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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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 강건성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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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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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강희자전



1. 개요
2. 어린 시절
3. 순치제의 죽음과 즉위
4. 영명한 청년 군주, 삼번의 난의 극복
5. 대만 평정
7. 준가르 정벌과 티베트 복속
8.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다
8.1. 만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천하
8.2. 죄인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8.3.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
8.4. 문화 사업
8.5. 종교
9. 사생활
9.1. 장기집권
9.2. 서양 문물 애호
9.3. 클래식 애호가
9.4. 자식 교육
10. 말년
11. 여담



1. 개요[편집]


강희제의 생애를 다룬 문서다.


2. 어린 시절[편집]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라를 통치하고 정책을 결정함에 보여 준 모든 것들이, 마치 수십 년간의 통치 경험을 가진 노련한 황제와도 같았다.

조아킴 부베[1]


강희제는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 , 자금성의 동육궁 중 하나인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3남이자 후궁인 서비 동(佟)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로써 강희제는 청나라 역대 황제 중 처음으로 자금성에서 태어난 황제가 되었다. 강희제는 서비 동씨의 유일한 자식이라,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양육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부류의 인물들이 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책을 잘 읽고 활도 잘 쏘는 등 다재다능해서 아버지 순치제와 조모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에게 사랑을 받았다.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5살 때부터로, 이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차기 군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 순치제의 4남으로 강희제의 이복 동생인 영친왕(榮親王)이 생후 3개월 만에 이름도 짓지 못하고 요절하자 강희제가 황태자로 정해졌지만, 공식적인 건 아니었다. 강희제가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서비 동씨가 승은공 동도뢰(佟圖賴)[2]의 딸로 개국 공신 집안 출신이고, 당시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순치제는 후궁 소생 황자들 중 총명한 히오완예이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3. 순치제의 죽음과 즉위[편집]


그해 11월, 갑자기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졌다. 현비 동고씨가 천연두에 걸렸으며 히오완예이 역시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히오완예이는 얼마 안 되어 다행히 나았다. 그러나 차도가 나아지지 않은 채 현비 동고씨가 결국 죽자, 순치제는 즉시 그녀를 효헌단경황후 동고씨(孝獻端敬皇后 棟鄂氏)로 올리고 신주를 태묘에 올린 다음 자신이 아끼던 태감을 오대산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그녀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후 아직 젊은 순치제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비통함에 빠져들었다. 세상사에 지쳐버리고 의욕을 상실한 순치제는 급속도로 병에 굴복해버렸고, 어떤 처방도 소용이 없었다.

히오완예이가 8세가 되던 해인 1661년 2월,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황제는 아담 샬에게 만약 자기가 살아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아담 샬도 그를 구할 순 없었다. 죽어가는 순치제는 거듭 아담 샬에게 누가 황위를 계승하면 좋을지, 현명한 판단을 부탁했다. 아담 샬이 조용히 불러준 이름은 다름 아닌 히오완예이로 이미 천연두를 한번 앓고 난 뒤여서 오랜 재위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순치제는 이에 동의하고 사망했다.

  • 순치제의 죽음을 둘러싼 묘한 이상 기류 때문에, 간혹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갑자기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순치제가 죽지 않고 황위에서 물러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이야기와 관련되어 오대산 청량사의 주지와 관련된 기괴한 이야기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이 절의 주지를 모델로 하여 만든 상이 있는데, 그 모습이 죽었다는 황제와 꼭 닮았다던가 하면, 새 황제는 즉위 후 10년 동안 세 번을 청량사에 왔는데, 주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 한 번도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것이다. 1670년 주지가 35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새 황제가 실물 크기의 주지 금상을 절에 내리고, 그의 무덤에 부장할 보화들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용의 대표작 중 녹정기도 이 설을 비중 있게 작중에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순치제 치세나 강희제 치세 초기를 다룬 중화권 사극에서는 작품마다 정사에서 다루는 것처럼 순치제가 요절한 것으로 나오기도 하고, 순치제가 생전 퇴위 직후 출가하여 정사에 나온 것보다 오래 살았다는 설을 따르기도 한다.

1661년 2월 5일 순치제가 사망하자 히오완예이의 할머니이자 순치제의 어머니인 효장문황후는 아들이 붕어하자 크게 놀라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각지의 신료들과 친왕, 군왕들을 불러 모아 후사를 논의하였다. 2월 7일에 청나라 조정은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적으로 알리고 국상을 준비하였으며 2월 17일에 세조(世祖)의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그 능을 효릉(孝陵)이라 하였다. 이후 유조에 따라 황태자 히오완예이가 새 황제로 추대되어 청나라 제4대 황제로 즉위했다.

강희제는 어머니 강비 퉁기야씨와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를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3]인 1662년에 연호를 순치(順治)에서 안녕과 평화를 뜻하는 강(康)'과, 조화와 흥성을 뜻하는 '희(熙)'자를 써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하는 연호 강희(康熙)로 개원했다.


4. 영명한 청년 군주, 삼번의 난의 극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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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강희제의 어진.

즉위 당시 너무 어려서 정황기 출신 감국 대신 겸 이부 상서 허서리 소닌(赫舍里 索尼, 혁사리 색니), 양황기 출신 병부 상서 구왈기야 오보이(瓜爾佳 鼇拜, 과이가 오배), 정백기 출신 형부 상서 나라 숙사하(納喇 蘇克薩哈, 납란 소극살합), 양황기 출신 호부 상서 니오후루 어빌룬(鈕祜祿 遏必隆, 뉴호록 알필륭)의 보정 대신 4인이 대리 통치를 담당했으며, 이 중 오보이가 다른 셋을 제치고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4] 오보이는 권력이 하늘을 찔러 숙사하를 죽이고 황제인 강희제 앞에서도 무례하게 굴었을 정도였다. 이런 오만방자한 태도와 권력 남용은 성장 중이던 강희제에게 당연히 위험하게 보였고, 결국 오보이는 1669년 강희제가 주도한 친위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16세의 강희제는 죽을 때까지 직접 나라를 다스렸다.[5]

통치 실권을 쥔 강희제가 처음부터 선정을 베풀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할 당시 앞잡이로 활약했던 한족 무장인 오삼계, 경중명, 상가희 3인은 이 공적을 통해 사실상 자치를 할 수 있는 왕 직위를 받으며 이른바 삼번(三藩)을 형성하였다. 각각 오삼계의 운귀(운남, 귀주), 경중명의 복건, 상가희의 광동 지역을 중심으로 강남 일대에서 왕 직위를 받은 뒤 사실상의 반(半) 독립 왕국을 세워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군사력과 경제력은 청 정부 입장에서는 큰 부담[6]이 되었다. 강희제는 삼번이 청 정부의 강남 직접 통치에 방해되는 애물단지라고 판단하고, 이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다.

이런 가운데 강희제가 기다리고 있던 기회가 드디어 왔다. 삼번왕 중 하나인 상가희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온 것이다. 이는 상가희가 본디 요동 사람인데, 나이가 많아 죽기 전에 고향을 보고 싶어진 것. 강희제는 이것을 대범하게 받아들여주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지배하던 번을 없애버리는, 즉 철번(撤藩, 번왕국을 폐지함)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던 상가희로선 뒤통수를 맞은 셈. 하지만 상가희는 본인이 왕위를 물러나고 싶다고 하였고 황제가 이런 무리한 제안을 들어준 구도였기에 철회하기도 그런지라 일단은 황명을 따르기로 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에 삼번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오삼계는 강희제를 떠보기 위해 자신도 같은 주청을 올렸는데, 강희제는 상가희 때와 마찬가지로 대응했다. 그러자 오삼계는 '강희제가 우리를 제거하려 하는구나'라고 판단해 이에 불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673년에 터진 이 반란을 삼번의 난이라고 하며, 오삼계는 자칭 주나라의 황제가 되어 직접 군을 이끌고 청나라 군을 농락하며 강남 일대를 통째로 쥐고 흔들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여기에 경중명의 번왕 자리를 세습했던 경정충이 합세하고, 상가희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장남 상지신이 아버지 상가희를 감금하고 반란에 가담하면서 난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로 인해 자칫하면 청 왕조는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했으나, 강희제는 서전의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엄격히 병사들을 단속하고 직접 전략을 총괄하였다. 친청반민족행위자 출신인 오삼계는 중국 한족에게조차 이념적으로 어필하는 바가 적은데다가 오삼계가 갑자기 급사하는 천운을 맞이한 청군이 강력한 반격을 가해오자 순식간에 오삼계의 세력은 축소되기 시작했다.[7] 결국 8년 간의 전쟁 끝에 1681년 오삼계 일족의 근거지였던 쿤밍이 함락되고 오삼계의 일족이 몰살되면서 삼번의 난은 청 왕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로서 1644년 입관(入關)한 후 약 40년 만에 실질적으로 청 왕조가 중국 전토의 직접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이때 조선은 숙종 치세로, 이 삼번의 난 때 윤휴북벌을 무척 지지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이 북벌론을 좋아하지 않아 폐기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보면 알겠지만 삼번의 난의 주동자들은 명분이 매우 적었고 조선 또한 기껏해야 이유가 오랑캐들에게 복수하자는 정도고 삼번과는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연계하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 강희제가 능력 있는 황제라서 승산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여튼 당시 조선 조정은 남인들과 윤휴를 숙청하는 고육책까지 써 북벌론을 잠재웠다. 삼번의 난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현종시기 조선에서는 경신대기근이 일어나 조선에선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동지사 복선군 이남이 청나라로 찾아갔는데, 이때 강희제가 복선군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군주에게 전하도록 하라.



