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유래와 역사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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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편집]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의 정치적인 의미는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 의장석의 시선을 기준으로 왼쪽(Gauche)에 민중을 대표하는 자코뱅당급진 공화파가, 오른쪽(Droit)에 온건 공화파가 앉았던 데에서 기원한다.[1] 좌파라는 낱말이 정치적인 함의로써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초, 왕정복고를 거부하고 저항하던 급진적인 반대파를 폄하하려는 의도로 사용했던 점이 그 시초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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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정치의 시작인 프랑스 혁명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 공화파는 대체로 태동하고 있던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초기 시장주의에 우호적이었고, 도시 노동자와 상공업자로 이루어진 혁명 민중인 상-퀼로트의 주된 요구였던 사유재산 개념의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분배와 정부가 주관하는 가격 제한을 통하여 모두에게 소유의 기회를 주자는 혁명 정부의 정책도 그 발상의 연장선이었다.[2] 로베스피에르는 장-자크 루소의 사상에 심취하여 인민 주권과 보통선거,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고, 자유, 평등, 연대(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의 신념에 기반한 공화국을 꿈꾸었다. 이러한 구상 하에서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등장한 것이 이른바 자코뱅 헌법, 1793년 헌법이었다. 또한, 이신론적인 구상으로 기존의 종교 도덕을 대체할 최고 존재의 제전을 도입하고 실시하였다. 혁명과 공포정치의 미성숙함, 루소주의와 최고 존재의 제전처럼 관념적인 방향성은 많은 사회주의자가 비판하는 부분이지만, 근대 사회의 태동기에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의 원형이 함께했던 급진 공화파의 혁명 정부는 역사적인 귀감의 대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끊임없는 혼란과 반혁명에 대한 의혹으로 혁명 정부의 정책은 대부분 제대로 실행된 바가 없었고, 민중과 급진 공화파의 동조 속에 로베스피에르는 반대파를 하나씩 숙청해나갔다. 혁명기의 민중은 온건 공화파가 숙청되자 자크 르네 에베르에베르파를 혁명의 선두에 세워 강력한 민주주의에 근거한 공포정치를 지지하였다. 더 많은 통제 정책과 더 광범위한 분배가 필요하다는 강경한 주장과 급진 공화파에까지 날을 세우는 에베르파의 성향에 위기감을 느낀 로베스피에르는 끝내 에베르를 숙청하였고, 민중은 로베스피에르에게 등을 돌렸다. 급진적인 민중은 각자 다른 이유로 연합한 중도, 반혁명 세력을 끌어들여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급진 공화파를 실각시킨다. 이후 급진 공화파가 실각하여 견제가 없어진 반혁명 세력은 혁명 정부의 정책을 철회하고 급진적인 민중을 탄압하였으며, 혁명은 급격하게 보수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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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는 평등주의자를 자칭하며, 급진 공화파의 소유권과 결합한 자유로운 분배주의라는 구상을 넘어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바뵈프는 원래 프랑스 혁명 정부와 로베스피에르에 부정적인 사람이었지만,[3] 테르미도르 반동이 끝나고 난 뒤 반혁명 세력이 실권을 잡자 로베스피에르를 옹호했다. 그리고 분배주의에 대하여 억지로 나누어 놓기만 하는 것은 또 다른 불평등을 낳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인민이 로베스피에르 같은 지식인과 결사하여 생산수단을 쟁취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뵈프는 이탈리아의 평등주의자 필리포 부오나로티와 비밀 결사를 만들고 반체제 봉기를 계획하던 도중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소위 바뵈프주의는 동시대의 진보 사상가들에게 폭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사회주의의 이론적 토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의 계급협조주의자이자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자생 시몽은 역사가 일정한 법칙을 바탕으로 발전한다고 분석하고, 미래 사회가 고도로 발달한 산업 경제를 중심으로 조직될 것이라 전망했다. 생 시몽은 과학적 원리에 의하여 생산자와 산업가가 미래 사회의 주체로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를 해체하고 생산수단에 대한 관리만이 남는다고 추측하며, 계획적으로 물질적인 부와 생산성을 증대시킨다면 자연히 구체제의 지배 관계가 사라져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평등한 사회가 도래한다고 주장하였다. 생 시몽주의의 구상은 장기적으로 이신론적인 관념론에 흡수되어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지만, 철학 속에서 사회학을 발굴한 생 시몽은 지배 계급의 해체에 대한 사상적 단초와 계획경제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샤를 푸리에는 몽상적인 주장으로 비판받지만, 자유로운 연애성해방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촉발시킨 사람으로서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용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푸리에는 성차별과 그때까지 여성에게만 전가되어 왔던 육아와 가사노동을 억압이라는 단어로 풀어쓰며,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재산권과 교육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푸리에 자기 자신의 표현대로 인류애적인 사상은 근대적인 성 관념과 자유 연애의 기틀을 마련한 성해방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사람에게 금욕을 요구하는 계몽주의와 전근대의 도덕에 맞서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이성이 아닌 욕구[4]라고 역설하며, 욕구가 충족되어 사람이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노력을 인정해주는 성과급을 제대로 지불한다면 즐거운 노동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단지 생존 수단에 국한되었던 노동의 개념을 나아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푸리에는 그 모든 과정이 종교적인 선의에 기대어 실현된다고 보았기에 실패를 피할 수 없었지만, 푸리에주의의 핵심은 후대의 사상가들에게 아주 획기적인 발상으로 여겨졌다.

영국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언은 사회주의자인 것과 동시에 근대적 체계를 가진 협동조합의 시조로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공동체를 실험한 첫 번째 사례이다. 오언은 사람의 성격과 능력은 개인을 벗어나 (대개의 경우에서)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고, 그것이 과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원리에 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오언은 아동 노동의 금지와 아동 교육의 필요성을 제창하고, 동업자들과 매입한 뉴래너크 공장에서 위생 상태와 노동 환경의 개선, 8시간 노동, 8시간 여가, 8시간 휴식의 원칙으로써 생산성을 증진시켜 자신의 이론에 실효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오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산성 경쟁이 오히려 생산 효율의 저하와 사회 문제를 낳는다고 분석하였고, 자율 노동과 노동자의 자주적인 사업장 관리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로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자신의 이론에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5] 오언의 구상에는 화폐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형태의 상품 교환 가치로 대체하는 것이나, 소비자와 생산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조합을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언은 뉴래너크와 자신이 미국으로 건너가 세운 공동체인 뉴 하모니에서 이 발상을 비롯한 자신의 이론을 실험했지만, 뉴 하모니는 영국과의 환경 차이[6]로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는 실패를 겪었다. 오언 본인은 영국 정부와 종교적인 도덕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할 만큼 명백히 종교인이 아니었지만, 이신론적인 성격이 있어 자신의 이론이 과학적인 분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면서도 신념적인 선의에 근거한다고 여겼다. 더불어 노동자는 그 자체로 사회에서 주체적인 역할이 될 역량이 없으며, 지식인과 부르주아가 관리해주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회주의를 반드시 오게 될 미래의 이상향으로 해석한 오언주의는 접근론적인 면에서 후대의 협동조합주의노동조합주의, 특히 영국의 남성 보통선거권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었다.

프랑스의 혁명주의자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필리포 부오나로티로부터 평등주의의 짙은 영향을 받았다. 블랑키는 단순 음모나 인민 봉기를 넘어서 강력한 규율을 가진 소수의 비밀 결사로 계획적인 파괴 공작을 감행하고 인민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는 과도기로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여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웅주의적인 테러리즘과 선동으로 자유 사회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한 블랑키주의는 블랑키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후계 사상들에게도 과도하게 폭력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적극적인 혁명과 인민 봉기로 국가 체제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은 아나키즘과 혁명을 중요시하는 사상적 기조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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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슈티르너[7]

나는 어떠한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

I have set my cause on naught![8]

《유일자와 그 소유》, 1845[9]

독일철학자이자 허무주의자, 개인주의자(에고이스트)인 막스 슈티르너, 요한 카스파르 슈미트(본명)는 에고이즘적 아나키즘의 시조이자 《유일자와 그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의 저자로서, 엄밀히는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데다 살아서는 거의 주목받지 않았고, 평생 채 500쪽도 되지 않는 분량의 짧은 글만을 남긴 사람이지만,[10]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미하일 바쿠닌 생전, 혹은 이 셋의 등장 이전의 헤겔좌파독일 관념론의 경향성을 설명하는 문헌에서 종종 언급되고는 한다.[11][12] 슈티르너는 당대 젊은 헤겔좌파 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자유인의 일원이었으며,[13] 헤겔적 변증법의 영향을 받았다. 극단적인 관념론자였던 슈티르너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모든 것을 (자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인 유령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특정한 권리라는 것은 사람이 어떠한 신념, 특히 국가사회적 규범에 복종함으로서 주어지는 것이기에 자유라는 명목으로 도덕을 강제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혁명주의에 대하여 모든 형태의 권위적 제도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과 더불어 순수히 지배로부터 탈피하려는 움직임인 반체제 반란[14]을 옹호하고 새로운 약속을 만드는 과정인 혁명을 거부했다. 슈티르너는 사람이 도덕을 극복하고 구체제의 제약 없이 자신의 욕구에 충실해지며, 법이라는 강압으로 규정된 소유권의 벽을 허물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15]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각종 체제에 대한 거부와 강력한 비판, 이론의 빈약함으로 에고이즘적 아나키즘, 슈티르너주의는 곧잘 아나키즘의 주류 기조에서 무시되지만 슈티르너의 사상은 철학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슈티르너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철학자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이다.[16]

국가는 노예적 노동으로 유지된다. 노동이 해방된다면, 국가는 소멸할 것이다.

The State rests on the — slavery of labor. If labor becomes free. the State is lost.

《유일자와 그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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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아나키스트이자 사회주의자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은 앞 세대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샤를 푸리에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이다. 프루동이 사용한 아나키라는 낱말은 지배(정부)가 없다는 뜻으로서, 일체의 권위와 지배, 강압이 없다는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프루동은 온정주의라고 비판받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태도를 일신하여 노동자와 소상공인이야말로 역사의 주체이며, 생산물의 가치는 오직 노동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보고 모든 소득은 생산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노동전수익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프루동 철학, 상호주의의 근간은 《소유란 무엇인가?》(1840)[17]에서 그 기틀을 찾아볼 수 있다.

만일 내가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야만 한다면, 그래서 내가 한마디로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한다면, 나의 생각은 당장에 이해될 것이다. 인간에게서 사상, 의지 그리고 인성을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은 곧 생사여탈의 권력이며, 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를 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굳이 군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도둑질이다"라고 마찬가지로 답할 때마다, 내 답변이 잘 전달되지 못했다는 노파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두 번째 명제는 사실상 첫 번째 명제가 모양을 바꾼 것에 불과한 데도 말이다.

