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타 흐루쇼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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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가족
아버지 세르게이 니카노로비치 흐루쇼프 · 어머니 크세니야 이바노브나 흐루쇼바 · 여동생 이리나 흐루쇼바 고르바초바 · 아내 예프로시니야 흐루쇼바,(사별), · 아내 마루샤 흐루쇼바,(이혼), · 아내 니나 흐루쇼바,(재혼),
사건 · 사고
쿠바 미사일 위기
관련 전쟁
키예프 전투,(1941.8.17~1941.9.26), · 바르바로사 작전,(1941.6.22~1941.12.5), ·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1942.5.12~1942.5.28),
관련 정치인
이오시프 스탈린 · 미하일 고르바초프
평가
평가
기타
스푸트니크 쇼크 · 처녀지 개간 운동 ·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1.1. 어린 시절
2.1.2. 우크라이나 정계에서 떠오르다
2.1.3. 중앙정계 진출
2.1.4. 대숙청 및 우크라이나 귀향
2.1.6. 다시 우크라이나
2.2. 지도자로 등극하다
2.2.1.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다
2.2.2. 스탈린 격하 운동
2.2.3. 정교회 박해
2.2.4. 인민 생활 수준 향상
2.2.5. 교육 및 민족 정책
2.2.6. 문화정책
2.2.7. 소련 공산당 개혁
2.2.8. 우주개발
2.2.9. 크림 반도 전속
2.3. 대외관계
2.3.2. 동유럽
2.3.3. 북한
2.3.4. 중국
2.3.5. 제3세계 및 서유럽
2.4. 실각
2.4.1. 군사교리 수정과 군부의 반발
2.4.2. 농업정책 실패 및 1963년 가뭄
2.4.3. 쿠바 위기로 리더쉽 약화
2.4.4. 반흐루쇼프 음모 및 실각
2.4.5. 실각후 은둔 생활 및 회고록 출판
2.5. 유산 및 평가
2.6. 사망



1. 개요[편집]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최고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2.1.1. 어린 시절[편집]


흐루쇼프는 1894년 러시아 쿠르스크주 칼리놉카(Калиновка)에서 나고 자랐다.

흐루쇼프의 고향인 칼리놉카 마을은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으로 이 마을은 현재 우크라이나 수미주와 맞닿아 있다. 우크라이나 - 러시아의 동쪽 경계선은 민족의 경계라기 보다는 행정 편의를 위해 소련 시절에 그은 것이어서, 출생지 자체도 러시아 - 우크라이나의 경계 지역에 있는 셈이고, 흐루쇼프 자신도 10대 이후부터 계속 우크라이나에서 살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오랫동안 살았기에 우크라이나인으로 종종 오해되지만, 흐루쇼프는 러시아에서 러시아인 농부의 아들로 자라났고, 민족 표기에서도 줄곧 '러시아인'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상술했듯 경계 지역이었고 그러한 경계 지역의 주민들은 이중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흔하기에 흐루쇼프가 러시아 - 우크라이나 양대 문화의 경계인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어릴 때는 목동일을 했다. 불규칙적으로 등교하긴 했지만, 초등 교육은 총 4년 정도 받았고, 이 정도만 해도 당시 기준으로는 꽤 잘 교육 받은 수준이다. 그 뒤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취업 전선에 나갔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청소년기에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음에도 대단한 지적 능력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정적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1908년 아버지가 먼저 일자리를 찾아 우크라이나[1]로 이주했고, 아들 흐루쇼프도 14세가 되었을 때, 유좁카로 이사했다. 이곳은 석탄이 풍부한 곳으로 농업이 주력인 러시아 제국에서도 중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흐루쇼프는 이곳에서 광산 노동자로 일했고, 20대에는 숙련된 광산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지만, 흐루쇼프는 숙련공이어서 징집을 면제받았다. 대전 중에 그는 노동 조합에 가입해 활동했다. 10월 혁명이 발발한 뒤, 우크라이나 라다는 독립을 공식화하여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는 여러 정치 세력이 격돌하는 내전이[2] 발생했고, 흐루쇼프는 난장판이 된 우크라이나를 피해 고향 칼리놉카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볼셰비키에 가담하고,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정치장교로 입대해 백군에 맞섰다. 이 당시 첫 아내인 피사레바가 고향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승리한 1921년, 흐루쇼프는 돈바스의 광산 책임자 직책을 역임했다.


2.1.2. 우크라이나 정계에서 떠오르다[편집]


하리코프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우크라이나 SSR은 붉은군대의 도움으로 내전에서 승리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멸망시키고 우크라이나를 차지하였다. 우크라이나 SSR은 소련에 가입했고, 흐루쇼프도 내전에서 정치장교로 보여주었던 리더쉽으로 볼셰비키당이 이름을 바꾼 소련 공산당의 고위당원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이전에 자신이 일했던 돈바스 광산으로 돌아왔고, 자본가들이 추방된 광산 경영을 맡아서 큰 성과를 내서 공산당의 주목을 받는다. 이어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계속 교육을 받으면서 부족했던 가방끈도 늘릴 수 있었다.

1925년에는 도네츠크[3]의 당서기로 임명되었으며, 이때부터 우크라이나 지역당의 중요인사로 자리잡게 된다. 이때 우크라이나 지역당의 서기장이었던 라자르 카가노비치를 알게 되었고 카가노비치의 제자, 피후견인로 알려지게 된다. 카가노비치의 눈에 든 그는 우크라이나 중앙정계로 발탁되어 키이우에서 일하게 되었고, 카가노비치가 중앙정계로 진출하자 잠시 후 그의 추천으로 중앙정계로 진출해 1929년 모스크바로 오게 되었다.

이당시 흐루쇼프의 항상 든든한 후견인을 하던 라자르 카가노비치[4]는 우크라이나 SSR을 세워서 소련에 가입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거물 정치인이었다. 당시 자기 눈에 든 흐루쇼프를 돌봐주면서 흐루쇼프의 중앙정계 진출과 이후 최고권력자로의 등극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 사람은 스탈린의 충신으로, 숙청 대상에 들었던 자기 형을 구해주기는 커녕 냉정히 통보, 자살에 이르게 할만큼 충성을 바쳤다.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 시절부터 흐루쇼프를 후원했고, 아마도 흐루쇼프가 대숙청에 휘말리지 않는데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카가노비치는 1940년대까지는 흐루쇼프보다 당내 위상이 더 높았지만, 스탈린 사후에도 흐루쇼프를 지지하여 흐루쇼프가 집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주도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되자 반(反) 흐루쇼프로 돌아섰고, 말렌코프 그리고 몰로토프와 함께 흐루쇼프를 끌어내리려다가 역공을 받아 반당분자로 찍혀서 실각했다. 이후 당에서 추방당하고 칼륨 공장장으로 좌천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고참 볼셰비키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오래 살았다. 바로 소련이 해체되기 5개월 전인 1991년에 사망했다. 심지어 흐루쇼프보다 1살 많았다.


2.1.3. 중앙정계 진출[편집]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1929년 중앙정계로 진출하면서 모스크바로 갔고 소련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카가노비치는 자신이 아끼던 흐루쇼프를 데리고 갔고, 흐루쇼프도 건설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아 건설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당조직으로도 승진하여 모스크바 지구당의 서기가 되었고, 흐루쇼프도 2인자가 되었다.

흐루쇼프도 카가노비치를 따라 건설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건설을 알기 위해 스탈린 공업학교에 입학해 건설학을 배우게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가 되는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같이 공부를 하게 되머, 1932년부터는 스탈린도 흐루쇼프의 존재를 알게 된다.

1934년 건설부 책임자로 모스크바 지하철 공사 감독을 맡아 위험을 감수하고[5] 지하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며 모스크바 지하철 공사를 완수했다. 이런 공적으로 레닌훈장도 받고, 모스크바 지구당의 제1서기가 된다.

스탈린은 자신의 개인별장으로 흐루쇼프를 초대할 정도로 흐루쇼프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2.1.4. 대숙청 및 우크라이나 귀향[편집]


1930년대 중반부터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된다. 이 때 동안 흐루쇼프도 이미 숙청대상이 될 수 있는 고위직이었고, 흐루쇼프의 동료 고위직들은 대부분 숙청을 당하는데[6], 그 와중에 자신도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흐루쇼프는 자신이 1920년대 잠시 트로츠키주의에 경도되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자신의 후원자였던 라자르 카가노비치에게 이야기했는데 카가노비치는 안색이 창백해지며, 스탈린에게 이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을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흐루쇼프는 개인적으로 스탈린을 찾아가 자신의 "과오"를 자백했고 참회하며 용서를 구했다. 스탈린은 흐루쇼프의 이런 참회가 맘에 들었는지, 흐루쇼프를 용서하고, 모스크바 당대회에서 이런 참회를 공개고백하라고 했다. 흐루쇼프는 당대회에서 스탈린이 시킨대로 이야기 했고, 이는 스탈린에 대한 확고한 충성으로 받아들여져 숙청되지 않고 다시 모스크바 지역당 서기로 재선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스탈린은 흐루쇼프에게 많은 체포된 반동들이 흐루쇼프의 이름도 불었다고 이야기 했지만, 흐루쇼프는 침착하게 자신은 반혁명세력에 가담한 적 없다고 부인했고, 스탈린은 흐루쇼프를 믿었는지, 흐루쇼프는 더이상 의심을 받지 않고 대숙청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1938년 스탈린은 흐루쇼프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임명했다. 이는 흐루쇼프의 전임자 스타니슬라프 코시오르[7]가 무리하게 농업집단화를 실행하다가 홀로도모르를 일으켰고, 대기근이 이후 몇년이 지났어도 여러가지로 우크라이나 정세가 혼란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사정에 밝고, 조직능력과 리더쉽이 검증된 흐루쇼프가 가서 현지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임명에 크게 놀라서 처음에는 "저는 우크라이나인이 아니니 좀 더 능력있는 분이 맡아야합니다"라며 겸손을 떨며 고사했으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고, 사실은 이곳은 홀로도모르 이래 여러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잘못하면 후임자인 자기가 책임을 뒤집어 써야할 판이기 때문에 몸을 사린 것이다. 실제로는 그는 우크라이나 볼셰비키의 대부인 카가노비치 인맥의 중심인물로 출세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와는 무관하게 생각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즉 소비에트 내에서 우크라이나 전문가를 들라면 흐루쇼프 아니면 카가노비치였던 것이고 스탈린은 폴란드인인 코시오르도 10년이나 우크라이나를 다스렸는데 흐루쇼프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냐고 강권했다.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맡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능력을 발휘, 이곳 전체를 철저히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만들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후견인인 카가노비치보다 영향력이 더 커진다. 이렇게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중에 스탈린이 장관회의 (소브나르콤) 부의장으로 승진시켜줄테니 모스크바로 오라고 제의했으나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를 떠나기 싫어 고사했다.

우크라이나에서 흐루쇼프는 1930년대 초반의 홀로도모르[8]로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이의 책임전가를 위한 대숙청을 담당하게 되는데, 스탈린의 명령대로 거의 모든 우크라이나 당정 요직과 군 간부들을 "트로츠키파 테러리스트", 또는 "폴란드 간첩"으로 몰아 숙청하고 거의 예외 없이 사형시켰다고 한다.

당시 흐루쇼프가 자신이 숙청한 인물들 중에 무고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던 것은 확실하고, 1939년에는 "인민의 적들을 찾아내 제거해야 하지만, 무고한 한 명의 인민이라도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이 숙청한 일부는 1956년 대권을 잡자마자 복권시키기도 했다. 훗날 1956년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격하하며 대숙청에서 사용된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살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대대적인 숙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본인 자신도 스탈린의 대숙청에 공범노릇을 한 것을 흑역사라고 생각한 듯, 집권후 우크라이나에서 자신이 숙청에 간여한 여러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우크라이나 대숙청의 책임자였다.


2.1.5.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39년 당시 흐루쇼프는 소련군폴란드 침공 당시 스탈린의 명령으로 폴란드에 진주하는 소련군을 지휘하는 소장 대우의 정치장교로 임명되어 다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폴란드령이 된 서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정치력이 있는 그가 필요했다. 점령지에서 그는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의 소련가입 찬성 투표를 감독하여, 부정한 수단까지 동원하여 결과를 찬성으로 만드는 한편 소련에 위험한 우크라이나인-폴란드인들을 대거 체포하여 숙청했다. 소련 붕괴 후 기밀해제된 카틴 학살 관련 서류에는 흐루쇼프의 사인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실상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숙청을 관리 및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흐루쇼프 회고록에 나오는 일화로, 흐루쇼프가 소련군을 이끌고 동폴란드로 진주하자 거기에 살던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를 대단히 반기면서 우크라이나어로 폴란드인들을 마구 욕하기 시작했고 폴란드인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벌벌 떨었다고 한다.[9][10]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할 당시, 키예프에 있었고, 당간부들은 모두 붉은군대에 입대하여 부대의 정치장교로 복무해야했고, 그도 다시 입대했다. 9월 키예프 방어를 위해 군과 협력하였으나 키예프의 함락을 막을 수는 없었고, 소련군은 60만명의 포로를 남기는 대패를 했다. 이로서 우크라이나 북부는 1941년 가을 전부 독일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11]

1942년 5월, 스탈린은 독일군에 넘어간 하리코프 방면에서 남서집단군 60만의 대군으로 반격을 기획했다. 흐루쇼프는 다시 사령관 세묜 티모셴코의 정치장교로 공세를 기획하는데, 독일군에게 역습을 받아 26만 7천 명이 전사하고, 20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사를 겪는다.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그와 티모셴코는 독일군 역습을 감지하고 방어를 위해 공세를 중단하고 병력을 재조직하려 했으나 스탈린이 흐루쇼프가 군인도 아닌 주제에 군인 행세를 하려 든다고 비판하면서 공세 강행을 지시했고 덕분에 대참사로 이어졌다고 한다.

완전히 좌절한 흐루쇼프는 숙청을 각오하고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고, 비참한 심정으로 그와 마주했다. 스탈린은 대패의 소식에 극도로 분노한 상태였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고 "독일놈들이 우리 수천수만명의 우리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고 발표했는가, 거짓말인가?"라고 물었다. 흐루쇼프는 "아닙니다. 스탈린 동지. 독일놈들이 발표한 숫자는 아마도 정확할겁니다. 우린 그 지역에 대략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을 배치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스탈린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독일군이 도네츠 강을 도하하지 못하기 위해서 무슨 조치를 취해야겠나?"라고 묻고는 회의를 잠시 중단하고 식사를 했다. 모스크바에서 지내는 동안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패배의 희생양으로 자신을 숙청할 것이라고 공포에 떨었지만 스탈린은 흐루쇼프를 불러서 많은 술을 마시면서 그를 고양이 입에 들어온 쥐처럼 가지고 놀았다. 하루는 스탈린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패주한 러시아 제국군 장군이 교수형을 당했단 얘기를 하면서 흐루쇼프를 위협하기도 했고 흐루쇼프는 자신이 파블로프 꼴이 날 것이라고 예감했으나 결국 스탈린은 그에게 전선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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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시절로 추정되는 흐루쇼프의 사진.

흐루쇼프는 1942년 8월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하여 안드레이 예료멘코 대장이 사령관으로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에서 정치장교로 복무하게 되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과 마마예프 언덕 뒤의 최전선 사령부에서 소련군 장병들의 사기를 감독하고 독일군 포로에 대한 심문 작업을 수행하였다.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이어 1943년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대장의 중앙전선군의 정치장교로 복무했다. 이어 바투틴 대장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정치장교로 복무하여 우크라이나를 탈환하는 것으로 군커리어를 마치고 다시 정치가로 돌아왔다. 최종계급은 중장.

1943년 5월에 개인적으로 큰 사건을 겪게 되는데 공군 전투기 조종사이던 아들 레오니트 흐루쇼프[12]가 적기에 격추돼 실종된다.[13] 끝내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없어서 탈영이나 배신 등 여러 음모론이 나왔다. 비록 레오니트 흐루쇼프의 공적은 인정되어 훈장은 수여되었지만 흐루쇼프의 라이벌들은 당연히 이를 기회로 흐루쇼프를 공격하기 위해 이러한 음모론들을 계속 스탈린 앞에서 발설했다.

