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은 살아있다/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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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아시아
3.1. 명
3.2. 일본
3.3. 만주
3.4. 류큐
3.5. 조호르 술탄국-말라카
3.6. 오스만 제국
4. 유럽
4.1. 이탈리아 연맹
4.2. 프랑스
4.3. 잉글랜드→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왕국
4.4. 포르투갈→이베리아 연합
4.5. 에스파냐→이베리아 연합
4.6. 루스 차르국
5. 아메리카
5.1. 칼리푸르니야 술탄국
6. 전세계
6.1. 천하대전
6.1.1. 한양의 맹 전쟁(무진전쟁)
6.2. 천하대회 / 만국화약
7. 외전: 1812년의 세계
8. 외전: 제3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1. 개요[편집]


대체역사물 임꺽정은 살아있다에서 바뀌게 된 역사를 서술한 문서. 꺽정여지도를 참조하면서 보면 이해가 쉽다.[1]


2. 조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선(임꺽정은 살아있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아시아[편집]


  • 유대인의 동아시아 진출
이지가 족보를 조작해 주고 민주당이 지원해 주기로 하였다. 졸지에 멘데스(Mendes)가 중국의 맹(孟)씨로 바뀌었다.

니탕카이 밑에서 용병 노릇하는 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레가스피가 파견 되었는데, 이때 카를 5세가 보낼 몸값이 지원비로 와전되었고, 여기에 동방의 엘도라도가 있다는 소문까지 퍼지며 레가스피의 사절단에 대규모의 콩키스타도르들이 동행하게 된다. 이후 이들은 조선, 일본[2] 등 동아시아 각지에서 용병 일을 하게 된다.


3.1. 명[편집]


  • 왕직의 승천문 농성과 종계변무
왕직이 승천문 위에 올라 농성을 벌인 사건. 왕직이 공개한 서한을 증거로 엄숭과 그의 아들 엄세번이 처단되었다. 왕직이 주원장과 황실을 모욕하자 분노한 천자가 활을 쏘라 명령하지만 왕직은 목을 메어 바로 자결하고 화살들은 승천문 현판에만 박혀 현판이 땅으로 떨어져 박살난다. 그렇게 승천문은 원 역사보다 100년여 일찍 천안문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부서진 현판 조각들은 북경의 빈민들이 왕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휘왕사에 모셔진다. 한편 엄숭의 빈 자리는 서계와 장거정으로 대체되어 조선이 요구하던 바인 종계변무를 빠르게 들어준다.

  • 천안문의 변
조선 정론보의 해적판이 강남에 퍼지며 명에도 제헌논의가 일어나고, 이에 전국 각지의 선비들이 천안문 앞에 모여 상소를 올리다가 이에 노한 가정제가 이들을 대거 숙청했다.

  • 향신 재산 몰수와 공사 제도 수립
대일통이라는 이름의 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장거정이 조선의 정여립이 내놓은 사회주의 이론을 보고 혹한 데다가 민주당의 자유무역 정책으로 이익을 보는 강남 향신층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재산으로 농민들의 마음을 사려는 수단으로, 농업은 농리공사, 상업은 상행공사라는 공사를 만들어 국유화하고 향신층에게 공사에서 허울뿐인 관직을 맡게 하는 대신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향신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비루한 인물들을 모아 홍병위라는 무력조직도 창설한다.

  • 천조의 국제기구화

3.2. 일본[편집]


  • 부산제 조총의 유입


  • 규슈 사회 격물
장거정이 의산문답을 반박하기 위해 멜서스 트랩 비슷한 논리를 가져오자 이에 대한 재반박으로 민주당이 규슈 전체를 표본으로 사회 실험을 시행하였다. 규슈의 모든 다이묘들을 불러모아 전쟁을 금지시키고, 일공구민(세율 10%)로 조세를 거두며 이를 1년 간 시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반발한 마츠라 타카노부가 시마즈 가문과 손잡고 반란을 모의 했으나, 이미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 버렸고 결국 히데요시가 직접 타카노부를 해고 시켰다.

자유민주당을 본뜬 동척사(東拓社)라는 회사까지 설립하여 적극적으로 관동에 손을 뻗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에게 참패했겠으나, 여기서는 신겐이 포르투갈제 컬버린에 맞아 비명횡사 하며 도쿠가와-오다 연합군이 승리를 가져가게 된다.

원 역사에서는 검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살해당했지만, 본작에서는 임꺽정이 거나하게 불장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교토가 불바다가 되고, 이 혼란을 틈타 요시테루를 빼돌리면서 미요시 일파를 엿먹인다. 그와중에 차례로 죽은 미요시 삼인중은 덤.

  • 앞당겨진 동서합전(덴쇼의 역)
임꺽정과 동맹을 맺은 쇼군 요시테루와 자유민주당 소속 관서 다이묘들은 아시카가 막부를 해체하고 조선처럼 의권을 따라 선출된 공회로 정부를 세우겠다는 서군 토막파를, 허수아비 쇼군 요시히데를 내세워 계속 무가가 일본을 다스리는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오다 노부나가와 그에 동맹한 도쿠가와, 우에스기, 호조 등 관동 다이묘들은 동군 좌막파를 구성하여 동서합전이 앞당겨지게 되었다.
이후 우대신 직을 거머쥔 노부나가가 덴쇼(天正)로 연호를 고칠것을 요구하자 마자 일본 66주 전체에서 전란이 발발하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최후의 전투인 아마가사키 회전에서 서군이 승리하고 이에 따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투항하며 덴쇼의 역은 서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덴쇼의 역에서 이긴 후 다시 권력을 잡은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그를 위시한 서군 세력이 주도하는 대대적인 개혁. 공(公), 무(武), 민(民)의 같이 정국을 주도하는 삼가합체(三家合體)의 법도를 정한 뒤, 조선의 체제를 참고한 새로운 국정 운영 체계를 수립하되, 그 실정은 일본에 맞추기로 하였다.[3]

3.3. 만주[편집]


  • 여진족의 천주교 수용
하비에르가 함경도에 선교하러 가서 일부 여진족들을 개종시켰다.

