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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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분야별 생활상
2.1. 기업
2.2. 군사
2.3. 부동산
2.4. 문화
2.5. 패션
2.6. 자동차
2.7. 소비 문화 전반
3. 어두운 면모
4. 참고자료
4.1. 유튜브 영상
4.2. 기사
4.3. 인터넷 글



1. 개요[편집]




1980년대 일본의 코카콜라 광고[1][2]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시기 일본의 생활상을 다룬 문서.


2. 분야별 생활상[편집]



2.1. 기업[편집]


  • 일본 기업의 아이디어가 기발하거나 독창적인 제품을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버블경제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기업이 기술 부문에 투자하고도 남아도는 잉여 자금으로 만든 것들이다. 그 시절 일본의 자동차, 제품 등을 보면 그저 돈지랄로 보이는 게 많다. 대표적으로 1991년부터 하이비전이라는 이름으로 HD 본방송을 시작했다거나[3][4], TV 기능이 내장된 손목시계[5], 온갖 기능이 첨가된 전자수첩[6], 가지각색인 게임보이 연계 기구들,[7] 슈퍼 패미컴을 내장한 TV[8], 일본의 여러 피서지의 바람 소리를 재현하는 전자 선풍기[9] 등. 버블경제 시기 일본의 컨셉카에 대해서는 이 영상을 보면 된다. 물론 당시로서는 일본의 화려한 발전에 눈이 멀어 마냥 우러러보는 시선이었지만.[10]

  • 전세계 억만장자 중 70%가 일본인이었으며 1987~1994년 세계 1등 부자가 세이부철도 회장 츠츠미 요시아키(堤義明, 1934~). 1987년 기준 순자산이 당시 가치로만 200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이 흥청망청은 모두 거품빨이었으므로 불과 몇 년도 가지 못한 건 물론이며 이후 일본을 시련으로 몰아넣었다.[11] 물론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일본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 큰 고생을 했는가 하면 여기에도 의문이 있으나...[12] 저런 호화 생활을 하다가 못 하게 되면 시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예 없이 사는 것보다 있었는데 없어진 삶을 사는 게 더 힘들다고 느끼는 게 사람 심리...

  • 프리터도 이때 유행하고 있었다. 언제든 취업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새로운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 쯤으로 취급받았다. 면접만 받으러 가도 교통비로 쓰라며 3~5만엔을 꽂아주는 시대였으니 면접만 보러 다니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13]

  • 백화점에서 무려 지하철 전동차를 판매한 적도 있었다. 그 주인공은 영단 500형 전동차. 1988년부터 마루노우치선02계 전동차가 도입되면서 500형 전동차의 폐차가 시작되었다. 1989년 처음 매각된 6량의 매각 방식이 비범했는데, 바로 미츠코시백화점 니혼바시 본점에서 판매한 것이다.당시 모습 미츠코시백화점 본점에 샘플로 454호를 전시하고 판매했는데, 당시 언론에서도 <백화점에서 지하철 전동차를 40만 엔에 판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14] 당시 미츠코시백화점에서 살 수 있는 가장 큰 상품이기도 했고, 하필 판매 시기가 다름 아닌 버블경제 시기였던지라 구매 희망자가 쇄도했다. 그 결과 구매 희망자를 추첨해서 팔 정도였고, 당초 24량을 판매할 생각이었다가 인기가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 18량을 부랴부랴 해체한 영단에서는 후회했다(...) 말 그대로 없어서 못 판 것이었다.

  • 일본항공은 이 때 보잉 747을 대량으로 운영하면서 국내선 국제선 가리지 않고 747을 투입했다. 도쿄-오사카, 도쿄-오키나와, 도쿄-후쿠오카, 도쿄-삿포로에 500석짜리 국내선 전용 747전일본공수와 같이 집어넣기도 했고[15], 호놀룰루행을 도쿄, 오사카 외에 나고야나 후쿠오카 심지어 삿포로 출발으로도 굴렸다. 그 외 일본계 브라질인이 많은 브라질 상파울루 노선에도 하루 두 번 747을 도쿄 출발 로스앤젤레스 및 뉴욕 경유로 굴리기도 했다. 1988년[16]부터 1995년[17][18]까지 일본항공 본사의 모든 여객용 기재는 복도 한 개짜리 협동체 없이 복도 두 개짜리 광동체로 구성되어 있었다.[19] 이 때의 영향으로 일본항공은 2011년 747 전량 퇴역 때까지 도합 126기의 747을 운용한 세계 최대 747 운용사로 꼽혔고, 버블 붕괴 이후로도 이 시절의 버릇을 못 고치다가 상장폐지까지 당하고 겨우 회생했다.

  • 일본의 백화점 그룹 소고는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호화로운 수준으로 백화점을 꾸민 것은 기본이고[20] 몇몇 지점은 아시아[21], 세계[22]에서도 최대급으로 꼽힐 정도에 한반도를 제외한 동아시아 전역, 동남아시아, 서유럽, 미국에까지 점포를 내며 공격적으로 확장세를 이어나가 전성기에는 매장 수가 40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고는 2000년 파산했다.


2.2. 군사[편집]


