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국 동맹 전쟁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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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과 원인
3. 경과
4. 결과
4.1. 파라과이
4.2. 브라질 제국
4.3. 아르헨티나
4.4. 우루과이

3국 동맹 전쟁/ 파라과이 전쟁
Guerra de la Triple Alianza | Paraguayan War

날짜
1864년 10월 12일 ~ 1870년 3월 1일
장소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라플라타 강
교전국
<^|1>파일:파라과이 국기.png 파라과이
<^|1>파일:브라질 국기.png 브라질 제국
파일:아르헨티나 국기.png 아르헨티나
파일:우루과이 국기.png 우루과이
지휘관
<^|1>파일:파라과이 국기.png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1>파일:브라질 국기.png 페드루 2세
파일:아르헨티나 국기.png 바톨로메 미트레
파일:우루과이 국기.png 베난시오 플로레스
결과
브라질 제국-아르헨티나-우루과이 3국 동맹의 승리
영향
파라과이 국토 40% 영구 상실 및 멸망 위기
이과수 폭포 3등분
병력
총합 150,000명
브라질 제국군 164,173명
아르헨티나군 30,000명
우루과이군 5,583명
피해규모
총합 300,000 이상 사망
총합 100,000명 이상 사망

1. 개요


19세기 중반 파라과이브라질 제국,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3개 국가와 3:1로 1864년~1870년까지 벌인 전쟁. 파라과이 전쟁(Paraguayan War)이라고도 한다. 남아메리카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자, 종전 150여년이 된 지금까지도 전쟁 당사국 네티즌들의 온갖 키배와 병림픽의 향연이 끊이지 않는 전쟁이다.

2. 배경과 원인


독립 이후 1814년 정권을 잡은 집정관[1]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는 장기간 독재 정치를 펼쳤는데,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집단에 권력이 집중된 과두제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프란시아는 농지개혁을 사행하여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 농민들에게 재분배했다. 이는 19세기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농지개혁이었다. 또 국내 생산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상품의 국제 유통을 감시하는 등,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달리 엄격한 계획경제, 보호무역 정책을 수립했다. 1840년 프란시아가 죽고 뒤이어 집권한 후계자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와 그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2] 도 그 정책을 그대로 따랐고 20년쯤 뒤에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많은 외국인 여행객들이 "파라과이는 부의 재분배 덕분에 극빈층이 없고 기근도 분쟁도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출처] 그 당시에 자국 기술로 증기선을 만들어 띄울 수 있었던 유일한 남미 국가이기도 했다. 영국 배를 한 척 사고 학생들을 유럽에 파견해 기술을 베껴왔다고 한다.
야심만만한 로페즈 대통령 치하에서 국력이 상승세에 있던 파라과이는 자기네를 아니꼽게 보던 브라질아르헨티나 그리고 막 독립했던 신생국가 우루과이 이상 이웃 3국과 충돌하게 된다. 거기에 당시 국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진 로페스 대통령은 내륙국 파라과이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브라질 쪽으로 해안선을 차지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짜고 있었고 조선 기술을 얻으려고 한 것도 항구를 차지한 다음에 쓰기 위함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이웃 나라의 심기를 건드린 것.[3]
  • 전쟁 원인에 대해, 한국에서는 전 세계 모든 나라를 자기네 경제권으로 편입시켜서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는 제국주의 열강에게 문호를 닫아건 파라과이는 눈엣가시였으며, 자기네 빚을 얻어쓰지 않는 괘씸한 파라과이에 열 받은 영국의 부추김을 받은 브라질 제국아르헨티나우루과이 내전에서 반파라과이파를 밀면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국이 3국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론은 사실 90년대에 폐기되었다. 60년대와 70년대에 한창 좌파운동의 바람이 불 때 이런 이론을 주창한 남미의 좌파 지식인들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만한 증거 자체가 없다! 그냥 대충 심증을 가지고 한 추측이었던 것.