니탕카이가 기린울라(吉林烏拉, 오늘날의 지린)를 중심으로 건국했다. 뜻은 '하늘 전사의 나라'. 히브리어로는 '이스라엘'로 의역된다[4]. 임꺽정의 제안으로 국가원수인 수러 버일러(統領, Surbeyler)는 직선제로 선출되며, 4년 중임제의 임기를 가진다. 쿠릴타이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는지라 여진족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졌다. 명에서는 니탕카이에게 아개위 도독의 직위만 내릴 뿐 나라로 인정하지 읺으며 칙서 없이는 교역도 없다 엄포를 놨지만, 이에 요동으로 들어오는 은이 끊기며 혼란이 일어나고 만다.
조선의 영향을 받아 6개의 야문[5]을 갖춰 나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진족의 특성 상 강력한 기마병을 갖추었다.[6]


3.4. 류큐[편집]


  • 류큐의 대만 진출
류큐의 왕위 계승전에 에스파냐와 민주당이 개입하였고, 그 결과 민주당이 지지한 쇼 칸 왕자가 승리하였다. 그 뒤 쇼 칸의 둘째 형인 쇼 겐에게 중산왕 자리가 돌아가고, 류큐에는 서림의 제안대로 진량사(津梁社)가 설립되어 류큐의 대만[7] 진출이 본격화 되었다. 그 과정에서 류큐는 다이토 제도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구아노를 확보하게 된다.[8]


3.5. 조호르 술탄국-말라카[편집]


  • 조호르 술탄의 말라카 복귀
포르투갈 총독이 말라카에 자리잡으면서 이교도인 이슬람인들을 모두 내쫓았지만, 상업 또한 쇠퇴하면서 말라카 또한 크게 쇠락한다. 이에 임꺽정 일행이 조호르 술탄을 시장으로 올릴 것을 획책하는 한편, 말라카에서는 성난 민심과 함께 총독을 겁박하여 종교와 상관없이 조호르 술탄이 말라카를 다스릴 수 있도록 엄포를 내렸다.


3.6. 오스만 제국[편집]


임꺽정 일당의 블러핑과 여기에 덧붙여져 눈덩이처럼 불어난 소문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구도 문제로 불이 옮겨 붙었고, 이에 쉴레이만 1세가 임꺽정과 직접 면담하여 운하에 대한 허가를 내렸다. 자금은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소국 들에게 갚는 빚으로 충당, 건설은 이집트 맘루크 들이 맡고, 현장감독은 민주당 산하 영국 동인도 회사가 담당한다. 유럽에서는 사라센 식 지명인 수에즈 대신 클리스마 운하라고 칭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력이 수에즈로 집약되면서 원 역사의 포트사이드 자리에 알 술레이마니야(쉴레이만의 도시)라는 무역항이 건설, 번영하게 된다.

  • 오스만 제국의 아메리카 진출
왕위 경쟁에서 탈락한 셰자데 바예지트가 울며 겨자먹기로 캘리포니아[9]에 진출하게 된다.

셀림 2세와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친히 이끈 오스만 군대와 지롤라모 자네의 이탈리아 연맹 용병대의 협공으로 그 윙드 후사르 마저 꺾고 쉴레이만 조차 해내지 못한 빈 함락을 성공시키고야 만다.

4. 유럽[편집]


  • 지동설의 확산
포르투갈령 인도 고아에서 핀투 선장이 이단 혐의로 잡혀가자, 서양인들에게는 '타고스 박사'라 알려진 이지(이탁오)가 고아 이단심문관 제군의 관심을 딴데로 돌리고 핀투를 구하기 위해 내놓은 방책. 주장을 처음 내놓았을 적부터 "그래도 지구는 돈다!"[10]라고 거나하게 어그로를 끌어버리는 바람에, 핀투 선장의 종교재판이 졸지에 천문학 전공자가 없는(...)[11] 이단심문관들로 하여금 골머리 싸고 밤샘하게 만드는 학문의 토론장으로 변질됐다. 꺽정이네는 이 틈을 타서 감옥을 터뜨려 핀투를 꺼내고 도망치고, 이탁오는 혼란을 틈타 재빠르게 튄다.

  • 교황청의 신앙의 자유 칙서 반포
이집트에 운하 짓는 일에 국가 및 종교를 가리지 않고 제국(諸國)이 다같이 연계되자, 구교와 신교 및 이교를 믿을 자유를 천명하여 사업에 차질이 없게끔 만들었다. 그 시작은 미켈란젤로를 선두로 한 표현의 자유와 자유석공조합의 건립이었다.

  • 교황청이 주도하는 교육
신교의 확장을 막기 위햐여 학교를 증설하기로 했다.

  • 휠체어의 도입
이지가 제갈량이 타고 다니던 수레의 설계도를 카를 5세에게 진상하였고, 그뒤로 노환으로 인해 무릎이 안좋아진 카를 5세가 애용하고 있다.

  • 몰타 구호기사단과 바르바리 해적의 화해
이후 바르바리 해적은 정식으로 오스만의 해군이 되거나, 엘리자베스 산하의 동인도 회사로 영입되었다.

  • 동양 고전의 전파

  • 노예제에서 머슴제로의 변화
라스 카사스 수사에게서 서양 노예제의 비참함을 들은 꺽정이 대안으로 조선의 머슴제를 제시한다. 지워진 빚을 갚을 때까지는 노예처럼 고된 일을 해야 하지만 자유인 신분을 유지하고 빚을 다 갚으면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점 때문에 라스 카사스 수사도 이를 하나의 진보로 받아들이고, 신대륙의 흑인 노예들도 머슴으로 신분을 상승시켜주려고 한다. 베네치아 상인들도 머슴제가 되면 그동안 노예로 삼는 것이 금지되었던 기독교인들까지 일을 시킬수 있다는 점 때문에 찬성하며, 조선어 머슴을 유럽인들은 들은 대로 '모숨(mosum)'이라고 표기한다.


