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탈북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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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북 과정에 따른 구분
2. 탈북 경로
2.1. 중국 + 제3국 루트
2.1.1. 태국 경유
2.1.2. 몽골 경유
2.1.3. 기타 동남아 국가
2.2. 러시아 루트
2.3. 해외 주재 중 탈북
2.4. 전면돌파 휴전선/NLL 루트
2.4.1. 휴전선 루트 귀순 사례
2.5. 해상 탈북
2.6. 전투기
3. 기타


탈북 경로들에 대해 다룬다.


1. 탈북 과정에 따른 구분[편집]


북한이탈주민들은 크게 탈북 과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뉘는데, 먼저 탈북한 가족이나 인권단체, 기독교 선교사들이 비용을 주고 알선한 브로커가 미리 마련한 운송수단과 루트를 이용해 중국으로 넘어오자마자 중국 대륙을 짧은 시간 내에 횡단하여 태국 이민수용소를 거쳐 바로 한국으로 입국하는 '직통생'과 아무 연줄없이 중국에서 길게는 몇년이나 체류하다 브로커와 선이 닿아 들어오는 사람으로 나뉜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주로 어선을 이용해서 탈북했다. 강원도 주문해변에서는 1948년 기준 하루 평균 50여명이 탈북해왔다고 한다.[1][(제헌의원 최헌길 의원의 발언중) 황해도나 평안도 출신 월남민은 주로 삼팔선 이남에 살짝 걸쳐있는 문제 때문에 육지는 별도 합의로 전체가 소군정 관할이 되었지만 바다는 미군정 관할인 해주시 남쪽 반도지역에서 배를 타고 옹진이나 연백을 거쳐 월남한 경우가 많았다.[2] 이 방법으로 탈북한 사람은 대표적으로 김형석이 있다.


2. 탈북 경로[편집]


많은 북한 주민들이 탈출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매년 몇천 명밖에 안 된다. 특히 김정은 집권 후 아예 연 천 명 정도까지 줄다가 코로나 사태로 국경을 봉쇄한 2020년 이후 급격히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줄어 2021년에는 63명에 그쳤고 2022년에는 67명이 되었다.[3]

인구가 1200만인 쿠바가 공산화 때~1993년 기준 120만 정도고, 북한과 비견될 독재국가인 에리트레아의 탈출인구가 월 4~5000명 수준에 독립 직후 지금까지 약 40만 명으로 추산되며 베네수엘라가 전체인구 약 3000만 중에 560만 정도가 탈출했음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인데[4] 이는 북한을 탈출하는 난이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아서 험난하기로 악명높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의 경우는 어떻게든 걸어서라도 브라질까지만 도착하면 되지만, 북한은 일단 두만강압록강이 국경을 가로막고 있다. 즉, 휴전선을 제외하면 배나 항공기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2020년대에는 호수와 군사시설이 없는 곳은 모조리 철조망이 쳐졌다. #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 기슭은 기본이고 기나긴 서해안, 동해안마저 모조리 철조망이 생긴 것이다.


2.1. 중국 + 제3국 루트[편집]



2019년 양강도 혜산시에 거주하던 5인 가족이 중국동남아를 통해 탈북하는 영상.(갈렙선교회)

일반 북한 주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던 방법으로 압록강두만강을 야간[5]에 넘어 중국으로 이동한 후 중국 본토[6] 혹은 제3국[7]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두만강을 통해 탈북한다.

중국 정부는 탈북자 단속에 열을 올리는데, 이는 북한과 맺은 협정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를 방치하면 중공에는 도움이 될 것이 없기 때문에 단속을 하는 것이다. 즉 북한이탈주민에게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이민관리국 요원이나 중국인민무장경찰 요원의 단속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에서는 돈이 많은 계층이나 여권을 발급받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외국으로 갈 때 여권이 따로 필요하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걸려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국 루트로 가기 위해서는 주로 량강도에 위치한 위연역을 이용한다.[8]

위연역은 압록강과 별로 멀지 않아서 걸어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곳의 정치장교들에게 뇌물을 주고 강을 건넌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간부들이 어슬렁거리다가 한 눈에 봐도 탈북할 것 같은 사람들이 보이면 접근하고 꼬드겨서 꽤 많은 양의 뇌물을 받아챙긴다고 한다. 아마 거기 간부들의 주 수입원일 것이라고 한다. 물론 정보 당국에 의해 이러한 행적들이 발각되는 정치장교들은 최소 무기노동교화형 내지는 사형된다.

한편, 중국으로 건너가는 것 자체는 그리 큰 처벌과 어려움이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이유는 중국과의 밀무역이다. 현재 북한의 장마당에는 상당량의 중국 물품이 들어와 있는데, 즉 중국과 북한 간의 밀무역이 활발하다는 증거이다.

밀무역 과정에서 북중국경을 넘는 일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때문에 탈북 목적이 아닌 단순 밀무역을 위해 국경을 넘는 경우도 상당하다. 북한 보위부 입장에서도 이거 막을 만한 인력이나 자원도 없고, 함부로 막았다가는 굶거나 폭동[9]이 일어날 판이니, 탈북정황이 확실하지 않으면 적당히 삥을 뜯거나 협박하는 선에서 끝난다는 주장도 있다.