흐루쇼프는 행방을 알 수 없는 레오니트를 탈영병으로 규정하고, 탈영병의 가족을 처벌하는 연좌제 규정에 따라 큰며느리를 굴라크로 보내버린다. 며느리는 5년 뒤 석방되었지만, 스탈린 사후까지 자기 자식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하지도 않았고, 커서도 어머니가 반역자라고 배워왔던 흐루쇼프의 손자들은 친모와의 사이가 죽을 때까지도 미적지근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결정적인 계기로 이후 흐루쇼프가 스탈린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스탈린조차 자기 아들 야코프 주가시빌리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자 며느리를 감방에 보내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흐루쇼프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1.6. 다시 우크라이나[편집]


1943년부터 소련군은 반격작전을 벌여 실지를 탈환하기 시작했고 흐루쇼프는 1943년에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1944년 가을까지 소련군은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수복했고, 우크라이나로 복귀한 흐루쇼프는 재건 작업을 맡았다.

우크라이나는 독일의 지배하에서 학살과 약탈로 우크라이나인 6명중 한명이 사망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소련군은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복하자마자 대량으로 징집을 실시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을 붉은군대에 입대시켰고 그에 따라 75만명이 입대했지만, 독소전이 워낙 격전이었기 때문에 1945년에 우크라이나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1/3에 불과했다.

1945년 우크라이나의 총생산은 전쟁전의 1/4에 불과했다. 흐루쇼프는 한편으로는 재건을 총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쟁전부터 시행되던 농업집단화를 밀어붙였다. 이곳은 전쟁전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반소감정이 많았고, 나치 독일은 이를 이용하여 우크라이나 반군을 조직해서 반소전선에 돌렸다 이들은 독일이 물러간 이후에도 서부우크라이나에서는 잔존하여 여기까지 진격해온 소련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이들을 진압하는 한편, 이들이 번성할 수 있는 민심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중앙정부에 식량 공급을 요청했다. 흐루쇼프의 지휘를 받은 소련군 및 소련 내무군은 1952년까지는 완전히 반소게릴라들을 박멸하는데, 이 때 반소게릴라 10만명을 사살하고, 25만명을 체포했으며, 분리주의자 수십만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14]

이 당시 우크라이나는 곡창이었에도 식량이 부족했는데, 식량 대부분이 중앙인 모스크바로 반출되었다가 다른 지역으로 수송되었기 때문이다.[15] 여기다가 소련은 동유럽 점령지에서의 민심을 달래고 공산정권 수립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자국인보다 동유럽으로의 식량을 우선배정했는데 이러다보니 우크라이나는 곡창지임에도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흐루쇼프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고, 응답이 없자 다시 1946년에 모스크바로 찾아가 스탈린에게 직접 항의를 해서 중앙정부의 원조를 얻게 되었다.

이후 병을 이유로 1947년 2월부터 1947년 9월까지 라트비아에서 요양을 했고, 이 때 우크라이나 지역당 서기장을 사임했다. 그 동안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카가노비치가 다시 우크라이나에 와서 흐루쇼프의 자리를 맡게 된다.[16] 1947년 9월 카가노비치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를 다시 맡았다. 흐루쇼프는 농업집단화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밀어붙이면서도 우크라이나인들을 위해 각 도시와 마을마다 도서관이나 체육관 공원 같은 공공시설을 대거 건립하기도 했다. 1947년과 1948년 우크라이나의 산업과 농업은 엄청난 회복세를 보였고, 이는 흐루쇼프의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1949년 12월 스탈린은 이런 업적을 낸 흐루쇼프를 중앙정계로 다시 불러들였고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지역당 서기가 되었다.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이 간부회로 개편되면서 간부회 위원으로 재선되는 것은 물론, 서기국 서기에 간부회에서 최고 핵심인 사무국의 일원으로 선거되는 등 그에 대한 스탈린의 총애는 유지되었다.


2.2. 지도자로 등극하다[편집]



2.2.1.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다[편집]


흐루쇼프가 중앙에서 일한지 4년만인 1953년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스탈린의 후계자로 꼽힐만한 사람들은 흐루쇼프를 포함해 여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단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해 소련을 다스리게 되었다. 1953년 3월 정부의 최고수장인 장관회의 의장은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제1부의장 겸 MGB[17] 장관은 라브렌티 베리야가 맡았다. 흐루쇼프는 기존의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에서 물러나서 당중앙위원회를 관장하였는데, 간부회 회의는 여전히 말렌코프가 주재하였다. 이후 1953년 9월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 직함이 신설되었고, 말렌코프의 제의에 따라 흐루쇼프가 제1서기에 선출되면서 당중앙위원회를 대표하게 되었다.[18] 이렇게 삼두정치를 이루게 되었는데, 흐루쇼프가 일인자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이 둘을 완전히 제거해야했다. 흐루쇼프는 먼저 베리야부터 손을 썼다.

베리야는 MGB라는 막강한 기관의 수장이기는 했지만,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을 맡아 수많은 사람을 처형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안티들이 많았던데다가 인망도 없었다. 그런데 베리야가 제1부의장이 되면서 갑자기 자유주의노선으로 기울어져서 100만명의 죄수들을 석방하기도 하고, 고문 방지법안을 낸데다가, 독일이 영세중립국이 되는 조건으로 동서독을 통일시킬 수 있다고도 했고, 연방 산하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등의 정책을 제의했다. 이런 베리아의 정책에 자극을 받은 동독주민들은 1953년 봉기를 일으켰고 이는 동유럽의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련지도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베리야가 갑자기 평화주의자 행세를 하고 나서자, 다른 경쟁자들은 스탈린의 과오를 자기들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수령이 되려는 수작이라고 여기게 되었으므로, 흐루쇼프는 쉽게 다른 장관회의 멤버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1953년 6월 흐루쇼프는 장관회의 개최를 요구했고, 정부 고관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흐루쇼프는 갑자기 베리야를 영국 간첩이라고 공격했다. 베리야는 친구이자 의장인 말렌코프에 자신을 방어해 줄 것을 애걸했으나, 말렌코프는 베리야를 외면했다. 흐루쇼프의 음모에 가담해 옆방에 대기해 있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들이닥쳐 권총을 들이대고 베리야를 체포했고, 베리야는 그길로 구금되어 6개월 후 비밀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렇게 흐루쇼프는 가장 큰 정적 베리야를 자신의 주도로 제거했다.[19] 이후 소련의 공포정치에 앞장섰던 국가안전부(MGB)는 국가안보위원회(KGB)로 격하되어 그 역할과 권한이 훨씬 축소되었다.

다음은 말렌코프였다. 말렌코프는 스탈린이 시킨 일을 무난히 완수하는 당료로 출세해서 고위직까지 올랐으나[20], 말렌코프가 최고지도자로 오른 것은 본인의 리더쉽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스탈린 사후 무난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게 좋다는 여러 경쟁자 후보군의 합의의 결과였다. 흐루쇼프는 말렌코프가 베리야와 친했음을 계속 장관회의 멤버들에게 상기시키고, 말렌코프의 개혁방안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들어 말렌코프를 계속 공격했다.이 때분에 1955년 2월, 말렌코프는 23개월 만에 정부 수장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21], 흐루쇼프는 그 자리에 바지사장으로 불가닌을 옹립하여 사실상 당과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1인자의 자리에 올라 최고권력을 쥐게 된다.

흐루쇼프는 1인자에 등극한 이후, 갑자기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는데, 이것은 공포정치에 식상한 공산당 내부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동유럽 각지에서는 탈(脫) 소련 자유화 운동을 불렀다. 이미 1956년에는 폴란드 포즈난 봉기와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고, 이는 모두 흐루쇼프의 실책으로 기록될 지경이었다. 1957년 6월 정치국에 있던 보수파들은 이것을 트집잡아 흐루쇼프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는 밀려난 말렌코프와 스탈린 아래서 고관을 지냈던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니콜라이 불가닌[22], 그리고 흐루쇼프의 옛 후견인이었던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장관회의에서 장관회의 의장인 흐루쇼프 해임안을 논의할 예정이었으나, 흐루쇼프는 계략을 써서 장관회의 멤버이자 국방장관 주코프와 짜고 "장관회의 멤버들에게 충분한 사전설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의를 제기하여 결론을 못내게 만들고, 그동안 자신이 1953년부터 장악하고 있던 당조직을 움직여 당중앙위원회를 소집했다. 소련 각지의 지역당 임원들은 이미 흐루쇼프 인맥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당중앙위원회를 연 것이다. 이들은 흐루쇼프의 반대파들을 "반당그룹"으로 몰아붙여 제명을 결의했다. 당이 정부를 지배하는 소련의 사정상, 흐루쇼프의 반대파들은 꼼짝없이 당직을 잃어버리고 모조리 실각했으며, 흐루쇼프는 이제 정부내에서도 도전할 자가 없는 절대권력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흐루쇼프는 오락가락하던 바지사장 불가닌마저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장관회의 의장에 앉아서 행정부를 장악한다.

흐루쇼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곧 권력투쟁에서 자신을 도왔지만, 온전한 자기 인맥이 아닌 공신들에 대한 토사구팽에 들어갔다. 흐루쇼프를 두 번이나 도운 주코프는 독소전쟁 기간동안의 전공으로 구국의 영웅으로 소련 인민에게 인기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군부에서도 추종자들이 많았다. 흐루쇼프는 주코프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을 것 같자, 계략을 써서 실각시켰다.[23] 1957년 10월 우방국을 도는 장기 외유를 보냈다가 돌아오는 시점에서 국방장관에서 해임을 발표했다. 주코프는 공항에서 KGB 요원에 의해 모처로 끌려갔다가 후임 말리놉스키 원수가 국방부를 장악한 시점에서 석방되었다. 이렇게 독소전의 영웅인 주코프는 힘한번 못쓰고 야인이 되었다. 군부 뿐만 아니라 정보기관에서도 토사구팽이 있었다. 이반 세로프는 베리야의 부하였지만, 흐루쇼프가 포섭해서 베리야와 이후 반당그룹을 제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공적으로 KGB 의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세로프는 사실 베리야의 공범이었고, KGB의 장악력이 뛰어나서 얼마든지 흐루쇼프를 위협할 수 있는 자였다. 흐루쇼프는 1958년 KGB의장에 당시 겨우 41세였던 자신의 심복인 알렉산드르 셸레핀[24]을 앉히면서 세로프를 국내 정치에는 힘을 못쓰는 군정보기관 GRU 사령관으로 사실상 좌천시켰다가 쿠바위기 후 책임을 물어 해임하고 대장에서 소장으로 강등시켜 불명예전역시킨다. 이로써 흐루쇼프는 토사구팽도 완료하고 절대권력을 이루게 된다. 그외에 다른 공신이었던 예카테리나 푸르체바도 서기국에서 추방하고 내각 문화상으로 좌천시켰다.

스탈린은 지나칠 정도로 주의 깊고, 어찌 보면 소심할 정도였지만, 흐루쇼프는 정반대로 굉장히 과격하고 앞뒤를 재지 않는 호쾌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교양머리가 별로 없어 동시대인들은 그를 떠벌이나 무식쟁이로 생각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스탈린 치하에서 자신의 성향을 완벽히 감추고 스탈린주의자로 자처하며 목숨을 부지했고,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에서는 정적을 하나하나씩 고립시켜 제거했고, 이후에는 반스탈린 노선으로 180도 전환하여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소련인민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장악하고, 1인자가 된 이후에는 토사구팽까지 완료하는 면모를 보였다. 그런 것을 보면 흐루쇼프는 다른 사람에게 비치듯이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권모술수와 계략에 비상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정적들도 흐루쇼프의 계략에 걸려 야인이 된 이후에야 이런 흐루쇼프의 놀라운 지략을 깨닫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공신을 마구 숙청한 이러한 행보 때문에 소련 공산당의 간부대오는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받게 된다. 흐루쇼프 시대의 간부회는 흐루쇼프에 대한 불신과 공포로 가득차게 되었고 이것이 1964년 반 흐루쇼프 음모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흐루쇼프는 베리야를 제외하면, 이렇게 실각한 사람들을 감방에 보내거나 처형하는 등의 물리적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실각한 자들은 흐루쇼프와 비슷한 또래임에도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특히 카가노비치는 흐루쇼프보다 한 살 위인데도 고르바초프 시대까지 살아 소련 해체 바로 직전(5개월전)에 죽었다.


2.2.2. 스탈린 격하 운동[편집]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 또는 탈(脫) 스탈린화 정책을 펴면서 스탈린을 신으로 모시고 있던 소련체제를 개혁한다. 이것은 흐루쇼프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고, 베리야, 말렌코프도 조용히 스탈린 우상화 폐지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스탈린의 숙청명령을 실행하던 충복들조차도 이런 공포정치로는 나라를 계속 이끌 수 없다는 것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25]을 감독하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억압적 정책을 대부분 폐지했고 고문 방지 법안을 내고 굴라크에 끌려갔던 이들을 석방시켰다. 이런 베리야의 자유화 정책은 다른 정적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흐루쇼프, 말렌코프 등 여러 정적들이 베리야를 "국가를 흔든다"는 명목으로 잡아 처형했다. 이것으로 다시 스탈린 시대로 정책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흐루쇼프도 스탈린 휘하에서 계속 승진해서 결국 대권을 거머쥐었기 때문에, 그가 집권했을 때도 그는 스탈린주의자로 보였으며, 스탈린의 신적인 우상화는 아직까지도 소련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비난하면서 그를 신적인 위치에서 독재자로 끌어내려 세계를 놀라게 했다.

흐루쇼프는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소련 전역과 전 세계 공산주의 국가에서 모인 대표단을 앞에 두고 무려 5시간에 걸쳐 '개인 숭배와 그의 결과에 대하여'라고 이름이 붙은 비공개 연설을 행했다.

연설의 도입부는 공산국가에서 비조로 추앙되던 마르크스는 개인숭배를 배격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또한 레닌도 자신을 우상화하려던 여러 시도를 경계했다는 일화가 추가되며, 연설이 진행되면서 스탈린은 마르크스나 레닌과는 그 반대였다는 것이 강조되어, 스탈린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절대적 진리인 마르크스-레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어긴 자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흐루쇼프가 단단히 준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여러 비행들을 나열하고,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하라는 레닌의 유언장, 스탈린의 키로프 암살 사주, 대숙청, 독소전쟁 당시 스탈린이 저지른 악행들을 열거하면서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독일을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겼다"[26], "스탈린은 천하의 악당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독재자"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 연설을 들은 소련 공산당 고위 당직자들은 충격을 금할 수 없었으며, 심장마비를 일으키거나 후에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후문에 의하면 흐루쇼프가 연설을 마치자 오랫동안 청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가, 이윽고 사람들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고 한다.[27]

이런 스탈린 격하 운동은 단순히 소련 정치를 개혁한 것일뿐만 아니라, 흐루쇼프가 권력을 확고히 장악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숨막히는 스탈린 치하를 살아본 소련 공산당원들조차 그 누구도 스탈린식의 공포정치를 다시 겪어보고 싶은 자는 없었기 때문에, 흐루쇼프는 당내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이것으로 흐루쇼프는 당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이후 자신의 경쟁자들을 "반당분자"로 몰아 실각시킬 수 있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소련의 체제도 많이 순화되었고, 많은 정치범들이 석방되었으며, KGB는 반정부인사를 체포하거나 처형하는 역할보다는 감시하는 역할로 바꾸었고, 스탈린의 악행에 대한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였다. 대숙청 당시 반역자로 처형된 수십만 명의 희생자들은 살려낼 수는 없었지만 복권하여 명예를 회복시켰고 굴라크에 있던 그들의 가족들을 석방하고 복권하였다.

또한 죄수들의 인권도 개선되었으며[28], 파리목숨처럼 행해지던 정치범에 대한 사형도 이 시점부터는 매우 자제하게 되었다.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100% 사형이었던 정치범은 거의 처형되지 않았으며, 소련 체제에 부담되는 자[29]들은 죽이기보다는 가택연금하거나 혹은 해외언론이 접촉할 수 없는 내륙도시로 전근, 그것도 별로 효과가 없으면 해외로 추방시켰다. 대표적으로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등등이 있다.

당시까지도 만연했던 스탈린 우상화는 소련에서 급격히 사라지며, 많은 스탈린 동상이나 초상화들이 철거되었다. 스탈린의 이름을 딴 스탈린그라드, 스탈리노, 스탈린스크 등의 도시들은 볼고그라드, 도네츠크, 노보쿠즈네츠라고 이름이 개명되었다. 스탈린상(Stalin prize)도 소련 국가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레닌 옆에 마련되었던 스탈린의 영묘도 제거되며 방부처리되어 전시되던 스탈린의 시신도 화장되어 크렘린 벽묘지에 묻혔다.[30]

이런 스탈린 격하운동 및 이에 따른 체제 통제 완화 및 자유화를 냉전시절에는 "흐루쇼프 해빙 (Khrushchev's Thaw)"이라고 했다.

