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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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편집]
이름은 옥정(玉貞)[1] 으로 성은 장(張),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659년(효종 10) 기해생(己亥生)으로 역관 장형(張烱)과 계실 윤성립(尹誠立)의 딸 파평 윤씨 사이의 막내딸로 태어났다.[2] 그녀의 동복 형제로 장희재와 장녀(김지중의 처)가 있다.[3]
인동 장씨 집안은 조상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었다. 조부 장응인(張應仁)은 『통문관지』에 ‘품격이 우아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으며, 문필에 능하고 중국 말을 잘하여 비록 탐오한 중국 사람이라도 감히 함부로 요구하지 못하였다.’[4] 고 그의 행적이 기록될 정도로 선조 때의 유명한 역관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특히 종백부 장현(張炫)[5] 은 인조 때부터 숙종 때까지 활동한 이름난 역관이었다. 그는 동생 장찬(張燦)과 함께 삼화(蔘貨) 등의 사무역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6] 이에 따라 ‘국중(國中)의 거부’ 즉 나라 안의 큰 부자로 불렸다.
외조부 윤성립 역시 왜학 역관으로 생전 최고 관작이 사역원 3등작인 종4품 첨정에 이르렀고, 외조모 초계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한 변승업의 당고모로 변승업의 아버지이자 『허생전』의 ‘변 부자’로 등장하는 변응성의 사촌 누이이다. 외숙부 윤정석은 육의전 면포 상인이었는데, 면포는 조선의 화폐 대용이라 오직 육의전 면포상에서만 취급할 수 있었던 물품이었으므로 그 부를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다.[7] 따라서 친가와 외가 모두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관은 ‘역상(譯商)’이라고 불리며 낮잡아 보는 처지로 중인의 한계는 뚜렷하였다.[8]
혹자는 그녀의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의 처갓집 여종이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종모법에 따라 그녀 역시 여종의 처지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9]
2. 입궁[편집]
유복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장옥정이 언제 어떠한 이유로 궁녀로 입궁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옥산부원군 신도비에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대궐에 들어가 성장한 뒤 비빈의 자리에 올라 원자를 길렀다’[10] 고 하거나 왕비로 책봉하는 숙종의 전지(傳旨)에서 ‘머리를 따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서’[11] 라고 한 사실을 통해 어린 나이에 궁중에 뽑혀 들어온 궁녀였음을 알 수 있다.[12] 비록 그녀의 나이 11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본디 부유한 집안이므로 입궁 이유로 신분적 한계[13] 나 경제적 어려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종백부 장현은 이미 여러 차례 다녀온 사행으로 쌓은 부를 바탕으로 집권 세력인 남인과 왕실의 종친인 인평대군의 아들들과 가까웠다. 여기에 본인의 딸을 궁녀로 입궁시켜 내수사의 내패(內牌)를 이용해 이득을 취한 바 있다.[14] 따라서 그가 현실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정치적인 목적에서 종질녀의 입궁을 주선했다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다.
그 외에 수표교와 관련된 야사가 전해진다. 숙종이 수표교 건너 영희전(또는 종묘)에 참배하러 갔다가 수표교 근처 여염집에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장옥정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래서 증조모인 장렬왕후에게 부탁하여 궁녀로 삼아 사랑의 결실을 보았다는
3. 후궁 봉작[편집]
3.1. 출궁[편집]
당시 국상(國喪)은 혜성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났으므로, 이러한 이변(異變)의 출현 조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후에 장녀(張女)가 일개 폐희(嬖姬)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필경에는 왕비의 지위를 빼앗아 왕후에 승진 하기에 이르러 화란(禍亂)을 끼치고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그녀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으니,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 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
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 11월 1일 병진 1번째기사
전에 역관(譯官) 장현(張炫)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의 옥사(獄事)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왔다. 경신년 인경 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명성 왕후(明聖王后)가 곧 명(命)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는데,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의 아내 신씨(申氏)가 기화(奇貨)로 여겨 자주 그 집에 불러들여 보살펴 주었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1680년(숙종 6) 음력 10월에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경희궁 회상전에서 죽었다. 이 당시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서 여러 날 동안 사라지지 않는 이변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불길하게 여겼다.[16] 실록의 찬자는 이러한 이변을 장옥정의 탓으로 보았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 22세였다.
장옥정은 비로소 숙종의 승은을 입었지만,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명성왕후는 인경왕후가 죽은 지 3개월 만에 언서(諺書)를 내려 새 왕비를 간택할 뜻을 비쳤다.[17] 본래 대혼은 국상을 마친 다음에 해야 옳지만 나라 안팎에 사람의 힘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권도(權道)로서 대혼을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옛날부터 계비의 책봉은 숙의(淑儀) 중[18] 에 하는데 지금은 숙의가 없고, 대혼은 절차가 많아서 시일이 오래 걸리므로 미리 금혼령을 내리지 않으면 여염에서 잇달아 혼인하거나 처녀단자를 내놓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인경왕후가 죽기 전까지 연달아 세 차례의 임신[19] 을 하였으나 불행히 후사가 없었으므로 “국본(國本)이 있지 아니하니 국가(國家)의 중대한 일로서 이보다 큰 것이 없다”는 명성왕후의 말이 명분이 되었다. 결국 전국에 금혼령을 내린 지 7일 만에 초간택을 실시하고, 20일 만에 삼간택을 실시해 민유중의 딸을 새 왕비로 삼았다.
이례적으로 빠른 계비 간택[20] 과 장옥정의 출궁은 서로 맞물려 있다. 국가의 공적 기록인 『숙종실록』이 장옥정을 ‘장형의 딸’이 아니라 ‘장현의 종질녀’라고 쓰고 있고, 명성왕후[21] 와 김석주[22] 및 훈척[23] 이 주도한 경신환국에서 장옥정의 친정이 피해를 보았고, 과거에 윤휴·허목 등이 친잠(親蠶: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는 의식)을 이유로 후궁을 들일 계획[24] 을 하고 정국을 흔들려고 했던 과거를 반추할 때 남인과 연계점이 있는 장옥정은 서인 세력에게 위험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명성왕후가 말하기를, “내전(內殿)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궁인 장씨(張氏) 비로소 후궁에 참예하여 희빈(禧嬪)을 봉(封)하시니, 간교하고 민첩혜힐(敏捷慧點)하여 상의(上意)를 영합하니 상께서 극히 총애하시니라.
