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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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웨덴의 축구선수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경력을 다루는 문서.


2. 클럽 경력[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81년에 스웨덴 말뫼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유고슬라비아 이민자 출신으로 아버지 셰피크 이브라히모비치(Šefik Ibrahimović)는 보슈냐크계, 어머니 유르카 그라비치(Jurka Gravić)는 크로아티아계이다. 아버지는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이자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한 비옐리나(Bijeljina) 출신이며 어머니는 현 크로아티아 자다르 주의 슈카브르냐(Škabrnja) 인근 마을인 프르코스(Prkos) 출신이다. 6자녀 중 한 명이었던 즐라탄은 말뫼의 이민자 지구인 로센고르드에서 다른 2남 3녀의 남매와 함께 자랐다. 부모님 이혼 후 즐라탄은 주로 아버지와 살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은 말 그대로 시궁창이었고 누구에게도 어떤 케어도 받지 못했다. 대화할 사람도 없어서 혼자 중얼거리는 게 버릇이었다고. 그래도 아버지는 즐라탄을 지극정성으로 키웠고 술을 많이 먹었지만 즐라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발벗고 나서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자세한 건 아래에 서술.

즐라탄은 6세의 나이에 말뫼 BI와 FBK 발칸의 유소년 클럽들을 거치며 축구를 시작하였다. 10대 초, 말뫼의 주전이였지만 15세가 되었을 때, 말뫼의 부두에서의 근무를 부탁 받아 축구 경력이 끝날 뻔 하였으나, 감독은 축구를 계속 할 것을 지시하였다. 9학년까지 중학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즐라탄은 보리아르스콜라로 진학해 평균 이상의 성적을 받았으나, 축구에 집중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2.2. 말뫼 FF[편집]


1999년 스웨덴말뫼 FF[1]에서 데뷔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던 말뫼를 1부 리그로 끌어올리는 활약을 통해 명문구단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발재간이 뛰어난데다 경기장 밖에서 할 말 다 하는 그의 태도는 엄청난 스타성을 지녔다. 스웨덴에서는 이러한 원더보이의 활약에 열광했고 단순히 이빨만 센 게 아니라 경기력까지 좋았기에 많은 클럽들이 즐라탄의 영입을 타진했다. 아르센 벵거 감독 또한 매의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결국엔 아약스에 입단하게 된다.


2.2.1. 이적[편집]


사실, 즐라탄은 아스날의 9번 유니폼까지 받으면서 거의 입단이 성사되는 분위기였다. 계약서에 사인만 남긴 상태에서 아르센 벵거를 처음 대면했는데, 아직 즐라탄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 못한 벵거는 시간을 끌며 테스트를 원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아스날에 입단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즐라탄은 자신의 능력을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기에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축구화를 신고 테스트를 받겠다." 라며 응수했다. 그러나 즐라탄과 함께 아스날에 방문한 말뫼 FF의 하세 보리 단장이 즐라탄을 만류했고, 즐라탄은 "아스날이 나와 사인하고자 하는 생각이 별로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입단을 그만뒀다고 한다. 즐라탄은 사소한 문제로 틀어진 이적이어서 당시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 결정은 후회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잘한 결정이라고 회상했다. 사실 당시 아스날과 사인했으면 커리어에 흠이 갔을 가능성이 높다.

유망주가 기회를 많이 부여받는 최근의 아스날과는 달리, 당시 아스날은 01-02 시즌 더블, 03-04 시즌 무패 우승을 기록하던 막강한 팀이었다. 공격진은 이미 즐라탄이 훈련장에서 보고 가슴이 설렜다는 레전드 오브 레전드 티에리 앙리, 데니스 베르캄프가 주전이었고 여기에 서브 자원으로 프랑스 국가대표 실뱅 윌토르, 나이지리아 역대 최고의 레전드 공격수 은완코 카누가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당시엔 엄청난 유망주로 평가받던 잉글랜드의 프랜시스 제퍼스가 다섯 번째 옵션으로 있었던 상황이기에 이 막강한 선수층을 뚫고 즐라탄이 기회를 받았을 확률은 매우 낮다.