《소유란 무엇인가?》, 1840[18]

프루동은 프랑스의 공화주의 혁명에 대하여 구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해 봉기했지만, 억압과 지배를 존속하게 만드는 원리인 재산권을 신성한 권리로 포장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소유와 상속에 대하여 스스로 노동을 통해서 얻은 가치가 아닌 노동자의 노동력 제공으로 유지되는 불로 소득, 실체가 없는 소유, 도둑질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법적으로 소유한 채 노동자가 만들어내는 생산물을 취하여 가격을 부풀리고 부등가 교환을 함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창조해내는 시장 구조와 화폐 경제를 살인으로 형성된 불가능한 체제라고 비판하며, 이러한 착취를 폭력으로 유지하는 근간을 권위로 지목하고 노동자가 생존할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체제에 반대하였다. 이리하여 프루동은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원리, 공동 소유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의 생산물을 자율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점유 체계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유지되는 연방주의 공동체와 노동에 알맞는 생산물의 교환 가치를 공급하는 인민은행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존의 정치 권력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관망하면서 모든 형태의 폭력과 소위 빠르게 불태우는 방식을 반대하고, 혁명과 노동조합, 사업장에서의 쟁의조차 거부하였다. 프루동주의, 또는 상호주의의 방식은 프루동 본인이 과학적 사회 분석에 근거한 사회주의라고 제언한 것과 정반대로 지나치게 온정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았지만, 근대 사회주의의 계보를 잇는 프루동의 핵심 구상은 많은 진보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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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사회주의카를 마르크스[19]프리드리히 엥겔스[20]가 제창하고 당대의 모든 사회·인문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분석 체계로, 독립적인 사상으로서도 코뮌주의(공산주의)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세계관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도 하는데, 자연 현상에 대한 접근, 즉 연구 방법과 인식 방법이 변증법적이고, 자연 현상에 대한 해석, 즉 이해와 이론이 유물론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변증법적인 접근법은 헤겔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과학적 사회주의의 변증법이 헤겔의 변증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관념론적인 성격을 제거한 핵심만을 취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분을 마르크스는 《자본[21][22][23]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헤겔과 다를 뿐만 아니라 정반대이다. 헤겔에게 사고 과정은 현실 세계의 데미우르고스(창조주)이다. 헤겔은 이 사고 과정을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독립적인 주체로까지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현실 세계는 단지 ‘이념’의 외적 현상 형태로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반대로 이념이란 물질세계를 인간 정신이 반영하여 사고 형태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또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유물론은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1804–1872, 독일의 철학자 겸 인류학자)의 철학을 참고한 면이 많다. 단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의 전례에서처럼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24]의 기본 골자만을 가져오고 새로운 형식으로 개선하였다. 이는 포이에르바하의 분석은 날카로웠지만,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적 관념론과 도덕주의자적인 면모가 자신의 철학에까지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25]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소위 비판적 수용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845)[26]에서 그 관점과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사유객체와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감성적 객체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Wesen des Christenthums)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 태도로 보고, 반면에 실천은 단지 저 불결한 유대적 현상형태 속에서만 파악하고 고정시켰다.

(…)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 안에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 이렇듯 현실적 본질에 대한 비판으로 들어서지 못한 포이에르바하는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1. 역사의 진행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Gemuet)을 그 자체로서(fur sich) 고정시키며, 따라서 하나의 추상적인, 고립된 인간 개체를 전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2. 따라서 그 본질은 단지 유(Gattung)로서만, 다수의 개인들을 자연적으로 결합시켜주는, 내적이고 침묵을 지키는 보편성으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성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분석한 추상적 개인이 일정한 사회 형태에 속해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845

많은 진보 사상가들에게 1848년 혁명과 그 소요 사태는 충격으로, 동시에 사회 변혁 운동의 전환점이자 더 나은 방향성으로의 기로를 열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마침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시 각각 30세와 28세의 젊은 나이의 혁명가로서 《독일 이데올로기》(1846)[27]와 프루동의 《경제적 모순들의 체계 혹은 빈곤의 철학》(1846)[28]을 비판하는 《철학의 빈곤》(1847)[29]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명료하게 요약한 이후 사회 운동에 적용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같은 해 2월, 둘은 자신들의 초기 문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자인 코뮌주의 선언(1848)[30]을 출간한다.[31][32]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코뮌주의 선언》

코뮌주의 선언은 엄연히 코뮌주의자 동맹의 선언문이었기 때문에 선동적인 문구로 해석에 많은 논란을 낳았지만, 그 주장의 골자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세계관에 대한 개략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먼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라는 대단히 도발적인 문장과 함께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역사를 비평한다. 역사에 변증법적인 기준을 두고 발전하며, 그 명료한 기준으로서 고대, 중세, 근대의 사회 구조를 경제 구조생산 양식의 사회적, 실질적인 역할, 형식의 변화를 들어 나누는 분석과 국가는 지배 계급의 수단일 뿐이라는 주장은 역사학과 사회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가 어떠한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특징을 공유하는 사회적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아주 혁명적인 역할을 해냈다고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혁신적인 생산력 증대를 예찬한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이 자본주의 구조의 최고 단계, 즉 다음 사회 경제 구조, 다음 생산 양식으로 이행될 시점을 모두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력에 따라 받는 사회로 지목한다.

공업의 발전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숫자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더 거대한 집단 속에서 한데 뭉쳐 세력이 커지며, 차츰 자신의 힘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기계가 여러 가지 노동 사이의 차이를 없애고 임금을 거의 어디서나 똑같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뜨림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이해 관계와 생활 상태는 더욱 똑같아진다.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격화해 가는 경쟁과, 이 경쟁으로 생겨나는 상업 공황으로 노동자의 임금은 더욱 불안정해진다. 기계가 점점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개선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 처지는 더욱더 불안해진다.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사이의 충돌은 점점 더 두 계급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들에 대항하여 결사체(즉 노동 조합)을 조직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금 수준을 유지하려고 뭉친다. 그들은 앞으로 충돌이 일어났을 때 먹고 살 것을 마련하려고 상설 단체까지 세운다.

(…)

일반적으로 낡은 사회 안의 충돌은 많은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과정을 촉진한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투쟁을 해 왔다. 처음에는 귀족과 투쟁했고 나중에는 공업 발전에 대립하는 이해 관계를 가진 일부 부르주아층과 투쟁했으며, 그리고 언제나 외국의 부르주아지 전체와 투쟁한다. 이 모든 투쟁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그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그들을 정치 운동에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부르주아지는 자신들만이 누려 오던 정치·일반적 교양의 요소를, 즉 부르주아지 자신에 대항할 무기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한다.

더군다나 이미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공업의 발전으로 지배 계급의 대부분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거나 최소한 그들의 생활 조건이 위협받는다. 이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계몽·진보적 요소를 대량으로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계급 투쟁이 결전의 시기에 가까워지면 결국 지배 계급의 내부, 낡은 사회 전체의 내부에서 해체 과정이 아주 격렬하고 날카로운 성격을 띠는 까닭에, 지배 계급의 일부가 지배 계급에서 떨어져 나와 혁명적 계급, 즉 장래를 손안에 움켜쥔 계급에 가담하게 된다. 따라서 과거에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에게로 넘어간 것처럼, 지금 부르주아지의 일부, 특히 역사적 운동의 모든 과정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게 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 가운데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모든 계급은 대공업이 발전하면서 몰락하여 멸망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공업 자체의 산물이다.

《코뮌주의 선언》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 권위의 종말과 더불어, 새 시대의 주체가 될 노동자들은 역사가 변화하는 방식의 본질인 계급투쟁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선언한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격동하는 현대 사회의 변화를 전망하며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도 아닌 계급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간 계급들, 즉 소산업가·소상인·수공업자와 농민은 모두 중간 계급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파멸에서 구하려고 부르주아지와 투쟁한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지 못하고 보수적이다. 아니, 그들은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혁명적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머지않아 프롤레타리아트로 넘어가게 될 것을 고려하는 한에서만, 그들이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장래의 이익을 옹호하는 한에서만,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려고 그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낡은 사회의 최하층에 있는 수동적 부패물인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우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운동에 끌려들어오는 일도 있으나, 그들은 전반적인 생활 처지 때문에 반동적 모략에 매수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코뮌주의 선언》

하지만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노동자 계급의 승리를 전망하면서, 이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주의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혁명 운동과 사상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엄밀히 과학이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 구조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통해 변증법적인 역사의 조류에 올라타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역사의 발전 단계를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본질 그 자체라고 여겼다. 이는 사회주의가 완벽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미래의 이상향이라고 주장한 공상적 사회주의과학적 사회주의 이후의 사회주의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따라서 과학적 사회주의가 말하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코뮌주의 사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짜여진 건물 도면처럼 명료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체가 될 노동자 계급의 온전한 자유에 맡겨져, 중도에 무너질 수도 있고, 더 나은 형태의 사회와 더욱 일신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코뮌주의 사회에서 다시 투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내세운 과도기 개념의 영향을 받은 노동 계급의 민주적인 정치 권력 취득이나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혁신적인 발상 또한 자유라는 이 역사적 흐름에 맡겨진 추측의 연장선이었다.

많은 매체에서는 흔히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을 팔고 임금을 받으며,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주는 것은 공정한 거래이자 기본적인 상식이라고 표현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임금을 받고 판매하는 것이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 즉 일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이윤이 노동에서 비롯되지만,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닌 노동력에 대한 대가이며, 이는 노동의 결과로 나온 생산물의 부가 가치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을 참조하여 뒷받침이 되는 자신의 새로운 논리를 내세운다.

자본가는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해 상품을 생산한다. 다른 상품들처럼 노동력이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는 임금만큼만 노동력을 소비해서는 이윤을 남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본가가 구입하는 공장·토지·기계·원자재 등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자기 가치의 일부를 생산물에 이전할 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력을 쥐어짜 임금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게 한다. 새로 창출된 가치 가운데 임금을 뺀 나머지 부분을 잉여가치라고 하고, 자본가는 이를 대가 없이 모두 가져간다.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무단으로 가져가는 것이 바로 착취다. 자본가는 이런 착취의 결과로 이윤을 획득한다. 자본가들이 생산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이윤 창출에 성공하기 때문이다.[33]

마르크스는 이에 관하여 원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현대 문명이라는 생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노동자는 구조적으로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가 주도하는 생활 양식에 맞춰 살아가기에, 그것에 기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착취 구조가 어떠한 악의나 우연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본주의와 자본가의 생존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이 구조적 관점에서 자본가의 선의와 베풂으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온정주의나 자본가들의 사유 재산을 강탈하여 무상으로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배주의를 완고하게 거부하고 반대하며, 그것을 관념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여기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것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한다.[34]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러한 면모는 앞서 서술된 코뮌주의 선언에서도 충분히 언급되고 기존의 사회주의나 다른 정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지지만,[35] 블랑키주의자와 연방주의자의 인민 봉기인 파리 코뮌을 다룬 후기 문헌인 《파리 코뮌》, 또는 《프랑스 내전》(1871)[36]이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의 요청으로 강령을 검토하고 비판한 《고타 강령 비판》, 또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1875)[37]에서 더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코뮌주의 선언에서는 노동자가 정치 권력을 취득한 정부는 다양한 친노동자 정책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프랑스 내전》에서는 구체제적인 국가 권위를 파괴하고 오로지 민중의 의지에 의한 완전히 새로운 정치 형태를 도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파리 코뮌의 행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했다.[38] 《고타 강령 비판》의 체계적인 반박과 대안 제시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방향성을 틀림없이 설명하고,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평등에 대한 접근을 비판하며 실질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것은 형식적으로 불평등해보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은 그 평생의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엥겔스의 의견을 따라가는 편이 옳다고 여겨지며, 엥겔스 또한 마르크스 만큼 다방면에서 뛰어난 사상가였기에 수많은 문헌을 남겼지만,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뒤링의 철학을 비판한 《오이겐 뒤링 씨가 과학에서 일으킨 변혁》, 또는 《반뒤링론》(1878)[39]은 자주 오해의 대상이 되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을 잘 설명한 교과서격의 문헌으로 받아들여진다. 엥겔스는 유고인 《자연변증법》(1883)[40]에서 화학처럼 (당시로서는) 새로운 과학 분야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마르크스보다 세부적인 시사 문제에 민감하여 다양한 의견을 남기고 과학적 사회주의 계통의 여성해방주의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려면 우선 그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1880[41]

과학적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는 여러 방면에서 많은 방식으로 비판받지만, 그 이전의 사회주의를 종합하고 그 앞으로는 사회주의가 나아가야 할 명백한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코뮌주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철학으로 여겨진다. 별개로, 코뮌주의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 마르크스 본인은 이 코뮌주의마르크스주의라는 명칭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원래 코뮌주의라는 이름은 중세에 존재했던 기독교 코뮌(공동체)를 이르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었으며,[42]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은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요구하는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며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과학"이라는 본질을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국가에서 코뮌주의공산주의라는 오역된 명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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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아나키스트미하일 바쿠닌피에르-조제프 프루동상호주의적 아나키즘을 이어받고 연방주의, 블랑키주의과학적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을 주장했다.