  • 자위대는 버블경제를 바탕으로 군비증강을 단행했다. GDP 대비 국방비 1%라는 제한이 걸려 있었지만 그 1%만으로도 세계 3위의 국방비를 기록했기 때문에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1980~90년대에 걸쳐 F-15J, E-2, 공고급 구축함,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같은 첨단무기들을 도입했으며 해공군력의 질은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을 크게 앞선다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였다. 해상자위대항공자위대에서 운용하는 무기체계들은 당시 남북한 해공군이나 중국 해공군보다 훨씬 우수했다.[23] 일본 해상자위대 장교들은 중국군 장교들 앞에서 자신있게 "단독으로 중국 해군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으며 90년대 이후 일본과 본격적인 갈등 국면에 들어서게 된 한국에서도 당시 처참한 해군력의 실태가 조명되면서 분쟁 시 일본에 해상봉쇄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었다. 공교롭게도 버블이 붕괴되면서 일본의 경제력이 정체되고 한국과 중국이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방비를 본격적으로 크게 늘리고 우수한 해공군 전투체계들을 도입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압도적 해상전, 공중전 우세에 있던 자위대의 지위는 상실된 상태다. 무기체계가 아니긴 하지만 일본 정부가 소유하고 항공자위대가 관리하는 일본정부전용기도 이때 도입 계획이 수립되었다. 1987년 당시 계획안은 무려 보잉 747 3대. 물론 버블이 붕괴된 이후 도입 수량은 2대로 줄어들었고 보잉 777로 대체된 후에도 2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 물론 버블시대가 자위대에게 마냥 좋은 시절이냐면 그건 또 아니라서 인력난에 시달렸다. 중소기업도 취직하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발 동동 굴리던 시절인데 그 중소기업보다도 급여 수준이 떨어지는 자위대가 인력모집이 활발히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다.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 90년대 초반 연재본에 따르면 매년 신병 모집인력이 2만 6000명이지만 1만 9000명만 모집되어서 정원의 15%가 미달하는 데다 그나마도 육군장교의 39%, 공군장교의 48%가 계약기간 만료전에 제대하고 민간회사로 간다고 나와 있다. 또 병들도 한국 돈 70만 원을 받는다고 나왔는데[24] 당시에는 대기업은 물론이고 웬만한 중소기업에 가도 이보다 몇 배는 받을 수 있었고 알바를 해도 최저임금보다 훨씬 많이 주었던 시절인지라 메리트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90년대 중반~2010년대 초의 취업 빙하기에도 자위대는 돈 없거나 학력 떨어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별 수 없이 가는 곳, 막장 취급을 받았으니 이때의 구인난이 어떤 수준인지는 뻔할 뻔자였다.


2.3. 부동산[편집]


  • 테마파크가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노동 시간 최장 국가 중 하나였고[25] 당시는 주당 44시간 노동제였기 때문에 야근은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에도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는 건 당연했는데 국내외에서 여러모로 지적받는 일이 많아지자 1987년 9월 주5일제 도입을 시작으로 차츰 노동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시기가 버블이랑 겹치면서 여가 시간도 늘어나고 돈도 넘쳐서 테마파크붐이 일게 된 것. 후나바시시에는 일본 최대의 실내 스키장인 자우스[26]가 생기는가 하면 미야자키현에는 한때 세계 최대 워터파크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오션 돔이 생겼다. 하우스텐보스도 비슷한 흐름을 타고 생겼으며 그 외에 여러 지방 도시에 테마파크나 박물관이 들어섰다. 물론 1980년대 초에 생긴 도쿄 디즈니랜드가 흥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일조한 듯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거품이 꺼진 뒤 하나둘씩 망했고 오션돔도 거품이 꺼지더니 세계 최대 워터파크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파리만 날리다가 2007년 9월 30일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이후 지자체에서 인수하여 다시 문을 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끝내 2017년에 철거되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27] 또 탄광산업이 사양세로 접어들 때 생명줄로 버블을 타고 볼거리를 유치하려다가 그 볼거리마저 거품이 꺼지자 도시까지 끌고가서 망한 동네도 있다. 도쿄 디즈니랜드 정도만 제외하면 버블시대에 생긴 테마파크 중 살아남은 곳이 있다고 해도 불황때문에 여전히 힘들다.[28] 하우스텐보스조차 예전만 못하다고. 우후죽순으로 생겼던 대형시설이 2010년대 이후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여기로. 굳이 장점을 꼽자면 도시권역을 개발하고도 돈이 남다 보니 지방도시까지 퍼져서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대한민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문화 인프라가 많이 확충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쳐도 인구 감소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서 대가를 치르는 중. 앞서 말한 테마파크의 난립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 도야마현의 소도시인 오야베시는 아예 도시 전체를 동화풍으로 꾸미기도 했다. 중학교 건물과 시민회관도 테마파크스럽게 지었을 정도였다. 공식적으로는 버블이 본격화되기 한참 전부터 계획되었다고 하지만 버블의 영향으로 재정이 풍족해지면서 본격화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동화풍 건축물들은 버블 붕괴 직후인 1992년에 지어진 것이 마지막이다. 또한 이곳도 인구는 줄고 건물은 노후화되는데 유지보수할 재정은 부족해져서 버블 시대에 지었던 동화풍 건물들이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

  • 술집의 접대부들은 부자가 된 부동산 업자들을 상대로 서비스를 하다 보니 생일 선물로 아파트나 집 한 채를 선물받기도 했으며 자가용 자동차는 물론이고 온갖 명품으로 온 몸을 도배할 수 있었다. 부동산 업자들은 접대부에게 으로 액수를 세지도 않고 1만엔 지폐 다발을 주었다.

  • 일개 목수의 일당이 수만 엔 수준이었다. 또 도쿄 긴자와 오사카 키다시지에서는 술 한 잔이 몇만 엔 수준에 골프장 회원권은 천만~억 엔 단위였다.[29]

  • 지방에서도 건설 붐이 일어 굳이 필요 없는 곳에 보여주기 식의 토목공사를 진행하는 데가 많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100명 남짓 사는 섬마을에 다리를 2개, 3개씩 놓는다든가, 주민 60명 사는 마을 앞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버린다든가... 당시 자민당과 건설업체 그리고 지역유지들 간의 정경유착에 따른 전시성 공사들이었는데 거품이 꺼지고 나서는 유지비가 부담이 되어 철거되거나 건설사들이 파산하는 곳이 많았고 무리하게 공사를 밀어붙인 지자체들이 재정에 타격을 입었다.