즐라탄은 아약스를 선택해서 빅리그보다 한 단계 낮은 레벨에서 이른 나이에 주전 기회를 잡고 차근차근 경험과 실력을 닦을 수 있었고, 유벤투스, 인테르를 거치며 익힌 이탈리아에서의 훈련방식[2]은 즐라탄의 기량을 만개할 수 있도록 했기에 즐라탄 본인에겐 아스날의 입단을 거절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기사


2.3. AFC 아약스[편집]


스웨덴 리그 역사상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아약스로 이적한 즐라탄은 마르코 판바스턴의 번호인 9번 셔츠를 받으며 엄청난 기대를 불러모은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부담으로 작용해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첫 시즌에는 리그에서 6골을 넣는데 그친다. 이후 로날드 쿠만이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반 바스텐이 아약스 유소년 코치로 돌아오면서 즐라탄과 교분을 쌓으며 플레이에 많은 조언을 해준다. 쿠만의 신뢰 아래에서 즐라탄은 적응에 성공하며 21골을 득점했다. 다시 빅클럽의 관심이 쏟아졌고 파비오 카펠로AS 로마가 관심을 가졌는데, 카펠로와 세리에 A에 정통한 판바스턴은 아직은 더 실력을 쌓아야 할 때라고 만류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도 연속으로 두 자리수 득점에 성공한다.

그러나 즐라탄은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고, 아약스의 선수관리 방식 역시 불만이었던 상태였다. 아약스의 네덜란드 선수들은 아약스를 거쳐가는 구단쯤으로 여겼고, 외국 선수들은 챔스 우승도 했던 명문팀에 들어와서 좋아하는 분위기라 팀 분위기가 이상했다고 한다. 이 문제에는 연봉 관련 불만도 일조 했는데, 아약스 이적 당시 에이전트가 없던 즐라탄은 하세 보리 말뫼 FF 단장의 말만 듣고 "좋은 조건이겠거니" 하고 쿨하게 사인했다. 하지만 이적 이후 확인해보니 주전 선수 중에 주급이 가장 낮았다. 이 일로 즐라탄은 아버지처럼 따랐던 하세 보리를 극딜하고 지금까지 까고 있는 중. 자서전에서도 한 챕터를 할당해서 디스했다. 거기다 루이 판할과의 갈등도 있었다.[3]

또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는데 2004년 여름에 있었던 네덜란드와 스웨덴의 A매치에서 즐라탄은 아약스의 주장이었던 라파엘 판데르파르트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렇지 않아도 즐라탄의 '나르시시즘적인 태도' 를 고깝게 여기던 네덜란드 언론은 팀 동료이자 주장이면서 자국 최고 유망주를 크게 부상을 입힌 즐라탄에게 집중포화를 했는데, 사실 평소 거만하고 팀 내 충돌이 많던 외국인 용병이 국가대항전에서 자국 최고 유망주이자 팀동료를 부상입히면 어느 나라 언론이라도 얌전할 수 없다. 당연히 즐라탄은 분노를 폭발시키며 팀을 떠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2.4. 유벤투스 FC[편집]


지금은 세리에 A의 위상이 많이 내려간 상태이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지금의 EPL에 밀리지 않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고 그 위상은 PL이 세계 최고로 올라섰던 2000년대 중반까지도 이어졌다. 칼치오폴리가 터지기 전까지는... 즐라탄이 유벤투스로 이적할 당시 세리에 A는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당시 유벤투스는 파트리크 비에라, 파비오 칸나바로, 에메르손 등의 기라성같은 스타들을 영입하고 감독으로 '우승청부사' 파비오 카펠로를 데려오며 세리에 A의 정복과 빅 이어를 들어올리기 위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미 유벤투스는 판타지스타 델피에로와 트레골 트레제게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 듀오를 데리고 있었기에 언론에서는 서드 멤버정도로 여겼지만, 파비오 카펠로의 지도 아래 즐라탄은 포텐이 폭발하며 주전 자리를 꿰찼다.[4][5] 말뫼 시절부터 감독은 물론 코치들에게도 이빨을 드러낼 정도로 한 성깔 하던 즐라탄이지만, 그 역시 일명 Il seregente di ferro(철의 교관) 파비오 카펠로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노회한 카펠로 역시 즐라탄의 성격을 컨트롤 할 줄 알았고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며 그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아약스에서 뛰던 당시만 하더라도 즐라탄은 깡마른 체격이었지만, 유벤투스에서 체계적인 식단관리와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20kg 가까이 벌크업 하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피지컬 괴물로 거듭난다. 또한 카펠로는 즐라탄을 골잡이로 만들기 위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만 움직이게 훈련시켰고, 점차 자신의 피지컬을 쓸 줄 알게 되면서 결정력이 일취월장한다. 즐라탄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유벤투스에서는 연습경기에서도 날 죽일듯이 달려드는 릴리앙 튀랑파비오 칸나바로를 벗겨내야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을 벗겨내더라도 뒤에는 잔루이지 부폰이 버티고 있었다. 내가 신참이라고 나긋나긋하게 대해주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항상 전력으로 연습에 임했다.[6]