창조의 열정은, 또한 파괴의 열정이다.

The passion for destruction is a creative passion, too.

《독일에서의 반동》, 1842[43]

바쿠닌은 초기에 민족주의를 토대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44]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그 구상을 버리고 자유권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제에 집중한다.[45] 바쿠닌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강력한 동의자로서 기본적인 원칙,[46][47] 사적 유물론[48][49]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옹호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논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바쿠닌은 모든 권위적인 방식의 사회 변혁을 거부한다. 그리고 초, 중기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인 의회 전술정치 권력의 장악을 반대했다. 이는 바쿠닌의 후기 저서인 《신과 국가》(1882)[50]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루며, 이른바 온건주의자국가주의자들의 입장을 비판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게 보통선거로 생겨난 것일지라도, 모든 법률, 모든 권위, 모든 특권, 법적인 허가나 공적, 법적 영향을 부정한다. 우리는 이것이 다수의 이익을 거슬러 복속시키고 지배하는 소수의 착취자들에게만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는 아나키스트로서의 인식이다.

In a word, we reject all legislation, all authority, and all privileged, licensed, official, and legal influence, even though arising from universal suffrage, convinced that it can turn only to the advantage of a dominant minority of exploiters against the interests of the immense majority in subjection to them.

This is the sense in which we are really Anarchists.

《신과 국가》

바쿠닌은 사회적 계층과 특권, 경제적, 정치적 사유에 의한 기회의 불평등이 개인의 자유를 해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자본주의는 국가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력 속에서 현대의 자유가 유지된다고 주장하지만, 사람의 자유는 법과 강압에 의해서 강요되는 법적 권리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 따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는 자연 법칙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바쿠닌은 자신의 저서 《국가주의와 아나키》(1873)[51]에서 보듯이, 지배 계급의 정치 권력을 탈취하고 노동자가 그것을 새롭고 민주적인 형태로 재편성하는 것,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구체제의 권위주의적인 국가주의와 비교하고 반동적이라는 비판으로 그 둘을 동일 선상에 놓는다. 왜냐하면 정치 권력의 장악은 필연적으로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를 연장시키며, 이는 결국 통치의 형태와 환경이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쿠닌은 정치 권력의 탈취와 프롤레타리아 독재(혁명적 독재)를 옹호하지 않는다. 바쿠닌은 가장 강력하고 민주적이며, 반권위적인 인민의 직접적 봉기로 이루어진 혁명으로 국가와 정치 권력을 분쇄하고 모든 권위, 지배 체계를 없애버릴 것을 요구한다. 바쿠닌은 말 그대로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 《권위란 무엇인가?》(1871)[52]에 쓴 것처럼 스스로 존경하는 마음이나 필요한 지식을 존중하는 것은 자연 법칙에 의한 의사 표현이기에 권위가 아닌 개인의 영역에서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강요되거나 아예 독점되어서는 안 되고 언제나 그것을 다시 비판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3]

사람들이 몽둥이로 맞고 있을 때, 그 몽둥이가 민중의 지팡이라고 불린다고 해서 행복해하진 않을 것이다.

When the people are being beaten with a stick, they are not much happier if it is called 'the People's Stick'.

바쿠닌은 혁명의 과정에서도 무권위와 무정부성을 강조했다. 장래적으로 국가는 소멸하고,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만의 행정 능력을 요구하고 제공하는 노동조합적인 생산 조직으로 대체된다고 여겼기에, 각 지역에서 노동자 계급과 농민이 연대하여 국제 연방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쿠닌과 바쿠닌을 따르는 연방주의자들은 국제 노동자 협회, 제1차 인터내셔널에서 라살레파의회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방법론에 찬동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대립하며, 전혀 새로운 방식의 혁명 전술을 연구해냈다. 제1차 인터내셔널 시기의 바쿠닌과 연방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역할과 직접 행동을 옹호하고 인민의 민주적 자치와 사업장에서의 자주 경영(관리)를 강조했다.[54]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라살레파의 의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정치 권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정당이나 지도자를 통한 혁명 전술에 반대하는 개념이었다. 바쿠닌과 연방주의자들의 구상은 곧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관점이 되었으며, 다시 무권위주의이자 무정부주의인 아나키즘의 본질 원리에서 자리를 차지했다. 바쿠닌이 주장한 자유 본위의 철학은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55]에, 구체제와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는 허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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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부를 천명한 파리 코뮌

코뮌이 이러저러한 미숙함은 있었지만 코뮌의 가장 큰 업적은 코뮌이 존속했다는 것 자체였다. 그것이 자라나는 토양은 근대 사회 자체다. 아무리 살육을 한다 해도 그것을 짓밟아 없앨 수는 없다.

카를 마르크스

1871년 3월, 자코뱅주의블랑키주의자들, 그리고 연방주의자들이 모여 파리에서 정교(政敎)가 분리된 교육과 교육권,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보장, 노동조합, 결사의 자유와 하루 10시간의 최대 노동 시간 제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의 최저임금과 야간 노동 금지를 요구 및 주장하며, 코뮌 평의회의 출범을 선언한다. 진압군으로 파견된 정부군의 군인들은 명령을 거부하고 시민 운동에 동조하였다. 그렇지만 코뮌은 과격분자들의 테러리즘과 행정 체계 정비의 미숙함으로 오랫동안 존속할 수 없었고, 이내 지방에서 군대를 소집한 프랑스의 잔혹한 탄압과 민간인 학살로 같은 해 5월에 붕괴하였다. 파리 코뮌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혁명의 방향성과 귀감을 제시하였다. 코뮌 봉기 당시, 한 철도 노동자는 자신이 작사한 노래를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의 멜로디에 맞춰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인터내셔널가의 유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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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모습이 더는 바리케이트 양편의 시가전이라는 낡은 형태는 아닐 것이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50)[56]

의 독어 2판 〈서문〉, 1895, 프리드리히 엥겔스


비동시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온 아나키즘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두 경향 사이의 경쟁 관계는 노동 운동을 지배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는 국가적 사회주의(State Socialism)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맞수였던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인 아나키즘은 많은 국가의 노동 운동 진영에서 축출되었다. 반면, 19세기 말의 아나키스트[57]들은 상징적인 폭력 행동을 통해, 노동자 대중의 공고하고 장기적인 조직이 없어도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잘못된 전술을 통해, 반면교사로서 노동 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다. 한편, 1880년대의 급격한 경제 성장은 노동자 대중이 산업자본주의 체계의 틀 안에서 평화롭게 노동 조건을 개선시켜나갈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강화했다.[58] (…) 20세기 초, 유럽의 많은 노동 조합은 사회민주당들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자유노조,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의 노동조합들, 스페인의 일반노조(UGT), 스칸디나비아, 스위스의 노동조합 연맹들이 그러했다. 영국에서는 노동조합의 다수 세력이 의회주의적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노동당의 창당을 지지했다. 아나키스트들과 다른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에서만, 프랑스와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일부에서만 노동 운동 내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발췌1]


독일의 사민당파, 사회운동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당대 마르크스주의의 석학이었던 카를 카우츠키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근본으로부터의 철학적 변화를 요구하는 수정주의와 사회 변혁의 전술 변화를 요구하는 개량주의를 주장했다.[59] 카를 카우츠키는 생전 엥겔스와의 친교와 과학적 사회주의의 해석에 관한 자신의 업적을 앞세워 혁명은 역사적으로 필연이기에 자연 법칙처럼 당연히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대기론을 펼친다. 물론 이 대기론은 명백한 오독이었다. 카우츠키는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에 바탕하여 혁명이 올 시기를 예측하고 기다리면 된다고 주장한다. 베른슈타인은 역사가 선형적으로 발전한다고 이해하며,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면서 그것을 단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가상(假想)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노동가치론을 거부하고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가 고도화된 자본주의 속에서 자연히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계급투쟁을 자신의 이론에서 도외시하였다. 이 시점에서 베른슈타인의 구상 속에 남는 것은 착취의 철폐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즉 기성 정치 권력의 안배에 따른 소득 분배의 개선뿐이었다.[60][61] 베른슈타인은 뒤이어 정치 권력의 장악을 거부한다. 이는 새로운 체제로 정치 권력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는 후기 과학적 사회주의나 바쿠닌의 의견을 따른 아나키즘적 관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 권력을 취득하지 않고 정치 투쟁의 성격이 제거된 노동조합의 경제 쟁의와 사회 운동만으로도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른슈타인은 근본적인 모순이 있고, 그것을 해결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에 수정주의를 가하는 것을 옹호하며, 완성된 형태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온전한 계승이자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는 온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획일적으로 비판받았다. 다만 베른슈타인의 의견을 솔깃하게 받아들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내 기성 정치 권력에 편승하였다. 사회민주당은 원래 기계적으로 식민주의에 반대하다가 베른슈타인 이후 사회적 자본과 자선을 통해 각 식민지의 노동 환경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제국주의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쪽으로 돌아섰으며, 베른슈타인은 그에 더하여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훗날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세계화하기 위해 전세계의 비자본주의 국가를 식민지로 끌어들임으로써 문명화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생산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민지에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사회민주주의가 제공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동시대의 걸출한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강조하는 자유에 기초한 연방주의국제주의의 원리, 혹은 사회 발전 단계의 다양성을 인정한 민족해방과 대치되는 것이었다. 이후 20세기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아나키즘의 사상적 후예들과 다른 길을 걸었으며, 제1차 인터내셔널의 사상가들이 강조한 노동자 조직의 국제 연대를 외면한 채 민족주의국가주의, 애국주의에 경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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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제2차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각국의 입장에 따라 서로를 힐난하고, 자유를 수호하는 결전이라는 명목으로 일제히 찬전에 표를 던졌다. 본디 제2차 인터내셔널은 반전(反戰)에 결의했으나, 실제로 그것을 지킨 정당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찬전론자들에 대해 분개하고, 각자의 사정에 맞게 반전 운동을 시도했다. 특히 좌파주의자들과 동유럽의 혁명주의자들은 국가가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인민을 고통받게 하려고 한다면 총파업징용 거부를, 불가능할 경우 무장 투쟁을 동원해서 국가를 공격하여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는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1900)[62]를 통해 베른슈타인을 이론적으로 패배시킨 좌파공산주의자유지상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시조, 독일의 혁명가이자 여성 운동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도 있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산업 노동자들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쉽게 풀어 쓴 교재인 《정치경제학 입문》(1910)을 몇 권의 소책자로 출간했던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 또는 《자본의 축적》(1913)[63]에서 자본론의 구시대적인 담론을 새롭게 갈아치움과 동시에 비평하고 현대 자본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으며, 자본 축적을 토대로 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와 결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자 계급의 사회 운동을 조직, 체계화하고 돕는 무권위적, 자율적, 전위적 성격의 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은 블라디미르 레닌[64]의 혁명 운동을 주도하는 전위당과 다른 것이었다.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적 부르주아 여성 운동인 서프러제트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한다.

이른바 남성 특권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암사자처럼 행동하는 부르주아 여성들 대부분은, 참정권을 얻고 나면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반동 진영의 온순한 양으로 돌아갈 것이다.

Most of those bourgeois women who act like lionesses in the struggle against “male prerogatives” would trot like docile lambs in the camp of conservative and clerical reaction if they had suffrage.

《여성 참정권과 계급투쟁》, 1910, 연설[65]

그러나 이것이 룩셈부르크가 여성의 정치 참여를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 계급 여성이 정치 참여 운동과 계급투쟁에 참여하는 행위가 여성의 권리 신장에 부르주아의 일탈보다 훨씬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평가하며,[66] 노동자 계급 여성의 잘 조직된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하여 자신의 정치적 성숙함을 일깨우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67] 룩셈부르크가 서프러제트에 회의적인 것은 선견으로 동시대의 성해방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스트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클라라 체트킨은 자신의 입장을 통하여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왜냐하면 서프러제트는 실제로 원래부터 사회적 특권이 있었던 부르주아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였을 뿐, 노동자 계급이나 젊은 층의 여성들은 참정권을 얻기 위해 다시 투쟁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여성 해방의 척도는 자연히 그 사회가 일반적으로 해방된 정도의 척도이다.

