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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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에 대한 내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 문서
1. 개요[편집]
에도 막부(江戸幕府)[2] 의 초대 쇼군이자 일본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센고쿠 시대를 최종적으로 종식시킨 최종 승자이자 천하인(天下人)이다.
센고쿠 시대 미카와 지역의 영주였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안에 들어가는 등의 일을 거치며 착실하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오다 사후 떠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켰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등을 일으킬 때 조용히 몸을 사리며 세력을 기르다가 그의 사후에 히데요시의 세력들을 상대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긴 뒤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다.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개척하고 에도 막부를 창립하여 에도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후에는 동조대권현(東照大権現)이라는 신호(神号)를 받아 신격화되었다.
문학의 영역에서 인내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 인고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된 인물로 해석되는 편이다. 몸이 퉁실하고 성격이 능글맞다 하여 간토의 너구리(関東の狸)란 별명이 있으며, 관련된 창작물에서 자주 너구리로 비유된다. 정작 본인은 이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기타[편집]
- 보물을 자랑하는 모임에서 이에야스는 계속 조용히 있다가 "댁 보물을 보여주시오"라는 소리를 듣자 멋쩍게 웃으며 "부끄럽게도 나는 가난하지만 내게 보물이 있다면 그건 내 가신들이라오"라고 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맛있는 것이 생기거나 하면 노복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교육의 성과에 따른 계산된 행동이라고도 한다. 판단은 각자가 할 일이지만 실제로도 미카와 출신의 무사들은 충성스러움과 요령을 피우지 않는 무뚝뚝함, 행동을 가벼이 하지 않는 우직함으로 유명했으며 가신들의 이탈과 배신이 난무하던 당시의 다이묘들에 비해 가신들의 이탈이 굉장히 적었다.[3]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미카와 시절부터의 부하'(三河以来の旗本)라는 표현이 개국공신, 혹은 창업멤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솔직히 말하는 부하를 좋아했다고 하며 날을 잡아 부하들을 모아 서로 떠들썩하게 논쟁을 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를 경계하며 추종 세력을 모으자 칠본창이 미츠나리를 암살하려고 했다. 이에야스는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할 판에 또다시 사건을 일으키냐"며 오히려 칠본창을 꾸짖고 미츠나리를 안전하게 미츠나리의 거성인 사와야마성까지 배웅해줬다. 이에야스는 적대 세력의 잔당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면 그냥 살려주는 방식을 즐겨 택했다. 이마가와 우지자네[4] 의 예도 그렇고 다케다의 자손들도 마찬가지. 다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딱 3명만 사형에 처했는데 모든 화의 근원격인 이시다 미츠나리는 살아있는 한 영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이라 판단해 죽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행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한 것도 있거니와 제장들과의 사이가 나빠[5] 살려두면 사건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해 어쩔 수 없이[6] 참수했으며, 안코쿠지 에케이는 모리 테루모토를 꼬드겨 자신을 공격하게 해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게 한 원흉이라서다.
- 소 요시토시는 서군인 데다가 자신이 직접 죽여버린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임에도 불구하고[7] 곤장 1대조차 처벌하지 않고 대마도 도주라는 이유로 조선과 화해하기 위한 도구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자신의 원한보다 조선과의 관계를 훨씬 중요시했고 이러한 이에야스의 행보는 그가 공이 사보다 우선되는 성격임을 보여준다.[8]
- 존경했던 인물은 제환공, 진문공, 한 고제, 당 태종,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존경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보듯이 당태종을 제외하면 어느 한 능력이 특출난 사람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은 부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등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고 부하들의 말을 잘 경청하는 용인술이 뛰어난 지도자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에야스의 행적을 보면 이들을 벤치마킹한 듯한 흔적도 많이 나타난다. 특히 일본인들이 최고의 무사로 손꼽는 인물 중 하나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9] 그리고 당태종을 존경했기 때문인지 <정관정요>를 즐겨 읽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공식 역사서로 여기저기 잔본 형태로 흩어져 전해지고 있던 아즈마카가미(吾妻鏡)를 모아 필사하게 하고 그걸 활자로 찍어 보급하게 한 것도 이에야스. 본인이 겐지의 후손을 자처했던만큼 겐지로써 최초로 일본의 패자가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존하여 도쿠가와 가문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 일본에서 '새해 첫 꿈'으로 보면 재수가 좋은 것이라는 속설이 있는 후지산, 매, 가지의 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좋아했던 것을 열거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후지산은 이에야스가 슨푸성(지금의 시즈오카 현)에서 은거하면서 노년에 즐겼던 경치였고 매는 이에야스가 매사냥 덕후였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가지도 이에야스가 좋아했던 음식이라는데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여기에 연관하여 뜻풀이를 해보자면 후지산(富士山)은 한자 그대로 부유함을 상징하고 매(鷹:타카)는 고귀함(高:타카)과 발음이 같으며 가지(茄子:나스)는 이루다(成す:나스)와 발음이 같다. 즉, 부귀와 꿈을 이루는 것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 것.