  • 도쿄의 넘쳐나는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도쿄 바벨타워[30], X-SEED 4000, SKY City 1000, TRY 2004 등 수 km를 넘는 높이의 초거대 빌딩들이 줄줄이 구상되었다. 오일머니를 힘을 입은 아랍권 국가들도 1km 높이 건물을 구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보다도 스케일이 더 컸다는 이야기.[31] 물론 버블 붕괴 후 다 무효화되었지만. 사실 앞의 두 건물은 확실히 2020년대 건축기술로도 건축이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참고자료


2.4. 문화[편집]


  • 일본인의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병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애정이 돈과 인력을 때려박아 매머드급으로 팽창한 것도 이 시기였다. 매년 2월 중순 혹은 하순에 도쿄의 실내체육관인 료고쿠 국기관에서 5,000명의 합창단을 모아놓고 공연하는 국기관 5천 명의 제9 콘서트(1985~), 간사이 지방에서 가장 큰 이벤트 홀인 오사카성 홀에서 10,000명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산토리 1만 명의 제9(1983~), 히로시마 최대의 이벤트홀인 히로시마 선플라자에서 1,000~2,000명 규모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제9 히로시마(1985~) 같은 이벤트성 공연이 시작된 것 역시 이 시기였다. 이때의 영향으로 수많은 가수들이 교향곡 9번의 An Die Freude를 일본어로 커버했으며 일본어 커버 버전뿐만 아니라 독일어 원곡 버전도 일본제 노래방 전기종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32]

  • 영화 천과 지, 애니메이션 AKIRA도 버블경제 시기 물량공세를 보여주는 문화계의 대표주자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후술하듯 '버블 시기 애니'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 가수 마츠토야 유미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매년 'Merry Xmas from YUMING'이라는 이름으로 크루즈 파티 겸 선상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1인당 4만 엔[33]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정원 500명을 놓고 매년 2천 명이 경쟁하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1989년 콘서트 녹음본


2.5. 패션[편집]


  • 당시의 일본 길거리 패션은 미국유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버블시기의 여유(?) 있는 생활상을 반영하듯[34] 옷감이 많이 들어가는 오버핏이 유행하였으며 당시 디자인 업계에서는 자켓의 경우 자연스러운 주름이 잡히는 것이 멋스러운 것이라고 여겨 남방셔츠의 경우 카라가 크고 품이 넓은 오버핏 셔츠와 굵은 넥타이, 블레이저의 경우 오버핏에 어깨가 커보이고 카라가 큰 것이 주류였다. 니트, 스웨터 등도 마찬가지로 오버핏이 유행이었다. 바지7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나팔바지디스코 바지처럼 아래로 갈수록 통이 커지기보다는 일자로 이어지는 느낌의 통이 넓은 와이드 핏이 유행하였다. 안경의 경우 알이 큰 금태, 뿔테안경과 반뿔테 안경이 유행하였다.

  • 1980년대 말에는 빈티지 스타일의 시부카지가 패션의 메카 시부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당대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는데 웨스턴 스타일 부츠, 부츠컷 데님 청바지, 금장단추가 달린 더블 브레스트 네이비 블레이저, 고로즈의 이글 악세사리 등이 시부카지 스타일의 패션 아이템이었다. 또 이 시기부터 갸루가 등장하였으며, 비주얼계가 등장하였다. 다시 말해 당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되던 시기였다.

  • 학생들이 입는 교복도 당시 시대상에 따라 품이 크고 통이 넓게 나왔지만 여자 일진, 즉 스케반 계열은 짧은 상의와 긴 치마를, 남자 일진, 즉 츳파리 계열은 짧은 가쿠란과 통을 줄인 교복 바지를 착용하였다. 또 스케반 계열은 짙은 화장에 강조된 가르마를 탄 시스루 뱅이나 세이코짱 컷을 하였고 츳파리 계열은 파마를 하고 앞, 윗머리를 뿔처럼 만들었다. 물론 이때 한국은 교복자율화 후반기였기는 했다.



2.6. 자동차[편집]


  • 당시는 지금과 정반대로 일본인들이 닛산 시마 같은 중대형차에 열광하던 시기였다.[35][36]외제차 수입도 급증해 벤츠 주력 모델이었던 W201 190E[37]는 너무 많이 보급되어 '코벤츠'[38]로 불렸으며 BMW E30 3시리즈롯폰기 코롤라[39]란 별명이 붙었다. 이 두 차량은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한국에서도 수요가 넘쳐서 이때 나왔던 물건을 이삿짐 명목으로 들여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스포츠카들의 수요도 대폭 증가했는데 일본 국내에선 수프라NSX, 스카이라인 GT-R. RX-7, 미쓰비시 GTO 등이 수요들을 노리고 제작되었으며 야마하 OX99-11지오토 캐스피타와 같은 고성능 슈퍼카들도 개발되었다. 또한 외제쪽에선 페라리와 포르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테스타로사911의 수요가 엄청 많았으며 특히 플래그 쉽에 한정생산이었던 F40959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40][41]

  • 당시 출시된 이륜차 역시 초고성능 및 고가의 파츠로 도배되었다. 400cc나 250cc 의 저배기량에서 4기통엔진을 쓴다거나 온갖 호화로운 부품은 현재 나오는 것과 비교해도 넘사벽의 포스를 갖고 있었다.

  • 한편 자동차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버라이어티 방송도 있었다. 유명한 것이 1988년에 방영한 JOCX-TV2(후지 테레비 계열)의 'AUTO 클럽(AUTO 倶楽部)'으로, '평소에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일반인 대학생이 당시 가격 1,200만 엔에 소비세 59만 엔 카레라 4 중고를 사서 여성 탤런트와 데이트'하는 등의 내용이 방영되었다.


2.7. 소비 문화 전반[편집]


소비문화도 대단했는데 해외여행객이 1986년 552만 명을 기록하며 500만 명을 넘긴 것을 시작으로 버블 말기인 1990년에는 연간 1100만 명을 기록하며 출국자가 1000만 명을 넘겼으며, 버블 붕괴 후인 1995년에는 1500만 명을 넘기고 1996~1997년에는 해외 여행객이 1700만 명에 육박했다. 참고자료 이때 주로 미국, 남미, 유럽, 아프리카, 중동 같이 매우 먼 지역들은 물론 급부상하던 한국, 동남아, 호주, 인도 같은 지역으로도 여행을 자주 갔다.[42] 당시 서양권의 일류호텔에는 일본인 단체객들로 만원을 이뤘고, 하와이 해안의 맨션과 별장 상당수가 일본인 소유였으며,[43] 서양의 부호와 아랍 왕족 정도만이 들렀던 고급 브랜드점에 일본의 '평범한 젊은이들'이 줄을 섰고, 틈틈이 고급요리도 즐겼다는 것은 당연했다.[44]

