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대학살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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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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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2\]

범죄 사건
학살 사건
난징 대학살(100인 참수 경쟁) | 마닐라 대학살 | 밀리환초 학살 | 바탄 학살 | 보르네오 학살 | 중국 북부 학살 | 치치지마 식인 사건 | 파푸아뉴기니 학살 | 팔라완 학살 | 베허호 사건 | 아라시함 포로 학살
생체 실험
731 부대 | 규슈대학 생체해부
전시 강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노역
정신대 | 죽음의 철도 | 하시마
정치적 추종 세력 및 사상
순국7사묘 · 신사본청 · 야스쿠니 신사 · 팔굉일우 · 일본의 우경화 · 일본의 역사왜곡 · 일본의 피해자 행세 · 일본회의 · 국가신토 · 새역모
가나다 순 배열
[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일본어 : マニラ大虐殺
영어 : The Manila massacre

1. 소개
2. 필리핀의 저항
3. 시가전 내내 자행된 대학살
4. 종전 이후


1. 소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 탈환전이 시작되자 저항하던 일본군필리핀 마닐라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난징 대학살 및 수백만명의 희생자를 낸 기무라 헤이타로의 만행들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또한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끔찍한 사건이다.


2. 필리핀의 저항


미국은 자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대해, 필리핀의 독립법을 성립하여 앞으로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1935년 11월에 독립준비정부가 발족하여 마누엘 케손이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그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남방작전을 개시했고, 1941년 12월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을 몰아내고 마닐라가 있는 본섬을 점령했다. 결국 1942년에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고 마닐라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자 케손 대통령은 미 해군 잠수함 편으로 중앙은행의 금괴 및 주요 각료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몇 달 후 42년 4월에 바탄반도의 미군이 항복했고[1], 5월엔 코레히도르 섬에서 맥아더의 대행으로 총괄 지휘했던 웨인라이트 장군[2]의 수비군이 항복하면서[3] 필리핀에서의 미군의 저항은 멈췄으나 항복하지 않은 소수의 미군/필리핀군이 주축이 되어 게릴라 조직들이 생겨났고 곧, 지역별로 유력하거나 명망높은 필리핀인 인사들도 자체 조직을 세워서 비정규전으로 일본군과 계속 전쟁을 벌였다. 게다가 구관이 명관이라고, 일제의 탁상행정[4]과 폭정[5]에 염증을 느낀 필리핀인들은 대개 지역별로 현지의 게릴라 조직에 가입, 활동하여 일본군을 괴롭혔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필리핀에서 수천km 떨어진 연합군에 무전 접촉이 성공하여 미군 잠수함을 통한 교류로 인력 후송[6]과 물자 및 인적지원[7]을 받아서 장기간 연명이 가능했다.

일본군 또한 이들 게릴라 조직의 성장을 매우 경계했고 곳곳을 순찰하면서 토벌을 벌였다. 전파추적장치를 장착한 선박을 기동시켜 곳곳 섬들의 게릴라들의 무선기지를 찾아내고 내부 첩자를 심어두거나, 본보기로 활동 가능성이 높았던 지역의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잡힌 게릴라 남,녀 포로들에게 잔인한 고문과 살해를 가하는등 보복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1월에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여 2월 3일에 미 육군 제1기병사단과 제37보병사단이 마닐라로 돌입했다. 일본 육군 제14방면군 사령관이던 야마시타 도모유키 육군대장은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잔존부대는 루손 북부의 산악지대로 후퇴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육군 제14 방면군과 함께 현지부대였던 일본 해군 제31특별근거지대 사령관 이와부치 산지(岩淵三次) 해군소장대본영은 마닐라 사수를 고집했기에 마닐라 해군방위대를 중심으로 하는 이와부치 제독이 지휘하는 육해군 혼성부대가 마닐라에 남아 미 육군과 3주 이상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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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부치 산지 제독(1895. 3. 2. ~ 1945. 2. 26.)