- 미묘하게 주술과도 엮여 있는 인물이다. 에도에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관련된 유적이 7개가 있는데 이것을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한 장본인이 바로 이에야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통해 천황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도쿠가와 가문의 보물을 숨기고 그 장소를 비밀리에 전수하기 위해 핫토리 한조에게 노래를 짓게 했는데 그것이 카고메카고메라는 설도 있다. 또한 이에야스가 에도에 저택을 지으면서 저택 한쪽에 악귀들을 모아놓은 귀문을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나중에 오카다 유키코와 사카이 노리코를 골로 보내버린 선뮤직의 저주가 나타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은 260년간 지속된 에도 막부의 원동력에 대한 추측이 발전한 것이거나 이에야스의 비범함에 대한 소문이 이어져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 덴뿌라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매 끼니마다 덴뿌라를 항상 먹었을 정도. 특히 도미와 옥돔으로 만든 덴뿌라를 좋아했는데 많이 먹을 때는 5마리나 먹었다. 일설에서는 도미 덴뿌라를 먹고 죽었다고 하는데 진실로 인정하기에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이다. 다만 덴뿌라가 위암을 악화시킨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에야스는 튀김 요리를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점차 비만이 심해졌고 기록을 보면 50세 전후부터는 고도비만이 되었다. 나중에 가면 비만이 너무 심해져 혼자서 훈도시를 매지 못하여 시녀들이 매주어야 했으며 항상 입던 갑옷도 못 입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상술했듯이 이에야스는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 비만이 심했는데도 에도 시대 일본인으로서는 엄청 장수한 편에 속하는 74살까지 살았는데 덴뿌라 섭취 말고는 나름 건강을 신경썼기 때문이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상은 일본 전역에 다양하게 설치되어 있는데 그중 유명한 상이다.
- 아버지로서는 영 좋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정말로 없었던 모양이었다. 장남은 권력다툼에서 밀려 스스로 할복했고,[10] 둘째인 유키 히데야스는 어머니와 함께 세트로 박대,[11] 셋째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도 서자에 셋째라고 여기저기 인질로 보내는등 박대했다.[12][13]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태도가 좋지 못했다. 본인 아버지도 어린 나이에 자기를 여기저기 인질로 보내고 나몰라라 하던 막장 부모였던 걸 생각하면 그대로 배운 모양이다. 반면에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게 내쳐져 생이별하고 재가한 어머니 오다이에게는 극진한 효심을 보여 어머니가 재가한 히사마츠 토시카츠(久松俊勝)와 싸우게 되자 죽기 전에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적진까지 잠입해서 어머니와 만나거나 말년에 정이대장군이 된 뒤 자기 어머니라고 모셔와서 여생까지 극진히 효도했다. 그리고 그 어머니와 재가한 히사마츠 사이에 난 이부동생들에게도 마츠다이라 성씨를 하사하고 에도 막부가 설립되자 영지를 줘서 다이묘로 삼았다.
- 많은 측실을 거느렸는데, 과부 출신들이 많았다. 남편이 죽으면 생계 자체가 위험한 당대 사회 특성상 과부 구제책을 겸해 '도쿠가와 가에 충성을 다하고 사망한 남성의 충실한 과부이자 그 남성의 아이를 낳아 기른 경력이 있는 여성'을 선호한 것으로 보아 확실하게 자손을 남기고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야스 이전의 마츠다이라 가는 손이 귀한 상태라 여러 가지로 위험이 많았으므로 자신의 후대에는 그러한 위험을 배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말년에는 소녀들이 많아서 취향이 로리콘으로 바뀌었냐는 말도 있다. 말년에 자기 시녀로 오타아라고 하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는데, 오타아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임진왜란 도중에 전쟁고아가 되어 거둔 조선인 양녀였다. 오타아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는 시녀가 되었고[14]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타아를 측실로 들이려고 했지만 오타아가 거부했다. 이 시기 가톨릭 탄압을 하게 되었는데 오타아는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향으로 독실한 신자였던지라 이에야스와 그의 측실들, 그녀를 잘 아는 다이묘들이 신앙을 그만둘 것을 설득했지만 오타아는 거부하고, 결국 오타아는 시골 벽지로 유배되어 말년까지 봉사에 힘쓰다 사망했다.