단, 잡히는 위치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동북 3성 지역이라면 상관없지만, 광둥성, 푸젠성, 저장성, 장쑤성 등 남부 지역이거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등의 서부 지역이면 그대로 끝이다. 여기까지 와서 밀무역을 한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 북송을 시키는 국가에서는 우리가 뉴스에서 한번쯤은 봤던 현지의 대한민국 대사관에 현지 경비를 뚫고 들어가 신변보장을 받는 방법을 썼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대사관 주변에 공안의 감시가 심해지자, 제3국의 대사관으로 집단 돌진하는 것이 한때 유행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경찰들이 모든 대사관 정문의 경비를 강화하면서 점점 힘들어지고 있으며, 특히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가는 건 이젠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담을 넘어서 들어가는 것도 전기 철조망이 담에 쳐져있어서 불가능하다. 중국 주재 일본 대사관은 아예 공안이 대사관 안에 걸어들어와 북한이탈주민 체포하는 것을 방기하다 걸려 국제적으로 욕을 바가지로 먹은 바가 있다.

이외에 신분증을 만드는 브로커를 통해 여권을 위조하거나 죽은 사람의 호적을 사서 위명여권을 발급받은 뒤 무비자로 입국 가능한 제주도로 비행기를 타고 와 제주국제공항 출입국사무소나 제주지방경찰청 등지에 자수하는 방식으로 입국하기도 한다. 혹은 브로커가 여객항의 직원을 매수한 뒤, 인천항으로 밀항하는 경우도 있다. 타 루트에 비하면 거리가 짧고 일단 비행기가 뜨면 안심할 수 있지만, 출국심사나 공항 보안 검사 중에 걸리면 도망칠 길도 없기 때문에 위험성이 큰 루트다. 그래서 이들은 위명 여권을 구입하고 출국할 때까지 긴장을 한다.[10] 그마저도 이 방법은 전산화가 되기 전인 2000년대까지의 이야기이고 전산화가 완료된 2010년대부터는 아예 불가능해진 방법이다.

여성들의 경우 조선족들에 의해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중국의 시골 노총각들이 중국 여성과 결혼하기가 힘들어지면서, 돈 몇 푼 주고 북한 여성을 아내로 사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탈북자는 중국에서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정식 혼인신고도 불가능해서 신분을 보장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결혼 뒤에도 이웃의 밀고나 중국 경찰의 검문으로 잡히면 언제든지 북한으로 추방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때문에 이들의 결혼생활은 불안의 연속이라고 한다. 게다가 중국의 낮은 인권의식과 '돈으로 사온 여자'라는 인식 때문에 온갖 가정폭력에 시달리기도 한다.[11] 이러한 북한 여성들은 세가지 운명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첫 번째는 중국에서 불안에 떨며 지내다가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당하는 것이고,[12] 두 번째는 자신을 사간 중국 남편이 괜찮은 인품을 가졌고, 어찌되었든 중국 시골의 생활수준이 북한보다는 훨씬 낫기에 현실에 수긍해 중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만약 아기까지 낳게 된다면 전근대적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북한 여성들은 중국 시골마을에 정착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은 추후에 중국에서 살면서[13] 중국어를 익히고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실상을 알게 되고 다른 탈북 여성들과 연락망을 구축하면서 브로커를 구해 결국 한국에 입국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케이스의 탈북 여성들은 나중에 한국에 정착했어도 중국에 있는 남편, 자식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기도 한다. 세 번째는 브로커를 찾아 중국 대륙을 횡단해 탈북에 최종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다. 보통 먼저 탈북한 가족이 있고 이들이 준비한 브로커를 잘 만나면 몇주 만에 태국 난민 수용소까지 도착할 수 있다.

매매혼 말고도 유흥업소 등에 팔려 가서 감금 상태로 혹사당하기도 한다. 너무 늙지만 않으면 이런 식으로 인신매매를 당해서 온갖 고생을 다 겪다가 겨우 한국으로 탈출하는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이러한 경로로 귀국한 북한이탈주민들은 중국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그래도 제일 짧은 거리의 탈북 루트이기 때문에 중국을 통하는 것이 여전히 제일 보편적인 루트다. 제일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중국 루트를 통하여 들어왔으며, 중국 정부는 탈북자들의 1차 목적지인 주중국 대한민국 대사관 뿐만 아니라 북한과 가까운 선양의 총영사관 및 대련 영사관 출장소에도 경계를 대폭 강화했다. 어느 정도냐면 시위를 막을 때 버스를 붙여서 방벽을 만들어 아예 건물 자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2020년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온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그 이전부터 삼엄해진 국경 감시 때문에 중국 루트가 거의 막혀 간다는 복수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국경의 감시가 전자 장비까지 동원될 정도로 고도화되고, 북한도 탈북을 좌시하지 않으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하고자 중국 정부의 이동 통제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BBC 코리아, 자유아시아방송, VOA, 아시아프레스, 데일리NK, 동아일보의 주성하 기자까지 한 목소리로 탈북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탈북 자체가 끊기긴 어려운 것이 북한의 근본적인 먹고사니즘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워낙에 심각하고 북한 주민들의 입장에서 중국과 북한 정권은 고작 코로나 19 따위로 취급할 정도로 더더욱 악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고작 전염병 하나 때문에 탈북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2022년 중국의 코로나 거리두기 정책이 극심했을 때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더욱 탈북이 어려워진 이유를 설명했는데, 안면인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현금 없이 위챗으로 결제를 해야 하기에 개인정보 및 백신패스 관련 정책들이 큰 난관이 된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모두 신원 미상으로 표기되므로, 한 성에서 또다른 성으로 이동[14]을 하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도 상당히 어려워지게 된 것.