5. 대만 평정[편집]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 동안 강희제는 북방의 압박도 받았다. 제정 러시아의 왕조가 지원해주던 러시아 탐험가들이 동방을 개척하는 시기였고, 시베리아를 지나 청나라의 북방 영토인 만주내몽골로의 확장을 노렸다, 이에 몽골계인 오이라트 계열의 부족 연합체인 준가르가 러시아에 협력하면서 일거에 청의 북변(北邊) 치안은 위태로워졌다.

이에 강희제는 1683년 대만 정복을 통해 남방의 변란 위협을 모조리 제거한 뒤에 북방 문제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만과 펑후 제도의 36개 섬은 정성공이 네덜란드 인들을 몰아내고, 그의 아들 정경이 세운 동녕 왕국(명정)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삼번의 난에도 가세했을 만큼 큰 위협이었기에 반드시 처리해야만 했다.

정경이 죽자 풍석범이라는 인물이 정극상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사태가 변한다. 정극상은 고작 12살이라 실권은 풍석범이 쥐고 있었는데 몹시 전횡을 휘둘러 많은 불만이 발생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때는 지금이라는 걸 깨닫고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인 요계성(姚啓聖)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고 수군을 잘 다루고 적을 잘 아는 수사제독(水師提督) 시랑(施琅)을 파견하여 동녕 왕국을 무찌르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랑이 과거에 정경의 부하였다는 것이다.[8] 이 때문에 그가 배신할 것이니 뭐니 하는 말이 많았으나 강희제는 그를 불러 경을 믿는다고 말하였고, 이에 감격한 시랑은 맡은 일을 멋들어지게 해치웠다. 강희제가 그 후에 행한 조치도 멋들어지고 영리한 행동이었는데,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는 대신 오히려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면서 정성공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려준 것이다. 정성공&정경이 반 만주족 감정을 내세웠으니 '사실 우리도 그런 사람 아니랍니다.'라고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강희제가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펑후해전에서 승리하고 그렇게 대만은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된다.


6. 루스 차르국네르친스크 조약을 맺다[편집]


당시의 루스 차르국로마노프 왕조는 모피 무역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가는 무장 탐험가와 개척자들을 후원했고, 무장 탐험가들은 청나라와 사사건건 충돌했는데 당연히 청나라 정부는 러시아인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 나선정벌이 있었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로, 물론 청나라쯤 되는 거대한 나라가 소규모 탐험대에게 그렇게 깨졌던 이유는 순전히 남명 정권과의 전투에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나선 정벌 당시 조총병으로 한정해도 주력은 엄연히 청군이었다.

어쨌든 1658년 청군은 조선군과 함께 스테파노프의 탐험대를 격파하고 스테파노프도 죽여버리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문제는 러시아의 탐험대가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1665년 체르니코프스키가 아르바진으로 군사를 이끌고 진격해 요새를 세우고 수령이 되어 10년간 통치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아르바진은 체르니코프스키의 통치하에 꽤나 번영했기 때문에 이웃 네르친스크에 식량을 대 줄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었으며, 이는 러시아 조정을 고무시켰다.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던 청나라는 관리들을 파견해 러시아인들이 청나라 영토 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으나 이 정도로 끝날 리는 당연히 없었다.

1667년, 아르바진 근처 한 부족의 수장인 간티무르가 15년 전 청나라에게 귀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들을 이끌고 러시아 제국에 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강희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계속 놔둔다면 청나라의 영향력이 상실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러시아에 사절을 보내고, 러시아도 청에 사절을 보내는 등 서로 간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이 이루어졌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한편 그동안 청은 북방에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1674년부터 지린에 팔기주방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1676년 청 조정에 도착한 러시아 사절에게 간티무르를 송환할 것을 요청했다. 허나 러시아 사절은 이를 거부했고, 청은 무력 충돌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의지를 표명했으나 이후 6년 간 소규모 충돌 몇 차례 외에는 별 일이 없었다. 문제는 러시아가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청이 이 지역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고 오판한 것. 러시아는 아무르 강에 군사를 보내고 아르군 강까지 활동 범위를 높이는 등 도발 수위를 높여 갔다.

청은 당시 삼번의 난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이런 도발을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반가운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된 것이다. 하지만 강희제는 좀 더 신중히 상황을 지켜봤고, 이후 1683년 대만의 동녕 왕국이 복속되어 남방은 완전히 안정되었다. 이후 강희제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특히 강희제가 신경 쓴 점은 러시아가 준가르의 갈단 체렝과 손을 잡을 것인지의 문제였다. 강희제는 준비하는 동안 병기와 식량을 구축하고, 조총을 개조했으며, 홍이포보다 강한 대포를 주조하고, 역참제를 정비하며 조선소를 건설해 대형 범선을 건조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준비가 모두 끝나고 1683년 이번원 상서 아이신기오로 아무훌랑(Aisin Gioro Amuhulang, 愛新覺羅 阿穆珊琅)은 러시아군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러시아는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러시아의 뚱한 반응에 청은 즉시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하였다. 청은 정예 기병 1,000여 기를 보내 아르바진을 포위했다. 아르바진의 군사는 450명으로 아무리 수성 측이 공성 측보다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군사의 정예도나 머릿수, 무기의 질과 양[9] 등에서 압도적으로 밀렸다. 아르바진의 암담한 상황이 전해지자 헤이룽 강 상류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이 보트를 타고 아르바진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상륙도 하지 못하고 격파당했다. 치밀하게 준비한 청군은 혹시나 올 지원병에 대비해 잠수병들을 미리 투입한 상태였다. 잠수병은 등패와 칼로 무장한 상태로 물 속에서는 깊은 곳까지 잠수해 러시아군의 사격으로부터 피했고 사격이 멈추면 즉시 튀어나와 칼을 휘둘러대고는 적이 반격이 할때면 즉시 잠수하고는 했다. 결국 지원은 잠수병들의 활약으로 완전히 실패하여 아르바진에게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후 청군은 아르바진의 포위를 풀었는데, 이때 러시아군은 간신히 도망쳤고 아르바진은 초토화되었다. 당시 아르바진의 군사령관은 톨부진으로, 그는 네르친스크로 후퇴했다. 이때 톨부진은 네르친스크로 가던 도중 구원병을 만났다. 네르친스크 독군 블라소프였는데, 블라소프와 힘을 합친 톨부진은 다시 아르바진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청군은 아르바진을 불태운 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간 상태였다. 이에 이들은 안심하고 아르바진에 들어가 요새를 재정비하고 장기전을 치를 준비를 했다. 1686년 강희제는 아르바진 요새가 재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람을 보내어 정탐을 한 바, 과연 요새는 재건되어 있었다. 이에 강희제는 지난 번보다 두배많은 2,000여 명의 군사를 보냈다.

아무리 청군이 러시아군을 격파해대도 악착같이 내려오는 러시아 탐험대를 완전히 막으려면 이들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야 했다. 따라서 강희제는 장기전을 치러 이들의 의지를 박살낼 준비를 하길 원했고, 청군 사령관에게 아르바진 주변에 해자를 파라고 명령했다. 이후 청군은 아르바진을 포위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포위된 아르바진은 보급이 완전히 끊겼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영부영 보급품만 축내다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러시아군은 청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는 해자를 뗏목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사의 정예도, 무기의 질과 양, 군사의 수 등 모든 면에서 청군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해자를 건너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총격과 포격이 러시아군에게 쏟아졌고, 결국 러시아군은 해자를 거의 건너지를 못했다. 심지어는 이 와중에 톨부진이 전사하였다. 기껏 상륙해 봤자 소규모의 군인들만 생존하였을 뿐인지라 청군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전멸했다. 결국 톨부진이 전사한 이후 네르친스크 지원군 사령관 바이돈이 러시아군의 지휘를 맡았지만 그 역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르바진의 군사와 네르친스크의 군사를 합쳐 총 800명의 군사를 거느렸던 탐험대는 해자에서 벌어진 청군과의 교전에서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이들 중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100명뿐이었다. 사실 만약 강희제가 이들을 완전히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남은 군사들을 죽이는 것도 청군에게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나, 혹시나 러시아와 갈단의 연합을 우려한 강희제는 이쯤에서 상황을 정리하기로 하여 러시아에 서신을 보내었다.

