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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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태평양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로, 1941년~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미국과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국민혁명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영국군이 주도한 버마 전선, 호주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을 포함한다.
2. 서론[편집]
臨時ニュースを申し上げます。臨時ニュースを申し上げます。大本営陸海軍部、12月8日午前6時発表。帝国陸海軍は、本8日未明、西太平洋においてアメリカ、イギリス軍と戦闘状態に入れり。帝国陸海軍は、本8日未明、西太平洋においてアメリカ、イギリス軍と戦闘状態に入れり。
임시 뉴스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대본영육해군부에서 오전 0600시 발표. 제국 육,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 있는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 섰다. 제국 육,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 있는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 섰다.
1941년(쇼와 16년) 12월 8일 오전 7시, 라디오 임시 뉴스
태평양 전선 개전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 해군 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 공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남방작전을 통해 석권하고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하락세를 타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그나마 복구한 전력이 전멸당하고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토 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한 일본 제국 수뇌부는 이후 지속적으로 패전을 거듭하다가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직후인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한다.
태평양 전쟁은 육상전이 주로 일어난 유럽 전선과 달리 태평양에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해전과 상륙전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태평양 전구에 투입된 미군의 각 군 장병들 (바다와 관계가 없어도) 에겐 수륙양용작전의 비중이 중요했고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전후 미국 육군[5] , 미국 해군, 미국 해병대는 크게 성장했는데 특히 미 해군은 태평양 전선의 주역이고, 이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매우 많이 활용했다.[6]
지역환경 특성상 미군의 경우 지상군으로 해병대가 많이 투입되었으나 해병대만으로 작전의 모든 수요를 채울 순 없어서 [7] 미 육군도 전쟁 초기부터 많은 부대를 파병했다.[8] 종전 시점에서 미군은 육군과 해병대를 합쳐 27개 사단이 파병 중이었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배경으로 한 전선인 만큼 유럽의 전장에 비해 해전의 비중이 컸으며, 일본 제국 해군 주도하에 시작된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과 나아가 상륙전, 대규모 합동작전이 벌어졌다.
한편 문명화된 지역에서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며 대결했던 유럽의 서부전선과는 다르게[9] , 야만인이라 칭해도 모자랄 정도의 일본군의 비이성적 만행(식인, 포로 학대, 민간인 살해, 인체실험 등)으로 인해 미군 및 호주군, 영국군은 박멸 식의 무자비한 전투를 벌였고, 2차대전 내에서도 상당히 처절했던 전장으로 손꼽힌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민들이 큰 희생을 당했다. 일본군의 만행은 미국 수뇌부에게도 충격적이어서, 미국 정부 차원에서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느끼고 분석서를 의뢰할 정도였다. 그 결과 출판된 서적이 지금도 대표적인 일본학 도서로 꼽히는 국화와 칼이다.
3. 배경[편집]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 참조.
4. 전개[편집]
- 1941년
- 1942년
- 미국 본토 공격
-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
- 둘리틀 특공대: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본토가 공습당했다.
- 산호해 해전
- 미드웨이 해전: 일본에게 유리하던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전투. 사실 엄밀히 말해서 미국 해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최후에는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으로 일본 제국 해군을 피해 달아나는 등 일본의 우세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전투의 패배로 일본 해군은 더이상 동진할 만한 여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알류샨 열도 전역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큰 의미 없이 이후로는 계속해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 알류샨 열도 전역 (~1943년 8월)
- 코코다 트랙 전투
- 부나-고나 전투 (링크 참조)
- 과달카날 전역
- 1944년
- 1945년
- 람리 섬 전투
- 페낭 해전
- 오보에 작전
- 도쿄 대공습
- 이오지마 전투
- 오키나와 전투
- 구레 군항 공습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1945년 8월 6일, 8월 9일)
- 시탕 굽이 전투
5. 군사력[편집]
미국, 일본 제국의 군사무기 생산력 비교 (1939-1945)[10]
태평양 전쟁 당시 취역한 미-일 항공모함의 평형. 보시다시피 격차가 어마어마하다.[14]
일본 제국 측의 무기 생산량 중 미국과 조금이라도 비교해볼 여지가 있는 것은 전투기로, 미국 생산량의 76.36%에 달한다(잠수함은 82.27%). 하지만 폭격기와 수송기 등으로 항공기 생산 능력을 배분한 미군과 달리, 일본군은 사실상 전투기 하나에 올인하였음에도 미국의 76%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이다. 미군 전투기는 P-51 머스탱, F4U 콜세어, F6F 헬캣, P-38 라이트닝 같은 전투기였고, 일본군은 초기부터 개량해서 운용한 제로센이다.
제로센은 초반에는 우세하였지만, 중반부터 더 좋은 성능의 미군 전술기들이 등장하면서 종이비행기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살 돌격 전술로 수적인 우세마저 잃었다. 게다가 파일럿의 생존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야 하는 상황에 베테랑 조종사, 숙련된 조종사들이 소모되었다. 여기에 형편없는 공업력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보수, 수리뿐 아니라 전술기 양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물론 패전 때까지 제로센만 운용한 것은 아니라, 시덴카이와 같은 신예기가 훌륭한 전과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부족한 생산량 때문에 대규모로 편성하지도 못했다. 당시 일본은 전투기의 생산 속도와 생산 가능량이 세계적인 수준에서도 우세했다. 전투기 쪽에 올인하고 또 많이 써먹기도 했던 만큼, 초기에는 영국과 소련조차도 능가했으며,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 왕국보다도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세계 최강자 미국이었다. 미국의 생산속도와 생산량에 비하면 일본은 새 발의 피, 아니 그 피의 적혈구 하나만도 못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은 미국에게 끊임없이 전투기를 상실했다. 제로센은 속도와 선회력으로는 미군 전투기를 압도했지만, 미군 전투기에 비해 무전시설이 조악했다. 때문에 미군은 우수한 무전시설의 장점을 살려, 제로센 1대에 미군 전투기를 2~3대씩 붙여서 무전으로 끊임없이 서로 약점을 보완해주며 다구리치게 만드는 전술을 채택, 제로센을 하나씩 하나씩 격파해 나갔다. 전쟁 후반부에 들어서자 일본은 본토공습으로 인해 공장시설까지 상실하면서, 미국과의 격차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지고 만다. 사실 대량으로 생산했어도, 일본에는 숙련된 조종사들이 부족해서 힘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제국이 올인하는 분야에서조차 생산량에서 미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으며, 질적 차이는 더더욱 컸다. 전투기의 질적 차이는 그나마 약과인데 미국이 9만대 가까이 생산한 전차 및 자주포 상당수는 M4 셔먼이지만 겨우 2,500대 생산한 일본의 전차라는 물건은 치하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이 1944년부터 양산한 M26 퍼싱 중형 전차는 44-45년간 생산량이 약 2,800대로, 대전 시기 일본 제국이 생산한 모든 전차, 자주포 총량보다 많았다.[15]
이러한 생산량의 격차는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 일본 제국의 무책임한 징병 정책으로 숙련 기술공이 대부분 징집되면서 일본의 생산 능력은 떨어져만 갔고, 미국의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남방에서 들어오는 원자재도 충분치 못했으며, 그나마 1944년 이후로 끊겼다. 1945년부터는 일본 본토 공습으로 그냥 공장들이 초토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본토가 안전하여 전시 산업 시설이 충분히 가동될 수 있었고, 숙련공도 넉넉했고, 이들을 징병하는 뻘짓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미국이 일본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례없는 양면전쟁을 진행 중이었기에, 위의 물자가 모두 태평양에 집중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생산물자 상당수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동맹국에게 렌드리스로 퍼줬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 전차 및 자주포 생산량의 대부분은 유럽전선과 그 동맹국에 집중되었고, 태평양에 할당된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트럭이나 야포 같은 지상장비 전반에 공통되는 문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의 주 전장은 바다였고, 해군 전력의 90%는 태평양에 투입되었다. 그 10%도 절대다수가 U-Boat로부터 대서양 항로를 지키기 위한 구축함이고, 주력함들은 레인저 정도를 제외하면 잠깐 얼굴을 비춘 게 전부다.
