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애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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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후
혜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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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혜왕후 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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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왕후 오씨
3
신명왕후 유씨
4
신정왕후 황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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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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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평왕후 김씨
의종 후
명종 후
신종 후
희종 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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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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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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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정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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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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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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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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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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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비 노씨




헌애왕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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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경종의 제3왕후
헌애왕후 | 獻哀王后


고려 목종의 모후
헌애왕태후 | 獻哀王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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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종의 왕녀
왕녀 황보씨 | 王女 皇甫氏


출생
964년
고려 황도 개주
(現 경기도 개성시)
사망
1029년 1월 20일 (향년 66세)
고려 개경 숭덕궁
(現 경기도 개성시)
능묘
유릉(幽陵)
재위기간
고려 제3왕후
979년 이후 ~ 981년 8월 13일
고려 왕태후
997년 11월 29일 ~ 1009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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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부계 개성 왕씨
모계 황주 황보씨[1]
부모
부왕 대종
모후 선의왕후 류씨[2]
형제자매
3남 2녀 중 장녀 추정 [ 펼치기 · 접기 ]
효덕태자(孝德太子)
성종
경장태자(孝德太子)
헌애왕후
헌정왕후[1]

배우자
경종
자녀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목종(穆宗, 980 ~ 1009)[1]
차남 - 미상(1003 ~ 1009)[2]

종교
불교
관저
숭덕궁 (崇德宮)
천추전(千秋殿)
→ 장생전(長生殿)[3]
→ 황주택(黃州宅)[4]
→ 숭덕궁(崇德宮)
존호
응천계성정덕왕태후
(應天啓聖靜德王太后)
시호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
별호
천추태후(千秋太后)

1. 개요
2. 생애
2.1. 고려의 공주에서 왕비가 되다
2.2. 유일하게 아들을 낳다
2.3. 과부가 되다
2.4. 김치양과 사랑에 빠지다
2.5. 섭정 태후가 되다
2.6. 왕위 계승을 노리다
2.7. 강조의 난과 말년
3. 가족관계
4. 평가
4.1. 불교 정책
5. 기타
6. 대중매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헌애왕후는 고려 왕조의 창업 군주 태조 왕건의 손녀, 고려 제5대 국왕인 경종의 제3비 그리고 제6대 국왕인 성종의 여동생, 제7대 국왕인 목종의 모후이다. 더불어 고려 제8대 국왕 현종의 이모이자 사촌누나이다.

생전 아들 목종에게 받은 공식 존호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 그러나 비공식 존호로 관저였던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했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

사후 제8대 국왕 현종이 올린 시호는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이다. 남편 경종과 헌(獻)자 돌림 시호를 받았으며[1] 시호를 줄여 '헌애왕후(獻哀王后)'라고도 한다.


2. 생애[편집]



2.1. 고려의 공주에서 왕비가 되다[편집]


헌애왕후는 964년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 왕욱선의왕후 류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대종과 어머니인 선의왕후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2]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그리고 경종 즉위후에 여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사촌인 경종과 결혼하게 된다.[3] 경종이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를 제3비, 제4비로 맞아들인 이유는 황주의 호족인 황보씨 가문의 영향력이 그때까지도 막강했기 때문이다.


2.2. 유일하게 아들을 낳다[편집]


경종에게는 이미 제1비 헌숙왕후, 제2비 헌의왕후[4], 그리고 후궁으로 대명궁부인[5]이 있었다.[6] 그런데 헌애왕후만이 경종의 유일한 후손인 아들 목종을 낳았다.


2.3. 과부가 되다[편집]


목종이 태어난지 1년 만인 981년 6월에 경종이 붕어하자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의 동복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된다. 과부가 된 뒤 헌애왕후는 어린 아들과 함께 숭덕궁(崇德宮)에 머물렀는데 이때 동주(洞州) 사람으로 외족(外族)[7]김치양[8]을 만난다. 헌애왕후는 황주 황보씨[9]이니 김치양이 외족이라는 것은 황주 황보씨와 동주 김씨 사이에 혼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치양이 스님 모습이었다는 것을 보아 화엄종(華嚴宗) 승려로 추정되는데 헌애왕후가 불교를 적극 지원했다는 점에서 불교 세력 중에 화엄종의 힘을 빌리려던 것으로 보인다.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는 화엄종을 지원했으며 1006년 헌애왕후가 발원한 경전의 초교와 중교를 화엄종 승려가 맡았기 때문이다.


