 한다. 영어에는 이런 식으로 같은 의미이면서 한 쪽은 라틴어 기원, 다른 쪽은 게르만어(즉, 영어 입장에서의 고유어) 기원인 단어들이 꽤 있다.
포트리스는 "단순히 내용물을 지키는" 용도가 아니라 적의 기동을 차단하는 방해물로써 기능한다. 16세기 이후로 서구권 요새의 대세가 된 성형 요새는 내부에 도시나 마을이 입주해있는 시타델로 기능한 사례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포트리스로 쓰인 경우가 더 많다. 유럽에서는 시타델로 쓰이는 경우가 꽤 있었지만[14] , 식민지에서는 성형 요새를 주로 포트리스로 사용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와 같이 순수히 적의 기동을 차단하는 축성물들을 진보(鎭堡)나 보루(堡壘)라고 불렀다. 보루는 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시설을 가리키는 단어로 영어단어 'Bastion'을 번역할 때도 자주 쓰인다. 얼핏 보기에는 산성이 포트리스와 비슷할 수 있으나, 산성은 기대되는 방어력은 포트리스인데 전술적 가치는 시타델에 가깝다. 이 시설은 원래 도시의 근원지가 있던 위치였던 경우가 많아 버로우의 특징까지 가지고 있다. 방어 능력 자체는 탁월해도 전략/전술적 기능으론 충분하지 않다.[15]
3.2.4. rampart[편집]

도성이나 성곽(城郭) 등 단독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다른 핵심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싸는 벽이다. 핵심이 되는 건축물은 램파트 안쪽 언덕 위에 있거나, 아예 램파트로 360도 보호된다. 램파트 사이에는 관문(Gateway)이 있어서 램파트를 부수지 못하는 적군은 이 관문으로 향하게 된다.
3.2.5. wall[편집]

- 방벽(영어 : Wall, 독일어 : Wall, 불어: Mur)
어떤 구역을 둘러싸는 형태가 아니라 선 형태로 세워진 성벽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경우도 성이라고 불렀으나 유럽에서는 '벽'(영어 : Wall, 독일어 : Wall, 불어: Mur)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여러 지역을 통과하며 길게 늘어선 방어용 구조물로써, 아주 간단하게 벽이다. 가장 원초적인 축성물 유형으로 자체적인 거점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문자 그대로 그냥 지나가지 말라고 지은 벽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장성(長城)이라고 부르며 기능도 완벽히 일치한다. 만리장성, 천리장성 등.
다만, 장성이 아니더라도 램퍼트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대한 규모의 벽을 두고 월이라고 하기도 한다. 도시를 둘러싼 방벽은 city wall(성곽, 성벽)이라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16] 이렇게 대규모의 방벽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도시는 walled city(성새도시, 성시)가 된다. 동양에서 "양양성을 함락시켰다", "평양성을 탈환했다" 식으로 도시 이름을 붙여서 '성'이라고 부를 때는 이 walled city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다.
여러모로 요새라기 보다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설치한 산맥(?) 같은 노릇을 하며, 아예 산맥에 지어서 산맥의 기동 방해 효과를 극대화할 목적으로 짓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만리장성과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월이다. 현대에도 마지노 선이나 대서양 방벽, 지크프리트 선 같은 현대화된 월이 지어진 바가 있다.
이런 시설은 보통 방어가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적이 지나가게 두면 심히 곤란한 영 좋지 않은 위치에 어쩔 수 없이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새라는 것은 적이 지나가지 못하게 짓는게 아니라 좋던 싫던 강제로 점령을 시도하게 만들어서 적의 기동을 차단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데, 벽은 적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에만 집중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드시 점령해야하는 시설이 아니므로, 궁극적으로는 적의 기동을 차단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결국 그냥 뚫고 지나가거나, 돌아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모든 축성물 중에서 가장 비싸고 비효율적인 유형이 장성이다. 하지만, 적이 지나가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이점을 얻을 수 있는 경우에는 그 무지막지한 비효율성을 감안해도 요긴해진다. 실제로 만리장성은 완전히 벽으로 세워지는 것이 명나라에 와서야 성사되었고, 사실상 국경 표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구간도 덕지덕지 붙어있던 장성임에도, "그 국경 표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약탈꾼들의 침입을 지연시켜, 지역 방어군을 소집할 시간을 벌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장성이 적의 기동까지 차단하리라 기대하고 축성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으로 이렇게 엄청난 거액을 삽질에 날려먹은 것이 그 악명 높은 마지노 선이었다. 물론, 독일군이 지나가지는 못하게 하는 것에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으나 전쟁 수행에는 도움이 전혀되지 않았다.[17]
따라서, 장성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적이 지나가는 속도를 늦춰 동원을 지연시키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국경 표시"라는 경제적/행정적 기능이 같이 존재해야 한다. 실제로 장성 형태의 월은 대부분 국경에 설치되어, 단순히 국경 밖의 외적이 국경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평시에는 통행세/무역세 등의 세금을 걷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무지막지한 규모와 건설 비용 상, 관세를 뜯고 불법 출입국을 차단할 용도로 특별히 짓는 경우면 몰라도, 순수히 군사적 목적을 두고 장성 규모의 거대 방벽이 설치된 경우는 전세계 역사적으로 극히 드물다.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거대 방벽의 대표격인 만리장성조차도 유목민 약탈꾼을 지연시키는 것 이상으로 불법 출입국자(...) 방지 같은 실용적인 기능이 있었다.
3.2.6. burgh[편집]

- 성새도시(영어: Burgh/Burh/Borough, 독일어: Burg, 불어: Bourg)
성벽 따위로 보호를 받는 주거지역를 칭하는 단어.
유럽은 전란이 잦아서 대규모 인구가 거주하던 곳은 필연적으로 일정 수준의 요새화를 갖추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성새도시다.[18] 그래서 행정구역의 명칭에도 많이 포함되어있는데, 유럽에서는 에딘버러(Edinburgh), 함부르크(Hamburg), 부르캉브레스(Bourg-en-Bresse) 등이 있으며, 영국에서는 오늘날에도 광역지자체의 하부로서 일부 존재한다. 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던 도시계급의 특권층들이 이후 이 단어에서 파생된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자본가 계급이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성(城)이라는 단어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 성이라는 단어는 본래 정착지를 의미하는데, 주요 정착지가 자연히 요새화되면서 어영부영 요새라는 뜻으로 혼용되게 된 것이다.(평양성, 국내성 등) 현대에는 위의 성관(Castle)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런 경우를 성새도시(城塞都市), 성시(城市)라고 칭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잔뜩 모인 정착지들은 당연히 "도시"로 발전하는데, 그 과정에서 영주의 성관이 발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요새화가 진행된다. 이런 "도시"들은 부유한 요충지에 생성되기 때문에 당연히 특권층으로 승급된 자유민, 곧 시민 세력의 거점으로 변모하며, 아무나 살 수 없는 유사 성관화 된다. 이렇게 버로우의 성벽 내부 주거지에 사는 특권 시민층을 프랑스어로 '성 안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이게 바로 '부르주아(bourgeois)'다.[19]
조선의 읍성은 버로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도시 발달에 따라 방어 시설로의 기능이 무력화되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초장에 도시의 부속물인 버로우와 달리 읍성은 본래 요새로써 고안되었으나 버러우같이 도시의 부속물이 되어버린 경우다. 이는 조선 시대의 읍들이 생긴 원인이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고 시장이 들어서서가 아니라 행정거점에 가까웠고, 방어체계도 피난처 겸 지역방어로서 산성에 의지하였던 탓이다. 공납을 비롯한 제도들을 바탕으로 유사 계획경제를 굴린 속칭 유교 원시 공산주의식 통치 하에서는 자유롭게 경영을 하는 시민 세력의 등장이 극단적으로 억압되었으므로, 당연히 읍의 도시화율도 높지 않았고, 사는 사람이 좀 있다 해도 목숨을 위협 받는 것을 각오해서라도 그곳에 남을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토지와 노동력의 가치가 높으므로 향촌에서 토지를 경영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결국 남아있을 이유가 마땅치 않으니 읍성의 기능 상실은 필연이었다. 게다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하도 오랫 동안 전란이 있다보니 주요 인구 밀집지가 아닌 나머지 지역들은 인구가 좀 많다 싶어도 죄다 산에 틀어박혀 중세 성관에 옹기종기 주민들이 모여 사는 것 같이 살고 있었다.
