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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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생활
2.1. 취미
2.2. 사치
2.2.1. 호화 별장
2.2.1.1. 초대소
2.2.1.2. 여호리 별장
2.2.1.3. 김정일을 위한 지하의 비밀공간
2.2.1.4.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
2.2.2. 미식가
2.2.3. 결과
2.3. 잔인성
2.4. 음란성
3. 가족
3.1. 여자관계와 자녀들
4. 풍자
5. 풍문
6. 기타


1. 개요[편집]


김정일여담을 정리한 문서.


2. 사생활[편집]




2.1. 취미[편집]


영화광으로 이미 학창시절에 국립 영화제작소에서 김정일 전용 상영관을 마련해줄 정도였으며 한국에서 신상옥과 최은희를 납치하여 영화를 만들게 할 정도였다.[1] 윤정희도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함께 납치하려다가 실패했다. 특히 특촬물 중에서도 괴수물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신상옥 감독에게 일본의 스탭까지 초청할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안겨줘서 불가사리를 찍게 한 것을 보면 신빙성이 높은 듯. 하지만 신 감독의 탈북으로 현재 불가사리에서는 신상옥 감독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다.

김정일은 수집된 세계 각국의 영화를 보존하는 영화총국 산하의 '중앙영화필름관리소'를 평양에 만들었다. 북한 영화계에서 종사했던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중앙영화필름관리소'는 평양 시내에 영화필름을 보관하는 '영화문헌고'를 두고 있는데 이곳에는 15,000편이 넘는 세계각국의 영화가 보관돼 있다. 이곳의 구성인원은 성우, 번역사, 자막사, 영사기사, 녹음기사 등 약 250여명이며 규모는 길이가 약 100m인 3층 건물이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하보관소를 따로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보관 중인 15,000편의 영화 가운데 한국 영화는 약 300편 정도인데, 재밌는 점은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50~60년대의 영화 빨간 마후라, , 내시 등의 네거티브 필름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이 한국 영화들은 대부분 과거 홍콩인도네시아 등에 수출된 것을 다시 구입해 들여 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세계 각국의 영화필름을 1974년에 가입한 국제필름아카이브연맹(FIAF)을 통해 상호교환 형식으로 수집하는 방법과 함께 몰래 복사해서 불법으로 들여가는 방법으로 수집하고 있다.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한국측의 방문단이 4편의 영화를 선물하자 즉각 반색하며 이것저것 물어본 다음에 "1주일 내로 소감을 보내주겠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에 시네21에서 김정일의 소감을 실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한국측의 반발이 심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한국 연예인들의 속사정과 출연영화를 줄줄이 다 꿰고 있어서 납치된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이 놀랄 정도였다. 그는 멀리서는 50년대부터 가까이는 이영애[2]로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의 한국 배우들을 좋아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침이 마르게 극찬한 일화도 있다.[3] 가수 김연자와의 친분도 매우 유명하다.

2000년 12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 당시에도 영화가 회담에서 거론되었다. 김정일은 미국 측에 자신이 북한에서 가지고 있는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5.1 경기장에서 엄청난 규모의 매스게임을 진행하고 올브라이트 이하 미국 대표단을 초대하였다. 이를 감상한 미국 외교관 웬디 셔먼은 김정일에게 만약 그가 북한의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훌륭한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고, 김정일은 이에 웃으면서 자신은 아카데미 수상작은 모두 보았으며, 훌륭한 감독들도 다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영화 이론도 공부했는지, 고위 탈북자에 의하면 "김정일의 저작의 절대 다수는 대필이지만, 영화와 관련된 것들만큼은 김정일이 직접 저작한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연극 영화는 단순히 취미인게 아니라 실제로 현대 선전선동에 핵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를 잘 이용한 대표적인 데마고그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있다. 권력 유지에 중요한 요소인 것. 지금도 선전선동부는 조선로동당의 핵심 부서다.

호주에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영화까지 있다. 안나의 동네가 대기업의 가스 채굴 개발지가 된다. 안나는 이를 막기 위해 자본주의 대기업에 맞서서 싸우는 영화제작을 위해 평양으로 가서 김정일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영화이론을 배워 영화를 만든단 내용이다. 적어도 선전 영상물 제작에 있어서는 제법 인정받는 전문가다. 그러나 홍사중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1994년 8월 30일자 <홍사중의 문화마당>에서 여느 독재자와 달리 영화광 기질은 '현실 도피' 측면이 더 강하다고 분석했다.

평소에 한국 TV방송을 즐겨봤다고 전해지는데,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도 김대중 대통령에게 한국 TV 뉴스를 보면서 한국 반응을 살펴봤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남한의 인터넷 사이트도 즐겨 찾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드레이 란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2001년에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에게 이메일 주소를 묻기도 했고, 2002년에는 자기랑 접견한 북한 고위 인사에게 "한국 사이트를 둘러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 적이 있던 데다가 2007 남북정상회담에서도 자신을 '인터넷 전문가'라고 표현하면서 이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

비디오게임 등 서양 문화도 즐겼다.[4] 스포츠 중에서는 농구를 좋아했는데, 2000년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마이클 조던의 사인볼을 선물하자 다른 북한 간부들은 그까짓 공 하나 주냐고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이었지만 김정일 혼자서 만족했다고 하며 현재도 올브라이트가 선물한 농구공은 북한의 국가선물관에 전신되어 있다. 미국 샌디에고 유니언 트리뷴은 2001년 북한이 삼성의 후원으로 조던을 초청하려 했으나 조던이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피겨 스케이팅을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는데, 백두산배 국제피겨스케이팅 대회를 생일에 맞춰 매년 2월[5]에 열고 있으며 자국 선수들 외에 러시아, 프랑스, 체코, 헝가리, 영국, 스위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선수들도 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대회에 참가한 알렉세이 야구딘에 의하면 러시아보다 더 좋은 시설을 갖춘 빙상장이 있다고 한다.

그외에도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승마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는데, 북한 선전물에서 김정일이 백마를 탄 영상이 자주 등장하는 걸로 봐서 승마 자체는 그럭저럭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지모토의 증언에 따르면 1992년에 말을 타다가 낙마를 한적이 있었는데, 이때 김정일은 쇄골이 부러질 정도의 중상을 입었으며 며칠간 의식을 찾지 못했다. 가까스로 깨어난 김정일은 열흘 후에야 연회를 열고 측근들을 초대하였으며 후지모토를 포함하여 서기실 부부장 김창선, 동포사업부원 박연만 등 5-6명의 서기실 직원들에게도 모두 자신이 진통제로 맞는 모르핀을 맞게 했다. 후지모토는 김정일이 자기만 마약중독에 걸리기 싫어서 그랬다고 쓰고 있지만(출처: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의 요리사, 3장), 그것보다는 암살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으로 추정된다.[6] 참고로 황장엽 회고록에도 김정일이 낙마한 내용이 나오는데 김정일이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 겁에 질린 김경희가 오빠가 죽으면 어쩌냐고 황장엽네 집에 전화해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엔카와 일본군 군가인 라바울 속요 등의 일본 노래를 매우 좋아했고, 자신을 시중드는 5과 소속 여성들에게도 자주 부르게 했다. 러시아어를 배운 이후로는 러시아 민요도 들었고, 1980년대 이후로는 디스코도 즐겨들어 왕재산경음악단에게 비밀리에 연주시키거나 공연시킨 영상이 여럿 남아 있다. 남한 음악[7]도 많이 들었는데, 최진희장덕을 즐겨들었다고 한다. 뽕끼가 있는 단조 위주의 음악이나 초창기 신스 음악이 취향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가수보다는 여가수를 압도적으로 좋아했다.

2.2. 사치[편집]


파일:Kim Jong-il.jpg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동이 속의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搬佳酵萬成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 위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 사람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낙: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떨어지니)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래소리가 높은 곳에 원망하는 소리도 높도다)

-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변학도의 폭정을 비판하며 지은 시. 김정일이 극도의 학정과 국민들의 빈곤 속에서 사치를 즐기던 것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내용이다.


김정일은 세계적인 갑부 1호이나 북한 주민들은 가난의 1호이다.

탈북자 출신 작가 장진성(1971~)[8]

[9] #


김정일은 1970년대부터 측근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즐겼는데 이게 본인이 완전히 취해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길게는 4일 이상 지속되기도 했다. 이 연회가 어찌나 난잡하고 사치스러웠는지, 보다 못한 1979년 리명재 로동당 부부장(리용호 전 외무상의 아버지)의 부인은 김일성과 김경희에게 이러한 난잡한 파티를 막아달라고 왼손으로 탄원서를 써서 바쳤다.

그러나, 문제는 김일성에게 가는 모든 문서는 이미 실권을 틀어쥔 김정일을 거치고 있었다는 것. 내부고발을 접한 김정일은 격노하여 범인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고, 보위부는 파티 참석자들과 그 가족들을 혹독하게 추궁하여 결국 2달 만에 리명재 부부장 부부는 체포되었다. 리명재 부부장은 "저런 건 마누라가 아니라 원쑤다! 내가 직접 처단하겠다!"라고 권총을 빼들어서 아내를 총으로 쏘아 사망하게 만들었고 김정일에게 권총을 바치면서 "죽여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그러자 김정일은 "너는 한번만 용서한다."라고 그를 살려주고 총애했으며 김정일이 하사한 젊은 간호사와 재혼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호화파티에서는 소위 술게임이 벌여졌고 간부들은 도수가 높은 술을 병 째 원 샷을 해야 했다. 마시고도 버틴 간부들에게는 김정일이 1만 달러 다발을 선물해줬고 버티지 못하고 토한다면 김정일은 화내면서 돈을 도로 압수해갔다. 한번은 후지모토 겐지가 꼬냑 한병을 억지로 원샷하고는 몰래 화장실 가서 토하자 어느 간부가 화장실까지 따라가와서 그 광경을 보더니 후지모토가 반칙했다고 일러바치면서 돈을 도로 뺏어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김정일이 봐준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남한과 소련/러시아, 일본의 최신 대중가요들을 부르면서 장기자랑을 하거나 돈다발을 두고 도박을 했다. 그리고 파티가 무르익으면 밑에서 후술하겠지만 기쁨조들이 음란한 복장으로 춤을 추었고 간부들은 기쁨조와 성적 유희를 즐겼다. 거기에 김정일의 전용 창고에는 자신이 농락한 여자들에게 선물할 각종 고급 물품인 보석류, 향수, 시계, 전자제품, 여자 의류, 여자 신발류, 핸드백 등이 산적해 있었다고 한다.

파티에서 김정일의 최측근들끼리 모일 때는 추잡한 행위까지 했어요. 파티 도중에 일부러 정전을 딱 치고서는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 뽀뽀!"하면 갑자기 키스도 하고 옷도 벗기고 하여튼 별짓을 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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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최측근 강태석의 증언#


"내가 오늘 그만 마시고 들어갈 테니 용기 있는 사람들은 아가씨를 정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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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환의 '평양 25시'에 실린 실제 김정일의 파티 도중 발언.


이한영의 증언에 의하면 인민무력부장이었고 북한군 고위인사였던 리용무와 김성윤은 물론이고 오진우도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오진우는 김정일의 파티에서 김옥희로부터 성상납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심지어 보천보전자악단 소속 미혼의 여성 단원을 임신시키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연형묵허담같은 당 간부들은 물론이고 김영남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김정일의 최측근이었던 장성택 역시 파티에서 기쁨조와 난잡하고 문란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이었고 사생아도 여러 명 낳았고 이들은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또 다른 최측근이었던 최룡해 역시 다른 고위간부들처럼 매우 문란하게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이렇게 난잡한 파티가 끝나고 나면 김정일은 마음에 들어한 간부에겐 고급 외제차와 같은 사치품을 선물해주거나 승진시켜줬다고 한다. 김정일의 호화파티는 단순히 자신의 욕구 해소를 넘어서 간부들의 충성 경쟁을 유도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 행사였던 것이다.