페라리, 롤스로이스, 벤틀리 같은 고급수입차가 거리에 넘쳤고[45] 롤렉스, 샤넬, 루이비통 같은 초고가 명품이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렸으며[46] 심지어 여대생들도 그런 명품을 예사로 걸치고 다닐 정도였다. 당시 일본 대학생이 하루 두 시간씩 일주일만 아르바이트를 하면 현재 300만원 선인 중간 레벨의 루이비통 가방을 살 수 있었기에[47] 한국에서 100만원 이상에 팔리는 루이비통 지갑도 당시 고등학생용 선물 정도로 여겨질 정도였다고 한다. 출처 심지어 1980년대 중반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구찌와 같은 명품 브랜드 고객의 70% 정도가 일본인이었을 정도였다.[48] 하도 일본에서 명품이 너무 많이 팔린 나머지 오늘날의 명품 이미지를 확립시킨 것도 버블경제 시기 일본의 명품 열풍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였다.[49]

뿐만 아니라 2020년대 한국에서 비싼 식사와 호캉스가 유행인 것도 원조는 버블경제 시기 일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일본 오마카세가 유행한 것처럼 버블기 일본에서는 이탈리아 음식이 이타메시(イタメシ/イタ飯)[50][51]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고급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 2인 식사에 보통 2만~3만 엔[52] 수준이었는데도 평범한 대학생들이 가득찼을 정도였다.[53] 프랑스 레스토랑도 인기를 끌었지만 격식을 차려야 하고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54] 일반인들은 특별한 날에만 들르는 정도였다.[55] 80년대 일본의 음식 유행

일본 디스코 댄스클럽인 마하라자[56]줄리아나 도쿄[57]는 그런 일본 젊은층의 소비문화와 유행을 주도하던 중심으로 일본 거품경제의 상징적 존재였다. 여성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반라로 클럽 무대에 올라 춤을 추었다. 한국에도 같은 이름의 클럽이 이태원에 생기기도 했다. 토미오카 고교 댄스부가 2017년 패러디로 재현한 춤이 바로 그 시대의 스타일과 춤이다.


3. 어두운 면모[편집]


상기와 같은 버블기의 생활상이나 소비 행태에 대해서 당시를 경험한 일본 중장년층은 '다소 과장되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한다. 버블기라고 해서 너나 할 것 없이 명품을 두르거나 최고급 외제차를 타는 삶을 누린 것은 아니었고, 집값이 너무 비싸 상당수 가정에서 대출금 상황에 얽매인 삶을 사는 이들도 많았는데, 당시 졸부[58]나 재벌과 같은 상류층 생활을 서민이 보편적으로 누렸던 것처럼 과장되게 묘사[59]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버블기 증언 상당수가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다.#[60][61]

버블기 일본의 평범한 서민 생활상은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일본의 가계 저축률만 해도 30%를 넘었으며,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한국의 저축 장려 캠페인에서 사용된 상투적 표현이 '선진국이 되려면 일본의 저축을 본받자'였을 정도. 또한, 당시 한국을 비롯한 해외의 일본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이었다.[62] 즉, 양극화 현상이 강하게 두드러지던 시대라는 뜻이다.[63]

따라서 버블 경제 덕에 부유층이나 부동산과 주식을 통해 재력을 얻은 신흥 부유층은 대도시와 휴양지에 집을 가지거나 추가적인 투자를 통해 재산을 더 크게 불렸고, 빈곤층도 어느 정도 혜택을 누렸지만, 이도 저도 아닌 중산층 이하는 그저 보너스를 더 받는 수준에 머무르거나, 그것도 아니면 비싼 부동산 가격 탓에 대출 상환에 매달리거나, 교외로 밀려나 장거리 출퇴근이 시달리기 일쑤였다. 소득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비싼 물가[64][65]에 고통받아야 했던 것이다.

즉, 버블 경제의 혜택을 일본인 1억 2,361만 명[66] 모두가 누리지는 못했다는 이야기이며, 때문에 당시 일본인 중에는 주관적으로도 객관적 기준으로도 자신들이 풍요롭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좌파 성향 경제학자 테루오카 이츠코(暉峻淑子, 1928~)의 1989년 저서 '풍요로움이란 무엇인가(豊かさとは何か)'[67]에서 버블 시기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서민의 열악한 생활상이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당시 기준으로 선진국 최장 근로 시간, 긴 통근 시간, 토끼굴과 비교되는 좁은 집[68], 방치 수준의 노인 복지 등을 버블 경제 시기의 어두운 면으로 꼽고 있다.

단, 이렇게도 팍팍한 삶을 살았던 평범한 일본 서민조차 타 아시아 국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풍요를 누렸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일본의 가구당 에어컨 보급률이 1991년 60%, 1995년 70%를 돌파한 것과 달리(#) 1993년/1996년 한국의 가구당 에어컨 보급률은 각각 6%/14%였다.(#) 또한, 일본은 이르면 80년대 후반부터 대다수의 가정이 집에 TV 2대는 갖추고 있었던 것과 달리(#) 한국은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무렵에야 거의 모든 가정이 집에 TV 1대를 갖추는 것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 당시 한국도 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여유롭게 사는 편이었음에도 이 정도로 격차가 컸다.

버블 시기에 이슬람권 산유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서민 생활 수준이 어느 정도 풍요로웠다고 할 만한 곳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스라엘 정도밖에 없었다.[69][70] 그리고 양극화가 심했다고 해도 생활보호대상자[71] 수는 전반적으로 하향 추세[72]였다. 단, 이러한 일시적 감소는 버블기의 호경기에 따른 긍정적 변화만은 아니고, 80년대에 발생한 야쿠자의 부정 수급 등 여러 사회현상에 따라 생활보호 대상 기준이 엄격한 방향으로 수정된 것도 한몫한다는 견해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통계를 해석할 것을 권장한다.[73]

정리하자면 당시 일본은 초호화 생활을 영위한 소수의 부유층 VS 절대 다수의 팍팍하게 살아간 서민층 구조였다고도 볼 수 있다.[74] 사실, 버블 시기 일본 서민들이 살기 고단했다는 것도 수치상으로는 북유럽 국가도 능가하고 스위스, 룩셈부르크에 비견되던 1인당 GDP에 비해서는 살기 고단했다는 것에 더 가깝다.

