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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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368년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가 대도를 점령한 이후 중원 정복을 완수함에 따라 원나라의 제11대 황제인 혜종 토곤 테무르가 북쪽으로 도주한 후 몽골 고원에서 지속된 정치체로 주로 케룰렌강 일대가 중심이었으며, 중국 만리장성 부근의 거점도시들을 점거하기도 했다.
'북원'의 범주를 천원제 우스칼 칸 토구스테무르가 시해당한 1388년까지로 설정하느냐, 아니면 이후 내몽골 제부가 청나라의 태종 숭덕제에게 복속하기 전까지의 몽골 정권까지를 모두 북원으로 보느냐는 논란이 있다.[4] 전자라면 원나라의 직계 후손으로서 20여 년 동안 존재했다는 의미이고, 후자라면 250여 년 동안 존재한 수많은 몽골계 세력을 통틀어 보는 것이다. 조리그투 칸 예수데르는 몽골의 대칸 지위는 계승했지만 원나라의 황제위는 본래 세조 쿠빌라이 칸의 치세때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잇지 않았으므로, 북원은 3대 20년만에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조리그투 칸 이후에도 아리크부카계와 쿠빌라이계는 끊임없이 다퉜기에 쿠빌라이계가 완전히 끊기진 않았으며, 특히 쿠빌라이계인 다얀 칸은 칸호를 원나라에서 땄을 정도로 영향력은 남아 있었다.
원나라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1368년~1388년의 북원은 1388년 제3대 천원제 우스칼 칸 토구스테무르의 치세때 부이르 누르[5] 에서 남옥이 이끄는 명나라의 대군 150,000명에게 습격을 당했고, 결국 우스칼 칸은 카라코룸으로 탈출하다가 툴강 근처에서 예수데르에게 살해당했다. 예수데르는 과거 쿠빌라이 칸과 툴루이 내전을 벌였던 아리크부카의 후손으로, 124년만에 쿠빌라이 칸의 황통을 무너뜨리고, 원나라의 황제 지위를 포기한 후 조리그투 칸으로 즉위함으로써 대칸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 북원의 멸망 이후 몽골은 차하르, 할하, 튀메드, 우량하이 등을 중심으로 한 6부족 연맹 단위로 재편되었으며, 이들 부족들이 서로 투닥거리며 통일되기도 하고, 간간히 명나라를 침공해 제11대 세종 가정제의 치세때는 경술의 변 같은 사건을 일으켜 위세를 떨치다가 청나라 초기 만주족 정권에 순차적으로 복속되었다.
2. 북원사 연구의 어려움[편집]
이 시기의 몽골 역사는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가장 큰 원인은 사료 부족이다. 만주족은 스스로 《만문노당》과 같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남겼고, 조선과 명나라 또한 만주족과 관련하여 수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연구가 수월한 편이다.
반대로 몽골은 스스로 남긴 기록들도 대부분 소략한 편이며, 서사시의 성격을 띠고 있어 객관적인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역사서마다 정보가 다른 경우가 많은데, 몽골의 중흥군주였던 다얀 칸의 생몰년도도 자료마다 다르다. 그리고 부족국가 특유의 복잡성은 덤이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각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가장 합리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또한 몽골 내부 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의 과정에서 소실된 자료도 많다. 오이라트의 수장 에센 타이시 같은 경우, 몽골 보르지긴 황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록들을 불태워버렸다. 이 때문에 북원 시기의 전체적인 통사를 다루는 저서는 없고, 몽골 제국 이후의 세계에 대해 다루는 책에서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는 수준이다. 그나마 관련해서 자료를 찾고자 하는 경우, 남의현, 김성수, 이주엽,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 미야와키 준코(宮脇淳子)[6] 의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이러한 문제로, 이 시기 역사를 다룰 때 잘못된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호칭 문제다. 오이라트, 달단, 몽골, 서몽골, 동몽골, 북몽골, 외몽골, 남몽골, 내몽골, 할하몽골 등 아무렇게나 섞어 쓰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 몽골을 타타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일단 이것이 멸칭인 점은 넘어가고, 이것 때문에 칭기즈 칸이 멸족시킨 타타르족을 이 시기 몽골과 혼동하게 만든다는 것이 문제다.