2023년 7월 초에는 국가보위성[15]이 국경 지역 경비 근무를 담당하는 국경경비대에게 '주민들의 탈북을 막기 위해 두만강 강바닥을 사람 키보다도 깊게 파 사람들이 강에 들어설 수 없게 하라'고 지시했는데,[16] 강의 중간이나 중국 쪽 가까이의 강바닥을 파지 말고 우리(북한) 쪽만 파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국경경비대 군인들은 무더운 날씨에 기계도 아닌 손으로 물살을 이겨내며 헛고생을 해야 하니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지시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느냐"고 불평했고, 상급 군관들조차 "국가보위성 지시니 형식적으로나마 작업하면서 물장난이나 치며 시간을 보내고 혹여 위에서 내려와 얼마만큼 팠느냐고 물으면 팠는데 모래와 자갈이 고스란히 흘러 들어왔다고 보고하라"고 이들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2023년 말 기준으로, 북중국경의 북한 쪽에는 이중 철책이 처져 있다. 초소가 저 두 개의 철책에 다 있는 상황이다. #


2.1.1. 태국 경유[편집]


태국을 탈북 루트로 사용하는 경우, 주로 메콩강을 따라 배 타고 내려와서 라오스, 미얀마, 태국 3국의 접경지인 골든 트라이앵글[17]에서 내린다.

이 때 탈북자들은 태국에 내렸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태국이 아니라 미얀마 땅이며, 여기서 폭 100m 정도의 얕은 강을 걸어 건너서 태국 땅에 가야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은 "굳이 강을 건너야 하게 만든다"며 불평하지만, 뱃사공 입장에선 태국 국경을 잘못 넘어서 밀입국하다 걸리면 벌금형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하므로 태국 땅에 안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태국 경찰에 체포된 북한이탈주민들은 밀입국 벌금을 내야 하는데, 뭔지 몰라도 돈 내라니까 거부하다가 감옥살이를 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이 많다. 하지만 북한이탈주민들이 너무 많아져서, 예산이 부족한 경찰서에서 탈북자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8]

어쨌든 태국 경찰에 무사히 체포되면 이후 방콕 이민국 수용소로 이송된다. 태국에 도착하면 한국을 포함한 원하는 나라로 추방될 수 있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태국까지만 도착하면 매우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고 한다.[19]

참고로 일부 탈북자들의 경우 북한과 중국을 지나며 경찰에 대한 공포증에 걸려 태국 경찰서로 가라는 브로커의 말을 거부하고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2.1.2. 몽골 경유[편집]


몽골도 북한이탈주민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쪽으로도 많이 간다. 다만, 중국 국경에서 몽골까지 가는 경로는 고비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혹독하기 때문에 여기서 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몽골 국경수비대에게 무사히 체포당하면 살지만 그 전에 사막에서 발견되는 게 문제다. 모래사막을 건너야 하는 몽골 루트의 위험성은 영화 크로싱경계에서도 묘사된다.[20] 이쪽은 북송 걱정은 없어도 목숨이 간당간당하다.#

그리고 몽골 국경수비대는 발견한 북한이탈주민들을 한국 대사관에 인도하며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보호 하에 울란바토르에서 한국 행 비행기를 탑승한다.


2.1.3. 기타 동남아 국가[편집]


말레이시아[21],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북송을 시키지 않는 국가에서는 현지 이민국에 불법입국으로 자수하는 방법을 택한다. 단 필리핀과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동티모르는 섬나라여서 가장 힘든 쪽에 속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라오스, 베트남이나 독재 국가로서 친중파가 많은 캄보디아, 미얀마는 탈북자 단속이 상당히 되는 편이다.

라오스는 한국 정부가 직접 손 걷어붙이고 나서자 갈등하다가 북송을 취소한 적이 있는데, 중국보다야 대화의 여지가 더 있다지만 이 정도의 외압이 없으면 라오스에서도 북송된다는 얘기다. 2013년 라오스 탈북 청소년 사건이 있었는데, 현지 한국대사관은 탈북자들의 신병이 억류되어 있던 18일 동안 단 한 차례도 영사면담을 하지 않았다. 결국 청소년 9명이 북쪽으로 압송되어, 이 루트는 현재 사실상 붕괴된 상태다.