매년 헤네시 코냑 구매에 50만 달러를 쓰는가 하면 연회 중에 즉석으로 1만 달러 다발 4~5개를 쌓아놓고 술 마시기 대회를 열어 상금으로 주기도 했으며, 승마를 위해 말 30여필을 수입하고, 평양 불꽃놀이에서 60억원을 탕진했으며, 2008년에는 자신이 사용하는 전용 시설들을 보수하는 데에만 3,700만 달러르 쏟아부었고, 2009년에는 이탈리아에 호화요트 2척으로 무려 240억원 어치를 주문하기도 했다가 발각되어 이탈리아 경찰에게 압수되기도 했고, 사망 얼마 전인 2011년 1월에는 권력을 세습할 아들 김정은의 '15호 관저'[10]약 1억 파운드(1,734억 원)을 들어 호화 주택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물론 김정일은 그 1980년대에 애완견 수입·관리에만 매년 수십만 달러를 쓰기도 했으며, 애완견의 건강검진을 위해 프랑스 수의사를 수시로 부르기도 했으며, 비슷한 시기 기준으로 고급 외제 승용차를 30대 보유했다고 한다. 참고로 김정일은 꼭 메르세데스-벤츠의 차량들을 탔는데, 별장 내에서만 사용하는 번호판 없는 벤츠 차량들도 많았고, 김정일은 차 값을 금괴로 결제하며 생전에 벤츠의 최고 고객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김정일이 입고 다니는 인민복도 일반적인 인민복이 아닌 서양제 고급 원단을 해외 주재 북한 대사관이 공수해와 장인이 한땀 한땀 만든 고가의 의복이었다.[11]

그리고 김정일은 전국의 각 공장, 농촌, 어장들에 반드시 '1호작업반'을 설치하게 하고는 여기서 만들어진 북한 최고의 생필품들과 식품, 특산물들을 자신의 호화생활과 측근들에게 줄 선물에 쓰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골프, 낚시, 승마, 제트 스키, 오토바이 등 북한 주민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취미생활을 후지모토 겐지와 즐기기도 한 것은 물론이고, 상술한 것처럼 김정일이 사망한 지 10년도 더 지난 2022년 기준으로도 인터넷 사용률이 뒤에서 2등(4.6%)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은, 압도적인 세계 꼴찌인 0.07%에 불과할 정도로 일반인의 인터넷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그 북한에서 인터넷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12]

물론 김정일은 2살 정도밖에 안 된 어린이들에게 탁아소에서 사탕과 장난감을 받을 때마다 "아버지 원수님 고맙습니다"를 외치게 하면서 자신의 아들 김정남은 너무나 아껴 생일선물을 해마다 100만 달러[13]를 들여 샀다고 한다. 김정남의 생일 선물을 살 때에는 호위사령부 2국9부가[14] 일본-홍콩-싱가포르를 넘어 독일, 오스트리아까지 들러 옷과 신발, 전자오락 기구들은 물론이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계, 도금한 장난감 권총도 사들였으며, 이런 장난감들로 채워진 300평 정도 되는 오락실은 김정남의 생일이 바뀔 때마다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는 한국으로 망명했다가 북한 간첩에게 피살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이 쓴 '대동강 로얄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에 나온 증언이며, 김정남의 놀이방은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젊은이이던 이한영이 보기에도 현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김정일은 생전에 보유했던 해외 비자금이 40~43억 달러로, 이는 태국산 쌀 1,000만톤어치, 즉 매년 100만톤의 추가 식량이 더 필요하다고 볼 때10년, 강냉이로는 2~30년 정도를 버틸 정도이다.[15] 금수산기념궁전에도 막대한 유지비가 들어가며, 이러한 작태는 현 김정은 정권 하에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2.2.1. 호화 별장[편집]


파일:평남 강동 별장.jpg
파일:김정일의 별장 중 하나.jpg
평남 강동 별장[16][17]

김정일은 자신이 후계자로 등극한 1970년대 중반부터 자연경관이 빼어난 명산과 온천, 바닷가 등지에 있는 수십만 평의 부지들을 골라[18] 관리와 경비를 담당하며 상주하는 사람도 수백 명에 달하는 거대한 별장들을 세웠는데, '특각'이라고 불리는 김정일의 이러한 별장들은 대략적으로 잡아도 24~33개에 달했을 정도로 많았으며,[19][20] 규모도 위성 사진으로 봐도 규모를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고, 이들 별장의 면적을 합하면 약 33.66km2로 일산신도시(15.7km2) 면적의 2배를 넘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는 대략적으로 환산해도 별장 하나 면적이 1km2였다는 이야기인 셈이다![21] 이런 별장들을 연결하는 전용 기차역[22]도 28개나 되었다고 한다.

평양의 경치 좋은 곳이면 어김없이 김정일 일가를 위한 특각과 초대소가 들어서 있었는데, 이 때문에 김정일 생전이 평양 거리를 걷는 시민들은 경관이 뛰어난 곳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철조망과 특수구역을 만날 정도였다.

이러한 별장들은 전부 군대를 동원해 철저한 보안 하에 지었으며,[23] 김정일 별장과 우상화 시설의 설계를 전담하는 '백두산건축연구원'에서 해외 건축가를 비싼 돈을 주고 초빙하여 설계를 맡겼다고 하는데, 김정일의 특각 건설에 투입된 자금은 총 25억 달러(약 3조 원)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북한 GDP의 12%에 육박했던 데다가 600만 톤 이상의 쌀을 구매할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한다. # 그리고 별장을 지키는 호위총국 군인들과 관리인들, 관리유지비를 포함하면 별장 하나에 적어도 수백만달러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되었다. 즉, 김정일이 국가 발전에 아무 쓸모도 없는 특각 건설을 안 하고 그 돈으로 식량을 사 모조리 주민들에게 풀어주기만 했어도 북한의 식량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소리다.[24]

내부도 김정은과 친분이 있는 미국의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외국에서 온갖 호화별장 많이 봤어도 그렇게 호화로운 별장은 처음이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데[25], 이는 정확히는 권력을 세습받은 아들 김정은의 별장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물려준 별장을 기반으로 한 별장에서 사는 것이므로 김정일의 별장도 그 정도로 호화로웠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정일의 집무실이 있는 창광동 지하의 오락시설들은 장진성의 말대로라면 '미국의 재벌들도 울고 갈' 수준이라고 한다.[26] 이 증언들과 후술할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김정일의 별장들의 내부는 빅토르 야누코비치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별장[27] 이상으로 호화로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정일은 1년에 2달 정도만 평양에 머무르고 나머지 10달은 날씨에 맞춰가며[28] 여러 별장들을 옮기며 생활했는데, 김정일이 쓰던 별장들에는 전용 기차역과 전용 도로, 보초소와 함께 정원, 연회장, 20~3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영화관과 사격장, 당구장, 볼링장, 롤러스케이트장, 승마장, 수영장, 예술단 공연을 위한 무대, 낚시터, 사냥터, 골프장, 심지어는 아이스링크가 있는 실내 체육관과 식품가공시설[29], 미사일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지하벙커 등 온갖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30]

내부는 외국에서 수입한 고급 대리석, 프랑스제 파인 세라믹 그릇, 스위스제 고급시계, 러시아나 일본 등지에서 생산된 고급 가구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김정일의 별장을 꾸리는 모든 설비나 물자는 100% 외국의 고급 자재만을 수입해 들어왔고, 김정일의 별장에서 쓰던 자재는 남아도[31] 밖으로 못 나갔는데, 별장의 자재들을 가지고 나가 외국에서 분석하면 외부에서 북한 내부의 비밀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별장에서 쓰던 물품들은 무조건 파묻거나 소각해버렸다고 한다.

이런 초대소 시설이나 김정일 패밀리의 생활상은 풍요로운 나라 일본에서 온 나조차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라웠다. 그러나 그들의 성역바깥으로 한 걸음만 나가면 그날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후지모토 겐지


특히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이 생전에 연중 가장 많이 찾았던 초대소인 원산 초대소는 둘레가 900미터인 전용 승마장과 영화관, 농구장 시설을 갖춘 것은 물론 물론 동해에 바로 닿아 있어 갖가지 해상스포츠들을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심지어 50m 길이의 거대한 이동식 수영장 위에는 길이가 10m인 워터슬라이드 2대도 있었으며, 이 배와 같은 이동식 수영장을 원산에서 함흥까지 끌고 가서 물놀이를 하기도 했다.[32] 게다가 원산 초대소에는 김정남, 김정은 등을 위한 게임센터도 있었는데, 펀치기계, 각종 아케이드 게임, 승마 게임, 레이싱 게임 등 일본 도쿄에 있는 최신 게임기를 전부 다 옮겨놓았다고 한다.

김정일이 초대소를 이동할 땐 요리팀, 의료팀, 경호팀 등 약 100여명이 동시에 이동했는데, 암살을 막기 위해 같은 종류의 벤츠 3-4대가 동시에 움직이며, 전파탐지를 막기 위해 무전조차 제한적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초대소 안의 실내 온도는 항상 22도로 유지되었는데, 22도가 사람이 살기 가장 적합하고 건강에 좋으며 쾌적한 온도여서 그랬다고 하며, 이를 위해 에어컨이나 난방기 등도 많이 동원되었다. #

특히 평양 북부 룡성구역[33]에 있는 12km2 면적의 룡성 관저[34]는 전용 철도역, 실외수영장, 사격장, 승마장, 승마트랙은 물론 심지어 나무를 심은 2개의 인공섬까지 갖추고 있다. #1 #2

물론 이들 별장들은 전기철조망과 CCTV, 김정일의 신변보위를 위해 24시간 주둔하는 호위국 군인들이 지켰으며, 바리케이드나 위장건물을 만들기도 하고 별장을 지키는 호위총국 건물을 입구에 설치해 별장이 아닌 군부대 특수지역으로 위장하며 '쪽잠에 줴기밥'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김정일의 모습을 철저히 가렸다. 물론 일반적인 북한 주민이 실수로 별장에 실수로 들어오거나 김정일의 차를 가로막으면 그 즉시 경비병에 의해 사살되었다.[35]

물론 김정일의 별장이 존재하는 '1호지역'이 존재하는 지방들에서는 공장을 세울 수 없는 것을 넘어 뙈기밭 농사도 허용되지 않았고, 김정일의 별장을 일반생활권과 분리시키기 위해 군인사택을 짓는 방식으로 이중삼중의 경호 철벽을 치기도 했고, 인접 도, 시나 군의 물길을 돌리거나 아예 차단해 버리는 방법으로 자연환경과 청결을 최대한 유지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별장 인근 지역에 살던 모든 주민들을 몇십 km 밖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장진성의 말대로 '온 국토가 (김정일 한 사람의 것으로) 사유화된' 셈이다. # 게다가 후술할 것처럼 지어만 놓고 거의 들르지 않은 별장도 있었으니 이렇게 아무 의미도 없이 증발한 인력과 돈의 손해는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이 그렇게나 '애민정신'이라며 자랑하는 현지지도주성하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김일성 3부자가 전국에 널려 있는 별장에 놀러다니면서 틈틈이 별장 밖으로 나와서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별장 인근의 군부대와 사업시설을 둘러보는 것이라고 한다.

김정일의 별장들의 위성 사진과 별장별 특징 등 세부 정보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길 바란다.

  • 김정일 별장 위치와 특징
  • [단독] "북한에 김정일 전용별장 24곳"
  • '김씨 조선'의 초호화 궁전[36]
  • 김정일특각: 주요 특각
  • 김정일 별장과 은신처들
  • 김정일 주요 별장 현황
  • 김정일 별장[37]


2.2.1.1. 초대소[편집]

초대소는 김정일이 지방 출장을 가거나 잠깐 쉴 때 사용하는 곳으로, 주로 오지마을이나 구석진 국경 지역에 세워졌으며, 주로 24시간 이하의 짧은 시간 동안 활용되었다. 별장만큼 크지는 않지만, 김정일 부자가 들르는 곳이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는 최고 시설로 꾸며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덤으로 초대소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김정일만 다닐 수 있는 전용도로가 반드시 만들어져야 했는데, 초대소는 '1호 지역'으로 분리돼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었다.

한 탈북자는 "김일성 부자가 지방시찰을 나갈 경우 ‘그 지역에서 쉴 수 있는 초대소를 만들지 않으면 수령을 모실 수 없다’는 당의 방침이 떨어져 전국 도(道)·시(市)·군(郡)마다 초대소가 건설됐다"고 증언했는데, 북한의 행정구역이 2011년 기준으로 9개도, 26개시, 148개군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김정일 부자를 맞이하기 위해 건설된 초대소가 180개 이상이라는 추측도 있다.[38]

게다가 이 초대소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김정일 부자의 기습 방문을 위해 일년 내내 대기 중이었는데, 실제로 북한에는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김정일 부자가 한번도 들르지 않은 채 ‘관리’만 되고 있는 초대소가 실제로 사용되는 초대소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39]

여하튼 김정일이 얼마나 초대소를 많이 지었는지 '시골 아낙네들이 차가 안 다니는 초대소 1호 도로에 곡식을 말리려고 널어놨다가, 보위부에 끌려가 호되게 당했다'는 이야기는 김정일 시절 북한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이야기중 하나였을 정도였다.