그리고 이 장비들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석유, 석탄, 철강과 같은 연료 및 원자재의 생산량, 수송 능력의 격차도 매우 컸다. 특히 일본은 워낙에 철이 모자라서 경북선 등 한반도에서 장사 안 되는 철도를 죄다 뜯어가버리고, 통영대전고속도로의 모체가 된 대전-삼천포 철도노선 공사를 중단시키는 등의 막장스런 모습도 보여주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일본 본토에서도 절이란 절은 다 돌아다니며 종들을 떼가질 않나, "동전 따위 만드는데 쓸 금속은 없다"며 1944년에는 엔화보다 아래 단위인 5전, 10전을 주화가 아닌 지폐로 발행했다. 전쟁을 벌이면서 무기 등을 제작하기 위한 철이 모자라다는 것 자체가, 암담한 전황을 나타낸다.
사실 일본은 옛날 옛적부터 철이 부족한 국가였고, 산업화를 하면서도 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일본은 고급 강철은 사실상 전량수입, 프라이팬 만드는 수준의 선철조차 과반을 수입했다. 강철을 만들 기술은 있었는데 워낙 생산성이 떨어지고, 선철산업은 좀 육성해보나 했더니 대공황이 터지며 싹 망해버려서...그나마 조선과 만주에서 철광과 제철소를 만들고, 소련에서 강철을 수입하고, 영국령 인도에서 선철, 미국에서 고철을 수입하는 게 중일전쟁기 일본이었는데, 일본은 시원하게 그 모두와 전쟁을 벌인다(...)
이들 원자재 대부분을 식민지와 남방 점령지에서 조달하던 일본 제국은, 해상교통로가 차단되자마자 바로 산업 능력과 전투력 유지에 위기가 닥쳤다. 일본이 원유를 공급받던 유전은 팔렘방과 브루나이, 쿠칭 등에 있었는데 미국은 전쟁 후반에 브루나이, 쿠칭 유전 지대에 상륙했고, 영국은 코코스 제도에서 전투기를 띄워 계속해서 팔렘방을 두들겼다.[16] 한 마디로, 일본은 안심하고 석유를 퍼올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극심한 석유난으로 인해, 전쟁 막바지에는 소나무에서 뽑아낸 송근유를 동원하여 전투기를 가동하려 했을 정도였다[17] .
그 밖에도 당시 일본 제국은 세계 최대의 텅스텐 산출국(식민지 조선의 상동광산[18] )이었으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할 기술력이 없었다. 텅스텐은 포탄용으로 사용되는 자원인데, 일본 제국은 텅스텐 가공 기술이 부족해서 조선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동맹국 나치 독일은 고철더미를 뒤져가며 텅스텐 재활용을 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중립국에게서 수입을 해오긴 했는데, 동부전선에서 소모하는 포탄의 양이 워낙 대규모다 보니 수입 물량으로는 도저히 요구량을 맞출 수 없었다.
미국은 자원의 부족을 우수한 산업 능력으로 해결했다. 개전 초 동남아시아가 일본에 넘어가면서 미국도 여러 가지 천연자원들, 특히 천연고무의 부족에 시달렸다. 이는 바퀴 달린 모든 것들의 생산에 지장을 초래했기에, 개전 초에는 미국도 전 민간에서 안 쓰는 폐타이어 등을 회수하는 식으로 고무를 충당했는데, 나중에는 합성고무를 만들어서 천연고무를 완전히 대체해 버렸다. 나머지 자원인 석유, 석탄, 철강 등이야 미국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맹국 캐나다에서도 쏟아지는 것들이었다. 이런 전략자원 레벨은 아니지만 DDT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수출하는 살충제 원료인 제충국을 입수하지 못하게 되자 미국이 산업 능력으로 생산한 화학 살충제였다.
이런 직접적인 전투 장비(무기) 및 전략자원 문제 말고도, 양국의 산업력과 기술력의 차이는 이 전쟁에 크게 작용했다. 사실 애초에 일본이 영국, 미국 등 다른 선진국들에 과학기술을 의존하고 있던 현실[19] 도 있었다. 당장 전황이 아직 불리하지 않던 개전 초인 1942년에는, 알류샨 열도 전역을 위해 자국의 고양이들을 죄다 공출해서 방한복 만드는 소재로 사용(#)할 정도로, 일본은 전 분야에서 기술력, 산업력, 자원보유량 모두 압도적 열세였다. 고양이 1마리 잡는다고 모피가 얼마나 나오겠는가?
또 다른 예로 불도저가 있다. 일본은 전쟁 기간 내내 인력을 동원해 삽과 곡괭이로 활주로를 만들었다.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당연지사. 반면 미군은 불도저를 이용하여 단시간에 활주로를 뚝딱 만들어냈다. 과달카날에서도, 알류샨 열도에서도, 전쟁 후반기 괌과 사이판,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도 말이다. 일본 제국은 전쟁 초기 노획한 불도저를 본국으로 가져간 후 그 효율성에 주목하여 고마쓰 중공업에서 카피해내긴 했으나, 성능이 제대로 안 나오고, 수량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5.1. 일본군의 한계[편집]
일본군은 일본 황실 회의록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 스스로도 미국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미국을 이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인정했고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마저 미국과의 장기전은 무리이고 단기전으로 미 태평양 함대를 무너뜨린 뒤 하와이 점령, 파나마 운하를 장악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데리고 와 후퇴조건으로 수출 제한을 풀려고 하였지만, 정작 일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미국이 생각보다 격앙된 모습을 보였고 함대를 긁어모으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단 1년 만에 전시생산 체제를 완성해 쇼 미 더 머니를 보여주며 결국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신속해야 하며, 모든 것이 계획에서 크게 틀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의 대립은 너무 심했다.
물론 당대 거의 모든 군대에서 각 군간 대립은 있었다.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도 비슷했던지 아돌프 히틀러의 수기에도 언급된다. 국방군(Wehrmacht)과 SS 간의 갈등도 엄청나게 심각했고[20] , 국방군 내에서도 육해공군간의 대립이 있었다. 특히 항공모함을 가지려던 독일 해군은 항공모함에 편제 될 항공대 지휘권을 가지고 괴링이 독일에서 나는 것은 전부 자기 지휘권이라 주장하며 견제만 하는 바람에 항공모함을 건조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에도 굴리지를 못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독일 해군의 에리히 레더 제독이 물러날 때 히틀러에게 "총통께 부탁드리는데, 해군의 적인 헤르만 괴링에게서 해군과 제 후임자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까지 했고[21] ,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이나 공군 야전사단 같은 편제가 따로 존재하는 등 엉망인 면도 있었다.