In any society, the degree of female emancipation is the natural measure of the general emancipation.[원문_주해]

샤를 푸리에[68]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에서 전쟁 거부 운동을 펼치고 징병, 징용 거부 운동을 주도하다가, 반전 결의를 배반하고 전쟁을 지원한 독일 사회민주당에 반기를 들었던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이끌고 동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전후 스파르타쿠스 봉기에 참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사민당은 정규군과 당대 독일에서 백색테러를 주도하던 군국주의 사설 무장 단체자유군단을 끌어들여 초로의 노동자들로 조직된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민병대를 탄압했으며,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지도자인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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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지리학자이자 생태학자, 아나키스트 철학자이자 혁명가인 표트르 크로포트킨[69]은 자신의 저서 《빵의 쟁취》(1892)[70]에서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를 주장하였다. 크로포트킨은 진화론과 역사 발전에 관하여 《상호부조론》(1902),[71] 즉 생태계를 구성하는 종들은 모두 사회를 구성함으로써 발전하고 그것이 진화로 이어진다는 획기적인 이론을 제시한 바 있으며, 학계에서 맬서스주의자들과 사회진화론을 따르는 다윈주의자들을 전면적으로 청산해냈다. 크로포트킨 역시 아나키즘의 대부인 미하일 바쿠닌의 영향을 받은 코뮌주의적 혁명가였지만, 자신의 상호부조론에 기초하여 역사적인 대립물 사이의 투쟁, 즉 사적 유물론의 본질인 계급투쟁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혁명을 개별 개체의 사회적 열망을 권위가 억압하여 초래되는 생태 발전의 특수 단계로 풀이한다. 따라서 권위를 생물의 본성을 제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로 해석했으며, 인간의 생태계에서의 권위적 총체를 국가로 지목하고 인류라는 종이 존속하기 위해서 낡은 껍질인 국가 권위와 구체제의 도덕을 혁명으로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의 구상 속에서 생태의 자연스러운 발전 방식인 혁명은 구체제의 지배 계급이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통상적인 사회 변혁 운동과 계급적 쟁의를 통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크로포트킨은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나키 상태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억압된 인민이 자유롭게 행동하며 모든 권위에 반항하는 것, 그리고 그를 억압하고 강제하는 모든 힘을 힘으로 회피하거나 극복하는 것이다. 각 개인의 자유는 그 스스로가 이를 확보할 때에 만들어진다. (…) 혁명은 원리가 될 이상과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끔 하는 힘에 관한 문제다. 한 가정에서건, 한 작업장에서건, 전 세계에서건, 이상이 의지가 되고, 힘이 물리적 우월성이 된다면, 혁명은 사실로 실현할 수 있다. 실질적 사실의 영역에서, 지역적 의지는 혁명화 된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인민이 구체제를 수호하는 적대적 권력에 의한 금지나 복수를 걱정하지 않고 완전한 자유 속에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우리의 혁명이 정당들이 예언하는 것처럼 혁명들과 다른 것은, 우리 혁명의 결과는 공식적인 적군을 진압한 후 공식적으로 선언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혁명은 자유로의 길에 서있는 모든 개인의 반란의 개별적 승리의 총합으로 구성된 사실이 될 것이다.[72]

자신의 입장을 다진 크로포트킨은 이윽고 국가와 구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국가와 권위적 체계는 사람의 사고 방식을 제한하고 사회 변혁의 긍정적인 면에 대하여 사고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부터 국가를 일종의 섭리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우리가 받은 모든 교육, 가령 학교에서 배우는 로마 역사, 나중에 로마법이란 이름으로 공부하는 비잔틴 법전, 그리고 대학에서 가르쳐지는 각종 학문들 때문에 우리는 정부를 믿는 일에 익숙해졌고, 국가의 덕목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 미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철학 체계가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가르쳐졌다. 모든 정치도 이 원리에 기초해 있고, 당파가 어떻든 간에 모든 정치인은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정당에게 권력을 달라! 우리는 너무나 무겁게 억압했던 비참함으로부터 당신들을 해방시킬 수 있고, 그렇게 할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이 이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회학이나 법학에 관한 책을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한 번 들춰보라. 그러면 거기에는 정부, 정부의 제도, 법률 등으로 온통 가득 차 있어서, 정부와 정치가들의 세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언론 역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똑같은 것을 믿도록 가르친다. 모든 기사는 의회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정치적인 계략으로 가득 차 있다. 반면에 광범위한 일상적 삶은 단지 경제 기사를 보도하는 지면이나 경찰 보고서와 법률 사건을 다루는 지면에서나 볼 수 있다. 그래서 신문을 읽게 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존재들, 말하자면 인류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조차 해보기 힘들다. 태어나서 자라고 죽고, 슬픔을 알고 있고, 일하고 소비하는 수많은 사람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걸리적거리는 몇몇 인물들을 외부에 만들어 놓는데 이들은 너무나 과장되어 있다. 때문에, 전체 인류는 우리의 무지로 인해 확대되고 과장된 이 인물들의 그늘에 가려지게 된다.

《빵의 쟁취》

크로포트킨은 이미 정부의 개입 없이도 유지되는 지역 사회나 농촌을 예시로 든다. 그리고 매일 무수히 많은 상업 거래가 정부에게 분쟁 해결을 위한 법적 처리를 청구하지 않고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은 대의제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무능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의회주의 정치에서 정치인들은 자신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정책을 제정하고, 선거에서 자신들을 다수파로 만들어달라고 외치는 정치인조차 기회주의자로서 그저 정부가 더 많은 분야에 관여할 수 있는 더 많은 통제를 만들기 위해 움직일 뿐, 정작 자신의 고유한 의견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대의제 정부의 무능은 정치권의 존 스튜어트 밀처럼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조차 대중의 불만을 되풀이할 수 있을 정도라고 비판하며, 인류는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알고 있다고 덧붙인다. 각국의 거대 노동조합이나 국제적인 대기업의 범례에서 보듯이, 거대한 통신망과 대안적인 소통 방식으로, 법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 국가의 행정 체계를 이미 대체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와 공동의 자산을 되찾게 된 사회는, 자유로운 단체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를 추구해야 하고, 역사의 새로운 경제적 단계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조직을 추구해야 한다. 각각의 경제적 단계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단계를 가지고 있다.

《빵의 쟁취》

또한, 크로포트킨은 사유재산의 사회적 수용이 분배주의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을 비판한다. 설령 누군가 사회적 재분배를 통해 이익을 볼 수 있을지라도, 코뮌주의가 원하는 방향성은 생산물이나 사적 소유를 모조리 앗아가서 다시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물질적 부와 사회적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을 해체하고 그 엄청난 재산을 나누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73] 코뮌주의가 사회에 요구하는 바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게 사회적 조건을 제공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자유롭게 일할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며, 자신이 생산한 몫을 부르주아에게 넘겨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사회적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코뮌주의의 자치적인 공동 생산 체제를 만드는 일에 쓰이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부가 자신이 생산한 것의 절반을 세금으로 빼앗기지 않으면서 땅을 경작하는 날, 풍성한 수확을 위해 땅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기계들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독점 자본가가 아닌 공동체를 위해서 생산하는 날, 그 날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잘 입는 모습을 보게 되는 날일 것이고,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다른 착취자들이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생산한 것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임금을 받으려고 자기 노동력을 팔 필요가 없다.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는 좋다. 하지만 외부에서 로스차일드 같은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다. 어떤 사람이 중국에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다음 당신들 사이에 자리 잡는 일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 사람이 자기 주위에 하인들과 임금노예들을 거느리고서, 그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희생을 이용하면서 부유하게 사는 일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당신들은 세계 전역에서 동시에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국경에 세관원을 설치해서 당신 나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조사하고, 그들이 갖고 들어오는 돈을 몰수할 생각인가? 아나키스트 경찰이 여행자들에게 총을 쏘아대는 모습은 정말 볼만한 광경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아주 심각한 오류가 있다. 이런 식의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부자들의 재산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재산들은 애초에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으로부터 생겨났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런 빈곤한 사람들이 없게 되면, 그들을 착취하는 부자들도 더 이상 없다.

막대한 부가 생겨나기 시작하던 중세시대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봉건 영주가 비옥한 골짜기를 소유한다. 하지만 이 비옥한 골짜기에 사람들이 없는 한 영주는 부자가 아니다. 그의 땅은 그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달에 있는 땅을 소유하는 편이 낫다. 이 영주가 자신을 부유하게 만들려고 무엇을 할까? 그는 농민들, 가난한 농민들을 구할 것이다!

만일 모든 농민이 한 뙈기의 땅을 갖고 있고 지대나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면, 거기에다가 농사일에 필요한 도구들과 가축이 있다면, 어느 누가 영주의 땅을 경작하려고 하겠는가? 모든 사람이 자기 땅을 돌볼 텐데 말이다. 그러나 전쟁, 기근, 전염병 때문에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된 수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한테는 말(馬)도 없고, 쟁기도 없다. (…)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계속 부지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어떤 조건이든지 받아들일 것이고, 결국 땅을 경작해서 땅 주인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 역시 중세시대와 마찬가지로 농민의 빈곤이 땅을 선점한 자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빵의 쟁취》

크로포트킨은 더욱이 임금 제도를 거부한다.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나 집산주의자들은 노동 숙련도를 예로 들며 급여의 차이를 정당화하지만, 단순 노동이든 전문 노동이든 그것이 사회에 기여한 정도는 측정할 수 없으며 단순 노동이 전문 노동보다 사회에 기여한 바가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74] 크로포트킨은 이 과정에 집산주의를 비판한다. 화폐를 통제하고 그것으로 세금 징수 제도의 존속과 무언가를 사는 데 필요한 일정의 가치를 부여하는, 즉 자본과 경제적 통제를 어떻게든 유지하는 국가에, 노동전표, 또는 조합이 발행하는 교환 가치를 등치시키며 새로운 형태의 임금노예제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없앤다고 말하면서, 실상은 국가나 다를 바 없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소유를 통해 생산수단을 계속해서 사유재산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배고픔이 생산적인 활동을 만든다는 주장을 '혹독한 관리 감독이 없으면 그들은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던 노예제나 농노의 폐지 반대론에 비유하며, 자유로운 노동과 공동의 이익으로 하여금 개인의 이익이 보장된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일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양한 성격의 사회주의자들은 국가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분파 중에서 즉, 기질, 사유 방식, 특히 다가오는 혁명에 대한 확신에서 차이를 보이는 분파는 두 경향으로 구분된다. 한 쪽은 대부분의 국가 기능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대하고, 혁명을 위해 이용하면서 국가를 수단으로 사회혁명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이다. 다른 쪽은 우리와 비슷하게, 국가는 현대적인 국가체제 혹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국가체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본질 자체가 사회혁명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즉 국가는 자유와 평등에 근거한 사회 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발전을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적 형식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을 갖는 사람들은 국가의 개조 대신, 국가의 완전한 폐지를 추구한다.