베트남의 경우 베트남의 경제 대부분을 한국에 의존하다보니 옛날보다 한국에 훨씬 우호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04년 베트남은 체류 중이던 468명을 이틀에 걸쳐 2차례 전세기편에 태워서 한국에 도착시킨 다음 정부가 베트남과 직접 교섭하여 대거 입국을 성사시킨 적이 있다. 당시 북한이탈주민 대부분 식량난, 생계 문제로 국경을 넘었는데, 여성 70%, 어린이 20%였다. 하지만 그 이후 베트남 지역을 경유하는 탈북 루트는 현재 사실상 봉쇄된 상태다.[22]


2.2. 러시아 루트[편집]


의외로 러시아로 직접 탈출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특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에서 제일 가까운 한국 외교공관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이다. 하지만 북한도 바보는 아니므로 그만큼 더욱 경계를 철저히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 이유는 북한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곳은 라선시 하나뿐인데, 이곳은 경제특구 지역으로 북한 내에서도 접근이 곤란한데다 라선시 일대가 두만강 하류인지라 강폭이 워낙 크기 때문에 탈북이 어렵다. 그러나 직접 도강하는 경우도 발견되었다.#

북한 특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북에 성공한 사례가 존재하며, 사실 이 사람은 일반 탈북자가 아닌 무역대표부 소속 외교관이라고 한다. 이는 몇 안 되는 고위급 간부가 탈북한 사례 중 하나이다.#

2005년에 러시아 - 카자흐스탄 루트로 탈북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원에서 교육하는 탈북자 중 5~10%는 러시아를 거쳐서 온다고 한다. 다만, 곧바로 러시아로 탈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는 중국 또는 중국 - 몽골을 거쳐서 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가는 것도 엄청나게 먼 길이지만 중국은 최소한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라도 있지,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교통 사정을 생각해 보자. 엄청난 대장정이 아닐 수 없다.

2023년 1월 25일, 러시아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 9명이 대한민국에 입국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북 소식통은 "이들이 현재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고 밝혔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터지면서 동요가 일어 한국에 들어오려고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통일부는 "탈북민 관련 사안은 신변 보호를 위해 확인이 불가하다"고 밝혔고, 국정원 역시 "탈북민 관련해서는 확인해드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와 활동가들에 따르면 코로나19 발생 이후 탈북민들의 중국 내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그나마 러시아가 새로운 경로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

하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는 한러관계가 나빠짐과 동시에 북한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이므로, 탈북민들이 러시아로 탈출하는 순간 북송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존에는 공산권출신 국가 치고는 의외로 범죄 혐의 또는 북한의 송환 요청이 없는 한 탈북자 강제북송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곤 하나, 2016년 러시아도 북한과 탈북자 강제송환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고 이미 우크라이나전 발생 전에도 탈북자를 북송한 전적이 있었다.#


2.3. 해외 주재 중 탈북[편집]


주로 외교관, 북한식당 종업원, 노동자, 유학생들이 이 루트로 들어오며 대만, 싱가포르, 쿠웨이트, 이집트, 러시아, 잠비아, 홍콩, 영국, 오스트리아, 체코, 키프로스[23] 등 다양한 국가에서 이런 사례가 있다. 중국 - 러시아를 통해 다른 나라로 밀입국해서 하는 탈북과는 물리적 난이도가 다르다. 대신 가족들과 함께 탈북하는 것이 어려우며, 해외 주재시 항상 북한 당국의 지속적인 감시가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탈북 외교관 1호인 고영환 박사는 콩고에서 유럽을 거쳐 40일만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중국령이지만 1국가 2체제인 홍콩에서는 치안이 좋아서 홍콩 경찰을 뚫고 밀입국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1996년 이후 탈북이 거의 없으며, 2016년에 탈북 사태가 발생했다. 홍콩 소재의 홍콩과학기술대학교에서 열리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석한 북한 고등학생이 한국 총영사관을 통해 탈북한 것이다.#

대만이나 싱가포르 역시 중국 대륙과 떨어져 있고 치안이 좋아서 밀입국할 방법이 없다. 싱가포르는 중국과 멀리 떨어져있고, 대만타이완 해협을 기준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마쭈진먼 역시 경비가 삼엄하다.

탈북작가 림일은 1997년 쿠웨이트로 해외 노동자로 파견되었다가, 그 곳에서 한국 대사관을 통해 귀순했다. 그리고 많은 국외 거주 북한 주민들이 외국에 소재하는 외교공관을 통해 한국으로 귀순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를 통한 탈북도 어느 정도 막기 위해, 북한에서는 11살 미만의 어린이를 제외하면 해외 출장 등이 있다 해도 가족 전원이 해외로 나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북한에 남은 가족을 인질로 삼아 탈북하면 수용소행 내지는 사형이라는 압박을 하는 것이며, 집단 탈북이 발생했을 시에는 그들의 가족을 매체에 출연시키며 "남한에서 이들을 납치했다"는 식의 여론전을 펼치는 경우도 많다.

드물게 납북되었다가 탈북한 경우도 있는데, 영화배우 최은희와 영화감독 신상옥 부부는 1978년 홍콩에서 납북되었다가 납북 8년만인 1986년에 오스트리아 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도망쳐 탈출하는 데 성공한 바가 있다.

당시 최은희, 신상옥 부부는 때마침 알고 지내던 일본 교도통신 순회 특파원이 빈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연락을 취해 다음날 만나자는 약속을 받았다. 다음날 그가 숙소로 찾아오자 이들 부부는 식사하러 가는 척 하며 북한 감시원들을 따돌렸다.