1686년 9월, 이에 대한 답변이 청에 도착하였다. 1687년에 청군이 퇴각함으로써 아르바진 전투는 완전히 끝났다.

계속되는 패배와 혼란스러운 국내 사정[10] 때문에 러시아는 만주로 영토 확장을 포기하였고 대신 러시아의 상업 활동 허가와 국경 확정에 합의했다. 1689년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네르친스크 조약 을 통해 아무르강 이북 지역[11] 및 외몽골 일부 지역에 대한 국경을 확정했다.

조약을 맺을 당시 러시아의 전권 대사는 골로빈이었다. 골로빈은 1687년 8월 셀렌기스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대화하기를 원하였으므로 셀렌기스크에서 강희제에게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셀렌기스크는 갈단의 위협에 노출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강희제는 이러한 골로빈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네르친스크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1689년 6월, 청국 협상 대표단 허서리 송고투(Heseri Songgotu, 赫舍里 索額圖)[12]는 골로빈에게 네르친스크에 도착했음을 알렸고, 곧이어 8월 19일에 그는 회담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골로빈과 정하였다. 이후 송고투와 골로빈은 협정에 따라 냉병기로 간단히 무장한 채 회담장을 호위하고 있는 경호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잡담을 잠시 나눈 뒤 회담을 시작했다. 당시 골로빈의 사절은 1,000여 명이었으나 송고투는 선교사 출신 통역사, 10,000여 명의 승려 및 군사 등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절단과 동행한 상태였다.

회담 초기에는 양측의 군사적 충돌에 대한 신경전이 벌어져 회담장에 긴장감이 맴돌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풀어졌고 이내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해서 맺은 조약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청은 헤이룽 강 북안을 확보했고, 러시아는 북경과의 교역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양측에게 긍정적인 조약이었다. 이후 양측은 외몽골과 시베리아에서의 국경 확정을 위해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추가로 맺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 역사상 매우 획기적인 유럽식의 '대등 - 평등' 조약으로, 한자로 된 문서는 전혀 작성되지 않았고, 러시아어, 만주어, 그리고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만주어문을 기준으로 노어문과 라틴어문이 작성되었다. 양국은 라틴어문에 날인했다.[13][14] 북경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2명이 통역으로 참가했다. 러시아 측의 협상단과 당시 유럽 공용어인 라틴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화이(華夷) 개념에 입각하지 않은 매우 독특한 조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훗날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관광당하자 러시아도 이때 맺어진 네르친스크 조약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하여 파기할 것을 요구[15], 수용되었으며 2차 아편전쟁 때는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얻어낸다.


7. 준가르 정벌과 티베트 복속[편집]


어쨌거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킨 강희제는 친정을 하여 북정(北征)에 나서 오이라트 부족 계통인 세계 최후의 유목 제국 준가르(Züüngar)를 토벌하였다. 준가르의 갈단 칸은 외몽골을 통합하고, 티베트와 연합하여 청나라를 압박하려는 가공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기에 절대로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688년 갈단은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어 외몽골의 할하족을 몰살시켰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죽을 힘을 다해 고비 사막을 건너 이 소식을 전했다. 이에 강희제는 직접 대군을 동원하여 고비 사막 너머에 사는 할하족의 복종을 받았다. 첫번째 원정에서 팔기군이 전면전에서 패하고 강희제 본인도 병에 걸리는 등 고전하였지만화력덕후답게 서양산 대포의 힘으로[16] 갈단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 강희제는 갈단을 추격하려 했지만 군량이 부족하고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서 포기했다. 갈단은 포기하지 않고 1695년에 다시 한 번 군대를 진군시켰지만, 미리 정보망을 통해 이를 알고 있던 강희제는 전 병력을 이끌고 갈단을 추격하여 대포와 총으로 공격하였고, 갈단은 병력의 절반과 부인을 잃은채 서쪽으로 도망쳤다.

강희제가 3번째 원정에 나서려고 했을 때 모든 신하들은, "비루한 갈단은 이제 곧 죽을 텐데 사막으로 가서 고생을 하지 마시라"며 막았고, 황제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강희제가 좋아하는 사냥 계획을 잡기도 하였지만, 이 모든 것을 취소시킨 강희제는 다시 8만의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그리고 차오모도 전투에서 강희제는 갈단의 준가르군을 섬멸했다. 결국 수세에 몰린 갈단은 1697년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3회에 걸친 친정을 통해 강희제는 준가르 군대를 격파하여 위협을 제거하였고, 1697년 외몽골 지역 전체를 제패해서 엄청난 판도를 구가하였다. 이때 강희제가 환관에게 쓴 편지에는 그가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갈단은 죽었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귀순하였다. 이제 짐의 큰 임무가 완수되었다. 두 해 동안 짐은 3번이나 원정하면서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지는 사막을 건너면서 이틀에 하루씩만 음식을 먹었다. 사막은 초목도 없고 물도 없는 곳이며 황사가 심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고난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 천신만고 끝에 큰 공을 세웠는데, 갈단이 없었다면 짐은 하루도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들의 도움을 입어 성공하였으니, 짐의 일생은 즐겁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망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원하던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조너선 스펜스, <강희제>에서 재인용.


그리고 몽골은 일찍이 후금에 복속된 내몽골은 물론 외몽골까지 복속되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몽골의 전통을 존중하여 몽골의 고유 제도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과거 내몽골의 차하르 족과 결혼 동맹을 맺어 만주-몽골을 일체화한 것처럼 몽골 공주를 만주 귀족들의 아내로 맞도록 함으로써 북방의 강력한 민족인 몽골족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역대 황후들 중 몽골 출신이 상당히 많다.[17] 어쨌거나 1697년 이후 청은 러시아가 대두할 때까지 명나라가 당한 것과 같은 북로(北擄)의 참변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갈단의 조카인 체왕 랍탄은 후에 대담하게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지를 건너 티베트를 공격, 포탈라궁을 약탈하자 강희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냈다. 그런데 뜻밖의 패배를 당하자, 이번에는 아들인 14번째 황자 윤정을 대장군왕으로 삼고 사천과 차이담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기어코 그들을 쫒아내는 데 성공했다.[18] 강희제는 7대 달라이 라마를 자신들의 손으로 세워 티베트를 중국의 영토에 포함시켜 대략의 판세를 만들었다. 사실 강희제가 티베트 불교를 챙겼던 이유는 예전에 갈단이 차지하고 있던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뺏어서 몽골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갈단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티베트 불교와 조화된 덕분이었는데, 만주족티베트 불교를 손에 넣게 됨에 따라 몽골은 정신적으로 만주족 휘하에 들어간 셈이다.


8.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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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기의 강희제

이상과 같은 전쟁을 마친 뒤 강희제는 전력으로 내치에 임했다. 강희제는 효율적인 중국 통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한족 지식인을 포섭하려고 노력했는데, 지식인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와 고생을 많이 했다. 사절을 보내 초빙하면 등용을 거부하니까 가마에 억지로 태워 시험장으로 끌고 와서 응시하도록 해 관료로 등용하려고 했더니 아예 도망쳐버리거나, 시험을 엉망으로 보아 일부러 낙제했기에 강희제는 쓸만한 한족 관료를 얻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또 그렇게 가까스로 얻은 관리들에게 신망을 얻고 중국의 황제로서 위엄과 지혜를 보이기 위해 강희제는 유교 경전을 비롯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여 막대한 지식을 쌓아올려야만 했다.

강희제의 학구열과 호기심은 유명해 대신들에게 잇따라 질문 공세를 퍼부어 쩔쩔매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으며, 서양 문물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여 예수회 선교사로 대표되는 당대의 유럽인들은 강희제의 풍부한 지식과 교양에 감탄해 "가톨릭을 믿지 않는 점만 빼면 최고의 군주"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유럽인들이 16세기 중국에 본격적으로 도래한 이래 이와 같은 평가를 받은 중국 군주는 오로지 강희제 뿐이었으며, 이것을 봐도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공부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강희제는 중국 문화를 애호하여 <강희자전>과 <고금도서집성>을 편찬하게 했다. 강희제는 여러 선교사들을 옆에 두고 그들로부터 지리와 역사, 기하학, 근대 수학 등을 배웠고 서양의 역법이 우수한 것을 인정하면서 역법 역시 배웠다. 심지어 라틴어까지 배우려 했으며 하프시코드까지 친 적도 있다. 또한 강희제는 저녁을 먹은 후 예수회 선교사들과 수학 계산을 하며 자기가 푼 문제가 맞는 걸 기뻐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강희제 시대에 활약한 유럽인은 아담 샬(Adam Schall, 1592년 ~ 1666년)을 시작으로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8년 ~1688년), 토마스 페레이라(Thomas Pereira, 1645년 ~ 1703년),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중국명 장성(張誠), 1654년~ 1707년) 등이 있다. 서양인들은 주로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경우가 많았으며, 천문 역법(曆法)의 계산과 도입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황여전람도(皇輿展覽圖)'와 같은 세밀한 세계 지도가 중국에 등장한 것도 이들의 활약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유럽인들의 활동은 예수회의 성공을 시기한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고발로 교황청이 유교적 예식을 채용하지 않도록 지시함에 따라 1693년부터 20년 이상 배척받게 된다. 이 유럽인들에 대한 배척은 1720년에 교황이 보낸 특사 덕택에 겨우 해소되었다.