부족들의 위치 또한 잘못 작성한 지도도 많다. 아예 없는 내용을 있는 내용처럼 잘못 서술한 것이 많은데, 이 시기 몽골과 관련해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글들은 안 보는 것이 좋다. 개요에서 올린 영상도 썩 정확하지 않다.[7] 이러한 잘못된 설명들은 이 시기 몽골의 역사에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장벽이 되고 있다.
2.1. 호칭 문제[편집]
명나라에서는 1388년 북원이 멸망해 몽골 부족 연맹으로 분리되자, '몽골'을 원래 호칭인 '몽고' 대신에 '달단'(타타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명나라와 조선에서 부르던 명칭으로, 여전히 몽골족 스스로는 '대원'이나 '몽골'로 불렀으며, 만주에 사는 여진족(후의 만주족) 역시 북원을 '튀메드 몽골' 내지는 "우브르 몽골"이라고 했다.
명나라에서 몽골을 타타르로 불렀던 것은 타타르가 야만인같은 멸칭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원래의 타타르족은 카마그 몽골족과 대대로 원수지간이었고, 결국 칭기즈 칸에 의해 멸족당하며 몽골족에 흡수되었는데, 몽골에게 있어 '타타르'란 용어는 바로 '야만인' 정도의 멸칭이었다. 몽골이 중국 대륙을 정복하자 '야만인'이란 의미로 타타르라는 단어가 중국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명나라가 성립된 이후, 몽골을 경멸하는 용어로 '타타르'를 호칭하기 시작하더니 아예 북방 유목민족 전체를 비하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8]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도 명나라에서는 타타르라고 불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북방민족을 비하해서 불렀던 오랑캐란 단어와 같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청나라에서는 '달단'(타타르)이라는 명칭이 폐기되었고, 한자 표기 역시 '달단'에서 '몽고'(몽골)로 되돌아갔다. 물론 여기서의 달단은 내몽골을 말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타타르인과는 무관하며,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와 관련이 있고,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후손들이다.
이 시기 몽골은 북원, 몽골, 달단 등으로 불렸다.
3. 역사[편집]
4. 의의[편집]
내/외몽골인과 부랴티아의 부랴트인, 그리고 칼미키야의 토르구트인까지 모두가 몽골 제국을 전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 제국이 무너진 이후 북원시대에 몽골은 크게 둘로 양분되었다. 일반적으로 몽골과 오이라트로 분리되었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쿠빌라이계에 충성하는 원(元)나라 세력과 반 쿠빌라이계 동맹인 오이라트로 볼 수 있다.
기실 양 집단은 민족적 구성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이라트 역시 원래의 오이라트 부족에 케레이트와 나이만 등의 부족들이 연합한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다.
몽골인들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집단이 있었고, 쉽사리 통일되지 않았으며 중간에는 오이라트 에센에게 권력을 내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다얀 칸 때 비로소 6개의 대부락으로 정리되었다, 이 6개의 대부락을 6투멘(6만호)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 그 구성은 좌익(동부)이 차하르, 할하, 우량하이였으며, 우익(서부)이 오르도스, 융셰부, 튀메드였다. 훗날 이들 중에서 차하르가 내몽골의 중심 부족이 되었고, 할하는 외몽골의 중심 부족으로 성장했다.
이 6부족 중 차하르부 등은 청나라에 복속되어 만•몽 연합 제국의 형태로 만주족, 즉 여진족들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가 현대 내몽골 정체성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내몽골과 달리 오늘날의 몽골국인 외몽골은 할하부 등이 전신이며, 이러한 역사가 마찬가지로 현대 외몽골 정체성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외몽골에는 몽골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남부의 부랴트인과 칼미크의 토르구트인도 포함되고, 엉뚱하게 튀르크 계통의 투바인도 포함된다.
5. 역대 지도자[편집]
5.1. 역대 황제[편집]
5.2. 북원 멸망 이후의 몽골 대칸[편집]
조리그투 칸 예수데이가 중국식 황제 칭호를 버린 후의 역대 대칸 목록이다. 대체적으로 동몽골의 칸들은 재위 시절이 평탄하지 못한 편인데, 그중에는 에센 타이시(다이온타슨다이 칸)나 다얀 칸, 알탄 칸처럼 명나라를 위협했던 칸도 있었으나, 대개 오이라트와 명나라에 시달리고 칸의 암살도 빈번했으며, 골육상쟁은 기본이었다.[10] 다이온타슨다이 칸 에센 타이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몽골 제국의 황족이었던 보르지긴씨가 대칸의 지위를 이어갔고, 에제이가 청나라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귀순하면서 멸망했다.