다만, 이를 부유한 국가의 국민이 부리는 배부른 투정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내외적 이유로 국가가 고평가되어 상대적으로 자산이나 금전 가치가 올라간 것처럼 평가된다 한들, 일반 서민이 국내에서 벌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GDP 혹은 국제적인 저평가 등에 의해 물가가 비교적 낮게 느껴지는 외국에서 생활하는 방식[75]은 대체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결국, 부유한 국가에서도 서민은 서민이며, 외부의 상상만큼 경제적 풍요를 쉽게 누리지는 못한다. 앞서 언급된 테루오카 이츠코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76]이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참고자료[편집]



4.1. 유튜브 영상[편집]




'24시간 싸울 수 있습니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자양강장제 '리게인' 광고[77]



버블기 초입 사회 분위기를 비판한 하마다 쇼고의 곡 'J.BOY'[78][79]

  • MARIMO TV - 8~90년대 일본의 사회상을 다루고 있는 유튜브 채널이다.

  • Lyle Hiroshi Saxon[80] - 90년대 초 일본의 사회상을 다루고 있는 유튜브 채널이다.


4.2. 기사[편집]




4.3. 인터넷 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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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4-14 00:31:02에 나무위키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생활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CF 속 미소 짓는 여주인공은 마츠모토 타카미(松本 孝美, 1965년생)다. 연인으로 나온 남자는 일본계 미국인인 켄 브레니스(ケン・ブレニス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에 버블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하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참고로 2분쯤부터 나오는 광고는 1980년대 한국에서도 거의 똑같이 리메이크되어서 방영된 바 있다. 심혜진이종원이 출연했으며 CM송도 한국어 가사였다. 코카콜라 내부 정책에 따라 일본의 원본을 정식으로 로컬라이징을 했다. 다른 영상들이 있는 버전도 있다.[2] 이는 단지 광고를 카피한 게 아니라, 3저 호황을 비롯한 경제 성장과 성공적으로 민주화를 이뤄낸 당시 한국의 분위기도 일본 버블 경제의 영향을 받아서 패션, 영화, 드라마 등 전반적으로 일본과 거의 흡사했다. 한국에서 리메이크한 코카콜라 광고도 당시의 한국 분위기나 사회상과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잘 어울렸고 많은 젊은이들이 광고 속에 나오는 샐러리맨들처럼 되기를 바라며 대학생활을 즐기던 때였다.[3] 정규 방송 시작을 선언한 것은 1994년이지만 사실상 1991년부터 본방송을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며, 심지어 공개적인 HD 시범 방송은 이미 1989년부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른 것이냐면, 미국이 비공개로 첫 HD 테스트 방송을 시작한 것이 1994년이었고 공개적인 HD 시험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96년, HD 본방송을 시작한 것은 1998년이다. 버블 경제 시기 일본은 공개 HD 방송에서 미국을 무려 7년이나 앞선 셈이었다![4] 발매 초 하이비전 TV 가격도 당시 일본인의 4~8개월치 봉급 수준의 거액이었으며, 심지어 본방송 시작 전에는 거의 당시 일본인의 1년치 봉급을 넘는 수준으로 비싼 제품까지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 때문에 본방송 시작 전 일본에서 HD TV는 겨우 2천 대에 불과했고, 이조차 대다수가 호텔, 터미널, 대형 공공 건물 등에서 사간 것이었다.[5] 참고자료 버블 훨씬 전인 1983년 출시되어서 취소선 처리.[6] 참고자료 심지어 게임보이용 전자수첩 소프트웨어도 나왔다. #[7] 참고자료(AVGN의 리뷰)[8]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버블 끝물인 1990년 12월 출시되었다.[9] 컴퓨터 칩을 이용했다고 한다.[10] 1980년대 일본 전자 기업들이 완전한 오리지널은 아니더라도 각각의 8, 16비트 컴퓨터 아키텍처를 갖고 있었던 것을 상기해 보자. 현재 일본의 8대 전자 회사로 일컬어지는 대형 전자기업 중 NEC, 후지쯔, 샤프, 히타치 등은 CPU에서 모니터 브라운관까지 대부분의 부품을 자사 공장에서 만들어서 자사 소프트웨어로 돌리는 PC를 출시할 수 있었다.[11] 츠츠미 요시아키도 2005년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후 2007년에는 억만장자 순위에서도 제외될 정도로 몰락했다.[12] 사실 중남미의 잃어버린 10년(1980년대)나 러시아의 잃어버린 10년(1990년대)과 비교해 봐도 그 차이가 크다. 저 두 사례는 기본임금과 복지혜택마저 줄어드는 초유의 사태였던 데 반해서 일본은 최소한 1997년까지는 미약하게나마 임금이 올랐다. 이후부터는 쭈욱 침체지만.[13] 면접비만 모아서 차를 산 사람도 있었을 정도. 전체적으로 인력이 모자란 시기라 면접에 대한 견제도 있어 면접 이후 지원 여부에 상관없이 면접자들을 하와이로 관광 보내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다른 회사 면접을 보러 가지 못하게 위해 돈을 부어서 견제를 한 것이다.[14] 1량당 가격 40만 엔. 차체만 구입하는 조건은 25만 엔이었다. 운송비는 자기 부담.[15] 그래도 오사카를 뺀 나머지 노선들은 신칸센이 없거나 있어도 너무 오래 걸려서 장사는 잘 되었다. 2020년대 이후로도 도쿄발 오키나와, 삿포로, 후쿠오카 노선은 장사 잘 되는 축에 들어가는 일본 국내선으로, 좌석 공급량은 유지하되 기종만 747보다 효율이 좋은 보잉 777, 보잉 787, A350으로 바꿔 계속 운항 중이다.[16] DC-8&보잉 727 완전 퇴역[17] 보잉 737 클래식 운용 시작[18] 사족으로 일본항공에서 협동체가 완전히 사라졌던 날(JA8031(DC-8-62)가 퇴역한 1988년 5월 26일)과 협동체가 다시 복귀한 날(JA8991(B737-446)가 인도된 1995년 5월 31일)은 7년으로부터 5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19] 2000년대 이후 에미레이트 항공이나 하던 운영을 당시 일본항공이 했다. 그렇다고 에미레이트처럼 환승승객 장사를 한 것도 아니고, 순수히 인바운드 수요만으로 저렇게 했다.[20] 다만 소고는 버블경제 이전에도 호화 전략을 택했다.[21] 1985년 개점한 요코하마점[22] 1993년까지 대폭 확장된 치바점. 다만 이는 '소고 타운'이라고 불렸던 만큼 단일 매장이라 하기는 힘들다.[23] 대한민국 해군은 당시 2차대전때 쓰던 기어링급 구축함이 막 퇴역을 하고 있었으며 현대해전에 걸맞지 않는 울산급 호위함, 포항급 초계함이 주력이었고 그나마 현대 해전에 조금이나마 어울릴만한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도입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 또한 F-16PB(Block 32) 도입이 진행 중이었으며, KF-16(Block 52) 도입(KFP 사업)은 추진 중이었다. F-15K 도입(FX 사업)은 1990년대부터 추진된다.