다만,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테러에 강하게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루지야의 스탈린 복권 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조지아인들 중 스탈린을 존경하는 이들과 스탈린을 증오하는 이들이 일치단결로 의견을 내는 게 흐루쇼프에 대한 비판이다. 전자는 스탈린 격하 운동 때문에, 후자는 후술할 정교회 탄압 때문에 흐루쇼프를 비판한다. 다만 스탈린 복권 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한 것은 과거의 공포정치로 회귀하자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가 강경하게 진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31] 또한 스탈린을 폄훼하기 위해 키로프 암살 사건을 조작해서 스탈린이 키로프를 암살한 것이라고 사건을 날조했다.


2.2.3. 정교회 박해[편집]


러시아 제국의 멸망 이후 해외로 피난한 러시아인 난민들 중에서 차르 복권을 외치는 정교회 성직자들이 적지 않았고,[32] 이들이 소련 인민들을 선동할 가능성이 결코 적지는 않았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소련 정부는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도 실제로는 정교회 관련한 여러 제약과 탄압을 가했다.

하지만 2차대전이 터지자 스탈린은 정교회와 밀접히 이어진 러시아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위해 어느정도 정교회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1958년부터 반종교 캠페인을 벌여 2차 대전 이후 정교회에 유화적이었던 스탈린이나, 그 후임자인 브레즈네프보다도 좀 더 반기독교적인 색채를 띠었다. 그리하여 재임기간 내내 반종교 캠페인을 벌여 종교활동을 하는 당원들을 색출해 당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스탈린 시대의 반종교정책이 교회를 부수고 성직자들을 수용소로 보내거나 처형하는 무식한 것이라면, 흐루쇼프의 반종교정책은 겉으로는 폭력을 자제하지만 좀 더 조직적인 것이었다. 일단 학교에서 무신론 교육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종교적인 사람은 상급학교 진학 (대학 포함)을 거절당할 수 있었다. 기독교 교회는 22,000개에서 7,000개로 줄어들었고, 교회는 강당이나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모든 교회는 의례나 전례, 성사를 받은 신자의 명단을 국가에 보고해야 했으며, 만약에 공산당원이 이런 종교행사에 참가한 것이 들통나면 바로 출당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무신론을 비방하는 성직자들은 체포되었다. 종교를 버린 전직 성직자들이나 교인들을 앞세워 무신론 선전에 동원하기도 했고, 무신론을 옹호하거나 종교를 비방하는 여러 서적이 출판되고 이에 관련된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흐루쇼프가 최초의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에 성공한 후 자신에게 "우주에는 하느님이 없었습니다"고 말해주었다며, 이에 관련되어 대대적으로 포스터를 제작하도록 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우주에는 하느님이 없었다! (포스터)"[33]

러시아에서 정교회를 비롯한 종교 단체들은 항상 미묘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러시아 국가는 종교적이었지만 종교 단체에는 거의 항상 부정적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경우 모체가 그리스 교회인만큼 비잔티움 시대의 세계총대주교좌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유사하다. 혁명 이전 러시아 정교회의 전제정에 대한 기본 입장은 차르는 지상에 있는 신의 대리인이어야 하며 반대로 차르가 그러지 못한다면 그는 '더 이상 차르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식 역성혁명 논리의 기초가 되어 고의식파 같은 단순 교회 내부의 반(反) 황제 세력 뿐 만 아니라 푸가초프의 난, 데카브리스트의 난, 러시아 혁명 같은 농민봉기나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반대로 이반 4세도 주교들과 논쟁하면서 자신이 전제군주라는 걸 '증명'해야만 했고 표트르 1세는 러시아 교회에 그리스인들, 라틴인들을 대거 투입시켜 프로테스탄티즘화시키려고 했으며 기존 러시아 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미신적인 것으로 묘사하여 조롱하였고 결국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철폐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적그리스도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34] 물론 이러한 행위는 러시아 제국 말기에 종교와 교회라는게 예전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 시대가 들어서면서 상대적으로 서서히 완화되기는 했지만 러시아 교회가 두고두고 전제정을 비난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1905년에 혁명이 발발하고 종무원장 포베도노스체프가 사실상 실각하자 '신앙의 자유'를 근거로 총대주교좌 복원과 선출을 위한 공의회 소집을 니콜라이 2세에게 요청할 것과 '1721년의 독단적 방식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고 선포했다. 1917년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의 복원을 선포할 때는 아예 전제정을 부정했다.

정리하면 제정 시대와 소련 시대의 종교 탄압은 서로 대비된다. 제정 시대에는 물리적인 탄압은 거의 없었지만[35] 조롱하고 교리적 측면에서 부정하려 했던 반면 소련 시절에는 비록 초기에 '살아있는 교회(Живая Церковь)'를 만들어 티혼 총대주교를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물리적인 탄압이 대부분이었다.[36] 어떻게 보면 당연한게 소련 시대에는 종교가 예전과 같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냥 나이브하게 종교 단체만 골라서 탄압할 수 있었다. 반대로 중세 시대에는 종교가 단순한 단체나 조직이 아닌 사람들의 사고방식, 세계관, 관습, 전통 등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종교 단체를 탄압하기 위해선 그 기반이 되는 사상과 교리를 근절시켜야 할 필요가 있고 이 와중에서 반종교적인 행위도 종교적인 기반 위에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러시아 황제들은 정교회라는 '종교'에 입각하였지만 (그들 개개인이 독실한 신자였기도 하고) '종교 단체'에 대해서는 완전히 부정적이었다. 성직자의 입장에서 후자에 죽거나 탄압당하는 것은 '순교'나 '고난'이었지만 전자에 경우는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였다.

흐루쇼프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기에 한때 신학교 학생으로서 기독교 교리를 뼈속까지 배운 스탈린보다 더 탄압적이었다. 그는 혁명 전부터 러시아 정교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산당에서 떠오르기 전부터도 첫번째 아내의 장례식에서 정교회식 장례를 거부할 정도로 종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스탈린은 혁명 이후 종교탄압을 완화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부흥을 허가하고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국가 행사에 초청하기도 했지만, 흐루쇼프는 러시아 정교회를 대놓고 박해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혁명 이후 공산당은 국가 무신론으로 인민들을 계몽(?)하면 더 이상 종교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으나 이것이 계속 빗나가자 공산 정권은 정교회를 박해했다.[37] 그래도 소련의 랜드마크가 될 만한 성 바실리 성당과 크렘린 궁 내부의 성당들은 헐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는 종교보다는 러시아 고유 문화재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당으로서의 기능은 정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스탈린은 전국민의 사기고양을 위해 정교회에 대한 제한을 완화했고, 원래부터 체제순종적인 정교회는 적극 전쟁수행에 협조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다시 교회 탄압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정교회는 흐루쇼프를 "악마의 자식", "사탄의 제자"라고 훨씬 더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가 오히려 죽어서 정교회의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던 것은 스탈린 시대 때 살아남기 위해 정권에 아부한 처세와 비슷하다.

이미 정교회는 존립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릴 정도로 탄압받았고 수도회와 신학교는 강제 폐쇄되었으며, 기존의 사제들과 신자들은 정부가 감독하는 교회에 발길을 끊고는 탄압을 피해 몰래 숨어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흐루쇼프의 종교 제한 정책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유무형의 탄압을 받았다.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후 브레즈네프 집권후 반종교정책은 조금 완화되었다. 이렇게 소련 공산당은 조직적으로 종교 박멸 정책을 취했음에도, 거의 천년간 러시아 민족정서와 결합된 정교회는 박멸되기 힘들었다. 일부 공산당원들도 여러 탄압을 피해서 남몰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 성리학이 국교화되고 숭유억불정책을 공식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지배층 내에서조차 불교신자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때 다시 사회주류로 등장하여 숨통을 트기 시작하더니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자 거의 국교의 위치로 승격되어 본격적으로 재부흥을 맞게 된다.


2.2.4. 인민 생활 수준 향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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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러시아의 흐루숍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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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중공업 편집증에서 벗어나 경공업을 중시하고 인민 생활 개선을 강조했는데, 사실 이런 노선은 스탈린 이후 소련 정치가들의 공감대였고, 흐루쇼프의 정적인 말렌코프나 베리야조차 스탈린 시절의 중공업 몰빵을 반성하고, 경공업에 중점을 기울일 것을 천명한데서도 드러난다. 다만 이것은 소련이 망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고, 소련 붕괴의 한 원인이 된다. 또한 구매력의 상승을 위해 대대적인 임금 인상을 단행했고, 그와 동시에 노인들 대상으로 보편연금 제도도 확립하여 노인층들에게 안정된 급여가 보장되어 노후걱정을 덜어주었다.[38]

스탈린 시대는 경제 성장률은 높았으나 특권층을 제외한 인민의 생활수준은 열악했는데, 흐루쇼프 시대에는 경제 성장률도 높았고 동시에 생활수준도 빠르게 향상되어 소련은 비로소 살 만한 나라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도 이 정책은 계승되어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소련에 TV와 세탁기, 라디오[39] 같은 가전제품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런 정책 기조는 말렌코프가 먼저 제창한 것이지만, 흐루쇼프 시대부터 실현되었기 때문에 인민 생활 수준 향상은 흐루쇼프의 공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브레즈네프도 흐루쇼프의 인민 생활 수준 향상 정책을 계승하여 브레즈네프 시대에도 소련 인민의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허나 소련 인민의 건강과 의료 수준 향상은 흐루쇼프는 대성공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대실패해 의료 복지는 흐루쇼프가 브레즈네프보다 확실히 잘했다.# 2차대전 이후 스탈린 시대 말기부터 흐루쇼프 시대 말기까지 소련 국민의 평균 수명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러시아 SFSR의 1948년 평균 수명은 남자 47세, 여자 56세였는데 1964년 평균 수명은 남자 64.89세,[40] 여자 73.58세로 선진국 수준 턱밑까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남자의 평균 수명은 3세나 감소했고 여자의 평균 수명은 크게 감소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증가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가 금주법을 시행하여 남자의 평균 수명이 흐루쇼프 시대 말기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1987년 64.83세에서 남자 평균 수명이 더 증가하지 않아 1964년 64.89세 기록을 경신하지는 못했다.

1950년대 이후 소련의 경제력 상승은 그들이 주장하는 공업 위주의 산업 발달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석유, 가스를 비롯한 각종 천연자원의 수출로 외화를 쓸어모으며 국부를 창출했던 덕분이었다. 스탈린 시절에도 이미 소련은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안에 드는 산유국이었는데, 1950년대에 이르자 그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광활한 시베리아 곳곳에서 석유, 가스 등 천연자원이 잇달아 발굴되어 넘쳐나기 시작했다. 스탈린 사후 소련이 서방과 관계 개선을 추구했던 것은 비단 지도자들의 정치적 성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베리아에서 쏟아져 나오는 석유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서방과 관계 개선이 필수적이었다. 1960년대 들어 소련은 전세계 1위의 에너지 수출국이 되었고 이는 소련 경제의 근간이었다. 반면 소련이 대외적으로 선전했던 공업화의 수준은 사실 열악했는데,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만 하더라도 소련이 만들어내는 자동차는 서방의 자동차들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품질의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의 장막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소련, 동독, 체코의 자동차 산업은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하며 도생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소련은 독소전쟁 후에 수많은 주거지가 파괴된 데다가 도시화로 인한 주택난이 가중되었는데, 흐루쇼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량의 아파트를 빠른 기간내에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소형 아파트가 주요 도시 지역에 대량으로 건축되었고, 이 아파트를 무상으로 공급하면서 당시 소련의 주거난 해소에 기여했다. 이러한 소형 아파트들은 흐루숍카(Хрущёвка)라고 불린다. 이 아파트는 값싸게 공급하기 위해 외관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 건설되고나서는 우중충해보였고, 또한 다수가 5층 이내로 건축해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경우도 다수였다. 또한 층간소음도 상당했고, 천장은 낮고 주방은 좁아 스탈린카[41]에 비하면 훨씬 후졌기 때문에 개집이나 판자촌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방도 처음에는 방 1개, 2개(9평, 12평)짜리인 경우가 많았고 나중에는 3대가 함께 사는 경우나 자녀가 많은 경우를 고려해서 방 3, 4개짜리(18평, 24평)아파트도 보급되었지만 역시 공간이 좁은 것은 여전했다. 그래도 공용아파트에 살면서 방 하나에 온 식구가 잠을 자면서 매일 아침마다 화장실에 줄 서는 것이나 지하실이나 다락방 같은 곳에 사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고, 썩 넓지는 않았어도 어쨌든 개인방, 개인화장실, 가정용 주방 등이 생기는 등 당대 소련 도시민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큰 혁명이었다. 사실 저렇게 우중중한 아파트를 건설한것은 주택난을 단기간에 땜빵한 다음에 어느정도 여유가 더 생기면 새로운 아파트로 대체하려는 계획이었지만 핵가족이 일반적인 가족형태가 되면서 주택에 대한 수요가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새로운 아파트 형태의 도입이 늦게 이루어졌던지라 계획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상당수의 흐루숍카가 여전히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있다.[42] 이 덕분에 러시아를 넘어 주변의 동유럽 국가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몽골에서도 흐루숍카 아파트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보통 5층에서 9층 구조에 가로로 늘어져 있는 형태가 가장 일반적이며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대도시에는 12층 짜리도 많이 있다.

그리고 소련에서 일반인들에게 별장이 보급된 것도 이 시기로 그 이전에 고위층이나 일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 등 일부에게만 나누어주었던 별장을 불특정 다수에게도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주면서 별장이 일반화되었다.


2.2.5. 교육 및 민족 정책[편집]


흐루쇼프는 1959년에 미국 방문에서 견학한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여러 국공유지를 대학에 불하하여 지역 명문대를 육성하고 있었는데, 흐루쇼프도 이를 소련에 도입하고 싶어했다. 소련의 고참학자들은 대부분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 몰려살고 있었고, 여기를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신진학자들은 자리가 있는 지방 거점 대학으로 이주하는데 적극적이었고 흐루쇼프의 정책은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흐루쇼프는 재능있는 학생들을 조기선발해 집중교육하는 영재학교를 대거 설립했다. 이런 학교는 처음에 수학과 과학 부문에만 실시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러 부문에 확대되어 과학뿐만 아니라 외국어, 예술, 음악, 체육 분야에서도 생겨났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거나 영재가 아닌 학생들을 위해서는 고등학교에서 직업교육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러시아 제국은 제국 내의 각 민족을 러시아인으로 동화시키려고 했지만, 레닌과 볼셰비키는 이런 시도를 단호히 반대하고 사회주의내의 각민족간 평등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레닌 치하에서 민족문화와 민족어는 보호되었고, 문자화되지 않은 여러 소수민족 언어에 키릴문자나 로마자가 도입되어 문자화되었다.

하지만 스탈린 치하에서는 제국시절의 대러시아주의가 부활하여 이런 시도가 약화되었다. 흐루쇼프는 민족어를 말살시키려던 스탈린 정책을 비판하고, 이를 개혁해, 개인의 의사에 따라 민족어와 러시아어를 선택해서 각 언어로 가르치는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게 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소련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소련 주류에 편입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류에 속하는 러시아어로 교육받기를 원했고, 흐루쇼프의 정책은 본의아니게 민족어를 말살하는 정책이 되어버렸다.

특히 러시아어와 가까운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는 이 정책 때문에 모어화자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들 부모들은 "어차피 집에서는 민족어를 쓰니까 아이는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게 러시아어를 쓰는 학교에 가는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런 학교에 자식을 보냈는데, 이러다보니 이런 아이들은 부모가 쓰는 민족어와 서로 통하는 러시아어를 가정에서도 사용하게 되고[43] 러시아어가 모어가 되어버려, 이들 지역에서 민족어의 입지가 약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은 소련 붕괴 후에야 바뀌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그동안 극심했던 동유럽의 반(反) 유대주의는 흐루쇼프 시대 들어서야 진정이 되는데 스탈린 시대까지만 해도 서로 철천지 원수 취급하던 현지 비(非) 유대인과 유대인 사이가 개선된 것이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 유대인들은 강경한 종교 탄압을 겪고 유대인 정체성이 옅어지면서 자신이 소련인 혹은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으로 자각하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그동안 반 유대주의를 조장하던 지방 유지들이나 성직자 계급이 몰락하면서 동유럽 각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유대인 혐오 감정이 감소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소련에 대한 충성보다는 민족이나 종교에 집착하는 면이 강했기 때문에, 소련 체제도 이들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소련은 굳이 이질적인 존재가 국가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1970년대부터 이민을 희망하는 유대인들의 출국을 허가했다. 이들은 고학력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도 국가적 손실이었고, 그리하여 이민을 떠나려는 유대인들은 그동안 국가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교육비의 보상금조로 거액의 출국세를 내야 했다. 그리하여 브레즈네프 시대부터 수많은 소련계 유대인들이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떠난다.