2.2.1.2. 여호리 별장[편집]

파일:여호리 별장 2.jpg
파일:여호리 별장 1.jpg
측면 사진
위성 사진

파일:마전별장.gif
전체 위성 사진. 전용 기차역과 인공풀장, 골프장(또는 승마장)이 선명히 보인다. 참고자료

그의 별장 중에서도 가장 컸다는 여호리 별장은 함경남도 락원군에 1977년에 지어진 건물로, 한 개 층당 면적이 800평(2644.6제곱미터)이나 되었으며, 별장 중앙건물은 바다와 맞닿아 해수면과 같은 위치에서 시작해 지상 7층 건물로 지어졌지만 높이는 일반 건물 25층과 맞먹을 정도로 높으며, 1층 창문이 통유리로 돼 있는데, 외부에서 보면 마치 건물 일부가 바다 밑으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여 ‘수중특각'으로 불릴 정도다. 게다가 해수면 아래로 3개층이 더 있어서 바다 속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두께 10센티미터 이상의 특수유리로 바다 밑에 수중 휴게실을 만들어 놓아 안에서 밖을 보면 바다세계의 황홀경에 매혹되어 피로가 풀리고 마음이 상쾌해졌다고 한다.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의 증언에 따르면, 이 별장은 김정일 층, 김경희 층, 김정일 자녀층 등으로 나뉘어 한 사람당 두 개 층씩 사용했다고 하며, 김정일의 경호원이던 이영국의 증언에 따르면 별장은 1호각, 2호각, 3호각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1호각은 김정일과 가족이 사용했고, 3층 건물인 2호각은 김정일 호위과가 24시간 대기한 데다가 근처에는 재정경리부 8과 직원들이 숙식하는 5층 건물 3호각이 있었는데, 그 지하에는 행사물자, 냉동 창고, 일반 창고를 뒀다고 한다.


2.2.1.3. 김정일을 위한 지하의 비밀공간[편집]

김정일의 저택과 집무실이 있는 평양 노동당 중앙위 청사 주변은 요새처럼 주변과 격리돼 있는데, 평양 지하에는 김정일과 당중앙 간부들만 사용할 수 있는 지하철이 따로 만들어져 있고 유사시 이동이 가능한 지하터널이 그물망처럼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정일 저택과 당중앙 청사에서 약 10㎞ 정도 지하터널이 만들어져 있고 용성구역 인민무력부에서 지하벙커까지 약 5㎞ 구간은 모두 지하터널로 연결돼 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지하철 옆에는 김정일 전용 지하도로가 따로 건설돼 있었는데, 중구역에 있던 김정일의 저택은 곧바로 용성구역의 인민무력부와 전시 지하사령부까지 모두 터널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비밀 지하터널은 일반 시민들이 사용하는 지하철과 똑같은 크기에 일반 승용차들이 왕복할 수 있는 너비라고 하는데, 지하 건설을 잘 아는 한 군인은 "김정일의 지하터널들이 평양 지하철 옆에 건설된 것은 비밀보장과 유사시 공기주입과 통풍을 위해서다. 산소공급이 안 될 경우 민간 지하철을 막아서라도 김정일 전용 터널에는 무조건 산소가 공급되게 만들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40][41]

이 비밀 터널은 7총국 산하 제1국 특수공병부대 2만~4만 명이 동원돼 1980년 초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김정일의 안전을 위해서 비밀터널 건설은 멈추지 않았을 뿐더러 한번 건설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최신 설비들[42]로 바꿔가며 지속적으로 성능 보완을 해왔다고 한다.

용성구역 인민무력부 뒷산에서 전시사령부까지의 지하터널은 평양 중심부와 연결돼 유사시 김정일과 그 측근들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지하요새였는데, 용성구역 지하요새 말고도 남포를 통해 바다로 도주할 수 있는 지하터널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연평도 포격전 이후 미국의 항공모함이 서해로 진입하자 김정일이 숨은 곳은 바로 용성구역에 위치한 전시사령부 지하벙커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지하시설 역시 최첨단 호화시설을 갖춘 곳으로 수개월을 지하에서 견딜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됐다고 한다. 지하벙커 주변에는 국가보위부와 인민보안부 청사들이 있고 인민군 특수부대들이 밀집해 있어 오직 김정일 부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1차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고위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에서 김정일 비밀 터널의 실체는 김정일 측근이나 최고위 간부를 제외하면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실제로 평양에서 30년 이상을 살았던 한 탈북자는 "평양 지하철 옆에 (평양 지하철과) 똑같은 크기의 지하터널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2.2.1.4.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편집]

놀랍게도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이 여러 채의 별장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은 특수부대가 호화 시설을 건설하기 이전인, 별장 공사 과정에서 터 닦이나 골조공사에 동원되는 일이 잦았기에 김정일이 현지 시찰이나 업무를 위해 이동할 때 해당 지역의 특각이나 초대소에 머문다고는 공공연하게 알려졌기는 했으나, 북한 정권의 은폐와 탄압의 영향으로 김정일의 별장이 상술한 것처럼 초호화판이라는 것은 생각치도 못했다.

오히려 북한 주민들은 "장군님"은 전국 곡곡을 현지지도 하느라 항상 바쁘고 현지지도를 하다가 어디 갈 수는 없는 노릇'장군님'이 남이 쉬는 곳에서 같이 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라며 김정일의 별장이 많은 것을 분노는 커녕 별다른 반감도 느끼지 못하고 당연하게 여겼다고 한다. #

심지어 한 탈북자는 북한에 살 적에 김정일이 별장에 머물며 휴가를 보내는 것을 '지도자의 특권'으로만 알고 있었으나 남한에서 일반 주민들이 가족들과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 다니며 휴가를 즐기는 문화를 보고 놀라워했다고 한다.[43] #


2.2.2. 미식가[편집]



김정일의 사치스러운 식생활에 대해 다룬 영상.
고난의 행군 당시에도 고생을 한다고 거짓선전을 하면서도 실제론 남한 사람들도 상상도 못할 산해진미를 맛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44]

잠은 쪽잠이 제일 달고 밥은 줴기밥이 제일 맛있다.

김정일이 생전에 했다는 교시.[45]

후술할 김정일의 생활을 보면 실소도 안 나오는 망언 중의 망언이다.


대단한 미식가로 매우 유명한데, 김정일은 선천적인 미각도 굉장히 예민한 데다 어린 시절부터 좋은 것만 먹어와서 그런지 입맛이 엄청 고급이었다고 한다. 20년 넘게 그의 전속 요리사로 일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연회에서 만든 초밥에 실수로 설탕을 평소보다 10g 정도 적게 사용했는데 김정일만이 이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46]

후지모토는 김정일이 최상품의 과일, 생선, 육류 등의 식재료 구입을 위해 전속 요리사들을 세계 각지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돼지고기, 체코에서는 맥주, 중국우루무치시에서는 멜론포도, 동남아시아 각국에서는 각종 열대과일, 이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캐비아, 일본에서는 생선, 간장조미료, 그리고 고급 을 구입했다고 한다. 한 번은 1,200kg나 되는 인도다랑어를 구입한 뒤 신선도 유지를 위해 항공사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평양으로 급송해 김정일이 보는 데서 해체하기도 했다고 한다.

후지모토에게 메기 요리를 먹고 싶다면서 일본에 단 하나 있다는 메기요리 전문점에 찾아가 요리법을 알아오라고 시킨다거나, 한 번은 일본 백화점으로 가서 개당 1,500엔짜리 [47] 쑥으로 만든 찹쌀떡을 100개나 사 오도록 해서 먹어보고는 맛있다고 감탄하면서 "왜 우리나라 요리사들은 이런 걸 못 만들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후지모토 겐지도 갖가지 진미들을 김정일에게 권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성게알이다. 김정일은 처음에 성게알을 먹을 때는 영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먹더니 이윽고 엄지를 추켜올리며 "후지모토, 맛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김정일은 또 초밥을 매우 즐겨서 중풍으로 앓아누워도 초밥을 못 먹는다면서 불안해했다고. [49][50]

아래는 김정일의 평범한 일주일 식단으로, 출처는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의 요리사>」. 심지어 이건 주 요리만 나열한 것이고 부채(副菜)까지 합하면 20~30가지는 된다고 한다. 거기에 데일리NK와 김정일의 식사에 대해 공동 연구를 진행했던 신라호텔 조리부 최인수 과장은 2005년 6월에 데일리NK와의 전화통화에서 "김정일 먹는 음식은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가격산정이 어렵다"라고 하면서 "전체 음식 중에 캐비어가 200만 원을 호가할 것으로 보여 가장 비싼 음식으로 추정된다"고 추산했다.

파일:김정일식단.gif
김정일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가 증언한 2001년 3월 당시 김정일의 식단
3월 25일: 소천엽랭채, 꽃간나우지무우초침, 메추리알랭, 꿩편구이, 쌀국수 볶음, 일품버섯볶음, 소쫄뚜기튀기은행, 통배추함찜, 단고기국, 조밥, 홍차.
3월 26일: 감자쌀라드, 야자상어날개탕, 물고기목이버섯술찜, 염소고기샤슬리크, 자라함찜, 게장서란화볶음, 백미밥[51], 콩나물국, 통배추볶음, 풋고추장, 홍차.
3월 27일: 다랑어도로, 쏘가리, 깡빠치, 뱀장어카비아, 네기도로, 이나리 (이상 스시) 도비새우뎀뿌라, 나메꼬버섯[52]된장국.
3월 28일: 풋미역초장무침, 상어날개소라탕, 가재미간장찜, , 버섯구이, 통배추밥조개살찜, 백미밥, 무우국, 하루말린고등어구이, 풋고추명란찜, 홍차.
3월 29일: 왕새우회, 남새생채, 대군상어날개홍쏘, 물고기룡정차[53]철판구이, 비둘기간장찜, 동과참나무버섯찜, 카레밥, 맑은국, 홍차.
3월 30일: 들버섯생채, 죽생상어날개탕, 쏘가리룡정차찜, 참깨닭구이, 라클레트치즈구이, 백미밥, 떡국, 도라지볶음, 가지볶음, 홍차.

물론 위 요리들 상당수는 요리법만 알고 재료만 구할 수 있다면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해 먹을 수는 있겠지만, 김정일이 먹는 밥상에 올라가는 식재료는 상식을 초월한 제조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특급 상품이므로 일반인이 김정일이 먹는 수준의 음식을 먹어봤을 확률은 0%에 가깝다.

일반인들이 각종 시장을 통해 어찌어찌해서 재료를 구하여 요리를 시도했다 쳐도 결국 김정일이 먹었던 음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김정일이 먹은 과일은 당도를 높이기 위해 1그루당 5kg짜리 설탕 1포나 개고기를 비료로 줘서 수확한 것이었으며, 야채류는 유리온실에서 온천수로, 뿌리 작물은 심산의 부직토만을 거름으로 썼고, 심지어 마시는 물도 북한에서 가장 이름난 생수인 신덕샘물만, 그 중에서도 전용 취수구에서 따로 받아낸 것만 마셨다.

쌀밥 또한 평범한 쌀밥이 절대 아니었는데,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의 경호원으로 일했다가 탈북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호위사령부 소속 식료공장에서는 찰기가 풍부하기로 유명한 황해남도 재령쌀만을 잡아 100여 명의 여자들의 손으로 김정일이 먹을 쌀알을 깨진 것 없이 알알이 골라내게 해 모양이 예쁜 것만 골라내게 한 후, 그 쌀에다가 재령 벼를 키운 재령의 물을 가져다 재령볏짚을 태워 만든 밥만을 먹었다고 한다. 참고로 전직 김정일 경호원의 말에 따르면 재령을 떠나 다른 고장의 물로 밥을 지으면 찰기가 떨어진다고 하며, 탄불이나 장작불보다 볏짚을 태워 밥을 지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

더구나 김정일은 2001년 7월 26일~8월 18일에 러시아를 방문할 때 전용 열차를 시베리아 서부의 옴스크시에 들렀을 때는 현지에서 조달된, 반쯤 훈제된 가슴 부위의 쌀로(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돼지 비계)를 맛보고는 '진짜 쌀로가 아니다'라고 했고, 불가리아식 피클을 보고는 '진짜는 소금으로 절여야 하는데 이건 식초로 절였다'는 식으로 트집을 봤으며, 심지어는 마요네즈와 치즈에 튀긴 작은 동전 크기의 만두가 나오자 '만두는 좀더 크게 해서 육수에 삶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잇값 못하는 음식투정을 부렸다.[54] 물론 당시 김정일이 탄 전용열차 안에는 프랑스산 와인이 가득 차 있었으며, 예정 도착역에는 비행기로 직배송한 이탈리아산 살아 있는 바닷가재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김정일을 보좌한 전 러시아 특사이자 2000~2005년에 극동 연방관구 러시아 연방 대통령 전권 대표를 지낸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Konstantin Pulikovsky, 1948~)의 증언인데, 덤으로 풀리코프스키는 김정일은 프랑스에서 공부한 훌륭한 요리사들이 만든 15~20가지의 요리를 한 끼에 먹었으며, 이 많은 요리는 시식을 하듯 은젓가락으로 조금씩 먹었다고 증언했다. #