그 심증이라는 것도 웃긴 게 당시 파라과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유럽 열강을 열받게 할만한 영향력은 전혀 없었고, 영국이 전쟁의 흑막이었다는 주장의 다른 '근거', 즉 영국이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로 초토화된 미국 남부대신 파라과이를 수탈해서 목화를 얻고자 했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 이미 이집트를 장악하여 이집트에서 목화를 신나게 탈탈 털고 있던 상황[4]에 전쟁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렇게 미약한 주장이 머나먼 한국까지 퍼지게 된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브라질아르헨티나가 이런 식의 물타기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영국에 돌릴 수 있었기에 교과서에까지 실어올리며 대대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이다. 계속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전쟁에 대한 결과는 파라과이 대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여튼 파라과이를 손 봐줄 기회를 찾던 이웃나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게 찰나 기회(?)가 찾아왔다. 현재의 우루과이지역이 브라질 제국에게 반기를 들어 전쟁을 일으킨 것인데, 이 기회를 놓칠세라 파라과이가 국경선을 넘어온 것.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 측을 지지하여 브라질을 공격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냥 강건너 불 구경하듯 손 놓고 있었지만 로페스가 자기네 의향을 무시한 채 아르헨티나 국경선까지 넘어오니까 괘씸해서 거들게 되었다.[5] 우루과이는 당시 막 독립을 성취한 직후인지라 그냥 아르헨티나를 도와서 거들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삼국이 동맹 맺은 꼴이니 삼국동맹전쟁이라 부르게 되었다.