일본의 적국이었던 연합국에도 이러한 면은 있었다. 미 해군과 미 육군항공대는 폭격의 우선 순위 문제로 갈등, 미 육군 출신인 더글라스 맥아더와 해군 출신 어니스트 킹이 필리핀-대만 진공루트 가지고 박터지게 싸운 적이 있고, 영국 공군은 영국 해군과 해군항공대의 처우를 두고 갈등한 것처럼 타군과 경쟁과 자존심 싸움이 상당히 치열했던데다가, 미군의 경우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상호간에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지원이 늦어져 애꿎은 미 해병대만 제대로 피를 보는 바람에 양측에 해병대가 이를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서로 교전까지 벌이려 한 적도 있을 정도로. 이 둘은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뒷감당을 못할 지경이라 교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거고, 소규모 부대 간에는 정말로 총질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뿐만 아니라, 해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던 연합함대조차 해군 본대와는 완전 따로 놀았을 정도로 일본군은 서로 손발도 하나 맞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일본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22] 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의 포인트는 "같이 이오지마에 배치된 해군 지휘관들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긴 하다. 사사건건 육군의 작전에 딴지를 걸면서 앵무새처럼 연합함대의 지원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 해군 쿠리바야시 중장이 "해군은 모르고 있냐?"라고 묻는 장면이 백미. 이처럼 자신들이 완벽한 협력과 통제 아래 진행되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말까한 어려운 작전을 눈 앞에 두고도, 일본군의 육해군은 서로 불협화음이다 못해 서로 방해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을 피하려면 미국의 조건대로 중일전쟁 당시 얻은 영토를 포기, 철수하는 방법과[23] 미국과의 양면전선을 만들어버리는 가불기에 가까운 선택지만이 주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군 스스로도 "미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는 명백하며,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할 시 일본이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 언급된 황실회의록의 기록만 보아도 자명하다. 일본군은 정복전쟁에 이미 수많은 예산과 인력을 소모한 시점이라서 중국과 만주를 무혈로 내주기에도 불가능하여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일본군이 고민에 빠지다가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킨 뒤 필리핀을 먹고 브루나이 방면 원유지대를 차지하자' 라는 최악의 결론을 내놓으면서 미국과의 전쟁을 고르게 된다.[24]
미국이 전쟁에 참여는 안 해도 연합국과 함께 유럽에 최우선적인 역량을 쏟고 있고, 대부분의 물자가 유럽 방면으로 투입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으며, 미국의 필리핀 점령에 대하여 동남아시아에서 반미 정서[25] 와 미국 내에서도 탈식민지론이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 미 해군의 심각한 전력 공백 상태를 야기한다면 자신들이 유리한 협상 위치 정도는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선전포고 전 기습공격의 문제로 반일감정에 불을 붙여, 결과적으로는 전쟁 수행 의지만 더 불태우게 만든 꼴이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도 미국은 어디까지나 참전국의 위치에서 유럽의 반인륜적인 집단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간 구원자의 입장이었는데,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느닷없이 자국 영토가 공격받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인들은 극대노하였고, 정치권 역시 만장일치에 가깝게 참전 결의안에 동의하면서,[26] 일본의 계획이었던 "치명적인 공격을 통해 미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목표는 첫발부터 어긋나게 되었다.
만일 미 해군을 크게 약화시킨 뒤 지속적으로 미 해군의 전력을 소모시키고 필리핀 및 태평양의 패전 소식이 지속되면 미국의 정치적ㆍ경제적 상황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 그렇다면 미국 내 여론도 "일본의 요구를 그만 들어주자"는 여론이 생겨, 미국은 점점 태평양에서 손을 떼고 유럽에만 올인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결과적으로 진주만공습 이후 미국이 전쟁 의지를 불태움으로써 오판이었으나, 진주만 이후에도 미국이 확실하게 공세로 돌아서는 미드웨이 해전까지 미국 내 태평양 전쟁에 대한 여론이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제대로 된 선전포고 등이 이루어진 것도 반드시 오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미국은 다시 본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 태평양 전쟁에서 구르는 해병대와 함께 찍은 다큐멘터리를 무료로 상영해야 할 정도로 전쟁 수행 의지가 갈수록 떨어져가고 있었다.
따라서 일단 미 해군을 섬멸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전력 공백을 야기한 뒤, 점감요격작전으로 지속적인 미 해군의 피해를 강요하여 경제적ㆍ정치적으로 부담을 받고 있는 미국을 단기간 내에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와 일본의 동남아시아 진출을 용인하게 하거나[27] 적어도 동남아 식민지들을 유지하는 댓가로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재개하게 만들려는 심산이었다.[28] 그러나 미국 상부의 입장에서 태평양은 사실상 미국의 앞마당이자 천연 방어 라인인데, 이 곳이 뚫렸다는 것은 언제든지 적국이 함부로 침공할 수도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국이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지속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일본군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국을 상대로 유리하게 전장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당장 진주만공습의 피해도 좀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긴 해도, 이것이 장거리에서 항공모함의 함재기로만 이루어진 공습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고[29] , 미국도 국채를 발행하고 렌드-리스 정책을 통해 빠른 전시경제체제로 돌입하고 있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그 많은 양의 전력을 단기간에 보충하는 것은 어려웠으며, 어떻게든 일본 해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거나 지연을 시켜야 했다. 결국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긁어모은 전력으로 일본군의 항모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총 4척을 지닌 항모기동부대 2개를 수장시킨 덕에 백중세로 바뀌었고, 이후 일본 해군의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과달카날 전투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수세적인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30]
일단 일본 입장에선 쓸데없이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느라 항공모함 2척 허비하지 말고, 괜히 폼 잡는다고 전함 뒤에 배치하지 말고, 항공모함 6척을 싹싹 긁어모은 뒤 초대형 전함 야마토, 무사시로 몸빵하면서 미드웨이 해전을 펼쳐 미국 항공모함 4척[31] 다 잡고, 무슨 수를 써서든 하와이에 최대한 가까운 곳에 함대기지를 지어서 하와이를 봉쇄하고 전함 주포든 함재기든 지상발진 폭격기든 싸그리 동원해서 진주만을 어떻게든 함락은 못 시켜도 무력화만 시키면, 만약 1942년 6월 시점에서 미국이 태평양에 보유하고 있던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파하는데 성공하면, 그 다음 미국 항공모함은 1943년 중반 이후나 되어야 나오니, 그 사이에는 거의 미 해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고립된 하와이를 두고 일본군이 태평양을 장악할 기회가 왔을 분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기엔 전위에서 몸빵 역할을 할 야마토와 무사시가 체급이 너무 커서 속도 등의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점과 속도가 느린데 연료는 무지막지하게 먹는 괴물인데 정작 운용국인 일본은 연료(석유)가 부족해서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전함사상에 찌들어 있던 일본이 왜 괜히 야마토를 호텔로 운용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냥 답이 나온다. 하와이의 방어력이 엄청났던 건 맞지만, 결국 고정된 타겟이고 요새화된 섬을 굳이 공략하지 않고 고립만 시키면 된다는 전략은 이미 현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겪은 바가 있다.
그런 다음 그 선에서 미국이 '무리다' 싶어 강화해주면 하는 거고, 강화를 해 주지 않으면 일본 해군이 오매불망 바라오던 함대결전도 가능했을 것이다. 전략적으로 하와이가 고립된다면 제아무리 미국이라도 서태평양 진출이 불가능해서, 있는 전력 없는 전력 다 긁어서 진주만으로 왔을 것이다. 여기서 이겨내면 그 때는 아무리 미국이라도 강화론이 꽤나 대두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압도적 함대를 어떻게 이기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과 미국의 정규항모비율은 5대7[32] 이었는데, 만약 미드웨이에서 일본항모는 다 살아남으면 9[33] , 미국항모가 다 죽으면 5[34] 가 되므로, 비율이 뒤집힌다. 필리핀해 해전이 역사에서 일본에게 처참하게 끝난 것은 미드웨이에서 한번, 과달카날에서 또 한번 일본 함대의 허리가 꺾였던 걸 어거지로 복구했던 게 원인인데, 위에 말했듯이 일본이 다 이기는 이 IF에서는 일본 함대는 1944년이 되어도 여전히 미국보다 우세를 지킬 수 있다. 아무리 미국의 공업력이 압도적이라도 항공모함을 1년 안에 다 만들어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항공기 우세 상황 지원을 일본이 받는 하와이 근해에서의 정면결전이라면 미국이라도 이긴다고 단언 못 한다.
물론 이렇게 연전연승을 해도, 유럽전선의 상황 같은 것과 맞물려 있었으므로, 더 자세히 말하려면 길어지지만 하여간 원 역사만큼 속수무책으로 발리진 않았을 거란 말. 1942년이 미국 입장에서 사상 최대의 위기였던 건, 역사적으로 하와이가 함락될 가능성이 "있기라도 했던" 유일한 시기였다는 점 때문이다.