호텔에서 택시를 잡은 후, 이들이 탄 택시가 숙소를 벗어나자 택시기사에게 차를 돌려 미국 대사관으로 가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 앞에 이르렀을 때, 이들은 택시요금을 낼 겨를도 없이 곧장 택시에서 내려 황급히 미국 대사관으로 뛰어들어갔다.

김정은 집권 이후로 외교관 탈북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UN의 대북제재가 시작되면서, 본국으로 송금해야 할 김씨 일가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외교관들이 본국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탈북을 결심한다고 한다. 또한 친척 또는 동료가 숙청되면 연좌제로 연루되고 싶지 않아 탈북하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에 벌목공으로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이 탈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2016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 2명이 탈북하였고 동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 10명이 총영사관에 자발적으로 망명 의사를 밝혔다.#, #

그런 만큼 일반인보다 고위층들은 가족들과 있으면 탈북이 더욱 쉬워진다. 다만 한국으로 가는 탈북은, 모든 가족을 탈북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갔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아예 외국으로 가기도 한다. 실제로 고위층이 한국을 많이 가는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대표적으로 2016년에 탈북한 태영호 의원은 가족을 탈북시키는데 성공, 정치활동을 한다. 2018년 11월에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관의 조성길 대사대리가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것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

당시 딸을 못 데리고 왔기 때문에 탈북에 실패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다가 2020년에 한국에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2019년 말 전일춘의 사위로 추정되는 주 쿠웨이트 북한 대사대리가 남한으로 망명하였다는 보도가 발표되었다.


2.4. 전면돌파 휴전선/NLL 루트[편집]


파일:귀순표지판.jpg
백령도에 설치된 탈북 유도 표지판. 이 표지판에는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래에 있는 전화기의 신호단추를 누르시면 안전지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라고 적혀있다.

휴전선비무장지대를 뚫고 남한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다. 지도상으로는 가장 가까운 탈북 경로이고 동사나 아사의 위험도 적고, 실패하든 성공하든 북송될 위험도 없는 사망과 탈출의 극을 달리는 경로지만, 휴전선을 통한 탈북자는 극소수며 중국 - 북한 간 국경을 이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 이유는 휴전선이 극도로 위험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탈출로이기 때문이다. 일단 탈북을 방해하는 요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휴전선 주변은 역사상 육군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유명한 마지노선이 휴전선의 3배 길이에 40만 명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조선인민군 육군의 70% 가량이 250km밖에 안 되는 원산시 이남 및 휴전선 근처에 전진배치되어 있다.

  • 북한군의 감시를 피하고 비무장지대에 들어서면 대한민국 측에도 민경부대가 기다리고 있다. 물론 국군은 귀순하는 탈북자인 줄 알면 보호해 주지만, 일단 저 멀리서 은밀하게 진입하는 게 탈북자인지 무장공비인지 알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오히려 규정대로 했다가 거수자가 사망할 경우 살인죄가 될 수 있기에 난감한 상황. 탈북하는 사람 입장에선 뒤에서도 총알이 날아오고 앞에서도 날아올 가능성이 있는 아주 위험한 환경이다. 대한민국 민정경찰의 GPGOP, 잠복호 근무병들은 무조건 사살 태세로 근무한다. 만약 비무장지대를 건너는 도중에 재수가 없으면 총 맞고 사망할 수 있다. GP나 GOP 쪽에 수기(백기)나 호루라기 등이 비치되어 탈북자가 GP나 GOP에 다다랐을 때 수기를 흔들거나 호루라기를 불면 귀순의사로 인식하고 탈북에 성공한다고는 하지만 관리도 제대로 안 되어있고 무엇보다 국군 측에서 귀순자임을 확인해도 귀순 유도하기 위험하고 귀찮다는 등의 이유로 남파간첩으로 보고하고 사살해 버리는 사례도 있으니 완전히 안심할 수만은 없다. 그래도 2020년대엔 명백한 탈북민임을 인지했음에도 간첩으로 보고하고 사살하는 것을 걸리면 그대로 해당 인원들은 군법재판에 회부되고 불명예 전역을 당할 것은 확정이며, 해당 부대 장교들도 모조리 모가지가 날아갈 테니 전보단 위험은 적다.

  • 5m 높이의 콘크리트 수조[24], 최고 10,000V 전압의 전기 철조망 또한 탈북을 방해한다. 쇠막대기를 이용해 전기를 땅으로 흘려보낸 뒤 철조망 밑으로 구덩이를 파고 통과해야 한다. 수십m 이상의 폭을 자랑하는 지뢰밭도 큰 문제다. 한반도의 휴전선은 전 세계에서 지뢰 밀집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다.

  • 휴전선을 돌아서 바다로 오자니 물살도 가파르고,[25] 수심이 깊다. 뗏목을 타고 오거나 운좋게 수영에 성공하는 사례도 있다.

중앙분계선을 넘어가면 대한민국 국군 GP가 보이는데, 이 때도 재수가 없어서 수하를 듣지 못했거나 겁에 질려 도망치기라도 하는 등 대남 도발로 오인받을 행동을 하면 국군 근무자에 의해 사살될 수도 있다.