3. 경과


파라과이는 이 전쟁 초기에 3국 동맹군을 말 그대로 관광보냈다. 징병제 국가였던 파라과이의 병력은 10만가량으로 추정되나 이에 반해 3국은 기껏해야 2~3만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바로 얼마 전까지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관계였다. 3국 동맹군은 초기에 파라과이보다 아르헨티나-우루과이와 브라질간 갈등이 거셌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엄청 치고박고 사이가 나뻤으며 우루과이 독립 전쟁 당시 우루과이를 아르헨티나가 대놓고 도왔기 때문이었다. 반면 파라과이는 징병제도 징병제지만 그 당시 장교부터 사병들까지 양질의 군사 교육과 훈련을 잘 받은 정예중의 정예였고 전쟁당시 남미 최강 경제, 군사 대국답게 무기들의 질과 보급도 우수했다.
그러나, 초반에 호되게 당하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군병력을 제대로 다시 파병하면서[6] 전쟁이 길어지자 파라과이는 불리하게 된다. 전쟁직전에 유럽에다 주문해놓은 최신형 군함 6척만 들어올때까지 참았어도 전세는 파라과이에게 너무 유리할 판이었지만 그걸 못참아서..
2019년 관점에서 보자면 파라과이가 너무 무모했다. 파라과이는 당시 인구 100만도 안 되었지만, 브라질은 1000만이 넘었고 아르헨티나도 500만이 넘었던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우루과이는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더 적은 나라이긴 했지만 바로 옆 아르헨티나가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쟁 초반엔 갑툭튀한 파라과이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체급 차이에서 오는 물량, 그리고 파라과이에게 숨구멍과도 같았던 라플라타 강 유역이 점령 당하면서 파라과이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사실 개별 전투로만 보면 파라과이와 3국 동맹간의 대결은 승률은 박빙수준이다. 파라과이군의 수준이 높다는걸 의미하는거지만 문제는 이게 초반 러시 승률빨도 있었고 이거 이후에도 3국 동맹은 전투에서 지고 부대가 작살나면 바로 그자리에다 새로운 부대를 파견하는 식으로 로테이션 돌려가며 붙었기 때문에 파라과이는 3국 동맹의 물량공세를 도저히 당해낼수가 없었다.
1866년 5월 투유티 전투의 참패로 로페스는 패배를 직감하며 종전협정을 맺고자 온갖 외교적 수단을 써봤지만 3국의 분노를 잠재우는데는 역부족이었다. 로페스는 1866년 9월에 종전협상을 하고 파라과이의 패전을 인정하는 형식의 종전평화협정에 사인하는거만 남았는데 협상직전 3국 동맹간의 비밀협상이 드러나면서 이걸 안 로페스는 바로 협상을 깨버리고[7][8] 아예 "조국과 같이 죽으리"라며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식의 대통령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9] 항복을 권하거나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이 눈에 띄면 사형시키는 식이었다. 이러다보니, 반발도 거세 내부에서 분열도 이뤄지고 만다. 아순시온 약탈 이후 세워진 임시정부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던 반 로페스 인사들이 돌아와서 세운 것이다. 이들도 전쟁 말기에 브라질 제국군 편에 가담했다.
어쨌든 거인같은 두 나라와 이들의 지원을 받는 신생 독립국. 3개 나라를 상대하기엔 여전히 작은 파라과이인지라 장기전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10] 구도였다. 마지막에는 있는거 없는거 다 끌어 모아다가 혹독한 훈련을 시켜 무조건 전쟁터로 내모는 바람에 남성 인구의 90%가 사망하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대참사를 당한 바 있었다. 전후 남겨진 남성이 약 3만명이었다고 한다. 전쟁 말기에는 10살 이하 소년병까지 훈련시키고, 설상가상으로 보급도 제대로 못한 채 전투복 바지만 입고 총만 쏘거나 그냥 칼만 가지고 우라돌격만 하던게 파라과이군의 참혹한 현실이었다.