2.2.6. 문화정책[편집]


흐루쇼프는 전반적으로 소련 예술계에 자유화를 이끌었다. 예를 들어 반혁명적인 작가라고 규탄을 받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 복권되었고 특히 혁명세력에 대한 혐오를 담은 소설 "악령"조차도 자유롭게 읽히게 되었다.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출판된 것도 흐루쇼프가 직접 이 소설을 읽고 허가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는 러시아 혁명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사 지바고의 요약본[44]을 읽고는 크게 화를 냈지만,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지가 파스테르나크를 "반역자"라고 공격하는 것을 중단시켰다고 한다. 또한 소련 공산당의 여러 간부들이 파스테르나크를 서방으로 추방하자고 건의했지만, 파스테르나크가 흐루쇼프에게 "제가 조국을 떠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내자, 노벨상 수상을 포기하는 선에서 사건을 무마하기로 결정한 것도 흐루쇼프라고 한다. 브레즈네프 시절에는 이런 관용적인 태도가 다시 보수적으로 바뀌어서,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검열을 받아 출판금지 명령을 받았고, 어떤 작품은 검열을 피해 사미즈닷이라는 지하출판물로 유통되었다. 이런 현상은 고르바초프 집권때까지 이어졌다.

음악부문도 큰 변화가 있었다. 재즈와 로큰롤은 1940년대 말부터 소련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스탈린 시대때는 이를 불순분자나 날라리들[45]의 음악으로 간주하여 탄압했지만, 흐루쇼프는 1957년 6회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를 앞두고나서 규제를 철폐했고 그 겱바 1960년대에 소련에서 재즈와 로킬롤이 대중적으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흐루쇼프는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추상주의와 모더니즘을 싫어했다. 스탈린 시절과는 달리 이쪽에 대한 탄압은 하지 않았지만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련에서는 이런 류의 예술은 발달할 수 없었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로 집권 당시 모스크바 마네시 화랑(Manage Gallery)에서 예술 전시회가 열렸을 때 직접 전시회장에서 추상화를 감상한 다음에 "당나귀가 제 꼬리로 그렸어도 이보다는 낫겠다!"는 감상평을 남기면서 추상화가들을 깐 일이 있다. 사실 당대 서방 일반인들이나 여러 유명인사들이 보기에도 이러한 추상 예술이 이게 그림이냐, 내가 그려도 이것보다 낫겠다며 까이기는 마찬가지였다만, 하필 흐루쇼프가 그 말을 꺼냈기에 그 무게감이 엄청났고 덕택에 소련 미술계는 다시 빙하기로 접어들었다는 웃지 못할 후문이 있다. 반면 미국은 문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앤디 워홀이나 잭슨 폴록 등 현대미술가들을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한편 표현주의 추상조각가 에른스트 녜즈베스트니[46]의 전시회를 관람했을 때도, 자기가 보기에 작품이 퇴폐적이라며 "왜 소련사람 얼굴을 이따위로 비틀었냐"고 비웃고, 이따위 작가는 서방에서 룸쌀롱 다니다가 온게 틀림없으니 굴라크에 보내 정신개조좀 시켜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녜즈베스트니는 자신의 몸의 큰 흉터를 보여주며, "저는 조국전쟁에서 조국의 부름을 받고 싸웠습니다"로 말했고, 흐루쇼프는 말문을 잃었다고 한다. 실제로 녜즈베스트니는 소련군 공수부대원으로 참전해 전공훈장을 세 개나 받은 예비역 중위이자 척추 부상으로 모르핀을 상용해야하는 장애인이었다. 이런 해프닝으로 네즈베스트니는 흐루쇼프와 친구가 되었고, 장기간 예술론을 토론하기도 하며, 흐루쇼프 사후 묘비도 디자인해주지만, 소련의 예술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녜즈베스트니는 흐루쇼프 사후인 1976년 추상예술을 푸대접하는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가서 컬럼비아 대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2.2.7. 소련 공산당 개혁[편집]


흐루쇼프는 50년대 말, 소련에는 이미 지배계급이 소멸하고 모두 평등한 인민들만 있다는 '전인민국가론'을 전면에 내세우며 세 가지 개혁안을 실행했다.

하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국회처럼 개방하고 공식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물론 일부 인민들에게는 연설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 당조직을 농업분야와 공업분야로 나누고 두 조직의 권한을 같게 해서 경쟁을 붙이는 것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바로 지방의 작은 소비에트부터 공산당 중앙위원회까지 매 선거 때마다 모든 위원의 3분의 1이 무조건 교체되어야 한다라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들은 여러모로 공산당원들이 계급화되어가는 소련 체제를 개혁할만한 나름 좋은 수였지만 흐루쇼프가 실각하자마자 전부 취소되었다. 대숙청 이전의 소련의 지방분권화 복구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약속했던 최고 소비에트의 다자후보 선거 같이 급진적 개혁은 하지 못했는데, 그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실각한 탓에 점진적 정치개혁이 중지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즈다노프 자신이 대숙청의 주도자에 스탈린의 충신이었으니 흐루쇼프가 그의 제안대로 실행하기는 꺼림칙했을 것이다.

다만 흐루쇼프가 추진한 지방분권화는 이후에도 계속 진행된다. 즉, 각 공화국의 수장[47]들은 모스크바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지역당에서 선출하게 되었다.[48] 문제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이런 지방자치 강화가 후진국 여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역당의 유력자들은 중앙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각 공화국을 자신의 영지처럼 다스리며 계속 임기를 연장하는, 일종의 봉건제가 되어버린다. 그 결과 소련 해체 이후 각공화국이 독립했을 때, 이 공화국의 공산당 수장들이 장기집권을 하는 독재자가 되어버린다. 대표적 인물이 카자흐스탄에서 27년간 집권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2.2.8. 우주개발[편집]


흐루쇼프는 당분간은 소련이 미군의 공군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의 공군력이 약해서 핵폭탄이 있어도 그걸 적지에 투하하기 힘들기 때문에 공군의 전력을 급격히 늘리자는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원수의 제안을 "경제에 부담된다"며 거절했다. 그 대안으로 소련의 베르너 폰 브라운이라 할 수 있는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그의 거대 로켓 R-7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이리하여 미소 간 우주 경쟁이 시작된다.

소련에서 미국까지 단 20분 만에 핵폭탄을 날릴 수 있는 로켓이 미국에게 가한 충격은 대단하였으며, R-7의 페이로드를 이용해 스푸트니크 위성 시리즈를 연달아 발사, 미국의 체면을 박살내는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국민을 안정시키려던 아이젠하워 정권은 지지도가 급락했고, 다급하게 미국의 인공위성을 쏘기 위해 강행한 미해군뱅가드 로켓도 전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보는 앞에서 폭발해 망신을 샀다.

그나마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와 육군 미사일 팀이 익스플로러 1호를 쏘면서 간신히 미국의 체면은 유지했다. 하지만 이 기점으로 미국도 이에 질세라 NASA를 설립하고 과학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등 이후 미국의 우주정책이 쾌속질주할 수 있도록 엄청난 투자를 했다.

코롤료프 설계국은 1961년에는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호를 쏘아 올려 세계 최초로 인간을 우주에 내보내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는 미사일과 핵무기를 결합해 전쟁억지력을 갖추기 위해 로켓기술에 아낌없는 지원을 아끼지 않은 흐루쇼프의 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

미소가 우주 경쟁을 벌이면서 결국 인류는 착륙이라는 큰 성과를 냈다. 인간이 달 착륙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의 아낌없는 투자가 결정적이었지만, 이렇게 우주 경쟁을 열어젖힌 시작한 흐루쇼프의 정책도 간접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2.2.9. 크림 반도 전속[편집]


1954년 집권하자마자 원래 러시아 SFSR 소속이었던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 SSR로 넘겨버렸다. 당시는 집단지도체제였지만, 이는 흐루쇼프가 주도한 것이 맞고, 1992년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가 크림 반도를 가지고 독립하자 러시아 의회는 흐루쇼프를 반역죄로 기소했을 정도로 러시아인들의 반발을 받았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당시 크림 반도 거주민 대다수가 우크라이나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러시아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으며[49], 두 번째로 크림 반도가 러시아 민족 역사 및 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러시아가 자신을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이라고 주장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흑해 영내 일대의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지역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폴리스들이 여럿 건설되어 현지인들에게 그리스 문물을 전파한 것은 물론 중세에는 키예프 루스동로마 제국 문화를 받아들인 거점[50]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51][52][53]

흐루쇼프가 왜 갑자기 이런 결정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는 위에서 보았듯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경계인이었고, 호적상 러시아인으로 등록되기는 했지만, 스스로는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생각도 한 것 같다. 출생지 자체도 우크라이나와 국경이 맞닿은 곳이고, 정체성이 형성될 때인 10~30대를 우크라이나(돈바스)에서 보냈고, 그가 출세할 수 있었던 계기도 우크라이나의 광산 경영과 당운영에서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흐루쇼프는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생각해서, 우크라이나 영토를 넓히는데 적극적이었다. 흐루쇼프는 1939년 정치장교로 참전한 폴란드 침공 당시에도 점령한 폴란드 영토를 두고, 벨라루스 SSR이 주장하던 브레스트 시를 우크라이나 SSR에 넘겨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서 당시 벨라루스계 소련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54] 또 한편으로는 2차 대전 이후 연방정부의 무분별한 식량공출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당시 이곳 제1서기였던 흐루쇼프는 모스크바로 달려가 목숨을 걸고 스탈린에게 항의하여 시정조치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를 대변하는 정치를 해 왔기 때문에,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기에도 흐루쇼프를 처음으로 지지한 세력이 우크라이나 공산당이었다. 사실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도 우크라이나에 상당한 애정을 표시하기도 하는 등, 개인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좋아한 것은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통치는 우크라이나인 기준으로 소련의 압제자에 가까웠다. 1944년 ~ 46년 그의 치하에서 무리한 집단화 및 전쟁 후유증으로 수십만명이 기아로 사망하기도 하고, 독립성향의 인사들 수십만명이 체포되어 감방에 가거나 처형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1948년까지는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런 업적으로 중앙정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흐루쇼프는 집권후 우크라이나인들을 크렘린의 중앙정계로 적극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그의 집권기부터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의 중앙 정계에 진출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항상 모스크바에서 임명하던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에 우크라이나 지역당에서 자체 선출되도록 한 것도 흐루쇼프 시대였다. 심지어 그를 축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나 KGB 의장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 국방장관 로디온 말리놉스키도 원래 우크라이나 지역인사들이었으나[55]. 모두 흐루쇼프가 중앙으로 발탁해 등용한 우크라이나 사단이었다. 이렇게 흐루쇼프는 자기가 선심 쓸 수 있는 한에서는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들을 배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좋은 항구를 주어서 우크라이나 지역당[56]의 지지를 위해 크림 반도를 넘겼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흐루쇼프를 비난하는 러시아인들은 그가 집권기반을 다지기 위해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팔아넘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가설로는 1961년 ~ 1975년 사이 건설된 북크림 운하의 건설 작업의 행정 작업을 간소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사실 월경지라는 것이 행정비용의 낭비가 있기 때문에 이것도 사실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반러감정이 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여기에 살을 더 붙여서 이 운하의 건설 비용을 러시아 SFSR에서 우크라이나 SSR로 떠넘기게 위한 것이라 주장한다.[57] 그리고 이 운하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한 원인이 되었다. 원래 크림 반도의 수원은 이 운하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4년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 넘어간 이후 우크라이나측은 댐을 건설해 이 운하를 막아버렸고, 물공급이 끊긴 크림 반도는 물부족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2022년 전쟁이 터지자마자 크림 반도로부터 북상한 러시아군은 진격 하루만에 댐을 폭파시켜서 운하를 다시 가동시켰다.

하지만 어쨌든 이 전속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속내는 매우 불편했다. 러시아 제국은 원래 모스크바 공국 시절에는 내륙국이었으며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병합하고 아르한겔스크를 개발한 이후에도 부동항 확보 문제로 고생하던 상황이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해양진출을 목표로 서쪽으로는 스웨덴, 남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계속 전쟁을 하면서 팽창했으며, 결국 러시아인들이 명군으로 꼽는 표트르 대제예카테리나 2세 시절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서야 각각 발트해(상트페테르부르크)와 흑해(크림 반도)에 맞닿게 되었다.[58] 그 시절에야 단순한 행정구역 변경 정도여서 그나마 무마되었으나 소련 해체를 계기로 러시아는 발트해리가, 탈린 같은 주요 항구도시는 물론 흑해오데사,[59]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같은 핵심 항구도시까지 상실하였다. 이는 수십년 뒤 2014년 크림 위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고, 이 갈등이 2022년 폭발하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면전으로 비화된다.


2.3. 대외관계[편집]



2.3.1. 미국[편집]


흐루쇼프는 미국과 평화공존론을 부르짖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대결만큼은 그도 호락호락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먼저 동독 영토내의 서독 월경지인 서베를린은 흐루쇼프의 눈엣가시였다. 이곳으로 자꾸 동독인들이 망명하는 바람에 동독과 소련의 국격이 실추되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는 서베를린을 두고 서방을 계속 위협했으며, 이때마다 서방은 긴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위협은 서방뿐만 아니라 소련 지도부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런 흐루쇼프의 협박은 나중에 흐루쇼프 반대파가 흐루쇼프를 "모험주의자",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딱지를 붙이는 구실이 되고, 실각 원인이 되어버린다.

파일:Dwight_Eisenhower_Nikita_Khrushchev_and_their_wives_at_state_dinner_9.1959.png

1959년 9월, 니키타 흐루쇼프 미국 국빈방문 당시 저녁만찬.
오른쪽부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니키타 흐루쇼프, 매미 아이젠하워, 니나 흐루쇼바

그렇지만 흐루쇼프는 이렇게 서방을 위협하면서도 미국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9년과 1960년 두번이나 미국을 방문했는데, 첫번째 방문에서는 2주간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으며[60] 이때 큰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방문은 자신을 UN 대사로 임명하여 억지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1961년 미국이 터키에 주피터 미사일을 배치하자 미소관계는 급격히 냉각된다. 자세한 사항은 쿠바 위기 참조.

쿠바 위기가 해소된 1963년 미국과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여 미소는 지상핵실험-수중핵실험을 중단한다.


2.3.2. 동유럽[편집]


스탈린 격하운동은 소련 국내 뿐 아니라 전세계 공산주의권에도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동유럽에도 일시적으로 자유와 해방의 물결이 퍼져나가면서 폴란드에서 포즈난 항쟁에서의 학살극을 벌인 스탈린주의파가 물러나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였으며, 헝가리에서 헝가리 봉기가 일어나서 너지 임레가 집권하게 된다.

흐루쇼프는 고무우카의 집권을 의심스럽게 보았으나, 고무우카가 자신은 소련과의 동맹을 굳건히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자, 고무우카의 집권을 승인하고, 폴란드에 와 있던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소련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고무우카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긴 했지만 이렇게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잔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에 대한 대응과는 다르게 헝가리의 반소봉기는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사실 원래는 너지 임레가 스탈린주의파와 대립했다가 쫓겨나는 경험이 있던 만큼 흐루쇼프와는 정치적인 성향은 비슷했기에 초기에 너지 정권을 승인하려 했지만, 너지가 집권한 이후에 헝가리가 유고슬라비아처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고 중립화 선언을 하려고 하는 등 소련에게서 독립하려고 하자 망설이던 태도를 바꾸고 헝가리에 군대를 보내서 너지 정권을 뒤엎게 된다.

소련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게릴라전으로 사회주의국가가 된 유고슬라비아는 친소노선을 거부해 소련과 사이가 극히 험악했으나, 흐루쇼프 시절에는 화해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이후로도 비동맹노선을 걸어 소련과는 거리를 두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나 서방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2.3.3. 북한[편집]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미 남로당파 및 그 지도자 박헌영은 6.25 전쟁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휴전 직후 숙청되었다. 이후 남은 계파인 연안파소련파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펴던 흐루쇼프의 영향을 받아 스탈린식 지도자였던 김일성을 실각시키려고 했지만, 김일성파는 이를 역공, 반대파를 무더기로 실각시키고 숙청하였다.

흐루쇼프는 북한이 자신의 지향과 반대로 나가는 것에 떨떠름했겠지만, 폴란드-헝가리에서 보듯이 반소-탈소 정책만 펴지 않으면 타공산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이를 추인해주었다.