그리고 2001년에 김정일이 북한에서 선상(船上) 파티를 열 때에는 프랑스 출신 요리사를 공수해오고는 20가지가 넘는 프랑스산 치즈와 포도주를 비롯한 요리에 필요한 재료는 주문과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즉시 들어왔고, 자신이 먹는 것은 최고여야만 한다고 믿었던 김정일은 외국에 나간 북한 외교관들에게 근무지의 명산품을 보내라는 지령을 보내 그 유명한 곰발바닥도 아닌, 낙타 발바닥[55] 같은 진귀한 요리를 먹기까지 했다고 한다. 더욱이 상술한 전직 경호원의 말로는 곰발바닥도 앞발과 뒷발의 용도가 달랐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국민들이 일일이 찾아서 바쳐야 했던 곰의 발바닥 중 힘을 더 쓰고 활동량이 많아 칼로리가 풍부하고 탄탄한 앞발만이 김정일의 식탁 위에 올라갈 수 있었고, 비교적 칼로리가 떨어지는 뒷발은 북한을 방문한 외국 수반과 외교관들, 주변 측근들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 세계 각국의 고급 요리를 즐겼지만 주로 깊고 진한 맛을 좋아해서 중국 요리를 가장 많이 먹었다고 하는데 특히 샥스핀을 좋아해서 사흘 내내 샥스핀 요리만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참고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기본적으로 기름기 많은 음식을 좋아했으며, 특히 다랑어뱃살초밥·성게초밥을 좋아했다고 하며, 김정일이 음식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첫째가 눈(모양과 색깔), 둘째가 향기, 셋째가 맛'이었다고 한다. # 후지모토가 증언한 김정일의 식단

또한 그는 서양 요리 중에서도 피자를 무척 즐겨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에르마노 플라니스(Ermano Furlanis)라고 하는 이탈리아 요리사가 1997년 당시 북한으로 출국을 하여서 김정일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뒤 북한의 양식요리 학생들에게 피자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고 교육하는 내내 두려움에 시달렸다고.#[56]

굉장한 애주가[57]위스키조니워커 스윙을, 코냑헤네시 XO를, 맥주발티카 No.5 졸로토예(Золотое), 와인샤토 디켐(Château d’Yquem)을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코냑을 광적으로 좋아해 한때 1년에 약 80만 달러어치의 헤네시 파라디(Hennessy Paradis) 코냑을 구매했으며 헤네시 사의 단일 고객 중에서 최대 구매자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자신의 관저에 대규모의 개인 술 창고를 마련해놓고 전 세계 각국의 명주 수만 병을 모아놓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한번은 자신의 술 창고에 후지모토 겐지를 데려가 "이중에 없는 일본 술이 있나 살펴보라"고 시켰는데, '산토리 임페리얼'이 없다고 하자 다음 일본 출장 때 꼭 사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도 김정일의 잔인한 성격은 어딜 가지 않아서, 자기가 먹을 식재료를 운반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가차없이 응징했다. 김정일의 혀가 무지하게 까다로웠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식재료를 공급하는 사람들은 레알 헬게이트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정일이 먹는 생선초밥을 만들 생선은 전속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직접 외국에 가서 고르고 급속 냉동 처리해서 북한으로 보내는 과정을 거쳤다. 하루는 후지모토가 북한에서 난 생선으로 초밥을 만들긴 했는데, 김정일은 단번에 맛없다고 화내면서 "이딴 건 두 번 다시 가져오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58]

아래는 북한 최고 지도자의 건강과 장수를 관리하는 연구소인 만수무강연구소에서 근무하다 탈북한 연구원들 사이에서 김정일이 먹어치운 식품들에 대해 증언한 내용들이다. 읽다 보면 그저 실소만 나온다. 개구리 기름 등 단순 별미가 아니라 특정 신체기능에 좋다고 먹었다는 음식들은 실제로 효과가 있을지 불분명함을 명시한다. 어쨌거나 김정일은 주체할 줄 모르고 체중이 불어나는 아들 김정은에 비해서는 상당히 건강관리를 한 것이 사실이다. 80년대에는 자신이 너무 비만이 된 것을 깨닫고 한동안 계단 오르내리기를 열심히 하면서 다이어트를 했다고 이한영이 증언하기도 했다. 이때 김정일을 만났던 최은희도 김정일이 80년대 초반에 살이 많이 빠진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다만 얼마 안가서 다시 폭식을 하는 바람에 요요가 와서 살이 쪘다고. 그리고 술자리에서도 업무를 봐야 했기 때문에 만취할 정도로 마구 퍼마시진 않았는데 한번은 황장엽이 김정일 연회에 참석해서 김정일이 자신에게 권하는 술을 억지로 한잔 마셨는데, 알고보니 김정일만 의사 권고 때문에 술이 아니라 물을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 그외에 기름진 초밥을 한동안 먹지 않는 등 식단조절을 한 적도 있었고 2000년부터는 금연도 하였다. 1998년부터 가택연금을 당했다가 2000년에 용서를 받고 다시 연회에 초대받은 후지모토 겐지는 김창선으로부터 김정일이 담배를 끊었다는 통보를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자신의 건강에 상당한 자신감을 보이면서 자신이 80-90대까지도 현역에 있을 것이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기도 하였으나 2008년에 뇌졸중이 오는 바람에 결국 도루묵이 되었고 특히 뇌졸중 발병 이후에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것이 방송에서 포착되기도 했다.



2.2.3. 결과[편집]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중동 왕족들처럼 과한 사치를 벌이는 지도자들은 많았지만, 김정일은 국가 경제의 기반을 붕괴시키면서까지 사치를 했다. 1970년대 권력을 장악한 이후부터, 김정일은 혁명 자금이 필요하다는 명분 하에 금광이라든가 북한의 특산품송이버섯과 같이 가장 수익성이 좋은 사업체나 기업소를 엄선해 내각 경제에서 완전히 분리하였고 각종 밀수, 마약 생산, 위조지폐 유통 같은 범죄 행위를 통해 외화를 조달하였다. 수입원들은 내각 기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독자적인 경제 체제가 되었고, 이는 조선로동당 재정경리부를 통해 '당 경제'라는 미명 하에 본인의 개인적인 사치에 이용되었다. 이후 선군정치라는 명목으로 군 경제도 인민 생활 경제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버리고서는 이렇게 모은 돈을 사치와 우상화 사업, 군비 증강에 사용하였다.[59]

1980년대 이후의 중국과 베트남처럼 개혁 개방 정책을 펼치거나 국방비 축소하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60] 인민들을 굶주리게 만든 걸 보면 한국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연산군이나 충혜왕을 능가한다. 더구나 연산군이나 충혜왕은 빨리 무너지기라도 했지, 김정일은 '권력 유지'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해서 인민들을 오래 쥐어짰으니 더욱 악랄하다.

예를 들어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천만 국민들이 너무나 굶주린 나머지 나무껍질 죽과 이탄[61], 심지어는 인육까지 먹어야 할 정도에 이르고 수백만 명이 쫄쫄 굶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김정일은 파렴치하게도 "이 세상 위인들 가운데 김정일 동지처럼 배를 곯아본 위인은 없을 것이며, 이 세상 위인들 가운데 김정일 동지처럼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고생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62]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은 염장무와 구운 감자 몇 알, 줴기밥[63][64]을 먹어가고 얇아질대로 얇아져 추위가 스며드는 단벌솜옷을 입으면서 야전승용차 안에서 쪽잠을 자가며 인민들을 걱정하며, 이후에도 식량난이 해결되지 않아 하루 한 끼의 죽만 먹고 있는 데다가 그 죽도 인민들이 배불리 먹으라고 나눠주었다" "김정일은 고생을 겪는 인민들 생각에 한 공기 죽을 놓고도 수저를 들지 못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등의 거짓 선전들을 해대며 스스로를 있지도 않는 애민정신을 가진 지도자로 포장했다.

이를 넘어 김정일과 측근들이 연회에서 먹다가 남은 산해진미들은 아무도 모르게 호위국 인근 철망을 친 강변에서 호위사령부의 1개 소대가 굴삭기 한 대를 가지고 죄다 땅에 파묻어버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직 김정일의 경호원은 "하루 한 끼 도 못 먹어 비틀대는 주민들이 낭비에 대해 알면 충성도가 그만큼 떨어질테니 그렇지!" 라고 촌평하였다. #

더구나 김정일의 식생활은 사치로 악명높았던 다른 독재자들과도 대비된다.

  •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65],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66], 적도 기니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심지어 김정일도 능가하는 수준의 사치를 벌인 필리핀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이멜다 마르코스는 김정일처럼 초호화 별장을 세우고 명품을 사들이는 것을 좋아해도 채식 위주의 서민적인 메뉴를 좋아하여 식생활에는 그렇게까지 큰 돈을 쓰지 않았다.
  • 세계 최악의 부패 독재자로 꼽히는 수하르토는 식생활에 욕심이 있기는 커녕 아예 장관들과 컵라면을 끓여먹는 것을 좋아했을 정도로 소박한 식사를 즐겼다.[67]
  •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인 폴 포트는 당시로서는 호화로운 음식을 먹긴 했는데, 그것도 김정일처럼 샥스핀과 고급 초밥을 즐겨먹은 것도 아니라 말린 게나 어묵과 땅콩을 곁들인 태국식 요리, 사슴 및 멧돼지 고기, 구운 닭고기, 구운 생선, 신선한 과일, 브랜디, 중국산 술, 뱀의 피를 곁들인 코브라 수프 정도로, 사슴 고기와 코브라 수프 정도를 빼면 대부분이 오늘날 서민들도 식당에 가면 충분히 사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68]
  • 마오쩌둥은 수하르토처럼 서민적인 음식을 즐겨 먹었는데, 이 글을 보면 알 수 있듯 마오쩌둥이 부농 출신이란 것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상당히 소박한 음식들이다.[69]

다만 예시로 든 해외 독재자들은 독재 체제의 시작점이 된 1세대 독재자들인 반면에 김정일은 김일성의 뒤를 이은 2세대 독재자라는 것은 감안해야 하는데, 상술한 1세대 독재자들의 자녀들은 김정일 못지 않은 망나니들이였다.[70] 다만 대부분은 아버지인 1세대 독재자가 몰락한 이후 권력을 이양받지 못해 '독재자의 자녀'로서나 망나니일뿐 그 자신이 또 다른 독재자로서 사치를 부린건 아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세습하여 독재자의 위치로서 독재자의 자녀급 사치행각을 선보인 김정일이 특이한 케이스이기는 하다.

사치를 하면서 평소에도 김정일만큼의 호화 식사를 즐긴 인물은 아버지 김일성을 제외하면 모부투 세세 세코[71]도 있지만, 이쪽은 애초에 도둑정치라는 말의 어원이 될 정도로 부패한 지도자였던 데다가 국가 경제를 침체시키는 능력이 김정일도 뛰어넘다 못해 거의 초능력의 범주로 바라봐야 할 정도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지도자였다. 그리고 우간다이디 아민[72]도 풍족한 식사를 했으나 김정일처럼 해외에서 직수입한 재료로 만든 특제 요리를 먹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이집트의 마지막 국왕인 파루크 1세[73]도 사치를 하면서 먹는 것을 엄청 즐기긴 했으나, 적어도 국민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호화로운 식사를 하거나 자신만의 전용 재료로 만든 음식만 먹어대지는 않았으니 김정일보다는 훨씬 낫다. 그리고 파루크 1세는 실권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백성들과 국력에는 해를 광범위하게 미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렇게 세간에 알려진 김정일의 사치는 프로파간다용 과장이 아닌 진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 사실 북한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정보의 불명확성과 풍문성이 비대한 반면[74] 김정일의 사치에 대한 증언에 대한 출처는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75], 김정일 전속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이탈리아 요리사 에르만노 푸를라니스, 김정일을 직접 수행한 러시아 외교관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납북되어 김정일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영화인 최은희, 신상옥 등의 김정일을 직접 마주하며 그의 사치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람들에게서 기인하며, 김정일에 대해 굳이 과장되어 말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니 증언들에 대한 신뢰도는 어느 탈북자의 카더라 통신에 비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다.

만약 김정일이 자신의 사치를 중단하고 그에 쓰일 돈을 식량 구입에 사용하였다면 고난의 행군 시 사망자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과 탈북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김정일의 사치에 대해 다룬 1996년 2월 15일자 중앙일보 기사 참고로 이 기사가 나온 시기는 고난의 행군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지 1달도 넘을 때였다.

물론 김정일의 친부인 김일성은 아들이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76] 김일성은 주변 사람들에게 김정일은 사치를 싫어해 옷차림도 항상 검박하게 넥타이 없는 양복이나 점퍼를 입고 다니는 데다가 식생활도 아주 검소해 어렸을 때부터 특식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윗 사람들에게 대접하곤 했다고 주장했으며, "내가 조밥에 된장을 먹으면 그도 조밥에 된장을 먹고, 내가 강낭죽(옥수수죽)에 소금을 쳐 먹으면 그도 강낭죽에 소금을 쳐 먹었으며, 지방에 나가 현지지도를 하면서 감자 몇 알로 끼니를 때우면 그도 감자로 끼니를 때우곤 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며 김정일이 '검박하게' 생활하며 사치한 생활을 하면서 낭비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까지 주장했다. # 물론 이는 김정일이 해외로 식량을 사러 갈 때 한 번에 200~300만 엔[77]을 썼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술한 위선적인 발언과 자웅을 겨루는 망언 중의 망언에 불과하다.

