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까지만 해도 상당수 주에서 투표권에 대한 재산 내지 세금에 따른 자격 제한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 전체 대비 유권자 수는 매우 적었다. 1824년 대선 당시 투표권을 가지고 있던 유권자 수는 미국 전체 국민의 2.4%에 불과했다. 사실 건국의 아버지들만해도 엘리트주의가 매우 강하여 일반 대중이 직접적으로 연방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던만큼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1828년에 이르러 주별로 재산권 기준을 차례대로 폐지하면서 백인 남성에 대한 보통 선거권이 확립되었고, 투표권을 가진 국민들이 미국 전체 국민의 10% 수준까지 늘었다. 물론 아직 노스캐롤라이나 등 다수 주에서 제한을 완전히 철폐하지는 않아 한계가 뚜렷했지만[1]
실제로 백인 남성 전체에게 투표권이 완전히 부여된건 1840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유권자 수가 기존 대비 크게 늘면서 점차 일반 대중이 정치에 대해 가지는 관심과 권한이 늘어나는 등 포퓰리즘이 선거의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1816년 대선을 계기로 연방당이 소멸하면서 소위 '화합의 시대'로 불리는 민주공화당 독주시대가 1824년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1820년 대선에 단독 출마해 선거인단 232명 중 231명을 독식하는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1824년 대선을 계기로 화합의 시대도 끝을 맞이하게 됐다. 민주공화당에서만 대선 후보가 4명이 독자적으로 출마하는 난장판이 열리더니, 결국 아무도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의 과반을 확보하기 못해 수정헌법 제12조에 따라 연방 하원에서 당선자를 결정해야되는 상황까지 됐다. 이때 일반 투표에서는 미영전쟁의 영웅인 앤드루 잭슨이 41.2% 득표로 선거인단 99명을 획득하면서 1위를 차지했지만, 하원에서는 2위였던 존 퀸시 애덤스와 헨리 클레이의 합의로 당선자가 애덤스로 바뀌는 대형 사태가 터진다.
애덤스는 당선 후 약속대로 헨리 클레이를 핵심 보직인 국무장관에 임명했고, 잭슨은 이를 '부패한 거래'라고 부르며 맹공을 퍼부었다. 애덤스는 잭슨을 달래기 위해 잭슨에게 전쟁부 장관 직을 제안했지만 잭슨은 이를 거부하고 애덤스 임기 4년 내내 자신의 계파를 만들어 본격적인 발목잡기에 나섰다. 결국 민주공화당은 이 분란을 감당하지 못하고 쪼개지고 만다.
두 사람 간의 맞대결은 1824년 대선을 넘어 1826년 중간선거까지 이어졌는데, 잭슨을 따르는 사람들인 잭소니언당[2]
현재 익숙한 전당대회를 통한 후보 선출은 18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등장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전당대회를 통한 후보 지명이란 절차가 없었다. 건국 이후 1824년까지는 미국 의회 내에서 의회 지명 코커스(Congressional nominating caucus)를 개최해 비공개로 후보자를 선출하는 결과를 거쳤지만, 1824년 대선에서의 파열음 이후 이 절차가 사라졌는데 1828년 대선은 양당제가 부활하는 과정에서 의회 지명 코커스가 공개 전당대회로 전환되는 사이에 있었던 셈.
하지만 혼란 속에서도 4년전 같은 후보 난립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결국 이번 대선은 누가 봐도 앤드류 잭슨이나 아니냐가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1824년 대선이 끝난지 1년도 지나지 않은 1825년테네시 주의회[5]
테네시는 앤드루 잭슨이 주하원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한 곳이자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곳으로 잭슨의 정치적 본거지 역할을 했다. 잭슨이 대통령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낙향 후 죽음을 맞이한 곳 역시 테네시였다. 태어난 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지만, 그의 진짜 고향은 테네시였다.
에서 바로 잭슨을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하면서 사실상 대선 불복 의사를 보였고, 마틴 밴 뷰런 등 반 애덤스파가 잭슨에게 다시 결집했다.