- 우에스기 겐신이 '여성설' 혹은 '반음양설'이 있는 것처럼 이에야스도 떡밥이 하나 있으니 바로 '이에야스 카게무샤설'이다. 한마디로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본인이 아닌 대역이었다는 설. 카게무샤로 '세라다 지로사부로(모토노부)'란 사람이 언급되곤 하는데 이 떡밥을 소재로 북두의 권 작가인 하라 테츠오가 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바사라에서는 마지막 스테이지 중간 보스(페이크 최종 보스)로 등장하기도 했다. 다만 글자 그대로 설이니 '이런 얘기도 있구나'하는 정도로 재미로만 알아두자. 겐신 여성설과 마찬가지로 이 카게무샤설에 대해서도 이에야스가 카게무샤였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까. 이에야스의 카게무샤로 확인되는 사람은 나츠메 요시노부(夏目吉信)(1517~1573)[15] 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은 본래 이에야스가 막 자립한 초년기에 미카와 일향종 농민 반란[16] 때 일향종 편에 섰다가 이에야스에게 패하고 항복했다. 그러다가 이에야스가 신겐에게 대패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다케다 진영으로 돌입해 전사했다. 뒷날 요시노부의 아들들 중 나츠메 요시키(夏目吉季)는 위의 명령도 없이 자신의 동료를 죽여버리는 일을 저지르고 하야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야스는 아버지의 공을 생각해 이를 용서해 주고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자네 아버님 덕택이네.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네"라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직속 가신으로 배치해 주었다고 한다.
- 개인적 취미는 '매사냥'이었다. 이 당시 높으신 분들의 취미로 유명했지만 이에야스는 거의 매사냥 마니아 수준이었다.[17] 또한 개인적으로는 의술에도 관심이 있어서 자기 몸의 병을 자기가 직접 처방하고 약까지 직접 조제할 정도였다고. 이 점을 반영해서 코에이의 <노부나가의 야망 12: 혁신>에서는 이에야스가 습득 가능한 고유 전법이 '치료'로 되어 있고 태합입지전에서도 의술 스탯이 높게 책정되어 있다. 전국시대 무장 치고는 70세 중반이라는 장수를 누린 편인데, 그만큼 이에야스 본인이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위키백과 이에야스의 일본어판에는 이에야스를 '건강 오타쿠'라고 적고 있다.
-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배웠고, 말년이 되어서도 검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검술 실력은 무력으로 유명한 그 가토 기요마사보다 한 수 위였다고 한다. 검술은 당대 장수의 기본 소양이었고, 본인도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병장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취미로서 검술을 상당히 즐겨, 막부 개창 후에도 종종 검술가들을 초빙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이토 잇토사이의 '오노하 일도류' 계열과 야규 무네요시의 '야규 신카게류'가 있으며, 이 두 유파는 다음 세대 쇼군들에게 검술을 교습하였다. 야규 가문은 검술 사범의 역할뿐만 아니라, 에도 막부의 정치적 결정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성장하였다. 또한 활솜씨도 나름 괜찮았다는 평. 젊은 시절에는 이마가와 요시모도의 사후 그가 사용하던 동해도 제일의 궁수(海道一の弓取り)라는 별명을 이어받을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고 한다.[18]
- 말년에는 젊은 부하들에게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식으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이마가와 가 인질 시절 이야기나 젊은 시절 최대의 적이었던 다케다 신겐과의 싸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추억이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준 기록이 없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끝내 동맹 관계를 끊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에도 만났던 적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특이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일설에는 이에야스가 실은 노부나가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19]
- 에도 초기에 철저한 숙청으로 철권 통치를 단행했으며 무사 계급과 평민 계급의 차이를 엄격히 규정하는 한편 다이묘들을 매우 가혹하게 다루었다. 대표적으로 말기 양자[20] 를 금지하거나 사사로운 일로 가이에키나 할복을 명하는 등 정책을 취하였고 도로를 통제하거나 철저한 호적 조사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통제하였다.[21] 에도 시대에 대중문화가 발달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22]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논공행상에서도 이에야스의 정치력을 엿볼 수 있는데 포상은 짜게, 처벌은 후하게. 대외적으로는 기리시탄 금지령을 이어받아 더욱 엄격한 형태로 확정하였고,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쿠로후네 사건 때까지 일본의 대외관계는 극히 제한되었다.
- 태정대신 타이틀도 있다. 단, 태정대신 직은 이에야스가 사망하기 1개월 전에 받은 관직이라 태정대신 직을 유지한 기간은 잠깐이다.
- 에도 막부가 네덜란드를 제외하고는 장기간 서양과의 교역을 끊었던 것과는 달리 이에야스 본인은 노부나가 못지 않게 남만(서양)의 물품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시계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는지 해시계나 서양식 시계, 모래시계를 수집하는 게 취미였다고 하며, 그 중 이에야스가 쓴 서양식 시계가 현존하고 있다. 이외 이에야스의 유품 중에는 나침반, 연필, 안경도 남아 있다. 또한 일본에 표류한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라는 영국인 항해사를 등용하여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 등 여러 나라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했고, 기하학과 수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윌리엄 애덤스는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라는 이름으로 죽을 때까지 일본에 살면서 다른 서양인들과의 교섭이나 선박 건조 등의 업무를 맡았다.