후지모토가 탈북한 2001년 기준으로 달러-엔 환율이 1달러당 121.4엔이었으니 김정일은 해외에서 수입한 재료값으로만 2001년 환율로 16,474~24,711$[78]를 쓴 셈이다. 참고로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11,561$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김정일은 북한보다 압도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된 한국인들의 1~2년치 국민소득을 넘는 돈을 오로지 해외에서 수입한 음식 재료값만으로 썼다는 말이 되며, 더구나 김정일은 이런 행보를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2.3. 잔인성[편집]


1984년 국가안전기획부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서 작성한 김정일 대외비밀 문건이 있다. 이 문건에 나오는 사례만 보더라도 김정일의 잔인성이 쉽게 드러난다. 김정일은 ‘김일성 부자 세습체제’를 반대하는 인사를 극비리에 숙청하기 위해 국가정치보위부 내에 비밀단체인 암살대를 조직, 직접 지휘했다.

암살대는 의사, 저격수, 운전수 등 15~20명으로 이뤄져 있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령사항을 즉각 수행한다. 1976년 3월 교통사고로 발표한 당시 정무원 부총리 남일의 사망도 실은 ‘암살대’에 의한 암살이다. 김정일은 남일이 소련의 비호하에 주석이 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죽이기로 마음먹었고, 김정일은 암살대에 평양남포간 고속도로에 대형화물트럭을 세워놓았다가 달려오는 남일의 승용차로 돌진, 충돌하여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암살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위장 보도를 지시하였다.

사례-1. 조선로동당 국제부 부부장 최준덕이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재떨이를 머리에 던져 심한 상처를 입혔음.[79]

1977년 첩 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공관관리책임자 이수헌을 처형.

1977년 자신의 난잡한 여자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연락군관 추태식을 처형.

1978년 난잡한 여자관계를 만류한다고 로동당 선전선동부부장 박성수를 처형.

1980년 김일성에게 김정일의 사생활이 너무 방탕하고 퇴폐하다고 진정하는 익명의 투서사건이 발생하자 2개월의 수사 끝에 선전선동부부부장 이명재의 처를 범인으로 색출, 남편이 직접 총살토록 조치. 이 사건에 대해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는 생전 “김정일 비밀파티에 이명재 당시 당 부부장이 참석했는데 이명재 부인이 비밀파티 사실을 알고 김일성에게 바로잡아 주라고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편지가 중간에 김정일에게 들통이 나서 이명재가 '저런 년은 내가 처단하겠다.'라고 말하고, 이명재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인을 쏴 죽였다”라고 했다. 이명재가 부인을 총살하는 것을 본 김정일은 이명재를 사면하고 우대하며 총애했다.

1981년 자신과 정을 통한 간호원 이영미가 부모에게 “나는 김정일을 모시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임신 중임에도 처형.

1981년 자신의 허가 없이 첩에게 모스크바행 비행기표를 사준 공관관리과장 노종일을 첩이 보는 앞에서 마구 구타.

1981년 김정일이 여동생 김경희와 같이 지방여행 시 동행한 예술단원 한 사람이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자 김정일이 이를 보고 권총을 꺼내 총살하려는 것을 김경희가 만류하여 중지.

김정일이 탑승한 차량이 주행 시, 마주치는 모든 차량은 사전 정지토록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하여 머뭇거리거나 늦게 정차하는 차량이 있으면 동승한 비서로 하여금 탑승자를 확인해 반드시 처벌.

김정일이 벌인 대규모 숙청으론 심화조 사건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2.4. 음란성[편집]


대략 1970년대 초중반에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기쁨조를 만들어서 바쳤다. 기쁨조 증언

기쁨조 안에 행복조, 만족조, 가무조가 있는데, 만족조는 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이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기쁨조를 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나 기쁨조를 나올 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각서를 쓰게 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인민국 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김일성 앞에서 스트립쇼를 하면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 기쁨조를 즐겼다는 이야기이다.[80]

김정일은 삼처(영숙, 성·나이 미상) 외에 첩 2명과 생활하면서도 주변의 근무여성을 특별양성하여 성적유희로 농락했다.

김정일은 1977년부터 매년 시·도 예술전문학교 졸업반 여학생 가운데 미모의 30여 명을 선발, 평양적십자병원 의대에 1년 과정의 특설 반에서 기본간호교육을 시키고 홍콩·마카오 등지에 파견하여 안마술 등 단기간의 연수를 시켜 자신이 최종심사한 여자를 집무실·공관·별장 등에 배치하여 즐겼다. 또 영화배우 유진희 (〈당의 참된 딸〉 주인공)·홍영희(〈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최삼숙·이정순·채수련·오화자·고지미 등 10여 명과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10여 명·전용타자수·담당간호사 등 숱한 여자들과 성적유희를 자행했다. 김정일은 이들에게 공훈 배우 칭호를 수여하고 고급물품을 선물했다. 김정일은 변태적인 기질이 다분한데, 주말마다 각종 연회를 열고 무용수들에게는 나체로 춤을 추게 하며 참석자(중앙당 부부장급 이상)로 하여금 이들을 애무토록 한 뒤 즐기는 등 변태적 음란 기질자임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김정일은 최소한 10명의 사생아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러시아 일간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Komsomolskaya Pravda)》지는 1997년 9월 23일 이런 사실을 폭로했다.

이 신문은 ‘수령과의 잠자리’라는 제호 아래, 기쁨조를 비롯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여성 편력을 거의 전면에 걸쳐 소개한 뒤, “우리(러시아) 여성들도 김정일의 관심을 비켜가지 않았다”며 “러시아 여성 연예인들이 엄청난 공연료를 받고, 김정일 개인손님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러시아 여성 연예인들의 평양 방문은 북한 특수기관에 의해 비밀리 이뤄지고 있는데, 이들은 많은 출연료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 단 한 차례도 공개공연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김정일 손님으로 평양을 방문한 모스크바 여성 합창・무용단원들을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목격함으로써 처음 드러나게 됐으며, 러시아 최고 인기 여가수 알라 푸가초바(Alla Pugacheva)도 1991~1992년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김정일에게 수많은 사생아가 있으며, 확인된 아이만 하더라도 10명 정도”라고 덧붙였다.


3. 가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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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의 김정일, 김일성, 김경희.
  • 친남동생
    • 김만일 - 러시아 이름은 슈라. 4살 때 평양의 저택 마당에 있는 연못에 빠져서 익사.
  • 친여동생
  • 이복여동생
    • 김경진
    • 김백연 - 1987년생.
  • 이복남동생
    • 김평일 - 체코 주재 북한 대사
    • 김영일 - 2005년에 사망
    • 김현 - 김일성이 주석궁 안마사에게서 얻은 아들로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과 동갑이라 한다. 이 안마사에 대해 북한 외부로 알려진 것이라고는 성이 제갈씨라는 게 유일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졌으나, 2015년에는 살아있으며 외교관으로 일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단 생년은 1971년생.


3.1. 여자관계와 자녀들[편집]


홍일천, 성혜림, 김영숙, 고용희, 김옥 이렇게 3~5명과 결혼했다고 추정된다.

사실 김정일의 정식아내가 누구인지는 정보가 없다. 아래의 사람들도 대부분이 동거관계였던 여자들로 탈북자의 증언이나 북한 공식석상에서 인정받는, 정확히는 자녀들이 김정일의 자녀로 인정받는 어머니들만 서술하고 있고 실제로 김정일이 누구와 정식결혼을 올렸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때문에 김정일은 여자관계가 상당히 복잡하고 난잡한 인간이라 김정일이 누구를 만났는지, 그들 사이에서 누가 태어났는지 알 방법이 없다. 당장 국가 공식기관으로 김정일과 고위간부를 위한 기쁨조에 수십명의 여자들이 배치(?)[81]되어 있어서 몇명이 김정일과 관계를 맺어서 자녀를 보았는지 파악이 불가능하다.

'김정일 로열패밀리' 를 쓴 이한영의 증언으로는, 이외에도 정도나 깊이만 다를 뿐 여기저기에서 여러 여자들과 무슨 댁 무슨 댁 하면서 살림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고 한다. 결국 비공식적 관계와 자녀들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3.1.1. 홍일천[편집]


김정일 주변인의 증언 외에도 주로 중국의 소식통을 통해서 김영숙 이전에 홍일천이라는 여성이 김일성이 직접 간택한 첫번째 정실 부인이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으론 전 중앙위원회 부부장 박병엽이 있는데, 홍일천은 김정일의 대학 동기로 1965년 김정일과 결혼해 1968년 딸 김혜경을 낳았으나 홍일천이 김정일과 결혼한 후에도 정치활동을 이어나가려 하자 이로 인한 불화가 생겨서 3년 만에 이혼했다고 한다. 하지만 뒤에 서술된 여성들과 달리 이들의 결혼생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손에서 나온 명확한 수기나 증언, 물증이 없어서 진위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82] 박병엽의 증언이 그나마 1차 사료에 가깝겠지만 박병엽은 북한 로열패밀리에 대한 오정보를 많이 제공해서 이 부분에 있어선 믿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리고 전직 정무원 총리였던 강성산의 사위였던 탈북자 강명도는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하기 이전에 김일성이 직접 간택해 준 어떤 여성과 약혼했지만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이 여성이 바로 홍일천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홍일천은 혁명 유자녀 출신으로 제7~8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바 있으며 이후 정무원 보통교육부 부부장 등을 거쳐 현재 김형직사범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김정일과 관계한 많은 여성들이 주로 김정일의 사적인 영역에서 머물렀던 것과 달리 공적인 활동이 활발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정말로 김정일의 아내였다면 가능할리가 없다는 반박이 많다.

북한 측은 1997년 남북한 학자들간의 대화에서 홍일천이 김정일의 부인이었냐는 질문에 경악하면서 남조선의 황당한 모략이라고 일축했다. 이한영도 홍일천과 김정일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형직사범대학 교수로 직접 홍일천을 학장으로 모셔본 김현식 교수도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소리다. 아마도 용모가 단정하고 김정일과 동기동창이라 그런 헛소문이 난 것 같았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3.1.2. 성혜림[편집]


파일:attachment/김정일/성혜림.jpg

김정일은 남산고급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면서 김일성과 돈독한 사이였고 또 자신의 학창 시절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한 원로 작가 리기영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때 친구의 형인 리평과 결혼한 형수였고 자신보다 5살 연상이었던 배우 성혜림을 처음 만났다.

김정일은 이후 당 선전선동부에서 영화계 현지 지도를 하면서 성혜림과 다시 만났고, 점차 관계가 깊어지면서 성혜림은 아이까지 있는 상태로 전 남편과 이혼했다. 리기영은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작가동맹위원장까지 지냈지만 며느리를 돈독한 사이였던 수령님의 아들에게 빼앗긴 충격 때문에 이후 작품 활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혜림은 리평과 이혼한 뒤 김정일이 28세 되던 해인 1969년에 배우 활동을 그만 두고 김정일이 세운 200평 규모의 15호 관저에서 비밀 동거를 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성혜림은 김정일의 첫째 아들인 김정남을 낳게 된다. 김정일은 생에 처음 본 자식이자 첫아들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1990년대에 탈북한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83]이 찍은 개인 비디오에는, 김정일이 직접 김정남의 젖병을 든 채로 오줌을 받거나 김정남을 업은 채 자장가를 불러주는 모습도 담겨 있다고 한다. 리한영의 증언으로는 김정남의 생일 선물을 사주기 위해 선물 구매단을 외국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선물의 액수가 1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삼촌이자 정적인 김영주와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절대로 흠 잡힐 일을 만들지 말아야할 김정일에게, 유명 원로 작가 집안 출신의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고 사생아까지 낳은 상황은 절대로 알려지지 말아야 할 비밀이었다. 이 때문에 동거녀 성혜림과 김정남의 존재는 여동생과 최측근 부하들 이외에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 그리고 비밀 유지를 위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입막음을 구실로 전부 죄 없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이런 황당한 일들은 단지 성혜림의 친구로 김정일과의 동거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 가족이 요덕수용소로 끌려간 뒤 탈북한 김영순이 쓴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라는 책에 나와 있다.

공식적인 결혼 후에도 김정일은 두번째 동거녀인 성혜림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지만 성혜림은 김정일의 결혼으로 빚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신경쇠약, 불안 발작을 일으켰다. 결국 성혜림의 어머니의 권유로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 뒤 계속 그 곳에 머물다가 2002년에 사망했다. 다만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이자 그 전에 탈북한 이한영이 대한민국으로 망명시키려 시도했지만 이한영 본인이 피살되면서 무산됐다.