작자 미상, 전규태 주해, 『인현왕후전』
또 『인현왕후전』에서 장옥정을 “민첩혜힐(敏捷慧點)하여 상의(上意)를 영합하니 상이 극히 총애하시니라.”고 하여 ‘약삭빠르고 교활하다’고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상황에 따라 임금의 눈치를 살피고 좋아하는 행동을 할 만큼 무척 영리한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명성왕후가 내전(인현왕후)에게 장옥정이 숙종의 감정[25] 을 조종하여 국가의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장옥정은 출궁 당한 뒤에 장렬왕후의 조카이자 숭선군의 부인인 영풍군부인 신씨의 보살핌을 받았다.[26] 실록의 찬자는 ‘신씨가 기화로 여겨’ 잘해주었다고 하는데 새 왕비의 간택을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아닌 왕대비 명성왕후가 주도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장렬왕후는 왕실의 웃어른인데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27] 명성왕후가 건재한 이상 재입궁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장렬왕후가 자기 궁녀인 그녀를 가엾게 여겨 조카딸 숭선군부인에게 당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3.2. 재입궁[편집]
명성 왕후가 승하한 후에 내전이 다시 임금을 위해 그 일을 말하였고, 자의전(慈懿殿)도 또한 힘써 그 일을 권하니, 임금이 곧 불러들이라고 명하여 총애하였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대개 공주가 장귀인(張貴人)이 자전(慈殿)의 상제(喪制)가 막 끝나자마자 즉각 도로 들어와 총애(寵愛)를 독차지함을 근심하여 여러 차례 불평하는 말을 하게 되었었다.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9월 13일 무자 4번째기사
1683년(숙종 9) 겨울부터 앓아누웠던 명성왕후가 회복하지 못하고 창덕궁 저승전에서 죽었다. 덕분에 장옥정은 6년 만에 다시 궁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28] 한 번 쫓겨났던 처지에 정식 후궁으로 봉작할 명분도 없었으므로 장렬왕후의 궁녀로 재입궁하였을 것이다. 이는 인현왕후의 패착이었는데, 기록에는 자식이 없는 인현왕후가 장옥정의 재입궁을 ‘권면’한 것으로 나온다.
대전(大殿)의 춘추(春秋)가 장차 30세가 될 것인데도 아직 저사(儲嗣: 세자)를 낳을 희망이 없자, 중궁전에서 이를 근심하여 대전에게 깊이 권면하니, 이에 장씨를 받아들였다.
大殿春秋將滿三十, 尚無儲爾之望, 中宮殿用是憂憫, 深勸大殿, 仍納張氏.
이문정,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 『수문록』
비록 직첩은 받지 못했지만, 숙종의 총애와 장렬왕후의 신임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입지와 위세는 당당하였다. 이때부터 장옥정은 노론·소론을 구분하지 않고 서인 세력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여러 차례 후궁을 들일 것을 종용하였는데[29] 이것은 장옥정을 향한 숙종의 총애를 분산시키려는 의도로[30] 서인 세력의 목표와 부합되는 행보였다. 그러나 젊음과 미모를 떠나 장옥정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장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一日, 上欲戲之] 장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들어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대개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교(傳敎)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 내전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으나 또한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인용문은 명성왕후가 죽고 다시 입궁한 장옥정이, 왕이 자신을 희롱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왕비에게 물어서 승인을 얻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서 자신이 먼저 왕을 유혹한 것이 아님을 왕비에게 알리고 앞으로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31] 이러한 장옥정의 모습은 마치 자신보다 나이 어린 왕비를 시험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32] 참고로 실록에서 왕비가 후궁을 직접 매질한 일화는 오로지 이 기록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인해 마치 연인 사이의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한 것처럼 오해받는데, 이 문장에서 희롱은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원문에서 보이는 한자 ‘戲’는 놀이의 뜻으로 불꽃놀이나 수박희 같은 유희 거리에도 쓰지만, 성행위를 말할 때도 쓴다는 것[33] 에 유의해야 한다.
시독관 이이명(李頤命)이 《통감강목(通鑑綱目)》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본기(本紀)를 강의하며 말하기를, “성제가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은 여색으로써 몸을 망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감히 성명(聖明)에게 염려할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마땅히 ‘단주(丹朱)처럼 거만함은 없어야 한다.’는 뜻 같은 것은 늘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윤4월 20일 계유 1번째기사
윤4월 20일 소대(召對)에서 이이명이 전한의 성제의 말로를 거론하며 여색을 경계하라고 말하였다.[34] 이이명의 말은 장옥정을 겨냥한 말이었다. 이때 후궁에 영빈 김씨도 있었지만, 장옥정은 영빈과 처지가 완전히 다르다. 영빈은 인현왕후와 인척 관계[35] 에 있는 명문세족 출신으로 “저사를 넓히려는 까닭”[36] 으로 맞이한 적법한 간택 후궁이다. 하지만 영빈은 자식을 볼 만큼 건강한 몸이 아니었고[37] 숙종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38] 이에 영빈의 종조부로 노론의 당수인 영의정 김수항이 장옥정 축출을 시도하였다. 6월 13일 김수항이 역관 장현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역적(譯籍: 역관 명단)에 올라 사행(使行)에 참여하고 있는데 복창군 형제의 심복이었던 죄를 물어 대역죄로 처결하기를 요구하였다.[39]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숙종의 강력한 비호 아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역관(譯官) 장현(張炫)의 근족(近族)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 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상처를 받는 길이 많아지고 나면 병을 조심하려는 뜻이 늦추어지기 쉽고, 말을 받아들이는 계제가 바르지 않으면 참소의 길이 쉽게 열리는 법입니다.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께서 절실히 경계하고 두려워 하셔야 될 바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장현의 부자(父子)는 일찍이 정(楨)·이남(李枏)에게 빌붙은 자이겠습니까? 그의 마음가짐이나 하는 일들이 국인(國人)에게 의심을 받아온 지가 오랩니다. 이제 만약 그들의 근족을 가까이하여 좌우에 둔다면 앞으로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화란이 다 여총(女寵)으로 말미암고, 여총의 화근은 대개 이러한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어찌 알지 못할 바가 있겠습니까마는, 신은 바라건대, 성상께서 장녀(張女)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7월 6일 무자 1번째기사
7월 6일 부교리 이징명은 숙종에게 자연의 재이(災異)를 두려워할 것과 수성(修省)에 힘쓸 것을 권유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외간의 말을 빌려 재입궁한 장옥정에 대한 우려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출궁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이징명의 상소는 단순히 장옥정에 대한 총애만을 거론한 것이 아니라 남인의 재집권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이징명이 파직되고 상소를 봉입한 승지 신필·김두명까지 하옥되었다. 숙종의 “나는 본래 배우지 않아서 아는 것이 없다. 내가 비록 어둡기는 하지만 결코 이 호서(狐鼠) 같은 무리들에게 제재를 차마 받지 못하겠다”는 말이나 “너희들의 방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북인(北人)이 군주는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한다”[40] 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 분노가 상상을 뛰어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장옥정에 대한 숙종의 총애와 대우는 더욱 심해지고 융숭해졌다. 9월 5일 장령 이국화 등이 천재(天災)가 거듭 일어나 백성이 거의 죽게 되었으니, 궁중의 건축을 중단하기를 청하였다. 당시 궁궐에서는 별당을 짓고 있었는데 이 별당이 장옥정을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공사는 비밀리에 진행되어 목재를 실어 오고 목수를 불러들이는데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하여 외부가 알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숙종은 “전해 들은 것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공사를 중지하지 않았다.[41] 실제로 숙종 즉위년부터 계속하여 흉년이 반복되었고, 나라 곳곳에서 홍수, 지진 등이 있어서[42] 시의적절하지 않았고, 숙종이 비망기를 내려 스스로 재주와 덕이 없어 하늘이 견책하는 것[43] 이라며 반성까지 한 상황이었으므로 매우 부적절한 처신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숙종의 잘못된 처신이 장옥정에게 향하는 화살이 되었다는 점이다.