강희제는 명대의 1년 치 궁정 예산으로 당대의 국가 통치를 위한 예산을 꾸려갔을 정도로 간소한 정부를 운영했으며 검소를 미덕으로 여겼다.[19] 명나라 시기 수만 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400명으로 줄이고, 스스로도 될 수 있으면 옷을 꿰매 입으며 모범을 보였다. 서양 선교사 조아킴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보낸 보고에서 "강희제는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군주인데도 그런 군주답지 않게 매우 검소하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하고 평가를 내렸다.


8.1. 만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천하[편집]


강희제는 홍무제영락제와 함께 높이 평가했으며, 남순 중에 주원장의 효릉에서 3번 절을 올리기도 했다. 존경심을 표현할 겸 한족을 포섭하려는 정치적인 제스처였는데 강희제는 사람을 쓰면서도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크게 차별하지 않았다. 대만 정복 당시의 인사 등용만 해도 그렇고, 삼번의 난 진압 중에서도 한족 장수들을 크게 등용했다.[20]

강희제는 직접 중국의 여러 지역을 시찰하여 강남을 6회나 순행(巡行)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의 남부 지역을 직접 관찰하였다. 보통 역대 중국 군주의 시찰이나 순행이라고 하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많았지만, 강희제는 호위 군사도 대폭 줄이고 소요되는 지출비 자체도 경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배려는 물론 민생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조처였지만 동시에 아직 만주족 통치에 반감과 적개심을 가진 강남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정치적 조치이기도 했다.

또 이후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를 편찬하며 본기, 열전, 지, 표 등이 완성될 때마다 전부 다 살펴보고, 과도하게 명나라의 황제들을 비난하는 편찬자에게는 주의를 주면서 말했다.

"짐은 군주로서 그들의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 또한 보고 싶다."


하지만 정통성에 관련된 문제에는 강하게 대처했다. 강희제 시기에 나온 두번의 문자의 옥 사건인 명사안, 남산안이 대표 사례.


8.2. 죄인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편집]


강희제가 아직 어린 시절, 죄를 지은 관리에게 강희제는 노하여 사형을 명했는데, 그 관리는 허리가 잘려서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래서 허리를 잘랐는데 당연히 사형수는 즉사하지 않고 멀쩡한 정신으로 고통에 울부짖으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참혹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강희제는 생각을 달리 하게 됐다.

본래 강희제 통치 초반에 정권을 잡은 구왈기야 오보이는 사람을 마구 죽였고, 강희제 역시 오보이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오보이에게서 정권을 찾아오고 그에게 내린 처벌은 사형이 아니라 연금, 구족 몰살이 아니라 타지로 이주시킨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년 황제의 아량을 칭찬했다. 까딱 잘못했으면 청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아니면 북쪽에 쪼그라들게 했을 법한 반란인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그 처벌은 오직 최고 우두머리들에게만 내려졌다.

그렇다면 부하로서 반란에 적극 참여한 인물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면, 그들에게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대신 그곳을 바탕으로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었고, 약간의 시간을 준 뒤 그 자식들도 아무 문제없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또한 청나라 하면 떠오르는 사상 탄압인 문자의 옥은 강희제 때도 있었지만, 그 규모는 강희제 때가 제일 작았고 옹정제-건륭제를 거치며 매우 커진 것이다. 강희제 본인은 문인들을 많이 보호해 준 편.

청나라가 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무렵, 명나라는 상황이 엉망이었고 여진족 역시 한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는데, 그 때문에 사방에 산적과 반란군이 들끓었다. 강희제는 물론 이들을 진압했지만, 사정을 살펴보고 단순히 생계가 어려워 가담한 사람들은 오히려 살 곳을 마련해주고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다.
  • 1668년: 35명
  • 1706년: 25명
  • 1712년: 32명
  • 1715년: 15명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냐면, 청나라가 지배하는 만주와 전 중국(하북·중원·강남)·내몽골·대만에서 사형이 집행된 사람 수다. 이 시기 청나라의 인구는 1억 명 이상을 향해 증가하고 있었고, 실질적인 인구, 즉, 호구 조사에 들어가지 않은 인구까지 합치면 훨씬 많았다. 그 정도로 큰 영토에 많은 인구를 지닌 나라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숫자가 이 정도(0퍼센트대에 수렴)였던 것이다.[21][22]

강희제는 사형이 선고된 죄인에 대한 집행 재가 요청이 올라오면 판결문을 여러 번 꼼꼼히 읽어보고 어떻게든 사형을 면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1668년 같은 경우에는 본래 48명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강희제가 이를 더 줄인 것이다.

자신이 글자 하나를 그으면, 사람의 목숨이 이에 따라 살아나고 죽게 된다. 그 무게를 잘 알고 있는 강희제는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정말 더없이 신중하게 임했다. 어마어마한 재물에 커다란 궁궐에 살고 있는 강희제였지만, 몇 번을 살피고 살펴 어떻게든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주려고 노력했었다.

짐은 백성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들이 어떻게든 살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노라. 형부에서 판결 기록을 올릴 때마다 짐은 그것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 죄인을 살릴 수 있는 이유가 있을지 찾아보고 있도다.

죄인이 죄를 저지른 것,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즉각 처형하기보다는 옥에 가두어 잠시 처형을 미루고 이듬해에 다시 관찰하도록 하라.

죄인들이 곧장 처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겠지만…….

아, 그러나 감옥 안에서 몇 달간 살다 보면 그들이 마음을 바로잡고 개과천선하고 싶어도 별다른 방도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니라. 그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죄인들에 대한 강희제의 측은지심은 대단했는데, 어느 날 조상들의 묘에 제사를 지내러 떠났던 강희제는 이 지역에 유배된 죄인들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보고 놀라고 불쌍하게 여겨 말했다.

짐은 이제껏 영고탑과 오라(烏喇)로 유배된 죄인들이 이렇게 고초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몸을 쉴 수 있는 집도 없고, 농사를 지을 돈도, 그리고 능력도 없도다.

게다가 그들은 남방 사람이 아닌가? 약한 몸으로 이렇게 추운 곳으로 와서 고향과는 전혀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불쌍하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지은 죗값을 치르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요양(遼陽) 같은 지역에 유배된 것만 해도 죗값을 치렀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그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주어 생계를 꾸려가도록 하고, 집을 지을 수 있게 하라!


죄인들을 유배시킨 것은 본래 그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도다. 그런데 그들을 이런 춥고 황량한 곳에 내버려 둔다면 결국 고통받다가 죽게 될 것이니 어찌 본래의 뜻과 동일하겠는가?

앞으로 사형을 면한 죄인들은 모두 상양보로 유배시키고, 샹양보로 보내야 할 죄인들을 요양으로 보내도록 하고, 반란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오라 지방으로 보내는 대신에 노비가 되지 못하게 하라. 형부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짐의 뜻을 헤아려 이 규정에 따르도록 하라.

강희제는 죄인들의 고통에 깊게 관심을 가져, 감옥에 있는 죄인들이 덥지 않도록 옥을 시원하게 해주고 청소해 주는 한편, 죄인들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으면 의사를 보내주었고, 만약 관리가 이를 모른 척 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크게 처벌했다.

10월부터 1월까지는 겨울인 데다가 유배당하는 죄인들은 모두 가난하여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니, 몹시 추울 것이니라. 그들이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길에서 얼어 죽어 마땅한 것은 아니니 불쌍하기 그지없도다. 앞으로는 10월에서 1월과 한여름인 6월에는 죄인을 유배지로 보내지 마라.

이상의 내용은 수신제가 - 등예쥔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강희제는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힘으로 지키려는 자는 홀로 영웅이 된다.

위엄으로 지키려는 자는 능히 일국을 지킬 수 있다.

허나 덕으로 지키려는 자는 천하를 세울 수 있다.