4.1. 이탈리아 연맹[편집]


미켈란젤로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교황 바오로 4세의 횡포에 골머리를 앓던 중, 때마침 흘러들어온 꺽정이네 일행의 부추김을 받아 주변 석공들과 함께 파업에 들어간다. 성질 괴팍한 노인네 취급을 받던 미켈란젤로의 평판에도 불구하고, 꺽정이네가 주변을 잘 포섭한 덕분에 오래 지나지 않아 교황청에서 GG를 친다.

  • 프라스카티 조약
카를 5세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진 빚을 상환하기로 하였다. 상환된 대금은 클리스마 운하 건설에 쓰일 예정.

  • 이탈리아 연맹(Lega Italica) 결성
교황청,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을 중심으로 신성 로마제국의 위협을 막기 위해 결성되었다.

  • 이탈리아 민족 의식의 태동

4.2. 프랑스[편집]


  • 앙리 2세의 이른 사망
원 역사에서는 마상시합에서 창 파편이 눈가에 튀어 감염증을 유발하는 바람에 10일간 앓다가 죽었지만, 여기서는 임꺽정이 힘조절을 잘못하여 창으로 거세게 들이받는 바람에(...) 허리가 접혀 즉사했다.[12]

프랑스의 왕위 분쟁에 임꺽정 일당이 개입하며 위그노 전쟁을 겪지 않게 되었다

  • 북미 식민지 개척
도키치로의 제안으로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부르봉 가문이 개척한 누벨오를레앙과 기즈 가문이 개척한 누벨로렌이 형성된 상황.

4.3. 잉글랜드→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왕국[편집]


원 역사보다 약 44년 앞서 설립되었다. 엘리자베스 튜더가 왕위를 포기하고 임꺽정과의 동행을 결정한 터라, 동인도 회사가 민주당 산하로 들어갔다. 이후 셰자데 바예지트의 사주를 받고 임꺽정 일행을 공격해온 바르바리 해적들을 역으로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본부는 알 술레이마니야(원역사의 포트사이드)에 위치해 있다.

  • 영국 빈민법 실시
원래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인 빈민법이 여기서는 메리 1세의 치적으로 남게 되었다.

  • 튜더 왕조 유지
엘리자베스가 왕위계승자가 바로 되는 대신 동인도회사 경영에 전념하기로 하면서 메리 1세가 이탁오의 계책을 받아 빈민원에서 고아 남자아기를 데려와 자신의 친자 찰스 왕자라고 선전하며 왕세자로 삼아, 튜더 왕조가 유지되게 되었다.

  • 메리 1세-펠리페 2세 간의 이혼 소송과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설립
펠리페 2세가 찰스 오브 합스버그를 외도의 소산이라 주장하며 이혼 소송을 제기 했으나 교황청에 의해 기각, 이후 빌럼 반 오라녜의 주도 하에 잉글랜드의 찰스 오브 합스버그를 국왕으로 하고, 메리 1세가 섭정을, 그리고 빌럼 반 오라녜 본인이 섭정 대리로서 전권을 가지는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특기할 부분이 있다면, 독립선언문에 직접적으로 조선의 국인선서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으로 빌럼 반 오라녜는 이를 지속적으로 강조하여 '달변공'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4.4. 포르투갈→이베리아 연합[편집]


  • 포르투갈 정부의 예수회 지원 중단
대신 유대인들의 자본적 지원과 민주당의 정치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 두리손 반란 지원
임꺽정에게 큰 피해를 입었고 앞으로 더 크게 입을 예정인[13] 포르투갈 정부와 고아 부왕령이 민주당-탕평당 연립 정권을 무너트린다는 같은 목적을 가진 명나라 장거정과 힘을 합쳐 두리손의 반란을 지원하기로 하고 함선을 파견하여 대량의 컬버린과 화약을 두리손에게 지원한다.


4.5. 에스파냐→이베리아 연합[편집]


  • 앞당겨진 마드리드 천도

  • 로마 공화정의 쇠락에 대한 논고
카를로스 1세의 마지막 저술. 줄여서 '쇠망론'이라고도 불린다. 살루스티우스키케로를 기반으로 하여 공화정의 필연적인 몰락과 계몽군주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 이베리아 연합 수립과 명과의 동맹
원역사대로 포르투갈 왕통이 끊기자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까지 차지해 이베리아 연합이 수립되었고, 명의 장거정과 동맹하여 세상에 의권을 퍼트리는 임꺽정의 나라 조선을 치는데 합의하고 명 및 조선에 적대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지원을 시작한다.


4.6. 루스 차르국[편집]


노브고로드 대주교의 목숨을 건 직언[14]에 아직 총기가 남아있던 이반 4세의 결단으로 황실 친위대인 오프리치니크의 폐지와 전국의회의 3년 정례화가 결정되었다.


5. 아메리카[편집]



5.1. 칼리푸르니야 술탄국[편집]


  • 칼리푸르니야 건국
오스만 제국에서 왕위 계승에 밀려난 셰자데 바예지트가 임꺽정 일행의 제안으로 조선을 거쳐 아메리카 서부의 개척을 맡게 되어 생긴 국가. 이들이 처음 도착한 곳인 라술(Rasul)[15]이 사실상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이언적을 위시한 조선인 이민자들의 수가 매우 많은지라 대다수의 건물들은(심지어 모스크조차도) 조선식이나, 이외에도 튀르크인과 그리스인, 아메리카 원주민, 심지어 이슬람의 확산을 막기위해 누에바에스파냐에서 보낸 에스파냐계 내지는 크리오요 계열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까지 섞여 인종구성이 복잡하다. 주변 원주민들인 키지 족과 추마시 족과는 교역을 하면서도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으나 이언적이 두창 예방 인두법을 전파하면서 갈등관계가 많이 해소된 것으로 묘사된다.