1868년 7월 25일. 그동안 3국 동맹군을 가장 괴롭혀왔던 후마이타 요새가 함락되었다. 파라나강에서 파라과이강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박힌 후마이타 요새는 함락당하면 바로 아순시온까지 뚫린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파라과이판 산해관이나 마찬가지였던 곳이었다. 후마이타 요새 안에 군수공장과 제철소를 박아놔서 무기 자체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병력도 1만이 넘어서 절대 함락이 불가능한 곳으로 여겨졌고, 그 명성답게 3국 동맹군이 파라과이에 들어갈때 3년 가까이 개고생을 하던 곳이었다. 요새가 함락 직전에 다달았을때 파울리노 알렌 장군이 로페스 대통령에게 퇴각을 요청했다가 옥쇄명령을 받고 좌절한 뒤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유감스러운 건 그 권총자살시도 몇시간후 퇴각명령이 떨어졌단 것이다.[11] 때마침 1868년에 내렸던 폭우는 파라과이강의 수위를 높여서 브라질 제국 해군 군함들의 아순시온 진입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
결국 1869년 1월 1일 수도 아순시온이 점령[12] 당하고 만다. 로페스는 산악지대로 달아나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지만 병력도 없고 무기나 지원도 물자도 없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 기간을 파라과이 역사학계에서는 언덕의 전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언덕의 전투 기간중에 벌어진 1869년 8월 12일 피리베부이 전투와, 4일뒤인 8월 16일 아코스타 뉴 전투는 3국 동맹과 파라과이군 서로 정신상태가 맛이 갈대로 간 전투의 극치를 보여준다. 피리베부이 전투는 브라질 제국군의 엄청난 학살과 강간극이 벌어졌으며[13], 아코스타 뉴 평원에서 파라과이군은 여기서 부상병과 노약자까지 동원하는것도 모자라서 9~15세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가짜 수염을 붙여가면서 6시간동안 전투를 벌였고, 항복을 하지만 브라질 제국군은 자비없이 전부 죽여버렸으며[14][15], 이때 어린이 전사자만 2000명이 넘었다. 파라과이의 어린이날은 8월 16일 즉 이날 전투로 죽은 2000명의 어린이들을 기리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1870년 3월 1일, 파라과이 북부 세로 코라(Cerro Cora) 밀림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라고 할 것도 없는 저항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포위당한 뒤 브라질 제국군 총사령관 호세 안토니오 코레이아 다 카마라(José Antônio Correia da Câmara) 공작이[16] 직접 나서서 병사 몇명만 이끌고 로페스 앞에 서서 "항복하면 파라과이 대통령직과 행정부는 그대로 유지시켜주겠다:"는 최후통첩을 했지만, 로페스 대통령은 이전에 했던 대통령명과 똑같이 "조국과 같이 죽으리라."는 말을 하면서 카마라 총사령관에게 덤벼들었고 결국 바로 사살당한다.[17] 얼마 안남은 장병들이 죄다 달아나고 죽을때 로페스에게 남은 부하는 100명도 되지 않았고 추격하던 브라질군은 이제 대충 추격해도 된다라고 온 게 그 50배에 달한 만큼, 마지막 전투도 아닌 일방적인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로페스의 나이는 만 42살이었다. 그리고 최후까지 로페스 대통령과 함께 총을 쏴가며 항전하던 영부인은[18] 죽지는 않았지만 브라질 제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이후 파라과이 임시정부와 브라질 제국이 열었던 전범재판에서 국외 추방 판결을 받고 파리에서 쓸쓸히 죽었다.[19] 파라과이군 장교로 복무중인 로페스의 장남 후안 프란시스코 "판치토" 로페스도 이 마지막 전투에서 싸우다가 몰려 항복권유를 받았는데 "파라과이군 장교에게 항복이란 없다"며 저항하다 죽었다.[20] 전쟁이 끝나고 로페스와 맏아들의 시신은 영부인과 작은아들들이 직접 땅을 파서 묻었다.