《국가: 역사에서 국가의 역할》, 1896[75]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국가적 사회주의(State Socialism)를 비판하기도 한다. 크로포트킨은 소련 당시 전위당의 최고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서신을 보내어 볼셰비키가 보여준 위로부터의 혁명을 비판하고, 아래로부터의 혁명, 지역 세력의 참여와 노동자 농민의 자발적 조직으로 이루어진 사회 변혁의 신새벽을 강조했다. 한편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의 연대를 긍정적으로 여겨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와의 조화를 추구했다. 이와 같이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는 크로포트킨 특유의 낙관적인 구상이 비판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합리적인 핵심만이 취해져 수많은 아나키즘의 분파에 긍정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상호부조론은 정파와 좌우의 정치색을 가리지 않고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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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1차 세계 대전을 옹호할 당시, 반전과 징용 거부에 더하여 전쟁에는 전쟁으로 맞서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틈타 부르주아 국가를 상대로 내전을 일으킬 것을 주장한 러시아의 혁명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에 반기를 들고 자신들이 소속된 정당을 두 정파로 분열시켜 소수파인 스스로를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76]라고 자칭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77]이다. 레닌은 원래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에 앞서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 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78]가 정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2단계 혁명론의 신봉자였으나,[79] 점차 《무엇을 할 것인가?》(1901)[80]를 작성할 즈음에서는 베른슈타인과 사회민주당의 혁명에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자신의 노선을 적극적 혁명주의로 틀었다. 그러나 레닌의 볼셰비키주의[81]는 여전히 러시아의 후진적인 발전을 근거로 들어,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82]에서처럼 노동자 계급과 빈농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전위당의 일당독재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토대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보듯이 레닌은 여전히 2단계 혁명론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혁명에 대한 모든 논의가 이에 기초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후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을 정치적으로 지지해야 하는가? 전쟁 예산에 찬성표를 던질 것인가? 반정부 투쟁을 접고 '조국 수호'를 외칠 것인가?"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 물음에 레닌은 "아니! 당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 전쟁이어서가 아니라, 반동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 재분할을 위한 노예 주인들 사이의 싸움이다."라고 대답했다. 당대의 혁명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민족국가의 토대 위에서 유럽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로 변모함으로써, 발전해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제 수명을 넘겨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이에 레닌은 현대 유럽에서 발흥하고 있는 경제적 현상인 제국주의가 자본주의가 모든 힘을 다한 후 쇠퇴하기 시작하는 단계의 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발췌2] 이리하여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또는 《제국주의론》(1916)[83]을 발표한 시점에서부터, 레닌은 이제 자본주의가 최종 국면에 접어들어 하강과 부패의 시대에 돌입하였다고 믿었다. 반등의 시기나 불평등한 성장의 영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식민지들의 산업 발전과 이들에 기생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역산업화를 초래할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본주의는 쇠락할 것이고, 지속적인 불경기를 겪을 것이며, 주기적으로 경제공황을 맞이할 것이고, 반복적인 전쟁과 파괴가 뒤따를 것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자유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었다.[발췌3] 레닌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하여 1915년 3월, "사회주의자가 전술을 결정하는 데 있어, 누가 먼저 공격을 개시했느냐 또는 누가 먼저 전쟁을 선포했느냐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조국 방어, 적군 격퇴, 방어전' 등은 모두 인민 기만의 문구이다."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세 명의 도적(영국, 러시아, 프랑스)이 독일을 약탈하기 위해 무장했다. 주문한 새 칼을 세 명의 도적이 손에 넣기 전에 두 도적(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이 선제 공격한 것이 대단한 일인가?"라는 설명을 덧붙였다.[발췌2]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주의는 한동안 계급투쟁의 기조가 잠잠했던 러시아의 노동 환경을 따라 세가 줄어들었다가,[84] 전쟁이 터지기 전 몇 해 동안 새로운 사회 변혁 국면의 파도 위로 급히 상승했다. "쉬지 않는 투쟁, 저항, 계속적인 조직활동을 수행할 준비가 된 가장 열성적이며 대담한 분자는 바로 레닌 주위로 결집된 분자, 조직, 인물들이다." 러시아 경찰청은 이렇게 말하면서 전쟁 전 몇 년간 이루어진 볼셰비키의 혁명 운동을 개략적으로 묘사했다.[러시아_혁명사]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러시아의 혁명 운동은 거의 사그라들었다. 레프 트로츠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침묵을 강요당한 소규모 혁명서클에서 혁명사상은 아주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당시 “볼셰비키”라고 자기를 감히 소개하는 노동자는 아무도 없었다. 체포당할 수도 있었으며 후진 노동자들에게 몰매를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혁명사》

이때 의회에서의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의 찬전 여론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은 추방당하다시피 도피한 해외에서 러시아군의 패배와 이로 인한 국내의 혁명(혁명적 패배주의)을 주장했지만, 레닌의 선언을 공개적으로 대변한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러시아의 제정이 강요한 애국주의 기조에 멘셰비키나로드니키들은 러시아의 승리를 주창했다. 그러나 1914년 볼셰비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 선동을 연설과 유인물로 전개했다. 이에 제정은 비밀경찰을 풀고 공장통제위원회(Factory Administration)로 각 사업장을 통제하여 여론을 제한했다. 1915년 2월, 볼셰비키 의원단 대부분이 국가 반역죄로 재판에 넘어간 시점에서, 레닌의 의견을 대변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전쟁이 열정적으로 노동 쟁의를 했었던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을 새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것은 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계급의 인적 구성은 40% 가까이 바뀌어 있었다. 전쟁 전의 모든 당 조직들은 거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전쟁은 지하 혁명 운동을 황폐화시켰다. 의원단이 체포된 후 볼셰비키에게는 중앙 집중화된 조직이 하나도 없었다. 지역위원회는 간간이 존재했으나 노동자 지구들과의 관계가 종종 끊어졌다. 분산된 그룹, 서클, 고립된 개인들만이 활동했다. 그러나 되살아나는 파업 운동은 공장에서 이들에게 어느 정도 투쟁 의지와 힘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서서히 서로를 찾아내어 노동자지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하운동도 소생했다. 경찰청 문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사회민주주의 지하조직의 압도적 다수파였던 레닌주의자들은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하르키우, 키예프, 툴라, 코스트로마, 블라디미르주(州), 사마라 등 중심부에서 전쟁 중지, 정권 타도, 공화국 수립 등을 요구하는 혁명 유인물을 상당 분량 발행해왔다. 그리고 이 혁명 작업은 노동자 파업과 소요사태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었다."[러시아_혁명사]

2월 혁명 이후 해외 망명 중이던 레닌은 4월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혁명 운동을 펼쳤다. 볼셰비키는 한동안 혁명의 조류 속에서 신정부, 즉 러시아 공화국을 옹호하고 있었지만, 레닌의 생각은 달랐다. 레닌은 4월 테제를 반포해 급진적인 평화를 주창하며 러시아가 즉시 전선에서 이탈할 것과 국체(國體)를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이양할 것을 요구했다. 오랜 전쟁과 국가의 통제에 지쳐 있었던 2월 혁명 당시 노동자 계급의 물결은 레닌의 의견에 암묵적으로 찬성표를 던지고 있었다. 레닌은 같은 해 10월,[85] 볼셰비키와 볼셰비키에 찬동하는 노동자 혁명군을 이끌고 러시아의 주요 대도시를 무혈로 점거하여 러시아 공화국을 해체한 다음,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10월 혁명러시아 내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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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86]은 자신의 소책자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1924)[87]에서 볼셰비키주의의 정의와 탄생을 다음과 같이 개략적으로 풀이한다.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레닌주의는 일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이고, 특수하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과 전술이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옹호자인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펼쳐지던 시대에 활동했다. 이 시대는 발달한 제국주의 시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이미 한 나라에서 승리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소비에트를 열어 놓은 시대이다.

바로 이 때문에 레닌주의란 맑스주의를 가일층 발전시킨 것이 된다.

흔히들 레닌주의는 유달리 전투적이고 혁명적이라 한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레닌주의가 이런 특성을 가지게 된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로 레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태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흔적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레닌주의는 제2차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자라나고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와의 투쟁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마르크스, 엥겔스에서 레닌에 이르는 사이에 제2차 인터내셔널이 완전히 지배한 일정 시기가 있었다. 이 기회주의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이 레닌주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

스탈린은 볼셰비키주의의 본질을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에 적용될 수 있는 국제적 의의를 가진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술이라고 서술한다.[88] 《경제적 무질서의 문제에 대한 소부르주아적 입장》(1917)[89]이라는 글에서 레닌은 국가가 어떤 계급에 봉사하는지와 국가는 어떤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가를 분명히 하는 것에 대하여 저술했다.[원문_각주1] 그리고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1917)[90]에서 레닌은 "국가는 계급 지배의 기관이다"는 것을 강조했다.[원문_각주2] 또한, 자신의 글 《임박한 파국, 어떻게 싸울 것인가》(1917)[91]에서 레닌은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묻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조직이다.[원문_각주3]

그러나 볼셰비키주의가 이로서 실천론, 즉 혁명 전술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은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의 '이론' 장에서 그러한 주장을 비판한다.

이론이란 모든 나라의 노동운동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다. 혁명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空虛)하고, 혁명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적(盲目的)이다. 이론을 혁명적 실천과의 밀접한 연결 위에 세울 때 이론은 노동운동의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론, 오직 이론을 통해서만 운동을 확신할 수 있으며 방침을 결정할 수 있고 주위 사물의 내적 연관 속에서 운동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 오직 이론을 통해서만 오늘날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제 계급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로 향해 가는지를 깨달아 실천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만큼 다음의 유명한 명제를 셀 수 없이 말하고 되풀이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혁명 이론 없이는 혁명 운동도 있을 수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92]

레닌은 누구보다도 이론의 막중한 의의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당이 수행하게 된 국제 노동계급의 전위투사의 역할에 비추어 볼 때, 또 우리 당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의 복잡성에 비추어 볼 때 이론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레닌은 일찍이 1902년에 우리 당의 이 특수한 역할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필요를 절감했다.

가장 선진적인 이론에 의해 지도되는 당만이 전위투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당의 역할에 대한 레닌의 예언이 이미 실현된 지금, 별도의 증명은 필요 없이 레닌의 이 명제는 각별한 힘과 중요성을 갖는다.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

스탈린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인용하며, 볼셰비키주의의 기본 전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관한 레닌의 이론은 세 개의 기본 명제에서 출발한다.

첫째 명제. 금융자본이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지배적 지위를 갖는다. 주식과 증권을 발행하는 것이 금융자본의 가장 중요한 업무이다. 원료산지에 대한 자본수출이 제국주의의 기초 중의 하나이다. 금융자본이 지배한 결과는 금융과두제의 무제한적 권력을 낳았다. 이러한 것들은 독점자본주의의 심각한 기생성을 보여주며 자본주의적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의 압박을 백배나 더 가중시킨다. 노동계급의 자본주의적 토대에 대한 분노를 격화시키며 대중을 자신의 유일한 구원의 길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끈다.

여기서 첫 번째 명제가 나온다. 자본주의 나라 내부에서 혁명적 위기가 날로 첨예화되고 종주국 국내 전선(戰線)인 프롤레타리아 전선에서 폭발적 분위기가 높아진다.

둘째 명제. 식민지 및 종속국에 대한 자본수출이 격증한다. 세력 범위와 식민지 영토가 확장되어 전 지구를 포괄한다. 자본주의는 극소수 선진국과 세계 대다수 식민지 인민으로 대립되며 선진국이 식민지를 금융적으로 종속시키고 식민지적 억압을 하는 세계적 체제로 전환한다. 이러한 것들은 한편으로는 분리된 민족경제와 민족영토를 세계경제라는 단일한 연쇄 고리로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상의 인구를 두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한 진영은 극소수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로 광대한 식민지 및 종속국을 착취하고 억압한다. 다른 진영은 대다수 식민지 및 종속국으로 제국주의적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두 번째 명제가 나온다. 식민지 국가에서 혁명적 위기가 첨예화되고 국제전선인 식민지 전선에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높아진다.

셋째 명제. 세력 범위와 식민지를 몇몇 국가가 독점한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불균등하게 발전한 결과로 이미 영토를 차지한 국가들과 자기 몫을 요구하는 국가들 간에 세계를 재분할하려는 치열한 투쟁이 벌어진다. 세력 균형은 깨어지고 균형을 회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다. 이러한 것들은 셋째 전선인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전선(戰線)을 격화시킨다. 이 전선은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고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앞의 두 전선, 즉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전선과 식민지 해방 전선의 결합을 촉진시킨다.