"


이렇게 연습경기부터 불지옥 난이도인 상황이니 살아남으려면 이를 악물고 거기에 맞게 실력을 늘릴 수 밖에 없었다. 즐라탄은 첫 시즌 리그에서만 16골을 넣으며 그해 최고의 외국인 선수 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체중조절에 실패하면서 움직임이 둔해진데다 노련한 세리에 A의 수비수들이 더욱 물고 늘어져 리그와 챔스를 통틀어 10골을 넣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우승경쟁을 하던 후반기에는 폼이 올라와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넣으며 2년 연속 스쿠데토를 획득하지만 칼치오 폴리 때문에 흑역사가 되었다. 즐라탄을 신뢰하던 루치아노 모지는 영구 제명되고 유벤투스는 세리에 B로 강등된다. 새로 감독으로 부임한 디디에 데샹은 즐라탄을 잡으려 했지만 즐라탄은 시합 출전을 보이콧[7] 한 끝에 결국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한다.


2.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편집]


구단주 마시모 모라티의 적극적인 투자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인테르는 17년간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팀이었다. 사실 즐라탄이 유벤투스를 떠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을 때 적극적으로 영입에 관심을 보인 구단은 AC 밀란이었다. 아드리아노 갈리아니 단장은 매의 눈빛으로 달려들었고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구단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구단주가 직접 나서서 저녁 약속까지 잡을 정도였다. 그러나 즐라탄은 리그 우승을 오랜시간 못한 인테르에 가서 타이틀을 손에 넣고 싶은 언더독 마인드가 마음에 들어 인테르를 선택했다. 근데 사실은 호나우두가 뛰던 팀이라 더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인테르로 이적한 이후 즐라탄은 본격적으로 기량을 만개하기 시작한다. 유벤투스 시절까지는 완성되지 않은 선수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인테르 시절부터는 본격적으로 유럽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성장한다.

인테르는 언제나 뒷심 부족으로 리그 우승을 놓치는 팀이었는데, 즐라탄과 파트리크 비에라가 합류한 2006-07 시즌에는 그야말로 리그를 독주하며 마침내 뒷심부족을 극복하고 스쿠데토를 획득한다. 다음 시즌에도 인테르는 스쿠데토를 획득하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리버풀 FC에게 힘도 써보지 못하고 16강에서 광탈하면서 로베르토 만치니[8]가 사퇴하고 새로이 주제 무리뉴가 부임한다.

인테르로 부임한 무리뉴는 즐라탄의 사소한 일까지 챙기는 세심함을 보이는 반면, 훈련장과 경기장에서는 즐라탄이 아무리 멋진 플레이를 보여도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밀당의 고수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무리뉴의 스타일은 즐라탄의 승부욕을 자극했고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즐라탄의 기강은 완벽히 잡혀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주며 세리에 A를 씹어먹는 포스를 보여준다. 2008-09 시즌 내내 날아다닌 즐라탄은 리그에서 25골을 기록, 드디어 카포칸노니에레[9]타이틀을 차지하고, 즐라탄 이적 이후 인테르는 리그에서 3연패[10][11]를 달성한다. 이때 쯤 재계약으로 연봉이 올라서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선수가 되기도 했다.