3.2.7. citadel[편집]

성곽(rampart)으로 둘러싸인 성새도시(Burgh/Burh/Borough) 내부에 있으면서 별도의 성곽과 방어시설을 갖춘 요새화된 주거지역을 의미한다. 어원은 이탈리아어로 도시를 가리키는 città이다.[20] 고대, 중세 대도시의 지배자들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도시 안에 이런 시타델을 지어 놓고 직속 병력과 함께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도시의 방벽(wall) 내에서 방어 거점으로서 따로 요새화된 구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버러우의 방어 효과가 저하될 뿐만 아니라 시가지 규모에 맞추어 무한정 증축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자연히 선택과 집중이 요구되었고, 따라서 방어에만 집중한 부속 시설을 따로 설치해야만 했다. 이렇게 생겨난 부속 시설이 시타델이다.
또한, 원래 요새로 지었고 요새로써 기능하는 시설들도 나중에는 추가적인 요새화가 필요해지면서 도시의 시타델과 비슷한 시설을 추가로 마련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특정 시설에 특별히 부속 방어 시설로 덧붙는 요새화 시설을 시타델로 다 퉁쳐서 부르게 된다.
공성전이 벌어졌을 경우 당연히 최후의 저항 거점이 되며, 실제로 공성전 중 도시 성곽은 함락시켰는데 시타델을 함락시키지 못해 교착 상태에 빠지거나 구원이 도착하여 공성에 실패한 사례도 여럿 있다.[21] 그래서 시타델 자체를 저항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어학사전들에서는 "성채"(城砦)라고 번역하는데,[22] 시타델이 도시, 즉 시티의 부속시설이라는 뉘앙스를 못 살리기 때문에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23] "방어기능 상실"로 인해 추가된 시설이라는 점에서 동아시아 기준으로는 "산성"들이 시타델과 동일한 역할을 하지만, 도시 내부에 있지 않기 때문에 시타델과 일치하지는 않는다.[24] 시설물 내에 추가로 설치된 부속 방어 시설이란 점에서는 차라리 내성(內城)이 시타델과 비슷하다.
해당 도시가 자유도시가 아니라 군주가 거주하면서 통치하는 도시일 경우, 대부분은 군주의 거주 시설과 집무실을 성채 안에 (후술하듯 성채 안의 아성에) 마련했다. 그리고 이 시타델은 포격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유용성과 지위가 공고해졌고, 별 모양 형태의 시타델이 이때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비슷한 것을 굳이 찾자면 평양성의 사례가 있다. 평양성은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는데 외성 너머에 중성, 중성 너머에 내성이 있는 식이다. 이 때 중성+내성이 외성에 대하여 시타델이고, 내성이 외성+중성에 대하여 시타델이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의 관계도 시티와 시타델의 관계와 유사하다. 북한산성 자체는 한양도성과 별개의 성곽이지만 탕춘대성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25]
3.2.8. 어원과 기타 외국어 단어[편집]
영어 'castle'은 라틴어 'castrum'의 지소형(指小形, diminutive) 'castellum'이[26] 고대 북부 프랑스어 'castel'를 거쳐 후기 고대 영어 'castel'로 들어온 것이다. 'castrum'의 복수형 'castra'는 조금 더 일찍 들어와서 'ceaster'로 유입되고 영국 지명에 '-caster', '-chester' 등의 흔적을 남겼다. 이러한 기원은 스페인어 'alcazar', 'castillo',[27] 프랑스어 'château'와 마찬가지이다. 한편 영어에서는 어중의 'st'에서 [t]가 묵음이 되는 경우가 많기에[28] [ˈkæsl]이라고 읽게 되었다. 재미난 점은 프랑스어에서는 'château'도 그렇고 같은 상황에서 [s]를 묵음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29]
좀더 포괄적인 방어 시설들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Bulwark가 있다.
독일어로 성을 의미하는 '-burg'(부르크)는 중유럽의 여러 지명에도 남아있다. 예를 들어 잘츠부르크(Salzburg)는 소금 성이라는 뜻.[30] 이는 영어의 'borough'와도 동원어 관계에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edinburgh'의 '-burgh' 역시 기원이 같다.[31] 독일어에서 'castle'을 의미하는 단어는 'die Burg'(부르크), 'palace'(궁전)은 'Pfalz'(팔츠),[32] 'Schloss'(슐로스)로[33] 구분한다.
스페인어로는 alcazar라고 한다. 다른 성이나 요새를 뜻하는 alcazaba,[34] castillo란 단어에 비하면 세밀하게 순수한 군사용 목적 뿐만 아니라 왕들이 거주하는 왕궁이란 뜻을 내포하기도 하며, 실제로 꼭 어느 한쪽 용도로 굳혀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4. 분류[편집]
성이 지어지는 위치와 형태, 규모, 용도에 따라 크게는 산성, 평지성, 평산성으로 나뉘고,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진성, 장성, 보성, 행성, 폐성, 수영성, 병영성, 관문성, 포성, 고성으로 구분한다.
4.1. 위치[편집]
4.1.1. 산성[편집]

산성은 말 그대로 산에 지은 성을 말하며, 드물게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지은 성도 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벽을 빙 둘러 지어서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테뫼식(머리띠식)과 성 안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능성이를 따라 성벽을 지은 포곡식[35] 이 있다.
산이나 구릉에 짓는다는 특성상 성의 규모는 대부분 그렇게 크지 않으며, 삼국시대 국경선 지역에 설치된 산성들은 산성이라기보다는 거의 돈대 수준에 가까운 작은 산성도 보인다. 높은 지형에 위치하기에 감시와 방어가 유리하며, 산을 끼고 지은 성이기 때문에 공성병기의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있어 복잡한 방호시설을 하지 않아도 엄청난 방어성능을 보였으나, 산이 침공루트 그 자체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지라 시대가 갈수록 이런 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참고로 충청북도에는 여러 유명한 산성들이 산재해 있는데 이들을 《중부내륙 산성군》이란 명칭으로 묶여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하는 중이다.
4.1.2. 평지성[편집]
그러나 방어력 증강을 위한 투자에 비해서는 방어력이 크게 늘지 않으며, 적의 대형 공성병기가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주변이 완전히 평야인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평야 중에서도 고지대를 취하거나, 적어도 성벽 내부에 약간이라도 고지대를 포함시켜서 내성을 만들어놓는 일이 흔하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성벽이 뚫리더라도 일부 지역은 살아남아서 농성전을 계속할 수 있다.
한국의 평지성들은 대체로 읍성이며, 방어적인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시에 피란하여 농성할 별도의 산성을 갖춘 경우도 많았다. 한반도의 특성상 어딜 가든지 산은 꼭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사시 피란이 전제된 읍성들은 대체로 성벽의 높이도 그리 높지 않고 방어에 썩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4.1.3. 평산성[편집]
다만 이러려면 지형의 조건이 평지 옆에 험준한 산이 붙어있는 등 여러가지 조건이 딱 맞아야 하므로 평산성은 짓고 싶을때 마음대로 지을 수 없어 그 수가 적다. 그리고 제대로 짓지 않으면 평지성도 아니고 산성도 아닌 것이 양자의 약점을 고루 가진 망작이 되기 딱 좋다. 더구나 성 안에 살고 있는 인구수에 비해 성벽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실제로 평산성이었던 읍성들이나 한양과 개성에서 성벽이 있는 송악산, 용수산, 북한산, 남산 등의 산기슭을 본다면 민가가 하나도 없어 성벽 둘레에 비해 사람이 거주할 구역이 평지성보다 제한적이다. 당연히 성벽을 따라 배치해야할 병사들의 수도 외부의 지원군 등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자체적으로 방어하기 힘든, 불리한 구조다.