[24] 당시 기준으로 월 10만 엔. 단, 해당 만화에서는 엔화가 아닌 미화 900달러로 나온다.[25] 연간 노동시간이 2,200시간 정도였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6년 기준으로 2,113시간이다.[26] 문을 닫은 이유가 적자 때문인게 아니라 처음부터 10년간 한정 운영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호인들 덕에 마지막까지 흑자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정확히는 1993년부터 2002년까지 운영한 거라 버블 시기와는 무관하며, 지금은 이케아 일본 1호점이 생겼다. 그러나 이 이케아는 엄밀히 말해서 최초의 일본 1호점은 아니다. 일본에서 한 번 실패를 겪은 뒤 2000년대에 재진출해서 리부트로 1호점을 다시 세웠는데 공교롭게도 자우스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27]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치히로의 부모님이 작중 주요 배경이 되는 유바바의 목욕탕과 부속시설을 거품경제 당시 만들어졌다가 망한 테마파크로 오해한다.[28]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은 2001년 개장이라 해당되지 않는다.[29] 출처: 사카이야 타이치 지음, 이승홍 옮김, 분열하는 경제대국, 1992, 한국능률협회, 136쪽[30] 높이가 10km(!!!)에 달하는 건물로 구상되었다.[31] 심지어 네옴도 도쿄 바벨타워 구상보다 스케일이 작다.[32] 물론 버블 당시의 일인지라 버블 시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현재의 젊은층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33] 1991년 환율로 약 303,600원 정도[34] 물론 세계적으로 오버핏이 유행한 경향이 있었으나[35] 이를 하이쏘카 붐이라 불렀다.[36] 소형차는 2000년대 이후다.[37] 현 벤츠 C클래스의 전신이다. 당시 상대는 BMW의 3시리즈.[38] 아기벤츠(子ベンツ) 혹은 작은 벤츠(小ベンツ)로 해석 가능.[39] 토요타의 준중형 세단. 한국에서 흔히 쓰는 "강남 쏘나타"와 비슷한 표현이다.[40] 전술하였듯 지금 대한민국에서 돌아다니는 오래된 병행 수입 차량 대부분이 이시기 일본에서 출고된 차를 한국에 들여온 것이다. 해당 차량들이 출시되었던 시기의 초록색 바탕의 지역 번호판 대신 현행 흰색 번호판을 달고 있는 경우 십중팔구 해당된다. 1987년 수입차 시장 개방 이전 대한민국에서 수입차를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은 주한미군의 중고차를 구매하거나 신성일포드 머스탱처럼 운송료, 관세, 수입쿼터까지 붙여서 원래 자동차 가격의 몇 배나 되는 부대비용까지 들여서 수입하는 것이었다. 1987년 수입차 시장 개방 이후에는 정식 딜러를 통한 구입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2000년대 FTA 체결 이전까지 수입차는 여전히 국산차보다 많이 비쌌다.[41] 그럼 여기서 우핸들이면 우측통행인 대한민국의 도로에서 운전하기 힘들지 않을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수입차가 많지 않던 시절부터 좌핸들=수입차=부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수입차는 좌핸들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 일본의 중고차 사이트들에서도 한국에서 우핸들 수입차를 찾는 것보다 좌핸들 수입차들을 훨씬 많이 찾아볼 수 있다.[42] 1990년 당시 한국의 내국인 출국자 수는 (일본의 1972년과 비슷한) 156만 명이었으며, 500만 명을 넘긴 것도 1999년에 1000만 명을 넘긴 것은 2005년이고 1500만 명을 넘긴 것은 2014년이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43] 당시 하와이의 별장이나 와이키키 해변의 호텔 1/3 이상이 일본인의 소유였다.[44] 출처: 사카이야 타이치 지음, 이승홍 옮김, 분열하는 경제대국, 1992, 한국능률협회, 135쪽[45] 참고자료 1990년 기준 롤스로이스 실버 스피릿 II가 2750만 엔에 벤틀리 터보 RL은 3150만 엔의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가격이었으나(당시 일본 직장인의 평균 연봉이 438만 4000엔이었다) 구매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많았고 버블 붕괴 후인 90년대 말에는 중고차 시장에 고급차들이 원가에 비해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나돌았을 정도.[46] 여담으로 샤넬과 루이비통은 각각 1980년/1978년 처음으로 일본에 매장을 세웠는데(특히 샤넬은 일본에 처음 진출한 매장이 부티크 직영점이었다), 한국에서 이들 브랜드의 매장이 1991년에야(정확히는 샤넬은 화장품 매장이 먼저 진출했고, 의류 매장은 1997년에야 한국에 진출했다) 세워졌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빨리 진출한 셈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들 브랜드는 면세점에는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진출해 있었다. 덤으로 에르메스 역시 한국에 1997년에야 진출한 것과 정반대로 일본에는 이미 1978년부터 진출해 있었다.[47] 다만 후술할 2022년 기사를 보면 아르바이트를 1개월 정도 하면 루이비통 가방을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아무래도 버블 시기 일본이라도 후자가 훨씬 현실성이 높다. 물론 이 역시 당시 일본에서는 '나이키 운동화 하나 사는' 수준에 당시 일본 여고생들의 필수품 수준이었다.[48] 1996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유명한 백화점으로 꼽히던 곳들조차 루이비통은 입점시키지도 못하고 샤넬 화장품 정도만 팔던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당시 한국과 일본 간의 경제적 격차가 어떠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덤으로 에르메스는 당시 한국에 아예 진출도 하지 않았다.[49]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 이전까지만 해도 명품은 일부 명문가의 특별한 기호품(嗜好品)이었지 비싸더라도 1만 달러짜리 가방과 같은 터무니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50] '이탈리아 식사'를 의미한다. 2010년대 후반에 들어 버블 경제를 돌아보는 특집 등에서 언급되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사어화했다는 인식이 더 크다.[51] 사족으로 당시 가장 유행하던 이타메시는 티라미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이탈리아 음식이 유행했던 이유는 부드럽고 세련되면서도 격식을 딱히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 때문이었으며, 마침 본고장에서 배운 일본인 셰프들이 귀국해 가게를 차린 것도 버블 시기였다. 