2.3.4. 중국[편집]


마오쩌둥도 처음에는 1957년 흐루쇼프의 자유화 정책을 좋게 보아서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을 펼친다. 이것은 흐루쇼프의 자유화를 모방하여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이 마오쩌둥까지 비판하는데 이르자 마오쩌둥은 이를 바로 취소하고 반우파투쟁을 벌여 자신에 대한 비판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또한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은 마오쩌둥의 세계혁명론과 모순되어서 이것도 긴장되었다. 1958년 마오쩌둥이 소련과 협의 없이 진먼 포격전을 일으키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1959년 흐루쇼프는 베이징으로 와서 마오쩌둥과 회담했는데,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7일간의 예정이었지만 3일만에 떠났다.

결국 중국과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수정주의 논쟁으로 번지며 중소결렬이 발생했다. 중국은 소련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소련과의 전면전을 가정한 군사전략을 수립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며 1970년대에 이를 간파한 미국이 전격적으로 중국과 수교하게 된다.


2.3.5. 제3세계 및 서유럽[편집]


스탈린은 제3세계의 식민지 해방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 그것도 친소적 인사들만 지원했지만, 흐루쇼프는 반서방적이면 굳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전폭 지원을 했다. 그리하여 독립하는 비동맹운동 노선 국가들에 굉장히 공을 들였으며, 이런 비동맹국가들은 중립을 표방했지만, 실제로 소련에 우호적인 스탠스를 보인 경우가 많았다. 1959년 성공한 쿠바 혁명의 지도부는 사실 이념적 색채는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었으나, 미국이 이들을 노골적으로 적대하고 소련이 전폭적으로 지원하자, 이들은 소련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게 된다. 그리하여 쿠바 공산당은 혁명이 성공한 이후인 1965년 출범했다.

소련의 제3세계 지원은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크게 늘렸다. 미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80년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성장시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했다. 이렇게 미국의 힘으로 커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소련 붕괴 이후 미국에 총부리를 돌려 현재까지 골치덩어리가 된다.

이집트에서는 1953년 나세르가 주동이 된 아랍민족주의자들이 군부 쿠데타로 친서방 왕정을 전복했다. 나세르는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미국은 나세르에게 냉담했다. 흐루쇼프는 실망한 이집트에 접근했고, 이집트군은 소련제 무기로 중무장을 하게 된다. 이렇게 소련의 도움으로 군사력을 키운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영국-프랑스가 지배하던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프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침략한다.

흐루쇼프는 전쟁이 발발하자 영프가 철군하지 않는다면 소련군이 이집트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만약 소련군이 참전하면, 미군도 동맹국인 영프를 위해 참전해야 하므로 3차대전이 발발할 우려가 있었다. 이 전쟁은 사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과욕이 빚어낸 것이었기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영프를 규탄하면서 보기 드물게 미소가 입을 맞춰 즉각 철군을 요구했다. 결국 미소의 압박에 영국과 프랑스는 철군했고, 소련의 국제적 위상은 높아졌다. 다만 소련군을 투입하겠다는 흐루쇼프의 호언장담은 쿠바위기에서처럼 흐루쇼프가 정말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모험주의자라는 인식을 깊게 만들었다. 쿠바위기 때 이것이 한번 반복되면서 흐루쇼프는 전쟁을 두려워한 소련 지도부에서 완전히 신망을 잃게 된다.[61]

흐루쇼프는 1955년 인도를 방문했고,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도 당해 소련을 방문하여 인도-소련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했다. 인도는 고아를 포르투갈로부터 무력으로 빼앗았는데, 소련은 이를 적극지지했다. 그리하여 인도군은 원래 영국군의 식민지 보조군을 계승했던 것을 바탕으로 영국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이후 소련식 교리로 훈련받고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중국이 사이가 나빠지면서 인도는 든든한 소련의 우군이 되며 이 관계는 소련이 붕괴한 21세기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62]

이렇게 흐루쇼프는 식민지 해방투쟁을 지원했기 때문에 식민지 대국이었던 영국 프랑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여러 식민지 해방세력은 영국과 프랑스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다만 1958년 출범한 프랑스 제5공화국샤를 드 골 대통령은 영미주도의 서방세계에서 프랑스의 독자성을 추구했고 소련과 관계도 소폭 개선되었다.


2.4. 실각[편집]



2.4.1. 군사교리 수정과 군부의 반발[편집]


소련은 냉전이 시작되자 다시 부활한 종심작전 이론에 의해서 서방보다 거대한 재래식 전력을 보유하여 전쟁억지력을 갖추려고 했다. 이는 독소전쟁의 전훈에 의한 것이었으나, 문제는 미국은 나치 독일보다도 훨씬 거대한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재래식 전력을 갖춘다는 것은 미국의 경제에 미치지 못하는 소련의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다.[63]

흐루쇼프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핵무기와 ICBM 등 전략무기를 확충하고, 재래식 전력을 감축하려고 했는데,[64] 이는 독소전쟁을 거치며 비대해진 군부의 반발을 불렀다. 특히 흐루쇼프의 집권을 돕기도 했던 국방장관 게오르기 주코프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고 흐루쇼프는 1957년 주코프가 외유를 하고 돌아오는 시점에 그를 해임해버렸다. 주코프는 꼼짝없이 그대로 야인으로 내려갔다.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흐루쇼프는 사후 출판된 회고록에서 주코프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주코프를 해임한 후 흐루쇼프는 자신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절부터 친했던 로디온 말리놉스키를 국방장관으로 내세웠고, 말리놉스키는 흐루쇼프의 생각대로 군을 개편했다. 그래서 소련 육군 교리도 핵과 미사일 중심으로 바뀌면서 BMP 보병전투차량의 등장 및 Object 775IT-1 미사일 전차 연구가 이 당시에 이루어졌다. 또한, 이 양반 덕분에 기존 중전차를 비롯한 재래식 전력의 도태가 빨라졌고 중전차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병기들에 사용될 예산들은 T-55와 T-62 같은 주력전차들에게 넘어갔다.

말리놉스키는 흐루쇼프의 심복이었지만, 그는 흐루쇼프가 실각할 때, 수수방관하여 흐루쇼프의 몰락을 재촉했다. 문민통제의 입장에서 보면,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게 한 말리놉스키의 행동은 적절한 것이었다. 의리 운운하며 그를 비난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허황된 것이다. 의리로 군을 사적으로 동원한다는 게 말이나 될 소리인가? 거기다 소련의 권력 구도에서 붉은 군대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하긴 했지만, 정작 군부가 정치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은 90년에 가까운 소련 역사에서 단 한 번, 8월 쿠데타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건에서조차 일선 현장 지휘관과 장병들이 인민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것에 당혹감을 느낄 정도였다.


2.4.2. 농업정책 실패 및 1963년 가뭄[편집]


파일:attachment/니키타 흐루쇼프/hruschev.jpg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추진한 집단화를 전후에도 계속 추진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기간과 전쟁 직후에는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생산량이 급감했지만, 제대한 농부들이 집단농장에 돌아온 1940년대 후반경에 우크라이나는 다시 "세계 최고의 곡창"이라는 예전 명성을 되찾을 정도가 되었다. 이 업적으로 흐루쇼프는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최고지도자의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집단농장 특유의 비효율 때문에 증산은 한계가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흐루쇼프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낸다.

먼저 흐루쇼프는 소련에 있는 광대한 미개척지를 개간하여 식량을 증산하려 했다. 그래서 실시한 게 미개척지 개간 사업인데, 문제는 미개척지의 대부분이 카자흐스탄 초원이나 시베리아 같은 곳이어서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다. 소련 사람들이 그동안 거기서 농사를 짓지 않고 버려뒀던 건 이유가 있었다. 춥고 메말라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농사 시작하면 망하기 딱 좋은 땅이라는 말.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처녀지 개간 운동을 참조. 그런데 50년 지난후 상황이 반전, 흐루쇼프가 농사지으려던 이런 동토나 황무지들이 지구온난화 때문에 경작지로 변모,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농업 생산량 증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65]

흐루쇼프는 집권 직후인 1954년부터 "옥수수 심기 운동"을 벌였다. 그는 소련의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생산성이 높은 작물인 옥수수를 재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59년 장기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옥수수 산지였던 아이오와 들판을 일부러 방문했을 정도로 옥수수를 좋아했다. 옥수수는 지력을 매우 소모하기 때문에, 지속가능하게 재배하려면 엄청난 화학비료와 농약을 필요로 하는 작물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화학비료 생산력은 옥수수를 대량으로 재배할 만큼 높지 않았다. 결국 흐루쇼프는 화학비료를 적게 쓰기 위해 옥수수에 적합한 지역에 다른 작물(주로 밀) 대신 옥수수를 재배하도록 하는 전략을 썼는데, 화학비료 없는 옥수수 재배는 밀의 3배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데다가, 옥수수 자체가 지력을 엄청나게 소모해서 계속 재배할 수록 생산량이 떨어졌다. 결과적으로 흐루쇼프의 옥수수 심기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밀대신 옥수수를 심은 소련은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빈약한 결과에 대규모 옥수수 도입을 추진한 흐루쇼프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고, 반대파들은 이를 흐루쇼프 공격의 구실로 삼는다.

다른 한편으로 흐루쇼프는 리셴코의 진화이론을 수용하여 농업생산 증대를 도모했다. 리센코는 용불용설을 변형해 종자를 냉각시키는 춘화처리를 하면 추위를 이기는 품종이 나온다는 '춘화이론'을 신봉했는데 이것은 스탈린 및 공산당 지도부의 구미에 맞아서, "공산주의에 맞는다"며 진리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과학과는 거리가 먼 사이비 과학이었다. 여기에 각종 실험조작등이 가해지자 소련 정부는 리센코의 이론에 따라 소련 농업정책을 추진하고 멀쩡한 종자들을 얼리는 춘화처리를 한다. 게다가 스탈린 사후에도 리센코의 영향력은 여전해서 흐루쇼프 시대에 들어서면 처녀지 개간운동의 와중에 춘화처리는 오히려 확대된다. 이게 가능했던건 리센코의 춘화처리를 유사과학이라고 비판하거나 유전자 설을 주장한 니콜라이 바빌로프 등 리센코의 이론에 반박하는 생물학자들이 대숙청에 모조리 쓸려나가서 이미 리센코가 과학계의 독재자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66]

이런 리센코 이론으로 만들어진 종자들은 그다지 증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리셴코 이론에 의해 획득성질을 유전받았다고 생각하여 황무지에 대거 심었지만 몇년만에 십수도의 온도차이를 이겨낼 성질이 나올리가 없으니 대부분 얼어죽었다. 즉, 리센코 이론은 농업 생산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흐루쇼프가 야심차게 추진한 여러 농업생산 증가운동이 실패한 가운데 1963년 소련 전역에 가뭄이 들었다. 흐루쇼프가 주장해 밀 대신 심은 옥수수는 이런 가뭄에 70~80%가 말라 죽어버렸다. 농민들은 갑자기 흉년이 들자 1930년대 처참했던 홀로도모르를 연상했고, 당시 사료가 없어서 가축이 쓸모없이 굶겨 죽인 것을 연상, 겁에 질려 모조리 미리 도살했는데,[67] 이 때문에 소련은 고기, 우유 가격 폭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기다가 생산증가를 과시하는 관료주의의 폐해 때문에 어떤 지방에서는 국영시장에 나온 고기와 우유를 사들여 이를 생산량으로 조작하는 짓도 벌였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 드물게 식량폭동이 발생하여 군대가 동원되어 진압할 정도였다. 여기에 가뭄 때문에 20%의 식량이 감소하여약 2천만톤 가량이 곡식이 모자르게 되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흐루쇼프는 국고에 있는 외환과 금을 풀어 외국에서 대규모로 식량을 사왔는데, 특히 바로 이전 해에 쿠바위기로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식량을 수입했다. 이는 식량증산을 약속한 그의 호언장담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고, 적국으로부터 식량을 구입한 것도 문제였다. 이는 그의 위신과 지도력에 큰 흠집을 냈다.


2.4.3. 쿠바 위기로 리더쉽 약화[편집]


흐루쇼프가 직접적으로 소련 지도층의 신망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으로 쿠바 위기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쿠바 위기 참조.

미국은 공군이 미약해서 자신들을 위협할 수 없을 것이라던 소련이 갑자기 ICBM이라는 신무기로 자신을 위협하자 화들짝 놀라 미니트맨 미사일을 600기 이상 배치했다.[68][69]

1954년 스푸트니크 쇼크로 패닉 상태에 빠진 미 의회는 ICBM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당시 생산가능한 중거리 미사일을 엄청난 속도로 만들도록 강요하였으며, 이들은 사정거리 문제로 인하여 미군은 이 미사일들을 서독튀르키예에 대량으로 배치했고 냉전시기 최전방국가였던 서독과 튀르키예에 대한 핵우산 정책으로 활용되었다.[70] 결국 서독과 튀르키예, 이탈리아에 배치된 주피터 중거리 미사일에 소련 지도부는 매우 놀랐다.

흐루쇼프는 미국과 치킨게임을 벌여 미국의 미사일 위협을 상쇄하려 하였다. 결국 미국의 바로 앞인 쿠바에 똑같은 중거리 소련제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치킨 게임 때문에 전 세계가 전면적인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다만 위에서 열거했듯이, 그는 전쟁의 참상을 그 누구보다도 더욱 뼈저리게 느끼는 위치에 여러번 있었고,[71] 당장 자신의 아들도 전쟁 중에 실종되어 사망했으리라 여겨지고 있었으며, 자신 역시도 스탈린 정권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최후까지 미국에서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전쟁은 피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었고, 미국 역시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핵전쟁만은 최후의 선택으로 여기고 피하고 싶어하는 분위기[72] 가 있었기에 결국 양측이 합의하는데 성공하는 뒷배경도 있었다. 실제로 겉으로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물밑에선 흐루쇼프와 케네디의 최측근 인사들이 직접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미지와는 달리 굉장히 신중한 사람.[73]

이렇게 1962년 10월 쿠바 위기는 미소의 핵전쟁의 일보 직전까지 갔다. 이는 흐루쇼프가 벼랑 끝 전술을 폈기 때문이었지만, 소련 지도부는 흐루쇼프가 현실을 무시하고 벼랑끝 전술을 펴다가 핵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한 인물로 보았다. 당시 핵무기 양은 소련이 미국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데다가, 아직 전후복구도 완전히 마무리되지도 않았고, 특히 공군력이 미국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흐루쇼프의 모험주의가 실패하여 만약에 핵전쟁이 난다면, 소련은 파멸이었다.

냉전시절 서방에서는 "소련의 지도자들은 세계적화를 위한 야욕을 품고 있다"는 식의 선전을 광범위하게 벌였지만, 이와는 반대로 2차 대전을 겪어본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전쟁의 참혹함을 겪었기 때문에 모두 전쟁을 두려워했고, 적어도 이 시점에서 미국과 전쟁을 하고 싶어한 소련 지도층은 아무도 없었다. 흐루쇼프조차도 실제 미국과 핵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쿠바 위기에서 체면을 손상해 가면서 미사일을 철거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위태한 벼랑끝 전술을 쓰는 것을 본 소련 지도부에게는 "이 양반은 이제 안되겠어"라는 공감대가 광범위 하게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꾸미던 브레즈네프는 동조자를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심지어 흐루쇼프의 심복인 국방장관 말리놉스키 원수까지도 브레즈네프의 음모에 동조했다.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음모자들은 군대와 KGB를 모두 장악했고, 결국 흐루쇼프는 눈뜨고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2.4.4. 반흐루쇼프 음모 및 실각[편집]


흐루쇼프는 쿠바위기 때 너무 막 나간 탓에 권력 기반이 악화되었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당내 고위직들은 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브레즈네프는 사실 흐루쇼프가 출세시켜준 사람으로 우크라이나 지역당의 드네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인사였는데 흐루쇼프가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국가원수격인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앉힌 것이었다.[74] 흐루쇼프는 자신과 지연으로 이어져 있는 우크라이나 사단을 대거 중앙으로 발탁했으며, 이들 신진 우크라이나 인맥이 자신의 집권을 옹위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흐루쇼프의 말년 리더십은 지나치게 막나가는 것이었고, 고위급 간부들을 상대로 구박, 질타, 모욕을 마구 서슴지 않았다. 흐루쇼프의 막말은 자신이 승진시켜준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는데, 그는 브레즈네프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에서 해임할 것을 결의하면서 브레즈네프에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불필요할 정도로 조롱했으며 자신에게 공손한 브레즈네프의 태도도 얕잡아보고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흐루쇼프는 당내 지도부의 임기 제한을 도입하여 당중앙위원회의 세대교체를 제도화할 것을 제안했고, 간부회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마구 비난을 퍼부으면서 이들을 몰아내고 젊고 유능한 새 간부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64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지도부를 새로 선거하겠다고 예고했다. 이렇게 되니 흐루쇼프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말거나 흐루쇼프의 손에 숙청당할 판이니 그의 막나가는 행태에 질려버린 소련 지도부는 앙금과 차이점을 털어버리고 흐루쇼프 축출 음모로 대동단결하게 된다.