현재 휴전선에는 그나마 여기까지 천우신조로 온 탈북자들을 안내하기 위해 푯말과 전화기를 두긴 했는데, 관리는 영 부실하다.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무사히 한국군에게 발견된다면 안보지원사에서 조사를 받고 하나원으로 가게 된다.

그런 고로 휴전선 경로를 이용하는 탈북자들은 북한군 민경부대 출신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휴전선 인근에서 복무하면서 비무장지대의 지형 조건과 북한군과 남한군의 경계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휴전선은 지뢰밭[26]이나 한국 측의 오인사격, 북한 측의 공격 등의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아 아주 위험한 루트이기 때문에, 이들 또한 아주 급박한 상황이 아닌 이상 중국을 경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북한 보위부 군관이였던 이철호의 경우도, 권총 1자루만 들고 혈혈단신 휴전선을 넘은 경우다.

예전에는 휴전선 루트로 들어온 귀순자에게 바로 식사를 줬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탈이 날 수도 있어 일선 부대에서는 물 이외에는 제공하지 않고, 국정원에 인계한 후에야 건강체크 후에 식사를 제공한다고 한다. 한편 2000년대 중반 중부전선을 통해 발생한 귀순 사례에 따르면 그냥 교대근무자들이 먹는 밥을 퍼다 줬다는 얘기도 있다. 근무병력들이 먹기 싫은 밥을 대충 퍼먹고 잔반처리하는 것을 본 탈북병사의 한마디가 "인민이 용서치 않을 겁네다"였다고 한다.


2.4.1. 휴전선 루트 귀순 사례[편집]



  • 2013년
    • 8월 24일, 40대 남성이 북한에서 교동도까지 헤엄쳐 민가의 문을 두드리고 귀순했다. 교동도 동남쪽이 주민 어업지대인 탓에 철책과 초소가 없었다고 한다.




  • 2017년
    • 6월 13일 저녁 7시 55분경 귀순자가 발생했다.
    • 6월 24일. 열하루 만에 북한 군인 1명이 또 귀순했다.
    • 11월 13일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가까스로 구조된 귀순병사의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치료를 받고 다행히 살아났다.
    • 12월 21일 오전 8시 4분경 19세 초급 병사가 총을 휴대한 채로 귀순했다. 탈영 이유는 부조리 때문이라고 유튜브에서 밝혔다. [27]






2.5. 해상 탈북[편집]


어선, 무동력선 등을 타고 서해안 혹은 동해안으로 빠져나와 남한 영해로 진입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1987년 '따뜻한 남쪽 나라'[28]를 찾아간다며 일가족을 이끌고 귀순한 김만철 씨와 박명호 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동해안으로 빠져나올 경우 해류에 따라 일본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낙후된 북한 강원도에서 배를 타고 탈북해서 강원도 고성이나 속초, 양양으로 들어와서 귀순하는 경우가 많다. 상당수는 이 과정에서 해군이나 해경에 걸리며, 일본으로 떠내려갈 경우 해상보안청 경비함에게 걸려 구조된다. 일본 역시 탈북자가 원하면 대한민국으로 보내준다. 물론 일본에 잔류하거나 제3국 특히 미국 등지를 선택하는 경우도 소수 있다.

바다를 통해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들을 탈북자 사회에서는 직통생[29]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로 가는 비용이 급등해서 바다를 통해 넘어오는 것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리스크는 크지만 2016년 탈북자 강연에 따르면 비용은 중러를 통해 오는 일반적인 과정에 비해 상당히 싸다고 한다.

바다를 통한 탈북이 늘자, 북한도 2007년부터 바다 출입증을 만들기 어렵게 하거나 형제나 친척 등 가족이 한 배에 탈 수 없도록 하는 법, 그리고 자신의 거주지 이외의 지역에서 배를 탈 수 없다는 규정을 신설하는 등 바다를 통한 탈북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으로 가는 길목인 지중해와 달리 이쪽을 통해 고향을 떠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2023년 5월 18일 황해남도 강령군[30]에서 9인 가족이 나룻배를 타고 귀순에 성공했다. 이 사례는 2023년 5월 북한 일가족 NLL 귀순 사건 문서를 확인하자. 2023년 10월 탈북한 한 함경남도 출신 일가족에 따르면 김여정이 목선에 철판을 다 씌우게 하여 배의 경로를 레이더로 감시를 받게 한다고 한다. #