4.1.4. 지하[편집]
베트남 전쟁 당시에 베트민과 베트콩들이 건설한 구찌 터널이 이런 개념으로 지어졌는데, 비록 사람이 들어가기엔 대단히 비좁긴 하나, 내부에 작전회의실, 식량창고, 병사들용 침실에 사기 진작을 위한 간이 극장도 있는 등, 웬만한 것을 다 갖추고 있다.
현대의 일부 군사기지도 종종 이런 식으로 건설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상기한 마지노선이나, 스위스의 방공호 등인데, 입구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은 구찌 터널과는 달리, 못해도 수천 명에서 많게는 천만 명도 넘는 인구를 수용해야 하므로 내부가 훨씬 넓고 쾌적하게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방공호를 다른 용도로 많이 써먹는데 주로 서민들의 피서, 피한지로도 애용된다.
이런 요새는 주로 건축공학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건설되지만, 데린쿠유같이 고대에 지어진 지하 도시도 좀 있다. 이 경우는 화산암같이 파내기에 용이한 지형에 주로 건설되었으므로 건설 난이도는 다소 낮지만, 운영 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당대의 첨단 기술이 대거 동원되었다.
4.2. 재료[편집]
성의 재료에 따른 분류는 다음과 같다.[36]
- 목책성(木柵城): 목책, 책성, 성책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해 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 형태의 성이다. 상대적으로 싼 값으로 쉽고 빠르게 세울 수 있지만 내구성은 낮으며, 특히 재질의 특성상 불에 약하다.[37] 상위 호환형으로 목책도니성(木柵途泥城)이 있는데, 이것은 한옥의 벽을 만드는 것처럼 나무로 골조를 만든 뒤, 흙을 덧씌워 토벽을 만드는 것으로 일반 목책보다는 품이 더 들지만 다른 성에 비해 훨씬 싼 값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으면서도 일반 목책보다 튼튼하다. 목책도니성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 보루 건설에 많이 사용했으며, 이외에 여말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전라도 해안지대에 많이 건설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역시 많이 사용했고, 이에 유성룡은 <설책지법>에서 여말선초기의 목책도니성과 왜군의 임시진지를 기초로 하여 대포를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목책도니성을 제시한 바 있다. 전축성, 석성이 일반화된 뒤에도 싸고 빠르게 짓는 게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많이 사용되었다.
- 목성(木城): 느릅나무, 버드나무, 탱자나무 등 빨리 자라거나 가시가 있는 나무들을 최대한 일렬로 빽빽하게 심어 서로 엉켜 자라게 해 천연 방어벽으로 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북방의 요, 금의 압력 때문에 자유로운 성곽 건설이 힘들었던 남송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 토성(土城): 흙을 쌓아 만든 성. 토루(土壘)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 황하 유역에서는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지형 자체가 널리고 널린 게 고운 진흙인 데다 흙에 칼슘성분이 풍부해 토성임에도 매우 단단했기 때문이다. 목책과 같이 설치하여 방어력을 키우기도 했다. 고대에는 흙을 정교하고 일정한 두께로 깐 뒤 다지기를 반복해 만드는 판축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이 방법은 튼튼하지만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들어 적당히 쌓아올려 만드는 성토법, 완만한 형태의 지형을 급경사로 깎아서 토성의 효과를 내는 삭토법, 돌로 일부 석축을 쌓은 뒤 그 위에 토성을 쌓거나 아예 처음부터 흙과 돌을 섞어서 쌓는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38] 이 있다.
- 석성(石城): 석축성(石築城)이라고도 한다. 이름 그대로 돌을 쌓아 만든 성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한 한국에서 특히 발달한 성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쌓은 편축성(片築城)과 성의 내외벽면만 돌로 쌓고 사이에 흙을 채워넣은 협축성도 석성에 들어간다.
- 전축성(塼築城): 전돌(벽돌)을 사용해 쌓은 성. 벽돌을 만들기 좋은 고운 흙이 풍부한 중국, 그리고 메소포타미아나 캅카스, 중앙아시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한국의 경우 벽돌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여건이 되지 않아 엄밀히 말해 순수한 전축성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돌과 흙을 벽돌과 같이 사용한 혼축성(混築城)이 대부분이다. 물론 벽돌성은 규격이 일정하여 보기도 좋고 섬세한 구조물의 건설이 가능하며, 접착력이 강해 포를 맞아도 피탄된 부분만 부서지는 장점이 있어 여러 차례 도입이 시도되었다. 국내에서도 드물지만 순수한 전축성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토질적인 이유로 좋은 벽돌 만들기가 어려웠으며 기후적으로도 습기가 많아 벽돌이 흙과 잘 붙지 못해 내구성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좋은 석재가 풍부하고 가공기술이 잘 발달해 있어 한국에서는 전축성이 주류가 되지는 못하였다. 한국 건축 문서도 참조.
4.3. 역할[편집]
5. 구성 요소[편집]
- 교두보
- 내성 / 외성
- 땅굴
- 도개교
- 돈대
- 망루
- 미궁 / 미로
- 보루
- 비밀통로
- 성곽
- 성내
- 성문
- 성벽
- 성채 = 시타델
- 아성
- 옹성[39]
- 요새포 / 해안포
- 저항보
- 총안구
- 치
- 탑
- 포루
- 포탑 (터릿)
- 해자 / 참호
- 호딩
아래부터는 주로 현대의 요새에만 존재하는 구성 요소이다.
6. 역사[편집]
6.1. 방어 시설로서[편집]
6.1.1. 기원[편집]
성이 언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석기 혁명 이후 가족 단위의 원시 집단이 대형화 되면서 하나의 부락을 이루었을 때, 부락의 외곽에 설치했던 시설이 성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최초의 요새는 사람이 넘어오지 못하는 수준으로 담을 높게 쌓은 형태였겠지만, 넘어오려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도록 담 위에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식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되어 발굴이 끝나 보고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는 성곽도시(城郭都市)는 팔레스타인의 예리코로 BC 8000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밖에도 문명의 4대 발상지에서 모두 성의 구조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이스라엘의 예리코 성이 축조된 시기 이전에 성이라는 방어 시설의 개념이 존재했고, 이후, 세계 각 지역으로 서서히 전파되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문명으로 전파된 것으로 파악된다.
6.1.2. 고대[편집]
춘추전국시대 및 삼국시대 시기 중국의 경우, 성을 쌓는데 벽돌을 이용하지 않았다.[40] 당대의 성벽을 쌓는 공법은 일단 맨 땅에 흙반죽을 쌓고 그 위에 건초와 흙을 섞은 건초 반죽을 쌓은 뒤 다시 흙반죽을 쌓는 방식을 반복했다. 중간중간에 건초 반죽을 넣는 이유는 건초가 흙을 붙잡아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41] 그리고 한 번 쌓을 때마다 최대한 다져서(넓은 판자를 이용해 다졌기 때문에 판축공법이라고 한다) 성벽의 내구도를 높였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만리장성이 시작된 부분의 유적. 전술한 방법으로 성벽을 쌓았다. 만리장성에서 벽돌로 만들어진 부분은 명나라 이후 시기에 지은 것이고 삼국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부분은 이 공법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중국 이외의 동북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부여, 고구려 등의 한국 왕조들이 이런 식으로 성을 쌓았다.
