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을 앞두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임기 중 서거하면서 당시 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은 대통령 직을 승계했다. 갑작스레 대통령 직에 오른 트루먼 대통령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상대로 항복 선언을 받아내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지만, 앞에 놓인 상황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1기 임기 동안 트루먼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서유럽의 경제 복구 지원 및 공산주의 확산 방지를 위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마셜 플랜을 세우는 등 전후에도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에 대해 미국 국내 여론은 곱지만은 않았는데, 미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한 적지 않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1]
대표적으로 1945년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전쟁특수가 끝나며 미국은 1945년부터 47년까지 실질 GDP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즉, 트루먼이 내치에 집중하지 않고 소련 견제 등 대외 정책에 지나치게 힘을 싣는다는 여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기에 민주당의 16년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감도 커지고 있었고,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갑자기 기둥을 잃은 민주당의 내부 계파 갈등도 대선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첨예화되기 시작했다.
1948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그야말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1946년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에 내준데 이어서, 트루먼의 전임 부통령이었으며 진보성향을 대표하던 헨리 월리스가 트루먼의 반공 정책에 적극 반대하며 1947년 민주당을 탈당한 후 진보당을 창당했기 때문이었다. 월리스는 진보당으로 트루먼의 외교 정책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설상가상으로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의 든든한 텃밭이었던 남부가 FDR 이후 강해진 당내 진보 성향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 트루먼 대통령이 군 내 인종 차별 금지 명령 및 흑백 차별대우를 조사하기 위한 민권위원회 구성 지시를 내리자 이에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다. 트루먼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있던 상황이라 정권 유지를 위해 후보를 교체해야되는 것이 아니냐는 민주당의 우려도 높았다.
하지만 막상 전당대회를 치러보니, 당내 분열상이 심한데다가 트루먼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대선에 출마할만한 다른 후보가 없었던 상황이었던지라[2]
트루먼 반대파들은 아이젠하워에게 트루먼 대신 민주당 후보가 되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한다.
, 전당대회에서 75%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트루먼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할 수 있었다.
트루먼은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자신의 러닝메이트가 될 것을 제안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겉으로나마)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선언했던 아이젠하워가 이를 거부하면서, 남부주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켄터키 주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앨번 W. 바클리가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전당대회 과정에서 휴버트 험프리 등 당내 진보 세력이 남부 민주당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권 협약을 표결 끝에 채택하자, 참다참다 못한 남부 민주당 세력이 전당대회를 박차고 나온 후 탈당해 주권민주당을 창당하고 스트롬 서먼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를 독자 후보로 출마시키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이미 나와있던 진보당의 헨리 월리스도 독자 출마를 선언하면서 여당 민주당 출신 후보만 세 명이 난립하는 상황이 되면서 안그래도 낮아보였던 트루먼의 재선 가능성은 이 시점까지만 해도 더욱 더 희박해진 것으로 보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엄청난 인기와 영향력에 눌려 16년간 기를 펴지 못했던 공화당이지만, 이번에야말로 정권교체를 위한 호기가 찾아왔다며 벼르고 있었다. 원래 전쟁 영웅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후보로 추대하려 했지만, 이때는 트루먼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아이젠하워가 이를 거부하면서 상황은 전당대회 경선으로 흘러갔다. 공화당 경선은 지난 대선에서 루스벨트를 상대로 선전했던 토마스 E. 듀이 뉴욕 주지사와 오하이오주 연방 상원의원 로버트 A. 태프트[3]
여담으로 이때 더글러스 맥아더도 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했지만 1차에서 11표, 2차에서 8표만을 얻는 굴욕을 당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공화당원들은 지난 대선에서 가능성을 보여줬던 듀이에게 좀 더 무게를 실어주었고, 1차 투표에서 434표, 2차 투표에서 515표를 획득하며 토마스 E. 듀이가 태프트를 누르고 2번 연속으로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게 되었다.