4. 결과



4.1. 파라과이


이렇게 전쟁은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결과는 브라질 제국아르헨티나에게 영토를 왕창 빼앗기고 약 6년간 이 두 국가의 통치아래 임시정부 체제로 있었다. 인구는 53만명에서 22만명으로 대폭 감소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인구도 줄고 이 여파로 경제도 붕괴되어 일부 극소수가 경제를 휘어잡아 중남미에서 넘치는 빈부격차 문제가 또 생겨나 내부 분열 및 갈등도 거셌다. 이 상처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파라과이의 인구피해가 극심했다. 전후 파라과이의 성인 남성 인구는 앞에서 나온대로 3만명이고 거의 모두 오랜 전쟁으로 앙상한 뼈와 총상, 자상만 남은 해골이나 마찬가지였으며[21] 남녀 성비도1:9라는 극악의 비율이 완성되어[22] 전설상의 아마존 여인국을 빼고 전세계사 최악의 성비 불균형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강간등 성범죄나 사생아 문제가 컸지만 도저히 해결 방법이 없고 어떻게든 인구를 늘려야해서 정부는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이 극악 여초사회화로 비극적인 관습들이 탄생하고 만다. 전쟁 이후 주둔한 브라질 제국군, 아르헨티나군에게 강간을 당한뒤 임신한 여자들은 아이가 태어나서 그 아이가 검은 피부를 갖고있으면[23] 바로 죽여버리는 관습을 만들었고[24] 성문화의 타락과 남자들의 성폭행, 성적 학대에 관대해지게 된다. 전쟁 이전 체스를 두고 바이올린, 플룻 연주와 시 낭송, 문학 토론이 있었던 아순시온 거리는 전쟁 이후 끔찍한 강간이 벌어지는 지옥으로 변했고, 대낮 광장과 길거리에서 남자가 여자를 대놓고 강간해도 이게 성범죄냐, 매춘이냐, 그냥 서로 즐긴 거냐 따질 수도 없으며 남자들은 이걸 파라과이 남자의 특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여자들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받아들였으며. 일부다처제는 전쟁 이후 무려 80년이 넘어가면서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가 폐지되었지만, 현재도 이런 남성 우월주의적 관념들은 전쟁 이후 파라과이에 뿌리깊게 남아있다.
파라과이로서는 남자가 너무 없어서 다급해져 차별받던 인디오, 즉 원주민과 흑인노예들까지도[25] 다시 파라과이 국민으로 우대하고 끌어들여 혼혈이라도 이루게 했고, 다행스럽게도 파라과이내 흑인 노예와 결혼했을때 검은 피부의 혼혈아기를 죽였다는 기록은 없다. 스페인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후에 이들에게 행하던 차별 탄압 정책도 폐지했다. 심지어 파라과이 전후 복구작업에 돈벌러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까지도[26] 본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국적을 받고 남아서 제발 파라과이 국민으로 살아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전쟁으로 줄어든 인구 회복이 다급했다. 아무튼 이러나보니, 파라과이는 중남미에서 원주민, 흑인들에게 꽤 관대하게 대하고 혼혈도 잘 이뤄졌다. 가까운 나라이자 3국 동맹 전쟁 당시 파라과이와 전쟁을 치뤘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차루아족이나 테우엘체족, 마푸체족 같은 자국내 남미 원주민들을 상대로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원주민들이 살던 토지를 뺏어 백인들에게 분배하고, 이탈리아, 시리아, 레바논 등 유럽과 중동 서아시아 국가 출신의 백인계 이민자들만 국적자로 받아주는 백인 우월주의에 입각한 이민 정책을 펼쳤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덕분에 이 두 나라는 남미에서도 백인 비율이 가장 높다.
로페스 대통령은 파라과이 민족주의, 침략자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저항정신, 애국심의 상징으로 현재도 파라과이에서 국부로 추앙받고있다.[27] 한편으로는 자신의 욕심으로 나라를 파멸까지 끌고간 미치광이 독재자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이건 시대와 시국의 변화와 평가하는 국가가 어디냐에 따라 크게 변해서.. 이게 다 브라질 때문이다. 영부인 엘리사 린치 여사도 파라과이에서는 파라과이의 여왕, 여걸, 국모로 추앙받는다.
그나마 파라과이는 이 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지나서 볼리비아와 벌인 차코 전쟁에서 이겨 3국 동맹 전쟁에서 잃은 땅만큼은 아니라도 땅을 다시 넓히는데 성공한다.
파라과이는 이 전쟁의 한이 남아서 아직도 해군과 해병대, 해군 항공대를 운용하고 있다.