-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관리가 매우 철저했다. 한 예로 화장실에서 옆구리에 끼워놓은 종이가 바람에 날아가 버리자 뛰어나가 종이를 주웠고, 이 광경을 본 하인들이 이유를 묻자 "나는 이것으로 천하를 쥐었다."라고 대답했다. 망가진 마구간을 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두게 했는데 이유가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커야 말이 더 강하게 자라나기 때문”이었고 뒷간을 장식했다는 이유로 성질을 내면서 장식을 철거시켰다. 부하들이 방에서 스모를 하면서 놀려고 하는 것을 보자 “다타미가 더러워진다”면서 그것을 뒤집고 놀도록 했다. 헌 옷을 계속 빨아가며 입어서 시녀가 많이 지쳤던 모양인지 하루는 “새 옷 좀 사 입으시라”고 불평했지만 되려 “자신은 천하를 위해 절약하는 것”이라며 시녀를 혼냈다고 한다. 밥은 많이 먹었지만 식사 자체는 1즙 3찬(국 하나에 반찬 3가지)으로 먹었고, 이런 모습을 가신들이 점차 따라감으로서 훗날 일본의 적은 반찬으로 소식하는 식사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도 후계자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좋게 말하면 검약함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인색했던 인물인 셈.[23]
- 괴이한 방향으로 군재가 뛰어났는데 승패 여부를 떠나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의 사상자를 줄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세키가하라 전투만 하더라도 본인의 직할부대의 피해는 최소화 시키면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병력들을 소모시키다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배신시켜 서군이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들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립 중에서도 말도 안되게 적은 병력 희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학을 떼 결국 아사히히메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내기에 이르렀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의 일은 딴 놈들끼리 싸워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득을 먹은 꼴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식으로 이득을 얻는 경우가 많아 너구리로 불리기까지 했다.
- 에도 막부 초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에 의해 각종 기술자들이 시즈오카로 몰려들어 각종 공사를 했는데 시즈오카가 살기 좋았는지 공사가 완료된 이후에도 그냥 눌러살게 된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 시즈오카 일대가 프라모델의 명산지가 되었으며 반다이, 타미야 등 네임드 프라모델 회사가 이 곳에 자리잡았다. 그렇다 보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사에 봉납된 헌물이 신사 헌물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프라모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저승에서 좋아하겠는데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양식 시계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프라모델은 딱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맞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
3.1. 기다림의 달인[편집]
일본 천하를 움켜쥔 전국 3영걸 중에서 이에야스의 성격이 제일 느긋했다. <갑자야화>의 한 구절이 삼영걸의 성격을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이 마냥 기다리기만 하다가도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발군이라 기회만 포착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치기했다. 그래서 음흉한 너구리 소리를 듣는다.(새가) 울지 않으면(鳴かぬなら)
오다 노부나가 - 죽여버려라(殺してしまえ)
도요토미 히데요시 - 울게 만들어 보이겠다(鳴かせてみせよう)
도쿠가와 이에야스 - 울 때까지 기다리자(鳴くまで待とう)
두견새(時鳥)
결국 이러한 세 명의 지배자들은 그 성격대로 수명이 갈렸다.
- 오다 노부나가 향년 49세
- 도요토미 히데요시 향년 62세
- 도쿠가와 이에야스 향년 75세[24]
다케다 신겐에게 패하고 말안장에 똥을 지리는 굴욕을 당하고도, 오다 노부카츠에게 배신당해 압도적인 군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해야만 했을 때도, 임진왜란에 강제로 출병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끝없이 참고 끝없이 기다리며 자신의 세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성공했다.
3.2. 감정 조절의 달인[편집]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생애 중반까지 엄청나게 굴욕을 많이 당했다. 다케다 신겐과의 전투에서 바지에 똥을 쌀 정도로 극에 달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맞붙어 이겨놓고도 명분이 서지 않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로 들어가는 등 생각보다 치욕을 많이 당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상당히 쿨했다.
다케다 신겐과의 전투에서 처절하게 짓밟히고 바지에 똥을 싼 일을 부하들에게 시켜서 그 모습을 초상화로 남겼고 심지어 석상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매일같이 쳐다보면서 항상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라고 생각했다.[25] 굴욕을 당했다고 해서 열폭을 하는 게 아니라 그 굴욕에 대해 연구를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밑으로 들어가는 굴욕을 당하고 게다가 나이 40살도 넘고 별로 미인도 아닌 아사히히메와 강제로 결혼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을 때도 '이제 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열폭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천천히 생각하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강제로 전봉당했을 때는 '원래 있던 곳에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남겨놓고 그대로 얼굴마담을 하자. 그리고 새 영지에서 내 이름을 선전한다.'라고 생각하며 양쪽 모두에서 인지도를 유지했다. 그 결과는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였다. 덤으로 이 전봉을 핑계로 임진왜란을 땡땡이 쳐서 자기 세력을 그대로 보존한 데다가 무익한 조선 정벌에 출병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는 이유로 얻은 역량 보존과 인망으로 인해 일석이조까지 따냈다. 거기에 더해서 훗날 임진왜란에 한명의 병사도 보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조선통신사 파병을 요청하였고 이렇게 일본을 방문하게 된 조선통신사를 '외국에서도 도쿠가와 막부 정권을 인정한다'라는 취지의 대대적인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기에 일석삼조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굴욕을 참는 능력이 남달리 강했고 그게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더욱 냉철한 판단력으로 무장시켰다. 그리고 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냉철한 판단력은 그를 일본의 지배자로 만들어줬다.