6. 전세계[편집]



6.1. 천하대전[편집]



천하대전
天下大戰
la Gran Guerra
시기
서기 1564년 7월 ~ 1570년
장소
덴쇼의 역: 일본
다섯 군대 전쟁: 저지대 국가
대튀르크 전쟁: 이집트, 발칸 반도, 헝가리, 오스트리아
북방전쟁: 리보니아,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대양 전투: (인도양)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섬, 고아 부왕령 · (태평양) 페루 부왕령, 필리핀 도독령, 칼리푸르니야
한양의 맹 전쟁: 동아시아 전역
원인
대일통론개명된 법도의 충돌
교전국
한양의 맹
파일:꺽살조선깃발.svg 대조선국
파일:아시카가 가몬.svg 서군(신정부군) → 파일:nishikinomihata_02.jpg 일본국
파일:압카이 아파시 구룬 깃발.svg 압카이 아파시 구룬
[ 기타 교전국 ]

파일:명나라 보.svg 대명
파일:오다 가몬.svg 동군(막부군)
[[스페인 제국|

스페인 제국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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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명된 법도는 명과 충돌하게 되었다. 조선이 헌법 제정, 국인선서 채택 등 입헌군주제 국가로 나아가는 반면, 명은 장거정대일통론을 앞세워 중화사상에 기반한 제국주의와 절대왕정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한편, 스페인 제국의 패권이 절정에 달한 유럽에서도 조선의 영향을 받아 시민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장거정은 '개명된 법도'를 분쇄하기 위해 중국의 막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군대를 양성하고, 마찬가지 상황에 처한 스페인 제국과 손을 잡고 수군을 재건한다. 스페인도 자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오스만 제국, 이탈리아 연맹, 영-불-란 연합과의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동방의 부를 끌어모으는 데 사활을 건다.

이렇게 조선을 중원 제국의 영향권에서 떼어냄으로써 장거정의 걸림돌 역할을 하는 꺽정이네와, 이들을 몰락시키기 위해 중원의 자원을 쏟아붓는 장거정의 대립은 마침내 전 세계가 끼어든 전쟁으로 이어진다.

주요 전선은 아래와 같다.

  • 덴쇼의 역(天正の役)
장차 벌어질 명과의 전쟁에서 일본을 우군으로 삼아야 한다는 린죠 히데요시의 발의에 의해 벌어진 전역이다. 민주당의 규슈 격물에 영향을 받은 서국 영주들이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중심으로 신정부를 선포하고 대정봉환을 주장하였다. 그 사이 교토를 손에 넣은 오다 노부나가는 우대신에 임명되어 동국 영주들을 규합한다. '공론주의의 군기고'를 자처한 조선은 서군을, 명은 동군을 지원하였다. 아마가사키(現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합전에서 서군이 승리하지만, 동군 병력은 중원으로 망명해 명군의 정예 병력을 구성하게 된다.
  • 다섯 군대 전쟁
네덜란드 독립 전쟁. 알바 공작의 에스파냐군, 신성 로마 제국 황제군(과 루터파 제후들), 저지대 계승을 주장하며 참전한 잉글랜드군, 프랑스군, 오라녜 공 빌럼의 저지대 독립군까지 다섯 군대가 맞붙었다 하여 '다섯 군대 전쟁'이라고 불린다.
  • 대튀르크 전쟁
오스만 제국이 수에즈 운하를 통해 동방 무역에서 이베리아 연합이 가지고 있던 지위를 깨뜨리자 지중해에서도 전쟁이 발발한다. 에스파냐는 수에즈 운하를 무력화하고자 맘루크의 반란을 원조한다.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령인 발칸 반도를 공격하고, '이교도의 위협'을 앞세운 폴란드-리투아니아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스페인 쪽에서 동유럽에서 러시아와 오스만을 견제한다. 합스부르크군이 발칸 반도에서 반격해 오자, 이탈리아 연맹의 지원을 받아 아드리아 해로 상륙한 오스만군은 빈을 포위한다. 포위를 풀러 온 윙드 후사르가 이탈리아군 중보병을 돌파하지 못하고 궤멸되어 오스만군이 빈에 입성하게 된다.
  • 북방전쟁
루스 차르국과 모스크바 대공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이 격돌하고 있다. 오프리치니크의 해체로 약화된 루스군은 리투아니아군에게 크게 밀려난다. 한편 스웨덴 왕국이 루스 차르국과 리보니아 지역에서 다투게 되자 기회를 노린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이 대 스웨덴 전선 한정으로 참전했다.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가 스웨덴군을 무찌르자, 스웨덴 왕족들은 연이은 패전으로 신뢰를 잃은 에리크 14세를 퇴위시키고 강화를 맺는다. 스웨덴이 이탈하면서 덴마크군에 의해 후방이 위협당하게 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서 철수하게 된다.
  • 대양 전투
수에즈(클리스마), 말라카, 고아를 비롯한 인도양의 해상 거점뿐만 아니라, 태평양 항로의 중심지인 마닐라와 은의 생산지인 포토시를 장악해 서로의 해상 공급망을 무력화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진다. 또한 스페인이 대전쟁에 휘말려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신타완틴수유 사파 잉카인 티투 쿠시가 부흥군을 이끌고 봉기하여 페루 부왕령을 뒤흔들고 포토시의 은 생산에도 큰 차질을 준다.

후세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 불리게 된다.