당시 즐라탄의 포스가 어땠냐면 그때 세리에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크랙이라면 AC 밀란카카안드레아 피를로, AS 로마프란체스코 토티 정도가 있겠는데 챔스나 국제대회가 아닌 리그만 놓고 본다면 전성기의 카카피를로, 토티 조차도 즐라탄이 이끄는 인테르의 리그 독주를 깨부수지 못했다. 당장 리그 우승 기록만 보더라도 발롱도르를 타고 챔스를 씹어먹던 카카의 밀란 시절 리그 우승은 이적 첫 시즌인 2003-04 시즌 뿐이고 토티의 리그 우승도 카펠로가 감독으로 있던 시절인 2000-01 시즌 뿐이다. 이 시절 인테르는 즐라탄과 마이콘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12] 괴수급 포스를 보여준 리그와는 달리,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6강에서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맨유에게 탈탈 털리며 또 광탈을 하고 만다. 빅 이어에 목마른 즐라탄은 그 시즌 트레블을 달성한 FC 바르셀로나를 보고 "그래 이 팀이야"라고 마음을 굳혀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에게 정식으로 이적 요청을 하고 사무엘 에투와 현금을 포함한 역대급 스왑딜을 통해 인테르를 떠나게 된다.

당연히 인테르의 울트라스들은 시즌 막판 지속적으로 떠날 것이라는 속내를 비친 즐라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라커룸까지 찾아와 즐라탄을 만류하는 팬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즐라탄의 마음은 이미 바르셀로나로 굳혀졌고 야유하는 팬들에게 세레모니로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까지 하기도 했다. 막판에 좋지 않게 헤어진데다 훗날 즐라탄이 AC 밀란의 유니폼까지 입게 되었으니 인테르의 울트라스와 즐라탄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결국 즐라탄은 떠나게 되었고, 바르셀로나로 가는 즐라탄에게 주제 무리뉴"즐라탄, 챔스 우승하러 바르샤로 가는거냐? 근데 어쩌지?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는 인테르가 우승할거다." 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인테르는 정말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였다![13]


2.6. FC 바르셀로나[편집]



2.6.1. 2009-10 시즌[편집]


즐라탄-쿠티뉴, 바르사 '실패작' 베스트 11 선정

‘9500억 증발’ 바르사, 즐라탄부터 뎀벨레까지 실패 B11

2009년 사무엘 에투+4,000만 유로로 맞교환되어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에투는 엄청난 스피드와 높은 기술적 면모, 정확한 골 결정력을 가진데 반해 즐라탄은 헤더 능력[14]+창조적 패스+뛰어난 연계 능력을 갖춘 선수로 둘의 대비가 뚜렷한 데다 양쪽 모두 이적 전까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팀의 스타일도 그에 맞춰졌기 때문에 이 둘의 비교는 월척이 샘솟는 싱싱한 떡밥이었다.[15]

시작 초반에는 화려한 득점, 어시스트 행진을 이어가고 엘 클라시코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맹활약을 하나했더니... 2010년 들어 수많은 기회를 까먹으며 버로우, 스페인 언론은 최악의 부진을 보이는 즐라탄에게 비난하였다. 그러다 3월 말 경부터 서서히 되살아나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2골을 뽑아내면서 되살아나나 싶었더니 즐라탄이 빠지자마자 리오넬 메시가 4골을 작렬하여 즐라탄이 빠지는 게 더 낫다라는 소리를 듣는다.[16]