기세를 탄 잭슨은 적극적으로 애덤스 행정부의 발목을 잡으면서 세를 키우기 위해 존 C. 칼훈 부통령을 설득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현직 부통령이 대통령 재선에 도전하는 상대 후보의 부통령 후보가 된 셈. 물론 칼훈 입장에서는 4년전 대선에서도 잭슨과 애덤스에게 모두 부통령 지명을 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본인에게 불가능한 선택지는 아니었겠지만 모양새는 좀 이상하게 됐다.
사실 각 주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고 남부의 이익을 변호하는 칼훈 입장에서는 강한 연방을 중시하고 여러 국책 사업을 벌이려던 북동부 출신 애덤스 대통령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 성향이고 남부에 더 가까운 테네시 출신의 잭슨 쪽이 이념적으로 좀 더 가깝기도 했다.
한편 애덤스 대통령 역시 기존 민주공화당 내 자기 계파와 대니얼 웹스터 상원의원 등 구 연방당 출신을 더해 세력을 키웠고, 4년전 자신을 지지했던 킹메이커 헨리 클레이, 재무장관 리처드 러시 등이 이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결국 애덤스도 북동부 지역 주의회들의 후보 지명을 받아 재선 도전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결국 이렇게 대선은 후보지명 절차나 전당대회가 없이도 애덤스 vs 잭슨 양자 구도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그렇게 미국 건국 이후 최초의 네거티브 대선의 막이 올랐다.
1828년 당시에는 현대처럼 모든 주가 주민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거인단을 직접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주별로 방식이 달랐다. 아직 참정권을 대중에게 순차적으로 확대하는 과정 중에 있었고,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는 주와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인 주가 섞여있었기 때문이다.[6]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868년 대선 전까지 주의회에 대한 간선제를 유지하기도 했다.
메인주는 오늘날의 메인주와 비슷한 방식이고, 뉴욕주 역시 '선거구별로 선출된 선거인단이 추가 2명 선출'라고 명시되어있지만, 결국 하원 선거구별 승자가 더 많은 쪽[7]
가히 네거티브로 점철된 미국 최초의 진흙탕 선거전이라는 표현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는데, 현대에야 선거 기술이 워낙 발전하면서 익숙해진 광경이지만 당시만해도 이전 대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이전 대선에서 선출된 대통령들이 건국의 아버지들을 포함한 독립전쟁 세대들로 서로 함부로 공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고, 대부분 후보들이 법조인, 농장주 등 엘리트 출신들이였던데다가 주요 유권자들 역시 재산권 규정으로 인해 부르주아들이었던만큼 서로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걸 천박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
하지만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인 존 애덤스 대통령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와 독립전쟁 당시 소년병이었던 앤드루 잭슨은 독립전쟁 세대라고 보긴 힘든 후보들이었던데다가, 특히 앤드루 잭슨 쪽은 전쟁고아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흙수저 출신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엘리트'와도 거리가 멀다고 느껴졌다.[8]
물론 앤드루 잭슨은 변호사로 성공한데다가 대농장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위 이미 개천룡이 된 인물로 서민을 직접 대변하는 인물이었다고 보긴 힘들다. 어디까지나 서민 출신이었다는 정도의 이야기.
한마디로 양 후보의 개인적, 정치적인 성격 자체가 제임스 먼로 이전과는 명확하게 다르다는 이야기.
거기다 유권자층 역시 4년전 대비 백인 남성 전반으로 크게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제 소위 말하는 부유층, 중산층 뿐만 아니라 서민층까지 공략해야되는 상황이 되었고, 그로 인해 '엘리트간의 고귀한 권력 쟁탈전'이라는 이전 대선들과는 완전히 다른 선거 양상을 띄게 되었다. 여기의 4년전 대선으로 양 후보간에 남은 앙금은 덤.