3.3. 의외의 성급함[편집]
위의 '기다리다 천하라는 떡을 먹은 자'라는 이야기 외에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인물로도 유명해서 느긋하고 신중, 침착한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전장에서는 그런 이미지와는 달리 꽤 신경질적이고 조급한 면모도 종종 보여주었다. 전략 레벨에서는 신중, 침착한 인물이지만, 전술 레벨에서는 조급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젊은 시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인데도 신겐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던 적은 유명한 사실이지만, 노련한 정략가로 변모한 뒤인 세키가하라 전투 초반에도 동군이 불리했을 때 지시를 내리다가 전황이 영 마음에 안 들게 돌아가자 화를 참지 못해서 시동이 등에 달고 있던 깃발의 깃대를 칼로 베어버린 적도 있었으며[26] , 불안하거나 기분이 나쁘면 왼손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는 특이한 버릇[27] 이 있었는데 이게 너무 심해서 피가 날 정도로 물어뜯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야스의 손톱 물어뜯기 버릇은 노부나가의 '데아루카(であるか: 그런가)'란 표현처럼 이에야스를 다룬 창작물에서 빠지지 않고 묘사된다.
또한 말을 타고 지휘할 때에도 처음에는 지휘채로 지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맨손으로 말안장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쳐가며 지휘했을 정도. 이런 모습을 보면 노부나가 못지 않게 다혈질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에 대한 조선측의 기록에서도 '사납고 날래다', '전투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는 등 호전적이고 격한 묘사가 많은 편이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당시 조선이 일본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당대 이에야스에 대한 조선의 평가는 대부분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던 강항의 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강항은 당시 이에야스에 대항하던 서군 측에 가까운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당연히 그가 접한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도 경외와 함께 증오가 섞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조선 조정에서는 후술되어있듯 "여전히 완전히 믿을 수는 없으나 만악의 근원 풍신수길보다는 낫겠지" 정도의 인식은 가지고 있었다.
4. 평가[편집]
4.1. 일본에서의 평가[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 들어선 긍정적인 평이 많은 편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왔다갔다하는 편이었다.
근대엔 막부를 세우고 나서 천황을 몰아붙인 탓에 평가가 좋지 못했다. 특히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나서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존왕사상 일변도가 되는 바람에 이에야스는 천황가를 홀대했다는 평가가 주가 되어 주로 비열함이나 간사함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사실, 황실과 공경[28] 의 처우는 오히려 에도 막부로 인해 많이 개선되었다. 센고쿠 시대에는 일개 다이묘가 천황의 가마에 화살을 쏘거나, 천황이 직접 글씨를 써서 생계비를 버는 경우까지 있었다.[29] 에도 막부는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 천황과 공경의 역할 및 한계를 규정하여 현실 권력에서 배제하는 한편 도쿠가와 직계 여손인 도쿠가와 마사코(徳川和子, 1607~1678)를 고미즈노오 덴노에게 시집보냈다. 에도 시대 중기쯤 가면 도쿠가와 가문은 무사의 대표이자 천황가의 일원이었으며 이는 에도 막부 후기~쇼와 시대까지 이어졌는데, 도쿠가와 사람이 천황가에 시집갔으니 홀대할 수 없어 적어도 경제적으로 궁핍할 일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전후 들어선 그러한 시절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며 오히려 반대로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나게 되었다. 에도 막부가 전후 수습을 잘하면서 일본의 국력을 키웠기에 이에야스가 평가받는 점도 있지만[31][32] , 한편으론 대히트작인 야마오카 소하치의 역사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33] 에서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묘사된 것이 대중의 인식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세력 구도를 잘 파악하여 많은 위기를 인내하다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롤모델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항목에도 있듯 소인배와 대인배스런 모습을 모두 보여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너구리의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어찌됐든 현실 감각이 있어 매사에 무모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해야 할 처신만 제대로 하면서도 본인의 내실을 탄탄히 쌓는 면모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명과 인도까지 정복하겠다고 큰 소리치다 본인이 죽고 가문마저 완전히 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34]
다만 오다 노부나가와 동시대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에야 패권을 쥐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화제성이 떨어지는 편이긴 하다.[35] 특히 노부나가와 동맹을 유지했던 시절에는 주로 싸운 것이 다케다 신겐이었기 때문에[36] 큰 활약상이 없다는 점도 문제이다.
재미있게도 일본에선 이에야스는 물론 다른 막부 창건자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역사의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라이벌에 비하면 인기가 처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리토모는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밀리고, 다카우지는 구스노키 마사시게나 닛타 요시사다,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같은 라이벌들에게 인기가 밀리는 편. 그나마 이에야스는 세 명의 막부 창건자 중에서는 나름 인기가 있는 편이다.[37] 다만 군사 간베에를 시발점으로 일본에도 NHK 대하드라마에서조차 임진왜란은 조금씩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요리토모나 다카우지와는 달리 평가가 상승하는 중이다. 적어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나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은 무고한 사람들을 일절 학살하지 않은 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이라는 큰 아킬레스건이 있기 때문이다.