또한 중국의 토성 벽은 모래와 자갈을 섞어 올린 토벽에 벽돌을 쌓아 포격에 대비하기도 했다. 탄도체가 벽돌을 때려도 충격이 흡수되고 설사 벽돌이 무너져도 토벽이 계속 성벽의 역할을 하는, 공격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열받는 구조. 거기에 공성시작과 함께 성위의 병력을 보호할 임시 요새가 건설되어버리기도 한다.
백제나 마한 등의 한반도 남부 지역의 왕조의 경우는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흙을 높다랗게 쌓아서 언덕을 쌓은 다음에 그 위에 목책을 두르는 방식으로 성벽을 조성했다. 이런 방식은 냉병기를 이용한 전쟁 방식밖에 없던 고대에는 상당히 유용한 축성기술이었다. 다만 모두가 흙과 목책만 쓴 것은 아니었고, 신라 삼년산성 같은 예외도 있었다.

고대 중동권 지역에서는 주로 벽돌로 성벽을 쌓았다. 예로부터 건축물 건축에 벽돌이나 적당한 크기로 깎은 돌을 이용하는 방식이 발달했기 때문이며[42] , 따라서 성벽같은 군사 시설도 이런 방식으로 자주 짓곤 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문명은 상당히 인상적인 성벽을 구축했다.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인 바빌론의 성벽 자체는 벽돌을 쌓아서 지은 전형적인 중동 스타일 성벽이지만, 겉을 파란색으로 칠한 도자기 타일로 마감처리하여 미관상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한다. 다만 기원전이던 이 시기에는 아직 조적[43] 기술이 없던 시절이라 무식하게 바위를 잘라서 벽돌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피라미드에 사용된 벽돌은 그 크기가 사람보다 클 정도로 어마어마한데 산이나 바위를 잘라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크기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아직 방어용 요새와 통치자의 관저 역할을 겸하는 성관은 등장하지 않았던 때다. 그런 건물의 개념은 중세 중기 이후에나 등장했고, 당시에는 유력자가 사는 곳은 경비 인력을 더 늘리는 정도에서 끝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보다는 평시 거주지로부터 위난시 대피할 피신용 요새 개념으로 시작된 곳이 많았고,[44] 좀 더 발달하여 거주지 자체를 둘러싼 성읍을 구축하였다.
6.1.3. 중세 초기[편집]

중세 초기 성벽 형태인 모트 & 베일리.
유럽의 경우 5세기~11세기까지는 야만족의 침입이 일상적이고 인구도 부족하고 중앙에서 갖춘 방비 체제도 빈약해서 각 지역에서 각기 알아서 침략을 막아야 했던 특성 상 상당히 급조된 형태의 성이 발달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기의 성은 성터 주위에 해자를 파고 그 파낸 흙을 쌓아올려 원추형의 언덕을 구축한 후 그 정상에 목조로 탑상의 건물인 킵(아성)을 세우거나 아니면 대지에 접속시켜 목책이나 해자를 둘러치는 식의 간단한 것이었다.
이 형식을 모트 앤드 베일리(Motte and Bailey) 형식이라고 하는데, 모트는 해자와 언덕을 포함한 영역이고 베일리는 위 그림에서 보이는 언덕 아래 방벽 안쪽의 공간이다.[45] 언덕 위의 킵 아래에 대장간이나 기타 부속시설들을 유치함으로써 전투 지속력을 키운 것이다. 노르만족의 축성방식으로 노르망디와 앙주에서부터 시작해서 브리튼 섬과 프랑스 전 지역, 신성로마제국 등지로 퍼져나갔다. 윈저 성도 원래 이 양식의 성이었으며, 성 중앙의 원기둥형 구조물이 이 형식이었던 시절의 잔재다.
이 형식은 11세기 무렵까지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1세기에는 킵을 석조로 만든 예도 나타났고, 동시에 견고한 성벽을 둘러쌓는 형식도 발달하였다.
서유럽에서 보이는 초기의 킵은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평면의 건물이며, 거기에는 우물, 그레이트 홀과 영주의 가족들과 하인들이 거주하는 방, 창고 기타 장기간 농성에 필요한 모든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예배당도 있었다. 벽은 매우 두껍고 모서리에는 커다란 우탑이 붙어, 높이는 2층 내지 4층으로 되어 있다. 입구는 통상 2층에 설치되어 걸쳤다 떼었다 하는 사다리로 출입한다.
이런 사각형 킵은 여러 방을 배치하기에는 편리하나 반면 공성추의 공격에는 약했다. 한쪽 벽면에서 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 다른 벽에서 측면 반격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점을 제거하기 위하여 킵의 평면을 원형이나 다각형으로 하게 된 것은 제3차 십자군 원정 이후의 일이다. 서유럽에 동방이 영향을 준 것들 중 하나이다.
6.1.4. 중세 성기 및 후기[편집]
수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의 축성술을 알게 된 서유럽의 기사들의 체험은 12세기 말엽부터 본국의 축성술에 반영되었다.
12세기까지는 기존의 모트 앤 베일리에서 구조적으로 큰 발전은 없었다. 해자(Moat) 바로 안쪽의 장벽(Curtain wall)과 킵이 돌로 축조된 수준. 하지만 야만족의 침입이 잦아들어 상대적으로 평화로워지고, 인구가 늘고 법이 발전해 행정 역량이 증대되어 더 크고 정교한 건축이 가능해졌다. 대신 영주들 간의 내전이 상시화되어 공성 위주의 전투가 잦아지자, 단순히 구조물이 아닌 구조면에서도 12~14세기를 걸치며 급격한 발전을 한다.
성벽은 요소요소가 탑으로 강화되고, 그들 정상부에는 오목하면서 불록한 흉벽 또는 성가퀴가 설치되었다. 침입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회랑식 주랑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마시쿨리라고 불리는 투석구가 마련되었다. 그러한 성벽에 싸인 성곽 속에서 가장 초점이 되는 건물은 킵이며 그것은 공방전에서 최후의 거점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가장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원형과 다각형 킵의 예로는 프랑스의 세자르 · 에탐프 · 프로방, 영국의 코니스보로 등이 있다. 한편 지중해 동쪽에는 11∼12세기를 통하여 비잔틴의 전통이 계속되어 1099년 예루살렘 함락 후는 십자군에 의하여 그러한 동방의 축성술을 살려 안티오키아에서 아카바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견고한 성이 여러 개 구축되었다. 12세기의 사오누, 마르가트, 그리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 등의 성채가 그 예다.
북프랑스의 가야르 성은 장대한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이러한 형의 성채건축은 13세기를 통하여 더욱더 개량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1917년에 파괴된 쿠시성도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대지에 세운 걸작이며 그 킵은 지름 31.5 m의 원통형으로 벽의 두께가 기부에서 약 7.5 m나 되었다. 독일에는 바위산 위에 세운 팔켄베르크성이 있으며, 영국의 예로는 런던 탑 · 윈저성 · 에든버러성 등을 들 수 있다.
13~14세기를 걸치며 베일리와 킵으로 나눠져 있던 구조가 해체되고, 해자 바로 안쪽에 기존의 킵의 역할을 한 탑들이 세워지고, 베일리는 오히려 그 킵들의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구조로 변한다. 베일리에 오두막을 세워 분담했던 주방, 마구간 등의 건물들도 킵 안의 건물로 재구성된다. 이런 13~14세기 축성술의 대표 건물로는 보디암 성 등이 있으며, 프랑스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지어지고 있는 중세성으로 유명한 귀델롱 성도 13세기의 양식을 따른다. 실질적으로 '중세 성' 하면 제일 전형적으로 연상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시대와 몽골 제국 및 왜구의 침입 등을 거치면서, 동북아시아에서도 성의 건축 방식에 대대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과거 삼국시대(중국)[46] 까지만 해도 토성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후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투석기같이 성을 직접 무너뜨릴 수 있는 공성무기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토성에 돌이나 벽돌로 보강하거나, 처음부터 석성을 짓는 건축 기술이 등장했다. 특히 동북아시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대포를 주요 무기로 사용한 지역인만큼, 튼튼한 성을 지을 필요성이 매우 컸는데, 그래서 서양에서는 근대 시기에 가서야 성형 요새를 짓는데 사용된 경사진 벽을 이용하는 방식이, 동양에서는 이미 15세기부터 조금씩 도입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는 단단한 화강암이 많아서 주로 돌로 성벽을 쌓았지만, 중국은 건축자재로 쓸 석재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주로 흙을 빚어서 구워만든 벽돌이 주로 애용되었다. 동북아시아 일대는 흙에 칼슘 성분이 많아서 이것으로 무언가를 만들면 굉장히 튼튼해지는 데다, 특히 중국은 이런 벽돌을 만드는 기술이 동북아시아 최고 수준이어서, 성 뿐만 아니라 웬만한 건축물을 모두 이것으로 지었다.