애덤스와 국민공화당 측에서는 앤드류 잭슨이 부인인 레이첼 잭슨(Rachel Jackson)과의 결혼한 일을 두고 불륜이라며 공격했는데 레이첼 잭슨이 전 남편과 이혼할 당시 행정 처리가 늦어지면서 이혼 절차가 완료되기 전에 잭슨과 결혼했기 때문. 애처가였던 잭슨은 이 네거티브 공세에 가장 크게 분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더해 과거 테네시 민병대에서 소장으로 복무하던 시절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법조인 출신이면서도 군사재판 없이 탈영병을 즉결 처형한 일, 농장주로 노예를 부리고 사고파는 일, 100번 이상의 결투를 벌인 일[9]
이후 검증 결과 실제 100번이나 결투를 벌이진 않았지만 성격이 불같아서 결투를 꽤 자주 벌였던건 사실이었고, 실제로 결투 중 입은 총상으로 평생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등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잭슨과 민주당 측에서는 애덤스가 주러대사를 지내던 시절 아내의 시종으로 데려온 한 소녀를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넘겨 준 일, 공금을 이용해 도박 기구[10]
근데 이게 다른게 아니라 체스판이었다. 이 부분은 잭슨 측의 확실한 네거티브인 셈.
를 산 일, 개인 재산인 당구대를 수리하기 위해 백악관 예산을 사용한 일 등을 공격했다.
양측 다 극한의 네거티브로 선거를 진흙탕에 빠뜨렸지만, 대상을 잭슨과 애덤스 양 후보로 좁히면 선거 운동 전략에서 차이가 좀 있었다. 잭슨은 미국 대통령 선거사상 처음으로 대중 선거 운동에 전력하면서 인기를 과시했다. 선거 중 아이를 끌어안거나 야외에서 열리는 대중 행사에 직접 참석하는 등 현대에도 볼 수 있는 많은 선거 전략이 잭슨의 이 캠페인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의견도 있을 정도. 또 자신을 향한 네거티브 공세에 직접 대항하기보다 자신의 강점을 강조하고, 애덤스 측에 역공을 가하는 방식을 즐겼다고 한다.
반면 애덤스는 대중과의 직접 접촉을 회피하고 대신 자신의 대통령 시절 성과를 강조하는 전략을 취했다. 대중과 만나기보다는 의회 연설을 열고 자신을 지지해줄만한 다른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늘렸는데 사실 이게 과거의 대선으로 봤을때는 기존부터 해왔던 전략 쪽에 더 가깝긴했다. 문제는 유권자 확대로 선거의 양상이 이전과 달라졌고, 이런 엘리트간의 만남이 잭슨 측으로부터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다는 점.
여기에 선거 2년전 사망한 토머스 제퍼슨 전 대통령까지 갑자기 선거전에 재등판하는 일까지 터졌다. 제퍼슨은 미국 건국의 주역 중 한 명이니만큼 현대까지도 미국 국민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대통령이다. 거기에 이번 대선이 열리던 1828년 시점까지만 아직 역사 속 인물이라기보다는 당대를 함께한 인물인만큼 그 제퍼슨의 이름값과 영향력이 훨씬 더 컸던 상황이었다.
1824년 대선 전이던 1823년 11월 제퍼슨이 직접 잭슨을 자택으로 초대해 미영전쟁 당시 잭슨의 활약상을 치하하면서 찬사를 날린 일, 1825년 하원 투표에서 헨리 클레이와 손을 잡은 애덤스가 당선되자 원래 민주공화당의 공식 후보였던 윌리엄 H. 크로포드에게 낙선 위로 편지를 보내면서 "바라지 않던 일이 벌어졌다."[11]
좋게 보면 크로포드가 낙선한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애덤스가 대통령이 된 것이 마뜩잖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고 쓴 일 등이 다시 거론된 것.
이에 반박하기 위해 애덤스 측에서는 일리노이 주지사를 지낸 에드워드 콜스를 내세워 1825년 8월 제퍼슨이 자신에게 잭슨이 민중을 선동하는 것이 우려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하면서 증인으로 토마스 길머를 증인으로 내세웠는데, 오히려 길머는 제퍼슨이 1825년 애덤스와 클레이의 타협에 실망해 잭슨을 지지하기로 생각을 바꿨다고 증언해버리면서 애덤스 측만 곤란하게 만들었다.[12]
실제로 이후 잭슨 시대를 전공한 역사학자 로버트 V. 레미니는 제퍼슨이 잭슨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거 같았다고 밝혔고, 제퍼슨은 잭슨쪽 외에도 애덤스에게도 우호적인 편지나 발언을 많이했다. 문제는 애덤스와 그 지지자들이 제퍼슨을 이용한 잭슨 진영의 홍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 아무래도 애덤스의 아버지인 존 애덤스가 제퍼슨과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영향이 있었던게 아닐까 추정된다.