4.2. 브라질 제국


승자인 3국 동맹도 인적 피해는 적지 않았다.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브라질은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파병해 1/3을 잃었다.아르헨티나도 2만이 넘는 전사자 및 사상자는 적지 않았다. 우루과이는 전사자가 6천명 수준이지만 이들도 당시 인구 40만도 안되었던 걸 생각하면 피해가 적지 않았다. 그래도, 이들은 승자로서 파라과이로부터 땅을 얻어내고 보상금이라면 파라과이 이거저거 개발권이나 여러 모로 뜯어갔다.
브라질 제국 황실은 수도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종전선언과 승전기념파티를 열었고 궁전에서 피아노 18대와 650명의 악기연주자를 동원하며 초호화 파티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 전쟁이 브라질한테도 하나의 비극을 만들었으니 군부의 부상이다. 전쟁직전 1500명에 불과하던 브라질 제국군 장교가 전쟁이 끝날때 만명을 넘겼고, 전쟁기간동안 숱한 전투 무용담과 전쟁 영웅들을 탄생시켰으며 이들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고 말았다.[28] 이후 이 군부는 "파라과이와 로페즈 대통령을 지나치게 몰아붙였다"는 식의 비판을 페드루 2세 황제에게[29] 대놓고 해낼 정도가 되었고. 때마침 전쟁에 참여하고 출세한 참전용사 출신 흑인들이 주도한 1888년 노예 해방과[30] 1889년 쿠데타로 페드루 2세를 축출하고 브라질 연방 공화국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후에도 쿠데타와 막후 정치 조정등으로 브라질 정치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가 안의 또다른 국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4.3. 아르헨티나


원래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를 반란자들이 들어가서 세운 미수복된 영토라는 생각이 박혀있어 이기회에 파라과이를 아예 멸망시켜서 땅을 브라질과 나눠 갖으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브라질이 파라과이를 아예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31] 그래도 전쟁 이전 파라과이 땅을 일부 뜯어내서 갖는데는 성공. 그 이후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에 이어 남미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기반을 마련했다.