2.4. 김치양과 사랑에 빠지다[편집]


당시 헌애왕후가 바라던 것은 당연히 선왕 경종과 자신의 아들인 목종의 즉위였으며 김치양을 통해 목종의 즉위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치양의 유배에 대해서는 둘 사이에 추잡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데 고려 초기 왕족 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고려할 때 왕위를 노리던 왕족 세력들의 영향으로 보인다. 헌애왕후가 아이를 가진 것은 아들인 목종 즉위 이후라는 점과 고려 초기 왕실의 권력 쟁탈전을 고려할 때 이 때는 처신을 조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990년 목종은 '개령군'으로 봉해졌으며 12월 책봉 의례 때 “성종은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를 도와라.”는 교서를 내려는데 이는 목종이 성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997년 성종이 중병에 걸리자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으며 헌애왕후의 아들이 목종으로 즉위하면서 '응천개성정덕왕태후(應天啟聖靜德王太后)'로 높여지지만 천추전(千秋殿)[10]에 거처했다고 하여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


2.5. 섭정 태후가 되다[편집]


목종이 즉위하면서 김치양은 중앙 정계에 뛰어들었는데 1006년 만들어진 대보적경(大寶積經) 사경 발문에는 김치양의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판삼사(判三司)라 적혀 있다. 상서우복야는 상서성(尙書省)을 관할하며 삼사의 판사, 사는 전곡의 출납 회계를 관할하는 것으로 김치양은 행정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훗날 강조의 정변 때 김치양과 함께 죽은 사람들은 김치양의 친당(親黨)으로 보인다. 유행간[11]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대량원군의 후계자 선정을 반대했다. 천추궁사(千秋宮司)를 맡은 문인위는 황주 인근 장연현(長淵縣) 출신이다. 이주정은 헌애왕후의 친속[12]으로 목종 12년에 유배되었는데 전중감(殿中監)이었으며 마찬가지로 고려 계통 패서호족으로 추정된다. 상서좌복야 이주헌은 동주 토산현 출신으로 삼사의 직임을 맡았는데 김치양이 동주 출신으로 삼사사를 겸한 걸 고려하면 연고로 가까워진 것으로 보이며 고속으로 승진한 것을 보아 목종 즉위의 공신으로 추정된다. 동주 토산현 출신인 안소광(安紹光)은 연고를 통해 접점이 생긴 것으로 보이며 무술이 뛰어나고 왕을 추대한 공이 있다는 기록을 보아 근위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휘원(宣徽院)의 판관이었는데 선휘원은 내료(內僚)를 총괄하고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관부다. 황보유의국왕의 측근 보좌 기구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헌애왕후 집안인 황주 황보씨라 추정할 수 있다. 헌애왕후의 친당은 모두 고려 계통 패서호족이었으며 혈통 또는 지역적 연고를 가진 자들이었다. 목종 즉위 이후 헌애왕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한 명 낳았다.


2.6. 왕위 계승을 노리다[편집]


1009년 정월 임오(壬午)일[13]에 천추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헌애왕후는 거처를 장생전(長生殿)으로 옮기고 목종은 병을 얻어 정무를 보지 못했다. 이때 김치양이 헌애왕후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14]을 목종의 후계자로 책봉하려다 왕위를 넘본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15] 김치양은 유충정에게 뇌물을 주면서 도와달라고 했지만 유충정은 거절한다.


2.7. 강조의 난과 말년[편집]


유충정은 곧바로 목종에게 봉서를 올려 '김치양이 왕위를 엿보고 있으며 심복을 널리 벌려놓았다'라고 알린다. 이에 목종은 강조를 불러들이는데 오히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을 포함한 7명은 죽고 나머지는 귀양을 가게된다. 헌애왕후는 목종과 함께 폐위되었으며 아들 목종과 함께 충주로 가던 도중[16] 목종은 적성현에서 강조가 보낸 부하들에 의해 시해된다.