수송선과 달리 군함은 당장 발주한다고 해도 시간이 필요했고[35] ,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이성적이고 효율적이며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자만하지 않은 채 철두철미하게 작전했다면, 태평양 전쟁의 판도가 다르게 돌아갈 가능성 역시 존재하였다. 더군다나 태평양전쟁 개전 초기 미 해군의 F4F 와일드캣에 대항하는 제로센도 이 당시까진 미 해군기에 비해 일장일단이 있는 기체였으나[36] , 내구력이 좋은 와일드캣의 장점을 이용해 타치 중위가 내세운 2(와일드캣) : 1(제로센) 비율로 이용한 공략법이 통하면서 제로센의 압도적인 속도나 선회력도 통하지 않기 시작했고, 미군이 전투기 F6F 헬켓으로 학살하는 와중에도 신형기 개발을 늦게 시작했다.
거기다가 일본 해군은 전함세력이라도 건재하였던 반면 미 해군의 경우 비교적 구형의 펜실베니아급 전함 USS 펜실베니아(BB-38)만이 진주만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테네시급 전함 USS 테네시(BB-43), 콜로라도급 전함 USS 메릴랜드(BB-46) 및 네바다급 전함 USS 네바다(BB-36)는 1942년까지 수리되어야 했고, 나머지 전함은 이미 미국이 완전히 승기를 굳힌 대전 후반에나 수리를 받고 동원되거나 그대로 폐기되어야 했다. 이처럼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여 공세가 꺾이고 과달카날 해전서 열세로 변해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이 완전히 미 해군에 의해 섬멸되기 전까지는 미 해군에 대하여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태평양 전쟁의 전개와 일본군의 실책 등을 모두 고려하니 "내가 맛깔나게 따귀를 때리면 감동 먹고 협상하겠지?" 라는 일본의 안일한 방침은 그저 비웃음거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 개념 자체는 "미국이 정신을 차리고 여러 지역을 점령한 뒤 병력을 증강하기 전에 한 번의 기습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인 막대한 규모의 함대를 무력화하고, 증원되는 미국 함대를 각개격파하여, 태평양에 국한하면 일본 해군이 미 해군에 비해 지속적으로 전력상 우위에 서게 할 경우, 미국은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상당히 합리적인 수준의 대전략이었다. 당장 하와이가 먹히고 미 서부 해안까지 위협받았다면 미국 입장에서도 갑갑한 일이었을 것이다.[37] 물론 일본군이 굳이 하와이를 점령할 필요도 없이, 미 해군이 수세에서도 분전으로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투에서 승리하여 미국 국내의 전쟁여론을 반전시키지 못하였다면 일본군이 이루려고 했던 부분이 일정 부분은 정말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이 만약 자신의 전력을 100% 완벽하게 효율적으로 굴릴 역량이 되었다면 미군이 이기기는 할 수 있어도, 1945년까지 100% 무릎 꿇린다고 호언장담하기는 힘들었다. 일본이 엄청나게 막강하거나 무서웠던 것은 절대 아니나, 당시의 그들은 분명 미 해군을 태평양에서 위협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해군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태평양이라는 대양을 사이에 끼고 싸우기에 일본이 공격하기 힘든 만큼 미국도 공격하기가 힘들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이오지마 전투로, 방어군의 지휘관이 잘 대처하자 무려 다섯 배나 되었던 미군도 제법 고전했을 정도로 상당히 진땀을 뺐던 바가 있다.[38] 엄연한 열강이었고[39] 아시아의 패권국이자 쟁패일로를 달리던 강국으로, 분명 머리만 좀 있었으면 미군과의 전쟁을 졌잘싸로는 끝낼 역량이 되었다.
일본군은 개전 초기까지만 해도,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웃음거리로서의 일본군이 아닌 명백한 태평양에서 미국과 연합군에 대한 현존하는 위협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일본군의 이미지 중 잔인성을 제외[40] 하면 멍청하고 무능하며 전근대적인 정신론만 고집하는 일본군의 이미지는 미국의 전쟁수행의지에 대한 오판과 이후 미 해군의 결사항전 등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장기전이 되면 질 것이라 예상하였던 전쟁이 장기화되어 막장이 되면서 결국 그렇게 몰락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일본군은 작은 오차도 허용하기 어려운 전쟁을 벌이고는 자신들의 손발도 매번 엇박자였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 항상 세계 최대의 패권국가의 자리를 놓은 적이 없는 국가를 상대로, 적인 미 해군의 분전으로 원하던 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금수조치 및 일본 자체의 경제력의 한계로 인하여 그에 대처할 계획조차 없었기에, 그 한계로 인하여 전쟁이 자신들의 계획에서 틀어지자마자 스스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6. 종전[편집]
일본의 항복 문서 참조.
7. 인명피해[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피해(사망자)는 총 48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전선에서의 피해가 28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20만 여명이다. 전투 행위에 의한 직접 전사자의 경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160,000명의 병력손실을 입었고, 포로로 잡힌 병력 중 12,935명,말라리아로 6만명이 추가로 죽었다.[42] 일본으로선 참담하게도,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잃은 총 병력 피해는 일본이 루손전투에서 잃은 병력과 비슷하다.
전투 환경 자체는 유럽에 비해 훨씬 열악했음에도, 중국 전선을 제외한 태평양전쟁 미군 전사자 20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는 유럽 서부전선 미군 전사자 28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는 유럽에 비해 태평양전쟁이 주로 섬들을 빼앗는 국지전으로 진행된 것도 있고, 미군이 징검다리 작전으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을 우회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승기를 잡은 1943년 이후 내내 태평양전쟁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고립된 섬에서 방어로 일관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 전선의 개활지에서처럼 대규모 회전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군도 해군 함대를 제외한 전투병력 중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본군, 특히 지상군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건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 등 전쟁 말기의 일. 그래서 태평양전쟁 말기를 묘사한 지도를 보면, 분명히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임에도 겉보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서 여전히 점령지가 상당히 넓어 보이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지역을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점령, 경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둘째치고, 이 시점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넓이 따위는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태평양전쟁 내내 미군이 쓰던 징검다리 작전은 "꼭 필요한 섬이 아니면 우회해 버리고, 대신 남겨진 섬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자"는 이 전략이다. 그래서 '개구리 뜀뛰기'(Leapfrogging, Island hopping) 라 불렸다. 더글라스 맥아더를 위시한 미 육군은 '이건 미 해군만의 창의적인 작전이 아니'라고 까고, 미 육군 전사에는 '개구리 뜀뛰기'가 아닌 '우회 작전'이라고 써 놨지만, 어쨌든 전후에 대단히 현명한 전략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많은 요새화된 섬들을 일일이 점령하려고 했다면, 손실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단단히 방어하고 있는 섬 주위의 섬을 미군이 점령하고 보급로를 끊어버리니, 일본군의 요새 작전은 자기들이 알아서 몰락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단점도 존재한다. 우회한 지점은 충분한 전력을 남겨 지속적인 타격을 해야 하는 것. 이는 대량의 물자가 소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략의 기초마저 씹어 먹는 이 짓은 보급로가 바다였고, 강력한 해군으로 제해권을 먹은 미군이니까 할 수 있었던 작전이다.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3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 때까지의 피해 대부분은 중일전쟁의 수렁 속에서 입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치고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1945년 패전까지 입은 피해는 전사 및 실종자. 포로 사망자만 도합 100만여 명에 달했다.[43] 그 전까지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감내할 만한 피해였다면,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냥 병력이 투입하는 족족 녹아났다는 소리. 거기다 본토가 안전했던 미국과 달리, 일본의 본토는 1945년 3월 이후 커티스 르메이가 지휘한 폭격으로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이는 안 그래도 동원 능력에서 차이나는 양국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일본제국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을 합쳐 1억 운운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의 인구는 7,000만 명. 반대로 미국의 경우 본국의 인구가 1억 3,000만 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고, 질적으로도 그 차이가 엄청났다. 일본이 병력 동원 측면에서 반란의 우려 때문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조선과 대만 출신 병사를 매우 꺼리며 받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며 태평양전쟁의 전역이 점점 넓어져가던 1943년까지도, 식민지 조선과 대만 출신의 일본군 입대 자원자 중에 실제로 선발된 인원의 비율은 채 5%가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선발한 식민지 출신 병사들도 전투병과에는 철저히 배제시키고 비전투병과 위주로 배속시켰다.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운운하면서 창씨개명을 시키는 식으로 적극적인 민족말살정책까지 펴놓고도 반란을 우려해서 입대를 불허하는 모순의 극치였던 것이다. 물론 대전 말기가 되어 일본 본토에 대한 위협이 턱 밑까지 다가오자 결국 방침을 바꿔서 조선인과 대만인들도 강제징집해 전선에 밀어넣고, 의무교육제도 및 선거권 도입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동화정책에 나섰으나 너무 늦어버렸고, 그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끝난다.