배를 타지 않고 바다로 헤엄쳐 탈북하는 사람들 또한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탈출 과정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일단 서해 바다쪽은 수심이 얕아 썰물 때를 노려 몇시간 헤엄치면 황해도쪽에서는 탈북이 가능하고 탈북에 성공한 사례도 존재한다. 동해쪽은 수심이 깊고 중간에 경유할 섬도 없어 수영으로 탈출한다는 전제가 불가능하다. 또한 바다이다 보니 물살이 워낙 심해 수영하기가 힘들고 수온도 상당히 차기 때문에 바닷물에 몇시간만 들어가 있으면 저체온증에 걸리기 십상이다. 겨울철이면 더 심각한데 바닷물에 몇 시간만 있어도 얼어 죽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수영장에서의 수영도 한 두시간만 해도 온 몸이 피로로 찌드는데, 해류와 해풍, 망망대해라는 심리적 영향이 있는 바다수영은 체력이 배로 소진된다. 북한의 특성상 대부분의 시민들은 열약한 환경에서 자라 체력이 상당히 약하기 때문에 이런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그 수영 잘한다는 박태환만큼 실력이 좋아도 바다로 헤엄을 쳐서 탈북을 시도하는 것은 사실상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띄울 수 있는 큰 물건을 띄우고 헤엄을 쳐서 탈북에 성공한 극소수의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보위부 출신 탈북자인 이철은이 있다. 헤엄쳐서 탈북해 해군 군함을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돌파거리가 짧고 수심이 얕은 한강 하구의 경우 갯벌을 따라 내려오다가 헤엄쳐 탈북하는 사례도 있기는 하다. 단, 이 경우는 거리가 강폭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2.6. 전투기[편집]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들로 북한 공군 소속 조종사들이 전투기를 몰고나와 그대로 귀순하는 경우다.

  • 노금석 상위(1953년, MiG-15)
  • 이운용 상위, 이인석 소위(1955년, YaK-18) : 독특하게 2인용 훈련기를 2명이서 타고 귀순한 사례로 연락임무를 받고 황해도 해주 앞 바다에서 임무도중 남한에 일가친척이 있어서 귀순할 생각이 있던 이운용 상위가 기수를 남쪽으로 돌리고 권총으로 이인석 소위를 같이 귀순할지 협박 했는데 알고보니 이인석 소위도 일가친척들이 남쪽에 있어 귀순할 생각야너도?야나도!이 있는걸 알아내고 우선 서로 권총 겨눈거에 대해 사과(...)한뒤 인천 상공을 지나 서울 여의도 공항에 내려 귀순했다##
  • 이웅평 대위(1983년, MiG-19) : 가장 유명한 사례로 당시 공습경보가 울려서 당시 국민들이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 이철수 대위(1996년, MiG-19)


3. 기타[편집]


탈북민 관련 기사에서 간혹 상세하게 탈북 루트등을 알려주면 '기자가 아니라 스파이', 김씨왕조에게 탈북 경로를 발설하는 거냐?' 라는 빈축을 사기도 한다.#

영화 <그물>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북한 해군의 장교 한 사람이 배고파서 고기를 잡으러 어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서 대한민국 해군에 구조된 경우가 있는데, 이 장교는 탈북할 의사가 없었기에 비무장지대를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빈곤함 문서에도 나와있는 사례이다. 문서를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쪽도 심히 비참하다.

엄밀히 따지면 '탈북'은 아니지만 가끔 사망한 북한군이나 북한 주민들의 시신이 바다나 강을 통해 한국으로 떠내려 오기도 하는데, 이 경우 남한에서 혐의점을 조사한 뒤에 북한 측에 시신을 인계했다. 혐의점을 조사하는 이유는, 간혹 간첩이 침투하다가 사고로 죽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영으로 내려오다가 익사한 간첩의 시신이 떠내려와서 발견된 사례들이 있다. 만약 북측이 시신 인수 의사를 밝히지 않는 경우에는 무연고자로 처리해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하고, 추후 유골 인계를 요구할 경우에 대비해 유품을 보관한다.#