8.3.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편집]


강희 50년인 1711년,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 실시되었다. '정세'라는 것은 사람의 머릿수만큼 걷는 것. 결국 사람이 늘어나면 세금도 더 걷어 들이게 되는데, 바로 이 해인 강희 50년의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시켜 버렸다. 말 그대로 국가 전체적으로 거둬들이는 정세가 더 이상 안 늘어났다. 이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데, 이때부터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강희 연간의 중국 사람들이 한꺼번에 아이를 많이 낳아서가 아니라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다가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이젠 뭐 부담도 없고…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으나 정세를 징수당하는 농민들이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지세 1냥 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데, 조세의 일원화를 통해 징세 체계가 단순해졌고, 인구 증가에 따라 1인당 조세 부담 액수가 상대적으로 감면됐기 때문이었다.[23]

하도 큰 일이기에 우선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 성에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이리하여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나 옹정제 때 결국 시작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선 저항이 극심했다. 그 뒷이야기는 옹정제 문서에서 확인하자.

강희제는 전쟁이 일어나도 세수입을 늘리지 않았으며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소작농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까지 하였다. 이는 강희제의 검소함과 유럽과의 무역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인데, 그 덕에 재정 상황이 상당히 풍족해졌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가뭄이 든 지역의 세금 면제는 당연하고 산불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집값을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심지어는 강희 51년에는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인한 큰 피해가 없어 여지껏 세금 꼬박꼬박 낸 나머지 지역들의 그 해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24]

이러한 정책들 때문에 명나라 말기 1억 명 이하까지 떨어졌던 인구는 강희제가 세상을 떠날 당시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한 강희 7년에 1,500만 냥이었던 은자는 강희 50년 경에는 5천만 냥이 넘는 양까지 증가했는데,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은의 블랙홀이 된 것[25]과 강희제 치하 청나라 조정의 정책적 성공이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정은제는 강희-옹정기간에만 적절한 조치였고, 이후 시기가 되면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하여 조정의 인민 장악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외세의 공세에 재정 지출이 증가해야함에도 고정된 세금량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제도 개혁은 후대 황제들의 몫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필 명군으로 이름난 강희제[26]가 세운 정책이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대명률 때문에 제도개혁에 어려움을 겪은 명과도 비슷한 부분. 역시 건륭이 문제다

8.4. 문화 사업[편집]


만주족이지만 유교, 그리고 성리학에 매우 박식하고 심취했던 강희제는 스스로도 유학자였고, 경연과 조회에서 유학자들과 키배를 떠서 발라버리기도 했다. 더욱이 치세 당초부터 송나라주자(朱子)를 존중하여 그 저술을 출판하고 이에 의해 군신 간의 도덕을 강조했다. 또 고급 문관 시험에 해당되는 과거를 정기적으로 거행하여 지식인의 희망에 부합하려고 했다. 세종대왕처럼 책벌레이기도 해서 아픈 와중에도 책을 보는 것을 놓지 않았으며, 글씨도 제법 잘 써 소림사의 현판을 친히 쓰기도 했다. 또 1679년 특별 시험을 행하여 50명의 재야 인재를 고관에 임용했다. 그중 40%는 상공업의 진보와 함께 고도로 문화가 발달한 강소성, 절강성 출신 문인이 차지했다.

수많은 문화 사업에 손을 댄 강희제는 중국에 존재하던 유사 이래 모든 도서를 모아다가 영구 보존판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조(前朝)의 역사인 '명사(明史)', 광대한 규모의 백과사전인 '도서집성(圖書集成)' 등 편찬을 위하여 특별 관청을 설치하고 광범위한 학자에게 직책을 주었다. 또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식을 받아들여 중국 최초의 위도를 사용한 지도인 황여전람도를 만들었다.

이 중에 백미는 단연 《강희자전(康熙字典)》. 이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십 명의 학자들과 대신들이 수년 동안 노가다를 뛰며 만든 대작이다. 강희자전의 지은이는 장옥서(張玉書), 진정경 등 30명으로, 모두 42권이고, 글자 수가 47,000자 남짓 된다. 글자 배열 순서는 먼저 나와 있던 자휘(字彙), 정자통(正字通)이 부수가 몇 획이냐에 따라 배열한 것을 그대로 따랐지만, '강희자전 순서'라는 말이 쓰이고 있듯이 뒷날의 부수별 한자 사전의 본보기가 되었다.[27] 이는 근대 이전 최대 규모의 자전이었으며 현대 중국어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업이었다.


8.5. 종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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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과 천문을 보고 있는 강희제
골수 성리학자 강희제는 가톨릭의 교리를 배우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만주족 황실은 전통적으로 불교[28] 신봉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를 탄압하지도 않았는데 가톨릭 포교를 허락하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조정의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명나라 때 처음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는 용어 문제 관련해서는 적당히 넘어갔고, 공자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민속으로 규정해 중국 가톨릭 신자는 이런 의식을 집전하거나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예수회의 활동은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시기를 받아 고발당했고, 당시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이를 우상 숭배로 여기는 회칙을 발표하였다. 또한 추기경이었던 샤를토마 마야르 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1668년 12월 21일 ~ 1710년 6월 10일)이라는 인물을 특사로 파견하여 "교황청의 관행에 정통하며 교황에게 신임 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내의 수도자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강희제는 이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에 온 선교사 집단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교왕[29]

에게 신임받는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대청제국에서는 적임자를 고르는 데 그런 차별을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앉아있는 용상과 가까이 있고, 어떤 자는 중간에 있고, 어떤 자는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충성심이 있으며 만일 충성심이 없다면 내가 어떤 일을 맡기겠는가? 그대들 중에 누가 감히 교왕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교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느님을 노엽게 한다면서 거짓말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쉽게 얘기하자면 “어차피 똑같이 천주 믿는 사람들끼리 누구는 신임하고 누구는 신임 못하고가 어디 있냐. 누구는 교왕이 신임하니까 믿어도 되고 누구는 교왕이 신임 안 하니까 믿으면 안 되는 게 어디 있냐? 교왕이 신임 안 하면 그 사람은 천주 믿는 사람 아니냐? 그러면 지금까지 신임하지도 않는 사람(예수회)을 우리한테 보내서 천주 믿으라고 전교한 거냐? 니들 지금 우리 무시하냐?”고 교황을 비난한 거다.

그리하여 전례에 관해 마테오 리치의 입장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추방시켰다. 그리고 옹정제 때엔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 자체를 전부 막아버리고 추방시켰다.


9. 사생활[편집]



9.1. 장기집권[편집]


재위기간을 보면 알수 있듯이 62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치했는데 이는 청나라는 물론 중원을 지배했던 군주들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것이다.[30]

심지어 하도 아버지가 오래집권하니까 황태자가 불만을 품고 깽판치다 결국 잘리기도 했다.

9.2. 서양 문물 애호[편집]


강희제는 대단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사물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지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즐겨 탐독하고, 천문학, 지도 제작, 광학, 의학, 대수학 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로부터 다양한 공학적, 의학적, 예술적, 천문학적인 이해를 구했다.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로부터는 기하학을 배웠으며, 프랑스 출신의 제르비용과 조아킴 부베, 포르투갈 출신의 페레이라 등에게서는 수학을 배웠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인 부베는 강희 21년 중국에 들어와 근 30여년이나 강희제에게 의학, 화학, 물리학의 상식과 라틴어 고전을 가르쳤다.[31]

당시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은 모두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강희제는 그들로부터 서양의 역사와 유클리드 기하학 등을 배우게 된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계산기도 이용했는데,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처음 발명했던 바로 그 초창기형 기계식 계산기를 썼었다.

벨기에인 예수회 선교사인 앙투안느에게 고차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비부호화된 대수법인 '차근법'을 배우기도 했고[32] 심지어 신하들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풀이 과정을 설명해주면서 즐기기도 하였다. 거기다 즐겨 하던 취미가 술 먹고 잔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을 불러서 수학 문제 풀면서 정답이 맞으면 좋아하는 것이었다.

또 강희제는 서양 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몽골 원정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이 오락가락 하다가 간신히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살아났던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인해 서양 의학에 대한 책도 좀 뒤적거려보고 양약을 자신에게 써보기도 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반면에 도사들이 찾아와 "불로장생...", "이거 드시면 신선..." 같은 말을 하면 화를 내면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미신을 배격하는 태도는 그가 죽기 전에 남긴 고별상유를 보면 더욱 잘 드러나는 편이다.[33]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8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7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기린과 봉황, 지초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옥이 나타나거나 천서가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헛된 말일 뿐이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9.3. 클래식 애호가[편집]


마테오 리치만력제 시대에 클라비코드를 선물한 이래 클래식 음악이 중국에 소개되고 있었지만, 그것에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던 사람은 바로 강희제이다.

