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2차 핵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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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09년 5월 25일 오전 9시 54분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실행된 북한의 2번째 핵실험이다.
출력은 TNT 약 4~6kt 규모이다.
2. 경과[편집]
2.1. 5월 25일[편집]
기상청은 5월 25일 오전 9시 54분, 1차 핵실험 장소인 함경북도 길주에서 ML 4.5의[1] 인공지진이 감지됐다고 밝혔다.[2]
북한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핵실험을 공식 발표했다. 다음은 조선중앙통신 보도 전문
우리 과학자, 기술자들의 요구에 따라 공화국의 자위적 핵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주체98(2009)년 5월 25일 또 한 차례의 지하 핵시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번 핵시험은 폭발력과 조종기술에 있어서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안전하게 진행되었으며 시험결과 핵무기의 위력을 더욱 높이고 핵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나 갈 수 있는 과학기술적 문제들을 원만히 해결하게 되었다. 이번 핵시험의 성공은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기 위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올리며 150일 전투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선 우리 군대와 인민을 크게 고무하고있다. 핵시험은 선군의 위력으로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과 사회주의를 수호하며 조선반도와 주변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데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주체98(2009)년 5월 25일 평양
2.2. 5월 26~27일[편집]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2차 핵실험과 관련, 긴급회의를 열어 “명백한 안보리 결의 1718호 위반으로 강하게 반대하고 규탄한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즉각적인 대북 결의안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도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대폭 참여를 선언한다고 발표하자, 다음날 북한군은 판문점대표부 명의로 "더 이상 정전협정에 구속되지 않겠다"며 정전협정 백지화 성명을 밝혔다. 그 이전에도 북측은 입장 형식으로 정전협정 백지화 의사를 밝혔으나 성명 형식으로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2.3. 6월 13일[편집]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6월 13일 전체회의를 열어 북한의 2차 핵실험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징계하기 위한 대북 결의안 1874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3. 평가[편집]
북한의 2차 핵실험은 1차 핵실험과 비교해 에너지는 5.62배 커지고 폭발력은 5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한국국방연구원은 이번 핵실험은 1차에 비해 규모 면에서 훨씬 업그레이드됐으며, 핵무기의 핵심인 기폭장치 또한 안정적으로 작동해 일정 수준의 핵무기 제조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내렸다.
1차 핵실험 당시 중국에 사전 통보한 설계 출력 4kt을 이번 2차 핵실험에서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1차때는 0.4~0.8kt의 출력이 측정되어 사실상 실패했다.)
정보 당국은 이번 핵실험의 폭발 위력을 최소 3~5kt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여담[편집]
핵실험 날짜가 한국 내 일부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2009년 5월 25일은 국내 분위기가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기간(5월 23일~ 5월 29일)일 때였기 때문이다. 국난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당시 국내 사회 분위기가 사분오열과 같았다. 북한이 난데없이 핵실험을 한 의도에는 이러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북한의 2차 핵실험은 이명박 정부 때 발생한 첫 번째 핵실험으로, 2013년 2월에 이명박 정부[3] 에서 두 번째 핵실험을 강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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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MA 기준 Mj 5.3, 러시아 기준 ML 5.0, USGS 기준 Mw 4.7[2]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3일만의 사건이다.[3] 정확히는 이명박 정부 말기/박근혜 정부 출범 직전이었다. 당시 박근혜는 아직 당선인 신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