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나라는 역시 중국. 중국은 당시 심각한 혼란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도 굶주리는 빈국이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의 침략까지 당해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8년 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으니 얼마나 많이 죽었을지는 뻔한 이야기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 폭격, 전쟁 기간 기아와 질병 등으로 군인 375만 명을 포함하여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2,200만 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 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00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만, 영국령 버마에서 25만,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7만,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유럽전선의 참혹함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태평양전쟁의 참혹함과 인명피해는 유럽의 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특히 독소전쟁을 제외하면 주로 전투 사망자가 다수인 유럽전선과 달리, 태평양전선은 아프리카 지역의 내전만큼이나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해 대부분이 유럽 강대국이 아닌, 부유하던 청나라 멸망 후 폐허가 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발생한 것, 홀로코스트처럼 체계적인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게 아니라 전국시대나 임진왜란[44] 처럼 전근대의 전쟁처럼 점령지에서 약탈/살해/강간하고 잊어버리는 식으로 일본 자신조차 전쟁범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점, 그리고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태평양 전쟁만큼은 아니라도 수백만 명씩 죽고 다친 국공내전과 6.25 전쟁 및 베트남 전쟁 등 동아시아에 새로운 전쟁이 계속 터지면서 정확한 피해 집계나 통계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이 태평양전쟁의 참혹함을 무디게 만들었다.
최근에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이 강해지면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참상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나, 사실 세계적으로 힘을 과시할만한 아시아 강국들 입장에선 "태평양 전쟁" 자체가 중요한거지 미국과 일본이 치고받은 "태평양 전선"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그보다도 중일전선과 국공내전, 6.25, 베트남 전쟁 등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훨씬 중요하게 부각하는지라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참상을 물을 때를 제외하곤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여전히 크다.
반면에 태평양이 차라리 양호한 모습도 있는데, 그건 포로 사망률이다. 소련군 포로는 30~57.5% 이상이 사망했고[45] 미군 포로는 27%가 사망했다. 단, 중국군 포로가 들어가면 최대 40%까지 올라가므로 나치 독일이 죽인 포로보다 많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다소 묻힌 감은 있으나, 나치 독일도 위안소 설치[46] 와 강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확인된 건수만 1942년 한 해의 수치만 1,000만에 달한다고 한다.[47]
8.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편집]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고, 얼마나 참혹한지를 잘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분명 물적, 인적 피해는 유럽전선이 더 컸으나 유럽전선은 전쟁으로서 참혹했을지언정 어느 정도 말과 문화가 통하는 지역이었고, 최소한 영국이라는 대륙내 현지자원을 활용 가능한 동맹국이 하나는 있었으며,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보여준 참극은 소련이 베를린으로 진격하면서 가장 많이 경험하였지, 미군은 절멸수용소 등 그 잔재를 보았을 뿐 직접적으로 경험한 바가 적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태평양은 일본군과 미군 모두에게 지나치게 넓고 발 디딜 곳 없는 바다가 가득 찬 곳이었고 그로 인해 미군도 어마어마한 물량과 국가역량을 퍼부어서야 보급이란 걸 할 수 있었고, 개전 초기 제대로 후방 기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한 곳이 멀리 떨어지고 당시에는 군사력이 부족했던 호주뿐이라, 대외 전쟁이란 걸 시작한 20세기의 미군에게 있어 거의 유일하게 보급 그 자체를 걱정할 정도로 가혹한 전장이었다.[48]
양 진영의 심각한 문화 장벽또한 전쟁을 잔혹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언어 장벽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고, 인간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사상과 문화의 차이 때문에 양 측 모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항복이라는 개념이 배제된 채 서로가 처절하게 그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이기 위한 절멸전이었다. 거기다가 일본이 패전에 가까워지면서 보여준 민간인을 고기방패로 쓰거나, 시체에 부비트랩, 일본군 부상병이 자폭하려 드는 등의 참상들을 최전선에서 몸소 겪으면서 그 비인간성에 더 학을 떼었던 면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짓을 당한 미군도 같이 미쳐 돌아가서 일본군의 머리를 삶아 살을 발라서 해골을 전리품으로 삼는 등, 일본군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짓까지 했다.
전쟁의 참혹함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서유럽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는 주로 승리의 영광을 다루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반면, 태평양 전선의 미 육군과 해병대를 다루는 매체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다루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 퍼시픽>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씬 레드 라인>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8.1. 열악한 지역[편집]
개발도 잘 되어 있고 평탄한 지역이 많았고 기후와 문화권도 비슷했던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매우 덥고 습한 기후에 상상을 뛰어넘는 빡빡한 정글 환경과 위험이 도사리는 요소, 험준한 산악 등, '문명'과는 거리가 먼 걸 넘어 아예 천만 광년은 떨어진 곳들이었다. 후일 일견 비슷한 환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베트남이나 미군이 전쟁을 치른 지역 중 가장 낙후된 아프가니스탄조차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일반적인 서구 문명에서 산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격오지에서 전투했다는 이야기다. 유럽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을 몰아내고 도시들을 해방시키면 현지 주민들의 호의를 받든 거래를 하든 해서 조촐하게나마 전투의 피로를 풀 파티를 벌이거나 매춘부를 통해 승리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겠지만, 태평양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에게 돌아오는 건 미군과 일본군 할 것 없이 진흙과 말라리아, 그리고 만연한 이로 인한 전염병 뿐이었다.