미군은 초기엔 심리전을 통해 일본군의 항복 및 철수를 권고했고 일부 구역에선 성과를 거두었다. 시가전 초기의 어느 거점에 일본군이 억류중인 3천명의 미국인(대다수는 전쟁 전부터 체류했던 민간인들...)이 있었는데 제1기병사단 소속 장교or 지휘관[8]이었던 브레디 중령은 해당 거점의 일본군과 교섭하여 일본군의 무사철수 보장을 조건으로 민간인 포로들을 무사히 넘겨받은 사례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거점이 이런 해피엔딩은 아니었고 대개 미군의 교섭시도를 무시했다. 시가지 중심부의 어느 거점에선 일본군이 마닐라 시민 수천명을 인질로 삼아 저항중이었는데 미군측 전선 총지휘관 제14군단장 그리즈월드 장군이 일선으로 나와 직접 확성기로 설득을 외쳤으나 무반응이었고 오히려 학살의 조짐이 보이자 대기중이던 미군 야포들이 수천발을 몇시간동안 퍼부은 결과 과반수의 인질들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건 양반이자 시작에 불과했고, 미군은 마닐라 내부로 진입할수록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자 영거리 포격으로 건물들을 하나하나 박살내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마닐라 시민들이 건물과 함께 죽어나갔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던 일본군들이 이를 목격한 미군에 의해 즉결처형되기도 했다.

여기까지야 시가전 공방 과정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민간인 처형 또한 일선 장병들이 흥분해 멋대로 벌인 짓이고 즉결처형까지 됐으니 큰 문제는 없었으나 시가전 도중에 취합된 정보 및 해당 전투가 종결된 3월 3일을 전후로 사후 조사를 하면서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3. 시가전 내내 자행된 대학살


그것은 희생자 대다수가 시가전 과정에서 발생된 포격, 폭격,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 보다 일본 육해군의 마구잡이식 방화와 냉병기에 찔려 죽은 게 더 많았던 것. 당시 마닐라 시내에 있던 약 70만 명의 시민들 중 대략 10만명이 이렇게 희생됐으며, 이는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투들 중에서도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한마디로 일본군은 미군의 화력에 쫓겨가는 와중에도 마닐라 시민들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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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 살해된 필리핀 민간인
일본군은 살해할 때 다음과 같이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살해했다.

"일본군들은 미쳐 날뛰었어요. 그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자 정말 미친 사람들처럼 흥분해서 살인과 파괴를 일삼았죠. 일본군들은 어린애들을 찔러 죽이고 길거리에 나와 있는 부녀자하고 노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또 집집마다 불을 지른 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 그들에게 마구 총격을 퍼부었죠. 한편으론 엘리베이터에서 소녀들을 떼거리로 잡아 메이거 호텔로 데려갔는데, 전 그 아이들이 강간당하는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총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른 것 외에도 일일이 찾아다니거나 끌어내 죽이기 귀찮다는 이유로 건물마다 화염방사기로 불을 지르고 사람들이 뛰쳐나오는 족족 죽였다. 여자들은 강간하고 죽였고, 개중엔 혀나 성기 같은 신체 일부를 전리품마냥 잘라내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 의료 책임자의 진술서에 기록된 Amnesse이라는 여자아이는 양쪽 젖꼭지가 잘라지고, 가슴과 복부에 총검을 찔러 상처를 냈으며, 10세 소녀는 팔이 절단되었으며 2세부터 10세까지로 이루어진 소년 다섯은 심한 화상을 입었고 화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

한술 더 떠 이들은 난징에서 그랬듯 참수 파티도 벌여댔는데, 그들은 남성들에게 자신을 묻을 구덩이를 파라고 명령한 뒤 어떻게든 완성시키면 그 앞에 무릎을 꿇리고 참수시킨 뒤 묻어버렸으며, 일부 힘이 약한 아이들과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들은 탄약을 낭비하기 싫다는 이유로 건물째 태워 죽여버렸다.[9] 심지어 사람들이 그 안에서 탈출하려는 것을 방지하고자 기관총을 가진 일본군들로 건물 주변을 포위시킨 뒤 쇠사슬로 문을 봉하고 건물에 불을 질러버렸다. 물론 모든 창과 문이 쇠사슬로 봉해진 건 아니기에 어떻게든 건물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이 보이면 그 즉시 기관총으로 벌집을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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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 깔린 채 사망한 어린아이
일본군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된 건물

또한 어떤 건물에선 방화와 함께 사람들을 대검으로 찔러대서 대략 50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물론 이 정도 규모는 당시 마닐라에서 평범한 수준이라 얼핏 봐서는 그닥 특별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건물이 다름 아닌 에스파냐국[10]의 영사관, 그러니까 스페인외교공관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국기까지 당당하게 내걸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비록 에스파냐국이 중립국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추축국과 친한 세력이었는데다, 당시 친일적 친적이던 중립국들도 잇따라 연합국에 가담하던 상황에서[11] 에스파냐는 일본이 가진 정말 몇 안 되는 우호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외교적으로 보았을 때 에스파냐 영사관은 그야말로 개막장 속에서도 절대로 일본이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이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피에 취해 있던 일본군에게는 그런 게 없었는지, 몇 안 되는 우호국의 외교 공관까지 쳐들어가 학살하는 희대의 병신짓을 벌인 것이다. 즉, 학살은 적국이든 우방국이든 아주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병신 사상을 가졌던 것이다.[12]

물론 에스파냐에서는 이 학살 소식을 알게 되자 격노했고[13][14], 결국 4월 11일에 벌어진 이 학살극은 에스파냐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게 일본은 유럽에 몇 남지 않은 중요한 우호적인 외교 채널을 잃어버렸다.