결국 헌애왕후는 홀로 황주(黃州)로 갔으며 그곳에서 21년을 생활하다 말년에 개경으로 돌아와 1029년 숭덕궁에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무덤은 개성에 있는 유릉이다.[17] 다만, 목종과 달리 헌애왕후는 어떠한 위협도 없이 말년은 조용히 살았던 듯하다.


3. 가족관계[편집]


  • 친할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 고려 태조 왕건
  • 친할머니: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 외할머니: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 아버지: 대종 선경대왕 왕욱
    • 어머니: 선의왕후 류씨
      • 친오빠: 고려 제6대 왕 성종
      • 여동생:[18]고려 제8대 왕 현종의 모후인 헌정왕후

태조의 손녀였음에도 할머니의 성 황보씨(皇甫氏)를 따랐다. 초기 고려 왕실은 남매간 근친혼[19]을 하면서도 일단 명목상은 같은 성씨의 결합을 피하려고 왕족 여성은 왕씨가 아닌 어머니나 할머니 쪽 성씨를 따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왕족들의 모계, 즉 각 지방에 근거한 유력 호족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효과도 있다.

경종은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과 신정왕후의 딸의 아들이고,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신정왕후의 아들과 정덕왕후의 딸의 딸들이므로 경종과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의 혼인은 친사촌(삼촌 광종)/고종사촌(고모 대목왕후)/외사촌(외삼촌 광종)간의 혼인이다. 게다가 부모끼리도 다 이복이 아니라 경종의 어머니인 대목왕후랑 헌애왕후의 아버지인 대종은 친남매 간이었다. 양쪽 사돈 안팎 어른들 모두 형제자매에다가 2명은 아예 친남매였던 셈.


4. 평가[편집]



헌애왕후와 아들인 목종의 위신은 바로 다음 국왕인 현종의 정통성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조선시대 <고려사> 편찬 이전, 당대 고려가 남긴 기록에서부터 곡필이 있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고려사> 등의 사서에서는 헌애왕후를 김치양과 사통하여 왕실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당시 고려의 도덕을 무시하고 조선의 성리학적 관점과 이전 왕조를 폄훼하려는 사관에 기초해 이루어진 왜곡된 평가라는 비판이 있다. 최근에는 팔관회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유학의 정치 이념을 강조했던 성종에 맞서 전통 사상을 강조하고 서경을 중시하는 등 북진 정책을 수호하려 했던 여걸로 재평가하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유학은 사대주의, 전통 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학계의 비판이 존재한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현종은 10대를 막 넘긴 어린 나이에도 이미 왕위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매번 헌애왕후로부터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복수귀로서 가장 좋은 것이 권력을 장악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까먹은 듯 헌애왕후를 두둔한 것을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물론, 현종을 강조의 정변으로 원치 않게 즉위한 무고한 이로 포장해야 하니 목종은 어머니 헌애왕후에 의해 허수아비가 된 유약한 임금으로, 헌애왕후는 불타는 권력욕으로 아들인 목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외간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며 온갖 악행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다 최후에는 아들 목종을 폐위당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몬 원인이 된 사악한 악녀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20] 유교적 이념을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여자가 정치에 참여해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 외간 남자와 사통했다는 점으로 인해 부정적 시선이 더욱 강해졌다. 따라서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헌애왕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든데 정도전의 경우 "헌애왕후가 음란해 김치양과 간통해 아들을 낳았다. 이 애초부터 이것을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해 결국 모자가 모두 재앙을 입었고 사직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며 비판했고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아래와 같이 비판하였다.

지어미로서 음탕한 행동이 있거나 신하로서 반역하는 뜻이 있다면 이는 강상을 무너뜨리고 천리를 어지럽히므로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인 것이다. 황보씨가 김치양과 간통하고서 어찌 태후의 호를 가질 것인가?