각 주의 선거인단 선출이 10월 31일,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에서 시작되어 11월 13일 노스캐롤라이나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되었다. 선출된 선거인단들은 12월 3일 소집하여 대통령을 선출했다.
개표 결과, 민주당의 앤드류 잭슨 후보가 55.33%를 득표하고 178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압승을 거두었다. 국민공화당의 존 퀸시 애덤스 후보는 마치 아버지 존 애덤스가 1800년 선거에서 그랬듯이 뉴저지, 델라웨어, 버몬트,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등 북동부 주에서만 잭슨에게 승리했다.
심지어 조지아에서는 민주당의 두 개 당파(트루프파, 클라크파)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고 두 계파가 모두 잭슨을 지지하면서 96.79% 득표율로 잭슨이 압승했다. 존 퀸시 애덤스의 국민공화당은 단 3.21% 득표에 그쳐 참패를 당했다.
국민공화당의 존 퀸시 애덤스 후보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지난 선거보다 더 많은 표를 획득했음에도 패한 후보가 되었다. 이 일은 무려 192년 뒤인 2020년에야 다시 일어나니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인 셈.
한편 민주당의 잭슨 후보는 켄터키에서 전국 득표율 차랑 비슷한 격차로 애덤스에게 승리했는데 이후 1856년까지 28년 동안 민주당은 켄터키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또한 잭슨은 노예주에서 72.6%, 자유주에서 50.3%를 득표해 모두 앞섰고 남부에서 20만표, 북부에서 40만표를 얻었다. 하지만 5분의 3 타협의 결과로 선거인단에서는 오히려 남부에서 더 많은 105표, 북부에서 73표를 얻었다.
한펴 잭슨은 대통령 당선 후 12월 22일, 아내 레이첼 잭슨을 잃는 아픔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존 퀸시 애덤스와 헨리 클레이의 선거 과정 중 과도한 인신공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맹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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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백인 남성 전체에게 투표권이 완전히 부여된건 1840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2]민주당의 전신이 된다.[3] 정확히는 애덤스를 지지한다기보단 잭슨을 반대하는 것에 가깝다.[4]국민공화당의 전신이 된다.[5] 테네시는 앤드루 잭슨이 주하원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한 곳이자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곳으로 잭슨의 정치적 본거지 역할을 했다. 잭슨이 대통령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낙향 후 죽음을 맞이한 곳 역시 테네시였다. 태어난 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지만, 그의 진짜 고향은 테네시였다.[6]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868년 대선 전까지 주의회에 대한 간선제를 유지하기도 했다.[7] 36명 중 하원 선거구에 따라 먼저 선출된 34명이 남은 2명을 뽑는다는 뜻이다.[8] 물론 앤드루 잭슨은 변호사로 성공한데다가 대농장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위 이미 개천룡이 된 인물로 서민을 직접 대변하는 인물이었다고 보긴 힘들다. 어디까지나 서민 출신이었다는 정도의 이야기.[9] 이후 검증 결과 실제 100번이나 결투를 벌이진 않았지만 성격이 불같아서 결투를 꽤 자주 벌였던건 사실이었고, 실제로 결투 중 입은 총상으로 평생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다.[10] 근데 이게 다른게 아니라 체스판이었다. 이 부분은 잭슨 측의 확실한 네거티브인 셈.[11] 좋게 보면 크로포드가 낙선한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애덤스가 대통령이 된 것이 마뜩잖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12] 실제로 이후 잭슨 시대를 전공한 역사학자 로버트 V. 레미니는 제퍼슨이 잭슨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거 같았다고 밝혔고, 제퍼슨은 잭슨쪽 외에도 애덤스에게도 우호적인 편지나 발언을 많이했다. 문제는 애덤스와 그 지지자들이 제퍼슨을 이용한 잭슨 진영의 홍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 아무래도 애덤스의 아버지인 존 애덤스가 제퍼슨과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영향이 있었던게 아닐까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