흐루쇼프는 1964년 내내 건강이 안좋았는지 모스크바를 비우고 흑해 연안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이렇기 때문에 브레즈네프는 쉽게 음모를 꾸밀 수 있었다. 여기에 흐루쇼프의 최측근으로 그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서기국의 소련군, 군수공업, KGB 담당 서기인 코즐로프가 과로로 인한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음모자들에게 아주 큰 호재로 작용했다. 일각에서는 코즐로프를 흐루쇼프의 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밝혀진 자료를 보면 코즐로프는 흐루쇼프가 가장 총애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KGB를 관리하면서 주요 간부들을 해임시킬 수 있는 약점들을 죄다 잡고 있었기 때문에 흐루쇼프에 불만이 많았던 간부회원들도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가 죽음으로 음모자들은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대로 흐루쇼프의 모험주의는 소련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공포를 자극하여 당내 고위직들은 대부분 흐루쇼프의 축출에 동조했다. 특히 권력기관인 KGB 의장인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와 국방장관 로디온 말리노프스키까지도 흐루쇼프가 직접 임명한 심복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이런 음모에 가담했다.[75] 하지만 이들의 음모는 1964년 9월, 니콜라이 이그나토프의 경호실장을 통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에게 유출되었다. 해당 경호실장은 흐루쇼프가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사이 세르게이에게 당의 거물들이 모스크바 바깥에서 비밀 회동을 벌이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흐루쇼프의 딸 라다에게도 익명의 여성이 전화하여 흐루쇼프를 축출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에 라다는 KGB에게 신고하라고 했지만 그 여성은 KGB 의장도 한패인데 어떻게 KGB에 신고하냐고 거절했다. 하지만 세미차스트니는 라다의 남편인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이며 당중앙위원회 위원 알렉세이 아주베이의 친구였기 때문에 라다는 이를 무시하였다. 아주베이에게도 조지아 서기장인 바실리 므자바나제를 통해서 경고가 전해졌으나 아주베이 역시 이를 무시했다.

흐루쇼프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오고 1주일이 지난 후, 세르게이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열리는 흐루쇼프 가족 산책에서 절대 정치 얘기를 해선 안된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깨고 자신이 들은 얘기를 전하였다. 흐루쇼프는 잠시 침묵하더니 잘 얘기해주었다면서 누가 음모에 참여했는지를 물었다. 세르게이가 브레즈네프, 포드고로니, 셸레핀 등이라고 하자 흐루쇼프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에 맞서서 동맹을 맺냐고 하였고 완전한 헛소리로 일축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포드고로니를 불러서 그 얘기를 해주었고, 포드고로니는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죠?"라고 태연자약하게 반문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가 들었단 소식에 공포에 질렸다. 카자흐스탄까지 따라가서 바람에 날린 흐루쇼프의 모자를 주워 모래를 털고 다시 씌워주는 아부까지 했던 그는 휴가를 떠난 세미차스트니를 불러 빨리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고 수선을 떨었고 자신을 방문한 모스크바 당서기 니콜라이 예고리체프에게 "콜랴, 흐루쇼프가 다 알아. 우릴 다 총살할거야."라고 공포에 떨면서 훌쩍였다. 예고리체프가 브레즈네프를 달래려 하자 브레즈네프는 "당신은 흐루쇼프를 몰라, 모른다고."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그의 가족들이 '비이성적, 비논리적'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물론 흐루쇼프도 어느 정도는 불안하였는지 정치국원인 드미트리 폴랸스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자백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흐루쇼프의 이런 애매한 태도는 오히려 반 흐루쇼프 그룹을 더욱 서두르게 만들었다. 반 흐루쇼프 그룹은 처음에는 흐루쇼프가 외국 방문을 하고 돌아오는 순간 체포하여 사임을 강요, 실각시키려 했으나[76] KGB 의장이었던 세미차스트니가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하여 포기되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는 흑해 연안에서 장기간 요양중이었는데, "농업발전 협의"로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정치국 회의에 급히 출두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흐루쇼프는 휴가 중인 자신을 빼놓고 정치국 회의가 열렸단 소식에 격한 반응을 보였다.

흐루쇼프(이하 흐): 대체 무슨 일 때문에 회의를 연 것이오?

브레즈네프(이하 브): 농업과 기타 문제 때문입니다.

흐: 아니, 날 빼놓고 결정을 내린다는거요?

브: 물론 동지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없지요. 이미 정치국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우리는 동지께서 오시길 부탁드립니다.

흐: 나는 지금 휴가 중이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하단 말이오? 난 2주만 있으면 돌아가오. 그때 얘기합시다!

브: 그래도 오셔야 합니다.

흐: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정치국원들이 다 모였다는 게 무슨 소리요? 우린 농업문제를 11월 전원회의에서 다루기로 했지 않소? 그때가 되면 그 모든걸 얘기할 시간이 아주 차고 넘칠건데!


브레즈네프의 계속된 설득에 흐루쇼프는 결국 비행기편이 있다는 조건 하에 다음날에 모스크바로 가는 데 동의했다. 흐루쇼프는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해변을 따라 걸으면서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였다.

아나스타스, 당신도 알겠지만 저들은 아무런 긴급한 농업 문제가 없소. 내 생각에는 저들이 나를 부르는 것은 세르게이가 우리에게 얘기해준 그것 때문인 것 같군.


브레즈네프와 반 흐루쇼프 그룹은 자신들이 흐루쇼프를 몰아내야 한다고 여기게 만든 흐루쇼프의 돌발적 행동이 자신들을 향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였다. 만약 흐루쇼프가 모스크바로 가지 않고 모스크바 바깥에서 반격한다면? 10월 12일, 브레즈네프는 세미차스트니에게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물었고 세미차스트니는 흐루쇼프의 비행기가 준비되었다고 확인해주면서도 스스로도 불안해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무장관 가스통 팔레브스키와의 오찬에서 흐루쇼프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였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하였고 언제나 사람들을 불러 수다를 떠는 것을 즐기는 평상시와 달리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수행원들에게 조용히 혼자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 아르메니아 꼬냑을 서빙하려던 스튜어디스조차 돌려보냈다.

10월 13일, 흐루쇼프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대개 소련 최고 지도자를 위해서 수많은 각료들이 몰려나와 환영을 해주었고, 흐루쇼프는 언제나 그 순간을 즐기면서도 내가 길도 모를 줄 아느냐고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날 모스크바 공항은 텅 비어 있었으며 세미스차스트니를 비롯한 세 사람만이 흐루쇼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국 회의에 도착한 흐루쇼프는 언제나처럼 의장석에 앉았고, 회의 소집 이유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의 개혁은 농업과 공업 모두에 있어 레닌의 가르침을 위배했으며 흐루쇼프가 동지들을 무례하게 대하고 점심을 먹으면서 마구 결정을 내리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한다고 공격함으로 포문을 열었다. 브레즈네프는 "동지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결론지었다.[77]

이에 흐루쇼프는 자신은 당과 인민을 위해 오랫동안 봉사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조차 갑작스러운 회의 소집에 휴가도 팽개치고 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몇가지 실수를 저지른 것은 인정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친구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자 겐나디 보로노프가 "이곳에 당신의 친구는 없습니다."가 소리를 쳤고 흐루쇼프는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거요? 대체 왜?"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의 발언은 제지당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당서기 표트르 셸레스트는 "우리는 동지를 존경해왔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만 동지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이제 아무도 솔직한 의견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좀 더 정중하게 공격했고 그가 정치국과 의논하지도 않고 전개한 처녀지 개간 운동이 재앙적 결과를 불러일으킨 수치라고 지적하면서 흐루쇼프를 예측불허, 통제불능의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그 다음은 보로노프였다. 보로노프는 스탈린 숭배를 흐루쇼프 숭배가 대체했다면서 자신이 농업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의 윽박질과 모욕에 눌려 아무런 의견도 표출할 수 없었다고 공격하면서 흐루쇼프가 은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은 알렉산드르 셀레핀이 나섰다. 그는 레닌이 스탈린에 했던 비판이 그대로 흐루쇼프에게 적용되며, 흐루쇼프는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공격했다. 수에즈 전쟁, 2차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키거나 여기에 개입한 것도 셸레핀이 공격하였다. 이어 안드레이 키릴렌코는 흐루쇼프가 자신에게 무려 3년이나 전화하지 않았다면서 그와 논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가 자신의 잘못을 다른 간부들에게 뒤집어 씌운다고 공격했다. 레오니트 예프레모프, 미하일 수슬로프, 빅토르 그리신도 가세했고 반 흐루쇼프 그룹은 회의를 저녁에 중지하고 다음날 아침에 재개해도 좋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혹시 흐루쇼프가 반격할지도 모르므로 누구도 흐루쇼프가 거는 전화를 받아선 안된다고 합의를 보았다.

회의장을 나온 흐루쇼프는 8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주변을 따라 걸으면서 세르게이에게 "모든게 네가 말한대로 되었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도청당하고 있음을 예감했음에도 미코얀에게 전화해서 "난 늙고 지쳤소. 저들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둡시다. 내가 가장 중요한걸 해냈소. 그 누가 감히 스탈린에게 그가 더 이상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하거나 은퇴해야 한다고 말하는 상상이라도 한 적이 있소? 그런 말 했다간 우리는 물 한방울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 거요. 이젠 모든게 바뀌었군. 공포는 사라졌소. 우리는 평등하게 서로에게 얘기할 수 있소. 그것이 내 공헌이오. 나는 싸우지 않을 거요."라고 말했다. 당연히 KGB는 이것을 도청했고 반 흐루쇼프 그룹은 마침내 승리를 장담하였다.

다음날 10시에 회의는 재개되었고 드미트리 폴랸스키를 시작으로 맹렬한 공격이 재개되었다. 폴랸스키는 스탈린조차도 흐루쇼프보다는 겸손했다고 공격했고 다음 발언자인 미코얀이 흐루쇼프를 옹호할 것을 우려했는지 흐루쇼프는 미코얀조차도 질척거리고 고집스러운 파리라고 모욕했다고 폭로했다. 다음 발언자인 미코얀은 흐루쇼프의 오류를 비판했으나 수에즈와 베를린 사태, 쿠바 미사일 위기에 있어 흐루쇼프의 대처가 옳았다고 옹호했으며 흐루쇼프가 제1비서에서만 퇴임하고 각료회의 의장으로는 남아있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만약 흐루쇼프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면 마오쩌둥만 좋아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셸레핀, 유리 안드로포프, 표트르 데미체프, 알렉세이 코시긴이 일제히 그런 반푼이 조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미코얀을 맹렬히 공격했다.

코시긴, 포드고로니가 흐루쇼프를 비판했고, 브레즈네프가 최종적으로 나서서 흐루쇼프가 자발적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어 표결이 있었고 정치국은 만장일치로 흐루쇼프의 퇴출에 동의했다. 최후로 흐루쇼프는 발언권을 얻었다. 참담한 분위기의 흐루쇼프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들은 나의 부정적인 면모와 행동에 대해서 많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해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정치국이 보여준 성숙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해온 일이 조금은 이 성숙함이 창조되는데 도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무례했던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설명한 많은 것들에 대해 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는 제가 약점을 드러냈으며 이것을 습관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저의 높은 직위가 저의 머리를 헤집어놓았습니다."라고 하였고 각료회의 의장과 제1서기를 겸직한 것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하지만 자신은 무려 46년이나 당원으로 있었으며 자신을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진 말고 일종의 명예직이라도 주어 당을 위해 봉사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떠나라면 언제든지 떠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바로 이어 브레즈네프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하였다. 브레즈네프와 수슬로프가 흐루쇼프의 은퇴에 대해서 발표하자 회의장은 "흐루쇼프놈을 당에서 제명하라!", "흐루쇼프놈을 재판정에 회부하라!"라는 야유와 저주가 쏟아졌다. 흐루쇼프는 눈을 감은 채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묵묵히 들었고 이따금 머리를 싸매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브레즈네프를 제1서기로, 코시긴을 각료회의 의장으로 선출하고 종료되었다. 흐루쇼프를 소련 최고회의 부의장으로 남기는 것이 어떻냐는 제의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부결되었다. 그에게는 매달 500루블의 연금과 승용차, 그리고 경호가 제공되기로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쿠데타는 성공으로 끝났다. 이런 사실상의 쿠데타가 자진사임 형식으로 끝난 것은 당지도부가 모양새를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소련은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을 이어받음으로써 충동적 리더쉽은 사라진다.[78]

흐루쇼프 본인도 어느 정도 낌새는 눈치챘다고 한다. 다만, 낌새를 눈치챘음에도 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순순히 물러났고, 그 과정에서 연금, 여생을 보낼 주거에 대한 부분을 협의했는데 브레즈네프는 연금액을 500루블에서 400루블로 깎은 것 외에 다른 조건은 다 그대로 들어주었다고 한다.[79] 여기에 모스크바의 안락한 주거지, 별장, 자동차 및 기사 제공의 조건이 추가되었다. 브레즈네프 및 반흐루쇼프파 자신들도 살벌한 스탈린 시기를 겪어본 인물들인지라, 스탈린식의 공포정치를 다시 실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흐루쇼프가 정적들을 죽이지 않고 좌천이나 고액의 연금을 받는 야인으로만 지내게 하여 모양새 좋게 은퇴시킨 것을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흐루쇼프가 이렇게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여러가지로 분석 가능한데, 일단 그 자신의 건강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는 점, 적백내전과 스탈린 통치를 겪었던 그가 또 다른 분열을 일으킬 자신이 없었다는 점이 있다. 흐루쇼프의 건강 문제는 의외로 심각해서, 1940년대도 중반에도 한창 전후복구로 바쁠 때에도 폐가 안 좋아서 우크라이나 지역당 서기장을 사임하고 장기간 요양을 했을 정도이다. 아마도 20-30대 내내 돈바스의 석탄 막장에서 광부생활을 한 것 때문에 폐가 많이 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흐루쇼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CIA가 몰래 그가 사용한 화장실에서 남긴 걸로 채변검사를 실시한 결과 "이 사람 아직까지도 살아있는게 신기하네." 수준이었다고 한다. 음모자들이 쉽게 음모를 꾸밀 수 있었던 것도 흐루쇼프가 요양을 이유로 장기간 모스크바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흐루쇼프의 후계자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도 크다. 본래 1960년까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였던 알렉세이 키리첸코는 무능해서 해임되었고, 그 다음 제2서기이자 흐루쇼프가 일찍이 후계자로 점찍었던 프롤 코즐로프는 과음과 만성질환으로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흐루쇼프보다 빨리 1965년 사망한다. 결국 흐루쇼프는 브레즈네프, 포드고르니, 코시긴 등을 신임했는데 이 세 사람은 보수파와 손잡고 브레즈네프 정권의 핵심구성원들이 된다. 결국 정적을 키워준 셈이다. 유일하게 흐루쇼프의 강력한 아군이었던 사람은 미그사의 창립자인 아르툠 미코얀의 형인 아나스타스 미코얀으로 흐루쇼프 해임당시 최고 소비에트 상무회 주석으로 국가원수였는데, 이 사람도 결국 흐루쇼프를 비호한 여파로 실각하고 만다.[80]


2.4.5. 실각후 은둔 생활 및 회고록 출판[편집]


전직 최고지도자에 대한 예우로 연금과 아파트, 그리고 별장을 받은 흐루쇼프는 강요된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실각 전날 측근에게 말했듯이 스탈린 시절이면 물기 하나 안 남기고 증발했을 것이지만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고 했다. 흐루쇼프는 계속 공안기관의 감시를 받았지만 물리적인 구속을 받은 것은 아니고 외국 인사들이나 예술가들의 방문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흐루쇼프의 아들인 세르게이 흐루쇼프의 회고에 의하면 흐루쇼프가 실각후 상실감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자주 울었다. 유일하게 흐루쇼프를 찾아온 고위 정치인은 위에 언급된 미코얀 뿐이었지만 흐루쇼프가 실각한 당일의 방문을 마지막으로 그조차도 다신 흐루쇼프를 찾지 않았다.

흐루쇼프 실각 후에 당의 공식 역사에서 흐루쇼프의 공로는 모두 삭제된다. 방대한 분량의 '소련 대백과 사전'에서 그의 공로가 모조리 삭제되었다. 특히 전공을 세운 정치장교의 목록에서 그의 이름은 삭제되었다.