동북아시아는 오랜 옛날부터 중압집권화가 철저하게 진행됐고, 그런만큼 군주를 제외한 유력자의 거처를 방어할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대신, 국경 지대를 포함해 군사적 요충지의 방어에 신경을 쓸 여유가 유럽에 비해 많았다. 그래서 동양은 예로부터 도시나 마을, 군사거점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wall)이 더 중시되었고, 자금성을 제외하면 군주의 거처가 될 성관(castle)이나 시타델(citadel)의 발전은 다소 미미했다.[47] 내부의 반란만 조심하고 외적의 침입만 막는다면 딱히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요소가 없는지라, 굳이 군주의 궁궐을 요새화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자금성이나 당나라 시대의 장안성 내성조차도 역할자체는 성관 역할이지만 내부에서 장기간 농성할 것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건 아니라서, 수도의 외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렀으면 반란군을 상대하는게 아닌 이상, 그 안에서 농성한 게 아니라 그냥 수도를 버리고 영내의 다른 지역으로 달아나버렸다. 남송이나 남명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 물론, 삼국시대(중국)의 군벌이었던 공손찬의 역경루나 명나라, 청나라 시기의 자금성처럼 서양의 성관과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는 거처를 지은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48][49] , 이마저도 나라가 공중분해된 전란기에나 잠시 등장했을 뿐이고,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하고 버려졌다.[50] 아무리 나라 전체가 뿔뿔이 갈라진 난세에도 각 세력이 내부적으로는 중앙집권체제를 잘 갖추었기 때문에, 역시 군주의 거처를 요새화할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관계로 등장한 것이 관문인데, 그 자체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축성술의 발달과 함께 성문 자체의 방어력을 높이는 연구에 신경을 쓰다보니, 성문이 요새화되는 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관문 내에서 직접 농성이 가능할 정도로, 그 자체가 서양의 포트리스(fortress) 역할을 한 것인데, 지역 전체의 방어보다는 군주나 공화정부의 수반, 기사단의 단장같은 수뇌부의 생존에 더 중점을 두어서 성관(castle)의 요새화에 집중하고 성벽은 시간끌기용으로만 썼던 서양과의 차이가 이것이다.
6.1.5. 화포의 등장과 성형 요새[편집]

대형 화약병기가 보편화된 시점부터 그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하는 듯했다. 그 전에도 투석기로 성을 좀 두드려보긴 했었지만 제대로 축조한 성은 외벽의 높이가 외벽의 두께보다 높고 제법 튼튼해서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는데, 화약의 힘으로 보다 무거운 돌이나 쇳덩이를 날려대기 시작하면서 외벽이 쉽게 무너져버리는 구시대의 성은 힘을 못쓰게 된다. 1453년에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성벽으로 꼽히는 콘스탄티노플 3중 성벽이 오스만 제국의 거대 대포의 포격으로 함락된 사건을 패러다임 전환 시점으로 꼽는다.[51]
이탈리아 전쟁에서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자 이탈리아 축성 기술이 정점에 이르렀는데 이런 이탈리아식 성형요새가 등장해 성곽건축의 획을 그었다. 사실 성형 요새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온것으로 프랑스의 보방은 그것을 개량한것이다.
프랑스의 천재 공학자 보방(Vauban)이 설계한 공격 거점으로써의 성곽으로 발전하면서 공격자들의 머리를 더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수직에 가깝게 쌓아 단순히 공격자들이 쉽게 올라오지 못하게 하던 구식 성벽 대신 약 60도 정도의 경사를 통해 공성포의 직격에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설계와, 계산된 각도의 성가퀴를 이용해 성 내부의 대형 요새 포로 적의 공격이나 참호를 분쇄할 수 있음은 물론 내부에 주둔한 병력을 활용해 적의 병참선을 공격할 수 있는 형태의 거점으로 변신한다. 이러한 형태의 거점으로서의 성은, 제1차 세계 대전까지도 유효한 방어 거점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형 요새도 결국 곡사포와 고폭탄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다.
대포의 발전에 대비한 이러한 형태의 축성술은 유럽에서 주로 나타났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화약 무기의 발달이 다소 정체되어 이러한 특징적인 모습의 성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이후 열강 시대에는 이미 근대로 온전히 넘어갔기에 이전까지 쓰이던 성과는 전혀 다른 콘크리트 요새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특정 양식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을 뿐이지 대포에 대한 대비는 이것저것 많이 나타났고, 조선의 수원 화성은 그러한 것들의 도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고 평가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바 있다. 예외로, 예로부터 유럽이나 중동과의 교류가 잦았던 동남아시아에서는 일찌감치 성형 요새의 건축 방식이 도입되었는데, 19세기에 오늘날의 호치민 시인 사이공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베트남의 사이공 성이 이 방식으로 지어졌다.
근세 열강이 팽창함에 따라 군대를 파병하고 그 지역에서 군사력 우세를 유지하기 위한 요새들이 세계 각지에 건설되었다. 도시를 보호하는 것도 아니고, 권력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 전투병만을 가득 집어넣은 형태의 성이다.
6.1.6. 근대[편집]

철근 콘크리트라는 무식한 자재가 나오면서 높은 수준의 방어력을 추구하는 거점을 건설하게 된다. 이 개념의 극단이 유명한 마지노선과 대서양 방벽 이외에도 콘크리트 전함이라고 불리는 드럼 요새나 무적의 요새라고도 불렸던 동물원 대공포탑 등 극단적인 방어용 시설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런 거점들을 정상적으로 해치우는 데는 엄청난 희생이 필요해졌고, 이걸 때려부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도 동원된다. 전략 개념에서야 우회해서 뒤통수쳐버리면 되지만, 당장 박살내야 하는 전술 수준에서는 피를 얼마나 흘려야 할 지 모르는 상황.
다만 마지노선과 대서양 방벽, 드럼 요새는 전부 돌파되었는데, 그건 바로 기동력의 혁신적인 증가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말이나 차량같이 병사의 기동력을 올려주는 수단이 널리 보급되지 않아서 도보가 기본적인 이동 수단이었다.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에 요새 같은 시설을 건설하면 공세를 펼치는 측에서는 우회에 막대한 자원과 시간이 낭비되므로 피를 흘려가면서라도 점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량의 대량 보급과 선박, 항공기의 발전 등으로 공세 측의 기동력이 늘어나면서 '씁... 점령 못하면 돌아가면 되지'라는 식으로 요새를 우회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방어측도 바보는 아니라서 우회를 막으려고 마지노선의 경우 160억 프랑을 들여서 750㎞를 커버했고, 대서양 방벽은 프랑스 남부 지방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부까지 커버하는 무려 3,860km 길이의 요새를 구축했지만.... 마지노선은 제대로 된 전투조차 치르지 못했고, 대서양 방벽은 연합군을 노르망디에 2달이나 묶어두는 등 어느정도 역할을 하긴 했지만 길이가 너무 긴 탓에 중간중간에 취약지점이 너무 많아 결국 돌파당하고 말았다. 드럼요새의 경우 마닐라 해안선을 끝까지 돌파당하지 않음으로써 밥값을 하긴 했지만 적들이 육로로 우회해서 들어와 마닐라가 점령당하므로써 존재의의를 상실했고 이어 일본군이 포격까지 퍼붓자 주둔군이 그냥 스스로 철수했다. 이후 일본군이 점령하고 써먹긴 하지만 미군은 기발한 방법으로 이를 돌파해내었다. 문서 참조.