시즌 초반에는 즐라탄이 무시무시한 포스를 보여주면서 바르샤 팬들은 만족해했고 인테르도 에투 + 4,000만 유로로 팀 스쿼드를 강화시켰기 때문에 양쪽 모두 그럭저럭 만족해했다. 그러나 2009년 이후 즐라탄은 그 좋은 골 결정력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좋은 기회를 매번 놓치면서 까였고, 에투도 득점 가뭄으로 넌 사비 패스 빨로 먹고 사는 반쪽짜리 선수일 뿐이지라며 미친 듯이 까였다. 어쨌건 즐라탄은 2010년 3월 말부터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다시 점점 부진한 활약을 보이다 2010년 인테르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는 2경기 다 막장 경기력으로 인테르의 스파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굴욕을 당한다. 에투도 첼시와의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 결승골을 뽑아내면서 좀 숨통이 트이는 눈치. 다시 만난 4강전에서는 둘의 위치가 역전되어, 훌륭한 경기력으로 결승 진출에 기여한 에투와는 달리 즐라탄은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지 못한다. 아니, 패배의 원흉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즐라탄 본인도 답답했을 게, 인테르 시절이야 본인의 강력한 피지컬과 뛰어난 기술로 2선까지 내려와 중앙에서 공을 키핑하며 마이콘 등이 올라올 시간과 공간을 벌어냈는데 바르셀로나는 한 선수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공을 소유하는 성격의 팀이 아닌 데다가, 라리가의 심판은 즐라탄의 피지컬에 대한 이의를 휘슬로 너무 자주 제기했다. 또 모처럼 원터치나 투터치로 패스를 내지를 때는 티키타카와는 좀 동떨어졌다고 할까, 너무 창의적이었다고 할까, 그런 패스를 내줬다. 결국 오프 더 볼 움직임이 둔탁한데, 제공권 담보도 불성실하고, 피지컬로 승부 보기에는 라리가에선 휘슬을 불고, 공 소유를 오래 해서 팀의 템포를 죽이고, 빠른 패스는 티키타카 시스템에선 너무 창의적이었다. 그러나 이 능력이 바르셀로나 이외에선 탑으로 쳐주니 결국 바르셀로나가 발렌시아에서 다비드 비야를 영입하는 대형 이적이 발생했다. 물론 즐라탄이 팀에 적응하고 비야가 새로운 위치를 받아들인다면 비야-즐라탄-메시라는, 예전의 R-E-M에 못지 않은 엄청난 공격진이 완성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즐라탄의 입지는 크게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즐라탄이 결국 중앙으로 돌아오지 못하면서 이 꿈의 공격진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8월 28일 AC 밀란으로 임대가 결정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선 임대 후 이적 형태로 AC 밀란으로의 완전 이적이 결정되었다. 이적료는 2,400만 유로로, 이전 바르샤가 즐라탄을 사 올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솔직히 즐라탄 정도의 선수의 이적료로는 좀 싼 편에 속한다.

즐라탄은 펩 과르디올라 감독과 원수지간인 걸로 유명한데, 떠나기 전 과르디올라 감독을 향해 "감독이 나의 꿈을 망쳤다"라며 대놓고 디스하고 떠났다.[17] 바르셀로나에서 즐라탄을 버린 진짜 이유가 메시의 플레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지션이 완전히 겹치는 크랙을, 그것도 한쪽이 월등한 마당에 둘이나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서전 'I AM ZLATAN'에서 직접 밝힌 내용에 따르면 불화의 경과는 메시가 중앙에서 뛰고 싶다고 표출한 후에 과르디올라가 메시를 중앙으로, 즐라탄을 측면으로 옮김 → 감독에게 자신은 사이드가 안 맞는다며 포지션 변경 요청 → 과르디올라가 그때부터 본인을 개무시[18] → 챔스 탈락 후 라커룸에서 즐라탄 폭발[19] → 철제 락커를 쓰러뜨리고 과르디올라에게 메탈 상자를 던지며 한바탕 싸운 뒤 → 완전히 갈라섬 정도였다고 한다. 불화를 직접 대화로 푸는 스타일인 즐라탄에 비해 언짢은 일에 대해선 기피하는 스타일인 과르디올라 감독의 성격 차도 불화에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즐라탄과 바르샤의 결별 이유는 역할 차이가 크다고 한다. 다비드 비야는 2010-11 시즌 스쿼드에서도 왼쪽에서 뛰고 있으니 즐라탄과 비야의 경쟁 문제는 사실 크지 않은 셈. 더 큰 문제는 메시가 중앙에서 자유롭게 뛰는 것이 즐라탄이 중앙에서 뛰는 것보다 바르샤의 축구에 더 잘 맞았던 것이다.