그리고 현지 장기 거주자나 원주민인 경우 노하우를 알기에 버틸 만하지만, 정글을 처음 접해 보는 인간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극한의 기후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시간당 100mm 정도의 폭우(스콜)는 일상에 가까우며, 스콜로 인해 어딜 가나 축축한 진흙탕, 늪, 뻘로 인해 전투화는 언제나 습기가 차있고 전투복은 진흙으로 인해 축축하여서 체온을 빼앗은 건 일상이었다. 화룡점정으로 열대 기후와 습한 환경 서식에 최적화된 곤충이자 인간에게 병을 옮기는 모기와 피를 빠는 거머리 등등 해충과 독거미, 독사, 병원균 등 위험한 생물이 득실거렸다. 더 퍼시픽에서는 이런 극한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 자살해 버리는 장교가 나오며[49] , 실제로도 유럽에 비해 대단히 높은 비율로 전투 피로증 환자가 속출하였고 태평양 전역을 뛴 해병대와 육군은 부상을 입으면 해상에 있는 병원선에 실려가 쾌적하게 쉴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정글과 전염병이 없는 전장도 있었지만, 이런 전장 역시 끝없는 자욱한 안개가 낀 망망대지와 잡초와 늪뿐인 전장 환경에, 알류샨 열도의 경우는 북극권의 엄청난 추위까지 도사리고 있었다. 사할린과 슘슈 섬 등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이 맡게 된 지역의 경우에는 여름에도 적당히 서늘한 환경 때문에 정글 못지않게 모기가 기승을 부렸다. 만일 몰락 작전이 계획대로 이루어졌다면 일본 본토의 폭염과 대설, 산악 지대, 화산, 문화 차이 등이 미군이 연승을 거두는 와중에도 크고 작은 장애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8.2. 열악한 보급[편집]
게다가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보급도 어려워, 장병들의 생활마저 매우 열악하였다. 아무리 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아들에게 본토에서 구운 초콜릿 케이크까지 수송해주는 미군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유럽에서 자체 보급도 어느 정도 되고 있었기에 미군의 여유로운 보급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럽이었다면 점령한 도시에서, 하다못해 중동이라 해도 곳곳에 소도시와 마을이 있으니 정 안 되면 징발이라도 할 수 있다. 대테러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ㆍ이라크 전쟁에서 미군도 본격 주둔 이전까지는 보급이 고속 진군하는 부대를 따라가지 못해서 현지인 마을에서 이렇게 징발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50]
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빵 한 조각, 휴지 한 장조차 전부 보급선에만 의지해야 했던 전장이었다. 과달카날 전투가 양군이 모두 극도로 열악한 보급 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대표적인 전장이다. 아마존 오지나 다름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 섬에 보급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원주민을 약탈했다가는 협조를 받을 수 없었기에[51] 결국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평양 전구에서 미군이 체험한 보급 난이도는 아주 헬게이트였다.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장기간 지속적인 보급 계획 수립이 필수적이었고, 보급부대의 규모도 유럽 전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방대하고 컸으며, 보통의 문명사회에서 쉽게 징발 가능했을 가장 기초적인 소모품 물자까지 보급에 의존해야 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조달한 물품들도 있었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게다가 1942~1943년 등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 비해 지원 규모상으로 크게 나을 게 없었고, 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꺾기까지는 항상 수세에 있었으므로 일본 해군에 의해 수송선단의 보급계획에는 항상 차질이 발생했다. 특히 과달카날 전투의 해병대는 외부 화력지원까지도 일본군 우세였으니, 결국 감투 정신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싸움 상대인 일본군, 협력 상대인 원주민은 문화권도 완전히 달랐다. 이렇다보니 전쟁 초에는 동남아시아 일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들이 주요 전장이라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지원을 받았는데도 유럽과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미군 장병들도 보급품 부족으로 심한 고생을 하고, 때때로는 진짜 정신력에 의존해야 했다. 과달카날 전투 초기 미 해병대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비행장을 짓고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등 정신력으로 버텼다. 애초에 육군보다 보급 순위도 밀려서 개전 초에는 사용하는 제식 소총부터 일본군 99식 제식 소총과 별로 다를 거 없는 스프링필드였고, 보급 사정이 나빠지면 식량 보급이 안 되어서 일본군이 패주할 때 남기고 간 쌀과 간장 같은 생소한 식재료만 가지고 상당 기간 배식을 해야 했어서, 타군에 비해 굶주림이 일상일 지경이었다. 그렇다보니 일부 해병대 병사들이 기회가 되면 육군 보급품을 훔치는 경우가 상당 부분 존재하였고, 이로 인해 군사법정에서 처벌받은 기록도 존재한다. [52]
전쟁 중반 이후 보급선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일본군의 경우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미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개구리 뜀뛰기 작전'에 의해 건너뛴 섬에 남겨져서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일본군들은 실제로 식량확보를 위해 둔전, 사냥 및 낚시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나마 라바울 본영처럼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한 곳도 있긴 있었다. '개구리 뜀뛰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일본의 최정예 비행대였던 '타이난 항공대'도 이곳에 본거지를 오래 두었으며, 최대 20만 명 이상의 육/해군 정예 병력을 배치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남태평양 최대 전략거점이었다. 병력이 워낙 많아 우회를 결정했으며, 종전 후 이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라바울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부건빌 전역처럼[53] 전 병력의 1/3 이상이 아사한 곳도 존재하였다.
8.3. 문화권이 다른 전장의 야만성[편집]
당시 유럽 서부전선의 독일 국방군은 인종주의에 찌들었지만, 일단 영국인과 미국인[54] 에 대하여는 그저 전쟁에서 적으로 만난 자들일 뿐, 유태인 등 자신들이 열등 인종으로 분류한 집단들과 달리 우선 절멸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문화권에 어느 정도 공통점도 있고, 결정적으로 대화가 어느 정도 통하다 보니, 비인간적인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마지막 남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애를 상기시킬 수 있는 극적인 이벤트 등이 벌어지면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이 희석되었다. 그러나 문화와 언어가 완전히 달라 일선의 병사들 간 어떠한 소통도 불가능했던 태평양 전장에서는,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이 맞붙고있던 동부전선과 동급으로 서로 야만성의 극치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55]
또한 헤이그 협약을 통한 교전권의 개념과 제네바 조약을 통한 '포로, 비전투원 및 민간인의 지위'에 대한 개념은 기본적으로 서양문화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일본군의 문화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기도 했다. 패색이 확실하면 발악을 하기보다는 대체로 교전수칙을 따라 손을 들고 자비를 청하는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싸우다 죽으면 야스쿠니에 가서 영령이 되지만, 항복하면 그냥 개죽음, 남은 가족은 강간당한다'는 식으로 세뇌당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항복하지 않고 싸우거나 대화도 통하지 않으니 항복하는 척하고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들었다. 간단한 예로 일본군 군가 중 하나인 <동기의 벚꽃(同期の桜: 도키노 사쿠라)>에 나타나 있다.
게다가 포로 문서에 보다시피, 미군이 서부전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유대인이 아닌 이상) 힘들지언정 최소한 포로로서 대우는 받았다. 본국에서 적국의 아군 포로들을 위해 식품이나 의약품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으며, 야사에 따르면 모노폴리 보드게임(…)에 탈출장비를 숨겨 보내서 포로를 탈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달리 말해 포로들에게도 보드게임과 의약품 정도 제공은 해 줬다는 소리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잡히면 뭔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역시 개전 초기에는 미군에 포로로 잡히면 자신들의 가족이 본토에서 '불명예자의 가족'으로 멸시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전쟁 후기에는 미군도 일본군 못지않은 잔혹성을 보이면서[56] 그러한 귀축영미의 이미지가 일본군의 머릿속에 굳어져 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으니 온갖 참상이 발생했는데, 일본군은 정식 절차를 밟아 항복한 미군 병사들에게 죽음의 행진을 시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고의로 양산한다든가[57] 아니면 아예 술자리에서 안주가 부족하다며 특별한 술안주라는 명목으로 잡아먹은 사례도 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극한 상황에서 한 일이 아니라 사기를 고양한다는 명목으로 한 거라 그 잔인성은 다른 식인과 비교할 수 없다. 굳이 변호를 하자면 치치지마 이외에는 재미로 식인을 한 사례는 없다. 오죽하면 저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의 행위는, 동시대의 일본군조차 경악할 수준이었다.
또한 자국 민간인까지 거짓 선전으로 연합국의 이미지를 악화시키고, 언어나 문화가 다르니, 민간인들 역시 이를 과장은 있을지언정 사실로 받아들였다.[58] 그렇기에 대전 후기에 이들을 집단 자살하게 만들거나, "패배하여 똑같은 처우를 받느니 차라리 일본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식으로 정신대/강제노동에 끌려가 일본인들[59] 과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들은 인간성을 유린당할 것을 강요받았고, 그로 인한 피해도 컸다.