현재와서는 성혜림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과거 북한 로열패밀리에 대한 정보가 검증이 안됐던 시절에는 성혜림과 김정일이 동거했다는 주장도 뜬소문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된 박병엽은 성혜림은 김정일과 아무 사이도 아니며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하려는 김정일은 오히려 여자관계를 조심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김정남도 사실 김영숙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는데 이제와선 황당무계한 얘기로 밝혀졌다.



3.1.3. 김영숙[편집]


김일성이 직접 며느리 감으로 선택했다고 알려진 여자다. 김영숙의 아버지는 청진공상대학 부학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영숙 본인은 중앙당의 말단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서윤석이 김영숙을 비롯한 중앙당 여비서 목록을 김일성에게 올렸고,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이 중에서 한명을 고르라고 하자 김정일이 김영숙을 골라 1973년 10월에 결혼했다고 한다. 당시 성혜림과 동거 중이였던 김정일은 아버지의 명령으로 김영숙과 억지로 결혼했으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성혜랑의 수기에 따르면 여동생 김경희가 결혼식에 데려가려고 사택에 찾아왔을 때도 자는 척하며 가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영숙이 김정일의 유일한 정실 부인인 셈인데, 김영숙에 관한 정보라고는 고향과 아버지 직업 정도밖에 알려진게 없다.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 김정일과의 사이에서 두 딸 김설송, 김춘송을 낳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두 자매도 밝혀진 정보가 딱히 없다.


3.1.4. 고용희[편집]


파일:attachment/김정일/고영희.jpg

1952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서 1962년에 재일교포 북송 사업으로 북한으로 건너가서 1970년대 초반부터 만수대예술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 김정일과 교제를 시작해서, 1976년부터 동거하면서 80년대에 아들인 김정철김정은, 딸 김여정을 낳게 된다. 13년동안 김정일 일가의 밥상을 책임지고 고용인들도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등, 정실 부인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후 유방암으로 2004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 오랫동안 '고영희'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용희'가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3.1.5. 김옥[편집]


파일:attachment/김정일/지워진김옥.jpg

오른쪽 아래 사진을 제외한 나머지 사진은 김옥이 아니라 김선옥이라는 전혀 다른 여성이라는 의견이 있다. (링크수정)

파일:external/image.mt.co.kr/image_display_origin.php?ImageID=2011012112410945751_3.jpg
92년 <우리의 지도자>라는 화보집에 뒷편에 보이는 김옥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몇년 뒤 사진에서는 지워져 있다.

고용희 이후 5번째로 김정일의 부인이 된 여성은 김옥이었다. 김옥은 1964년생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현 평양음악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재산경음악단에서 활동하다 김정일의 눈에 들어 1980년대 초반부터 서기실(비서실) 과장으로 근무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보좌해왔다.

고용희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비밀 파티 등에도 참석했고 수행 비서에서 간호사 역할까지 맡아 최측근으로 보좌하다가 1990년대 말부터는 고용희가 낳은 아이들을 대신 맡아주는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고용희의 두 아들 김정은과 김정철은 김옥을 존칭없이 옥이라고 불렀지만, 김정일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위간부들은 그를 동지로 존칭했다.

평소에도 김옥과 친자매처럼 사이가 좋았던 고용희는 이 시기 중병으로 몸이 온전하지 않았던 상태였고 자신이 직접 김옥에게 '내 뒤를 이어 김정일과 을 보필해달라' 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의 전속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김정일이 먼저 질문하면 대답할 뿐 언제나 유령처럼 조용히 김정일 곁에서 있었다고 하며, 야심이나 권력욕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소박하고 헌신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껄끄러울 수 있는 고용희와도 친자매 같은 좋은 사이를 유지하며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김옥이 김정일 사이에 자식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김정은이 집권 직후 김옥을 숙청했다는 설도 나도는 등, 엇갈리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숙청설의 경우 일단 표면상으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일 사후 제정된 김정일 훈장의 수상자 중에 김옥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적어도 막후의 영향력은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김정은 집권 10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을 봐서 그다지 대접받는 처지는 아닌 듯하다.


4. 풍자[편집]


파일:로켓몬스터_김.jpg

일본에서 유행했던 짤방. 일명 로켓몬스터 핵지우피카[84]


김정일의 통치를 슈퍼 마리오 시리즈로 표현한 영상. (한국어 자막)

북한 내에서부터 정치범수용소 같은 각종 개막장 정책들로 인하여 북한 주민 2500만명의 삶을 완전히 개판으로 몰고 간 것 때문에 원래도 아는 사람들에겐 유명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심심하면 질낮은 국제적 깽판을 쳐댄 통에, 점차 해외 대중들에게도 그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만 추려서 나열해봐도 납치, 선동, 조작, 먹튀, 성범죄, 고문, 사치, 공개 처형, 마약 밀매, 무기 밀매, 위폐 발행, ,무력시위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엔 공간이 부족할 지경. 특히 2009년부터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여 세계 평화도 위협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능력은 아직 미약하다는 평가가 있고 그냥 기득권 지키려고 그런 뻘짓을 하는 것이라는 평가도 있어서 이걸로 진짜 사고 칠지는 미지수지만, 이 쯤 되면 그야말로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당 최종보스들이 흔히 밟는 왕도를 제대로 밟아가면서 독재자 계의 클리셰로 등극했다. 특히나 외모 관리(?)는 어느 정도 했던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땅딸막한 키에 뽀글뽀글한 파마 머리, 안경, X색의 볼품없는 인민복에 툭 튀어나온 똥배가 묘한 시너지를 일으켜서 강렬한 개성을 자랑하는고로 나름대로 특이한 캐릭터성도 제대로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무튼 이로서 그는 지구촌 뉴스에도 자주 등장하였으며 덕분에 국제적인 유명 인사가 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나마 오사마 빈 라덴, 무아마르 알 카다피, 사담 후세인 정도가 이에 비견될 만한 악당이었으나, 빈 라덴과 후세인은 미국에게 '사냥감'으로 낙인 찍혀서 죽었고, 카다피도 결국 자국민에게 비참한 꼴로 사살당하고 시체까지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단 김정일은 제대로 천수를 누리다 갔기에…

그 때문인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한민족이며 일례로 비밀결사 매의발톱단 THE MOVIE- 총통은 두번 죽는다에도 등장했다. 북미권에서도 김정일을 풍자한 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올 정도. 심지어 예전엔 김정일 코스프레까지 하는 일본인이 있었을 정도였다. 특히 사우스 파크의 제작진인 트레이 파커맷 스톤이 만든 미국 영화 팀 아메리카: 월드 폴리스에서는 대놓고 악당으로 출연하여 엄청나게 까이다가 마지막에 그가 바퀴벌레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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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풍문[편집]


  • # 박지원의 회고에 의하면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에게 사석에서 “주한미군이 통일 뒤에도 한반도에 주둔해야 동북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박지원이 “그럼 왜 그토록 주한미군 철수를 부르짖냐”고 반문했더니, “그건 국내정치용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5.1. 친동생 살해설[편집]


1950년대 말 북한의 로동당부위원장 보좌관을 지냈던 리기봉이 지은 책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김정일은 어린 시절부터 악동이었고, 벌레를 발견하면 밟아죽였다. 1945년 해방김일성의 집은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에 있었다. 1948년 초여름, 그 연못에서 동생 슈라(한국명: 김만일, 당시 4세)가 익사했으며, 6살이었던 김정일은 현장에 함께 있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형제는 연못 가장자리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먼저 연못에서 나온 김정일이, 뒤따라 연못에서 기어올라오는 동생을 몇 번이나 물속에 다시 집어넣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탈출한 전직 외교관 고영환도 자신의 책 <망명 고관이 본 김정일>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1945년 해방 후 김일성의 집은 평양시 상수구리[85]

에 있었다. 1946~1948년 초여름, 김일성의 아들인 유라(김정일)와 슈라(김만일)가 여기에 있는 연못에서 함께 놀았다. 장난꾸러기였던 유라는 슈라에게 물을 억지로 먹이거나, 다리를 끌어당겨 물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못 가장자리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유라는 깊은 곳으로 점점 빠지는 것이 두려워서 4m 깊이의 연못에서 나오려는 동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동생이 얕은 곳으로 가려고 하면 거꾸로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어푸, 어푸’ 하면서 동생은 물을 마시고 있었으나, 유라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곳에 함정이 있다’는 말처럼 동생은 익사해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일성은 "연못의 물을 전부 빼버리고 흙을 채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오늘날 그 곳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잔디만 자라고 있다.


이기봉과 고영환 두 사람의 기술은 시기는 다르지만, 흡사 사고를 목격한 것처럼 상세하다.


5.2. 친아버지 간접 살해 혹은 사망 방치설[편집]


파일:충격 북한 패륜사건[이만갑].mp4_20160428_162347.156.jpg 출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제1차 남북 정상 회담을 며칠 앞두고 사망한 김일성.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그의 사인은 심근경색에 의한 쇼크사였다. 하지만 김정일이 당시 악천후 속에서 굳이 헬기로 김일성을 호송하려 했던 일이나 특각에서 의료진을 모두 철수 시킨 일, 가까운 병원이 아닌 먼 거리에 있는 평양까지 옮겨 치료를 하려고 했던 일, 등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했다고 한다. 그리그 그 후 김일성이 사망한 장소인 특각을 철거한 사실이 밝혀 지기도 했다.# 대우그룹의 회장이자 남포공단의 최고 경영자였던 김우중 회장에게 김일성이 망명을 부탁한 사연(김일성이 죽기 나흘전)을 토대로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5.3. 남일 살해설[편집]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나 외무상 등을 지낸 북한의 고위 관료였던 남일은 1976년에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건설을 책임지고 현장 지도를 가던 중 정체불명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하지만 워낙 뜬금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갑자기 사고사한 탓으로 김정일이 남일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남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기타[편집]


김일성과는 달리 양복을 그다지 입지 않았다. 젊을 때는 김일성을 따라서 양복을 입고 현지지도에 동행한 사진이 꽤 많지만 나이 먹은 후에는 모두 인민복 일색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인민복이 유명하지만 말년에 주로 양복을 입은 아버지 김일성이나 나름 양복 입은 사진을 공개하는 아들 김정은과 달리 김정일은 양복을 극단적으로 입지 않았다. 김일성 사망 이전에 2번 정도 양복을 입고 지도를 나간 사진이 존재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고 김일성이 죽은 후에는 오로지 인민복과 점퍼 차림을 고집했다.

파일:/mypi/gup/182/4942_1.jpg
스티브 잡스와 같은 해에 죽어서 나온 짤. 스티브 잡스의 명언 사진에서 인물만 바꾼건데, 잡스의 의미는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우직하게 밀어붙여라" 정도의 의미였지만, 김정일에게 붙여놓으면 그냥 "평생 힘없고 멍청한채로 복종하고 있으라"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생전 고소공포증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용기보단 기차인 태양호를 더 애용했다고 한다.

그의 영문이름 표기는 Kim Jong-il. i가 대문자 'I' 로 쓰일 때는 뒤의 소문자 ''과 합쳐저 로마 숫자 II와 똑같아지므로 '김정 2세 / Kim Jong II(2)' 로 보인다. 실제로 일부 해외 사이트에서 이 사람을 "김정" 이라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 보면 된다. 비슷한 논리로 마지막 글자 '일'이 il, 즉 '아프다'는 뜻의 ill과 l 한글자 차이만 나는 관계로 김정일 투병 소식이 퍼지면 '이름이 김정일(ill)만 아니었어도…' 하는 조롱이 넷상에 올라오곤 한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 쪽이 취향인 듯하다. 두 대통령의 방북 당시 자료의 표정을 비교해보면… 사실 위의 성격 문단을 참조해보면 알 수 있듯, 또한 일생토록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해온 독재자임에서 충분히 추정할 수 있듯, 거칠고 직설적인 노 전 대통령보다는 온화하고 우회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던 김 전 대통령이 보다 대하기 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에게 대놓고 호남 사람이라 집요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패션관련기사에서 언제나 세계 제일의 워스트 드레서로 선정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도 되었는데, "옷에 자신의 사상을 잘 투영했다"는 게 그 이유. 물론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옷차림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행하는 패션이며, 세계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김정일의 옷차림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선전된다.