이와 다른 케이스로, 중국의 탈북 브로커들이 "돈을 벌 수 있다"고 사람을 속여 강제로 데려온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는 있다. 다만, 해당 보도를 다룬 언론사와 기자의 경력을 보면 가려들을 필요는 있다.# #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이런 사례를 과장하면서 사기 혹은 강제로 이뤄진 탈북이 일반적이고, 이게 기획 탈북이라는 개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기획탈북 자체가 언론에 탈북과정 등을 노출시켜 후원을 더 받으려고 하는 짓이기 때문에 오히려 강제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비난받긴 하는데 탈북 루트 및 탈북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다른 탈북자들을 탈북을 못하게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고 탈북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번외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점령지에 보내지면 탈북민으로썬 다행일 수도 있다. 아무리 러시아군이 개판이라도 북한보단 나을 테고, 드니프로강 등 문제가 없진 않지만 자포리자주-도네츠크주 전선 쪽에서 우크라이나에 투항 형식으로 탈북할 수 있기 때문. 우크라이나에 도착해서 주우크라이나 대한민국 대사관을 찾거나 우크라이나의 우방이자 한국의 협력 파트너인 폴란드로 가는 데 성공하면 한국행 비행기를 태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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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반동분자도 여럿 섞여있었다고 추정된다.[2] 일단 이 지역에서 감시를 피해 배에 오르기만 하면 바다가 미군정 관할이라 경비병이 추격할 수가 없었다.[3] 그나마 탈출 가능성이 있는 함경도 지방 국경지대 출신이 탈북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이들의 고향에서는 '한 집 건너면' 탈북자의 가족이 있다든가 심지어 '마을 전체'가 탈북하는 등 많은 사람이 탈출했다는 증언 등을 토대로 알 수 있다.[4] 여담으로 난민 배출의 끝판왕격 국가는 북한은커녕 민주 캄푸치아도 울고 갈 수준의 생지옥이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치하의 적도 기니로, 단 10년 만에 인구가 30만 명 정도인 나라에서 10만 명(인구의 1/3이나 된다!)이 탈출했다고 한다. 물론 응게마는 국민들의 도피를 막으려고 나라의 모든 카누를 불태우는 엽기적인 행각까지 저질렀으나 주민들이 강을 헤엄쳐서라도 탈출하려 하는 등 탈출을 막는 데에는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5] 보통 인적이 적은 새벽 2~5시 사이에 도강을 많이 한다. 강폭이 넓고, 수심도 깊어서 뗏목이 필수이다. 그마저 아니라면 산소통에 물갈퀴가 필요하다.[6] 중국에 주재하는 각국 대사관으로 가는 방법[7] 태국, 몽골, 러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8] 간혹 검문을 피해가면서 도보나 자전거 등을 이용해 국경까지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황해도에서 도보만으로 국경까지 이동해 월경한 탈북 사례도 존재한다.[9] 그런데 2020년 이후부터 이 예상을 깨고 김정은은 코로나19라는 구실이 생기자 이를 최중대사로 여겨 이것도 차단하고자 하였다. 혜산시 문서를 보면 중앙당 간부 같은 권력이 많은 사람이 연루된 밀무역도 처벌한 사건이 있다고 한다. 무역량이 99% 이상 줄기도 하는 등 비현실적인 통계 속에서 진짜로 굶어죽는 사태가 있다는 말도 들리는 형국이나 그런 불만을 몇 배 더 잔혹하게 처벌하고 이런 처벌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후한 혜택을 주면서 막는 것으로 보인다.[10] 대한항공 등의 한국 국적기를 탄 순간부터 대한민국 항공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한국 국적기에 타기만 해도 탈북은 성공한 것이다. 설령 타 국적기를 탄다해도 현실적으로 고작 탈북자 한 명 잡겠다고 이미 이륙한 비행기를 다시 회항시켜서 체포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다.[11] 물론 윤설미의 중국인 시부모, 남편처럼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긴 있다.[12] 한국이나 미국 국적이 없기 때문에 중국 동북 3성 지역이 아니더라도 잡히면 거의 무조건 북송된다.[13] 대부분 동북 3성 지역에 산다.[14] 동북 3성 지역에서 중국 중부나 동부, 서부, 남부 등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에 해당된다.[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에 직속된 조직으로,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상 김정은에 직속된 조직이다.[16] 링크에 건 적도 기니의 독재자 응게마도 국민들의 해외 도피를 막기 위해 황당한 지시를 내렸다는 것만큼은 김정은과 대동소이하지만, 강을 깊게 파내는 대신 나라에 있는 개인 소유 선박들을 모조리 불태우게 했다. 물론 이 상황 속에서도 강을 헤엄쳐 적도 기니를 탈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17] 주변부가 마약 온상지. 90년대 마약 세력이 저물며 주로 녹차를 재배했다가, 근래에 다시 마약 재배가 증가하는 추세.#[18] 실제로 한 탈북자 유튜버는 경찰서에서 잡아주지 않아, 경찰서 앞에 뻐기거나 태국 여행을 하는 등 3주 정도를 경찰서를 거점으로 죽치고 앉아있었다고 한다.[19]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 태국을 통해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 여성의 경험담이 방송된 적이 있다.#[20] 계속 사막 벌판만 나오다가 굶어 죽는 경우가 대다수.[21] 특히 말레이시아는 김정은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화학무기로 자신의 이복형을 죽인 사건 이후로 북한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다. 최근에는 북한과 단교했으며, 아예 탈북자에 대해 관대해졌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22] 이때 이만갑 출연진 중 한 명인 유현주 씨가 탈북했다. 입국일이 7월 27일이었는데, 같이 온 사람들과 함께 "탈북의 7.27~"이라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23] 대개는 북키프로스에서 탈북한 경우가 많았다.[24] 전기철조망 앞에 있어서 감전될 확률을 높이고, 넘어가는 순간에 잠복호의 사격 대상이 된다.[25] 큰 조차로 인한 빠른 조류는 주로 서해안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서해 NLL을 통한 탈북 사례를 살펴보면 물때를 파악해서 연안 조류를 고려해 탈북했다는 언급이 많이 보인다.[26] 가장 위험한 요소로 1953년 정전 이후 비무장지대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지형상의 변화 등의 이유로 지뢰가 어디로 쓸려내려갔는지 한국 측도 북한 측도 아무도 모른다.[27] 귀순을 유도한 분대장은 30박 31일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28] 이 남쪽 나라에 대한 의견이 매우 분분한데, 이는 당사자가 자주 번복을 하기 때문이다.[29] 원래는 북한의 교육체제 하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뜻하는 단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것이 당연한 남한과 달리, 북한은 군 생활을 거친 후 대학생이 되는 경우가 직통생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북한 사회에서 직통생이 되려면 가문 배경, 학업 성적, 당성 등 다양한 부문에서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 까다롭고 어려운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 공통점이라서 그렇게 부르게 된 듯 하다.[30] 대한민국 헌법 상 황해도 옹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