여기서 세 번째 명제가 나온다. 제국주의 하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제국주의 세계 전선에 대항하는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동방의 식민지 혁명은 필연코 통일된 세계혁명 전선으로 연합한다.

레닌은 이 모든 결론을 한마디로 총괄하였다.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이다.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 《제국주의론》[93]

[참고]

레닌과 볼셰비키주의는 좋으나 싫으나 그 이후의 사회주의의 방향성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왜냐하면 레닌이 주도한 현실사회주의에 근거한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세계 혁명, 연방 체계는 혁명적 민주주의가 세계 패권에 다가간 전례없는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레닌의 특유의 권위주의적인 전위당과 국가주의적 사회주의 이론은 국가자본주의라고 비판받으며, 많은 반대자를 낳았다. 하지만 레닌을 옹호하는 파벌 또한 그 수가 많다. 스탈린의 표현대로 이런저런 결함 투성이였지만, 소련의 획기적인 성공은 볼셰비키주의 기조의 현실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볼셰비키-레닌주의나 자치권을 존중하고 각자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민족해방론의 영향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가미된 사회주의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만들었다. 레닌의 권위주의적 논리는 그 사후에 걷잡을 수 없는 우상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레닌 이후의 최고지도자 스탈린은 최대한 분권과 집단 지도 체제로 이를 막으려 했지만, 결국 우상화를 구국의 결단 취급하게 되는 역효과를 피할 수는 없었다. 스탈린은 이를 분명한 실패로 여겼다. 레프 트로츠키"레닌은 "역사 속에서는 항상, 피억압 계급의 명망 있는 혁명 지도자가 죽은 뒤, 그 적들은 그 이름을 피억압 계급을 속이는 데에 이용해 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레닌 자신에게만큼 이 역사적 작업이 지독하게 자행된 적은 없다."[발췌2]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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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에게는 강력한 반대자들이 있었으며, 아나키즘적 원리에 근거하여 사상적으로 볼셰비키주의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 러시아 내전 당시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나로드니키[94]처럼 개인적으로 무조직적인 반체제 테러를 저질렀지만, 조직과 조합의 중요성을 각성한 또 다른 일부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영향을 받아 볼셰비키와 백군을 모두 반대하는 반군을 일으켰다. 이들은 대개 흑군이나 좌익 반대파라고 불렸으며, 그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은 혁명 전위적인 아나키즘 조직을 형성하자고 주장한 정강주의우크라이나 자유지구였다. 정강주의, 또는 강령주의는 지금까지의 아나키즘 운동이 영세했던 이유는 이론의 부재와 잘못된 해석, 즉 무정부를 만드는 데만 성공하면 알아서 사회주의 사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관념론에 의지하기 때문이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아나키즘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계급투쟁의 전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조직을 형성하고 끊임없이 혁명 운동을 벌여야 하며, 아나키즘의 이상은 아름다운 유토피아도, 추상적 철학의 이데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우리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결코 공통된 혁명적 과업에 해롭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오히려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고 유용할 것이다.[95]



바쿠닌도 아나키스트의 총체적 조직이라는 개념을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조직에 대한 열망과, 그가 1차 인터내셔널에서 행했던 활동들은 바쿠닌이 이러한 조직의 열정적 투사라 바라보는 것이 합당하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사실상 모든 적극적 아나키스트 투사들은 분열된 활동에 대항하여 투쟁했다. 그리고 그들은 목적과 수단에서 단결로 묶인 아나키스트 운동을 갈망했다.

《자유지상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 1926, 〈서문〉[96]

《강령》[97]은 나아가 아나키즘은 어떤 사상가에 의하여 철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나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크로포트킨조차 아나키즘이라는 사상발명한 것이 아니며, 그저 인민 대중으로부터 아나키즘이라는 사상발견하고 널리 알렸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강령》은 아나키즘은 인본주의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아나키즘에 인본주의적 관념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짓이며, 이 인본주의라는 거짓은 아나키즘을 새로운 착취 수단으로 바꾸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령》은 단일한 인류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계급투쟁적 원리에 의해서만 아나키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아나키즘의 탄생, 개화, 실현은 노동자 계급의 삶과 투쟁 그 자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강주의는 아나키즘이 현대의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를 노동자 계급이 세상을 자유를, 독립성을,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로 변혁시키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대적 사회 변혁이 도달하는 바로 그곳에, 자유지상주의적 (즉, 아나키즘적) 코뮌주의가 있다고 설명한다. 《강령》은 사회에서 사회적 연대와 자유로운 개인은 최대로 드러나게 되며, 이 두 갈래의 이상은 완벽히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강령》은 물리적이건 지적이건, 사회적 가치의 유일한 창조자는 노동자라고 선언한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노동자만이 사회적 경제적 생활을 운영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강주의는 비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옹호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지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강령》은 비 노동자 계급이 자유지상주의적 코뮌주의 사회에 있다고 해도 어떠한 강제적인 의무를 부과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신 비 노동자 계급이 다시 여타 노동자 계급과 같이 생산적인 일을 하게 되고, 자신들이 어떠한 태생적 특권도 부여받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은 조건을 제공받는다는 것을 수용한다면, 사회가 자유로운 합의로써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구성원들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누리며 살고 싶어할 때에야 그 사회적 존재를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강령》은 현대적 부르주아 대의민주정 체제가 지배 계급의 통제 수단, 즉 사회가 노동자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두 계급의 혼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르주아적 사유의 근간이 되며, 이러한 혼합은 의회와 민족 대의 정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강령》은 민주주의가 공식적으로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단결의 자유, 평등 등을 법으로 규정하지만, 실제로 그 자유는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제정된 법적 제약, 즉 법적 권리들은 그것이 부르주아와 지배 계급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령》은 부르주아 대의민주정이 자본주의적 사유의 원칙을 불가침의 원칙으로 보존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부르주아와 지배 계급이 전체 경제를, 언론을, 교육을, 과학을, 예술을 통제할 수단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현 사회 구조의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나 그에 의탁한 사람들[98]을 사회의 주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국가와 대의민주정이 경제 생활권을 독점함으로써 부르주아는 정치권에서 무제한적 권력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령》은 결과적으로 현대적 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대의민주정 체제가 정치적 자유의 형상 뒤에, 허구의 민주적 보장 뒤에 숨은 부르주아 독재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로써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국가가 정치적, 시민적, 사회적 관계를 통제하며 구체제의 법을 수호하는 기구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강령》은 부르주아 대의민주정 체제에서의 법의 근간이란 대다수 인민이 소수에 예속되는 것이라는 명제가 앞선 전제에 더해지고, 이것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국가에 대한 정의가 완전해진다고 말한다.

국가는 부르주아가 확보한 조직된 폭력임과 동시에, 그 집행기구의 체계다.

《자유지상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

《강령》은 혁명 조직이 정치 권력을 취득해야 한다는 국가적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한다. 그들은 소위 사회주의적 권위노동자 국가를 평화적, 의회주의적, 또는 혁명적 방법으로 확보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아나키즘적 관점에서는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계급투쟁의 노동 해방적 성격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권위는 언제나 인민 대중의 착취와 예속에 의존한다. 모든 권위는 착취로부터 태어났거나, 착취를 위해 창조되었다. 폭력과 착취가 없는 권위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

국가와 권위는 대중으로부터 모든 주도권을 앗아가고, 창조와 자유로운 행동의 영혼을 죽이며, 그들에게서 복종을, 기대를, 사회적 사다리를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지도자를 향한 맹신을, 권위를 나누고 있다는 환상을, 노예의 심리 상태를 길러낸다.

그렇기에 노동 해방은 오로지 광대한 노동 대중의 직접적 혁명 투쟁과 자본주의 체계에 대항하는 계급 조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독일, 스웨덴, 벨기에 등의 사회민주당을 보라![a]

현재의 질서를 긍정한 채 평화로운 수단으로 사회민주당이 권력을 확보하는 것은 노동 해방이라는 과업에서 단 한 발짝도 전진하는 길이 아니다. 실질적인 힘,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권위는 경제와 정치를 통제하는 부르주아지에게 여전히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의 형태에서 사회주의적 권력의 역할은 체제 변혁이 아닌 개량으로 축소된다.

볼셰비키의 노동자-농민 국가를 보라![*a ] 사회적 봉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조직함으로써 권력을 확보하는 것 역시 노동의 진정한 해방이라는 대의에 전혀 복무할 수 없다.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어야 할 국가는 그 자신의 필요와 성격에 따라 불가피하게 왜곡된다. 국가는 그 자체로 목표가 되고, 특정한 특권 계층을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권위와 국가를, 언제나의 대중에 대한 폭력적 예속과 착취를 재확립하게 된다.

《자유지상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


사회 혁명의 핵심적 세력은 도시 노동계급, 농민 대중, 그리고 전문 노동자와 지식인들[b]

의 일부이다. 전문 노동자와 지식인들[b]은 도시,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방식으로 착취되고 억압받고 있지만, 전문 노동자와 지식인[b]들은 노동자와 농민에 비해 단결력이 약한 경향이 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가 전문 노동자와 지식인들[b]에게 노동자와 농민에 비해 경제적 특권을 허용하여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문 노동자와 지식인[99] 계층의 가장 불우한 일부만이 사회 혁명에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다.

《자유지상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

《강령》은 아나키스트로 이루어진 혁명 전위 조직의 근본적 과업을 노동자와 농민들을 사회 혁명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지목한다. 부르주아 대의민주정을, 권위와 국가를 거부하는 데에서, 노동 해방의 완성을 선포하는 데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계급 투쟁의 철저한 원칙을 강조해야 하며, 대중의 계급의식과 혁명적 비타협성을 갖추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등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의식을 각성시키고, 사회 혁명 운동을 일선에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과학적 사회주의에 의하여 거대한 혁명 대오의 일선에서 배제됐던 농민 조직과도 함께 국가 권력으로부터 탈피할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강령》은 아나키즘이 혁명의 가장 강력하고 급진적인 이론적 추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것이 국가주의 정당들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정치적 지도자성과 동일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인민을 선동하는 지도자성은 결국 혁명 속에서 국가 권력을 낳을 뿐이라는 것이다. 《강령》은 아나키즘적 혁명 전위 조직의 목적이란 인민 대중이 혁명의 방향성을 고르는 것과 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돕고 헌신할 따름이지,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강령》은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나 볼셰비키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한다. 《강령》은 기성 정치 권력을 취득하는 것을 완고하게 반대하며, 구체제 위에 쌓아올려진 모든 권위적인 도덕과 지배 체계를 혁명적으로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아나키즘이 고통받는 대중의 대변자가 되고 싶다면, 사회 혁명의 깃발이 되고 싶다면, 아나키즘은 옛 체제의 흔적 위에 강령을 두어서는 안된다. 이행기라는 기회주의적 경향들처럼, 근본적 원칙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을 가장 날카롭게 발전시키고, 적용시켜야만 한다.

