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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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학자, 교육자(교수), 정치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감정기,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한국어, 한국역사 교육과 연구를 주도하여 국학과 민족학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반면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활동을 하여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양면적인 인물이다.
2. 약력[편집]
- 190?. 서당 수학
- 1910.4. 평안북도 선천군 신성중학교 입학
- 191?. 평안북도 선천군 신성소학교 강사
- 1913.4. 평안북도 선천군 신성소학교 훈도
- 1913. 중국 허베이성 톈진 신학서원 입학
- 1917. 중국 허베이성 톈진 신학서원 졸업
- 1918. 미국 미주리 파크 대학교 역사학과 입학
- 1922. 미국 미주리 파크 대학교 역사학과 졸업
- 1922.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과 입학
- 1923.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종교역사 전공 입학
- 1925.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과 졸업
- 1925.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종교역사 석사
- 1925. 미국 코네티컷 예일 대학교 대학원 종교역사 전공 입학
- 1927. 미국 코네티컷 예일 대학교 신학 박사
- 1927. 조선YMCA기독교청년회 이사
- 1927. 조선기독교서회 이사
- 1927. 연희전문학교[6] 문과 교수
- 1927. 이화전문학교[7] 문과 겸임교수
- 1927.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과장
- 1927. 근화여자실업학교[8] 문과 겸임교수
- 1934.5. 진단학회 창립발기인
- 193?. 조선민족학회 창립발기인
- 193?. 조선어학회 회원
- 1938.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
- 1938.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사
- 1941.8.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 1941.8. 조선예수교 장로교도 비행기기부회 부회장
- 1942.4.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유지재단 이사회 이사 및 회계 실행위원
- 1945.9. 경성대학(現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 겸 법문학부장
- 1945.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조선교육위원회 자문위원
- 1945.12. 연희전문학교 교장
- 1945.12.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창립발기인
- 1945.12. 국민대학교 재단 이사
- 1946. 연희대학교 초대 총장
- 1948. 미국 파크 대학교 신학 명예박사
- 1949.12. 동방학연구소 초대 총장
- 1949.12. 《동방학지》 편집인
- 1950.5. 제2대 문교부장관
- 1950.11. 국무총리 서리
- 1952.10. 한국 YMCA연맹 위원장
- 1953. 서울특별시교육회 제3, 4대 회장
- 1953. 세계 대학봉사회 한국지부 이사장
- 1954. 미국 스프링필드 대학교 인문학 명예박사
- 1956.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 1956.10. 한국행정연구회 초대 회장
- 1956.10. YMCA청년회 유지재단 이사장
- 1958. 디포대학 법학 명예박사
- 1959. 동국대학교 백성욱총장 회갑기념논문집 편찬위원장
- 1960.5. 초대 참의원 선거 후보 (무소속 / 서울시 제1부)
- 1960.7. 초대 참의원 (초선)
- 1960.7. 제4대 대통령 선거 후보 (무소속 / 낙선)
- 1960.8. 초대 참의원 의장
- 1960.8.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9]
- 1961. 연세대학교 명예 총장
- 1962. 세계대학봉사회 한국지부 이사장
- 1962. 미국 뉴욕시 대수장(大受章) 수훈
- 1964. 연세대학교 재단이사회 이사
- 1964. 한국연구원 이사장
- 1964. 한국역사편찬회 편찬위원
- 1964. 한글학회 이사
- 1965. 연세대학교 문학 명예박사
- 1965. 크리스찬 아카데미 고문
- 1966.12. 야당통합과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 고문
- 1969. 국토통일원 고문
- 1970.3. 외솔회 회원
- 1972.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 서노회 명예목사
- 1972. 전군 기독교 신자화 후원회[10] 초대 회장
- 1974. 외솔회 제2대 이사장
- 1977. 전군 기독교 신자화 후원회 고문
- 1980.2. 국정자문회의 위원[11]
- 1981. 한국기독교학교연합회 고문
- 1981.4. 국정자문회의 위원 (재선)[12]
- 1982.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회 명예총재
3. 일생[편집]
1895년 3월 9일 평안도 곽산군 관면 관삽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관상리)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백영순(白永淳)[13] 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10년 봄에 평안북도 선천군의 신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14] . 1913년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 유학, 톈진 신학서원에서 3년 과정을 거쳤다. 1916년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파크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학, 신학을 공부한 뒤, 1925년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사 연구를 시작하여 1927년 <조선신교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일대 최초의 한국인 박사다. 귀국 직전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대학교에서 정교수직 제안을 받았지만 고국에서 교육에 전력해야 한다며 이를 거절하고 귀국했다. 귀국하여 9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후학을 지도했다. 한때 보성전문학교에서도 잠깐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조선기독교서회 이사, 조선어학회 회원, 영국황실아주학회 한국지부 이사, 진단학회와 조선민속학회 발기인,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다. 특히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지내며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저항하며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특히 연희전문학교 문과 과장을 지내면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정인보, 최현배, 백남운 교수 등의 조선어, 조선학 운동과 연구를 적극 지원하였고 연희전문학교에 조선어, 조선사 수업을 정식으로 개설하는 것을 강행했다. 또 동아일보 등에 기고를 통해 조선 민족학을 위한 일종의 도서관 설립을 제안하는 등 민족학과 국학을 발전을 위해 앞장섰었다. 해방 후에도 동방학 연구소(현재의 국학 연구원)를 설치해 국학 연구를 계속했다.