3.3. 정식 봉작[편집]
12월 10일 숙종은 서인 세력의 항소를 일소에 부치듯 장옥정을 숙원(淑媛)으로 봉작하였다. 숙원은 내명부 종4품에 해당하는 가장 말단 후궁이지만 사가의 첩실과 다르며, 내명부에 속한 관원이자 왕실의 일원으로서 궁방을 운영하며 재산권 행사를 할 수 있다. 이로써 장옥정의 입지는 매우 굳건해지고, ‘조적(趙賊)’으로 불리는 귀인 조씨 수준의 죄를 짓지 않고서는 인현왕후가 함부로 쫓아내거나 죽일 수도 없게 되었다. 아직 왕자녀를 생산한 공로가 없는데도 직첩을 받았으니 충분히 과한 행보였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백 명의 노비까지 하사하였다.[44]
12월 14일 사간원 정언 한성우(韓聖佑)[45] 는 “장씨에게 봉작을 더해 주시는 전하의 거조에 과연 추호도 사사로운 뜻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46] 라고 하면서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 때문이며, 전하가 장씨를 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라고 상당히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나갔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니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궁인(宮人)들은 왕족(王族)들과 체결(締結)하고, 왕족들은 사대부(士大夫)들과 결탁하여 갖가지로 아첨하고 없는 사실을 날조(捏造)하며 음흉한 소문을 지어내어 군주를 모함하는 습관은 진실로 매우 통탄할 일이다. 지금부터 이와 같은 일은 드러나는 대로 효시(梟示)하는 것을 영갑(令甲)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의 전교 가운데 왕족(王族)은 대체로 제공주(諸公主)들을 가리킨 것으로서, 익평 공주(益平公主)의 집이 더욱 의심을 받았다. 나중에 대신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환수(還收)하였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4일 갑자 4번째기사
숙종은 “모욕을 당했다.”고 분노하면서 한성우를 체직하였다. 여기서 왕족과 체결한 궁인은 인현왕후나 영빈 김씨 또는 두 사람 모두를 가리키고 사대부와 결탁한 왕족은 주가(主家: 공주가)로 특히 익평위 홍득기(숙안공주의 남편)의 집이 의심받았다. 그러나 승정원과 홍문관이 일제히 한성우를 두둔하고, 영의정 김수항과 우의정 이단하의 진언[47] 으로 숙종의 전교는 회수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숙종은 의빈(儀賓)의 정사 참여를 다시 국법대로 금지하고 지난번 해창위 오태주(명안공주의 남편)가 진청한 일[48] 은 앞으로의 폐단이 될 수 있다며 들어주지 않았다. 즉 오태주를 통해 경고 조처를 한 것이다. 실록의 찬자는 이날 기사에 ‘여러 공주들은 다 장씨(張氏)에게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태주가 이러한 엄한 교지를 만나게 된 것’이라고 썼는데, 숙안공주·숙명공주·숙휘공주·명안공주는 모두 서인 가문의 며느리로 인현왕후, 영빈 김씨와 인척이었다.
4. 기사환국[편집]
4.1. 유언비어[편집]
1687년(숙종 13) 2월 15일 숙원방에 노비를 줄 때 누락되었다면서 전토(田土) 1백 50결(結)을 주라고 명하였다.[49] 다만 승정원에서 “흉년으로 종묘의 제향도 절감하자는 의논이 있으니, 시급하지 않은 일은 기다렸다가 천천히 의논하자.”고 하니,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갈라 주도록 하였다.
이렇게 장옥정에 대한 총애가 멈추지 않더니, 1월 23일 조사석을 이조판서로, 5월 1일에는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50] 이때 숙종이 복상(卜相)[51] 의 관례를 무시하고 우의정을 임명하였으므로 홍문관 부교리 민진주(인현왕후의 사촌)가 임금이 직접 재상을 임명한 행위를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52] 이는 조사석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노론이 국왕의 인사권 행사를 제어하려고 든 중대한 사건이었다.[53] 그 후 조사석은 여러 번 사직을 청하고, 숙종은 허락하지 않는 일이 계속되었다.[54] 『숙종실록』에는 조사석이 사직을 청한 이유에 앞서 ‘후궁 장씨의 어미는 곧 조사석의 처갓집 종’[55] 이라고 하면서 사통하는 관계라고 하였다. 또 조사석이 ‘궁액(宮掖)에 연줄을 대어 남몰래 정승 자리를 도모한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조사석이 꺼리어 계속하여 면직하기를 바랐다’고 하였다.[56]
이해 6월 여러 도(道)에 큰 수해가 났는데, 실록의 찬자가 “옛적의 역사에 큰 수해를 여총(女寵)의 징조”라고 했다면서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썼다.[57] 그만큼 장옥정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때에 김만중이 “후궁 장씨의 청탁으로 정승이 되었다.”며 유언비어를 언급하는 바람에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58] 숙종이 장옥정에 대한 총애나 청탁으로 조사석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나중에 이 유언비어의 출처는 영빈의 이모부 홍치상으로 밝혀졌다.[59]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는 부친을 구명하기 위해서 홍치상이 ‘숙명공주에게 들은 말’이라고 하였으나 숙종이 홍치상 스스로 흉언(兇言)을 지어낸 것이라며 홍태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60]
장(張)의 어미가 조사석의 처갓집 종이란 것은 전연 허황한 말이고, 사통(私通)했다는 말은 더욱 무리(無理)한 말이다. 적(賊)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은 진시로 조사석과 지친(至親)이고, 조사석은 또한 이미 탁룡(濯龍)에게서 수계(受戒)한 사람이고 보면, 궁중(宮中)에서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의지함은 당초부터 일찍이 길이 없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 이제야 유독 동평군 항에게만 의지하게 되었겠는가?
숙종실록보궐정오 18권, 숙종 13년 6월 16일 임술 1번째기사
한편 소론이 주도하여 수정한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 이 사건은 모함으로 정정된다. 또한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이자 『숙종실록』의 총재관인 민진원은 개인 저서인 『단암만록』에서도 ‘(장)형이 일찍 죽어 그 처(其妻)가 가난이 심해 품팔이(傭)를 하였으며, 이웃에 사는 조사석 집에 수시로 출입하여 조사석 부인에게 빌어먹었다(丐食)’고 썼다. 그러나 민진원이 쓴 이 문장은 윤씨가 장형의 첩이 아닌 처였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해당 문장에 쓴 여종(婢)이 신분제 상의 노비 신분을 뜻한 것이 아니었음을 본의 아니게 후세에 증명해 버리고 말았다. 종(奴·婢)엔 사전적 의미 외에도 사용자의 인성에 따라 고용인(雇傭人: 보수를 받고 기술이나 노동,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사람) 혹은 지위나 무력 등으로 인한 입장상의 약자를 폄훼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61] 따라서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첩이 아닌 정처로 보아야 맞다.