《자유지상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

이어 《강령》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적극적으로 연대할 것을 촉구한다. 《강령》의 관점은 구체제의 권위적 지배 체계를 혁명적 노동자 조합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얼핏 보기에 진보처럼 보이지만, 아직 이론적 태동기에 있으므로 기회주의개량주의에 이끌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주의는 얼마든지 아나키즘적인 방향성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으므로, 일반적인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등에서 아나키즘적 혁명 전위 조직이 쟁의와 사회 운동을 선도하는 것처럼, 혁명적으로 발전할 씨앗이 심어진 노동자 조합을 적극 아나키즘적 노동자 조합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강주의는 아나키즘적 열정에 근거하여 모든 권위를 반대한다. 연방주의의 원칙에 근거하여 국제적 연대, 단결과 혁명에 대한 모두의 책임을 요구한다. 정강주의는 아나키즘적 열정에 근거하여 모든 중앙집권화를 반대한다. 《강령》에서의 원칙에 근거하여 이론적 단결을 요구한다. 산발적으로, 동시에 조직적으로, 일치단결한 전술과 이론에 근거하여 혁명을 일으킬 것을 요구한다.[100] 정강주의는 동시대의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볼셰비키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정강주의자들의 《강령》을 위시한 조직적인 혁명 전술과 사회 변혁 운동은 (아주 미세한 사조직을 제외한다면) 혁명적 노동자 조합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고, 역사상 대부분의 아나키스트 반란은 점조직과 개인에 의하여, 말하자면 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속적이고 무의미한 소요 사태와 "혼란주의, 무질서주의 타도"라는 명분을 내세운 볼셰비키의 계획적인 아나키스트 탄압이 이어지자, 정강주의는 아나키즘의 아직 다듬어질 필요가 있는 조직적 혁명 전술로서 자리잡았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자치구는 볼셰비키의 배신과 침공으로 결국 몰락했고,[101]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자신의 혁명적 저술을 역사에 남김으로써 유럽의 서쪽 끝에서 준비되고 있었던 새로운 혁명의 반석이 되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나키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레닌 사후의 레닌주의는 크게 이오시프 스탈린마르크스-레닌주의레프 트로츠키볼셰비키-레닌주의로 분파되었다. 하지만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사상이 서로 크게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정권을 잡고 레닌이 생전에 비판하지 못했던 점들에 대해서 대안을 선택하며 트로츠키와 유사해졌고, 트로츠키는 처음부터 볼셰비키주의와 레닌의 사상을 비판하며 스탈린과 유사해지고 있었다.[102] 잘 알려진 일국사회주의연속혁명론의 대립은 사실상 후대에 붙여진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1936)[103]에서처럼 스탈린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고, 스탈린도 말년에는 트로츠키의 정치적 행보에 관심을 가졌지 트로츠키의 사상 자체에는 크게 눈여겨보지 않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미 스탈린이 시행할 일국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의 초안을 제시하고 추진했으며,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주장할, 서유럽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의 산업적 기반을 다졌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차이점이 있다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으로 세워진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어떠한 방향성으로 나아가야하는가? 뿐이였다. 스탈린은 먼저 소련의 혁명을 완수한 뒤에 세계혁명을 이룩하자는 입장이였지만 트로츠키소련은 단지 혁명의 전초기지일뿐이며 지금 당장 세계혁명을 위해 움직여야한다는 입장이였다. 스탈린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회주의 딱지를 붙인 국가주의자나 민족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트로츠키의 볼셰비키-레닌주의제4차 인터내셔널에 영향을 주었다.[104]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스탈린주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트로츠키주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소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바리케이드로! 바리케이드로!

¡A las Barricadas! ¡A las Barricadas!

민중 가요, 바리케이드를 향해

스페인 제2공화국1936년으로 다가올수록 많은 정치적 변화점을 가지게되었다. 팔랑헤[105]을 위시로한 파시스트세력은 물론 카를리스타와 같은 전통적 중세주의자들, 일반적인 보수주의자, 알폰소 왕당파, 지주와 자본가들의 연대도 있었으며 이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106], 스탈린주의자,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POUM등), 사회민주주의자등 많은 세력이 난립하는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권은 CEDA를 위시로 하는 보수세력이 정권을 차지하였다가 아스투리우스 광부 노동자 파업의 강제진압등 보수주의적 억압을 보이며 좌파들의 연대를 만들었다. CNT의 생디칼리슴당, 통합마르크스주의노동자당, 스페인 사회노동당, 스페인 공산당등의 좌익 세력이 연대하여 인민전선을 구축하였고 이들은 정말 가까스로 선거에서 승리하게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에 보수세력은 불만을 가지게되었고 결국은 1936년 7월,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위시한 팔랑헤당국민전선파에스파냐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반좌파, 반민주의 기조 아래 전국의 파시스트왕당파를 끌어들여 에스파냐 내전을 시작했다. 에스파냐의 공화파, 소련의 지원을 받은 코뮌주의 정부, FAI(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대)가 이끄는 CNT(전국 노동 연맹)의 민병대는 인민전선파의 대오를 형성하여 에스파냐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국민전선파에 맞섰다. 그러나 서로 간의 불신과 공화파, CNT 지도부의 전향, 소련의 배신으로 인민전선파는 이미 전력의 차이에서부터, 내부적인 단결의 문제에서부터 열세였으며, 파시스트의 군홧발 앞에 하나씩 각개격파당하였다. 에스파냐 내전은 끝내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국가파시스트당 통합 팔랑헤의 승리로 끝났고, 좌파에게는 여전히 국제적 단결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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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이원론이라는 불합리한 개념을 버려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적대하는 두 개의 세상을 형성한다는 이원론적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편협함은 분리를 낳지만, 관대함은 화합으로 이끈다. 좀 더 너그럽고 관대해지자. 여성과 남성은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아니다.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무한한 헌신이다. 헌신은 스스로를 한층 풍부하게 하고 확신을 주며,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이런 태도만이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고 여성 운동의 비극적인 결과를 무한한 기쁨으로 승화시킬 것이다.

《여성 해방의 비극》, 1906[107]

미국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엠마 골드만아나키즘적 페미니즘의 종합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골드만은 아나키즘적 혁명을 옹호하며 사회 혁명 운동에의 집중과 선거 거부 운동을 주장하고, 애국주의와 도덕주의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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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은 민족 국가를 강화하고, 서구 지역에서 민주적 코포라티즘이라는 틀 안에서의 사회적 동반자성(정부, 기업, 노동조합의 협력)이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구권에는 공산당의 독재가 군림하기 시작했다.

《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2001[10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사회민주당이나 사회당, 노동당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하였거나 온건, 중도 좌파 성향의 정당들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조직하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노선과 완전히 결별하였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고데스베르크 강령》 이후부터 반공주의의 대열에 합류했으며, 그 밖에도 수많은 사민당 계열의 정당이 대중 정당이 되었다. 이런 실정에서도 기존의 혁명주의 노선을 고수한 것은 일부 소수 정당이나, 소련의 지원을 받은 정당들 뿐이었다. 유럽공산주의의 시작이었다.