6.1.1. 한양의 맹 전쟁(무진전쟁)[편집]


한양의 맹 전쟁 (무진전쟁)
漢陽之盟戰爭 · 戊辰戰爭
시기
서기 1568년 9월(음력 8월) ~ 1570년
장소
동아시아 전역
원인
대일통론개명된 법도의 충돌
교전국
한양의 맹
파일:꺽살조선깃발.svg 대조선국
파일:nishikinomihata_02.jpg 일본국
파일:압카이 아파시 구룬 깃발.svg 압카이 아파시 구룬
북원 투메드 부
백련교
파일:명나라 보.svg 대명 남경조정
파일:명나라 보.svg 대명
파일:오다 가몬.svg 동군
[[스페인 제국|

스페인 제국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제국"
행정구
]]

지휘관
파일:꺽살조선깃발.svg 조선국왕 이환
파일:꺽살조선깃발.svg 영의정 이준경
파일:꺽살조선깃발.svg 도원수 임꺽정
파일:꺽살조선깃발.svg 삼국도총관 권율
파일:꺽살조선깃발.svg 삼국부총관 이순신
파일:꺽살조선깃발.svg 서삼도수군통제사 정걸
파일:압카이 아파시 구룬 깃발.svg 수러 버일러 아이신기오로 교창아
파일:압카이 아파시 구룬 깃발.svg 니탕카이 요한
파일:nishikinomihata_02.jpg 오오기마치 덴노
파일:nishikinomihata_02.jpg 태정대신 아시카가 요시테루
파일:nishikinomihata_02.jpg 자유민주당 영수 린죠 히데요시
투메드 칸 알탄 칸
바간나기
백련교 두령 조전
파일:명나라 보.svg 명 황태자 주익균
파일:명나라 보.svg 국민당 영수 오승은
파일:명나라 보.svg 융경제
파일:명나라 보.svg 내각대학사 장거정
파일:명나라 보.svg 동창제독 풍보
파일:명나라 보.svg 요동경략 척계광
파일:명나라 보.svg 이성량
파일:명나라 보.svg 조승훈
파일:명나라 보.svg 양응룡
파일:오다 가몬.svg 오다 노부나가
파일:오다 가몬.svg 니와 나가히데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펠리페 2세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필리핀 도독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기도 데 라베사리스†
병력
한양의 맹
200,000명
명군
200,000명

조선, 일본, 압카이 아파시 구룬 삼국이 체결한 '한양의 맹'은 무진년(1568년) 봄 명에 사신을 보내 개명된 법도를 수용하고 적대를 철회할 것을 골자로 하는 광복삼장(光復三章)을 요구하였다. 이를 명이 수용하지 않으며 전쟁이 발발한다.

  • 무진의 변
한양의 맹 삼국은 황태자 주익균의 생일을 명분으로 북경에 사신을 파견한다.
…우리 동방 삼국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사흘 뒤 정오를 기하여 우리 삼국과 대명 사이에는 전화(戰禍)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 광복삼장(光復三章)을 들어 보이며 명에 최후통첩을 하는 이지함
사신단은 천리비차, 신기총통무적귀차 등의 군기를 선보이며 시선을 끌지만, 명군은 이에 넘어가지 않고 사신단을 추포하기 위해 포위망을 구축한다. 그러자 사신단은 백련교도들의 도움을 받아 성내에 침투한다. 이어 장거정의 사저에서 난동을 일으키고, 이를 틈타 융경제의 행렬을 습격하여 황태자를 납치한다.

  • 톈진만 기습
백두산을 올라라!

- 맹약군 연합함대에 기습을 명령하는 군호
최후통첩에서 공언한 사흘 뒤 정오가 되자, 정걸이 이끄는 맹약군 연합함대[16]톈진 항을 기습한다. 세키부네에 포를 달고 에스파냐 갤리온 사이로 침투해 격침하거나 화공선을 활용하여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의 계략[17]으로 명-에스파냐 함대는 상당한 전력을 보전할 수 있었다. 또한 톈진을 통해 철수하는 사절단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사자를 내고, 니탕카이 요한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 다퉁 전투
경술의 변이나 토목보의 변에서도 못 이룬 위업을 이뤄낸 꺽정이네의 소식은 북원알탄 칸을 자극하였다. 알탄 칸의 손자 바간나기[18]대동을 침공해 장성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는데, 명에게 탈탈 털리고 중긴 하툰마저 할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만다.

  • 요동 전역
전쟁 발발 직후 요동에서 지상전이 벌어진다. 도원수 임꺽정 부부가 이끄는 맹약군은 무순 성벽을 화포로 지워버린 뒤 퇴각하고, 사르후에서는 그 화포까지 버리고 패주하며 명군을 허투알라(혁도아랍)까지 끌어들인다. 연방의 구심점이던 니탕개가 전사했으니 여진의 위소들이 분열했을 것이라고 예측한 명군의 오판을 역이용한 것이다.(여진은 오히려 니탕개의 죽음을 계기로 부족과 종교를 넘어서 통합하고 있었다.)
이성량이 이끄는 명군이 꺽정이네의 계략에 포위되자, 척계광은 사로병진책을 앞세워 허투알라 일대에 갇힌 명군을 구원하러 나선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믿음[19]으로 사기가 충천했던 맹약군을 맞아 사르후의 산길을 뚫지 못하고 패주한다. 샹안하다를 통해 간신히 빠져나온 이성량과 그 가병을 제하고 4만에 가까운 명군이 그대로 포로가 된다.

  • 한양 전투
한편, 톈진에서 살아남아 전력을 보전한 명-에스파냐 함대는 오다 노부나가가 이끄는 정예 병력[20]을 싣고 한양을 공격했다. 이들은 그 수가 적어 본격적으로 조선을 침공할 역량은 없었지만, 조선 정부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정치적·전략적 성공을 거두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명군은 한강 수로를 거슬러 도성에 진입하였고, 사업당과 육조거리 등 한양 중심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조선 국왕이 창덕궁에 남아서 항전[21]하고, 종묘를 자폭[22][23]시켜 문종대왕 싱글벙글 에스파냐 부대를 궤멸하자 오다도 기겁하게 된다.[24] 철수하던 명 수군은 조선 수군의 반격으로 갈레온 절반을 잃고, 한양지맹 3국은 오히려 사기가 더 오르게 된다.