서양 음악을 배우기 위해 스승을 여럿 두었으며, 직접 작곡도 하였다. 벨기에 출신의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신부는 청나라의 천문기관인 흠천감에서 천문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강희제에게 음악도 가르쳤다. 페르비스트 신부가 강희제에게 포르투갈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토머스 페라이라 신부가 음악의 천재라며 음악 선생으로 추천하였다. 강희제를 알현한 페라이라 신부는 하프시코드와 작은 오르간을 강희제에게 선물하고, 중국 음악을 서양식으로 편곡하여 들려줘 강희제를 놀라게 하였다.

1708년 페라이라 신부가 세상을 떠난 이후 3년간 음악 교사가 없었다가, 로마 교황이 이탈리아 출신의 테오도리코 페드리니를 음악 교사로 추천하여 강희제의 세번째 음악 선생이 되었다. 테오도리코 페드리니는 강희제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그를 시기했던 대신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강희제가 노년일때 억울하게 투옥되었다가 옹정제가 즉위한 이후 누명을 벗고 석방되었다. 이후 페드리니는 옹정제의 음악 교사로도 일하였다.

국가원수 치고 음악을 직접 작곡한 사람이 적다는 것을 고려하면 강희제의 서양 음악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었던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비슷한 예시가 있다면 프리드리히 대왕.[34]


9.4. 자식 교육[편집]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자식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쓴 황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자식들 교육 관련으로 항상 한 말이 있다.

"적잖은 귀족 집안의 자식들이 과도하게 귀염만 받고 자라기 때문에 커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나 제멋대로 구는 망나니가 된다. 게다가 그런 자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한다. 그렇게 키우는 것은 곧 자손을 망치는 일이다. 그러니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자손이 어렸을 때부터 반드시 엄하게 훈육해야 한다."


옹정제는 나중에 강희제의 이런 말들을 모아 「성조인황제정훈격언(聖祖仁皇帝庭訓格言)」을 내기도 하는데 내용은 강희제에 대한 칭찬 및 찬양 + 강희제의 격언들이다.

상서방(上書房)은 이런 황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이곳에선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3가지의 언어를 배우게 했고 역사책과 여러 경사들을 배우게 함과 동시에 말 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까지 가르쳤다.

강희제는 이곳에 내각 대학사와 한림원 출신의 최고의 학자들을 직접 선발하여 투입했는데 명재상 장정옥의 아들인 대학사 장영, 이학(理學)의 대가 웅사이, 예부상서 탕빈, 만주어 학자 서원몽 등 다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강희제 시절의 선교사 부베는 황자들의 교육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자들의 교육은 한림원에서 가장 학식이 넒은 사람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모두 청년 시절부터 궁정에서 특별히 양성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자들의 모든 활동과 학습을 친히 관리하고 점검했다. 그는 황자들이 쓴 글을 직접 읽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공부한 내용을 구술하게 했다.

황제는 특히 황자들의 도덕성 함양과 신체 단련을 중시했다. 그래서 황자들이 철이 들 무렵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 각종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게 하여 그런 기예들을 오락 겸 취미로 삼게 했다.

그는 황자들이 너무 귀하게만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고생을 해 봄으로써 강해지고, 검소한 생활 습관을 들이기를 바랐다. 앞서 말한 것들은 제르비용 신부가 6년 전 황제를 수행하여 달단산에 여행을 다녀온 후 전해준 이야기다.

군왕은 처음에는 맏아들과 셋째, 넷째 황자만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러나 사냥을 갈 때면, 그 밖의 황자 4명도 동행하게 했는데, 어린 황자는 9살이었다. 사냥을 하는 1달 동안 어린 황자들은 황제와 함께 하루 종일 말 위에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견뎌야 했다. 어깨에 화살통을 메고, 손에는 활과 쇠뇌를 들고 사냥하는 황자들은 민첩하고 용감했다. 그들 가운데 사냥을 못해 빈손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처음 사냥을 나온 가장 어린 황자도 작은 화살로 사슴 2마리를 잡았다.

황자들은 모두 한어와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어렵고 복잡한 한자도 단기간에 익혀나갔다. 그 즈음 막내 황자도 이미 사서 중 3권을 떼고 마지막 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는 황자들이 유럽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자라게 만들었다.

황자들 주위의 신하들은 그 어느 누구도 (황자들의) 아주 작은 실수조차 감춰 줄 수 없었다. 그들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끔찍한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황자들이 이렇게 배운 좋은 머리와 자질로 싸움질만 했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을 참고하자.


10. 말년[편집]


엄청난 업적을 이룩한 강희제의 말년은 행복하지만은 못했다. 오랜 통치로 황제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고[35] 황태자의 비행과 황자들의 암투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강희제는 아들 35명과 딸 20명[36]을 두었는데, 이 중 허서리 소닌의 손녀인 효성인황후 허서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37] 소생의 유일한 적자이자 장남[38] 윤잉을 황태자로 정하고 매우 총애했다. 유일한 적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강희제는 황태자에게 수많은 봉읍을 하사하며 동궁인 육경궁(毓慶宮)을 지은 뒤 그곳에 거주하게 했고, 황제의 상징인 황포를 입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 차별적인 특전을 주고 다른 황자들보다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하였다. 다른 황자들은 다른 궁에서 유모 등에게 맡겨 키웠지만 황태자만은 곁에 두고 직접 길렀다.

게다가 다른 황자들이 황태자의 자리를 위협할까봐 다른 황자들에게 큰 작위도 주지 않았고, 그들을 왕으로 봉하는 것도 꺼렸다. 그러나 20대까지는 황제를 잘 따르고 열심히 일하던 황태자는 30대를 넘어서면서 직무에 태만해지기 시작했고 주색잡기에 빠지기 시작했다.[39] 강희제는 속으로는 황태자를 아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매우 냉정하게 대했는데, 이런 태도는 언제나 빡빡한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형제들의 암투 속에서 살아야 했던 황태자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형제들의 암투가 매우 극심했는데, 황자들은 개국 공신 허서리 소닌의 아들인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와 황태자 인청(윤잉)가 속한 황태자당(皇太子黨)을 포함해서 서자이지만 맏아들인 황장자 인티(윤제)와 그의 외삼촌인 나라 밍주가 속한 황장자당(皇長子黨), 4황자 인전(윤진)을 필두로 한 황사자당(皇四子黨)[40], 겉으로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행세하며 많은 이들의 인망을 얻었으나 실제로는 간교하고 이간질에 뛰어나서 황자들 간의 분란을 부추긴 8황자 인스(윤사)가 속한 황팔자당(皇八子黨)[41]등으로 나뉘어 황제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강희제는 유교에 심취했기 때문에 당연히 유일한 적자 윤잉을 차기 황태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만주족에게는 적장자 같은 건 상관없이 가장 능력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전통이었다. 아직 강희제 대에는 이런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따라서 다른 황자들은 적자만 편애한 강희제의 태도에 매우 반발했던 것으로 보인다.[42]

결국 황태자는 강희제의 후궁을 건드리는 등 몇 차례의 소동을 일으키다가, 끝내는 반역을 일으키려다가 폐위되고[43] 서인으로 강등된 후 함안궁의 냉궁에 유폐되어 죽을 때까지 감금당했다.[44]

강희제는 첫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황태자를 두지 않고 있다가[45] 죽기 직전에야 황4자 인전을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이 황4자가 바로 옹정제다. 죽기 직전에야 차기 황제를 지명한 이유는 또다시 새 황태자의 주변에 간신과 파벌이 형성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청조 특유의 후계 제도인 태자밀건(太子密建)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태자밀건 제도는 황태자를 미리 정해놓지 않기에 모든 황자들로 하여금 행실을 조심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정황상 강희제의 이러한 후계 지명은 큰 정치적 혼란을 불러왔다.

강희제의 붕어 이후 황8자 윤상, 황9자 윤당, 황10자 윤아 등은 자신들과 대립했던 옹정제의 숙청을 두려워해서 그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또한 이들은 강희제가 十四(십사), 즉 14번째 아들 윤정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十(십)자가 第(제)자로 고쳐졌다고(혹은 십자가 지워졌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각색한 것이 바로 강희제 독살설 및 전위 조서 위조설이다. 후일 四(사)자가 제대로 적힌 강희제의 전위 조서가 발견된데다 十(십)자를 第(제)자로 고치는 건 당시의 문장구조에는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사실상 조서 위조설은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었는데도 이 떡밥은 강희제의 전위 조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오랜 세월 큰 지지를 받았다. 이는 황14자 윤정이 티베트 원정 등에서 공을 세웠고 실제로도 강희제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 하지만 옹정제 역시 그만큼 강희제의 신뢰를 받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강희제의 곁에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 있었던 황자였던 점을 감안하면, 강희제의 독살설과 조서 위조설은 옹정제의 즉위를 반대하는 황자들이 꾸며낸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46] 당연히 허무맹랑한 조서 위조설을 주장한 강희제의 황8자 윤상, 황9자 윤당, 황10자 윤아, 황16자 윤정은 옹정제 즉위 이후 일제히 숙청당했다.