한편 국외에서 국제적 학술, 교육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며 서구에 한국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1931년 영국 왕실아세아학회 한국지부 이사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국외 학술 활동으로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사회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해 한동안 국외에 머물다가 귀국 직후인 1939년 체포되어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1942년 9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1942년부터 돌연 내선일체 지지 및 학병 모집 선동, 신사참배 장려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엄청나게 많은 기고를 하였다.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22일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대학 법문학부장에 취임했으며 경제학부 학부장을 겸하며 사실상 총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미군정에 의해 세워진 조선교육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정부수립후 한국교육위원회로 개편된 후에도 자문위원직을 유지했다. 이때 홍익인간을 한국 교육의 이념으로 채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46년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장관을 지냈다. 재임 중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전북대를 설치했다. 그 해 11월 국무총리 서리에 잠깐 임명되었으나 인준이 부결되었다.
1960년 참의원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 이후 초대 참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윤보선이 아직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입법부 수장의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을 닷새 동안 대행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정계에서 교육계로 돌아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일하였다.
이후 1970년대에는 반(反)유신운동에 뛰어들어 민주화운동에 투신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1974년에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에 동참하였고, 야당인사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1969년부터 국토통일원 고문, 1980년 국정자문회의 운영위원으로 만년까지 학계·교회·사회·국제관계 전반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다.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받았으며, 197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90세로 죽었으며,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연세대학교 본교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용재관이라는 건물[15] 도 있었으나 노후화로 인해 철거되었다. 철거 이후 2015년, 경영관이 자리했으며, 해당 건물 지하 1층에는 용재홀[16] 이 있다. 국제캠퍼스의 기숙사에는 12개의 하우스가 있는데 이 중 하나의 이름도 '용재'이다. 오늘날의 교명으로 초대 총장을 지낸 인물이라는 점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그의 친일 행적 때문에 학생들이 철거를 주장한 일이 있다.[17] 라이벌인 고려대에서 인촌 김성수가 받고 있는 논란과 비슷한 셈. 여기에 백낙준의 호를 딴 용재상이라는 상이 있고, 수상자는 용재석좌교수에 임명한다. 그런데 백낙준의 친일 행적을 비판한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가 선정되자 이를 문제삼아 번복한 적도 있다.
4. 평가[편집]
일제강점기 말기의 행적 때문에 김동인, 이광수, 최남선, 김활란, 김성수, 유진오, 모윤숙 등과 더불어 전시체제기 대표적인 친일파라는 비판을 듣는다.
연세대학교 학보사 연세춘추에서 백낙준의 친일 행적을 논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면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본인과 달리 독립운동가였던 장준하의 최대 후원자였다는 점. 사실 이 둘은 같은 평북 출신에 신성중학교 출신이라 어느정도 동질감이 있던 사이었는데, 잡지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장준하를 문교부 공무원으로 발탁시켜서 어용잡지(...)인 사상을 출판시키는가하면, 나중에 사상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폐간되고나서 훗날 장준하의 전매특허와도 마찬가지인 사상계의 출판에도 여러모로 지원을 많이 해줬다. 오랫동안 사상계의 사무소가 있던 지금의 종로구 자리에 있는 한청빌딩이 이 당시 연세대학교 소유였기때문에 연세대 명예총장이던 백낙준이 입주하는 데 도움을 줬을 가능성이 큰 데다가, 본격적으로 사상계가 출간되고나서 백낙준의 영향으로 초창기 집필진들은 연세대학교 교수진들이 많았던 편이었다.
5. 선거 이력[편집]
6. 소속 정당[편집]
7. 둘러보기[편집]
8. 관련 문서[편집]
[1] 이명은 백성빈(白成彬)이며 일제강점기 당시 사용했던 창씨명은 시라하라 라쿠준 (白原樂濬)[2] #[3] 인주공파(仁州公派) 20세 낙(樂)◯ 항렬. 수원 백씨 32세.[4] 국무총리 서리 수행 (1950년 11월 3일 ~ 1950년 11월 15일)[5]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60년 8월 8일 ~ 1960년 8월 12일)[6] 現 연세대학교[7] 現 이화여자대학교[8] 現 명지대학교[9] 전임자 이승만 하야 후 참의원이 구성되면서 새 헌법에 따라 참의원 의장으로서 5일간 대통령 권한대행. 백낙준 취임 전에는 허정 국무총리가 하고 있었다.[10] 現 군복음화 후원회[11] 최규하 정부[12]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13] 족보명 백영신(白永信).[14] 안양의 신성중, 신성고는 이 학교의 후신을 자처하기도 했다. 설립자가 이 학교 출신이기도 했고. 다만 현재는 학교의 한자표기도 바꾸는 등 현재는 이에 대한 의식은 거의 없다.[15] 중앙도서관과 교육과학대학 건물로 사용.[16] 강당식 강의실[17] 여담으로 연세대에는 똑같은 친일매국노인 유억겸의 이름을 딴 유억겸기념관까지 교내에 있다. [18] 제1부[19] 1961년 의원직 상실(5.16 군사정변)[20] 민주당에 흡수 합당[21] 민정당과 신설 합당[22] 신한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