북한의 문자규격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이름에 사용되는 글자가 따로 특수문자로 입력되어 있다.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북한 '콤퓨터'에서 사용되는 북한 전용 폰트에서 그의 이름을 입력하면 반드시 김정일로 자동 강조되고, 특수문자화 된다.[86] 붉은별 같은 컴퓨터 운영체제는 물론 삼지연이나 아리랑 같은 조선식 운영체제 탑재 기기에서도 같은 기능이 있다. 그 외에 각종 서적이나 신문 등지에서도 반드시 그와 김일성의 이름은 강조체로 나온다. 추가로, 이 사람의 이름을 입력하면 그 이름이 반드시 줄의 맨 앞으로 오도록 자동정렬된다.#

파일:attachment/김정일/kimpig.jpg

김정일을 매우 닮은 사람이 있는데, 김영식이라는 한국인이다. 원래 도장 가게를 하던 분인데 김정일을 닮아서인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나오게 되었고, 이 인연으로 서브컬처에서 김정일 역으로 많이 나왔다고. VJ 특공대 2012년 9월 7일 방영판에 나온 바 있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목했을 때 이에 불만을 품은 김정남이 김정은을 죽이고 김정일을 유폐하고, 김정일은 남한으로 망명해 제2의 견훤이 되는 것 아니냐는 반 농담식의 예측도 있었다. 김일성의 충신으로 주체사상 정립에 크게 기여한 황장엽이 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까지 묻히자 김정일도 귀순하면 크게 우대해주는 거 아니냐는 얘기에 기반한, 실현가능성이 없진 않으나 극히 적은 농담에 가까웠다. 물론 실제로 일어난 일은 역으로 김정은이 집권 후에 김정남을 암살해버린 당태종식 엔딩이었지만.

북한식 햄버거고기겹빵을 발명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나라살림이 어려워도 새 세대는 튼튼하게 키우고 싶다"면서 “돈이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며 고기겹빵 공장을 건설시켰다는 주옥같은 명언은 덤. 이 일화는 트로피코 5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파일:external/www.earthnutshell.com/108-kimjongilia-flowers.jpg
일본의 식물학자가 베고니아의 일종인 김정일화라는 꽃을 보내기도 하였다.[87]

류경호텔도 서울에 63빌딩이 건립되자 '남한의 63빌딩을 능가하는 대형 호텔을 지으라'는 김정일의 명령에 건설되었고, 1985년 방남한 북한 사절단이 남한제 자동차를 타고 회담지에 향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여 부랴부랴 북한제 자동차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서독제 벤츠 190분해-복제하여 3년여 만에 유사품 10대 가량을 생산했는데, 멀리서 보면 그럴듯했으나 가까이서 보면 차체 표면이 울퉁불퉁하였고 그나마도 주행 중 계속 문제가 생겨서 견인차들이 늘 따라다니는 둥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남한에 대한 미묘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최진실 지옥의 소리로 알려진 모 교회고인드립 시리즈에서도 고인드립 대상이 되기도 했다. 뭐 당해도 싼 작자이긴 하지만. 참고로 그 애비도 이 교회에 의해 함께 고인드립 당했다.

한 덩치했던 김일성과는 다르게 키가 상당히 작았는데, 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에는 공식 석상에 대부분 키높이 구두를 신고 등장했으며, 사진을 찍을 때에도 늘 양 옆에는 키가 작은 사람들을 끼고 키가 큰 사람들은 양 끝으로 몰아내고 찍었다.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당시 최은희에게 “최은희 씨, 저 난쟁이 똥자루 같지요?”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고. 다만 김씨 3부자 중에서는 그나마 체중이 적게 나갔다고 한다.