4.2. 옥교 사건[편집]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실록은 ‘왕자가 탄생하였으니 소의 장씨가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62] 왕자를 낳을 당시 장옥정은 종4품 숙원에서 정2품 소의(昭儀)로 품계가 높아졌다. 이같은 숙종의 지극한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소원하던 왕자를 낳은 것이다. 이 왕자가 바로 20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경종이다. 숙종에게는 재위 14년 만에 얻은 맏아들이자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얻은 자식이었다. 이때 숙종의 나이 28세, 장옥정의 나이 30세였다.
장옥정이 왕자를 낳자,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서 어머니가 윤씨가 지붕이 있는 가마인 8인 옥교(屋轎)를 타고 궁중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 사헌부 지평 이익수·이언기는 사헌부의 금리(禁吏)를 시켜 옥교를 메고 왔던 노비를 치죄하고 옥교까지 빼앗아버렸다. 또 천인(賤人)이 옥교를 탔다고 하면서까지 그 무엄함을 규탄하기도 하였다.[63]
이에 숙종은 사헌부와 형조에 문목(問目)을 보내 출입패인 동패(銅牌)에 ‘입(入)’자를 쓰고 나갈 때는 ‘출(出)’자를 써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모두 왕명에 따라서 했고, 연전에 귀인(영빈 김씨)의 모친이 출입할 때에 사헌부에서 이와 같이 모욕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후궁의 산실은 으레 궁중에 만들기 때문에 후궁의 본가로 하여금 들어와서 간호하고 교자를 타고 출입하도록 허가한 것은 지금 새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전해 오는 옛 규례이며, 궁중의 시녀들은 한 천인에 불과하나, 직품이 상궁에 오르면 법에 의하여 교자를 타게 된다며 반박하였다. 숙종은 지평 이익수와 이언기를 곧바로 파직하였으나 승정원의 간쟁으로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64]
당연히 원칙대로 한다면, 윤씨는 지체가 낮아 지붕이 있는 옥교를 탈 수 없다. 본래 옥교는 당상관의 부인이나 며느리나 되어야 탈 수 있지만, 영빈의 어머니도 당상관의 부인이 아닌데 옥교를 타고 궁중을 출입하였다. 하지만 조사석이 지적하듯 “장 소의의 어미는 여항의 천인”이고 “영빈의 내외족당은 여러 대에 걸쳐 중요한 벼슬을 한 집안”이니 같지 않았고, 또 윤씨가 탄 옥교는 8인이 메는 옥교로써 공주나 옹주가 탈 법한 “만든 모양이 매우 사치하고 참람함이 지나친 것”이었다.[65]
4.3. 원자 정호 사태[편집]
1689년(숙종 15) 1월 10일 숙종은 창덕궁 희정당에서 원자 정호의 뜻을 밝히며, 반대한다면 사직하고 나가라는 강경한 의지를 보였다. 이는 곧 장옥정의 낳은 왕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으로, 인현왕후의 임신 및 출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이야기다. 당시 인현왕후는 23세로 젊은 나이였고, 왕자는 태어난 지 백일도 안된 갓난아기였다. 대신들의 뜻은 “중궁께서 생남(生男)의 경사가 없으면 국본(國本)은 자연히 정해질 것”이라는데 모아졌지만, 숙종은 자신이 서두르는 이유로 “국세가 외롭고 위태한데다 강국(强國: 청)이 이웃에 있어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리고 “대계는 이미 정해졌다.”는 말로 원자 정호를 완전히 못 박는다.
바로 다음 날인 1월 15일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로 정호하고, 4일 뒤 종묘와 사직에 고한 후 원자의 생모인 장옥정을 희빈(禧嬪)으로 봉작하면서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삼았다. 또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는 좌의정의 관직을 추증하여 원자 외가의 격을 높여 주었다.[66]
예치(禮治)를 통한 유교적 이상세계를 지향했던 조선사회에서 ‘종법(宗法)’의 핵심은 직계의 종가(宗家)를 이을 ‘종자(宗子)’를 영속적으로 세워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종법의 가계계승 원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적장자 계승의 원칙이었다. ‘적장계승(嫡嫡相承)’, 즉 적자(嫡子)에서 적손(嫡孫)으로 계승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가의 계승방식으로 여겼다.[67] 그러나 왕실에서는 적장계승을 현실세계에서 실현시키기가 쉽지 않았다.[68] 숙종은 이러한 환경에서 후계자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우선 ‘후궁 소생의 서자’라는 타이틀을 세탁하고자 했다. 즉 원자 정호는 장옥정의 아들을 단순한 서자가 아닌 ‘장자(長子)’로 삼아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정통성을 부여하는 정치 행위였다.
2월 1일 봉조하 송시열이 원자 정호에 관한 2본의 상소를 올렸다. 원자 정호가 지나치게 성급하다는 말이지만, 상소의 핵심은 숙종의 이러한 정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졌으니, 임금과 신하의 분의(分義)를 다시 논(論)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면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하였다. 숙종이 송시열을 삭출하면서 “이런 것을 그대로 두면 무장(無將)의 무리들이 장차 연달아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데서 의도를 알 수 있다.
2월 2일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하고 영의정에 여성제(소론), 좌의정에 목내선(남인), 우의정에 김덕원(남인)을 임명하여 기사환국의 서막을 열었다.[69]
4.4. 왕비 책례[편집]
1689년(숙종 15) 4월 21일 숙종은 사헌부 관원들과 청대하는 자리에서 불쑥 궁중의 내전에서 자신이 당한 변괴(變愧)를 이야기하였다. 이 자리는 송시열의 죄상과 형률을 논하는 자리였는데, 숙종은 청대를 시작할 때부터 “단지 송시열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궁위 사이에도 변괴가 있으니, 대간이 다 논진(論陳)한 다음 말하겠다.”고 하며 운을 떼었다. 그 변괴는 인현왕후가 선왕과 선후의 말을 가탁하여 장옥정에게 아들이 없을 것이라는 간교한 말을 한 사실이었다.