《동사강목》 현종 20년(1029)


현대에 들어 그녀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로 목종 재위 도중의 업적을 섭정을 맡은 헌애왕후의 공으로 돌려야 된다는 말도 나오나 목종은 재위 초기부터 스스로 친정을 했고 재위 중반까지 보여준 정치적 행보와 업적은 상당한 수준으로 여요전쟁 승리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 목종이 헌애왕후에 의해 휘둘리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헌애왕후가 목종을 압도하는 권력을 쥐었다는 통념을 부정하기 이전에 목종이 유약한 이었다는 통념부터 극복해야 한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목종과 헌애왕후의 권력 구도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애초 현종의 암살을 여러차례 시도한 자신의 모친 헌애왕후를 막는 것에만 급급했던 것이 목종의 실책이다. 즉, 자신의 왕권 유지를 위해 다다익선으로 모계의 지원을 받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애초 세력이 약해 왕권에 위협이 되지 못하던 황족에 대한 암살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지 못해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1. 불교 정책[편집]


헌애왕후의 본관인 황주는 화엄종을 믿었고 헌애왕후의 아버지 대종은 선종(禪宗) 광자대사를 흠모해 그 제자가 될 정도로 선종을 선호했고 황주 승려 균여는 화엄종을 중심으로 유가종(瑜伽宗)을 포섭하기를 원했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해 팔관회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불교와 토속 신앙을 억제했지만 최승로 사후 전통 중심으로 회귀했다. 부모의 기일에 사원에서 분향하고 서경에 종종 행차해 재제(齋祭)를 지냈다. 성종 9년 12월 한언공에게 요청해 송 황제에게서 대장경 2500권을 받았다. 성종 10년 4월 귀국해 대장경을 바치자 승려를 초빙하고 사면령을 내렸으며 목종에게 양위한 뒤 내천왕사로 옮겨 38살에 사망한다. 이런 후기 성종의 종교 정책은 헌애왕후의 뜻도 일정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태조와 정종에서 시작된 서경 중시 정책은 성종 후반부터 시작되어 목종 때 더욱 강화되었다. 목종 원년 7월 호경(鎬京)으로 개칭하고 호경에 4회 행차해 재제를 지냈는데 호경에서 팔관회가 열렸을 가능성이 있다. 목종 12년 개경 정변 당시 왕은 상정전(詳政殿)에서 연등회를 연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부활했음을 보여준다.

목종 2년 7월 진관사(眞觀寺)가 성남(城南)에 헌애왕후의 원찰, 3년 10월 숭교사(崇敎寺)가 목종의 원찰로 창건되고 10년 2월 진관사 9층탑이 건립되었다. 이는 선덕여왕삼국통일을 기원해 만든 황룡사 9층탑과 왕건이 후삼국통일을 기원해 평양성에 만든 9층탑을 헌애왕후가 이어받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이상의 나라를 만들고자 한 염원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진관사는 화엄종, 숭교사는 유가종(법상종) 계열이었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목종 9년 7월 《대보적경》(大寶積經)의 글씨를 금으로 필사한 고려국 금자대장경 대보적경을 편찬했다.고려 말 왜구가 약탈해 일본에 남아있는데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발원했다는 내용이 있다. 연월 글 쓴 사람과 함께 초판을 쓴 승려는 화엄종이었다. 헌애왕후는 ‘보살계 제자’니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금자대장경을 베꼈다는 것으로 보아 권32뿐만 아니라 대보적경 전부와 다른 사본도 필사한 듯 보인다. 대보적경은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하나로 묶은 경전으로 49첩 1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보적경은 밀교사상이 농후해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밀교적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아있는 사본인 대보적경 권32가 대보적경 제11출현광명회(권30~34)의 일부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서방정토와 아미타불 신앙은 물론 반야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신앙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대보적경에는 여자 신도의 신앙에 대한 내용도 많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대보적경 사본은 목종 5년 무렵에 수태해 아기의 건강한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산후에는 아기의 성장과 장래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목종 10년 개경 총지사에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이 간행되었다. 삼세여래의 전신사리가 모두 보협인다라니에 함축되어 있으니 이를 간직한 보협인탑을 만들면 모든 부처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는 총지사 주지가 보협인다라니경을 불탑 안에 안치해 공양하기 위해 보협인경의 사본을 제작하고 찍은 것인데 이 경전판의 제작은 초조대장경의 탄생에 기여했다. 총지사에서 밀교 보협인경이 대량으로 간행됨에 따라 많은 불탑에 안치되었을 것이다. 밀교의 총지사는 고아종이 화엄 귀법사를 창건했을 때 그 소속의 총지원이었다. 이 절은 목종 때 원이 아니라 사로도 불렸다.