덤으로 이 열풍으로 이전에는 귀했던 이탈리아산 식재료들을 슈퍼에서 '손쉽게' 살 수 잏을 정도로 구하는 게 쉬워졌다고 한다. 참고자료[52] 당시 환율 기준으로 1만 엔은 5~6만 원 남짓 수준이었다. 그리고 버블 말기인 90년대 초반에 한국의 근로자 평균 월급이 60만 원 남짓이었던 것과 달리 동시기 일본의 샐러리맨 평균 월급은 30만 엔(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약 150~190만 원)이었다.[53]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피자도 고급 외식 취급받던 것과 대조되는 양상이다. 참고자료[54] 당시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 코스 메뉴는 1인분에 1만 엔 대를 넘어 2만~3만 엔 대도 있었다고 한다. 비싼 건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2배 가격이었던 셈. 참고 인터뷰: https://r.gnavi.co.jp/g-interview/entry/yajirobe/4558 "버블 경기가 시작한 1984년에는 프랑스 최고봉 (미쉐린) 3성 레스토랑 지점(라 뚜르다장 도쿄점, 다만 현재는 파리점이든 도쿄점이든 모두 1성급으로 떨어졌다)이 도쿄 호텔 뉴 오타니 내에 오픈했으나, 개점과 동시에 사람들이 몰려든 나머지 예약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프랑스 코스 요리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테이블 매너와 긴장된 분위기 탓에 제대로 이야기도 못 한 채 식사를 끝마쳤고, 2명에 4~5만 엔 하는 가격에 당황했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 조금 더 캐주얼한 이탈리안이 주류가 되었다"는 취지의 내용. 참고로 당시 일본 샐러리맨 평균 월급이 약 22만 9000엔(한화로 78만 원)이었다.[55] 사족으로 버블 훨씬 전인 1981년 기준 워커힐 호텔의 프랑스 레스토랑 '세라돈'의 1인당 가격이 1만 2천~2만 5천 원 정도였다. # 당시 노조 가입 근로자 임금이 25만 원 하던 때였다. # 프랑스 고급 레스토랑의 1인분 가격이 거의 근로자의 2~3일치 봉급 수준인 것은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던 한국이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0개국 중 하나이던 일본이나 똑같았던 셈이다.(...)[56] 1982년 오사카에서 개업한 디스코 클럽으로, 오사카 본점보다는 도쿄 아자부주반 지점이 더 유명했다. 시기적으로는 이 클럽의 영업 시기가 진짜 거품경제 시대와 일치한다. 다만 줄리아나와 달리 복장 규정이 까다로운 등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컨셉은 아니었다.[57] 엄밀히 말하면 1991년 처음 개장했으므로 거품경제와는 관련이 없긴 하나 적어도 1995년까지는 사회 분위기가 거품경제 시기와 거의 차이가 없어서 버블 시절의 문화라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실제로 일본인들 스스로도 줄리아나 도쿄를 거품경제 시기의 상징들 중 하나로 여긴다.[58] 나리킨(成金). 주로 집안에 매각할 만한 여분의 토지가 있는 사람들이나, 살고 있는 집을 저당잡힌 차 돈을 빌러 증권시장에 투자한 사람들이 그랬다.[59] 상술한 해외에서 사치를 부린 '평범한 일본인'들도 실제로는 버블 덕을 본 졸부들이나 여유 있는 중상류층과 그 가족이 대다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60]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저명한 독신 연구가 아라카와 가즈히사(1963년생, 버블 초기인 1987년에 취업한 '신인류 세대'이다)의 증언이다. 아라카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버블이 붕괴했다는 것도, 그 당시가 버블이었다는 감각도 없었으며, 오히려 주가 폭락 이후인 1990~1994년이 가장 사회적 분위기가 좋았던 데다가 경기가 나빠진다는 것을 인식해도 본격적으로 불경기임을 실감하게 된 것은 1997년부터였다고 한다.[61] 단카이 주니어이자 빙하기 세대인 저술가 하야미즈 겐로는 2023년 10월 26일 부인공론 기사를 통해 "경기가 좋은 시대. 버블 시대를 살아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당시 일반 서민은 호경기에 오히려 분개하고 있었다. 돈을 버는 것은 주식을 가진 자와 토지를 가진 자뿐. 서민은 마이 홈을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호경기가 끝나고 땅값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좋은데...'야말로 당시 서민의 대표적인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62] 일본의 고소득을 아득히 뛰어넘는 고물가와 (당시 중진국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의 서민들 집보다도 더 작은 일본 서민들의 집 등 당시 일본 일반인들의 삶이 한국인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분명히 있었다. 물론 저런 이미지에서 일본인들은 돈 있다고 흥청망청 안 쓰니 일본이 강대국이 된 것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기도 했지만 어쨌던 돈 있다고 일반인들이 흥청망청 쓰고 살던 시기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 것.[63] 이는 한국의 X세대도 마찬가지다.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하는 상류층의 문화가 자주 매스컴에 노출되다보니 당시 대부분의 청년들이 사치를 일삼은 것 같지만, 실상은 사회초년생때부터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경우가 많았고, 아무리 자동차가 한창 대중화되었다는 시대였지만 고급승용차는 돈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부익부 빈익빈은 변함 없었다. 그리고 당시 언론은 "선진국 일본에는 과소비란 말이 없이 절약하며 산다"며 한국의 경제 발전에 따른 소비를 '과소비'라며 매우 경멸적으로 보면서 일본인의 절약정신을 본받으라는 식의 기사를 써댔다. 예시[64] 특히 엔화 고평가로 인해 외국인들에게는 진짜 살인적인 수준이었다. 1989년 기준 커피 한 잔에만 7달러(2024년 환율로 17.5달러)였을 정도였으니 미국의 투자은행가조차 "제3세계 이민들이 미국에 왔을 때 느끼는 감정을 이제야 알겠군. 이 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살 형편이 못돼."라고 말했을 정도였다.[65] 한국과 비교하자면, 1990년 기준 한국의 평균적인 봉지라면 가격이 200원(38엔)이었던 것과 달리 동년 기준 닛신식품컵라면 가격은 155엔(825원)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짜장면 가격이 1000원 남짓이었다. 