초창기에는 바르샤 전술의 포커스가 전방의 즐라탄에게 집중됐고 메시도 잘 맞춰주었다. 즐라탄 역시 팀의 기대에 맞게 수많은 골을 넣어주며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즐라탄이 감독과의 문제로 잠시 부진해진 타이밍에 메시가 컨디션을 되찾고 미친 듯이 골을 퍼붓기 시작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당연하게 과르디올라 감독은 바르사 전술의 모든 포커스를 메시에게 돌렸고 메시의 활동 폭이 영역을 가리지 않게 되자, 자연스레 중원의 패스는 모두 메시에게 이어졌다. 메시 본인은 이전에 비해 훨씬 넓어진 활동폭으로 개인적인 성장을 이루어냈고 바르셀로나 역시 메시를 앞세워 최강 자리를 고수했다.

당연히 그전까지 팀내 득점 1위였던 즐라탄은 다시 중앙 자리를 요구했으나, 팀은 중앙에 즐라탄이 아닌 메시를 세우고 메시 역시 즐라탄 못지 않은 그러면서도 바르샤에 어올리는 모습을 보여줬기에 게다가 감독 본인의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즐라탄의 바르샤 이적은 망한 시즌이 되고 말았다.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즐라탄은 바르샤에서 메시가 받는 에이스 대접을 어디서나 받아왔던 선수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본인은 메시와의 경쟁에서 밀렸다라고 생각해 당황스러워 했던 것 같다.[20] 바르샤의 다른 선수들의 사정을 보자면, 메시에게 패스를 집중시켜 주지만 그 메시의 어시로 골을 넣기도 하고, 메시와 공존하고 있기에 아무 문제 없지만 즐라탄은 그것조차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클럽 입장에선 밀집 수비 등에서 상대를 뚫고 빠져나가는 경이로운 재능의 메시가 꼭 필요했고 팀 스타일에 더 잘 맞았다. 메시가 성장하면서 즐라탄의 역할을 모두 할수있게 되면서 더 이상 즐라탄이 바르샤에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새로 영입된 비야가 '메시와의 공존'을 중시하며 잘 적응해나가는 것만 봐도 즐라탄은 메시와 공존에 실패했기에 바르샤와 결별했던 것이다.

포지션 문제로 시작된 감독과의 전쟁이 곧 나머지 시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결국 즐라탄은 바르샤와 안 좋게 헤어지게 되었다. 메시에 대한 감정 역시 좋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으나 즐라탄이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된 마지막 순간까지도 메시와 즐라탄은 사이가 좋았고 불화도 한 번 없었다고 한다. 메시가 중앙 포지션을 원했단 것을 즐라탄도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사이좋게 지냈고, 지금도 여전히 서로에 대해 좋게 보고 있다는 모양. 아닌 게 아니라 이후에 PSG로 이적하면서 챔스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나는 일이 많아졌는데, 즐라탄이 메시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은 거의 다가 극찬이었고 메시가 부상당하자 빨리 돌아오라고 행운을 빌어주기도 했으며 경기 전 대기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을 때도 유독 둘만 반갑게 인사를 나누거나 수다를 떠는 장면이 자주 보여졌다. 오히려 메시와 호날두를 비교하며 호날두를 은근히 깔 지언정 메시에 대해선 좋은 말밖에 안했다.