냉전 시기, 제1세계제2세계에 대한 정보 통제와 경제적 제재, 그리고 반공주의적이고 매카시즘이 팽배한 억압적인 분위기에, 당대 청년층 사이에서는 국가에 대한 반감과 공산권에 대해 기묘한 낭만주의적이고 노스탤지어적인 관념이 자라났다. 이윽고 68혁명이 시작되면서 좌파 운동은 다시 한 번 활기를 얻었다. 금지함을 금지하는 자유지상적인 기조 속에서, 아무리 국소적일지라도 좌파적 진보주의의 색채는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원래 전형적인 전위당 독재 체제 하에서의 문화 탄압 운동이었다. 노동자 계급과, 특히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으로 농촌사회주의를 강조했던 마오주의는, 그리고 농민들에게서 혁명적 열정을 이끌어내고 지도해야 하는 공산당이 관료와 당군을 동원하여 민중을 선동하고 지역 사회와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정부도 이것은 본말이 완전히 전도되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마오쩌둥은 정부와 관료 집단이 혁명에서 손을 놓고 지식인 계층과 노동자, 농민을 선동하여 그들이 직접 봉기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이에 지식인 계층과 노동자, 농민 계급 출신의 청년들로 구성된 조반파가 후기 문혁의 주도권을 잡았다. 후기 문혁은 대약진운동이 어질러놓은 중국을 되살려 식량 생산량과 공장위원회의 도입으로 생산성이 올랐으며, 지식인들과 전문 인력이 지방으로 퍼져나가 농촌에도 지역마다 보건소가 1개씩은 설치되는 등 사회 정비 면에서도 일신을 이루었다.[109] 문혁은 후기로 갈수록 마오주의적 반관료투쟁이 격화되어 1967년 1월 시점에서는 조반파가 공산당의 통제를 거부하며 코뮌주의적 원리에 기초한 사회주의 자치구를 선언하고, 중국 남동부 일대의 성시가 이에 동조하여 반관료 봉기를 일으키는 1월 코뮌, 또는 1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1월 혁명은 같은 해 2월 마오쩌둥의 통제 명령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내 공산당 공격 금지가 발동되었고, 주자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혁명에 대한 문혁의 열정은 사그라들었다. 이후 중국에서 노동자 자주 경영과 사업장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지방 자치 코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89년의 천안문에서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1] 대개 자코뱅, 또는 자꼬뱅당은 소위 공포정치를 펼쳤던 산악파(급진 공화파)로베스피에르주의 파벌과 동의어로 쓰이는 예가 많지만, 산악파지롱댕(온건 공화파)은 모두 거대 정치 집단인 자코뱅당의 헤게모니를 두고 대립한 정치 파벌이었다.[2] 다만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인한 국내의 혼란에 대하여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은 견지하였다.[3]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의 관리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계획적인 인구 감축 정책을 펼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 또는 감정, 정념(Passion)[5] 사회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쓰인 것은 동시대의 여러 저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오언은 흔히 처음으로 사회주의자를 자칭한 사람으로 여겨진다.[6] 당시의 미국은 영국과 달리 공장 노동보다는 개척지를 이용한 토지, 운송 산업에 자본이 집중되어 있었다.[7]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림[8] 이 경구는 종종 "나에게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All things are nothing to me) "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오역이라는 추세이다.[9] #[10] #[11] 다만 역시 막스 슈티르너도 헤겔 좌파에 속하기에 유물론을 기반으로 두긴 했다. 다만 그 유물론에서의 해석에서 나는 존재하지만 다른 것이 실제로 존재는 하는가?로 귀결되기에 사실상 관념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에 관념론으로 분류되는 것이다.[12] #, #[13] 마르크스와 슈티르너가 만난 적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엥겔스는 슈티르너와 자주 교류했으며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모임은 젊은 철학자들의 토론회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슈티르너는 세심한 청중이었지만 본격적인 참여는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4] 반역, 반란 같은 레토릭이 사용되지만 이는 혁명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혁명은 결국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반란은 어떠한 체제든 체제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15] 하지만 소위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즘이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이러한 막스 슈티르너의 이론을 다르게 해석하여 노동조차도 개인의 취미로만 활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원시주의로의 회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벤자민 터커와 같은 이들은 그것을 아나키즘적 자본주의의 일면으로 해석하기도 하는 모습 등을 보였다. 물론 진짜 막스 슈티르너가 이러한 모습을 원했을 리는 만무하다.[16] 단 니체와 슈티르너의 사상은 구체적인 접근법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니체는 현실을 살아가는 자는 끝내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 억압을 감내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야지만 도덕적 극복자인 위버멘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니체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극복자로서의 자아는 시작부터 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억압을 극복함으로써 발현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위버멘쉬의 철학에서 이른바 유령은 극복을 위한 도구가 된다. 반면 슈티르너가 제창한 유일자의 철학은 사람이 애초부터 도덕적 극복자로서의 (자아)가 이미 내적으로 발현되어 있는, 이기주의자(에고이스트)라고 규정한다. 슈티르너한테 어떤 사람이 유일자로서 거듭날 데에 대하여 극복하게 되는 부분은, 단지 나를 억압하는 세상의 모든 유령이 허상, 즉 없다라는 점을 자각하느냐, 또는 그렇지 못하느냐 뿐이다. 그렇기에 유일자의 철학에서 유령은 도구가 아닌 그저 본질적으로 없는' 것, '의 부정으로써 소멸하게 되는 아주 빈약한 억압이 된다. 그렇기에 슈티르너는 모든 형태의 체제를 거부하는 반란을 옹호했으며 니체는 극복엄밀히 무엇인지 규정을 하지 않았다.[17] #[18] #[19] 또는 칼 맑스[20] 또는 엥엘스[21]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종래의 자본주의 연구와 사회주의 비판을 망라하여 출간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초가 되는 서적이다. 《자본론》(1867–1894, 1905–1910)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 생전에 책으로 나온 것은 《자본(Das Kapital): 정치경제학 비판》(1867) 뿐이었고, 나머지 2권 《사회주의 비판》(1885)과 3권 《경제학의 역사》(1894)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초고를 정리하여 출간했으며, 현대에 널리 읽히는 판본은 카를 카우츠키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4권 판본을 3권으로 나누어 출간하고 소련 시절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서신과 주해를 덧붙여 다시 출간한 것이 그 바탕이다.[22] 《The Capital》, 제1권, 제2권, 제3권[23] 《Das Kapital》, 제1권, 제2권, 제3권[24] 포이에르바하 본인은 이 유물론이라는 표현마저 싫어했다.[25] 이오시프 스탈린,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상권, 하권[26] #[27] #[28] 제1권, 제2권[29] #[30] #[31] 초기 과학적 사회주의의 분석적 토대는 사후 출간된 마르크스의 초기 문헌인 《경제학·철학 초고》(1844)에서 살펴볼 수 있다.[32] 공산당 선언이라는 번역이 더 퍼저있긴하나 엄밀히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번역하자면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서의 Partei는 정당의 느낌보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동맹이라는 느낌이기에 코뮌주의자 동맹선언, 코뮌주의자 선언등이 맞는 말이다. 왜냐면 마르크스는 (이후에는 바뀌었을지언정) 코뮌주의자 선언을 썼을 당시만 해도 공산당이란 전위당의 개념에서의 이였지 정치적인 정당으로서의 이 아니였기 때문이다.[33] #[34] 그러나 마르크스가 이런 비판을 퍼붓는다는 것은 일반인이 다른 사람을 고평가하고 칭찬하는 것과 꽤나 유사한 심리였다. 마르크스는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으며, 마르크스가 제대로 고평가한 것은 평생의 친구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나 철학적 아버지이자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지식인이었던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같은 매우 친하거나, 매우 존경하는 극소수 정도였다. 그마저도 엥겔스까지 마르크스의 공격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었고, 피에르-조제프 프루동과는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정도는 마르크스가 그들의 역사적 역할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셈이다.[35] #[36] #, #[37] #[38] 다만 마르크스는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기에, 후일 사회민주주의의 수정주의 논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39] #[40] #[41] #[42]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중세의 코뮌을 역사에서의 사적 유물론, 변증법적 단계를 통해 사회주의와 유사한 환경이 형성된 사례로 꼽기도 했다.[43] #[44] 앞서 인용된 《독일에서의 반동》에서만 하더라도 바쿠닌 초기 사상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45] #[46] #[47] 생산수단의 사회화, 불로 소득과 상속 재산의 폐지를 말한다. 통념과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는커녕 사유재산을 폐지하라는 주장조차 한 적이 없다. 비슷한 예로 마르크스는 소유권과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개인적 소유, 즉 점유의 개념만을 남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프루동에 대하여, 그럼 노동을 위한 생산수단과 사회 기반 시설은 어떻게 만들고 유지할 거냐고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요구한 것이지, 사유재산을 부정하지 않았다.("코뮌주의의 특징은 소유 일반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를 폐지하는 것이다."코뮌주의 선언(1848) 제2장 프롤레타리아와 코뮌주의자, #)[48] 특히나 그의 저서등에서 바쿠닌의 사적 유물론관을 볼 수 있는데 그는 관념론은 자유의지라는 개념아래 모든 자유를 굴복시키는 권위를 만들어 모든 인민들을 동물적 본능만 남은 노예로 만든다고 말했으며 유물론은 바로 그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대중들의 투쟁으로 만들어나가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한 진정한 자유를 만든다고 말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유물론은 동물에 불과했던 인간이 드디어 인간이라는 고등종으로 진화하는 철학이자 모든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자유를 세우는 인간의 철학이라고 말하였다.[49] 바쿠닌의 사적 유물론과 사회철학[50] #[51] #[52] #[53] #[54] 바쿠닌은 미래 사회에 대한 선견으로 룸펜 프롤레타리아, 즉 일정한 일자리가 없는 노동자 계급을 "빈곤과 착취 속에서도 살아가는 위대한 민중"으로 예찬하며, 그들의 조직화를 주장하기도 했다.[55] 아나키즘 문서에서 보듯이 자유지상주의는 아나키즘과 유의어이다.[56] #[57] 일리걸리즘에 하이퍼링크가 되어 있지만, 사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정강주의 이전까지의 아나키즘은 (심지어 바쿠닌까지도) 다음의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유지상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1926)의 〈서문〉에서 디엘로 트루다(노동 조직)는 이를 총체적 만성 조직부전으로 표현했다.#[58] A. Castel, De la Premiere Internationale a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Marseille, 1995), pp. 13-15.[발췌1] 《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2001), 바딤 다미예, 아나키스트 연대 역(譯)[59] 이에 기초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이 《에르푸르트 강령》(1891)이다. #, 원문[60] #[61] 《사회주의를 위한 전제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임무》, 1899[62] #[63] #[64] 또는 울라지미르 레닌[65] #[66] The irresistible progress of the proletarian class struggle has swept working women right into the whirlpool of political life. Using their right of union and assembly, proletarian women have taken a most active part in parliamentary life and in election campaigns. It is only the inevitable consequence, only the logical result of the movement that today millions of proletarian women call defiantly and with self-confidence: Let us have suffrage! , #[67] Today, it is the proletarian woman’s turn to make the capitalist state conscious of her maturity. This is done through a constant, powerful mass movement which has to use all the means of proletarian struggle and pressure. , #[원문_주해] 마르크스는 1844년 자신의 저서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코뮌주의 사회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데 샤를 푸리에의 같은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Though Rosa Luxemburg could not have known it, Karl Marx cites these same words in the third of the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npis of 1844 when he discusses the nature of communist society.) [68] #[69] 어문 규범은 표트르 끄로폿킨[70] #[71] #[72] #[73] “오, 사유재산의 수용! 나는 그게 무얼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람들에게서 외투를 모두 가져가서는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원하는 걸 가져갈 수 있고, 제일 좋은 외투를 차지하려고 자유롭게 서로 싸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실없는 조롱은 경박하고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외투들을 다시 분배하는 것이 아니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재분배에서 이득을 볼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엄청난 재산을 각자 나눠 갖자는 것도 아니다. #[74] 누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더 높은 보수를 요구할 수 있을까? 병을 발견해낸 의사가 그럴 수 있을까? 혹은 위생적인 간호로 환자의 회복을 도운 간호사가 그럴 수 있을까? 증기기관은 최초로 발명한 사람일까? 아니면 증기가 피스톤 아래로 흘러가도록 밸브를 열어주는 줄을 기계에 달린 레버에 동여맸던 소년일까? 어느 날 이 소년은 밸브 줄을 잡아당기는 일이 지긋지긋해져서 기계에 달린 레버에 그 줄을 동여맸던 것이다. 자신이 모든 현대적 기계의 본질적인 부품인 자동 밸브를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기관차를 발명한 사람일까? 아니면 탄력성이 부족한 돌은 기차 탈선의 원인이 되므로, 이전에 철로 밑에 깔아놓았던 돌 대신에 나무 침목들을 까는 게 좋겠다고 제안한 뉴캐슬의 한 노동자일까? 기차를 멈춰 세우거나 지나가게 하는 신호수일까? 아니면 기차를 한 선로에서 다른 선로로 이동시키는 전철수일까? #[75] #[76] 또는 볼쉐비끼[77] 또는 울라지미르 레닌[78] 현대적인 정당, 의회 정치 체계를 뜻한다.[79]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1905[80] #[81] 레닌주의라고도 알려져 있다. 볼셰비키주의라는 말 자체는 자코뱅주의처럼 볼셰비키라는 정치 집단의 총제적인 방향성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해서, 언제나 레닌의 입장(레닌주의)이 볼셰비키주의였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때는 볼셰비키 내에서 레닌보다 레프 트로츠키가 유명했던 시절도 있었기에, 트로츠키주의를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 현대에는 앞선 서술처럼 레닌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된다.[82] 같은 책. #[발췌2] A B C #[83] #[발췌3] #[84] 원문, 즉 러시아 혁명을 논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러시아 혁명사》(1930)에서, 책의 저자이자 볼셰비키의 핵심 인물이었던 레프 트로츠키는 해당 부분을 볼셰비키주의는 (러시아 계급투쟁의) 반동기에 잔인하게 분쇄되었다고 표현했다. #[러시아_혁명사] A B 1-1권, 1-2권, 2-1권, 2-2권, 3-1권, 3-2권, 부분 인용.[85] 구력이다. 현대적인 달력 체계로는 11월 7일이 된다.[86] 또는 이오씨프 쓰딸린[87]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88] 《레닌주의의 제 문제》,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89] #[원문_각주1] Lenin Collected Works, Progress Publishers, 1964, Moscow, Volume 24, pp. 562-564.[90] #[원문_각주2]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5, pp. 381-492.[91] #[원문_각주3] Lenin Collected Works, Progress Publishers, 1977, Moscow, Volume 25, pp. 323-369.[92] 전술됨. #[93] #[참고] 스탈린은 여기서 자신의 문장과 레닌의 문장을 번갈아가며 서술하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강조(쌍따옴표를 붙임)하였다. 이는 번역 원문에도 그렇게 되어 있지만, 발췌하면서 명제를 중심으로 강조를 이탤릭 처리로 변경하였다.[94] 소위 인민주의라고 말해지는 러시아내의 비(非)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이들은 처음에는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농촌계몽운동등을 시도했지만 생각외로 농촌들의 차리 지지도가 높자 실망하여 허무주의적 태도로 차르를 암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이들은 국가의 강력한 탄압으로 몰락했지만 이후 좌파 사회혁명당등으로 이어지며 그 기세를 이어갔으며 러시아 혁명에서도 볼셰비키와 같이 혁명주의자들의 한 편으로 섰다. 하지만 이후 급진적인 좌익 반대파의 입장에 있었기에 볼셰비키에서 대대적으로 숙청당한 이후 혁명적 공산당으로 개명되어 볼셰비키에게 합당되었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초기 강령에서 매우 조합주의적인 면을 볼 수 있다.[95] 미하일 바쿠닌이 작성한 《파리 코뮌》의 〈서문〉을 인용.[96] #[97] 같은 책. 동시대의 아나키스트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지상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을 《조직적 강령》 내지 《강령》이라 표현하고는 했다. 《강령》, #[98] 예를 들자면, 특히 정치인들.[a] 원문에서는 각주[b] A B C D 원문은 노동 인텔리겐챠[99] 원문은 인텔리겐챠[100] #[101] 자유지구가 볼셰비키당을 비롯한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102] #[103] #[104] #[105] 심지어 팔랑헤당도 우파와 좌파가 나뉘며 서로 싸우는 추세에 있었다. 우파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파시즘식 협동조합주의를 외첬지만 좌파는 아예 노동조합과 지방자치를 토대로한 직접민주주의의 노동조합의 전체주의 국가인 노동조합국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하였다. 그러나 좌파 세력은 내전이 일어나자 대대적으로 탄압, 탈당, 흡수당하며 유명무실 해지며 세력을 잃었다.[106] 심지어 당시 아나키스트들도 개량주의자냐, 팔랑헤 좌파와 연대하여야하느냐, 아니면 프로핀테른(당시 볼셰비키 주도의 국제 노동조합 연대)에 가입을 해보는 것이 어떠하냐, 아예 개량주의 정당인 생디칼리슴당을 만들고 선거에 나가서 공화국을 지원하는 것이 어떠하냐등의 여러 의견이 보이기도 하였다.[107] #[108] #[109] 물론 이것이 조반파만의 성과는 아니었다. 문혁 당시 홍위병들에게는 다양한 성격의 파벌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문화재를 파괴하는 홍위병이 잘 알려져 있듯이,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을 제지하는 홍위병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