목종 10년 창건된 진관사 9층탑에도 보협인경이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총지사는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홍철의 보현인경 제작은 헌애왕후 내지 목종의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헌애왕후는 보협인경과 보협인탑 신앙, 불탑신앙, 다라니신앙, 밀교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때 송에서 대장경이 전래되면서 성종 후반기와 목종 대에 대장경 필사가 활기를 띄었으니 현종 이전에 이미 초조대장경 각판사업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달원 원종대사 비문에 따르면 광종도 22년 10월 원화전(元和殿)에서 대장경을 숭배했다고 한다.

헌애왕후는 본인 원찰인 진관사의 종파가 화엄종이고 발원해 제작한 대보적경을 화엄종 승려가 맡은 것으로 보아 화엄종 신도로 보인다. 또 목종의 원찰인 숭교사가 유가종이고 대보적경 일부에 미륵신앙이 있는 점과 김치양의 시왕신앙이 지장보살과 관련이 있고 지장보살은 유가종과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유가종 내지는 미륵보살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자처하면서도 화엄종의 지지를 받은 측천무후의 불교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5. 기타[편집]


  • 경종 사후 헌애왕후의 관저는 '숭덕궁(崇德宮)'이었다. 아들 목종은 즉위 전, 성종에게 '숭덕궁 적자(崇德宮 嫡子)'로 불렸다. 이후 태후가 된 헌애왕후의 새 관저는 그 유명한 본궐 내 천추전(千秋殿)이었다. 헌애왕후가 천추전에서 김치양과 대놓고 사통하여 김치양의 관저로 불리기도 했다. 강조의 정변 이후 자신의 고향인 황주[21]로 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숭덕궁(崇德宮)에서 죽었다. 숭덕궁에서 출발해 숭덕궁에서 죽은 것이다.

  • 최사위 묘지명엔 여후(呂后)란 명칭으로 등장한다. 헌애왕후를 한고조 유방의 황후인 여태후에 비유한 것으로 헌애왕후를 비난하려고 한 것이다.

  •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따르면 헌애왕후의 관저는 먼 후손인 인종에 의해 다시 언급되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자겸의 관저를 정해줄 때 부의 이름을 숭덕부(崇德府)로 한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헌애왕후의 관저는 김치양의 관저로 취급되기도 했는데 인종이 싫어했던 이자겸을 엿먹일려고 일부러 안좋은 유래를 가진 이름을 준 것이다. 정작 이자겸은 이를 몰랐는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인종과 같이 왕실 내부의 역사를 속속히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인종이 이자겸의 사병을 숭덕부군(崇德府軍)이라고 부른 기록이 남아있다.

  •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어머니 황보씨를 높여 왕태후(王太后)로 삼고 함께 청정했다."고 나오는데 즉위 당시 목종의 나이가 18세였다는 점과 초기 목종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점에서 헌애왕후가 섭정이 아닌 청정을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청정은 임금의 뒤에서 발을 내리고(수렴)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청정) 수렴청정(垂簾聽政), 동궁(東宮)이 대신 듣는 대리청정(代理聽政)과 같은 명칭으로 섭정(攝政)과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섭정 제도는 여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를 한데서 비롯되었는데 조회에 참석하고 황제의 명령과 같이 황태후의 명령을 제(制)라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임조칭제는 고려 헌종의 임조칭제를 맡았던 고려시대 모후의 섭정을 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명분부터 모후가 임금을 대신하는 임조칭제와 선왕의 후비로서 임금을 보좌하는 것으로 달랐고 임금과 청정 대상이 특정 날짜에 동행해 조언하거나 반문하는 형식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막후정치를 보면 알겠지만 후비의 청정은 정전에 가는 일은 드물고 평시에는 신하들과 임금의 논의를 듣고 결정하거나 정전(正殿)과 자전(慈殿)을 오가며 하인이나 문서를 통해 결정하는 막후정치였다. 천추전에서 청정을 했다는 것은 임조칭제보다 수렴청정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수렴청정의 경우 전면에 나서는게 아니라 자신의 거처에서 막후정치를 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헌애왕후는 정사에 직접 관여한 것 치고는 의외로 세력이 매우 약한 편이었는데, 이에 섭정이 아닌 어머니로서 왕을 도와주고 이런저런 사회 활동을 한 수준이 아니였겠냐는 소리이다.