더군다나 점령군인 일본군은 자신들의 점령지의 문화에 대해서도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대규모 식민지를 장기간 경영한 경험이 없어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몇백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대학살 수준의 탄압만 보고 자란 덕분에, 대부분의 식민지에 무작정 그렇게 대한 것이다. 한반도 식민지배의 과정도 참 어이없게, 시작부터 총칼 앞세워 무작정 찍어 누르다가[60] 어마어마한 반발을 겪은 뒤에는 또 완전히 다 풀어줘서[61] 오히려 독립운동을 할 환경을 조성해줘 버리는(…) 바보같은 수순을 밟았다. 덕분에 15년 가까이 민족말살통치를 시행하는데도 조선을 일본화하는 데에 실패했다. 식민지배에서 식민지인들이 대규모로 저항 활동을 한번 벌이면 최소한 100년은 잡고 제압해야 한다. 저항활동을 총칼로 때려잡고 나서도, 저항에 참여했던 식민지인들이 "우리 그때 대단했지" 식으로 생각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62]
태평양 전쟁 당시 많은 숫자의 원주민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착취당하였고, 그 결과 대부분의 남태평양 군도에서 지금까지도 90세 이상의 원주민 어르신들은 잽(jap)의 j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하기 바쁠 정도로, 일본의 이미지는 악화되었다.[63]
당장 일본군과 원주민이 우호적으로 지냈던 섬은 일부 덕장들이 지배했던 인도네시아나 부건빌 정도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오죽하면 원주민들은 "식민지배하던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낫다"며 백인, 미군, 영국군, 호주군 같은 군대를 솔선수범해서 도왔다. 예를 들어 과달카날에서 해안감시원을 하다 일본군 이치키 부대에 잡혀서 고문당하고, 목을 총검으로 찔린 뒤에도 놀라운 투혼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미군에 일본군의 공격을 알리고 은성무공훈장을 비롯해 영국 기사작위까지 받은 자콥 C. 보우자(Jacob Charles Vouza)라는 원주민도 있을 정도다. 관보 링크 일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원주민 노인들이 나온 바 있는데, "못 부르면 일본군이 죽여서" 살기 위해서 불렀다고 했다.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8.4. 이성의 증발[편집]
위와 같은 미쳐 돌아가는 전장이다 보니 장병들에게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도 우생학과 왜곡된 무사도 정신이 군대 내에 널리 퍼져 있고, 미군에 대한 프로파간다로 인하여 포로로 잡히는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미군 1명이라도 더 죽이고 동귀어진하려는 집단이었고,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이해할 리가 없었던 미군들은 그런 일본군의 행태에 아연실색하여, 일본군에 대해 더더욱 적개심을 키우며 잔혹해져갔다. 양 전장에서 서로를 같은 인간이 아닌 자신보다 열등한 무언가로 보고, 전술 및 전략적 목표를 위해 공방전을 벌이는 것이 아닌 섬 하나 내부의 상대방을 절멸시키기 위해 서로 싸우다 보니, 태평양 전역에서는 서유럽 전선에 비해 이성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특유의 잔혹성으로 인하여 부비트랩과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 위반을 매우 자주 저지르는 야만적인 집단이었고, 비록 전쟁 포로 생환율은 유럽전선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 생활에 있어서는 훨씬 열악하다 보니, 미군 역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은 상정 외로 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여기에 미군 소대장ㆍ중대장 등 지휘관들은 전투에 임할 때마다 휘하 부대에 "항복하거나 잡히지 말라"고 말하고 나서 전투를 시작했는데, 이 명령을 내린 배경에는 쪽바리 같은 인간 이하에게 잡히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심을 조장하여 미군들의 전투의지를 더 고양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일본군 역시 사정이 안 좋은 건 매한가지여서, 기존에 존재하던 사이비 무사도에 따라 포로로 잡히는 걸 수치로 여긴다든가, 일본군 대본영의 프로파간다로 인하여 "우리들이 무너지면 본토에 있는 가족들이 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고 여자들은 강간당할 것"이라 믿었다. 더군다나 일반 병사들의 입장에서 미군은 말도 통하지 않고, 비록 일본군 스스로에 의해 조장되었다고는 하나 특유의 호전성과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 해병대를 보며 마찬가지로 저 귀축영미에게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것이라는 공포심 하에 더더욱 잔혹하게 죽을 때까지 싸웠다.[64]
그러다 보니 태평양 전쟁에서는 고대의 전쟁터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마경이 펼쳐졌다. 일본군은 포로를 산 채로 해부하거나, 생체실험과 같은 맨정신이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될 미친 행위까지 대놓고 버젓이 저지르고, 미군 포로에 대해 처참한 대우를 하면서 바탄 죽음의 행진 등으로 인해 상당수의 전쟁 포로들이 끔찍하게 숨졌다. 거기다가 종종 기록으로도 발견되지만, 일본군 장교들이 미군 포로들에 대한 학대 등은 그 참상이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도 상당수의 미군 포로들이 아사하거나 아사하기 직전에 섬을 탈환한 미군에 의해 구조되는 등 태평양 전역의 부족한 보급 문제 때문에 일본군의 포로 학대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졌다. 거기다가 민간인을 부비트랩으로 사용하고, 미군의 의무병조차 사살하거나 부상병과 자폭시키는 등, 일본군의 비이성적인 행보는 전쟁이 진행될수록 심화되기만 하였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접근할수록 일본군의 행각은 꺾이기는커녕, 일반적인 총검 돌격을 넘어 더 끔찍해졌고 심지어 기계화되었다. 자폭 잠수함[65] , 자폭선, 자폭 창병, 자폭 잠수부, 자폭 비행기, 오키나와 등 점령지 민간인을 이용한 부비트랩,[66] 자폭 전차, 유인 대함 미사일 등이 그것으로, 전과 자체는 잘 올리지 못했으나 그 방식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미군 역시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67] ,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성을 상실하자 일본군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은 일선의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에게 만연하였다. 이들의 주도하에 포로 학살이 잦았으며, 이에 대한 기록과 대표 증언인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 포로를 살해한 적 있음을 실토하는 전 미 해병 참전 군인의 증언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68] 심지어 과달카날 전투 당시에는 포로를 심문을 위해 후방으로 이송하라는 지휘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병대원들이 전투 도중 생포한 일본군 포로들을 전원 학살한 기록도 있으며, 웨이크섬에서의 포로학살의 보복임을 천명했다.[69] 태평양 전쟁을 다룬 실화 바탕의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는 미 해병대가 일본군 포로를 받지 않는다는 묘사가 나오며, 오키나와 전투를 다룬 화에서는 항복하는 일본군들을 망설이지 않고 즉각 사살하는 장면도 나온다.[70] 역시 실화 기반 소설 바탕의 작품인 씬 레드 라인에서는 분노한 미 육군 병사가 일본군 포로를 구타하다가 결국 쏴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더군다나 전쟁 후반부에는 미 해병대와 미 육군의 야전 지휘부에서 포로는 필요 없다고 명령하며 일본군에 대한 박멸을 지시한 기록조차 남아있고, 이를 미군 상층부가 제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정도로 빈번했을 정도로[71][72] 태평양 전쟁은 그야말로 오로지 서로를 죽이기만 위한 잔인하고 폭력적인 전쟁으로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거기다가 일본군을 같은 인간이 아닌 인간 이하로 보고 있던 일선 병사들이 일본군 시신의 두개골을 떼어내거나, 살아있는 일본군 포로의 신체 부위를 절단하여 기념품으로 챙기기도 하였다.[73] 그리고 이러한 무한한 적개심이 지휘관들에게까지 미쳤고, 그 결과 도쿄대공습 같은 통상적인 전쟁이라면 상상도 못할 대규모 공습을 가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이들이 속출하고[74] , 결국 파일럿들이나 폭격병들이 공감능력결여 증세를 호소하며 정신병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인종주의적인 논리도 작용했는데, 최소한 같은 백인종끼리 싸웠던 서유럽 전선과는 달리 일본군은 황인종이었고[76] , 일본군 역시 1930년대 이후로 국수주의 기류가 들끓고 개전 이후 '귀축영미' 등의 프로파간다를 열심히 펼쳐온 여파로 대다수의 병사들이 백인, 흑인으로 이루어진 연합군 측을 사람 이하의 것으로 보기 일쑤였기 때문에 태평양 전선에서는 양측 모두 서로를 인종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싸웠던 것이다.