병인년 희빈(禧嬪)이 처음 숙원(淑媛)이 될 때부터 귀인(貴人)에게 당부(黨付)하였으며, 분을 터뜨리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內殿)과 귀인(貴人)은 선묘(宣廟)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淑媛)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액정(掖庭)에 있게 되면 경신년에 실각(失脚)한 사람들에게 당부(黨付)하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승지 이시만과 목창명 이하 사헌부 관원들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혹스러워 하였다. 이들은 숙종이 너그럽게 용서하고 참아서 수신제가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인현왕후가 선왕과 선후의 말까지 끌어다가 속인 만큼, 이러한 마음을 가진 인현왕후가 원자를 자기 자식처럼 아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입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원자가 탄생한 뒤에 더욱 불평하고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있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여자가 쓰는 모자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남자의 모자를 쓴다니 실로 뜻밖이다.’하고, 궁인들 중에도 왕자가 탄생한 것이 의외의 일이라고 말하는 자가 몇이 있으니,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국본(國本)을 일찍 정한 본의가 이것이다.” 《기사유문(己巳遺聞)》
연려실기술 제35권 /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임금이 말하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실로 이는 뜻밖이다.’ 하였다. 일찍 국본(國本)을 정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숙종은 후궁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호하여 ‘장자’의 지위를 명확히 하였다. 그렇지만 원자의 생모인 장옥정은 여전히 후궁의 지위였으므로 원자의 적통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인현왕후는 원자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기는커녕 불만을 터트리며 불온한 언행을 일삼았다. 이러한 인현왕후의 언행은 장옥정 모자(母子)에게 매우 위협적이었다. 다시 말해 경종이 숙종의 씨가 아니며, 장옥정이 어디서 ‘씨가 다른 자식’을 데려와 바꿔치기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면서 “후사(後嗣)에게 화(禍)를 끼치게 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과궁(寡躬)의 실덕(失德)을 감수하겠다.”[70] 는 발언이 괜히 나온 발언이 아닌 셈이다. 물론 이러한 인현왕후의 언행은 갑술환국을 기점으로 일부분이 삭제[71] 되었으나 『기사유문』의 존재는 남아있었던 탓에 『연려실기술』을 통해 전해지고 말았다.
4월 23일은 중궁전의 탄신일이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상 단자(貢上 單子)와 축하단자[賀單子]를 바쳤는데, 주상이 모두 환급하라고 명하였다.진상하려고 마련한 음식은 모두 후원에 파묻으라고 명하고, 날마다 진상 하는 일도 이와 같이 폐지하라고 명하였다. 이처럼 크게 잘못된 조치가 나온 것은, 안에서 희빈 장씨가 날마다 이간하는 참소를 올리고, 바깥에서 남인(南人)이 몰래 주상의 뜻을 꼬드겼기 때문이었다.
四月二十三日, 卽中宮殿誕辰也, 例納供上單子及賀單子, 上皆命還給. 供上盤羞, 皆命埋諸後苑, 命廢日供上之如此, 大過舉, 內則有張嬪之日進讒間, 外則有南人之潛誘上意故也.
이문정,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 『수문록』
이로부터 이틀 뒤인 23일은 인현왕후의 생일이었는데, 생일 문안까지 금지시켰다. 이때 인현왕후는 폐출되기 전 24일 숙종과 크게 말다툼을 하면서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할 것인가?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72] 라는 언사까지 할 정도로 부부 관계가 망가져 있었다. 결국 인현왕후의 교명(敎命)·책보(冊寶)·장복(章服) 등이 불살라지면서 5월 4일 폐비에 관한 일을 종묘와 효사전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불과 이틀 만에 장옥정을 새 왕비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 너 장씨는 늘 내칙(內則)을 따라서 덕이 후궁 중에서 으뜸이니, 성품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주(周)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고, 몸소 문안하여 대비(大妃)를 섬기게 되더니, 어찌 다행히도 시중들던 끝에 과연 이처럼 단장을 마치는 경사가 있게 되었는가? 중대한 종사(宗社)를 부탁할 데가 있게 되는 것은 하늘이 나라를 돕는 것이고, 『춘추(春秋)』의 의리에서 상고할 것은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하여지는 것인데, 마침 중궁 자리가 비었을 때에 존귀한 중전 자리에 합당하다.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 10월 22일 기묘 1번째기사
다만 장렬왕후의 국상 중이었으므로 실제 책례는 이듬해인 1690년(숙종 16) 10월에 치러졌다. 드디어 조선 최초로 중인 신분이면서 왕비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일련의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다.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왕실의 훈척이거나 또는 훈척에 가까웠던 서인계 인물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 남인들도 인현왕후 폐출에 선뜻 동의하지 않을 정도로 명분도 없었다.[73] 그렇다고 남인이 박태보처럼 끝까지 인현왕후를 위해서 절개를 지킨 것은 아니다. 일례로 권대운 등은 ‘임금이 어렵게 여기고 있는 것은 희빈(禧嬪)의 출신이 미천하기 때문인 것’이라면서 장옥정의 친정을 위하여 역관 장현에게 상을 내릴 것을 청하여 대신의 은례(恩例)에 따르게 하였고, 또 장희재를 무신(武臣)의 극선(極選)인 무고(武庫: 군기시)와 태복(太僕: 사복시)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74] 민종도는 빈청에서 큰 소리로 “지금 임금께서 내전(內殿)을 폐출하려 하니, 신하들은 마땅이 예에 따라 논집(論執)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강력히 간쟁하여 기어이 절의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숙종의 뜻을 적극 봉행하였다.[75]
4.5. 대군 출산[편집]
1690년(숙종 16) 6월 7일 산실청이 설치되었다.[76] 7월 19일 산통을 느끼자 내의원에서 불수산(佛手散: 출산을 돕는 처방)에 익모초 2돈을 가하여 올렸고, 장옥정은 무사히 대군 성수(盛壽)를 낳았다. 숙종은 매우 기뻐하면서 산실청에 참여한 의관 김유현(金有鉉)과 권유(權愉)를 가자(加資)하도록 명했다가 불가하다는 반대로 김유현에게 수령직을 제수하고, 권유에게 숙마 1필을 하사하였다.[77]
새로 낳은 왕자(王子)가 죽었다. 장씨(張氏)가 낳았는데, 낳은 지 겨우 열흘이었다. 예조(禮曹)에서 조시(朝市)를 멈추고 예장(禮葬)하는 등의 일을 아뢰었다.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 9월 16일 계묘 2번째기사
중궁전이 해산한 뒤에 대전, 중전에 약방이 문안하였다. 답하기를, 알았다. 정원과 옥당이 문안하였다. 답하기를, 알았다.
中宮殿解娩後, 大殿·中殿, 藥房問安。答曰, 知道。政院·玉堂問安。答曰, 知道.