바르셀로나에 있던 시절에도 메시가 즐라탄을 위해 자신이 얻어낸 PK 찬스를 양보해주기도 하는 등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즐라탄이 메시나 바르셀로나 선수진에 대해 언급한 발언들은 좋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도 항상 다른 선수가 아닌 리오넬 메시를 세계 최고라고 지목해왔고 인터뷰마다 칭찬했다. 심지어 자서전에서조차도 펩에 대해선 개객끼라고 잘근잘근 씹으며 온갖 욕을 다 해댔지만 바르사 선수들에 대해서는, '감독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정도로만 이야기할 뿐 그외의 비판은 한 적 없었다. 어찌보면 본인이 밀려나게 된 원인인 메시에 대해서도 자신과는 축구 외에도 여러가지 면에서 정반대의 선수이고 어릴 때부터 바르샤에서 자라와서 이 문화에 잘 적응되어있는 것 같다 정도로 묘사하고 오히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재적인 선수이자 세계 최고'라고 칭찬까지 했다. 거기다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즐라탄은 무려 6년 연속으로 메시에게 표를 던졌다. 심지어 메시보다 이니에스타가 더 주목받아야 된다고 지적했을 때에도 정작 즐라탄이 1등으로 뽑았던 사람은 메시였다. 이쯤되면 오히려 매우 친하다고 봐야 할 지경. 최근 챔스에서 만났을 때 화기애애하게 친목을 도모하며 악감정 따윈 없음을 인증했다. 막스웰의 증언에 따르면 둘이서 메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즐라탄이 메시 칭찬을 했으며 본인은 메시가 즐라탄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자존심이 강한 즐라탄도 메시 만큼은 인정하고 있기에 자신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선수 두 명의 공존이 어려웠다는 문제가 갈등의 주 원인이었음에도 정작 당사자들은 함께 있던 시절부터 이후까지 한결같이 잘 지내고 있으나 감독이었던 과르디올라와만 원수지간이 된 게, 단순히 전술에 대한 즐라탄의 불만만이 다인 게 아니라 (즐라탄의 주장에 따르면) 과르디올라의 태도 문제 혹은 두 사람의 성격차가 가장 큰 원인이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볼 수도 있다.

이적 후 전반기 시즌과 AC 밀란으로 임대 이후 날아다니는 즐라탄의 모습을 보면 펩과의 불화로 인한 심리적인 요인이 부진에 한몫한 것 같다. 게다가 부진을 만회할 새도 없이 기회도 없어졌으니 그리고 바르셀로나 구단의 약간 폐쇄적인 분위기 역시 즐라탄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됐을 것이다.

2009-10 시즌: 45경기 21골 11도움
라리가: 29경기 16골 7도움
UEFA 챔피언스 리그: 10경기 4골 2도움
코파 델 레이: 2경기 1골
FIFA 클럽 월드컵: 2경기 1도움
UEFA 슈퍼컵: 1경기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경기


2.7. AC 밀란 1기[편집]



2.7.1. 2010-11 시즌[편집]


2003-04 시즌 이후 스쿠데토를 따내지 못한 밀란은 리그 우승이 절실했다. 그리고 다시 이탈리아 무대로 돌아온 즐라탄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약하며 세리에의 왕다운 활약을 보여주며 기대에 부응했다. 밀란의 공격진에는 알레샨드리 파투호비뉴가 있으나, 사실 즐라탄을 대체할 수 있는 선수들은 아니기에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다시피 하면서 공격을 먹여살리는 활약을 보여주었다.[21]

즐라탄은 밀란 이적 이후 부터 본격적으로 타고난 압도적인 피지컬을 사용하는 선수로 변모했다. 아약스 시절과 유벤투스 초창기가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개인기에 의존하는 선수였다면, AC 밀란 시절부터는 피지컬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무게감있는 공격수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활동량은 여전해 이때 즐라탄은 진짜 미칠듯이 열심히 뛰었는데, 센터 서클까지 내려와서 뛰는 경기도 많았다. 그래서 경기 후에 지쳐서 구토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히기도 했다. 또한 점점 다크서클이 내려오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기대하던 밀라노 더비에서 인테르의 울트라스들은 열렬한 환영(?)으로 맞이해줬지만, 즐라탄은 인테르에 정이 남았는지 인테르는 까지 않고 바르셀로나와 과르디올라를 깠다. 밀라노 더비에서 활약 끝에 인테르를 이긴 후 과르디올라는 자신이 간디라도 되는 줄 안다 라고 깠다.[22] 그리고 AC 밀란은 시즌 마지막까지 혼전에 혼전을 거듭한 끝에 극적으로 2010-11 세리에 A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즐라탄이 뛰는 이탈리아 클럽은 무조건 리그를 우승한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러나 챔스에서는 16강에서 상대적으로 수비가 약하다고 평가받는 토트넘 홋스퍼 FC를 만나 이번에도 아무것도 못하고 통합 스코어 0-1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축빠들의 반응은 과연 즐라탄은 세리에 왕 세리에만 벗어나면 작아지는 즐라탄이라고...