그의 은퇴 생활 중인 1967년 3월, 1960년 미대선에서 케네디에게 패배하고 장기간 정치낭인 신세였던 리처드 닉슨[81]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그를 찾아왔다. 닉슨은 1959년 흐루쇼프가 방미했을 당시에, 바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대신해 부통령으로서 흐루쇼프의 상대역으로 장시간 동행하며 친분을 나눈 사이였고, 닉슨도 모스크바에 방문해서 흐루쇼프와 또 만났다.[82]그런데 닉슨은 하필이면 흐루쇼프가 별장에 간 사이에 아파트에 방문하는 바람에 못만나고, 흐루쇼프는 멀리 찾아온 친구를 만나지 못해 아쉬워했다고 한다. 닉슨은 그 이후 화려하게 재기해서 대통령에 오른다. 하지만 닉슨도 흐루쇼프처럼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퇴임했다.

은퇴생활중인 1966년부터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직접 집필할 수 있는 문필력이 안되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녹음테입에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녹음하는 것이었다. KGB는 1968년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당중앙에 보고했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아르비드 펠셰와 키릴렌코를 시켜서 흐루쇼프의 작업을 중단하고 회고록을 압수하려 했지만 흐루쇼프는 회고록 집필은 헌법에서 보장된 시민적 권리라고 맞서면서 "연금과 아파트를 빼앗을테면 빼앗아 보라, 나는 금속노동자로 돌아가서 먹고 살 수 있다. 그것도 안되면 구걸해서라도 먹고 살 자신이 있다. 하지만 책상물림인 너희들은 굶어죽을 것이다!" 라고 일갈했다. 1970년 흐루쇼프가 건강이 악화되어 병석에 들자, KGB는 로켓제작사의 중역인 아들 세르게이를 위협해 테이프를 압수했지만, 이미 흐루쇼프는 서방에 비밀리에 사본을 넘긴 상태였다.

비밀리에 반출된 사본을 받은 미국 측에서는 회고록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흐루쇼프에게 모자를 선물로 보냈다. 이에 흐루쇼프는 그 모자를 쓴 사진을 찍어서 미국에 보내주면서 회고록이 진짜임을 암시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흐루쇼프의 회고록이 1970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자 흐루쇼프를 불러 추궁했으나 흐루쇼프는 자신은 회고록을 반출하지 않았다는 거짓진술을 하였고 오랜만에 국영방송에 나와 서방에서 출판한 자신의 회고록은 가짜라고 거짓진술을 했다. 소련도 이를 근거로 흐루쇼프 회고록이 가짜라고 인민들에게 보도하는 것으로 일을 일단락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계속되는 핍박에 1970년 11월에 사망한 드골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그가 부럽다고 하기도 하였다.


2.5. 유산 및 평가[편집]


흐루쇼프가 남긴 말들 중 "내가 한 일들 중 의미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사형당하지 않고 그저 유배되게 소련을 변화시킨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탈(脫) 스탈린화 정책을 펼쳤고, 재임 기간 내내 수많은 유머러스하거나 탈 권위적인 일화를 다수 남김으로써 소련을 말 한번 잘못했거나 태업했다[83]하면 굴라크로 끌려가거나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고생을 해야 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사회 분위기를 지닌 나라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닌 국가로 변화시켰다. 또한 스탈린 시절 누명을 쓰고 처벌받은 사람들을 석방하거나 복권시켰다.

본인도 물론 독재자라는 평가지만, 적어도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로 분류하던 서방 학계의 정의에 혼란을 줄 정도로 사회 억압을 풀고 광신적인 지도자 숭배를 완화했으며 피의 숙청이 난무하던 정치 문화를 온건화했고 모든 잉여생산물을 철저히 수탈해 공업화에만 쏟아붓던 스탈린 식 경제 정책을 완화, 민생 경제를 향상시킨 업적을 이뤘다. 결국 스탈린은 군사력과 경제성장에만 집중하여 부국강병에만 힘쓴 반면에 흐루쇼프는 경제성장을 통한 민생에 더 신경쓴 것이다.

흐루쇼프가 시행했던 정책 중 상당수는 브레즈네프 시기에도 폐지되지 않고 시행되었고, 스탈린 시대에는 소련이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인민들이 여전히 궁핍한 삶을 면치 못했는데 나름대로의 자유를 주면서도 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며, 이런 점에 있어 흐루쇼프가 소련에 남긴 유산은 크다.

피가 피를 부르던 소련 정치를 순화한 인물이기도 했다. 스탈린 시절만 해도 권력 투쟁에서 패한 경우는 대부분 처형되었는데, 흐루쇼프는 베리야를 제외한[84] 다른 정적들(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을 당에서 추방만 했을 뿐, 처형이나 감금 같은 물리적인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정적들은 비록 권력을 잃고 야인이 되었으나, 모스크바에서 고액을 받는 연금생활자로 지내거나 혹은 지방의 한적한 기관으로 좌천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방침은 후임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고, 흐루쇼프 자신도 그 길을 따라 야인이 된 후에도 고액 연금수령자로서 수혜를 입었다.[85]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판해서 스탈린 체제의 억압성을 수정하려 한 것은 높게 평가받지만, 반대로 이것이 그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흐루쇼프의 시기에 교육을 받은 세대가 나중에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의 주축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권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편이다. 러시아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평가가 접전을 이룬다.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 정책을 폈다가 결국 소련해체와 경제파국으로 이어져서 현지에서의 평가가 매우 나쁘지만, 흐루쇼프는 농업정책만 빼면 경제정책을 잘 펼쳐 빈곤이 퇴치되어 생활수준이 크게 올랐고, 억압적인 정책을 폐기하면서도 우주진출 등 소련의 위상을 올리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정교회 탄압 및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주었다는 점 때문에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역적 취급을 받고 있다. 거기다 아들인 세르게이 흐루쇼프를 낙하산으로 공업 관리직에 앉히며 혈연주의와 노멘클라투라의 출연을 가속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데 우크라이나에 우호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고,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긴데다가, 탈스탈린화 정책을 펼친 것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86] 하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철저히 탄압한지라 우크라이나인들도 마냥 좋게 볼 수만은 없다.

또한 그가 관여했던 1953년 동독 봉기, 헝가리 혁명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서방에서는 브레즈네프 시절에 "흐루쇼프 해빙"이 모두 되돌려졌다는 냉전적 견해가 있었고, 고르바초프 시절에도 구소련권에는 이런 견해가 널리 펴져 있어서 브레즈네프를 소련 붕괴의 원인을 만든 암군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만, 현재는 흐루쇼프시절의 여러 자유화 조치가 브레즈네프 시절에도 상당수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로버트 서비스 같은 서방의 보수 역사학자들도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의 여러 조치들을 과거로 되돌리기는 했지만, 흐루쇼프를 본받아 스탈린식의 공포정치나 국가폭력은 자제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를 축출하고, 기록말살형 수준으로 그의 업적을 무시했지만, 흐루쇼프가 추구한 자유화를 좋게 평가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경우 현재까지도 흐루쇼프에 대해 수정주의자로써, 혁명을 후퇴시키고 미제국주의와 평화공존을 추구한 인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포함한 수정주의 노선은 사회주의 배신자들의 노선이었고,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변질시켰으며 붕괴로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2.6. 사망[편집]


1971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나름대로 거창한 장례식을 치렀지만, 크렘린 벽 묘지에는 묻히지 못하였다. 지금은 노보데비치 수도원보리스 옐친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함께 묻혀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나름대로 명망 있는 인사들이 많이 묻혀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크렘린에 비하면...또 전직 서기장임에도 러시아에서는 신문 한 줄로 사망소식이 언급되었고 서방에서만 그의 사망이 큰 이슈가 된다.