1946년 중간 선거에서 이미 하원 246석, 상원 50석을 확보하며 상·하원을 모두 탈환한데 이어 양당 대선 후보 확정 후 여론조사에서 듀이 후보가 트루먼 대통령을 상대로 최대 두 자릿 수까지 앞서는 결과가 연이어 발표되면서 1932년 이후 그 어느때보다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높아져 있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전술하듯 재선에 도전하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좀처럼 반등하지 않는 상황에서, 여당 민주당 후보가 무려 세 명(트루먼-월리스-서먼드)으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토마스 E. 듀이의 패배를 예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공화당 고위 지도자들 역시 듀이에게 안정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 무리하지 말고, 논란이 될만한 이슈는 철저하게 피하라고 조언했다. 실제로 듀이는 언더독의 위치에 서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집요하게 공격했던 1944년 대선 때와 달리 "당신의 미래가 당신 앞에 놓여있다."("You know that your future is still ahead of you.")는 식의 상투적인 어구만 반복하며 무료한 선거 캠페인을 이어갔다.
반면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던 트루먼은 본인의 장기(?) 중 하나인 네거티브와 독설을 철저하게 동원하며 듀이와 공화당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1946년 중간 선거 당시 공화당이 승리했던 점을 이용해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도 2년간 아무 일을 하지 않았다고 일종의 식물 국회론, 야당 심판론을 꺼내들었다. 또한 본인이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것을 이용해, 소련이 자신의 패배와 공화당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며 색깔론까지 꺼내들었다. 공화당은 이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며 항의했지만 여론조사 상 크게 뒤진 상황에서 가릴 것이 없었던 트루먼은 철저하게 항의를 무시했다.
트루먼의 계속된 공세에도 듀이는 트루먼의 주장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거나 트루먼을 비판하지 않고 기존의 선거 운동을 계속 이어나갔고, 공화당은 상황을 낙관하며 벌써 듀이 행정부 각료들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선거 운동 기간이 막판에 달하자, 갤럽 여론조사 기준으로 듀이와 트루먼의 지지율 격차가 17%p(9월말)에서 오차범위 근처인 5%(10월말)까지 좁혀졌다. 이 과정에서 진보당과 주권민주당으로 이탈했던 민주당 지지층이 전략적 투표를 위해 다시 트루먼에게 결집한 것.
물론 그럼에도 아직 듀이가 우위를 지키고 있었으며 뉴스위크, 라이프 등 유력 언론들도 듀이의 승리를 점쳤다. 1936년 대통령 선거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승리를 예측하며 유명세를 얻은 갤럽조차도 듀이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5]
이정도로 주요 언론의 예측이 빗나간 선거결과는 68년 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거둔 승리에나 비견할 수 있다. 1948년 선거 결과의 충격도 그 정도였다고 보면 된다.
개표 결과, 민주당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유효 선거 인단의 과반 이상(57.1%)을 확보해 연임에 성공했다. 개표 초반 트루먼이 일찍 리드를 잡았고 개표가 끝날 때까지 결과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당시 개표 방송을 진행했던 NBC는 개표 방송 막판까지 듀이의 표가 늦게라도 쏟아져 나와 결과가 뒤집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패배를 예상하고 집에서 잠(...)자고 있던 트루먼은 새벽 4시, 200만표 차이 리드를 유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깨어나 경비원들을 다시 캔자스의 자택으로 불러들였고 그제서 승리를 확신했다. 정말 모두의 예상을 뒤집은 것. 그것도 무려 딕시크랫이 남부 주 선거인단 39명을 강탈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진보당 헨리 윌리스의 트롤링에도 오하이오(25명), 캘리포니아(25명)[7]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은 공화당 지지층이 많았던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폭우를 동반한 악천후가 왔던 것 때문에 공화당 지지층중 상당수가 투표를 포기하여 표심이 듀이에게 크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물론 듀이가 캘리포니아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선거인단은 278:214로 트루먼이 우세하였을 것이다.