1990년 일본의 평균 월급이 약 283,800엔으로 닛산 컵라면 1,830개를 살 수 있는 데 반하여 한국 평균 월급 548,500원(1989년 기준)으로 봉지 라면 2,742개를 살 수 있음을 생각하면, 경제 수준 차이를 고려해도 일본의 물가가 지독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66] 1990년 기준[67] 한국에서는 2007년에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2000년까지 무려 47쇄본까지 발행했을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는데, 그만큼 이 책에 담긴 일본의 모습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2024년 현재도 판매 중이다.[68] 책에서 묘사된 바로는 방 너비가 출입문과 같은 수준의 약 0.78평짜리 방조차 있었다. 이 방에 접이식 침대와 세면 시설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데, 한국의 고시원과 비슷하거나 못한 수준으로, 일반적인 일본의 아파트보다도 처참했던 것으로 알려진다.[69] 한국도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시기로 여기는 3저 호황부터 1997년 외환 위기 직전까지의 시기인 1986년부터 1997년까지와 외환위기를 막 벗어난 2001년부터 2006년까지의 호황기에도 전자의 시기에는 서민들에게 조기 해외유학이나 해외여행 같은 것은 꿈같은 얘기였고 후자의 시기에는 현재진행형으로 심각하게 거론되는 청년실업 문제와 부동산 가격의 폭등 문제가 처음 대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한국은 명백히 각 가정의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고 주5일제 도입 등 복지정책이 조금씩 확충되던 시기였으므로 서민들의 경제력이 크게 상승한 시기였던 것도 맞다.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한 향수가 생겨나는 것이고 이 점이 일본인들이 버블경제 시기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부분이다.[70] 물론 싱가포르, 홍콩, 대만도 일본만큼 1년에 몇 번씩 해외여행 가거나 좋은 집 사거나 이런 일들은 하기 좀 힘들었다. 당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말레이시아와 한국&말레이시아보다도 가난했던 타 동남아 국가들, 최빈국이던 중국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에 이스라엘 역시 1980년대 초중반에는 1,000%에 육박하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신음하던 적이 있어 마냥 여유로웠다고 보기는 어려웠다.[71] 한국으로 치면 기초생활수급자. 여담이지만, 한국에서 기생수라고 비하해서 부르듯, 일본에서는 나마뽀(ナマポ)라는 비하어로 부르기도 한다.[72] 빈곤 가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버블 경제가 시작된 1985년(약 1.2%)을 기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서 1995년(0.7%)까지 지속적으로 하향 곡선을 그렸고, 버블이 붕괴한 1991년 기준으로는 이미 0.7%대였다. 다만, 본격적으로 취업 빙하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는 1996년부터 다시 급격히 증가했고, 고령화 등과 맞물려 증가 일로를 달리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 2017년 발행 '생활보호제도의 현상에 대해'[73] 특히, 편모 가정에 대해서는 자립 권장으로 방향이 바뀌어 생활보호 대상에서 탈락한 편모 가정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자립 가능한 고령자조차 탈락하는 경우가 있어, 고령자 자살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74] 다만, 당시 일본인들은 이런 생활상에도 만족하며 살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989년, 요미우리 신문이 조사한 결과 일본인의 92% 가량이 현재 생활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일본인 90.6%가 자신이 중류층이라고 인식했던 반면 하류층이라 인식한 사람은 4.2%로 상류층(3.5%)과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다. #[75] 실제로 스위스에서는 물가가 높은 자국 슈퍼가 아닌, 국경이 맞닿은 독일의 저렴한 슈퍼에서 쇼핑하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이는 특수한 경우다.[76] 문고본이기에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여담이지만, 1990년 발행된 9쇄 기준 세금 포함 550엔이었고, 2024년 현재 판매 중인 것은 968엔이다.[77] 버블기 기업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광고로, 과로가 만연하던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영웅본색 3에 출연하기도 한 도키토 사부로(時任三郞)가 광고의 메인 캐릭터를 맡았다.[78] 80년대 일본은 이전까지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배금주의가 심화되어, 본격적인 버블기에 들어서기 전부터 버블의 예조(予兆)가 나타났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흐름을 우려한 작품이 문화계 일각에서 등장하기도 했는데, NHK 연속 TV 소설 '오싱'이나 가수 하마다 쇼고의 곡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마다는 1980년대 초반부터 MONEY(1984년 발표) 등 배금주의 등을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1986년 발표한 J.BOY는 그 정점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당시 사회를 비판했던 이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금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J-League, J-Pop 등 J 컬쳐 명명법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79] "J. Boy 내걸었던 이상도 지금은 멀리 있고. J. Boy 지켜야 할 긍지도 보이지 않네. 끝없이 이어지는 생존 경쟁 달리다 지쳐. 집도 일도 던져버리고 목숨조차 던진 친구. 그리고 나는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자 산처럼 쌓인 일을 끌어안고 억지로 견뎌내네. J. Boy 미덥지 못하고 풍요로운 이 나라에. J. Boy 무엇을 걸고 무엇을 꿈꿔야 하나"라는 가사를 통해, 당시 일반적인 일본인이 느끼던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80] 1984년부터 도쿄에 거주중인 미국인 유튜버이다. 어깨에 캠코더를 메고 상가, 골목길, 전철역, 공원 같은 일상적인 장소를 1인칭 시점으로 촬영한 영상이 주를 이루며, 버블이 꺼진 직후인 1990~1993년에 촬영한 영상의 비중이 높다. 30년이 지난 2024년 현재까지도 정기적으로 도쿄의 일상이 담긴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