아무튼 강희제의 치세 말년은 이런저런 문제가 이어져 강희제는 퇴직하는 대신에게 "신하는 사직하고 물러날 수도 있지만 천자인 짐은 그럴 수도 없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1722년, 강희제는 65세 이상의 노인을 자금성에 초청하는 행사인 천수연(千叟宴) 을 주최한 후 얼마 안되어 오한과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보이더니 12월 경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여담으로 말년의 강희제에게 그래도 힘이 된 사람이 바로 훗날 건륭제가 되는 손자 훙리. 아들들의 막장짓에 진저리가 난 강희제에게 똑소리 나고 용감하며 귀여운 훙리는 좋은 손자였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어린 손자와 같이 다니며 먹을 것을 주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는데, 옹정제가 후계자가 된 것은 훙리의 공이 크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건륭제 본인도 이 때의 기억이 굉장히 인상 깊은지 평생 강희제를 좋아하고 강희제의 초상화를 항상 집무실에 걸어두고 다닐 정도로 존경하면서 지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짐은 감히 조부이자 성군인 성조황제보다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자신의 재위기간이 강희제의 재위기간인 61년을 넘기기 1년 전에 아들 가경제에게 양위했을 정도였다.[47]


11. 여담[편집]


강희제의 통치기(1661년 ~ 1722년)는 한국사현종(顯宗, 1659년 ~ 1674년), 숙종(肅宗, 1674년 ~ 1720년), 경종(景宗, 1720년 ~ 1724년)의 치세와 일치한다. 조선에서 왕 3명이 재위할 동안 청나라는 단 1명이 훨씬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흠좀무한 성과를 내었다.[48]성군 강희제 관련 포스트

강희제의 측근인 조아킴 부베는 그의 외모를 키가 조금 크며 약간 살이 찐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고[49] 이마가 넒고 코와 눈이 작다고 묘사했다. 성격은 매우 부드럽고 정중했다고 한다.

식생활로는 폭식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적당히 먹고 주로 신선한 채소 위주의 음식을 많이 먹었다. 다만 그렇다고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아니라서 틈틈이 닭고기와 양고기를 먹기도 했다. 특히 짠 음식과 젓갈을 최대한 먹지 않고 음식을 싱겁게 먹었으며 야식은 절대 먹지 않았다. 술과 담배는 일절 하지도 않았다. 식사 후에는 소화를 시키려고 후원을 산책하거나 서양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관람하고 독서를 하는 취미생활도 가졌다.

제갈량출사표 중 후출사표 중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즉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는 말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신하가 본래 제갈량의 이 말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가리키며 임금이 가질 자세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자, 강희제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다."#