, 일리노이(28명)를 1%p 미만 격차로 모두 수성한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듀이는 뉴욕,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뉴햄프셔 등 다수 북부 주를 민주당의 손에서 빼앗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승리를 거두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만약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중 2개 주에서 듀이가 승리를 거뒀다면 전국 득표에서 패배하더라도 스트롬 서먼드의 남부 강탈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네거티브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 패인으로 작용했다. 쉽사리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개표 방송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듀이는 다음날 오전 11시 14분, 패배를 인정하고 트루먼에게 축하 전화를 걸었다.
당시 친공화당 성향의 언론이었던 시카고 트리뷴에서 엄청난 사고를 쳤는데, 개표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듀이가 트루먼을 이겼다."는 기사를 1면에 실었다가 역관광을 당한 것. 하필이면 이 시기 인쇄소가 파업을 하는 바람에 평소보다 일찍 신문을 찍어내야 했는데 '설마 트루먼이 이기겠어?' 하는 생각에 '듀이의 승리'를 타이틀에 떡하니 박았고 결국 그 설마가 사실이 되어 이런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위의 사진은 트루먼 대통령이 재선 확정 후 승리를 만끽하며 공개적으로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조롱하고 있는 모습이다.
패자인 공화당은 말그대로 패닉에 빠졌다. 대통령 선거는 물론 같이 치러진 양원 및 주지사 선거에서도 완패하고 만 것. 듀이가 지나치게 계산적으로 선거 운동에 임해 트루먼의 네거티브를 이겨내지 못했던데다가, 1946년 ~ 1947년 최악의 시점[8]
이 시기 GDP가 12%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이 15%에 달했다.
을 지나 1948년 시점에서는 점차 미국 경제가 회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선거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방심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운이 좋았으면 선거를 이길 뻔했다는게 얼마나 이번 대선 선거 구도가 공화당에 기울어진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였는지를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승자인 민주당도 마냥 웃을 순 없었다. 힘겹게 집권을 20년으로 연장했지만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부주가 아예 민주당에서 이탈하는 등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대선 4연승을 이끌었던 뉴딜연합(New Deal coalition)이 점차적으로 해체되는 모습을 보인 것.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남부주들은 대선에서 독자 후보를 출마시키며 점차 왼쪽을 향하는 민주당을 훼방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1960년 대선에서 승리한 존 F. 케네디 시기까지는 남부에도 민주당 충성파가 많이 남아있었지만 배리 골드워터와 리처드 닉슨의 남부전략에 결국 남부주들은 이후 골수 공화당 지지층으로 변모한다. 뉴딜연합 시대를 제5정당제, 남부전략 이후를 제6정당제라고 한다.[9]
2024년 현재 미국의 정당체제는 제6정당제이지만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한 2016년 이후부터는 제7정당제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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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적으로 1945년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전쟁특수가 끝나며 미국은 1945년부터 47년까지 실질 GDP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2] 트루먼 반대파들은 아이젠하워에게 트루먼 대신 민주당 후보가 되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한다.[3] 전직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아들이다.[4] 여담으로 이때 더글러스 맥아더도 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했지만 1차에서 11표, 2차에서 8표만을 얻는 굴욕을 당하고 물러났다.[5] 이정도로 주요 언론의 예측이 빗나간 선거결과는 68년 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거둔 승리에나 비견할 수 있다. 1948년 선거 결과의 충격도 그 정도였다고 보면 된다.[6] 여담으로 텔레비전 개표방송이 이때 처음 송출되었다.[7]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은 공화당 지지층이 많았던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폭우를 동반한 악천후가 왔던 것 때문에 공화당 지지층중 상당수가 투표를 포기하여 표심이 듀이에게 크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물론 듀이가 캘리포니아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선거인단은 278:214로 트루먼이 우세하였을 것이다.[8] 이 시기 GDP가 12%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이 15%에 달했다.[9] 2024년 현재 미국의 정당체제는 제6정당제이지만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한 2016년 이후부터는 제7정당제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