4.2. 한국에서의 평가[편집]
한국에선 사실 일본 전국시대를 자세히 아는 대중들이 적으니 임진왜란으로 유명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도를 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인지도가 엄청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고보면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임진왜란을 수습하고 조선과 외교 관계를 회복하는 등의 행보로[38]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축의 일본 권력자들 중 한명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까지 선대의 뜻을 따라 조선과의 친교를 중시했기에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과 일본의 사이가 다시 앙숙이 된 것은 일본이 서양에게 개항을 당하면서 제국주의에 눈 띄기 시작했을 때부터이다. 즉,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 시기는 친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조선에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 초기만 해도 그의 속내를 알 수 없기에 경계했는데, 당시 조선에선 여전히 내전 중이던 일본이라 정확한 정보도 얻기 힘들었기에 그냥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준해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부산에서 떠도는 소문이나 일본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포로들의 말이 그나마 정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이조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부 문제가 정리되면 조선을 재침할 것이라는 말, 도요토미 가에서 반격을 시작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쫓겨날 것이라는 말[39] 이 떠도는 등 중구난방이었다. 그나마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쓰시마 도주의 말도 <기유약조>를 보면 알 수 있듯 상당부분은 대마도측 입장에서 유리한 조작으로 점철된 것이었고, 조선 조정은 이를 진즉에 눈치챘으니 정말로 믿을만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조선과 명나라는 도쿠가와 막부를 여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선조 말엽부터 시작하여 효종 때까지도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광해군일기》를 보면 조선 조정이 일본의 정세를 탐지하여 명나라에 보고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받아 본 명나라 유격의 답신이 이랬다.
자문을 받아보고 왜인들의 정세를 알았습니다. 적국에 일이 있는 것이 비록 귀국에 다행이기는 하나 덕천가강은 꾀를 써서 강자를 제어하는 일을 잘하니, 뜻을 얻은 뒤에는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8년(1616) 5월 20일
다만 그렇다고 그가 조선에 우호적으로 나온 것이 속일 목적이었거나 계략이 있었거나 한 건 또 아니었으니 무작정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저 일본 내의 정치적인 이유[40] 때문이었긴 하나 어찌됐건 조선 정벌에 소극적이었으며 저런 명분을 내건 것 때문에라도 양국 관계 회복에 애쓴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도 <기유약조> 때부터 쓰시마 도주가 문서 자체를 조작하긴 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뜻까지 감히 거스르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서 조작을 문제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쓰시마 도주의 행동이 발각되었을 때 일본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를 더 염려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측의 대변인이자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요구를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조정해서 조선에 전달하고, 조선의 요구 또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조정해서 일본에 전달하는 식이었다. 대마도의 이런 행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도 있었는데, 흔히 임진왜란의 명분으로 알려진 정명가도라는 말도 본래 히데요시의 요구는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고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라는 의미로 너무나 불손한 의미였던지라 대마도 도주였던 소 요시토시가 살짝 손을 봐서 가도입명(假途入明), 즉 '명에 들어가니 조선은 그 길을 빌려달라'는 뜻으로 바꾸어 보냈다. 물론 그 말이 그 말인지라 조선 조정도 진의를 바로 눈치챘지만,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대마도가 어떤 역할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상(효종)이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임의백(任義伯)을 소견(召見)하여 묻기를,
"너는 동래(부산)에 오래 있었으니 일본(日本)의 사정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아뢰도록 하라."
하매, 임의백이 아뢰기를,
"신이 동래에 있을 때에 들으니, 일본은 백성이 매우 번성하고 살길은 매우 어려우므로 저희끼리 도륙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고기를 삼킨다 합니다. 원가강(源哥康)이 심처왜[深處倭]
를 진복[鎭服] 하려고 강호[江戶] 로 거처를 옮겼는데, 강호와 왜경[倭京] 사이는 길이 머나 인가가 촘촘히 잇달아서 여염이 번성한 것이 우리 나라의 종가(鍾街)와 같고 군사가 많기도 예전에 없던 것이라 합니다. 남조[南朝] 의 신사(信使)가 서로 통하고부터 상선(商船)이 잇달아 와서 왜경에 정박한다 합니다. 접(接)때 남조에서 왜국에게 군사를 청하니, 왜인이 ‘조선은 교린[交隣] 의 정분이 두터우므로 급한 일이 있으면 구제할 수 있으나 남조는 일찍이 서로 통한 의리가 없으므로 구제할 수 없다.’ 하므로 남조의 사신이 통곡하며 가지 않고 그대로 왜국에서 죽었는데, 근래 그 의논이 조금 변하여 혹 구제하려는 의논이 있다 합니다. 또 왜인이 늘 남조는 형세가 강성하고 청국은 쇠잔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남조가 과장한 말인 듯합니다. 또, 왜경은 인심이 매우 나쁘지는 않으나, 마도[馬島] 사람은 그 나쁜 것이 유난히 심한데 도주(島主)가 어리석으므로 장차 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 줄 것이라 합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원가(源家)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칠 때에 맨 먼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묻고 다음에 조선 사람을 함부로 죽인 죄를 물었으니, 그 자손이 어찌 그 조훈(祖訓)을 어기겠습니까. 원가가 그 나라에 오래 살아있는 것이 실로 조선의 이익입니다."