4.4. 우루과이


전쟁이전에는 양쪽 국가의 속국 취급을 받아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안에서도 시끄러웠는데 전쟁 이후 3국 동맹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내정간섭이 사라졌다.

[1] 건국 당시 파라과이는 집정관제였다. 대통령제로 바뀐건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부터.[2] 대통령 취임 당시 파라과이 독립선언서에 적혀있는 세습금지 위반논란이 있었다. 이걸 임기를 10년만 한다는걸로 반대를 무마했지만.[출처] MANUEL D'HISTOIRE CRITIQUE, Le Monde diplomatique[3] 정작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초대 대통령은 죽기 직전 아들에게 "파라과이 공화국은 아직도 해결못한 문제가 많다. 그러니 칼보다는 펜으로 문제를 해결해라. 특히 브라질 관련으로는..." 이란 유언을 남겼다.[4] 이집트산 목화는 고대부터 당시까지 최상등품으로 평가받았으며, 현재도 서구 브랜드 업계에서는 이집트산 면(Egyptian Cotton)을 최고로 친다.[5] 브라질 군을 우루과이에서 완전히 밀어내겠다며 파라과이의 남쪽경로, 그러니 아르헨티나 영토를 열어달라고 요구한 것인데 길을 빌려 씨를 말릴 것이라 예측한 아르헨티나가 이를 거부하였다.[6] 흑인 노예와 원주민들을 대규모로 징집했다. 제대하면 노예 신분 해방과 차별금지, 출세를 보장한다는 약속도 함께.[7] 3국 동맹 비밀 협상내용이 기가막히다. 1)3국 동맹 구성원중 혼자 파라과이와 단독 강화로 배신때리기 금지, 2)로페스 대통령, 파라과이 정부, 군부 핵심 인사는 무조건 사형 3)파라과이 독립은 보증 4)막대한 전쟁 배상금으로 파라과이 뜯어먹자(....). 애초에 파라과이 자체를 박살내려고 서로 짜둔건데 파라과이에서 빡치지 않는 게 이상하다.[8] 나중에 한번 더 언급하는 내용이지만 이거는 브라질 제국과 페드루 2세의 강짜나 마찬가지다.[9] 이후 바로 벌어진 쿠루파이티 전투에서 파라과이 군은 3국 동맹군의 멱을 따고 족을 쳐놨다. 평화협상당시 파라과이 군이 재빨리 재정비를 해놔서 가능했던 승리.[10] 원래 약소국들이 전쟁을 벌일 경우 속전속결로 끝을 내려 하는 경향이 크다. 북한의 전쟁교리도 마찬가지로, 무조건 초반에 끝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잡고 있다. 장기전으로 갔다간 아무리 중국 인민해방군이나 러시아 군대의 도움을 받더라도 미군에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왜 초반 러시가 주요 전술 중 하나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11] 그리고 1868년말 반역스캔들에 휘말려 사형당한다. 이때 3년 개고생 트라우마로 3국 동맹군은 전후 평화조약에다 후마이타 요새 완전 철거와(이미 1865년 3국 동맹 비밀 조약에 후마이타 요새 파멸이 들어가 있다.) 그 자리에 요새 등 군사시설 재건립 영구금지 조항을 넣어 파라과이 정부에게 사인할 걸 요구했고 파라과이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했다. 현재 후마이타 요새 자리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고 그 마을 곳곳에는 후마이타 요새 시절 지어진 교회 잔해와 무기고, 제철소 잔해나 건물이 남아 있어 관광지로 쓰이고 있다. 파라과이 국민들에게 후마이타 요새는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곳이다.[12] 이걸 스페인어 : Saqueo de Asunción, 영어 : Sacking of Asuncion(아순시온 약탈)이라고 한다. 이 당시 아순시온 시가지 전체가 방화로 불타오르고 대통령궁이 다 털리고 파라과이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도 털려서 파라과이 역사 자료들과 유물들을 전부 브라질 제국군이 가져가버려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 국립 도서관 지하에 150년 넘게 박혀있다. 전쟁 100년후 몇몇 유물들은 돌려주기는 했지만 중요 문서들은 안돌려줘서 파라과이 역사학계에서는 이 약탈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 이전, 스페인 식민지 시절, 예수회, 파라과이 건국사, 전쟁 이전 파라과이 대통령들과 파라과이 최대 전성기 시절, 그리고 파라과이 전쟁 관련 연구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다. 대략 현재 우리나라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 발해 등 고려/조선 이전 한국 역사의 기록이 워낙 부족해서 관련 역사학 연구들 거의 대부분을 발해고나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고려, 조선시대때 편찬된 역사서나 유물, 유적들을 통해서 의존하는 것과 거의 흡사한 상황이다. 다행히도 일부 기록물들은 빼내 오는데 성공했지만 이거마저도 피리베부이 전투에서 불타 없어졌다.[13] 여기에 질린 아르헨티나 군 총사령관은 이후 전투 참여를 포기했다.[14] 전투가 끝나고 파라과이군 소년병들의 어머니들이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거나 혹은 생존자들을 찾고 있을 때 브라질 제국군이 평원에 불을 질러 그 어머니들까지 죽고말았다. 이때 방화 명령을 내린 자는 브라질 페드루 2세의 사위 오를레앙공 가스통 백작. 4일전 피리베부이 전투에서 마누엘 메나 바레토 장군이 전사하자 이에 대한 복수로 피리부이 병원과 마을의 방화, 아코스타 누 전투의 일방적 학살과 방화를 명령한 것이었다. 