[1] Joachim Bouvet, 1656년 7월 18일 ~ 1730년 6월 28일 중국 이름은 백진(白晉)·백진(白進)· 명원(明遠)으로 프랑스 루이 14세가 파견한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다. 강희제의 신임을 얻어서 강희제에게 유클리드 기하학과 해부학 등을 강의했으며, 강희제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겼다.[2] 한족화된 여진족의 후손으로 퉁기야 씨의 시조가 된다, 그의 후손인 동국강과 동국유는 한인 팔기에 소속되었다가 강희제 즉위 후 특명으로 일족이 양황기로 편입되어 정식으로 만주족이 된다. [3] 중국은 전통적으로 즉위 다음해에 개원하는 유년칭원법을 채택해왔다. 중국에서 즉위년칭원법은 전임 황제를 축출하고 반정으로 즉위했다거나 전임 황제가 실정 및 학정을 했다거나 해서 그해의 정통성을 부정해야 할 때에만 예외적으로 썼었다. 반면 일본은 새 천황 즉위 직후 바로 개원하는 즉위년칭원법이 전통이었다.[4] 당시, 소닌은 너무 늙었고, 어빌룬과는 같은 팔기 출신이어서 연합하였기에 혼자나 마찬가지인 숙사하를 배제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5] 사실 보정대신 4인이 지정된 것은 도르곤이 섭정왕으로 청나라를 좌지우지하였던 것에 대한 대비책으로 나온 것이었다. 이들 4인 중 원래 숙사하는 도르곤의 부하였고, 남은 3인은 홍타이지의 부하였는데, 도르곤이 섭정할 때에 오보이 따위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을 만큼 미약한 존재였다.(평가에 따라서는 약간 다를 수 있지만 도르곤과 아우 도도는 어머니가 강제로 순장되면서 별볼일 없는 상황 속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서 팔기 중 2기를 장악하였다. 특히나 순치제 시기 강남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을 총지휘하였던 인물이 도도였음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오보이가 무용으로 이름 높았어도 황족, 그것도 누르하치의 친아들을 이길 정도는 아니다.)[6] 특히 중국대륙의 주류 민족은 한족인 반면 청나라는 만주족이었기에 한족에게는 만주족은 자국을 침략후 정복한 외국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당연히 한족들은 한족 부흥을 명분으로 한족출신이 궐기를 하면 대대적르오 호응할 여지가 있었기에 청나라로써는 이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에 가까웠다.[7] 그 당시에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 수밖에 없는 것이 만주족들이 입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고, 청나라의 명령으로 남명정권을 없애겠다고 운남을 지나 미얀마북부까지 공격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인물이 자기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갑자기 명나라 부활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8] 녹정기에서 위소보에게 불쌍하게 당하는 그 인물이다.[9] 강희제는 기병들에게 강력한 대포를 딸려 보냈다.[10] 당시 러시아는 이복 누이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반란을 일으켜 어린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를 압박해, 이반 5세가 공동 황제가 되고 소피아가 섭정이 되도록 만든 상태였고, 나선 정벌의 복수도 소피아가 막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네르친스크 조약 역시 소피아가 체결했다.[11] 우다 강 주변은 미결정지[12] 허서리 소닌의 아들이다.[13] 이전에 이곳에 라틴어문이 초안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맞다면 출처 요망[14] 네르친스크 조약 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와 청조는 자국어(노어, 만주어) 문서와 함께 라틴어 문서를 서로 주고받았다고 한다.[15] 표트르 대제 문서에도 나와 있는데,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이 무효라고 생각했다. 황제였던 표트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의 권한으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된 직후 소피아는 자기 애인과 함께 직접 쿠데타를 일으켜 표트르를 완전히 몰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하여 수녀원에 갇힌다.[16] 강희제는 서양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당시 중국에 들어오던 가톨릭 선교사들로부터 이런저런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17] 르네 그루쎄는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에서 이러한 강희제의 방식을 두고 '체제'는 야만인들을 다루는 중화주의의 행정적 경험이었고, '토대'는 만주의 칸들에게 몽골의 칸들이 복속하는 유목민과 유목민 사이의 관계였다고 표현했다.[18] 일설에 따르면 이 시기가 되면서 강희제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아들들 사이에 후계자 분쟁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에 황자들 중 한명을 지휘관으로 파견해서 전쟁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어느정도 의문의 여지가 있는데, 과거 강희제가 자신의 형과 동생을 대장군으로 몽골에 파견했다가 대패하며 망신만 당하고 돌아오자 강희제가 단단히 빡쳐서 이들을 처벌한 적이 있었다. 이후 친정으로 갈단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또다시 일부러 황자에게 대규모 병력 지휘권을 주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대규모 병력을 지휘할 능력을 가진 황자도 몇 명 없었는데, 가장 유력하였던 인물이 14 황자였다. 그리고 14 황자는 동복동복형 4 황자가 아닌 이복형 8 황자의 파벌에 속한 인물이기도 하였는데, 8 황자는 당시 신하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조정 내에서 숨은 실세로 입김이 여러 곳에 미치고 있었다. 강희제가 이런 상황을 완전히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윤정은 원정을 떠나있는 사이에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키면서 제위를 먹튀(?)당한채 북경으로 소환된다. 피휘 때문에 이름마저 윤제로 갈려버린 14 황자는 13년간 옹정제에게 홀대당하지만 대놓고 사고를 치진 않았고, 덕분에 개새끼, 돼지새끼 소리 들으며 생을 마감한 다른 형들과 달리 건륭 연간에는 황숙으로 적당히 대접받으며 말년을 무탈히 보낼 수 있었다. [19] 단, 황제가 강남을 오가던 비용에 일부를 총신들에게 부담시켰는데, 이는 오가는 와중에 황제가 그들 집에 방문하여 일정기간 머물면서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으나, 엄청난 부자가 아닌 이상 황제와 수행원들 접대에 허리가 휘청거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강희제는 손자 건륭제와는 달리 최소한의 인원으로 강남의 유학자들을 회유하는 차원에서 간 것이지만, 최소한으로 했어도 적은 인원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황제가 사용 비용을 내무부에 청구하라고 친절하게 말해주었지만, 돈을 청구한다는 것은 감히 황제에게 "너님 모시느라 돈 많이 썼으니 좀 메워주셈."이라고 말한 것과 같았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서야 진짜로 돈을 청구할 간 큰 인간은 없었다.[20] 개국 이래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구성원 모두가 실전경험을 쌓던 팔기군이 남명이 패망하면서부터는 기강을 잃고 해이해졌다. 물론 150년 후 가도중쇠, 아편전쟁 때의 추태에 비하면 삼번란에서의 전적조차도 매우 용맹스러워보이기는 한다만(...) 어쨌든 팔기군은 강희 원년 영력제가 오삼계에게 목졸려 죽은 이래 10여년의 세월을 탱자탱자 놀았다. 거기에 또 한가지 원인으로는, 복건과 광동의 반란세력이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쌓는 바닷사람들이 많아서이기도 했다. 만주족은 예로부터 자체 해군력이 없어서 명의 수군을 귀순시켜 쓰는 편이었고, 팔기한군도 이들이 한족 포병대와 함께 증편된 것이었다. 애초에 반군의 수괴 중 하나인 경정충이 홍타이지 시절 수군을 이끌고 만주족에 귀순한 경중명의 후손이잖은가.[21]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한 해 사형당하는 숫자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6천 명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인구 증가 수치를 따져보아도 매우 많은 편.[22] 비슷하다기엔 뭐하지만 만력제 시기에는 줄줄이 사형 집행 건수가 0명인 해가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건 당시가 태평성대였다기보다 만력제가 일을 안 해서이다.(…) 유교권에서 사형은 최고 군주의 결재가 있어야만 집행이 가능했는데 황제가 결재 자체를 안해버리니 사형수들이 옥에서 죽거나 시효인 20년이 지나 석방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23] 1. 성세자생인정으로 정세가 고정됐는데, 2. 여기에 탄정입묘로 고정된 정세와 토지에 부과된 정세, 토지 기반의 지세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정세 부담이 현격하게 감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24] 쉽게 말하면 다른데는 다 면제받아봤는데 얘네만 못받았으면 억울할 테니 너네도 올해는 내지 말라는 것. 재정이 풍족했음은 사실 이 말 하나로 충분히 표현이 가능하다. 이러니 인구가 증가할 수밖에. [25]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은의 1/4 내지 1/3을 빨아들였다고 한다. 아편전쟁은 이렇게 빨려 들어가고도 돌지 않는 은을 털어 무역 적자를 메우려는 영국극단적인 조치가 일으킨 결과였다.[26] 건륭제가 할아버지인 강희제를 매우 숭배했다.[27] 유니코드의 한자 영역도 강희자전 부수 순서를 따른다.[28] 입관 전부터 불교를 믿었고 입관한 뒤에는 중국식 선불교에 더해 티베트 불교도 수용했다.[29] 강희제는 교황을 교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사실 교황을 법왕 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30] 여담으로 적모이자 모후황태후인 효혜장황후도 청나라 역사상 가장 장수한 황태후이다. 실제로도 강희제가 사망하기 불과 5년 전인 1717년에 사망하였다.[31]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中[32] 본래 중국에 고차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방법으로 '천원술'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명나라를 거치면서 그 방법이 잊혀졌지만 강희제가 매곡성이라는 신하에게 "서양 사람들이 말하길, 이것이 동양에서 전파됐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조사해보아라." 라고 명하여 천원술과 차근법이 같다는 걸 알아내기도 한다.[33] 사실 이게 웃음으로만 넘길 수 없는게 중국사에서는 황제가 도사들이나 돌팔이 의사들이 갔다바친걸 덥석 먹었다가 죽은 사례가 여럿 된다. 당장 강희제가 황제가 되기 불과 20~30년 전에 명나라의 태창제가 돌팔이 의사가 바친 환약을 먹었다가 즉위한지 한달만에 죽어버린 사례가 있었다.[34] 다만 둘이 처한 환경을 고려했을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고전, 옛날 음악 애호가였고 강희제는 지극히 힙스터스러운 취향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35] 고지혈증과 부스럼에 걸렸고 몽골 원정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받았다. 이때문에 당시 황태자였던 윤잉한테 양위할 생각까지 했었다. 물론 병이 낫고 나서 바로 취소했다.[36] 성인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아들 20명, 딸 8명.[37] 금슬이 좋아서 강희제가 사랑한 황후였다. 윤잉을 낳은지 얼마 안되어 산고로 22살에 요절했다.[38] 계보상으로는 차남이었으나 형 승호가 3살에 요절하여 실제로는 윤잉이 맏이었다.[39] 실제로 윤잉은 여성을 굉장히 좋아해서 황태자비인 구왈기야씨외에 첩을 13명이나 두었고, 그 첩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만 해도 9남 14녀나 되었다.[40] 원래 이 세력은 다들 황태자를 따르는 태자당에 가까웠지만 태자의 각종 비행이 도를 넘어서자 인망이 높고 여러 공을 세우며, 아버지의 신임도 두터웠던 넷째 윤진을 구심점으로 점점 태자당에서 황사자당으로 변했다. 물론 정치적 감각이 있는 당사자 윤진은 항상 형님을 용서해달라며 아버지에게 빌고, 가끔 손주 자랑이나 하는 등, 절대적으로 저자세를 취했다. 오히려 윤상 등 윤진을 따르는 다른 동생들이 선을 넘어서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윤상은 정말로 유배까지 당했다.[41] 이 황팔자당 중 14황자 윤정은 황4자 윤진의 친동생이었지만 서북 전선에 출격한 대장군왕으로 활약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보이며 독자노선을 걸었고 유조 조작설 같은 야사에서의 떡밥을 남기기도 했다. [42] 사실 윤잉도 자신의 이복형제들한테 형제라기보다는 '황태자 전하'라고 부르라며 군신의 예의를 요구했기 때문에 형제들한테서 반감을 크게 사고 말았다.[43] 만주족 전통에 따라 피서산장에서 텐트 치고 살던 강희제에게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물론 강희제 측의 일방적 주장이지만... 특히 윤잉의 역모는 증거가 없었으며 강희제가 문제만 일으키고 다니는 윤잉이 싫어서 그를 폐위하려고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44] 윤잉은 강희제 사후에도 그에게 학을 뗀 옹정제가 감금과 서인 강등을 풀어주지 않아서, 감금된 지 12년 째인 옹정 2년에 52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나마 강희제가 유언으로 윤잉의 목숨만은 보전하고 윤잉의 맏아들도 친왕으로 임명해주라는 명을 내려서, 옹정제는 윤잉의 사후에나마 장례를 황족의 예로 치루어주면서 그의 황족 지위를 복원시켜주었다. 시호 밀(密)을 추가한 이밀친왕(理密親王)이라고 복권되었는데 이는 순박하지만 과오를 저질렀다는 뜻이다. 타국인 조선왕조실록에까지 누이들을 강간했다는 어마어마한 악담이 기록될 정도의 난봉꾼에게 "과오는 저질렀지만 그래도 순박했다"는 시호는 엄청 후하게 쳐준 셈. 윤잉의 맏아들 이친왕 홍석은 옹정제 살아생전에는 아비를 잘못 뒀을뿐 아들이 무슨 죄냐며(사실 홍석도 아버지 못지않은 망나니였다), 후히 대우받으면서 살았지만 옹정제 사후 건륭제가 즉위한 연간에 정통성 논란이 불거지자 가차없이 숙청당하고 만다.[45] 특히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하고 나서 황태자 옹립을 얘기하면 지위고하를 가리지않고 참수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했기에 신하들은 후계자를 언급할수도 없었다.[46] 조서 위조의 근거가 희박한 또하나의 이유는 청나라 황제들은 만주족의 칸이자 몽골의 대칸이었기에, 만주 문자 및 몽골 문자로 작성한 조서도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설령 한문 조서를 위조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나머지 조서에서마저 일부 글자를 수정하는 식의 위조는 거의 불가능했다.[47]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는데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허영심이 높았던 건륭제의 성격상 태자밀건법과 같이 불투명한 방법이 아닌 자신의 생전에 공개적으로 직접 후계자를 지목하는 것이 황제답다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48] 현종 시대에 조선에 큰 기근이 들었을 무렵 파견된 조선 사신에게 강희제는 "너희 나라 백성들이 이번에 다 굶어 죽게 됐대매? 그게 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서 그런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강희제와 청나라가 조선의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 이 대목은 최근에도 당시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종종 쓰인다.[49] 이는 강희제가 어린 시절에 천연두를 앓았기 때문이다. 물론 초상화는 미화를 위해 강희제의 얼굴에 있는 마마자국을 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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