  • 대불복(大不服)남경 조정 수립
우리가 사직이다!

- 남경성에 모인 백성들이 외친 구호
오승은은 항저우에서 봉기 아닌 봉기가 일어난 이후 민주당의 지원을 받는 저항조직인 국민당을 세운다. 국민당 운동은 향신들의 불만을 자극하고, 장거정의 사상탄압에 반발하는 양명학 학당을 중심으로 강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전란이 발발하자, 오승은은 손인심이라는 위장신분으로 출판공사가 있는 푸저우에서 활동하며 장거정의 대일통론을 칭송하는 서책인 '장태악대일통론도설'을 인쇄해 퍼뜨리기로 한다. 이때 꺽정이네 일당이 대일통론의 성과를 선전하는 원본 대신, 대일통론의 온갖 모순을 지적하는 각주를 추가한 수정본으로 바꿔치기하여 강남 전역에 뿌린 것을 계기로 강남 백성들이 총파업인 '대불복'을 벌이게 된다.
장거정은 응천순무 경정향에게 꺽정이네 일당이 있는 남경성을 포위하여 진압하라고 명령한다.[25] 그러나 장강 봉쇄망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게 간단히 뚫리고,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조달해온 쌀을 남경 백성들에게 팔아 식량을 조달한다. 왕직이 민중영웅 '휘왕'으로 떠받들어지는 것을 본 임꺽정이 왕직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앞장서서 농성을 벌이고, 그 두 달 사이 대불복에 가담한 강남 백성들은 물론, 이들에게 몰매를 당할까 두려워하던 홍병위까지도 동요하여 남경성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운집한다.
끝내 경정향은 '이 벽을 허무시오'라고 압박하는 국민당과 '우리가 사직이다'를 외치는 백성들에게 굴복한다. 해서와 오승은은 각지의 향신들을 규합해 황태자 주익균을 추대하고 대명 남경조정을 선포한다.

  • 자금성의 변
요동 전선에서 패배를 거듭한데다 남경 조정 수립으로 강남을 잃은 장거정이 오다 노부나가가 지휘하는 일본+스페인 용병대를 남경 조정 토벌군으로 차출하려고 하자 노부나가는 '우리를 버림패로 쓰려고 하는 장거정과는 이제 계약관계가 끝났다. 적은 자금성에 있다! '라고 외치며 반란을 일으켜 자금성을 들이쳐 불을 지르고 금위군을 몰살시킨다. 융경제는 풍보가 모시고 빠져나가지만 장거정은 도망을 거절하고 홀로 남아 노부나가를 독대하고 노부나가의 칼에 쓰러지는데....
이 모든 것은 장거정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장거정은 이대로라면 임꺽정과 그 '개명한 법도'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지고 죽고, 명나라의 정권은 남경 조정으로 넘어가겠지만 북경 일대는 노부나가가 당나라 절도사처럼 군벌이 되어 다스리면서 한양의 맹 3국을 견제하며 후일을 도모하게 하고, 대일통론을 후세에 남겨 훗날 한양의 맹 3국이 초심을 잃었을 때 대일통론이 다시 중화에서 솟아오르기를 꿈꾸면서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었다.


6.2. 천하대회 / 만국화약[편집]


장거정이 사망한 후 병부상서가 된 오다 노부나가는 당장은 장거정의 대일통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임꺽정을 먼저 찾아와, 명나라 조정은 실제 권력은 모두 포기하고 국제연합처럼 국가간의 중재만을 담당하는 명목상의 천조가 되고, 천하 모든 나라는 서로 평등한 관계를 맺고 국가간 분쟁은 천조에게 맡기자는 대담한 구상을 제안하고, 임꺽정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천하대전이 끝나게 된다. 전쟁에 참여했던 모든 나라가 한양에 모여서 노부나가가 제안한 새로운 국제질서에 조인하는 만국화약과, 부대행사로 모든 나라의 상공인들이 한양에 모여서 세계박람회인 천하대회를 성대하게 여는 것으로 본편의 막이 내린다.


7. 외전: 1812년의 세계[편집]


꺽정이가 온 세계를 뒤흔든 여파로 실제 역사보다 120여년 정도 발전이 빨라, 라디오와 LP레코드가 보급되는 등[26] 실제 역사 1930년대의 생활상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국제 정세도 1930년대처럼 파시즘과 공산주의로 인해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상황. 그 사이 벌써 한 차례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은 꺽정이 벌인 천하대전.)이 벌어졌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세월이 흐르면서 민주당은 당명이 여러차례 바뀌었고, 최근에는 국인의권당으로 당명이 바뀌었는데 최근 공회 권점에서 제 1당 자리를 잃게 되자 다시 민주당으로 고치자는 이견이 나온다고 한다. 반면 대동당은 정여립 이후 당명이 바뀌지 않았다고.

동방 3국(조선, 일본, 대금)의 동맹은 여전히 굳건하다. 일본의 하야시 라잔은 화학의 아버지가 되며, 그래서 각종 원소의 이름이 오행설에서 따온 이름으로 지어진다.

노부나가 구상에 따라 실제 권력을 포기하고 국제연합 역할을 하던 대명 천조 조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주씨 황통이 끊어지자 '만국연합'으로 명칭을 바꾸고 천자를 대신할 총통 직을 설치했으나, 실제 역사의 국제연맹처럼 점차 유명무실해져 간다고 한다. 이후 중국은 자치정부의 난립으로 혼란이 지속되다 장헌충, 이자성, 아이신교로 도르곤(이른바 삼총사)의 활약으로 남경 정부와 북경 정부로 어느정도 정리가 된다. 이후 북경 정부와 조선의 산업화 경쟁으로 정약용과 그 형제들이 비행기를 발명해 내는 등 원 역사보다 몇갑절 이상으로 기술 발전이 빨라졌다. 유럽에서도 몽골피에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여 '정씨비차공장'과 '몽골피에 사'가 양대 민항기 제작사가 되었다.