흐루쇼프의 부음을 듣자 은퇴생활중 자주 만나던 예술가 지인들이 감시에도 불구하고 모여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한다.
[1]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Екатеринославская губерния) 유좁카(Юзовка, 현 도네츠크)[2] 왕당파, 볼셰비키, 멘셰비키, 나로드니키(인민주의), 민족주의자, 아나키스트, 친(親) 독일파, 친(親) 러시아파 등등이 모두 각각의 세력을 끌고 다자간 내전을 벌인다.[3] 당시 이름 스탈리노[4] 생몰년도: 1893년 ~ 1991년[5] 소련은 일반 노동인부뿐만 아니라 굴라그 죄수를 인력으로 동원했는데 당시 소련의 기술이 안좋은데다가 지나치게 심도가 깊어서, 상당수 인력이 순직했을 정도로 위험한 공사였다.[6]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일하던 당시 직접 스탈린에게 보고한 사형수 숫자만 8500명이라고 한다.[7] 폴란드계 소련인인데, 해임후 "폴란드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했다.[8] 소련은 홀로도모르의 책임은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이 아니라 "트로츠키파 테러리스트의 사보타주의 결과"라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현지에서 대규모의 숙청을 실시하게 된다.[9] 이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폴란드인들과 잦은 마찰을 빚어 소련 점령기에는 소련에 부역해 폴란드인들과 대립하였고 나치 독일 점령기에는 나치독일에 부역하여 우크라이나인이 아닌 타 민족을 박대하였다. 그러다 나치 독일이 자치권 몰수 및 자신들을 학살대상으로 삼자 반독 감정이 올라오고 전후 소련군이 진공하자 다시 소련 편으로 붙었다.[10] 폴란드 제2공화국우크라이나국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수립 이후 영토 확장을 하면서 점령지의 민족주의자, 러시아 백군, 독일군, 볼셰비키 세력과 잦은 마찰을 빚었었다.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서부 영토를 합병하면서 그곳의 우크라이나인들을 지배했었는데, 그나마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시절에는 갈리치아 및 서벨라루스의 민족 자치를 보장하기라도 했었으나 그의 암살 이후 설립된 정부는 폴란드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타민족 세력을 은근히 차별하거나 강제동화 시킨 전적이 있어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유로마이단 사태 이전까지는 사이가 좋은 국가라고 보기에는 힘든 관계였다.[11] 남부는 1942년 봄에 함락되었다.[12] 레오니트 흐루쇼프는 과거 술을 마시던 중 빌헬름 텔 흉내를 내다 부하를 총으로 싸서 죽여버리는 대사고를 쳤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최전선으로 좌천되어 독소전쟁까지 최전선에서 근무하게 된다.[13] 사실 Fw190이 동료 기체를 기습할 때 자신이 몰던 Yak-7을 던져 동료 기체를 보호하다가 그대로 격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아마 자신의 부하를 쏴죽였던 일로 나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로 추정.[14] 이 수치의 소스는 미국 정치학자인 윌리엄 토브먼의 책(Khrushchev: Man and His Era)이 출처이다. 이 책 자체는 퓰리처 상을 받은 명저이기는 하지만, 그 데이터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이 책을 리뷰한 학자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소련군에 징집된 우크라이나인 장정이 75만명이었는데 아무리 소련이 냉혹했다고 해도, 전쟁 이후 노동력이 필요할 때, 강제노역을 시키면 시켰지 수십만명의 처형이 가능했을 것 같지는 않다.[15] 소련 특유의 유통 제도 탓이다. 소련에서 물품을 유통할 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나 키예프, 민스크, 바쿠, 예레반, 알마티 등 주요 대도시 지역을 보급 우선순위로 지정했고, 지방 소도시나 농촌지역은 유통 후순위로 지정해놓았다. 이러한 시스템이야 타 국가에도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소련이 생필품 생산량이 모자르다보니 지방에 물자가 부족하게 공급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 때문에 지방주민들은 물건을 원활하게 구하려면 기차나 자동차, 버스, 비행기를 타고 타 지역으로 가서 발품을 팔거나 대도시 지역으로 가서 물건을 사야하는 애로사항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러시아 극동의 프리모리예 지방은 이런 시스템 하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보니 블라디보스토크의 식료품 가게들에서 러시아 국내산 식품은 일부분이고 중국산 식품이 대부분이다.[16] 일부에서는 이 질병이 스탈린에게 항의한 후 보복이 두려워 가장한 꾀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7] 국가안전부, 내무부(NKVD)에서 공안부문만 떼어내어 확장시킨 기관[18]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스탈린은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서기장 직함을 폐지하고 서기국의 일원으로만 남았다. 하지만 명목상의 서기장 직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의 수장임을 모르는 사람임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침해받지 않았다.[19] 베리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베리야는 스탈린 시절 한 짓들로 인해 대중과 당은 물론 2차 세계대전 승리라는 명분 하에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한 군부에까지 원한을 사고 있었다. 특히 군부에서는, 철천지원수 수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이반 코네프가 베리야 제거에는 합심했을 정도다. 베리야는 사생활도 연쇄 강간마 수준이라 서로 경쟁했던 과두정 일원들과 군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베리야 처형에 동의했다.[20] 스탈린의 명을 받고 독일 기술진들이 보유한 V2 기술을 무난히 소련의 기술진에게 이식시켰고, 2차 대전 당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을 경계하던 스탈린의 의중을 읽고 게오르기 주코프를 맹비판하여 그를 좌천시켰다. 또한 스탈린의 마지막 숙청사건인 1952년 유대인 음모 사건을 주도하여 13여명의 유대인을 숙청했다.[21] 스트레스에 의한 자진 사임으로 보이며, 다만 소련 장관회의의 멤버로는 계속 남는다.[22] 이 사람은 흐루쇼프와 반(反) 흐루쇼프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23] 흐루쇼프의 주코프 제거를 도운 인물이 필리프 골리코프였다. 골리코프는 원래 정치장교출신으로 정치장교, 정보장교로 1940년 GRU총수까지 올랐다. 정치력과 계략에 매우 능한 인물로, 고위 정치장교는 99% 처형되던 대숙청 기간에도 무사했다. 또한 정보기관간의 경쟁관계 때문에 GRU는 NKVD와 매우 사이가 나빴고, 전임 GRU 사령관 13명중 소련 건국 초반에 재임한 두명을 제외한 10명이 대숙청 기간중 죄다 처형당했을 정도로 이 자리는 위험한 자리였음에도 골리코프는 자신을 노리는 야고다, 예조프, 베리야의 칼날을 능숙하게 피했다. 정치력에 비해서는, 정보전이나 작전지휘능력은 별볼일 없었는지, 바르바로사 작전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서 해임당했을 뿐만 아니라, 독소전 기간동안에 야전으로 나가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참패를 당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 과오로 숙청당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정치력 하나는 대단했는지 그럼에도 후방에서 종사하면서 계속 승진했다. 흐루쇼프는 이렇게 대단한 정치력을 가진 골리코프와 짜고 주코프를 제거했다. 골리코프는 이 공적으로 2차 대전 전공이 거의 없음에도 1961년 원수에 오른다. 하지만 1962년 역시 토사구팽된다.[24] 흐루쇼프의 심복이었지만, 그를 배신하여 브레즈네프와 함께 축출하는데 1등공신이 된다. 하지만 이후 브레즈네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야인이 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까지 살아남았다.[25] 다만 수십만이 처형된 대숙청은 베리야가 아니라 전임자인 예조프의 짓이다. 물론 베리야도 규모는 적지만, 여러 숙청사건을 만들었다.[26] 물론 대숙청으로 인한 소련군 약체화나 독소전쟁 초기의 뻘짓 등의 문제점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스탈린이 독소전쟁 승전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주코프를 비롯한 주요 장군들이 1942년 중반부터 독일을 밀어 붙일 수 있던 것도 스탈린의 덕이었다. 스탈린은 전술적인 안목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보급이나 병기 등의 분야에서는 나름의 능력을 보여줬고, 전쟁 지도자로서 외교전과 전시 국가를 운영하는 역할은 확실히 했다. 무엇보다 1943년 초까진 군의 작전에 개입하며 독일측에 좋은 짓을 해줬지만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완패한 이후 스탈린은 작전 개입을 중단하며 주코프가 맹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장군들간의 갈등 교통정리를 해주었다. 반면 히틀러는 종전때까지 후회불가타령을 하며 독일군이 곳곳에서 재시간에 후퇴하여 소련군의 공세를 방어할 새 전선을 만들 기회를 빼앗았고 스탈린그라드, 팔레즈 등 여기저기서 대규모의 정예 부대가 포위되어 전멸하는 큰 피해를 끼치게 된다.[27] 이 연설에서 착안한 공산주의 유머가 있는데 전당대회에서 졸던 당직자 한 사람이 자다가 깨서 "흐루쇼프! 이 더러운 반동!"이라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왜냐고? 잠결에 제21차 전당대회가 열렸다고 착각하고 흐루쇼프의 후임이 흐루쇼프를 격하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해당문서에도 나오지만 제21차 전당대회때도 그 이후 제22차 전당대회때도 스탈린 비판은 계속되었다.[28] 물론 나치독일에서 끌려온 전쟁 포로들은 그딴거 없다.[29] 꼭 반체제 인사가 아니더라도, 종교인사, 시오니즘성향의 유대인 같은 이들이 있다.[30] 다만 스탈린이 소련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라는 것은 흐루쇼프도 완전부정하지 못했다. 스탈린이 이장된 크렘린 벽묘지는 소련에서 국가적 위인을 모시는 곳이었다.[31] 당시 시위대는 흐루쇼프와 미코얀, 불가닌의 탄핵을 요구하면서 망나니중의 망나니였던 바실리 스탈린을 중앙위원회에 임명할 것을 요구했기에 사실상 요구를 수용하는게 불가능했다.[32] 대표적으로는 미국의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이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정교회 묘지 인장을 반대했던 사례를 들 수 있다.[33] 다만 유리 가가린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증언도 있고, 가가린과 그의 가족은 모두 세례를 받은 정교회인이었다는 증언도 있다.[34] 이 점에서 서유럽에 있었던 황제vs교황 같은 일반적인 교권과 속권의 충돌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근본적이었다.[35] 사실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교회 토지와 재산을 국유화하고 체제 비판적인 성직자를 체포하는게 대거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더 이상 물리적인 탄압이 필요없을 정도로 죽여놓아서 이후에는 별로 할 필요가 없었던 것에 가깝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이상 종교와 교회가 예전 같은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어진게 가장 컸겠지만[36] 신학교에 대한 양측의 차이가 이를 잘 말해준다. 소련에서는 주로 단순히 신학교를 강제 폐쇄 했지만(17세기 ~ 18세기 초) 제정 러시아는 신학교에 러시아 학자를 추방하고 외국의 그리스, 라틴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학생들의 수업 참여를 강제했다.[37] 스탈린이 모스크바 시내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을 헐고 나서 소비에트 궁전을 세우려다가 무산되자 그 자리에 야외 수영장을 만든 것도 흐루쇼프가 했다.[38] 사실 연금제도 자체는 러시아 제국때 도입되었고, 레닌과 스탈린 시대에 확충되었지만,지역에 따라 연금제도가 파편화되어있었기 때문에 어느공장에서 일하나, 어느농장에서 일하냐에 따라 지급형태가 천차만별이었고, 이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노후를 빈털털이로 살아야되는수 있었다. [39] 미국은 번영의 1920년대를 보내면서 이미 그때부터 세탁기, 냉장고, 라디오가 많이 보급됐는데 의외라면 의외일 것 같지만 1960년의 당시 소련의 라디오 보급률이 50%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소련은 미국보다 40년이나 늦게 보급된 것이다. 그래도 흐루쇼프의 업적은 대단했다.[40] 소련 붕괴 이전 최고 기록이었다![41] 스탈린 집권기에 건축된 고급 아파트[42] 흐루숍카는 일반인들에게 면적이 좁고 외형도 불품없어 보이기 때문에 큰 호평을 받는 주거형식은 아니지만 러시아 대도시 지역의 집값이 일반 서민들 기준에서 수십년치 봉급을 써야 겨우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그나마 싼 흐루숍카가 선호되고 있다.[43] 사실 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1960~80년대생 대부분은 이런 정책 때문에 모어가 러시아어가 되었다. 예를 들어 소련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조차 러시아어가 모어였고, 러시아어로 코미디 연기를 시작했다.[44] 흐루쇼프가 완전판이 아니라 정보기관이 만든 요약본을 읽은 이유는 소련에서는 출판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작품은 서방에서 완전판이 먼저 출판되었다.[45] 이 당시에는 스틸야기(стиляги)라고 불려졌다.[46] 생몰년도: 1925년 ~ 2016년[47] 공화국 지역당의 서기장[48] 다만 중앙이 보기에 지역당의 지도자가 크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중앙당이 해임할 수는 있었다.[49] 다른 한편으로 우크라이나어를 주로 사용하는 돈 강 지역 상당수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넘어갔는데 흐루쇼프는 이 지역 대신에 러시아어 사용자가 많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주었다.[50] 자세한 내용은 블라디미르 1세, 바실리오스 2세 문서 등 참조.[51] 대표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주요 항구도시 오데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흑해에 건설한 폴리스 오데소스에서 따온 이름인데, 오데소스는 원래 오늘날 불가리아 바르나 일대의 지명이지만, 예카테리나가 새로 항구를 건설하는 와중에 도시 명칭을 멋대로 도용하였다. 러시아가 고대사가 빈약한 나라이다보니 고대 그리스와의 연계점에 집착했던 것이다.[52] 다른 한편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역시 자신들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인들과 스키타이인들의 교류 및 융화에서 찾고 있다.[53] 서로 혈맹인 중국과 북한이 자국 역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백두산만큼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천지를 갈라서 경계를 삼은 것도 이와 유사하다.[54] 결국 이곳은 벨라루스에 편입되었다.[55] 말리놉스키는 2차 대전 전공으로 원수에 오르기는 하지만, 소련군에는 그보다 훨씬 전공이 높은 원수들이 여러명 있었다. 국방장관 임명 이전에는 전략적 중요성이 한참 떨어지던 한직인 극동군관구에 몇년간 쳐박혀 있던 인물이었다.[56] 소련 공산당은 중앙집권 체제였지만, 일단은 연방 체제였기 때문에 지방조직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 지도자들에게 신망이 있어야 했다. 중앙이고 지방이고 마음대로 절대권력을 휘두른 스탈린 시대가 소련 전체 역사로 치면 오히려 예외적인 기간이다.[57] 근거없는 설이다. 애당초 이 운하 건설은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에 전속되고 7년 후에야 연방재정으로 실시되었고, 운하 소유권도 우크라이나 SSR 정부가 아니라 연방정부에 있었다. 설령 이런 음모론자들의 주장처럼 크림 반도 운하 건설 비용이 우크라이나의 재정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어차피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에 전속된 이상, 그 건설비용을 우크라이나가 떠맡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58] 물론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는 러시아 제국의 흑해 진출의 중핵이 바로 자포리자 코자키였으므로 할 말은 있다.[59]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함께 러시아 항구도시 투톱이었다.[60] 이때 디즈니랜드에 가게 해달라고 하다가 안전상의 문제로 거부되자 격분해서 항의하기도 했다.[61] 사실 흐루쇼프의 이런 허장성세 전략은 미치광이 전략의 고전적인 사례이지만, 2차 대전이라는 생지옥을 겪어본 소련 지도부는 이를 너무나 불안하게 봤다. 이것이 흐루쇼프의 실각 원인이 된다.[62] 미국이나 서방이 정치제제가 유사한 인도를 자기네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인도는 사실 서방을 믿지 않으며, 오직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중국과 상대할 때만 서방에 발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제재에 전혀 동참하지 않고 있다.[63] 구 소련의 최전성기에도 경제규모는 미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64] 후에 1960년대 중국, 그리고 1990년대의 북한도 비슷한 전략을 쓴다. 재래식 무기를 대규모로 확충할 돈이 없을 때, 핵무기를 개발해 전쟁억지력을 갖추는 것은 오히려 싸게 먹힐 수도 있다. 소련 붕괴 이후에 러시아도 한동안은 이 전략을 고수해서 타이푼급으로 대변되는 핵전력은 끝까지 지켜냈다.[65] 1980년대 러시아의 밀생산량이 연간 4천만톤 안팎이었는데, 2010년대에는 거의 9천만톤에 육박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소련 붕괴로 사회주의의 비효율적인 경영의 개선도 역할을 했다.[66] 원래 소련 생물학계에선 1930년대까지만 해도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필두로 한 유전자설(당시엔 가설. DNA는 50년대에 와서야 발견)이 대세였고 바빌로프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돌아다니며 무려 40,000개의 품종을 들여오는 등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심지어는 종자를 찾아 일본을 거쳐 한국까지 찾아왔고 1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숙청 당시 스탈린과 친분이 두터웠던 리센코와 달리 인맥이 없던 바빌로프는 고작 5분 동안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형무소로 끌려갔고, 소련 인민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그는 '연구를 빙자하여 국고를 축내며 외국 여행이나 다닌 반동'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러 과학자들이 스탈린에 탄원하여 사형은 간신히 면하고 종신형으로 대체되었으나 3년 후 형무소에서 굶어죽고 만다. DNA가 발견된 후인 1960년대에 바빌로프는 복권되었다. 이미 그는 굶어죽었지만...[67] 실제로 그 당시 같이 기근이 심하지는 않았다.[68] 1964년 당시 미국이 실전배치한 탄도탄 전력은 아틀라스 ICBM 113기, 타이탄 I 108기, 미니트맨 600기, 폴라리스 224기였는데 반해 소련의 탄도탄 전력은 R-7A 6기, R-16 172기, R-9A 11기 수준이었다.[69] 당시 소련은 전후복구에 중점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본격적인 핵무기 생산 경쟁을 할만한 사정은 아니었고, 소련의 당시 사정은 최소한의 전쟁억지력으로서의 필요한 핵무기만 배치한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흐루쇼프 당시에는 본격적인 핵탄두 경쟁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전후복구가 마무리된 이후인 1960년대 후반부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탄도탄 전력을 엄청나게 증강시켜 1970년대 말에는 소련이 미국을 추월한다.[70] 참고로 남한 역시 랜스 미사일과 같은 단거리 탄도탄이 배치된 적이 있다.[71] 자기 목숨도 왔다갔다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사업.[72] 실제로 친해진 미국기자한테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묻고, 기자가 그 이유를 묻자, 좀 있다가 미사일 쏠 때 여기만 빼고 쏠려고 라고 답했다.[73]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D-13'에 보면 흐루쇼프가 정치인/외교관/군인들이 개입된 공식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자신의 어릴적 고향친구를 밀사로 파견해서 백악관측과 비밀협상에 나서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케네디 대통령도 자신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한테 포괄적인 권한을 부여해서 최종협상에 내보낸다. 실제 역사에서는 피그만 침공을 계기로 이미 양측이 서로 밀사를 보내면서 직접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74]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상임위원회:입법부) , "소련 장관회의"(장관회의:행정부), "소련공산당 정치국"(당)은 자주 혼동되는데 (특히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도 모두 presidium(Президиум)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그렇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각각 국회 의장단, 국무회의, 집권여당의 최고위원 회의 정도로 보면 된다. 당시 흐루쇼프는 정부와 당의 수장을 맡고 있었고, 브레즈네프는 입법부의 수장을 맡고 있었다. 당이 정부를 지배하는 사회주의국가 사정 상, 당 정치국이 사실상의 최고권력기구였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을 장악해서 흐루쇼프를 축출한 것이다.[75] 말리놉스키와 세미차스트니는 이런 음모에 가담했지만, 흐루쇼프측에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데는 극히 반대했다. 브레즈네프의 음모가 유혈 쿠데타가 아니라 조용한 형태의 실각이 된 것은 바로 무력을 쥔 이들이 가담해서 역설적으로 폭력사용을 자제했기 때문이었다.[76] 이런 수법은 흐루쇼프가 군부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졌던 전임 국방장관이었던 주코프를 1957년 실각시킬 때 썼던 방법이었다.[77] 공산권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상당히 도발적인 표현이다. 북한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을때 몽골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불편한 심정을 표현했다. 참고로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해서 서방에서는 대체적으로 환영하면서 북한과 수교를 모색하여 스칸디나비아 4국 및 호주와 친서방 3세계 국가였던 이란, 태국 등이 북한과 수교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나, 공산권에서는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해야한다는 대목에 대해서 소위 '친일친미 주구 파쑈 군사독재' 박정희 도당이 자기네 사회주의 형제국보다 더 가까운 것이냐면서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78] 참고로 냉전시절에는 소련을 악마화하기 위해서 브레즈네프가 스탈린시절로 돌아간 수구적인 지도자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었지만, 최근 정치학계의 연구로는 브레즈네프 시기가 그다지 보수적이지 않았다고 보는게 정설이다. 이 당시 미소마찰에 의한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소련 내부에서는 스탈린 시절과 같은 공포정치로 돌아가지는 않았고, 오히려 1970년대 고유가에 의한 오일머니로 소련인민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 이런 체제를 "흐루쇼프 없는 흐루쇼프 체제"라고 정치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79] 당시 소련 1루블은 0.8달러의 가치가 있었고, 64년 당시 미국의 평균 월급이 300달러 수준에 불과했던 것과 소련의 생필품 가격은 엄청나게 쌌던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한 돈이다.[80] 흐루쇼프 실각 후에도 미코얀, 수슬로프, 그로미코 등은 개혁파의 입장에 서서 당내 민주주의, 권력 분점, 집단지도체제등을 줄기차게 주장하였으나 이들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안드로포프는 당시 소련 권력층에서 그렇게 급진적인 개혁파는 아니었다. 수슬로프의 경우 '흐루쇼프가 1인 독재를 하려고 해서' 흐루쇼프의 실각에 참가한 것이지 원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즈다노프 노선을 따라 권력분립과 당내민주주의에 '집착'한 일종의 보수개혁파였으며, 미코얀의 경우 노동계급에 정치적 실권을 부여하자는 주장까지 했다![81] 당시 미국 전부통령[82] 1959년 미국과 소련은 상대국에서 자기네 나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때 미국은 여러 가전품을 갖춘 자국 중산층 가정의 주방을 재연해 전시했다. 닉슨과 흐루쇼프는 모스크바에서 TV 토론으로 논쟁을 벌였고(kitchen debate), 이는 소련과 미국에 방송 중계 되었다. 흐루쇼프는 그런 미국 주방의 전시품이 별게 아니고, 머잖아 소련도 비슷하게 살거라고 주장하며 닉슨에게 "당신 손자들은 공산주의 아래서 살거요"라고 말했고, 닉슨은 "당시 손자는 자유로운 곳에서 살것입니다"라고 반박했다. 이후 흐루쇼프 아들이 미국에 귀화해서 닉슨의 말이 맞았다고 회자되었다.[83] 태업(怠業): 노동쟁의 행위의 하나. 겉으로는 일을 하지만 의도적으로 일을 게을리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손해를 주는 방법이다. 물론 저건 사전 상의 정의로, 열심히 일해도 그에 따른 인센티브가 없으니 설렁설렁 일한다는 공산주의의 한계와,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숙청의 칼을 꺼내들기 이전 개막장스러운 인간들이 지방 공산당원입네 설치며 무단 태업과 결근을 일삼던 역사적 사례로 인해 소련에서 태업죄는 단순히 "너 해고" 정도로 끝나는 죄가 아니었다. 스탈린 시절 "할당량만큼 사람을 잡아들일 수가 없어 전진긍긍하던 지역 엔카베데가 아침 시간 출근하던 통근 버스를 붙잡아 시간을 끈 뒤 출근 시간이 지나자 태업을 기도했다며 승객들을 모조리 잡아다 굴라크에 던져버리는" 웃을 수 없는 촌극도 왕왕 일어나서 문제지. 이 "할당량" 문제가 원체 심각했던지라 엔카베데와 경찰은 굴라크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체포를 남발했는데, 수용소 군도를 보면 굴라크에 끌려간 이웃집의 갓난아기를 어떻게 하냐며 동네 주부가 경찰서에 찾아오자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 주부와 아기까지 전부 잡아들여 굴라크로 끌고간 사례, 집시 한 무리가 나타나 주인 없는 벌판에 텐트를 치자 지역 경찰서장이 기회다 싶어 모조리 체포해버린 막장 사례들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84]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베리야는 살인과 고문, 강간을 밥 먹듯 즐기고 스탈린을 제외한 모든 인원들과 척을 맺는 등 성격이고 인간 관계고 할 것 없이 개차반 중의 개차반이었던지라 자신이 수장이었던 NVKD 빼고는 전부 베리야를 죽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스탈린 사망 이후 흐루쇼프, 몰로토프, 주코프, 코네프 등 정치국원 및 고위 정치원들은 전원 베리야의 모가지를 따버려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엿고, 결국 베리야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저 인원들 중에서는 주코프와 코네프 등 서로 원수지간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조차 베리야의 숙청에는 서로 협력할 지경이었다.[85] 재밌는 건, 흐루쇼프가 숙청하면서 죽이지 않고 좌천시킨 정적들은 보로실로프만 빼면 전원 흐루쇼프보다 오래 살았다. 살벌한 권모술수가 난무했던 중앙정치에서 벗어나 현실에 체념하고 유유자적 살아서인지 스트레스를 덜 받은 듯하다. 정작 흐루쇼프도 만 77세에 죽었으니 단명과는 거리가 멀었다.[86] 그러나 오히려 반세기가 지난 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2022년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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