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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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의 기준을 충족하지 않은 학살에 대한 내용은 학살 문서 참고하십시오.동음이의어에 대한 내용은 제노사이드(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집단 살해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편집]
集團殺害 / Genocide
제노사이드(genocide)는 천부적 혹은 사회적 요소를 들어 특정 인류 집단을 고의적 및 제도적으로 말살하는 행위, 또는 그러한 시도를 일컫는다.
폴란드 출신 법학자 라파우 렘킨(Rafał Lemkin, Raphael Lemkin, 1900년 4월 24일 ~ 1959년 8월 28일)[1] 에 의해 20세기 중반에 정립된 개념이다. 그리스어로 인종을 뜻하는 Genos와 살해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Caedo, Caedare[2] 의 합성어로써 주로 '집단 살해'라고 번역된다. 1944년 그는 터키에서 몇십 년 전 일어났던 참극을 보고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고, 이는 이후 1948년에 일반적인 학살과는 구분되는 일종의 범죄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립되었다. 다만 학계나 교육계 등에서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용어로 확산된 것은 1970년대 전반이다.
주로 특정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하기 위한 의도적 행동을 가리킨다. 그 주체는 정부나 정규군일 수도 있으나 민병대와 같은 자생적인 점조직에 의해 수행되는 경우도 많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의도로, 의도가 있다면 집단의 '절멸' 이외에도 '민족적 거세'라는 제한 목표를 설정하여 집단 성폭행을 조직적으로 자행하는 경우나 문화적 탄압 행위 등도 제노사이드로 판단될 수 있다.
이러한 집단 살해의 예시는 고대에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카르타고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파괴,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횡행, 고도의 산업력과 행정력을 가진 국민 국가(Nation State)의 등장, 그리고 과학 기술과 무기의 발달로 인해 집단 살해가 더 자주, 더 대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중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벌인 홀로코스트가 악명 높아 제노사이드의 대명사로 자리잡았으며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산업화, 체계화된 학살'이라는 특성에 있어 현대적 의미의 제노사이드가 정의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종전 후 집단살해 범죄를 정의하고 방지하기 위해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CPPCG)'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도 1950년에 이 조약에 가입했으며, 1995년에 제정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이러한 종류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단체에게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
단, 위에서 언급한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집단을 제외한 집단의 학살은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의해 처벌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저 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해당 협약의 범주를 굳이 저 4개 집단으로 한정짓지 말자는 학설도 존재하고, 국제사회에는 꼭 제노사이드가 아니라도 대량 학살, 대규모 인권 탄압, 전쟁범죄 등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수없이 많다.
1.1. 관련 법령[편집]
1.2. 심리[편집]
당연히 사람들은 맨 정신으로는 다른 사람을 집단으로 학살하자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제노사이드가 일어나는 배경에는 거의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 있었다. 제노사이드는 이 어려움의 책임을 돌릴 다른 집단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들을 제노사이드로 몰고 가는 심리의 중심엔 타자화 (우리와 그들로 나눔)와 비인격화 (상대를 사람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가 있다.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저들이 우릴 먼저 죽일 것이라는 공포와 혐오를 심어주어 거대한 증오범죄를 자행하게 되는 것이다.
1.3. 학살과의 차이[편집]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는 사건의 분류 과정에서는 권위있는 인권단체, 관련학자, 전문기관의 판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살 사건들은 제노사이드의 사례로 인정받지 못한다. 대표적인 권위 있는 목록은 아래와 같다.
- 국제 기구: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
- 각국 기관
1.4. 사례[편집]
제노사이드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사건들에 대한 내용은 학살 문서 참고하십시오.
- 뉴질랜드
- 모리오리 대학살(1835~1863)
- 칠레
- 셀크남 학살(1880-1910) - 칠레 정부가 셀크남 원주민들을 학살한 사건. 이 학살 이후 순수한 셀크남인들은 단 한 명도 남지 못했다.
- 독일 제국
-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1904~1908) - 독일 제국이 저지른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
- 오스만 제국
- 아시리아인 대학살(1914~1924) -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군이 아시리아인들을 상대로 학살한 사건.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1915~1917) - 오스만 제국의 청년 튀르크당이 20세기 초반에 자국 내의 소수민족 기독교 신자인 아르메니아인에게 편 제노사이드. 하지만 문서를 보면 알다시피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으로 벌인 게 아니라 무슬림인 아랍인, 아시리아인, 그리스인 등에 역시 제노사이드를 가했다. 근대의 대표적인 제노사이드로 50만명 이상의 아랍인, 750,000명의 아시리아인, 900,000명의 그리스인, 1,500,00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참으로 조직화된 목적을 가지고 학살당했다.[3] 아르메니아인만 죽인 게 아니라고 아랍권 등에서 분노하기에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란 이름부터도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와 오스만 말기 제노사이드라는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 아르헨티나
- 나팔피 학살(1924)
- 중국
- 티베트 학살(1950~) - 1950년 티베트 침공 이후 중국은 티베트인들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려는 시도를 했고 티베트 망명 정부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의 학살로 인해 1950년 부터 1984년까지 120만명 가량이 학살당했다고 발표했으며 서방 학자들도 최소 50만명 가량이 학살당했다고 추정한다.