프랑스는 그 사이 왕정과 공화정으로 정치 체제가 계속 혼란스럽다가 제3왕정을 무너트리고 제4공화정인 '프랑스 대동주의 인민공화국' 이 집권했으며[27], 실제 역사 스탈린처럼 로베스피에르 서기장의 대숙청을 통해 삼만명 이상을 아메리카 대륙의 굴라그로 보내고 있다. 과학자들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노동교화소에 보내 성과를 낼 때까지 처벌한다고 한다.

본편에서 도시국가 동맹이었던 이탈리아 연맹은, 외전 시점에선 유럽 최강국 중 하나인 강력한 통일 국가 이탈리아 연방이 되어있다. 이탈리아의 '일 두체(Il Duce, 영도자)' 이자 종신독재관인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는 6주 안에 빈을, 1년 안에 베를린, 프라하, 파리를 정복하고 로마 제국을 재건할 수 있다며 주변국을 위협하고 있다.

소빙하기는 원 역사 대로 찾아왔는데, 잉글랜드는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으로 영연방으로 국가 체제를 개편하여 수습했으나[28], 프랑스는 그 여파로 제 1왕정이 붕괴되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외에도 중국 남경 정부와 폴란드는 영토를 크게 잃었고,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칭호를 포기했으며, 반면 프로이센과 중국 북경 정부, 영연방, 동방 삼국은 큰 이익을 봤다고 한다.

러시아와 동유럽은 왕정이 폐지되고 '슬라비아 합중국'이라는 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었으며, 국가원수는 통령으로 연임이 가능하다고 한다.

중동 지역에서는 와하브 운동이 벌어지는데, 이게 원 역사와는 달리 유교식 윤리 도덕을 바탕으로 이슬람교를 개혁하자는 혼종으로 나온다. 도덕과 인의를 숭상하는 무슬림으로서 '공정무역' 상품을 소비하자는 캠페인은 보너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서부 지역은 알 타이샤(텍사스)까지 칼리푸르니야 술탄국이 대부분 차지했으며, 수도 나성에 있는 회재대학교(이언적의 호를 땄음)에서는 이슬람 신앙과 성리학을 융합시킨 이슬람 개혁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지대는 일본 동척사의 위임통치령, 나성 북쪽 지역은 사업당 위임통치령이 있다. 북아메리카 동부 지역은 북쪽은 영연방에 속한 뉴스코틀랜드, 뉴잉글랜드 2개국이 있고, 포토맥 강 이남부터 루이지애나까지 프랑스에 속한 누벨프랑스가 있다. 민주당 동지들 중 가장 장수한 이탁오는 말년에 대암산맥(로키산맥) 현무산이라는 산에 임꺽정을 비롯한 민주당 동지들의 얼굴 조각상을 크게 새겨놓아 이 시대에까지 유명한 관광지가 돼있다.

대영박물관은 이 역사에서도 세계 최대의 박물관이나, 소재지가 런던이 아니라 수에즈 운하가 있는 술레이마니야 시에 있고, 영국 동인도 회사가 운영주체이다. 유물을 모을 때 도굴이나 사기를 친 적은 있지만 강탈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8. 외전: 제3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편집]


후일담에 따르면 결국 이탈리아의 나폴레오네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며, 프랑스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로베스피에르 정권을 전복시킨 후 이탈리아와 동맹하는 등 영연방과 슬라비아 합중국을 제외한 온 유럽을 정복했으나 영연방의 커즌 리-처칠 총리가 완강히 저항하는 사이 동방3국이 연합군을 보내 영연방과 슬라비아를 도왔고, 동방3국이 지원한 핵무기를 슬라비아 군이 아드리아 해 상공에서 폭발시켜 핵무기의 위력을 경고하자 나폴레오네가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면서[29]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전쟁 이후 핵무기 폭발력의 총 톤수를 제한하는 국제조약이 맺어졌다.

그 후에는 원역사처럼 우주개발 경쟁이 벌어졌으며, 알렉상드르 뒤마의 대작 SF 영화 3부작 '보물성 시리즈'가 전 세계에서 크게 흥행했다. 슬라비아의 니콜라이 고골이 첫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했으며, 영연방의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최초의 유인 달착륙에 성공했다. 동방 3국도 공동으로 고탐태허사라는 우주국을 세워 성한 계획이라는 달 유인 우주선 계획을 진행 중이며 '주자 성한(성한 6호)'이 처음으로 유인 달착륙에 성공했다고 한다. 또한 동방 3국은 이순신의 후손이 제안한 군략통어방안이라는 우주병기의 개발도 시작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유인우주선은 발사하지 못한 대신 무인탐사선 분야에 주력하여 달의 뒷면을 최초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외행성 탐사선 알 라이드 6호샤하다가 새겨진 동판을 싣고 토성을 지나 태양게 밖으로 나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토머스 에디슨스마트폰을 발명하고, 전기자동차 사업을 하던 니콜라 테슬라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도움을 받아 핵융합로 개발에 성공한다. 중화연합의 원세개는 화성에 처음 발을 딛은 인간이 되고, 그 후 화성에 소행성을 추락시킨 후 광물을 채굴하는 우주광업이 화성에서 크게 발달하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의 화성 대동주의 혁명, 화성에서 날뛰는 '붉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을 잡기 위해 중화연방의 요청으로 파견된 조지 S. 패튼실용성은 떨어지지만 화려한 외양의 이족보행병기를 타고 싸운다는 등의 묘사가 잠시 나왔다.