6. 대중매체[편집]



6.1. 드라마[편집]



6.1.1. 강감찬[편집]


  • 1973년 KBS 일일 사극드라마 《강감찬》에서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22]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김치양과 간통을 하고 목종에게 강감찬과 서희를 거세시키자는 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6.1.2. 무인시대[편집]


2003년 KBS1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고려 후대의 시대를 다룬 만큼 언급으로만 나온다. 공예태후가 무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왕위 계승을 방해하자 이의방이나 정중부가 직접 찾아와 "천추태후처럼 왕실을 농단할 생각이냐"며 윽박을 질렀다. 공예태후는 이 말을 듣고 분노하지만 천추태후의 폐단을 결국 무시못해 한 발 물러서고 만다.


6.1.3. 천추태후[편집]


2009년 KBS2 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배우 김소은이 연기한 어린 시절(2화~8화) 헌애왕후의 모습은 츤데레에 가까워서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으며[23] 배우 채시라가 연기한 성인 시절은 고려를 지키기 위해 거란과 맞서 싸우고 정치 전면에 나서는 등 의로운 모습이 돋보인다. 섭정을 나선 이후 아들 목종의 업적을 거의 다 가져온 데다 김치양과 애인 사이가 된 후에도 매우 떳떳했는데 아들이 신경 쓰인 건지 "목종이 정 싫어한다면 김치양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현종의 머리를 깎아서 로 보냈는데 "미워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조카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24]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자는 각종 유혹도 번번히 거절했으며 김치양반란강조의 정변때에 어쩔 수 없이 김치양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는 했지만 극 중 모습을 보면 결국 끝까지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마냥 천사처럼 착하다가 중반에 약간 악해지는 모습을 보이자 시청자들이 주인공을 악역으로 만들지 말라고 반발했다는 말도 있는데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태후 시절에도 나라를 잘 다스렸으며 비록 김치양강조의 분쟁때문에 나라의 혼란이라는 결과를 초래했으나 그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왕권을 차기 국왕인 현종에게 넘긴 후 말년의 에피소드가 다뤄진다.


6.1.4. 고려 거란 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천추태후(고려 거란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23년 KBS2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이민영이 맡아 강조의 정변 사이 초반에만 등장한다. 천추태후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당연히 노골적으로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25]을 차기 후계자로 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아들 목종과도 대립하는 양상이 나온다. 심지어 현종의 어린 시절에 출가를 명령한 것 역시 천추태후의 짓이었으며 아들을 대신해 관료들을 궐내로 불러 들여 김치양과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려는 행보를 보인다.


6.2. 예능[편집]