하였다. (중략)
- 《조선왕조실록》 효종 6년(1655년) 1월 25일 경술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에야스의 이름은 임진왜란 이후 포로 교환이나 전후 처리 등을 논할 무렵에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 본명인 '덕천가강'이나 '원가강'(세이와 겐지, 즉 청화 원씨의 후예를 자처했기 때문이다.)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면 평가는 전반적으로 '국적, 원흉 취급이었던[41] 히데요시와는 달리 나름 개념 있는 왜인' 정도다. 일본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했던 임란 당시에는 틀린 정보도 많았지만, 후대 통신사의 기록에서는 정보가 상당히 제대로 나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효종 때 조선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남용익이라는 사람은 일본의 역대 지배자들을 소개하는 파트에서 이에야스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원뢰조의 지파(支派)로서 대대로 겸창(鎌倉: 가마쿠라)에 살면서 8주(州)를 합치고 받아들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으며 상모(狀貌=얼굴의 생김새)가 풍만하고 준수하며 날래고 사나워 잘 싸우므로 온 나라가 감히 그와 싸울 사람이 없었다. 평수길이 친히 가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뒤에 원한을 풀고 수길에게 귀순하였으며, 수길이 죽을 적에 아들 수뢰를 그에게 부탁하였다.
경장 8년(1603년) 계묘년에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고 10년(1605년) 을사년에 위를 아들 수충에게 전하여 주고 대상국(大相國=태정대신)이라 일컬으며 부자가 국가의 정사를 전집하였다. 을묘년(1615년)에 대판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평씨(도요토미)를 멸망시켰으며 다음해 병진년(1615년)에 죽으니 호는 '동조대권현'(東照大權現)이며, 정권을 잡은 게 3년간이었다.
- 《부상록》 중 <문견별록>(聞見別錄)의 -관백 차서-에서
한편, 임진왜란 직후 쓰인 강항의 《간양록》을 보면 이에야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괴팍스러운 성품에다가 싸움질을 좋아하기 때문에 전국을 통틀어 감히 그와 자웅을 견줄 자가 없었다."
"차분한 성격에 말수도 적고 얼굴이나 몸집도 두툼하게 생겨 덕스러운 편이다."
"수길(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살았을 때에는 많은 인심을 얻었지만 수길의 뒤를 갈음하게 되자 도리어 일반의 신망이 떨어져 갔다."
"하는 짓이 명랑하지 못하고 컴컴하다. 한 번 비위에 거슬리면 그 사람을 죽을 고비에 몰아넣고 만다. 그렇기에 부하들도 코앞에서만 슬슬 기지 한 놈도 믿고 따르는 놈이 없다고 한다."
- 《간양록》 중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보면 알 수 있듯 후대보다 악평이 제법 많은데, 사실 《간양록》의 기록은 강항이 포로 시절 직접 일본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것이라서, 도쿠가와 가문을 좋게 보기 힘들었던 기나이나 오사카 근방, 즉 서일본 출신의 인물들에게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도쿠가와 욕이 저렇게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간양록》에서나 《부상록》에서나 상당히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인물이면서 말수가 적고 침착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다.
4.3. 군 지휘관으로서[편집]
전장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당대에서부터 이미 높게 평가받아 왔다. 전략/정략 측면에서 이에야스의 능력은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야전지휘관으로서의 이에야스의 역량은 그 휘하의 미카와 가신단이 아네가와 전투에서 병력이 우세함에도 졸전을 벌인 오다군(히데요시, 시바타 가츠이에 모두 돌파당함)과 달리 병력이 열세함에도 아사쿠라군을 격파했고,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미카와 가신단 필두인 사카이 다다쓰구의 활약 등으로 용명을 떨친 데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2개 회전이 오다군의 보조적 역할이라면, 압도적 병력 열세에서 야전 축성과 기습으로 히데요시군의 이케다 쓰네오키, 모리 나가요시를 전사시킨 고마키 나카쿠테 전투는 이에야스의 야전지휘관으로서의 노련함과 신속한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례. 전국시대의 회전 사례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은 가운데,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외에는 이에야스가 참패한 전투 자체가 드물고 말년의 세키가하라 전투나 오사카 전투를 제외하면 이에야스의 전적은 최상위권에 넉넉히 든다.