- 파룬궁 학살(1999~) - 캐나다 전 국무장관 킬고어는 중국의 파룬궁 학살을 제노사이드라고 분류했으며 미국 국회 공청회에서 중국의 파룬궁 학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는 최소 6만 5000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 신장 재교육 캠프(2016~) -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반중 성향 무슬림 민족들(위구르와 카자흐)을 타깃삼아 강제로 불임 수술 및 집단 강간, 강제 통혼, 혼혈을 시행하는 상황이다.
- 북한
- 난쟁이 수용소(1970~)
- 짐바브웨
- 구쿠라훈디 학살(1983~1987) - 당시 총리였던 무가베가 은데벨레족, 칼랑족을 학살한 사건. 이 학살로 2만명 가량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IAGS는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분류했다
제1차 중동전쟁을 전후로 하여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5] 거주하던 아랍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 작전명 달레트, 공식 명칭 '여호수아 계획'이라는 형태로 아랍인 민간인들을 죽였다. 피의 숙청이라고 드러난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사건'은 1개 마을에서 하루 동안에만 250여명이 죽었고,[6]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북부 도시 하이파는 지프차를 동원해서 방송까지 하면서 학살 이후 소이탄으로 소거했다. 이런 학살이 드러나면서 총력전이 본격적으로 격화했다.[7] 이후 제1차 중동전쟁이 이스라엘 진영의 승리로 기울자, 본격적으로 다시 학살했다. 축출과 파괴라는 형태로 나온 이 학살은 엄청나서, 10월 전투 중에서 다와이마 마을 학살 사건에서는 아이를 포함한 80~100명을 살해,[8] 사프사프 지역에서는 50여 명의 남자들은 우물에 던져넣고 총격해 죽이고 14세 여아를 포함한 적어도 4건의 강간살해, 사사에서는 백기를 확인하고도 1,000여명이 죽고 남은 인원은 마을에서 추방, 살라하에서는 94명이 폭사 등을 이었다.[9] 이 과정에서 1948년 한 해에만 이스라엘 육군이 400여개의 아랍인 마을들을 파괴하였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탈주한 난민의 수만 75만에 이른다. 그나마 이스라엘 진영을 변호한다면, 이런 학살 사례의 거의 전부는 이르군처럼 유대인 테러조직이 일으킨 것으로 하가나는 가능하면 이런 행위를 막으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비인도적일 뿐 아니라 영국령 팔레스타인 지역주민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한 아랍인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지역경제를 붕괴시키고 사회구조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인데, 하가나의 투쟁 방향이 영군에 대한 테러와 아랍 연합국(아랍 연맹의 회원국들)의 침공에 대한 방어로 전환되면서 끔살당하는 비유대인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1949년의 봄에 이르러 휴전과 함께 은폐하는 것으로 종결했다.
2. 이민족·이종족 학살[편집]
위와 거의 비슷하지만 이쪽은 Xenocide라고 표기한다. 이원복 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등지에선 '인종청소'라 하기도 한다.
[1] 라파우 렘킨은 1900년 러시아 제국 베즈보드네(현 벨라루스 젤바)에서 폴란드 유대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차대전 전후 세워진 폴란드 제2공화국의 국민이 되었으나 1939년 폴란드를 침략한 독일군을 피해 국외로 도피했다. 1941년 최종적으로 미국에 정착했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2] Caedare가 접두사를 만나며 ae 이중모음이 i로 줄어든다.[3] 튀르키예에서는 부정되는 사건으로, 학살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계획적이었다는 것과 그 규모를 부정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상 튀르키예의 역사 왜곡으로 취급받으며,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이를 제노사이드로 인정하고 있다.[4]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해체되기 직전부터 유대인 학살과 아랍인 학살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영군의 철수와 동시에 시작한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해체는 영국 본토의 팔레스타인 통화이사회(Palestine Currency Board)가 런던과 텔아비브 및 카이로와 암만에서 동시에 진행한 팔레스타인 파운드의 금융청산 관련으로 1950년까지 매우 오래 걸렸다.[5] 이 시기에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 전체 85%의 영역을 차지하던 아랍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의 투쟁 및 중동전쟁을 겪으면서 그들의 영역이 45%로 감소했다. 이스라엘 진영은 이 학살과 제1차 중동전쟁을 거쳐서 아랍인들의 거주 지역을 15% 미만으로 줄였다. 기타 지역에서는 모조리 학살.[6] 군대가 포위한 다음에 집을 버리고 항복할 시간을 15분 동안 주고 그 뒤에 모든 사람들을 강간 살해. 학살 가담자에는 남녀 청소년들도 들어갔다.[7] 이라크의 군대는 상층부의 공격불가 명령을 거부하고 공격했다.[8] 이 과정에서 노부부를 집안에 가두고 집을 폭파, 갓난 아이를 업은 아랍인 여성을 불러서 강간을 당하게 한 다음에 일이 끝나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아이와 여성을 모조리 살해 등이 있다.[9] 이는 모두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정치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발표한 내용이니 논란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