천원제 이후의 몽골 대칸 가계는 상당히 불확실하게 기록된다.
5.3. 역대 지농(조논)[편집]
지농('친왕')은 본래 대칸이 내려주는 귀족 작위 같은 것이었지만 다얀 칸 이후로는 우익(서부) 3투멘을 다스리는 지배자를 가리켰다. 튀메드부의 수장 알탄 칸의 활동으로 군빌리크 이후의 지농들은 실질적으로 오르도스부만 지배했다. 역대 지농은 다음과 같다.
이후로도 1949년까지 지농의 자리는 유지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힘은 없고, 명목상의 지위에 불과했다. 이후의 지농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중국어 위키 페이지를 참고할 것.
6. 대외관계[편집]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명나라-몽골 관계 문서를 참고할 것.
북원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자신들을 초원으로 쫓아낸 원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천원제 시절까지는 다시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명나라에 대한 지속적인 침공을 진행했다. 하지만 1388년 조리그투 칸의 즉위 이후로는 중원과의 접점이 옅어져서 중원 회복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이후 에센 타이시와 다얀 칸의 치세때 잠깐 이 의식이 부활했다.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 같은 경우, 몽골의 칸이 중원을 정복하기를 고대했다고 직접 말했으며, 명나라 정복을 위해 여진족과 조선에 물자를 공급하라는 칙서를 내리기도 했다. 몽골의 다얀 칸 또한 스스로 칸호에 '다얀'(대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명나라에 보낸 칙서에는 북원을 북조, 명나라를 남조라 칭했다. 하지만 중원 회복에 대한 의식은 두 사람에게만 보여진다. 아마 이 두 사람이 유일하게 북원을 통합하고 안정시킨 군주들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칸들은 내부의 적, 오이라트와 싸우느라 중원 회복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몽골족이 관심을 가진 문제는 무역 문제였다. 초원에 사는 유목민족은 항상 식량과 물자 문제에 시달렸는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조선과의 교류는 거의 없는 것에 가까웠다. 이전 고려의 왕실인 개성 왕씨는 원나라의 황금씨족과 혼인관계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교류를 가질 수 있었으나, 조선의 왕실인 전주 이씨는 원나라 보르지긴 황실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집안이었다. 조선은 몽골 관련 소식을 대부분 명나라나 여진족으로부터 얻었다. 여기서 만약 몽골의 움직임이 심창치 않다 싶으면 북방의 방어를 강화했다. 하지만 몽골과 조선 사이에는 명나라와 여진족이라는 방어막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몽골의 침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명나라가 몽골에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생각하면 조선이 얼마나 평화롭게 지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때문에 조선은 200년동안 간간히 소규모의 여진족과 왜구의 약탈을 받으면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모굴리스탄 칸국의 경우, 서로 친족이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양국은 가급적 전쟁을 삼갔다. 튀메드부의 알탄 칸이 사신을 보내 칭기즈 칸부터 지금의 모굴리스탄 칸까지의 계보를 읊게 하여 모굴리스탄 칸을 감동시켰다는 일화나, 어떤 모굴리스탄 칸이 알탄 칸에게 나라를 합치자고 제안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도 양자 사이의 자식들이 이슬람식 교육을 받게 한다는 조건으로 모굴리스탄 칸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카라델 칸국(하미 칸국)은 다른 대우를 받았는데 툭하면 에센 타이시의 공격을 받았고, 몽골의 유력자들도 몽골 고원에서 쫓겨나면 하미로 도망가는 등 동네북 취급을 받았다.
북원(1368년~1388년/1635년) 말기에 가서 루스 차르국(1547년~1721년)과 접촉하게 되었다. 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의 전신)은 몽골족도 건드려봤지만 이전까지의 북방 소수민족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부랴티아족만 정복하는 수준에서 단념했다. 이는 당시 루스의 동방원정이 주력부대가 아닌 코사크 부대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 차르국과 주로 접촉한 몽골 부족은 할하 계통 부족이었다. 이들은 루스 차르국에 준가르(1653년~1755년)를 함께 공격하자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7. 기타[편집]
- 북원은 쿠빌라이 칸 황통과 아리크부카 황통이 대칸의 자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경쟁하다가 다얀 칸의 치세 이후 쿠빌라이 황통이 다시 대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으로 유입된 북원 몽골인들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간간히 보인다. 명나라의 영향으로 달단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들은 조선에 자리를 잡고 버터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고 한다. 버터를 수유라고 했으므로 이들이 머무르는 곳을 수유치라고 불렀다. 그런데 수유치 주민은 병역이 면제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달단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 가구에 장정만 수십 명에 이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수유치를 없애고 이들에게 버터를 만드는 일 말고 새로운 생업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백정이었다.