동물원 대공포탑 같은 요새는 끝내 돌파당하지는 않았다. 벽 두께가 무려 2.4m, 천장 두께가 1.5m였던 데다가 전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었기고 식수도 충분했기에 사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도 결국 마지막에는 포위당한 상태에서 항복하였고 전황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한편 일반적인 야전에서도 기관총과 포병 화력의 확대로 방어 진지를 구축할 필요가 생겼지만 땅 위로 뭘 세워서는 단기간에 유의미한 방호력을 제공하기 어려워져 땅 밑으로 파는 방법을 택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참호의 등장이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인 것을 '성/요새'로 부르기 때문에 참호와 같은 간이 방어시설은 '성/요새'에 포함시키지 않으나, 참호전과 같이 특수한 전장에서는 수십 km에 달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되기도 하였다.
6.1.7. 현대[편집]
핵무기의 등장으로 강대국 사이의 전면전이 어려워진 현대에는 전투의 양상이 정치, 외교에 긴밀하게 엮여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졌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유형의 요새가 등장했다.
우선 더욱 강력해진 공군과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지하 깊숙한 곳에 견고하게 갱도와 격납고, 지하기지 등이 등장했다. 특히 북한처럼 압도적인 공군 전력을 보유한 상대를 적으로 상정한 경우엔 이와 같은 시설을 무수히 지어 전국토 요새화를 이루어 놓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하자 마자 순식간에 무력화되는 걸 피할 수 없다. 강대국들도 나름대로 전국토의 요새화는 아니더라도 핵전쟁시 군과 관의 수뇌부들을 보호하거나 반격용 핵무기를 숨겨놓는 시설을 준비해 놓는다. 이들의 지하기지는 북한 따위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방어력을 자랑한다.[54]
또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은 건물이 대중화되면서 시가전의 난이도가 무지막지하게 상승했다.[55] 선진국들은 따로 요새를 준비하지 않아도 전국에 막강한 요새가 즐비한 셈이 되었다.[56]
항공, 포병, 생화학, 벙커버스터, 핵무기 등의 파훼법이 많아져서 전통적인 성곽형 요새들의 위상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상 병력의 기동력을 확실하게 차단할 수있는 물리적인 방어, 방해 건축물인 만큼 이전 시대의 성곽형 요새들도 현대전에 맞춰서 변화해가며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군대, 특히 기갑전력의 기동력이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빨라졌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대전차방호벽은 분쟁지역에서 요긴하기 쓰인다. 대표적인 예시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바레브 라인이며 대한민국 국군도 기계화 전력이 북한보다 열세였던 1970년대말에 서울 북방에 구식 성채처럼 성벽과 성문을 갖춘 '수도권 방벽'이라는 성벽을 쌓기도 했다.
6.2. 방어 목적 이외의 발전[편집]
6.2.1. 행정 및 권력의 상징[편집]
고대로부터 성곽이 둘러쳐진 곳은 어떠한 형태로든 행정체계가 잡힌 곳임을 의미했다. 성이라는 건축물 자체가 보통 노동력을 동원해서는 지을 수 없는 것인 만큼 존재 자체로서 노동력을 체계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집단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행정체계라는 것이 반드시 합법적인 집단이 집행하는 것을 전제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도 후삼국시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각지에서 호족 또는 도적들이 성을 짓고 해당 지역의 우두머리임을 자처했다. 대부분의 호족들과 도적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관직을 인정받지 못한 비인가 집단들이었다. 물론 그 안의 병력들도 모두 개인이 소집한 사병이었다. 다만 이 경우는 동원할 수 있는 자본의 한계 및 기타 애로사항때문에 다소 조잡했던 것이 현실이며, 대도시나 군주의 처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소재한 마을에 세워진 성들은 당연히도 훨씬 튼튼하게 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후삼국시대 호족들의 성은 워낙 급조한 성이 많다보니 토성으로 지어진 경우도 꽤 있었지만, 당대의 주요 국가인 태봉, 후백제, 고려에서 지은 군사적 목적의 성은 석성이나 혼축성[58] 인 경우가 많았는데, 군소 호족과 주요 국가의 조정이 투사할 수 있는 경제력과 행정력에 넘사벽급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과 인도 아대륙의 경우는 영주의 거소로 쓰이면서 해당 지역의 통치 기반이 되었다. 영주의 성에서는 각종 판결이 이루어지곤 했으며, 이러한 면에서는 사법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59] 당연히 이들 지역에서도 상술한 것처럼 영주의 세력의 차이에 따라 성의 규모가 달라졌는데, 공작이나 후작, 백작 등 영역제후나 왕 정도의 대영주라면 성 자체가 매우 으리으리하거나 난공불락으로 불릴 정도로 공략이 어려웠던 경우가 대부분이다.[60] 물론 하급귀족이라고 하여도 보유한 성과 그 세력이 절대 무시할 수만은 없었는데, 성주나 남작, 자작, (소)백작[61] 따위의 칭호를 자칭하였던 여러 하급 영주들이 도처에 널린 성을 중심으로 영역을 형성하였다. 특히 10~11세기 동안 프랑스에서는 전역에서 성을 축조하거나 성을 장악한 신흥 영주들이 귀족 집단에 합류하였는데, 사학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성주층"이라 일컫고 그 체제를 "성주령"이라고 부른다. 북프랑스에서는 이들이 금방 영역제후와 군주의 봉신이 되거나 아예 그들이 임명하여 탄생한 반면 남프랑스의 경우 기존 대영주인 툴루즈 백작이나 아키텐 공작 같은 이들의 세력이 크게 퇴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유사하게 독일어권에서도 성백작(Burggraf)이나 자유영주(Freiherr), 영주(Herr) 등 수많은 군소영주들이 성을 중심으로 통치하였다.
또 다른 요새화한 거주지이자 봉건제 사회의 구성원인 "도시"도 이러한 점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도시는 주교좌 교회의 거소로서 교구 중심지였으므로 고대 말부터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중세 초에도 군주들이 교회에 의지하는 경향이 컸고, 영주들도 후원자나 보호자 노릇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동시에 도움을 받았다.
6.2.2. 도시로의 발전[편집]
고대 문명권 이후로 수많은 민족의 번성과 폐망, 전쟁등으로 성곽도시(城郭都市) 및 성채의 형태로 더욱 견고하게 발전하여 중세 유럽시대에 절정을 맞이한다. 서양에서는 봉건시대에 장원을 구분짓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옛날 성의 이미지로 이미지가 고정된 한국의 성과는 달리, 지금도 중화권에서는 사람들이 몰려사는 도시라는 의미다. 중국어로 도시를 '城市'라고 한다.[63] 조선시대의 한성(漢城)은 성벽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벽을 포함해서 그 안에 있는 도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원 화성(華城)도 마찬가지. 이런 성들의 성벽은 방어용이면서 동시에 도시의 구획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 공통적으로 17세기까지만 해도 나라를 불문하고 대도시, 권력의 상징이였다. 하나를 지으려고 해도 재료가 많이 들고 인부도 많이 필요하고 비용도 자연스레 많아지므로, 성벽의 건축이 웬만한 대형 건물 한두채 짓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자연스레 시골 읍내보다는 권력자가 거주하는 지역이나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짓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 도시는 특권적 주거지였고, 모름지기 도시라면 성벽으로 보호받는 공간이었다. 당연히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장원의 농노와는 달리 법적으로 더 많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민으로 간주되었다. 시민들은 중세 초에는 명목상 주교를 도시영주로 삼았다가 서약공동체(코뮌)를 결성하고 실력행사를 하거나 군주와 제휴하여 특허장을 받고 도시법과 시의회를 바탕으로 자치를 하는 자유도시로 변모하였다.