승정원일기 18책 (탈초본 342책) 숙종 16년 7월 19일 무신 10/14 기사
이러한 기쁨도 잠시로 출산한 지 두 달여가 지난 9월 16일, 대군이 죽고 말았다. 여기서 기록이 충돌한다. 우선 『숙종실록』에서는 ‘장씨(張氏)가 낳았는데, 낳은 지 겨우 열흘이었다’고 나오는데, 『승정원일기』에서는 대군이 7월에 태어나 산실청에 문안하고 중궁의 기후에 대해 묻고 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대군이 생후 열흘 만에 죽었다는 기록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실록 편찬 과정에서 잘못되었거나 의도적인 누락으로 의심된다. 대군의 사망 원인은 기록에 자세한 정황이 나오지 않아 추측이 어려우나 워낙 영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78] 비록 둘째아들을 잃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왕세자의 생모이자 국모인 왕비였고 총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듬해 1691년(숙종 17) 진선 정시한이 상소하여 폐출된 인현왕후를 별궁에 살게 하고 늠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바로 삭탈하고, 차후 폐비에 대해 말하는 자는 중벌로 다스리겠다고 위협하였다.[79] 반면 부원군이 된 장형의 사당을 나라에서 지어주기로 하였다. 사당의 규모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하게 짓는데 공사에 충당하라고 은 1,000냥을 특별히 하사하기도 하였다.[80] 또 묘소에 신도비를 세우고 시호를 내려주었다. 원래 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으면 연시(延諡)라고 하여 집안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숙종은 그녀의 친정에 이 잔치 비용까지 보내주고 삼정승을 비롯한 조정의 관리들을 모두 참석하게
5. 갑술환국[편집]
5.1. 환국의 징조[편집]
1693년(숙종 19)은 불우한 해였다. 이해 2월 1일, 수일 전부터 왕세자의 왼쪽 뺨과 턱 아래가 부어올라 약간 붉고 열이 나며 만지면 아픈 증상이 나타났다.[82] 그런데 아들에게 종기가 생기자마자 장옥정에게도 종기가 생기더니 2월 21일에는 숙환(宿患)인 담화(痰火)가 재발하였다.[83] 숙환은 오랫동안 앓아왔던 병증을 말하는데 대비, 왕비, 세자빈이 아니면 보통 후궁의 병증은 『승정원일기』에 기록하지 않아서 그녀가 언제부터 숙환을 앓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의학에서 담(痰:가래)으로 인해 생긴 화(火)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났던 약 6년의 궁녀 시절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서 드디어 형용하기 어려운 병이 생기게 되었는데, 해가 갈수록 더욱 고질이 되어 화열(火熱)이 위로 오르면 때때로 혼미(昏迷)하기도 했다.
경종수정실록 5권, 경종 4년 8월 2일 임신 1번째기사
경종은 어린 시절부터 담화가 있어서 재위 기간 중에는 상초(上焦:심장 아래)가 꽉 막힌 것 같은 증세로 약을 처방받은 기록[84] 이 있다. 이를 보아 어려서부터 건강 체질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생후 7개월 즈음인 숙종 15년 5월 22일에 발병한 미감(微感: 가벼운 감기), 해수(咳嗽: 기침), 비체(鼻涕 : 콧물) 등의 증상[85] 을 시작으로 눈병, 부스럼 등 다양한 질병 기록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아들처럼 그녀도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담화를 앓았을 수 있다. 더군다나 왕세자가 건강하지 못하면 왕비의 지위도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점은 심리적으로 큰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4월 1일 장옥정의 오빠 장희재가 포도청의 사찰 사건으로 인하여 포도대장 직임을 내려놓았다.[86] 장옥정에게 있어서는 큰 타격이었다. 총융사와 포도대장 직임을 맡아 군권과 경찰권을 쥐고 있던 장희재의 날개 하나가 꺾였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장옥정의 새로운 연적인 숙빈 최씨가 등장한다. 숙빈은 4월 26일 숙원 봉작을 받으면서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해 10월에 왕자 영수(永壽)를 출산하므로 숙원으로 봉작될 때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이 사실을 장옥정의 숙환과 연결한다면, 후궁 시절부터 앓았던 담화가 1693년(숙종 19)과 1694년(숙종 20)에 재발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옥정이 왕비의 자리에서 후궁으로 강등될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무렵이기 때문이다.
남인 측도 숙종의 변심을 기민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예로 당시 숙원이었던 최씨가 왕자를 낳자 이현일(남인)이 숙종에게 적서의 분별을 엄정히 해야 한다고 아뢰는 일이 있었다. 이는 왕세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새로 태어난 왕자는 서자임을 주지시키는 발언이었다.
이현일이 아뢰기를, 국가의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는 실로 바라고 기다리는 가운데 큰 경사입니다. 다만 예로부터 적서(嫡庶)의 구분은 엄정함이 엄연히 엄하여 지금 왕세자가 점점 장성해지는데, 이처럼 어렸을 때에 때때로 서로 만나 엄격한 구분을 알게 하고, 그로 인해 습성이 더불어 자라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끝없는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상이 이르기를, 유신이 아뢴 바가 참으로 좋으니, 각별히 유념하겠다고 하였다.
玄逸曰, 國家螽斯之慶, 實出於喁俟之際, 慶莫大焉。第自古以來, 嫡庶之分, 截然有嚴, 卽今王世子, 漸至長成, 及此蒙幼之日, 時時相見, 使知截然之分, 以之習與知長, 則是乃無疆之休也. 上曰, 儒臣所達誠好, 各別留心焉.
승정원일기 18책 (탈초본 354책) 숙종 19년 10월 13일 계미 20/32 기사
불행 중 다행히 이 왕자는 태어난 지 두 달여 만에 죽었다.[87] 그러나 최씨가 연달아 두 번째 임신을 한 상태여서 궁중 내 입지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중궁(=희빈 장씨)의 숙환이 담화(痰火)이며, 이미 고질병이 되었다[88] 고 말했다. 즉 장옥정은 숙종의 총애가 다른 여성에게 옮겨가고 병약한 왕세자와 왕비 지위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5.2. 고변과 역고변[편집]
1694년(숙종 20)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함이완의 고변을 숙종에게 아뢰었다. 고변의 요지는 소론인 한중혁과 노론인 김춘택 등이 금품을 모으고 사람들을 길러 환국을 도모한다는 것[89] 으로, 한중혁은 주로 상인들로부터 김춘택은 주로 역관들로부터 거사 자금을 갹출하여 상당량의 은화를 모집하였다.[90] 김춘택은 권모술수에 능하여 궁인의 동생을 매수해서 첩으로 삼아 궁궐과 통했고, 심지어 장희재 처와 간통까지 하면서 남인을 정탐하였다.[91]
3월 29일 불과 6일 만에 김인의 역고변이 잇따른다. 고변의 요지는 장희재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숙빈을 독살하려 한다는 것, 또 신천군수 윤희와 훈국별장 성호빈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데 훈국대장 이의징이 참여하였으며 민암·오시복·목창명 등 남인이 결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남인들은 이를 김인이 이의징에게 원한이 있어서 지어낸 고변이라고 말했고 숙종도 이를 수긍하였다.
민암 등은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의 노론을 일망타진하려고 김 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옥사를 일으켜 국문하였다. 이들을 완전히 제거 하려고 한 민암의 계획과는 달리 숙종은 4월 1일에 오히려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함부로 죽인다[愚弄君父 魚肉搢紳].”고 민암을 질책하여 처벌하였고[92] 영의정 권대운을 비롯하여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시켰다. 대신 영의정 남구만, 우찬성 박세채, 좌참찬 윤지완 등의 소론계로 인사 교체를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숙빈이 기사환국 이후에 장희빈으로부터 크게 시기를 당해서 거의 그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다.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이 인경왕후의 본방과 친밀하였는데, 갑술환국 때에 세상 사람들이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해서 숙빈에게 계책을 만들어서 남인의 정상(情狀)을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그래서 큰 처분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按淑嬪承恩在己巳之後, 大被猜毒於張氏, 殆不得保其性命, 肅宗乳母稱奉保夫人者與仁敬妃本房親密, 甲戌飜局時, 世多言金鎭龜之子春澤, 因奉 保設策於淑嬪, 以南人情狀詳, 聞于上前, 致有大處分云, 故南少輩, 便指淑嬪, 爲金家私人矣.”