[1] 대체역사 갤러리의 두 유저가 만든 임꺽정은 살아있다의 지도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를 구글맵에 표시하고 각 표시마다 주석이 달려있다. 까다롭스키 작가가 직접 공지를 걸어놓은 반공식적인 자료이다. 동일한 유저들이 작가의 전작인 고종, 군밤의 왕으로 똑같이 만든 지도도 있다.귀남선정도 [2] 오다 노부나가가 이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였다.[3] 천황을 비롯한 조정이 유명무실한 상황이니 만큼 중추부를 그대로 옮겨오는 것은 어려웠고, 이에 따라 각 쿠니의 대표자를 모은 국회(國會)에서 국정 운영을 정하고 장*차관도 국회에서 선출하는 의원 내각제에 가까운 체제다.[4] 서양에는 구루니아(Gurunia)로 알려졌다.[5] 조선의 6조에 대응, 허나 세부적인 업무는 여진족의 실정에 맞추었다.[6] 일본에서는 이 기마병들을 붉은 마병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데, 이는 이들이 돌진할때 외치는 '압카이 어럼비(주님께서 원하신다!)'라는 구호를 '아카이(붉다)'로 착각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3배 빠르다는 소문이 돈다는 풍문으로 볼때, 모티프는 아무래도...[7] 류큐인들은 대만 북부를 우후우지쿠니(大沙糖國)라 칭하고 있다.[8] 이때 서림이 꿈꾸는 그림이 묘사되는데, 류큐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대만 진출에 쓸 노동력으로 일본인들을 거래하고 오귀자들을 마름으로 쓴다는 무시무시한 발상이다.[9] 해석에 따라서는 칼리푸르니아, 즉 칼리프의 땅이라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10] 물론 실제 갈릴레이가 진짜로 이 말을 한 건 아니다.[11] 이탁오도 딱히 지동설을 증명할 수 있던 건 아니었지만, 고아의 성직자 중 천문학 전공자가 없어서 모두 이탁오의 언변에 끌려갔다.[12]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임꺽정이 킹 슬레이어 칭호를 획득했다는 등(...)의 개드립이 나왔다.[13]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 가장 타격을 받을 나라는 바로 포르투갈이다. 게다가 비록 '동방의 우환' 소리는 들었을지언정 임꺽정이 방문한 서양 국가들은 나름대로 이득을 취했는데(오스만, 이탈리아, 잉글랜드는 수에즈 운하 이권을 취했고, 추가로 잉글랜드는 왕위 계승이 안정되었다, 프랑스는 왕이 죽되 내전이 삭제되었으며, 에스파냐는 카를로스 왕자의 리스크를 줄였다.) 여기서 포르투갈만 예외였으며, 얼마나 분위기가 살벌하였는지 임꺽정이 방문했어도 왕이랑 인사 한 번 안 했다.[14] 말이 직언이지 성당째로 불사른다는 반쯤 협박이었다.[15] 뱃멀미에 시달리던 바예지트가 천사 지브릴(사실은 갈매기)을 보고 발견한 곳이라 '전령'이라는 의미로 라술이라 이름 붙었다. 누에바에스파냐에서는 어느 그리스인 역관이 이를 천사라 번역하여 로스 앙헬리스(Los Angeles)라 부르고 있고, 조선인들은 라술을 음차하여 나성(羅城)이라 부르고 있다.[16] 보하이만 반대편의 요동에서 출진했다. 명이 백련교도들에 의해 요동에 대한 통제를 상실한 결과이다.[17] 연합함대를 속이기 위해 톈진을 스스로 불태웠다.[18] 원 역사에서는 다퉁을 침공한 것이 아니라 다퉁에서 명에 귀순했다. 할아버지 알탄 칸이 약혼녀인 중긴 하툰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바간나기의 귀순을 계기로 벌어진 교섭에서 명은 바간나기를 돌려보내고 알탄 칸을 순의왕으로 책봉했다.[19] 척계광은 이것이야말로 모든 병기 가운데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73장의 제목 만병지왕의 의미는 이를 일컬은 것.[20] 에스파냐 부대와 일본 무사들[21] 임금이 숭례문 문루에 올라 적을 꾸짖던 중에 (꺽정이와 짜고) 총에 맞는 자작극까지 벌였다. 임금의 용기 아닌 용기를 본 도성 백성들도 분기탱천하여 끈질기게 항전했다.[22] 에스파냐 용병대가 임금이 있는 창덕궁을 공격하기 위해 남쪽의 종묘를 범했다. 이를 예측한 꺽정이와 임금은 종묘에 신위 대신 화약을 채우고 적군이 진입하면 종묘를 폭파종묘지뢰악하게 했다.[23] 세자황태자, 대왕대비를 비롯한 왕실 구성원과 종묘의 신위들은 미리 빼돌려 개성으로 옮겨 놓았다.[24] 조선 백성들에게는 종묘의 열성조께서 진노하여 오랑캐에게 벼락을 내린 것으로 소문이 난다.[25] 파업만으로도 내각을 뒤엎을 수 있다는 인식을 깨기 위해 남경을 본보기로 진압하려 한 것이다.[26] 이미 전기, 내연기관, 전화는 보편화 될대로 보편화가 되었다.[27] 그 여파로 원 역사의 루이 16세인 루이스 오브 버번이 잉글랜드로 망명오게 된다.[28] 찰스 오브 합스버그 이후로 제임스 1세, 찰스 2세로 이어지던 튜더-합스버그 왕조의 왕통이 끊기자 스코틀랜드 왕가의 제임스 7세를 데려와 왕으로 앉힌 뒤 마리아 테레지아와 혼인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영연방 왕조는 스튜어트-합스버그 왕조이다.[29] 이때 부하들은 유대인 등 내부 불만분자를 학살하자, 끝까지 게릴라전으로 맞서자 등 원역사의 히틀러 같은 주장을 했으나 나폴레오네가 이런 주장을 모두 묵살하고 깨끗이 항복했고, 그 점이 참작되어 나폴레오네는 사형 대신 일본 다네가시마에 종신유배형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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