결국 이러한 무자비하고 잔인한 대학살로 인해 마닐라에 있는 건물의 30%가 파괴되고 민간인 약 125,000명이 학살당했다. 위의 사진들은 전후 남아있는 기록 중 일부에 불과한 사진이다.

사건의 가장 큰 책임자인 이와부치 제독은 마닐라 함락 직전인 1945년 2월 26일, 마닐라의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에 위치한 자신의 사령부 건물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했으나 시신 훼손이 심각해 이와부치 제독의 시신은 식별이 극히 힘들었다고 한다. 사후 중장으로 1계급 특진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학살에 가담하긴 커녕 오히려 대민 지원을 한 부대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삼대오물로 유명한 도미나가 교지 장군이 이끄는 육군 제4항공군이었다.[15] 이들은 자신의 주둔지 인근에 일본 육해군 부대의 민간인 학살 시도에 대해 이를 중단하지 않으면 아군이라 해도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저지했다.


4. 종전 이후


전후 마닐라에서 학살 혐의 책임자로서 야마시타 장군이 마닐라 군사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는 필리핀에서 시가전이 시작될 시점에는 사령부를 이미 철수했고, 학살을 주도한 건 이와부치 제독 이하 해군 육전대와 이와 함께한 육군 병력 일부를 중심으로 한 패잔병들이었다. 전범재판에서 야마시타 장군은 학살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재판에서 인정됐으나 예하부대의 학살에 대한 상급자로서의 책임 소재로, 마쓰이 이와네와 동일한 혐의까지 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장 큰 책임자였던 이와부치 제독이 자살하여 그 대신 책임을 질 인물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 역시 야마시타 장군의 처형에 영향을 미쳤다.

구체적으로 진행된 조사에서 파울로 대학에서는 어린이를 포함 994명을 살해, 북부 묘지에서는 2,000명을 처형, 산차고 감옥에서의 집단 살해 등이 극동군사재판에서 주장되었다. 그러나 일본 우익진영에선 마닐라 시민의 죽음은 미군과의 전투시 휘말려 사망한 것으로 미군의 폭격과 사살도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야마시타 장군은 죽기 전에 자신은 관련이 없다며 모르는 사실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도 직접적인 연관성은 증명되지 않았다.

일본 우익들은 미국이 마닐라 대학살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일본에게 대학살의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고 주장해대는 개소리를 지껄이며,[16] 이 대학살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당연하지만 미국 역시 학살의 원인을 자국 탓으로 돌리는 소리에 대해서만큼은 가만히 안 있고 적반하장이라면서 으르렁거린다.