민진원, 이희환 옮김, 『단암만록』
이는 갑술환국이 이루어진 후에 노론 측에서 “춘택의 공이 있었으니, 그의 부친 김진구(金鎭龜)로 대장을 삼아서 그의 공을 갚는 것이 마땅하다.”[93] 고 하였는데, 이 말은 환국의 직접적인 원인이 숙빈을 배후에서 조종한 김춘택의 노력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남인과 소론들은 숙빈을 가리켜 ‘김씨들의 사인(私人)’[94] 이라고 하였다.
5.3. 후궁 강등[편집]
4월 1일 숙종은 폐인(廢人: 인현왕후)·홍치상·이사명 등을 위하여 변명, 구원하는 자는 역률(逆律)이나 중률(重律)로 엄히 다스리겠다고 지시하며 환국을 일단락지었다. 그런데 숙종은 4월 9일 폐인을 어의궁에 옮겨 거처하게 하는 예우를 논의하더니 4월 12일 폐인(廢人)이 아닌 전비(前妃)라고 일컫으며 서궁(西宮)의 경복당(景福堂)으로 들어오게 했다.[95] 이때까지 장옥정은 왕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 오히려 곤위(坤位)에 잇거늘 폐비 민씨 어찌 문안치 아니하느뇨. 크게 실례하며 방자함이 심하도다."
『인현왕후전』
이튿날 정전(正殿)에 나아간 뒤에 임금이 비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경덕궁(慶德宮)에 이처(移處)하고 내가 몸소 가서 맞이하면, 바로 예(禮)에 맞고 경에게도 빛이 있을 것인데, 살펴 생각하지 못하여 큰일을 너무 갑작스레 처리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숙종실록』 숙종 20년 4월 12일
그러므로 《인현왕후전》에서 드러나는 장옥정의 요구는 일견 타당해보인다. 또 인현왕후도 폐비의 신분으로 돌아왔기에 왕세자와 조정의 문안을 받지 않으려고 했고, 왕세자 앞에서 앉아있을 수 없다며 일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이날 장옥정의 거처를 별당으로 옮기게 하고, 왕비 새수를 거두고, 희빈의 옛 작호를 내려주되 왕세자인 경종이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지하지 않도록 조치했다.[96]
6. 무고의 옥[편집]
6.1. 전개 과정[편집]
1701년 9월 24일 숙종이 제주에 유배 가 있는 장희재를 처형하라고 비망기를 내렸다. 비망기의 내용은 '지위가 강등된 뒤, 장희빈은 울분의 나날을 보내며 숙종과 인현왕후에게 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시 중전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게다가 인현왕후를 중궁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민 씨'라고 부르면서 요사스러운 여자라고 욕했다. 인현왕후가 시름시름 앓자,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으면 자신이 다시 왕비가 될 것이라 믿고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 뒷쪽 별채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였다.
무고의 옥은 숙빈 최씨가 취선당의 신당과 인현왕후 저주를 고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고변으로 숙종은 취선당 궁인들에 대한 국문을 시작하였다. 실제로, 중궁전인 통명전 동물들의 사체가 발견되었고 취선당에 설치되었던 신당에서도 여성의 옷을 입은 인형이 발견되었다. 숙종은 장씨 휘하 궁인들도 친국하였고 취선당 궁인들은 신당을 왕세자의 두창이 치유되길 기원하기 위해 1699년 설치한 것으로 자백했다. 그러나 1701년까지도 취선당의 신당을 치워지지 않았고 이에 대한 의혹을 숙빈 최씨가 숙종에게 제공한 것이다. 이에 장씨 휘하 궁인들은 신당을 치우면 령이 노해 왕세자에게 해가 갈까 치우지 않은 거라 자백했지만 가혹한 고문을 못 이긴 궁인들이 추가 증언으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빌었다고 자백하여 결국 희빈 제거가 결정되었다. 신당을 차려 치성을 드리는 일부터가 무속 신앙을 천대하였던 당시 사회에서 큰 허물이 될 수밖에 없다.[97] 인현왕후도 죽기 전 '취선당의 궁인들이 대조전을 함부로 드나들고 자신의 몸이 아픈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며 인현왕후 본인도 생전에 장희빈의 저주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취선당 궁인들의 자백대로 1699년에 신당이 설치되었고 1701년까지 유지되었다면 궁궐 내에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6.2. 예정된 죽음[편집]
9월 25일 장옥정의 운명이 결정되었다.[98] 이날 숙종이 비망기에서 한나라의 무제가 구익부인[99] 을 죽인 일을 언급할 때부터 그녀의 죽음은 예정된 일이었다. 왕세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소론 대신들의 반대가 이어졌지만, 숙종은 동부승지 윤지인, 가주서 이명세 등을 파직 및 삭출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하였다.[100] 심지어 죄상을 밝히겠다고 연일 관련자들을 친국하는 중에 세 번이나 차자를 올리면서 옹호한 최석정을 중도부처하기까지 하였다.[101]
왕세자가 상소를 올렸다. “신이 올해 14세이지만 제 어머니의 악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청컨대 어머니와 함께 죽여주십시오.”
王世子疏略曰, “臣今年十四, 其母爲惡, 必無不知之理, 請與母同死云云.”
남하정, 원재린 역주, 『동소만록』, 「王世子疏」
이때 세자의 나이 열세 살이었는데,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신의 어미가 죄를 지었는데 신이 몰랐다고 할 수 없으니, 같이 죽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또 궁문 밖에 거적을 깔고 여려 신하들에게 울면서 하소연하여 말하기를, “내 어미를 살려주십시오.” 하였다. 좌의정 이세백은 옷깃은 뿌리치고 피하였는데, 최석정이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감히 죽음으로 저하에게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時世子年十三, 上書言: “臣母為非, 臣不應不知, 請同死.” 且席藁宮門外, 泣訴諸臣日“願活我母”. 左相李世白拂衣而避之,錫鼎泣曰“臣敢不以死報邸下?”
이건창, 김용흠 역해, 『당의통략』
왕세자 역시 생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상소를 올렸다. 자신은 어머니의 잘못을 모르지 않는 나이이므로, 어머니와 함께 죽기를 청한다는 간절함을 담았다.[102] 그러나 왕세자의 효성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빈어(嬪御)가 후비(后妃)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게 하라.”[103] 고 하교하는 한편, 10월 8일 다시 한 번 자진하라는 비망기를 내리면서 종묘사직과 왕세자를 위해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임을 강조하였다.[104]
6.2.1. 죽음의 방식[편집]
“네 대역부도를 짓고 어찌 사약을 기다리리요. 죽는 것이 옳거늘 요악한 인물이 행여 살까 하고 안연(晏然)히 천일(天日)을 보고 있으니 더욱 사죄(死罪)로다. 세자의 낯을 보아 형체나 온전히 하여 죽음이 네게는 영화라. 어서 죽으라.”