원래는 도시민을 뜻하였다가 자본가 계급을 가리키는 말로 변한 "부르주아"(Bourgeois)라는 단어도 그 어원은 "성(Bourg) 내부에 사는 사람"이다. 성도 건축물이니만큼 유지·보수 비용이 들어가는 데다가, 공간도 그리 넓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성 내부에서 거주하게 되면 당연히 유지 비용을 세금으로 거두곤 했는데, 이게 일반 서민들이 부담하기에는 큰 데다가 기본적으로 이런데는 땅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결국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일반 백성들은 성 밖에서 살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성 내부에는 상공업 종사자, 귀족 같은 소위 '돈 좀 만지는 사람'만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성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 = 재력 있는 사람 = 부르주아'가 된 것이다. 지금은 성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재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만 남았다.
일본의 죠카마치(城下町) 거주자들의 경우도 어떻게 보면 부르주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가령, 일본 전근대 사회에서 상인들은 마을 사람이라는 뜻의 쵸닌(町人)이라고 불렸다. 일본 귀족들은 다른 귀족들처럼 도시에 있는 하기성과는 별도로 산 정상에 독립된 산성을 설치하여, 여기에 다시 혼마루와 니노마루 등을 반복하여 외적만이 아니라 내적들[64] 로부터도 자신들을 보호하였다.
반면, 한국이나 중국처럼 중앙집권제의 역사가 깊고 지방통제를 위한 행정체계가 제대로 자리 잡힌 경우는 봉건 사회와 달리 도시는 특권적 주거지가 아닌 행정의 하위 단위에 불과했다. 그런 관계로, 유럽과는 다르게 꼭 대도시가 아니더라도 읍성이라고 하여, 군사적 요충지나 행정 중심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도 성벽이 둘러쳐진 경우가 많아서, 웬만한 경우에는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 안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공성전이 발생했을 때 유럽의 경우는 병사나 가신들 위주의 전투원들 위주로 성 안에서 농성하게 되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는 비전투원들도 입성해 함께 농성하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65]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들에게'란 에세이에서 이러한 차이를 흥미로운 관점으로 보고 있다.
6.2.3. 개인 거주지로서[편집]
주로 일부 귀족이나 왕족들의 취미나 거주 목적으로서 일종의 저택이나 별장으로 지어졌다. 한 예로 영국의 국왕 조지 4세는 브라이튼에 로열 파빌리온이라는 별궁을 지었는데 그 디자인이 그야말로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사의 궁전 형상이어서 당대에는 많은 빈축을 샀다. 이런 사례로 유명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성을 재현해보고 싶어서 지었다고 한다. 물론 이게 엄청난 재정낭비었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루트비히 2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에 빡친 의회와 국민들에 의해 폐위되고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의 말로도 좋지 않았다.
이는 당시에 불어닥친 낭만주의 열풍에 의한 것으로, 이 시기부터 성이 부유층의 저택이나 별장으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성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진 20세기에 지어진 성도 있었는가 하면 성이 발달하지 않은 북아메리카에 지어진 성도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허스트 캐슬이 대표적인데, 문제는 이게 영국 웨일스에 있는 800년된 수도원을 부숴서 지은 것이라서 문화재 훼손이라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67]
살기에는 썩 편한 편은 아니다. 겨울에는 무진장 추운 데다가, 편의시설이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 옛날 건축물들인 만큼 단열이나 습기배출이 잘 되지 않아 겨울엔 엄청 춥다. 사실 진짜 석조로 지은 오리지널 중세 성은 여름에도 써늘하다. 그래도 프랑스[68] 나 이탈리아는 애초부터 계절 걱정할 필요 없는 지중해성 기후 지역이라 저런 문제가 덜하지만, 겨울에 특히 추운 지역에선 시대변화에 따라 더욱 감당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개/보수도 대부분 지역법상 쉽지 않아 내/외장재를 현대식으로 재시공할 수도 없으며 도심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생활스타일에서 주거용으론 사실 부족한 면이 많다.
6.2.4. 현대의 부동산 거래[편집]
오늘날에도 유럽에서 성은 주거용 저택으로서의 가치가 있어서 거래가 되긴 한다. 하지만 관리인원이 많이 필요해 유지비 폭탄을 맞는 데다[69] 시골에 있어서 교통까지 불편한 경우가 많아 대부분 생각만큼 고가에 거래되지는 않는다. 보통 돈 많은 사람들이 별장용으로 하나 구입하는 정도. 대개는 470만 유로 정도에서 시작해 드물게 정말 비싼건 5천만 유로 정도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영국 랭커셔에 있는 해자까지 딸린 써랜드 캐슬은 고작 375000 파운드(약 6억 5천만원)에 매물로 나와있었다. 위 링크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현재는 팔린 상태. 이건 좀 과하게 많이 싼 편이지만, 보통 저 정도 성이라도 수백만 유로를 넘어가지는 않는 편. 레이디 가가도 스코틀랜드에 자신의 소유로 된 성이 하나 있다. 그런데도 서구권의 부유층들에게 성이 인기있는 이유는 순전한 재력 과시가 목적이다. 그 자체의 가격은 싸도 유지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점 때문에, 그 스스로의 부를 과시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엘리자베스 2세가 살아생전 거주하던 버킹엄 궁전은 2015년에 수리했는데 수리 비용만 1억 5천만 파운드(약 2600억 원)가 들었다. 그래서 성에서 산다는 것이 출세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런 경향이 상류층들이 성을 선호하는 것을 부추기는 상황이다.[70]
다만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국보급 성이라면 이런 식으로 쉽게 거래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위 링크에 연결된 성도 겉보기에는 중세식 성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거의 파괴된 것을 19세기 후반에 중세시대 서유럽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고딕 리바이벌 양식으로 재건한 것이다. 잘보면 외벽이 너무 얇고 낮은 데다가, 성탑이 있었을 자리에 정원이 있는 등 요새로써 기능은 제거된 근대 건축물임을 알아볼 수 있다. 진짜로 중세 당시의 건축물이 온전히 남아서 문화적 가치가 막대한 성[71] 은 국가나 문화재 재단 차원에서 철저하게 관리한다.
6.3. 지역별 양상[편집]
높은 벽을 쌓아 침입을 방지한다는 원리는 동일하지만 그 형태와 목적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만리장성이나 천리장성 같이 국경 등에 긴 담을 쌓아 올리는 장성이 있고,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한 도시 외곽을 벽으로 둘러싸는 도시성곽, 유럽에 존재하는 권력자 거주용 성관(城館), 크라크 데 슈발리에 같은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견제하거나 방어할 용도로 지은 요새형 성 등. 같은 나라, 지역 내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쟁 양상의 변화에 따라 성의 형태는 제각기 다르다.
한국이나 중국 등지에서는 따로 권력자용 거주 공간을 성처럼 쌓아 올리기보다는 대도시 내에 궁궐을 짓고 담으로 구분 짓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사람이 모이고 교역하기 쉬운 대도시는 전체를 둘러싸는 성곽으로 방어하고, 길목에 전투용 요새성을 따로 두어 거점방어에 이용한 것. 따라서 차단/요격전에 성공하지 못하면, 대도시들은 꽤나 손쉽게 적의 손에 넘어갔다. 농경지 약탈은 어차피 막기 힘들고, 인명 보호에는 도성보다 피난용 요새가 나았다. 주요 거점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순수한 요새형 성도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대표적. 이런 요새형 성이 따로 있는 것이 바로 아시아권에서 성과 성관을 따로 생각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요새형 성엔 거주용 성관을 지어놓지도 않았고, 지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혼란기 중국이나 유럽은 조금 사정이 달라서, 옛 대도시들은 도시 외곽의 방어성이 필수적이었다. 큰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기보다 도시 단위로 공격받는 일이 잦은 경우, 도시성 자체의 방어 능력이 중시되었던 것.