- 무협소설에서는 새외무림 세력으로 등장하며, 명나라의 건국 이후 몽골 초원에서 원나라의 재건을 꿈꾸며 음모를 꾸미는 흑막 집단으로 자주 등장한다. 원말명초 몽골족과 한족간의 투쟁을 주무대로 하는 《의천도룡기》에서는 몽골 황족인 조민이 북원 지역으로 낙향하자, 한족 반군의 지도자였던 장무기가 이를 따라가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 시나리오 4에서는 군주인 혜종 토곤 테무르와 아들인 소종 아유르시리다르가 카라코룸으로 피신한 이후의 북원이 나온다. 다른 시나리오에서의 몽골 진영에 비하면 암울하고 둘의 수명이 짧은 편이라 초기부터 자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원나라 최후의 명장인 코케 테무르가 있고, 몽골기병과 화포병을 뽑을 수 있으며 개발할 수 있는 땅도 많고 컴퓨터가 조종하는 명나라는 북원보다 고려와 일본을 자주 공격하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진 않다. 등용 특기가 있는 코케 테무르를 간첩 유닛으로 고려에 보내 초기 충성도가 낮은 이성계를 영입해도 좋다.
8. 관련문서[편집]
9. 둘러보기[편집]
[1] 중원의 명나라 바로 북쪽의 넓은 지대가 북원이며, 북원 서쪽의 세력이 오이라트이고, 동쪽 만주족의 국가는 릭단 칸을 쓰러뜨리고 북원을 정복하는 후금이다.[2] 카라코룸은 1380년 명나라의 북벌 때 완전히 약탈당했다[3] 내몽골 지역[4] 권용철(2021), <원대 말기~北元의 重臣 카라장(哈剌章) 小考>, 《史叢》 104.[5] 부이르 호수. 현재의 내몽골 북동부 후룬부이르 시 부근이다. '누르'는 '노르' 또는 '나우르'라고도 하며, '호수'라는 뜻이다.[6] 재밌는 점은 이 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이다.[7] 우량카이(여기서는 우량카이 투멘이 아닌 우량카이 3위를 가리킴)는 명성조 영락제의 방어선 남하로 영락제 시기쯤 되면 만리장성 코앞까지 내려온 상황이다. 튀메드부는 청해가 아니라 고비 사막 이남 인산산맥 근처가 중심지였다. 이브라힘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청해를 차지했는데 그것 때문에 청해 지역을 튀메드부의 영역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오이라트의 영역도 잘못되었는데, 오이라트는 에센 타이시 때 발하쉬호까지 진출하긴 했지만 잠깐 뿐이었고, 발하쉬호까지 간 것은 할하몽골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났을 때였다. 그리고 발하쉬호 위쪽이 아니라 동남쪽 부근이 오이라트 땅이었다.[8] 이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얘 러시아를 비하할 때, 꺼내는 말 중 하나가 타타르이다.[9] 몽골 초원으로 이동해 북원이 성립된 시기는 1368년으로 북원 황제로는 2년 동안 제위했다. 물론 북원과 원은 북송과 남송처럼 같은 나라가 이어진 것이기에 대수로는 동일하게 11대가 된다.[10] 이는 유목제국이라면 누구나 겪은 문제로 확고한 계승법이 없거나, 힘이 우선시되다보니 지도자가 휙휙 바뀌기 일쑤였다. 이미 북원도 전신격인 원나라 시절 원성종 테무르 카안 사후 원혜종 토곤테무르 카안의 즉위때까지 26년 사이에 즉위한 대칸이 10명이나 되었다.[11] 당시 가정제가 만력제 못지 않은 태업군주였던 것도 한 몫 했다.[12] 동방 3왕가 중 옷치긴 왕가의 요왕(遼王)은 명태조 주원장과 타협한 끝에 명나라 아래서 만주에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여, 올량합 3위로 불린다.[13] 청나라가 내몽골에서 북원의 옥새를 얻어 몽골 제국의 계승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