작자미상, 정은임 교주, 『인현왕후전』
임금이 하교하기를, “장씨(張氏)가 이미 자진(自盡)하였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장(喪葬)의 제수(祭需)를 참작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10일 계해 2번째기사
10월 10일 장옥정은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에서 자진하였다. 처음 자진하라는 비망기가 나오고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인현왕후전』이나 노론계 당론서인 이문정의 『수문록』 등에는 장옥정이 사약을 받은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장옥정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빨리 먹이라.”며 사약을 연달아 세 그릇을 부어버리거나 한 그릇의 약으로도 오장육부를 다 녹일 수 있는데 세 그릇을 함께 부으니 짧은 시간에 두 귀, 눈, 코와 입으로 검은 피가 솟아나 땅에 고였다거나 죽은 뒤에 시신이 다 녹았다는 이야기는 『인현왕후전』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숙종실록』을 비롯한 관찬 자료에서 장옥정의 죽음은 자진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방식은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사약같은 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장옥정의 자진과 관련하여 숙종은 사약을 언급하였으나 당시 판중추부사 서문중·우의정 신완·이조판서 이여 등이 왕세자를 낳아서 기른 사람에게 유사(攸司: 관청)의 형벌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승정원에서 국왕의 전지(傳旨)를 받아 집행하는 공식적인 절차없이 진행되었다. 이는 성종 때 폐비 윤씨의 죽음과 연산군의 복수를 거울삼아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다만 1729년(영조 5) 대사성 이덕수가 신사년의 일을 말할 때 “辛巳年禧嬪張氏賜死.”라고 하였으므로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사사(賜死), 즉 사약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105]
희빈이 죄를 자복한 날에 말하기를, “세자를 한 번 보고 난 후에 주상의 명을 따르겠다.” 하였다. 어미와 자식의 정리로 보아서 금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으므로, 주상이 세자와 만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렇다면 희빈으로서는 마땅히 눈물을 흘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악독한 말을 쏟아내면서 그 독수를 뻗쳐서 세자의 아랫도리를 침범하였다. 세자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다가 잠시 뒤에 깨어나니 궐 안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세자가 이 이후로 기이한 질병에 걸려서 용모도 점점 수척해지고, 정신이 때때로 혼미해졌다.
이문정,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 『수문록』
여담으로 장옥정이 사약을 받을 때,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못 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수문록』에 실려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기 힘든 야사에 불과하다. 남인계 당론서인 『동소만록』은 경종의 건강 상태에 대해 다르게 서술[106] 하는 데다가 경종이 나중에 자식을 보지 못한 걸 가지고 조작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장옥정 입장에서는 아들이 오래 살아서 대를 이어야 추후에 명예 회복이나마 노려볼 수 있고 제사를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아들이 조선 20대 국왕으로 즉위하지 못했다면 ‘옥산부대빈’으로 추봉되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7. 사후[편집]
7.1. 제한적인 상장례[편집]
10월 10일 밤, 흰색 휘장인 소금저(素錦褚)로 덮힌 장옥정의 시신은 창경궁 선인문의 협문을 통해 정릉동 본궁[107] 으로 보내졌다. 이때 시신이 통과하는 문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취선당이 건양현(建陽峴)[108] 과 명정전 사이에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건양현을 지나거나 동쪽으로 명정전의 어로(御路: 왕이 다니는 길)를 지나는 것은 모두 미안하다는 점에서 선인문의 협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장옥정의 상례 절차는 정릉동 본궁에서 거행하였고, ‘희빈’ 대신 ‘장씨’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장희빈상장등록(張禧嬪喪葬謄錄)』에 “장씨는 바로 희빈이다”라는 설명이 세주로 수록 되었다.[109]
비록 ‘장씨’로 호칭하되, 그 상장례는 생시의 후궁 지위에 따라 예장(禮葬)으로 거행될 수 있었다. 다만 죄인으로 죽었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숙종은 상·장·제수를 수송하겠다는 호조의 계사에 대해, “단지 제수(祭需)만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110] 이는 호조에서 지급하는 관곽을 포함한 상장의 물품을 제한하여 일반적인 예장보다 등급을 낮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왕세자와 세자빈의 거애(擧哀)와 복제(服制)가 정해졌다. 거애는 창경궁 숭문당에서 이루어졌고, 복제는 『의례』의 “서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을 입는다.”라는 예문을 근거로 3개월의 시마복(緦麻服)을 입되, 단 3일 만에 벗어야 했다.[111]
원래 장옥정의 장지는 광주의 다소미(多所味)로 12월 22일이 발인이었다. 이렇게 사망 3개월째 장례를 치르는 것은 일반적인 상례 절차와 동일하다. 그러나 11월 21일 우의정 신완이 장지에 하자가 많다고 주장하면서 전면 재검토된 것이다.
장씨(張氏)를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장사지냈는데, 발인과 하관(下棺)할 때 세자와 빈궁(嬪宮)이 금중(禁中)에서 망곡(望哭)하였다. 이보다 앞서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돈(李墩)과 종실(宗室) 금천군(錦川君) 이지(李榰)가 지관(地官)을 거느리고 여러 곳을 다니며 장지(葬地)를 고르다가 이곳을 얻어 장사지낸 것이다.
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1월 30일 임자 2번째기사
양주 인장리, 지평 수동, 수원 용봉리, 광주 하도의 땅 이렇게 네 곳의 산론(山論)을 검토하여 새로운 장지는 양주의 인장리[112] 로 정해졌다. 이처럼 발인이 4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은 그만큼 장지 선정이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풍수지리상 길지를 정하기 위해 장지가 재검토되면서, 『가례』의 3개월 장례 규정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조상과 자손은 기(氣)를 같이한다는 성리학 이념에 따르면, 조상의 체백이 온전하고 신령이 편안해야 자손이 번성할 수 있었다.[113] 따라서 생모의 묘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왕세자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장지 선정에 신중을 기한 것은, 왕세자와 희빈의 혈연관계가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114]
1702년(숙종 28) 1월 30일 발인과 하관이 진행되었고, 왕세자와 세자빈이 망곡의(望哭儀)를 행하였다.[115] 이 망곡의를 끝으로 왕세자와 세자빈의 의례가 마무리되었고, 이후 우제, 졸곡, 연제, 상제 등의 주요 상례 절차는 『장희빈상장등록』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당시 왕세자는 적모(嫡母)인 인현왕후 국상에서 상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장옥정의 발인이 4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은 ‘왕비’로 대우한 것이 아니다.
7.2. 왕세자를 위한 천장[편집]
7.3. 사친 추보[편집]
7.4. 19세기 이후[편집]
장희빈의 묘는 본래 경기도 광주시에 있었지만 1969년에 고양시 서오릉 구역으로 이장되었다. 이를 대빈묘(大嬪墓)라고 부른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대빈궁(大嬪宮)에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