물론 필리핀에서도 일본 우익의 주장은 당연히 개소리로 본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비롯한 필리핀 정계인사와 장교들은 이 당시 일본군에게 맞서 싸웠고, 이 학살로 가족과 터전을 잃고 증오에 차 항일 게릴라에 가담한 이들도 많았다. 또한 이들은 미군과 손잡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니 일본 우익이 미국 탓이라고 외치는 걸 개짖는 소리로 들을 뿐. 이들이 나중에 필리핀 정계, 군직에 몸담은 상황에서 저런 소리를 받아들일 리 없다. 다만 학살이 있었다는 걸 넘어 우발적이었는지,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1] 미군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집단항복이라고 전해진다. 7만 6천명의 장병이 항복했는데 이중 미군은 1만명 안밖이었고 나머진 필리핀군이나 당시 필리핀은 독립 이전이라 별 차이는 없다. 이때 일명 '죽음의 행진'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바탄 죽음의 행진이다.[2] 맥아더가 호주로 도피했을 때 그는 여전히 필리핀에서 맡았던 사령관 임무를 지속하려 했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현지 지휘의 어려움은 불가피했고 이에 보완책으로 지휘권을 몇등분하여 필리핀 거점 곳곳의 미군 장성들에게 일정 위임하고 자신은 간접적으로 그들을 조율,지휘하려 했으나 곧 미국 본토의 군 수뇌부에선 웨인라이트 장군(육군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맥아더의 대행 역을 부여하고 맥아더는 이후 전쟁 중반까지 맡은 보직 남서태평양 전구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호주 방어및 전구 내의 연합군 반격을 위한 준비에 몰두하게 된다.[3] 그때까지 항복했던 것은 루손 섬을 위시했던 중,북부 지역이었고 비사야 섬과 민다나오 섬으로 대표되는 남부지역의 미국/필리핀군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항복조건으로 모든 필리핀 지역의 저항중지및 항복을 요구했고 웨인라이트 장군은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명령했고 그의 부하장교/장성들이 저항거점들을 돌면서 대면으로 명령했다.[4] 대표적으로 사탕수수 밭을 엎고, 미국으로부터 수입할 수 없게 된 목화를 재배하게 했다. 하지만 이는 필리핀의 식생과 맞지 않았고, 그 결과 한 해 농사를 망친 필리핀인들이 반발하자 일제는 이를 무력 진압했다.[5] 구리 광산에 필리핀인들을 징용시켜 넣었다. 하지만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자꾸 도망가자 도망자 색출과 더불어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서로의 감시를 유도하기도 했다.[6] 현지의 의료수준으로 치료를 할 수 없는 게릴라 중상자들이나 수용소에서 탈출한 연합군 포로들 외 기타요인들은 사전 약정된 지점에서 잠수함을 타고 호주로 후송되었다. 논픽션 소설 더 퍼시픽의 주인공 쇼프너 중령도 이런 경우였다.[7] 주로 미군의 특수부대원들로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엔 맥아더 사령부에서 편성,직속된 비정규전 부대였다. 게릴라 조직의 지휘나 인적 보강및 일본군에 대한 체계적인 타격을 위해 전쟁 기간 내내 계속 잠입했다. 그외 소수의 게릴라 지도자들은 호주로 가서 훈련을 더 받고 돌아오기도 했다.[8] 마닐라에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 미군은 각종 지원부대를 배속시킨 몇개의 대대급 T/F부대를 편성하여 마닐라 진입을 위한 목적으로 전개시켰다.[9] 애초에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운동 탄압할 때 저지르던 짓을 중국과 동남아에서 그대로 했을 뿐이다. 제암리 학살 사건 참고.[10] 현 스페인 왕국 이전 프랑코 시절의 스페인국을 뜻한다.[11] 대표적인 경우가 터키.[12] 데즈카 오사무의 걸작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파시즘이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세상에서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들은 어디든지 있는 법이라 일단 법적으로 동맹국인 독일 시민으로서 일본에서 자란 주인공 아돌프 카우프만이 주변 사람들한테 난 니들이 싫어하는 그 영미가 아니라 독일 사람이라고라고 호소해도 주변 사람들이 어쨋든 양코배기는 양코배기 아니냐며 괴롭히는 장면이 나온다. 이걸 생각하면 당장 윗대가리란 놈들도 도덕성과는 별개로 가치판단을 일절 배제한 군인으로, 정치인으로 봐도 노답 꼴통들이 이리 많았는데 실제로 학살을 자행하는 일선 병사들이 스페인인이냐, 미국인이냐 안 따지고 그냥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학살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13] 다만 이 사건을 접한 뒤에도 에스파냐에서는 '그래도 일본과의 외교 관계는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논란도 있었다. 자국민 학살이 발생했는데도 이럴 정도로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일본을 우호적으로 대하고 있었다.[14] 당시 에스파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전국민의 절반을 죽이면서까지 아돌프 히틀러베니토 무솔리니의 비위를 맞춰줘서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고 나니 그 히틀러무솔리니제2차 세계 대전을 터뜨렸고, 이들의 외교적 압력에 따라 좋든 싫든 간에 명예 추축국으로 분류되어, 연합군은 이미 에스파냐을 반쯤 적성국가 취급하고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공화파 잔당을 지원하며 에스파냐도 추축국과 절연할지를 고민하던, 외교적 고립 중에서도 최악의 고립 상태에 있었다. 이러니 아무리 이런 사건이 터져도 에스파냐 당국 입장에서는 몇 안 되는,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한 우방국이라 할 만한 일본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15] 도미나가 장군은 탈영의 신역사를 쓸 만큼 무능과 무책임이 하늘을 찔러서 그렇지, 그렇다고 인간이길 포기한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 이시이 시로와 토의를 하곤 "세균전을 벌이겠다고? 그건 아니지! 민간인은 사람도 아니냐?"라고 일갈한 일화도 있다.[16] 다만 이들도 왜 수많은 민간인들이 대검에 찔리거나 참수된 채 한 곳에 몰려 죽어 있는지에 대해선 그럴듯한 설명조차 하지 못하고 우연 혹은 날조라며 부정하기 급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