2016년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천추태후를 주제로 다뤘을 때 당시에는 천추태후를 다룬 사극이 드라마 《천추태후》 밖에 없어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드라마 내용 중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부분들만 편집해서 보여주었다. 출연진들도 드라마의 막장성을 아는지 은연 중에 "무슨 고려를 부흥시키려던 영웅까지는 아니지만..."이라는 언급을 했다. 그래도 마냥 평면적인 악녀로만 볼 수도 없고 나름대로 추구한 사회 모습이나[26] 야심도 있었던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의미로서의 권력 기반이 어디인지를 까먹은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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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종 獻화대왕과 獻애왕태후[2] 헌애왕후와 성종의 아버지인 대종의 경우 969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때 헌애왕후의 나이는 고작 5살이었다.[3] 언니인 헌애왕후의 나이와 동생인 목종의 출생년도를 감안하면 978년이나 979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4] 문원대왕문혜왕후(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의 딸)의 딸[5] 원장태자(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의 아들)과 흥방궁주(태조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의 딸)의 딸[6] 참고로 경종의 부인 5명 중 4명이 모두 경종의 사촌이다. 헌숙왕후가 경순왕의 딸인데, 만약 어머니가 낙랑공주라면 경종의 부인 5명이 전부 사촌이 된다(...).[7] 외족은 어머니의 일족으로 어머니의 부모, 형제자매와 배우자, 어머니 형제자매의 자녀가 여기에 해당한다.[8] 동주 출신에 김씨(金氏)인 것을 보아 태조의 후궁 대서원부인소서원부인의 아버지 김행파(金行波)의 후손이자 동주 김씨로 추정되고 있다. 동주 김씨는 관향이 똑같이 황해도 서흥군서흥 김씨와 헷갈리기도 하는데 이쪽은 경순왕계인 김보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고 그 반면 동주 김씨는 김행파가 왕건에게 처음으로 김씨를 사성받아 시작한 가문이다.[9] 목종이 죽은 후 내려간 곳도 어머니의 고향인 정주가 아닌 할머니의 고향인 황주였다.[10] 고려 초기 문원대왕문혜왕후의 아들인 천추전군(千秋殿君)과 혼인한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녀이자 성종 제1비 문덕왕후 유씨의 언니인 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이 거처한 곳이다.[11] 고려 초기 중앙에서 활동하던 유씨는 평주 뿐이기에 헌애왕후의 고향 황주(黃州)나 김치양의 집안 동주(洞州)와 같은 패서호족(浿西豪族) 평주 유씨(平州 庾氏)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고려 계통 패서호족 간의 연고로 뭉친 것이다.[12] 촌수가 가까운 일가[13] 16일[14]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아들은 부계가 김씨이므로 왕조 교체를 기도한 것이나 다름없다.[15] 일단 헌애왕후는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의 후비들에 대한 열전 중 헌애왕후에 대한 기록에서도 김치양이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고만 나올 뿐 헌애왕후의 동조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헌애왕후에 대한 평가가 결코 좋을 리 없는 조선시대에 고려사가 편찬된 것을 감안했을 때, 이렇게까지 언급이 없다면 사실상 헌애왕후는 연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16] 고려사에 보면 목종은 폐위돼 양국공이 된 후 유배나 귀양을 간 게 아니라 시골로 돌아가 늙는 것을 원한다하여 자진해서 충주로 가려했다.[17] 참고로, 유릉에서 유(幽)라는 시호는 상당히 좋지 않은 단어로써, 헌애왕후에 대한 후손들의 평가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幽)라는 시호의 뜻은 動察難常(동찰난상)으로 '나라가 크게 어지럽다'라는 뜻이다.[18] 헌애왕후의 언니이자 성종의 누나일 확률도 있다. 현화사비에 나오는 구절 成宗大王之次姉也에 손위 누이 자(姉)가 있어 풀이를 하면 성종대왕의 둘째 누나다. 또 고려사 왕비 열전을 보면 왕비의 혼인날이 아닌 후사나 중요도에 따라 실었기 때문에 경종 왕비 열전에 헌애왕후 다음으로 4번째에 실렸다 하여 헌정왕후를 손아래로 볼 수도 없다. 다만 오늘날 누나의 남편을 자형(姉兄)이 아니라 손아래 누이 매(妹)자를 써서 매형(妹兄)이라 한다던가 누나나 여동생 상관없이 남매(男妹)라고 하는 것을 보면 손위 누이 자(姉)를 그냥 여자 형제 단순히 누이 의미로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19] 특히 왕족 여성의 경우엔 전부 근친혼을 했는데 고귀한 혈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본 목적에다 태조의 후손들 중엔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많았던 탓이다. 기록에 남겨진 태조의 공식적인 34명 자식들 중 딸은 9명 뿐이고 나머지 25명은 모두 아들이다.[20] 하지만 정작 현종도 혼외 사통으로 인해 태어났고, 조선시대 이전의 한반도 역사 기록에서 여성의 재혼이나 사통으로 인해 아버지가 다른 자식들의 출산에 대한 흔적은 꽤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종의 출생은 당대 관점에서도 현종의 아버지가 유배를 떠나야 했을 정도로 비난받을 짓이긴 했다.[21] 현 황해도 황주[22] 당시에는 필름을 아끼기 위해서 방영 후 다른 촬영에 재사용했다.[23] 아역 시절이 시청률도 높은 편이었다.[24] 사실 누구로부터 보호하느냐 하면 그것부터 웃기다. 신혈사의 스님들은 헌애왕후로부터 현종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승방 지하 땅굴도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25] 이름은 현이다.[26] 신라 말기 신흥 유학 세력이 내세운 유교적 질서의 사회와 대비되는 개국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고려 본연의 사회를 추구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