다만 오다 노부나가나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모리 모토나리, 호조 우지야스 등의 쟁쟁한 다이묘들에 비해 이에야스가 한수 처지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에야스가 이긴 전투가 화려한 전략전술이나 극적인 반전 등 오락적인 요소가 부족하기도 했고[42] , 반대로 그의 생애에 있어 몇 안되는 패배인 미카타가하라 전투나 그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상대가 다케다 신겐이나 사나다 노부시게 등 에도 시대로부터 전통적으로 대중문화에서 인기가 매우 높은 인물들이었기 때문. 게다가 이에야스라는 인간의 주력 전공은 지휘가 아니라 권모술수였다는 점도 한몫 하는데,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군대를 지휘해서 승리를 한 게 아니라 적장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배신을 유도해내서 이겼다는 점이 그렇다.[43]
서양학자 조지 베일리 샌섬(George Bailey Sansom, 1883 ~ 1965)은 오다 노부나가를 평하면서 그의 군재는 히데요시나 이에야스 같은 유능한 장군의 도움을 받은 편이었다고 평해 이에야스가 헛물은 아니었다는 평을 내렸고, 노부나가가 확장하면서 이에야스에게 뒤를 맡긴 것만 봐도 군사적으로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노부나가에 비해 개척하는 역량은 부족했을 뿐이었다.
물론 패배도 있긴 했는데, 영혼까지 털리다 못해 똥까지 쌌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야 병력이나 포진부터 이미 열세였던 데다 상대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다케다 신겐이라 당해버린 것이라 쳐도, 오사카 전투에서는 그 사나다 노부시게의 반격으로 우위를 점하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몰려버렸다. 이에야스가 생전에 전장에서 생명의 위협에 빠진 적이 두 번 있는데, 그 두 번이 모두 다케다 관계자가 지휘하는 적을 상대했으며 그때마다 적이 빨간 갑옷을 입은 놈들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그 모습이 어지간히도 인상적이었는지 다케다 멸망 뒤 이에야스는 다케다 유신들을 재정비하여 자신이 아끼던 젊은 무장 이이 나오마사 휘하에 편제, 이이 아카조나에를 운용하게 되는데 말년에는 전투가 없어서 군기 빠진 신참들이 붉은 무구를 갖추고 있다고 한탄[44] 했다는 걸 보면 역시 다케다 가의 붉은 군대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전략전술/무략/모략/정략/임기응변 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에야스는 당대 1급 군 지휘자가 맞다. 전략의 시야가 오다에게, 전술의 화려함이 신겐, 무략의 용맹함이 겐신, 모략의 깊이가 모리 모토나리, 정략의 견실함이 호조 우지야스, 임기응변의 순발력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밀린다고 해도, 이에야스는 실패나 굴종을 극복하면서 각 방면의 1인자들에게 버금가는 역량을 축적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쟁쟁하던 군웅들을 제치고 천하를 거머쥔 것이다.
5. 가족관계[편집]
- 부친: 마츠다이라 히로타다
- 모친: 오다이
-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
-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 - 자결
- 장녀: 가메히메(亀姫)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정실
- 계실: 아사히히메(朝日姫)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복여동생
- 측실: 오쓰마노가타(お都摩の方)
- 5남: 마쓰다이라 노부요시[45]
- 측실: 오만노가타(お万の方)
- 측실: 오만노가타(お万の方)
- 차남: 유키 히데야스 - 유키 하루토모의 양자가 됨
- 측실: 오아이노가타(お愛の方)
- 측실: 오타케노가타(お竹の方)
- 3녀: 후리히메(振姫) -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 →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의 정실
- 측실: 자아노쓰보네(茶阿局)
- 6남: 마츠다이라 타다테루
- 7남: 마쓰다이라 마쓰치요
- 측실: 오나쓰노가타(お夏の方)
- 측실: 오카지노가타(お梶の方)
- 4녀: 마쓰히메(松姫)
- 5녀: 이치히메(市姫)
- 측실: 오우메노가타(お梅の方)
- 측실: 오스와노가타(お須和の方)
- 측실: 오무스노가타(お牟須の方) - 난산 도중 모자가 함께 사망
- 측실: 오카메노가타(お?の方)
- 측실: 오센노가타(お仙の方)
- 측실: 오로쿠노가타(お六の方)
- 측실: 니시고리노가타(西郡の方)
- 차녀: 도쿠히메(督姫) -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 →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의 아내
6. 후손[편집]
후손들이 아직도 종친회를 갖고 있다. 도쿠가와 종가 18대 당주는 도쿠가와 츠네나리이다. 도쿠가와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 재직 중. 여담으로 당주가 한 기업에 재직할 무렵 하필이면 다이묘가였던 마에다 가문의 종가 당주도 한 부서에 있었는데, 이때 상사가 두 사람에게 농반진반 "마에다와 도쿠가와의 당주를 턱짓으로 부리는 건 태합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겠지" 하면서 좋아했다고 한다. 도쿠가와 츠네나리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히로는 21세기 들어 정계에도 진출한 적이 있으며, 2006년에는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1살 어린 베트남 여자와 결혼했다.
7. 초상화 및 상(像)[편집]
시즈오카시 슨푸유메히로바(すんぷ夢ひろば)의 박물관에 있는 상. 이에야스의 모든 상들 가운데 오고쇼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위 동상을 제작할 때 참고한 초상화.
8. 창작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