비단 미군 뿐만 아니라 호주군[77] 도 일본군의 잔혹한 만행에 극심한 증오를 품고 포로 포획을 거부하거나 포로를 학살하는 등의 보복행위를 빈번하게 자행했다.[78] 알려진 사건 중 하나로는 코코다 트랙 전투 중 붙잡은 일본군 포로 대 여섯명을 산채로 총검으로 찔러 학살한 사건이 있다.[79][80] 이 사건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 사건을 목격한 호주군 병사는 "전쟁중이었으니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느꼈다"고 증언하였다.
8.5. 일본군 스스로의 문제[편집]
일본군 역시 전쟁 초기의 성공에 의한 오만과 군국주의 교육 하에 이루어진 인종주의 교육관에 의해 야만성이 높은 군대였다. 특히 식민지의 주민으로서 2등 시민 취급이라도 하였던 한국인과 대만인에 비해 중일전쟁 점령지의 주적인 중국인에 대한 대우는 더욱 더 처참하여, 난징 대학살 및 100인 참수 경쟁 등 그야말로 인면수심의 태도를 보여주었으며, 패색이 짙어질수록 이들의 야만성과 광기의 정도는 더더욱 심각해져갔다.
심지어 전쟁 후반부의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중에는, 당시 일본의 우방국 시민도 있었다. 1945년 필리핀 탈환전 당시 마닐라의 일본군은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에 쳐들어가서 민간인 50여명을 학살하고 건물에 방화했다. 이 사건 때문에 1945년 4월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버렸다. 더군다나 나치 독일이 수용소에서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81] 점령지인 하얼빈에서 731부대를 운영하면서 중국인과 러시아인 임산부를 상대로 혹은 갓난아기와 아기 엄마를 같이 생체실험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일본군의 문제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이를 옹호하거나 부정하려는 극우세력이 존재하는 것도 문제다. 일본 극우세력 중에는 당시의 일본의 위세에 취해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 '백인의 압제, 착취로부터 아시아 해방을 위해 일본이 총대를 멘 정의로운 성전(聖戰)'이라 부르며 온갖 미화를 일삼으며 현재까지도 어그로를 끌고 있다. 1대 남은 가이텐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 이때의 전범들을 일본에서는 영령이나 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을 사실 역시 문제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참배를 하면서도 참배를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곳도 많다는 게 더 문제이며, 한 독일인 기자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참배를 하던 일본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그 독일인 기자에게 욕을 했다.[82]
9. '대동아전쟁'과 명칭에 관하여[편집]
전쟁 당시에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이 일본 내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대동아공영권을 만들기 위한 일본의 행보를 귀축영미들이 방해하므로, 여기에 반격하기 위했던 전쟁'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전후 GHQ는 '신도 지령'을 통해 당시 일본이 사용한 대동아전쟁(
미 군정 당시 일본 매체들은 GHQ의 엄격한 검열로 대부분 '이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등의 표현을 사용했지만[83] GHQ가 물러나고 해당 지령이 폐지됨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극우세력들을 중심으로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옹호하는 입장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 중에는 '일본이 싸운 것은 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는 흔한 주장부터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이 전쟁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오래전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단어일 뿐이며 해당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현대 일본 극우들이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을 주장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과 연관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중 일부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에 대해 현재 일본 정부는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타내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애매한 부정적 입장[84] 을 고수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동아전쟁이라는 용어는 일본 내에서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상황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일본의 식민통치를 기억하는 90대 이상의 세대들에는 대동아전쟁이라는 단어에 익숙한 이들이 존재한다.[85] 이는 중일전쟁을 일컫는 지나사변이라는 표현과도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 제국의 해당 명칭 사용과 잦은 선전에 기인한다. 현재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진 국가는 일본뿐이며, 그마저도 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로 인한 피해를 입었던 한국과 중국은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태평양 전쟁의 목적을 미화하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한편, 영어로는 ‘Pacific War’라고 하는데, 태평양을 뜻하는 ‘Pacific’이 ‘평화롭다’는 뜻이다보니 실제로는 매우 참혹했던 전쟁인 ‘Pacific War’가 ‘평화로운 전쟁’이라는 뜻도 되어 그 자체로 훌륭한 시적인 역설이 된다. 한국어로 ‘태평양 전쟁’이라고만 부를 때는 잘 느껴지지 않는 감정이다.[86]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과 묶어 아시아-태평양 전쟁(Asia-Pacific Wa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10. 인용구[편집]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 쇼와 덴노
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다."
"지금은 새벽이다. 밤 세 시다. 오전 세 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우리의 근성은 대단하고, 적의 정신력은 나약하므로, 우리는 백전백승이다."[88]
― 츠지 마사노부
― 히로타 고키를 제외한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 사형당하기 직전
― 나구모 주이치
"만약 미국과 전쟁을 하라고 하신다면 처음 1년에서 1년 반 정도는 승산(남방작전, 싱가포르 전투)이 있겠습니다만, 전쟁이 2~3년 이상으로 길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89]
"
"대일본제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그 근거! 그것이 듣고 싶습니다."
"기름이 탐난다고 전쟁을 시작하는 자가 어디에 있는가!"
― 이시와라 간지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만 한다. 병기가 없어서, 탄환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91]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다. 총검이 없으면 맨손이 있다. 맨손이 없으면 발로 차라. 발도 없으면 물어뜯어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 주는 나라다."― 무타구치 렌야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
"이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들은 다다미 위에서 죽지 못한다. 그 각오를 해둬라."
― 사이온지 긴모치
"폐하는 도조에게 속으셨다. 만주사변 중 폐하는 군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다. 전쟁은 덴노도 모르는 사이에 또 덴노의 허가도 없이 시작되었다."[92]
-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 저서 국화와 칼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中에서
"형은 쉬운 길을 가십시오. 동생은 어려운 길을 가겠습니다."
― 왕징웨이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천 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93]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제국(諸國)의 대일(對日)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합중국은 일본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진주만 공습 직후 의회에서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며 한 연설,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 서두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다시 돌아오겠다."
― 더글러스 맥아더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본어라는 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쪽바리들을 조지고! 쪽바리들을 조지고! 쪽바리들을 더 죽이는 겁니다!"
''일본 놈들은 정말 정이 안 가는 놈들이야. 정말 나치와 비교될 만하군. 스테드포드 중위, 그렇지 않나?"
― 제이미 스터딜슨 (필리핀 미군정의 소령)
"태양에서 나오는 힘이, 이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옥좌가 있는 땅 일본 전체를 일식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 해리 트루먼
"나와 함께 있었던 해병대원들은 열여덟 살에서 스물두 살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 것임을."
"내 진정한 바람이자 모든 인류의 소망은, 이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과거의 피와 대학살을 벗어나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커티스 르메이 일본 본토 공습 중 Operation Meeting House를 짜면서.
11. 관련 문서[편집]
11.1. 교리[편집]
11.2. 사건사고[편집]
- 설리번 5형제
- 코브라
-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
- 어뢰 스캔들 : 미 해군 잠수함대와 뇌격기 비행대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린 사건이다.
- 벵골 대기근
11.3. 전쟁 범죄[편집]
12. 참고 자료[편집]
- 존 톨랜드 저 《일본 제국 패망사: 태평양전쟁 1936~1945》 (원제: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
- 이노세 나오키 저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 야마모토 시치헤이 저 《어느 하급 장교가 바라본 일본 제국의 육군》
- 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 저 《미드웨이 해전》
- 우가키 마토메 저 <전초록>
- 박광홍 저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 기타 일본군 관련 참고 서적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