이후 이 때의 야만적 학살 명령들은 브라질에서도 죽을때까지 비난 받았다.[15] 그러나 브라질에서는 이걸 파라과이군이 연기를 피우면서 불이 일어난걸로 위장시켜 생존자를 구출하려다 불이 번져서 피해가 커졌으니 가스통 백작은 잘못이 없고 파라과이군의 자업자득이다 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16] 1869년까지 카시야스 공작이었다가 카시야스 공작이 지쳤다는 이유로 그만뒀다.[17] 로페스 대통령이야 3국 동맹 비밀 조약문서를 알고있는데다 이미 파라과이에는 3국 동맹 말을 듣는 괴뢰정부(파라과이 임시정부라고 하지만 로페스 기준으로는 괴뢰)도 만들어져서 자기를 죽이려는데 당연히 제국군 총사령과 말을 믿을리가 없으니 그냥 죽으려고 달려드는거 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총사령관 카마라 공작은 로페스를 죽일생각은 없고 최후통첩을 듣듣 안듣든 그냥 생포할 생각으로 부하 몇명만 데리고 간건데 로페스가 달려들고 생포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부하들이 총을 쏴서 로페스가 죽은거라. 근데 저때 총사령관이 살리긴 했어도 로페스 반대파가 세운 임시괴뢰정부 혹은 로페스를 끝장내고 싶어했던 페드루 2세가 사형시킬 확률은 100%다.[18] 엘리사 린치(Eliza Lynch, 1835~1886). 아일랜드인으로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프랑스로 이민해서 파리서 살다가 프랑스 군의관과 결혼하고 한번 이혼한뒤 이 당시 프랑스 주재 파라과이 대사로 부임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와 만나 재혼하고 파라과이로 들어왔으며, 이후 파라과이에 프랑스식 요리, 패션, 놀이, 문학, 음악, 미술 등을 들여와서 수도 아순시온의 문화를 크게 활성화시키고(이 시기 아순시온 거리에서는 나이든 중년 이상은 체스를 두고, 젊은이들은 유럽에서 들여온 시와 소설을 읽으면서 토론하는 풍경이 흔했다) 여성 학교도 세워 파라과이 여성의 교육에도 큰 공헌을 한걸로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이후 3국 동맹 전쟁 당시에는 여자들로 이뤄진 "Las Residentas" 라는 집단을 만들어 후방에서 군대를 지원했으며 때때로 아예 최전방에서 파라과이군을 직접 지휘하고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여장부중의 여장부였다. 현대 파라과이 역사에서는 그녀를 파라과이의 여걸, 국모로 기리고있지만 다른 남미역사에서는 좋게 봐야 파라과이의 에바 페론 정도고, 나쁘게 보는 경우는 파라과이의 대마녀, 탐욕의 창녀라는 평가를 내리고있다. 남미 역사토론에서 파라과이 전쟁을 주제로 할 경우 100% 키배와 병림픽의 헬게이트가 열리는 인물. [19] 페드루 2세, 브라질 제국군, 파라과이 임시정부는 린치 여사도 사형시킬려고 했지만 린치 여사는 영국시민권자(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이 시기가 영국령이었다는걸 기억하자)라는걸 내세웠기 때문에 국외추방으로 그쳤다. 이후에 린치 여사는 국외 추방명령 항소, 재산 반환청구 소송, 회고록 출판 때문에 잠깐동안 파라과이에 들린적은 있다.[20] 영부인 린치는 아들이 총에 맞아 죽는걸 바로 앞에서 봤고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하다가 제국군들에게 "이것이 당신들이 말한 문명인가?"라고 항의했었다.(3국 동맹은 전쟁의 명분으로 "폭군의 압제로부터 파라과이를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을 이곳에 전파한다"라고 선전했었다.)[21] 정글에서는 야생 재규어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지못미.[22] 지역에 따라 1:25라는 정신나간 성비를 자랑하는데도 있었다.[23] 브라질 제국군은 전쟁에서 이겨먹으려고 흑인 노예들을 전쟁이 끝나면 노예 해방에 출세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대거 입대시킨다. 완전한 해방은 약 20년 뒤에야 이루어졌지만 적어도 이 당시 참여한 흑인 병사들은 해방이 되었고 아주 약간이지만 출세도 했으니 어쨌든 약속은 지켰다. 단 아르헨티나도 흑인 병사가 있었지만 여기는 아르헨티나 문서를 보듯이 전쟁에서 가장 생존률이 희박한데만 보내서 살아나오기가 너무 힘들었다.[24] 물론 인구 증가에 눈돌아간 파라과이 정부가 허용할 리가 없고 걸리면 처벌이다.[25] 차별을 증오했던 집정관 프란시아 박사께서 통곡할 내용인데 로페스 대통령 체제시절에는 차별정책이 꽤 있었다. 이 차별정책에 이를갈던 인디오와 흑인노예들은 3국 동맹군에게 아주 협조를 잘해줬다.[26] 주로 유럽인, 터키인, 인도인.[27] 파라과이 과라니 지폐에 아버지 로페스의 초상과 로페스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져있고. 아순시온 전쟁 박물관에는 "국가와 함께 죽으리라"는 말이 크게 새겨져있다. 또한 로페스가 전사한 3월 1일은 파라과이 독립 기념일 다음으로 중요한 국경일로 "국가 영웅절" 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28] 1872년 이들을 중심으로한 공화당이 창당.[29] 로페스가 빡친 3국 동맹의 비밀 협상내용 상당수가 황제의 의도가 들어가있었다. 황제는 로페스가 자기 명예를 건드렸다고 생각해서 심기가 너무 불편해 로페스를 죽여버리고 싶어했다.[30] 물론 기득권 통제를 위한 페드루 2세의 의도가 있었다.[31] 물론 페드루 2세께서는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