중세의 유럽같이 짧은 전쟁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곳에서는 도시의 방어보다는 권력자 거주구를 중점 보호하는 형태의 성이 나타난다. 이쪽은 직업군인 간 전투로, 일반민 마을을 약탈하기보다는 권력자 목을 따고 구역 일대를 손에 넣는 형식의 전투가 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중국의 성은 평지성이 방어의 기본이다 보니 성벽을 매우 높게 짓고 다중 문 방식의 성문을 채택해 평지성이지만 높은 방어력을 보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성문이 기본적으로 작은 데다가 한두 개밖에 없고 '산노마루', '니노마루', '혼마루'라고 불리는 3중 성벽 구조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으며 침입해온 적군들을 언제나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내부 구조도 미로같이 만들어놓아 역사상에서도 손꼽히는 매우 높은 방어력을 자랑했다. 다만, 그 대가로 교통이나 거주 편의성 등 평시 도시로서의 성의 기능을 많이 포기했다.
아메리카에는 성이 발달하지 않았다. 성의 개념이 아메리카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가 이미 성이 쓸모없어진 시기와 겹쳤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대포에 맞아서 무너진 곳을 빨리 복구하기 위해서 목재로 벽을 두른 요새가 대세가 되어서 돌로 지은 성 자체가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성을 단순히 저택으로 쓴다고 해도 그런 곳에 거주할 귀족이 없었다.[72] 부유층의 거주지 목적으로 지어진 성은 20세기에나 미국 등지에서 생겨났고[73] , 그 이전까지는 그런 목적으로는 성이 발달하지 않았다.
중국의 성은 많은 인구 탓에 트럭 2대가 다녀도 될 정도로 넓은 성채를 자랑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경우 오랫동안 통일국가를 유지하다 보니 다수의 병력을 운영하면서 성곽방어도 그에 맞게 변형된 결과라 볼 수 있다.
한편 센고쿠 시대 일본은 다이묘들이 오랜 전란으로 인해 산성에 도피용 산성을 따로 만들기도 했고 아예 산성에 주로 거주하는 경우까지 생겼는데, 이런 일본의 산성들은 평지의 성들과 마찬가지로 큰 데다가 복잡한 방호 시설들이 지어져 더더욱 난공불락을 자랑했다. 하지만 교통의 불편은 여전한 문제인지라, 성 방호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 점점 평지성, 평산성에 주력 자리를 내주게 된다.
요새형 성곽의 정점을 보고 싶다면 인도로 가보면 된다. 일본은 전국 시대를 겪으면서 긴 내전을 치르면서 성의 구조가 보완을 철저히 하고 성곽 특유의 독특한 구조가 매력인데 인도의 경우, 중국 못지않은 인구 대국인 특성과 다민족국가로 일본 못지않은 내전을 일상적으로 겪으면서 일본과 중국의 장점을 혼합한 듯한 요새 구조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인도는 토양 기반이 사암이라서 일본보다 더 수월하게 성을 지을 수 있어서 일본보다 더 규모 있고 개성 넘치는 성들을 보유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어떤 성들은 아예 산 전체를 파서 산 자체를 요새화 시킨 것도 있으며, 또 어떤 것들은 계곡을 깎아서 만든 성도 있다. 그래서 상대하는 입장으로선, 저걸 어떻게 뚫어야 하나 할 정도로 말 안 되는 구조를 가진 성들을 인도에선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독특한 구조 덕택에 수많은 판타지 덕후들이나 작가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 때 반드시 인도의 성들을 참고할 정도라고 한다.
거제시 장목면 일대에 있는 매미성처럼 태풍으로부터 농경지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관광지가 된 사례도 있긴 하다. 이 경우는 땅 주인이 순수한 흥미 차원에서 지은 것이다. 거주 목적을 겸하긴 했으나 흥미용으로 지었다는 점에선 노이슈반슈타인 성도 매미성과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3.1. 한국[편집]
한국의 산성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입보항쟁, 청야입보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사실상 청야전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왕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들이 산이나 구릉 위에 축조되었으며 왕성이라고 할지라도 구릉 위에 형성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즉, 수도에는 왕성(또는 그냥 왕궁)과 피난용 산성의 시스템을 갖췄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다.[74] 따라서 대부분의 산성에는 저장, 저수시설이 필수적이며 실제로 발굴조사에서도 특히 저수시설에 대한 관리는 수차례에 걸쳐 보완되는 흔적이 발견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예 산성이 지방행정의 치소(治所)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되는 경우도 많다.
한반도에 현존하는 산성 유물 중에는 건축 당시 산성의 성벽 높이가 거의 보루수준인 곳도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상당수가 허물어져서 그때의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전방의 국경지대가 아닌 이상 다른 후방의 성들을 유지하는 것에는 소홀해지기 쉬웠고 도시와의 접근성도 낮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지면 관리가 이루어지기 힘든 탓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것도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읍성철거령으로 사라졌다.
조선시대에는 평지성이 읍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지어졌는데 외성만 있고 외부와 이어지는 정문이 많이 나있는 데다 높이도 그리 높지 않아서 방어력이 약했다. 읍성은 정규군을 막아내기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앙 권력의 위엄을 높이고 행정 구역 표시, 도적 및 왜구를 막아내는 것, 즉 치안이 주 목적이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적이 처들어오면 읍성을 비우고 산성에서 농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타국의 성들과 비교했을 때 성벽과 성관의 규모가 단촐해보이는 것은 읍성에 그런 구조물을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읍성이 있기는 하되 전란이 일어나면 읍성을 비우고 산성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허술했던 읍성은 임진왜란 때 이미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공성전에 이골이 난 일본군에게 매우 쉽게 함락되었다. 기존에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 정규군이 주력 방어선인 산성을 돌파해버리자 왜군의 진로에 놓인 읍성들은 빠른 속도로 점령되었다. 반면 대 여진 전선이었던 함경도는 여진족의 침략이 잦았던지라 경성읍성같이 웅장하고 큰 성들이 존재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읍성도 기존보다 잘 정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예외적으로 읍성임에도 잘 지어져 여러 방어시설과 내성/외성 구분이 잘 되어있던 진주성의 경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2차 진주성 전투에선 함락당했지만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어 진군을 저지함으로써 뛰어난 방어력을 보였다.
조선시대에도 일부 산성은 조정의 명으로 새로이 축조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쌓았던 산성들을 재활용하거나 새로이 간단하게 쌓음으로써 왜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산성의 기능이 어떠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어떤 늙은 왜인이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장들은 매양 『조선이 청야(淸野) 작전을 써서 산성으로 들어가고 곡식들을 다른 곳에 옮겨 저장하는 것이 걱정이다. 물길에서 가까운 지역의 산성이라면 10년의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식량 운반이 편리하고 군량을 계속할 수 있으니 기어이 함락시킬 수 있겠지만 만일 아주 궁벽한 지역에서 성곽을 튼튼하게 마련하고 식량을 쌓아 두고 청야 작전으로 막아낸다면 들에는 노략질할 것이 없고 뒤로는 계속되는 군량이 없게 되어 격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로서는 큰 걱정거리이다. 』 하며 이를 늘 논의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 5월 18일 무신 5번째기사
7. 목록[편집]

8. 창작물에서[편집]

9. 관련 문서[편집]
- B-17 - 별명이 '비행요새(flying fortress)'. 후계기인 B-29의 별명은 '슈퍼요새(Superfortress)', B-52는 '성층권의 요새(Stratofortress)'다. B-21 명칭 공모전 때는 '그림자 요새(Shadowfortress)'도 응모된 바가 있었고, 공군 측에서 해당 명칭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 중부내륙 산성군
- 건축 관련 정보
- 관광 관련 정보
- 역사 관련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