2007년 1월 21일 방송된 전국노래자랑 서울특별시 성북구편에서 당시 56세였던 남성이 김정일 코스프레를 하고 무대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김정일이 1994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골프를 했을 때 18홀에서 38언더파 34타를 기록하고 그것도 모자라 한 경기에서 홀인원을 11회나 기록했다고 북한에서 선전했다는 풍문이 유명하고 2004년 뉴욕타임스에서 기사화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문제는 뉴욕타임스 기사는 1994년 9월 14일자 호주 파이낸셜 리뷰 기사를 재인용해놓고 북한 언론을 인용했다고 오보를 낸 기사였으며, 문제의 호주 파이낸셜 리뷰 기사 역시 북한에서 정말로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증거를 제시한 적이 없다. # 기사들마다도 달라서 어떤 기사는 1994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쓰고 어떤 기사는 2007년으로 쓰고 있으며 북한매체에서 주장했다는 정확한 증거를 낸 기사는 하나도 없다. 다만 뉴욕타임스 1994년 10월 19일호에서 한 기자는 북한의 골프 관계자가 '김정일이 홀인원 5개를 포함해 18홀 동안 34타를 쳤고 어느 홀에서든 버디 못지 않은 성적을 냈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88] # ESPN은 김정일 사망 이틀 후인 2011년 12월 19일자 보도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가 사망했다"고 비꼬았다. 2013년에는 미국 사이트 골프닷컴에서 김정일을 골프에 나쁜 영향을 준 10대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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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21:09:15에 나무위키 김정일/여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훗날 국정원 문건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맨발의 청춘으로 유명한 김기덕 감독 또한 이 무렵 납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김기덕 감독은 맨발의 청춘을 찍고 용가리의 1969년 판을 찍게 된다. 참고로 김정일의 컬렉션 중에 대괴수 용가리의 온전한 판본이 남아있다.[2] 대장금에서의 그녀의 연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왜 우리는 저런 아름답고 우아한 여배우가 없냐"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당시 이영애가 출연한 작품 DVD 다수를 김정일에게 선물하자 무척 좋아했다고.[3] 실제로 최은희가 김정일의 목소리를 녹음했던 1980년대 당시, 한국의 영화 수준은 대학생 정도인데, 북한의 영화 수준은 유아 수준이라고 혹평했다. 참고로 1980년대는 한국에서는 '한국 영화계의 암흑기'로 평가받는 시기인데, 김정일조차 이런 말을 했을 정도면 당시 북한 영화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4] 마리오 카트를 좋아했다고 한다.[5] 북한이 자체적으로 개최하는 피겨 스케이팅 대회인 것으로 추정되며, 2011년 기준 20회째다.[6] 바이알에서 바로 뽑아가지고 맞았을텐데, 바이알에 접근할수 있는 인물들은 주변인들 뿐이므로 그랬을 것이다.[7]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90년대 초까지만 해당한다. 이후에 남한에서 대세가 된 흑인 음악, 락, 발라드 등은 취향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8] 탈북 전에는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대남정책과 연락소 부원이었던 데다가 김정일에게서 '나의 작가'라고 불리고 김정일을 두 차례나 접견했을 정도로 김정일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으나, 2004년에 탈북해 2011년까지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8년에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를 출판했으며, 2015년에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를 출판해 세계 32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2021년에는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서 성폭행 의혹을 보도해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으나, 2년 후에 성폭행 혐의가 무고였음이 밝혀지며 서울서부지법의 판결로 1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받게 되었다. #[9] 사족으로 북한에서 지도자들을 접견하는 '접견자'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몇 달 전부터 미리 뽑아 놓고 모의접견에서는 지도자를 닮은 사람을 접견관으로 나오게 하는 등의 엄격한 훈련을 거치게 할 정도로 엄격하게 선발하는데, 이 훈련을 2번이나 통과할 정도로 북한 체제에 충성심이 강했던 사람마저 탈북해 북한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북한이 얼마나 폭압적인 국가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10] 김정일의 첩이자 김정은의 친모이던 고용희가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위성사진[11] 실제로 김정일은 고급 원단으로 제작된 옷 아니면 절대 아무 옷이나 입지 않았다. 물론 북한에서는 이를 '얇아질대로 얇아져 추위가 스며드는 단벌솜옷'이라고 허위선전했지만.[12] 물론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인터넷 사용마저 마치 김정일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듯이 "김정일은 백두산 천기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국외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 안에서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선전한다. 정작 이런 식이면 '남조선' 국민들 절대다수가 '백두산 천기'를 타고 난 것과 다를 바 없게 되지만.[13] 1976~1982년 기준으로 100만 달러이기에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무려 약 310~430만 달러(약 37.2억~51.6억 원)이나 된다.[14] 김일성 부자의 집무실 및 공관에서 쓰는 모든 물품을 조달하는 곳이다.[15] 열린북한방송의 <만화 김정은>에서 발췌.[16] 1989년 6월 10일에 후지모토 겐지가 촬영한 것이다. 원본 링크[17] 왼쪽 사진은 김정일 전용의 '장군 건물'(앞에는 분수가 있는 연못이 있었다)이고, 오른쪽 사진은 초대소 내부를 총괄하는 '본관 건물'이다. 강동 별장에는 고용희, '왕자(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공주(김여정)'를 위한 '1호 건물'과 김경희&장성택 부부를 위한 '2호 건물'도 있었으며, 후지모토 겐지는 연못 앞의 '5호 건물'에만 체류했다.[18] 각 특각은 그 지역의 경치를 최대한 즐길 수 있게 지어졌으며 온천, 해변 등과의 접근성도 고려해 지어졌다.[19] 70여 개에 달한다는 말도 있으나, 이는 정확히는 김정일과 그 측근들이 사용하던 호화저택 수를 합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국민들은 가난에 허덕이는데 김정일의 측근들이 가진 호화저택 수가 2~30개 가까이 됐다는 것도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20] 다만 김정일의 생전에 김정일의 별장이라고 알려진 곳들 중 일부는 김정일의 별장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평안남도 온천구의 온천리 별장이라고 알려진 곳이 있는데, 실은 이곳은 2004년 12월 4일 개설된 '룡강온탕원'이라는 온천이다. #[21] 당장 서호초대소의 주요 건물들 봐도 그 엄청난 규모를 체감할 수 있다.[22] 기차가 다니는 지역에 있는 별장마다 김정일 일가와 그 측근들만 사용할 수 있는 역을 구비해야 했다. 그리고 인근에 기차역이 없어 기차역을 두지 못한 별장들은 지하터널을 활용해 출입구를 위장했다고 한다.[23] 내부공사 때부터 일정 구역별로 호위총국 초소를 설치하는가 하면 호위총국 발행 비표를 지급하여 방 또는 층 등 지정된 담당 작업구역만 출입하도록 했고, 도배, 실내장식 등 마무리공사는 아예 중앙당 8국에서 전담토록 조치했다고 한다.[24] 실제로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기준으로 인구가 2300만 명이던 북한의 모든 주민이 배불리 먹으려면 700만 톤이, 굶지 않을 정도라면 5백만 톤의 식량이 필요했다고 하며, 심지어 북한의 인구 수는 실제보다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북한 주민들에게 필요한 식량 양은 소폭 줄어든다. 게다가 당시 북한에서 감자와 옥수수 생산량을 다 합쳐도 400만 톤 정도로 해마다 100만 톤을 더 생산해야 주민들이 굶지 않게 버틸 수 있던 마당이었다. #[25] #[26] 상술한 것처럼 장진성이 탈북 전에 김정일과 밀접한 사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27] 내부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그를 몰아낸 후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유럽 최빈국 신세인 자신들과는 정반대로 웬만한 갑부들의 저택 이상으로 호화로웠던 야누코비치의 별장 내부를 보고 매우 분노했다고 한다.[28] 추운 겨울에는 황해도나 평양시 인근 별장에, 더운 여름에는 백두산 지역 별장에 머물렀다고 한다. 후술할 '만수무강연구소’는 김정일 부자의 건강을 위해 전국의 기후를 분석, 계절별로 가장 적합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별장을 분리해 놓기도 했다.[29] 후술할 것처럼 김정일이 엄청난 미식가이기 때문에 따로 만든 것이다.[30] 다만 김정일은 생전에 비행기를 타기 싫어했기에 별장에 전용 비행장을 설치하지는 않았고, 김정은이 집권한 후에야 별장이 전용 비행장이 세워졌다.[31] 정황상 '김정일이 마음에 안 든다 생각해도'라는 의미일 것으로 해석된다.[32] 참고로 김정은은 원산 별장의 수영장에서 수영, 요트, 제트스키, 바나나보트 등을 즐겼다고 한다.[33] 정확히는 김일성광장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1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34] 김정일 사후에 김정은의 주 거주지가 되었다.[35] 게다가 북한은 뻔뻔하게도 이렇게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에게 보상 차원으로 훈장을 주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한다.[36] 후술할 초대소와 지하 공간 관련 내용은 이 기사를 참조했다. 참고로 이 기사를 쓴 사람이 바로 수용소의 노래의 저자 강철환이다.[37] 구글 어스로 본 김정일의 별장 위성사진들이다.[38] 이는 상술한 '특각'과는 따로 놓은 수치로 보인다.[39] 이에 대해 한 탈북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예를 들어 제가 자강도에 있을 때 흥주 초대소를 하나 지었는데 거의 5-6년 동안 지었습니다. 인공호수도 만들고. 그런데 그 후에 김정일이가 그곳에 한 번도 오지 않은 지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렇지만 인민들은 그것을 지어놓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하나를 위해서 10년에 한 번 묵을 지 말 지 할 집을 인민들을 동원해서 짓는 것입니다." 출처[40] 이는 이론상으로는 전쟁시 평양 시민들이 살기 위해 지상으로부터 100~150m 밑에 있어서 핵공격까지 막을 수 있는 평양 지하철역으로 피신했는데 김정일이 자신과 측근들만 살아남기 위해 지하철의 산소 공급을 끊어 피난간 주민들을 사실상 몰살하는 것도 가능했다는 소리다! 김정일이 선전과 겉으로만 애민정신을 외쳤지 실제로는 국민들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던 악마와도 같은 독재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41] 실제로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인민은 줄면 줄었지 마르지 않는다. 땅이 있고 물이 있고 내가 있는 한 인민은 얼마든지 다시 불어난다."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런 마인드를 가졌던 김정일이 기근 피해자들을 위한 해외 원조들을 모조리 횡령해 자신과 측근들의 사치향락에 탕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던 셈. # 김일성을 위시한 역대 북한 지도자들이 내세웠다는 이민위천(以民爲天, '사람을 하늘처럼 여겨라'라는 뜻이다)과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 내세우는 '인민대중제일주의'라는 말이 허울뿐인 말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42] 철강과 시멘트는 북한산 최고의 제품을 썼지만 터널 장비는 스웨덴에서 수입해 사용했고, 환풍, 통신, 난방 등 시설들은 유럽이나 일본에서 수입해 활용했다고 한다.[43] 다만 북한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단 것을 생각하면 휴가를 지도자의 특권이라 여기던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44] 참고로 이 문단은 이 다큐멘터리와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이 기록된 서적 '김정일의 요리사'를 많이 참고해서 작성했다.[45] 북한에서는 이 말같지도 않고 '남조선'에서 수십년 동안 오만 조롱을 받고 있는 '쪽잠에 줴기밥' 소리를 무려 2020년대에도 거리낌없이 반복하고 있으며, 이 희대의 위선적인 발언을 2022년에 출판된 김정일전집 제42권에 실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충성의 결심을 가다듬게 하는 이 격언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치신 위대한 장군님의 끝없는 열정과 무한한 헌신성을 이야기하며 노동당시대의 새 격언으로 길이 전해질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후술할 김정일이 먹는 줴기밥과 쌀의 진실을 감안하면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100% 위장용 헛소리만 한 것은 아닌 셈이다.[46] 다만 본인도 긴가민가했는지 전날에 술을 마셔서 숙취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 하자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고.[47] 순수한 떡 가격은 100엔 정도, 나머지는 여비, 운송비 등 부대비용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물가임을 감안하면 지금의 3만 원~5만 원이다.[48] 정황상 전승역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49] 반면 북한의 민간인들, 정확히는 평양에 사는 데다가 외식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류층들이 먹는 초밥의 퀄리티는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다. 평양에서는 2016년 9월에 전승광장네거리[48]에 김정은의 지시로 '초밥전문식당'이라는 초밥 식당이 문을 열긴 했고, 2019년 8월에 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에서 주민들과 해외 동포들, 외국인들이 이 식당에서 만드는 초밥을 맛보고는 '정말 맛있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는데, 정작 선전한답시고 올린 초밥 사진들을 보면 맛있어 보이기는커녕 찰기가 없는 밥과 거의 상한 수준의 생선 등 질이 처참한 수준이라 한국 네티즌들에게 '쿠우쿠우, 마트는커녕 편의점 초밥만도 못하다' '인프라가 없는 (나라의) 부자는 선진국의 일반인만도 못 하다' '차라리 강준치 초밥이 훨씬 나아 보인다'는 등의 비야냥 섞인 소리를 들었다. 북한의 초밥집 모습 김정은 시기에도 북한 상류층들이 선전 사진조차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조악한 초밥을 먹어야 하는 것과 달리 김정일은 거액을 들여 냉동처리를 완벽히 한 채 일본에서 직수입한 생선과 김정일만을 위한 쌀과 물로 만든 밥으로 만든 최고의 초밥을 틈만 나면 먹었다. 다만 북한 초밥의 퀄리티가 매우 낮은 이유는 요리사 실력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북한이 재료를 빠르게 전달할 도로, 트럭은 물론이고 재료를 냉동 상태로 신선하게 보관할 전기도 없을 정도로 인프라가 열악하기 때문이다.[50] 물론 전술한 초밥집은 후지모토 겐지가 평양에서 운영하는 초밥집과는 완전히 다른 곳인데, 그 초밥집은 외국인 VIP와 조총련 사업가 전용 식당인 데다가 김정은의 주문도 들어오는지라 생선과 밥의 질도 기본은 갖췄다고 한다. #[51]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요리사>, 이한영의 <대동강 로열패밀리> 등의 증언을 취합하면, 이건 보통 쌀밥이 아니고 평남 문덕군의 전용 농장에서 재배한 쌀 중에서도 사람 손으로 일일이 깨진 것과 모양이 고르지 않은 것을 골라낸 것가마솥백두산 땔나무를 때서 지은 쌀밥이었다.[52] 일본어이며, 우리말로 나도팽나무버섯이라고 한다.[53]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에서 생산되는 고급 녹차.[54] 그로부터 고작 몇년 전에 있던 고난의 행군 때 일반적인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에 견디지 못하고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진지하게 사이코패스로 보일 정도로 복에 겨운 투정이리고 할 수 있다.[55] 참고로 낙타 발바닥 요리는 중동, 중앙아시아 사막 지역에서 진수성찬으로 생각해서 귀한 손님에게 대접한 요리이며, 양귀비가 좋아한 요리였다고 한다.[56] 참고로 북한의 최고위층이 먹는 피자는 대략 이렇다. 파일:북한피자2.jpg[57] 알콜 도수 50%짜리 술 두 병을 마시고도 끄떡없었다는 증언이 있다. #[58] 상술한 것처럼 김정일 사후에도 북한산 생선으로 만든 초밥의 실태가 실태라는 것을 감안하면 누구보다 맛있는 것을 매일매일 먹고 살고 누구보다 까다로운 미각을 가졌으면서 누구보다 복에 겨운 투정만 하고 살아온 김정일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59] 하태경의 <만화 김정은> 발췌.[60] 역설적이게도 국방비에 최대로 투자했지만, 군 상태의 열악함은 개선되지 못하였다. 즉, 본인이 사치를 즐기고 남은 예산을 국방비로 사용한 격이다.[61] 고난의 행군 시기 국가에서는 '김정일의 정신을 받들어 (기근을) 헤쳐나가고자' 이탄 국수를 만들어 먹을 것을 장려했는데, 실제로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나온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비료로 쓰이던 것을 음식으로 만든 거라 이탄 국수는 역한 냄새는 기본에 맛도 사람이 먹을 수 없던 수준이었고, 먹으면 배는 부르나 소화가 안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정일은 이런 불량한 물질을 국민들에게 먹을 것을 '장려'했다.[62] 이는 김정일이 (조작된 출생지인) '백두산 밀영'에서 자라며 험난한 유년기를 거친 끝에 '위인'이 됐음을 선전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한다. 다만 김정일이 어릴 적에 친모와 남동생을 잃는 등 가정사가 불행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물질적으로는 '배를 곯기는' 커녕 오히려 해방 후에는 평양시의 수상관저에서 지내며 유복한 어릴 적을 보냈다.[63] 참고로 김정일이 먹는 '줴기밥'은 '무우오가리(무말랭이)와 절인 오이, 까나리'를 넣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동유럽산 기름, 뉴질랜드산 소고기, 일본산 연어알, 캐비아가 포함되어 개당 재료비만 45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거기에 아들 김정은도 같은 선전을 했다. #[64] 북한 사람들은 이미 김정일 생전에도 알 만한 것은 다 알고 있었기에 이밥에 고깃국 약속을 믿는 북한 주민들은 더 이상 없는 판이었으며 "인민들 굶을 때 쪽잠에 줴기밥 먹었다면서 배는 왜 그렇게 나왔나?"라고 비판했고, 출처 거기에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장군님의 쪽잠은 푹신한 곳이요, 줴기밥도 영양가가 다 들어간 것일 것이다'는 풍자도 돌았다. #[65] 국영농장에서 공급된 재료로 만든 식사만 먹긴 했으나, 이는 차우셰스쿠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여서였지 고급 식재료만을 요구하는 사치를 일삼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66] 다만 평소 식사는 검소하게 먹는 대신 본인의 생일잔치만큼은 자신의 나이에 무게를 맞춘 케이크를 만드는 등 호화롭게 치르었다.[67] 다만 수하르토는 적어도 본인은 사치를 했다는 증거가 없는데, 실제로 수하르토는 퇴임 직후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 부촌의 2층 저택에 살긴 했으나, 집 사진을 보면 세계에서 4번째로 부유했다는 사람의 집이라기에는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일 정도다.[68] 물론 이 당시는 일반인들이 멀건 쌀죽을 그릇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적게 먹어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이를 견디다 못해 고난의 행군 때처럼 흙과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는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이 잘 먹어서 집권 이전보다 살이 더 찔 정도였다.는 것과 대조된다.[69] 마오쩌둥이 특히 좋아하던 음식은 매운 삼겹살찜 홍소육(红烧肉)과 고추였는데, 특히 홍소육은 죽을 때까지 즐겨먹을 정도로 좋아했음에도 일주일에 한두차례 먹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절제했고, 중국을 통일한 후 생활이 안정화된 후에도 산해진미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70] 실제로 마르코스의 장녀인 아이미 마르코스는 자녀를 필리핀에 두고 유럽을 여행할 때 모유 택배를 보낸다고 고국의 항공사인 필리핀 항공의 특별 항공편을 모유 택배로 써 필리핀 항공의 많은 항공편이 지연되거나 취소케 하는 갑질을 저질렀고, 수하르토의 막내아들 토미 수하르토는 사치로 물의를 빚은 것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판사를 청부살인한 것이 발각되어 감옥에 수감되면서도 호화롭고 자유로운 감옥 생활을 하다가 가석방된 바가 있다.[71] 유유상종이라고 모부투 역시 굶주리는 국민들을 뒤로 한 채 고급 술들을 폭음하고 수십 채의 호화 별장을 가졌으며, 각료들의 부인들을 강간하기도 했다.[72]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유명하지만 후에 아민의 전속 요리사가 루머임을 밝혔다.[73] 이 사람도 김정일처럼 여자를 엄청 밝혔다.[74] 자세한 내용은 이 항목 참조.[75] 1997년 남파간첩에게 암살당했다.[76] 참고로 김일성도 김정일만큼은 아니었지만 집권하는 동안 초호화 생활을 하고 특별 재료로 만든 최고의 음식들만 먹고 살았다. 그러나 김일성은 김정일과 비고하면 어느 정도 소박한 입맛이긴 했다.[77]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직장인들의 월급이 30만 엔 정도였다고 하며, 심지어 1991년에 다랑어를 사올 때에는 당시 일본인들의 연봉도 뛰어넘는 400만 엔을 들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1991년 당시 일본은 거품경제가 잦아들긴 했어도 1인당 GDP가 미국까지 뛰어넘고 세계 4위를 기록한, 오늘날로 치면 싱가포르 포지션인 부국 중의 부국이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은 일본이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즉, '남조선'보다도 가난한 나라)이고 자신들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인 것마냥 선전했다.(...)[78]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무려 27,984~41,977$에 한화로 환산하면 약 3,358~5,037만 원이며, 더구나 이를 한 달마다 쓴 재료값으로 치면 김정일이 1년에 쓴 음식 재료값은 현재 가치로 약 4억~6억 원 이상이라는 말이 된다! 더구나 상술한 만수무강연구소의 운영비와 연구에 들어간 돈을 감안하면 김정일이 1년에 먹는 데에만 쓴 돈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 단위일 것으로 추정된다.[79] 최준덕은 김정일의 첫사랑이자 두 번째 부인인 성혜림의 묘지기였다. 김정일의 최측근이며 김정일 서기실(비서실)의 2인자였던 그는 김정일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다니다가 모스크바로 유학, 러시아통이 됐으며 러시아어에도 능통하다. 그는 본처 자리를 빼앗기고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린 성혜림이 치료를 위해 1974년 모스크바에 머물자 성씨를 돌보는 역할을 했다.[80] 실제로 김일성도 사생아를 여러 명 낳았으며 그 중에는 김현도 포함되어 있다.[81] 웃기는 소리지만 기쁨조는 사실 여군들로, 중위나 대위 계급을 받고 있다.[82] 엄밀히 따지면 둘째 부인이라는 김영숙이나 슬하의 김설송 김춘송도 알려진게 별로 없어서 불확실한 인물들이다.[83] <김정일 로열패밀리>라는 책의 저자인 리한영(본명: 리일남)의 어머니이기도 하다.[84] "비까동(직역하면 '번쩍-쾅')"은 사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 피폭자들이 원폭을 불렀던 별명이다.[85] 한 차례 평양특별시 중구 영문동으로 바뀐 다음, 지금의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으로 바뀜.[86] 이 때문에 북한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텍스트를 다른 나라의 프로그램에서 실행시키면 김 부자의 이름이 깨져서 나온다.[87] 참고로 이 사진을 찍은 영국인은 당연히 어이없어했다고 한다.[88] 홀인원이 11개에서 5개로 반토막(?)난것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