다만, 10-11 시즌 즐라탄이 밀란의 에이스로 리그 우승 주역 중 하나인 것은 맞지만 냉정하게 보면 하드캐리했다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다. 일단 스탯은 29경기 14골 11어시스트로 준수한 편이기는 하나 인테르 시절이나 11-12 시즌보다는 떨어지는게 사실이고, 특히 인테르가 턱밑까지 추격해오던 리그 마지막 10경기에서 단 한개의 공격포인트도 올리지 못했다. 거기에 그 성질머리 어디 안간다고 29R 바리전에서 상대 선수를 팔꿈치로 가격해 퇴장당하더니 32R 피오렌티나전에서 심판을 가격해 또 퇴장을 당하면서 팀에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 즉, 밀란이 끝까지 선두를 놓치지 않고 우승을 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인테르에게 역전 우승이라도 내줬다면 되려 역적으로 몰렸을 상황. 혹자는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수상을 근거로 내밀지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는 대부분 리그 우승팀에서 수상자가 나오는 상이고,[23] 연말에 투표를 하기 때문에 11-12 시즌 전반기 무시무시한 득점 페이스를 보이던 즐라탄의 활약까지 반영된 상이라고 봐야 옳다.[24]

2010/11 시즌: 41경기 21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9
29
0
14
11
챔피언스 리그
8
7
1
4
0
코파 이탈리아
4
2
2
3
0
합계
41
38
3
21
11



2.7.2. 2011-12 시즌[편집]


2011-12 시즌, 알레샨드리 파투, 안토니오 카사노가 부상, 호비뉴가 평범한 공격수가 되어버리고 감독이 인자기를 쓰지 않으며, 미드필더진도 지독한 부상의 바람이 불어 젊은이 몇 빼고 늙은이들로 풀경기를 돌리는 상황에 이르자 혼자서 공격 작업을 전부 하는 초월적 능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역시 그 탓인지 리그 1위는 유베가 달리고 있다. 과연 세랴 킹에게도 리그 우승에 실패하는 시즌이 찾아올 것인가. 그러던 중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 산시로에서 열린 아스날 FC와의 경기에서 4-0 대승으로 벵거에게 멘붕을 선사했다. 코시엘니는 미친듯이 털리다 부상으로 교체되었고 아스날 수비의 최대 잉여라고 말해지는 요한 주루가 들어오자마자 더 털렸다. 즐라탄은 모든 골에 관여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전 유럽에 알렸다. 그리고 페널티킥으로 골을 넣고 결국 한 골까지 챙겼다. 골을 넣고 포효하던 그 모습은 그야말로 왕. 사실상 앙리의 고별전을 망쳐버린 주범.

최종 성적은 32경기에서 28골을 넣으며 생애 두 번째 카포칸노니에레에 오른다. 그렇게 밀란에서 커리어를 마감하나 싶었는데. 한국 시각 2012년 7월 13일, 티아고 실바와 함께 파리 생제르맹 FC로의 이적이 발표되었다. 둘의 이적료 총합은 6,200만 유로. 26년 만의 리그앙 우승을 노리는 PSG에게는 천군만마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그렇게 발표했을 뿐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에이전트가 발표했다. 오히려 아직은 갈 길이 멀다며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는 훼이크고 결국 공식 발표되면서 이적을 확정지었다.

즐라탄과 실바의 이적은 앞으로 겪을 밀란의 부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그다지 이적할 생각은 없어서 주급 협상 때 천문학적인 급료를 요구했고, 파리는 그걸 또 수락하였다.[25] 그렇게 즐라탄을 내보낸 밀란은....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6]

본인은 AC 밀란 시기를 커리어의 터닝 포인트로 생각하는듯 하다. 이는 맞는 말로 즐라탄이 바르셀로나에서 후반기 부진을 거듭하며 감독과 불화로 최악의 시기를 보낼때 밀란으로 가서 플레이 스타일을 갈아엎으며 다시 인정받는 시기였으니 말이다.그리고 즐라탄 스스로도 AC 밀란에 있던 때를 가장 좋았던 시기였다고 회자하기도 한다.[27]

밀란에 어지간히 남고 싶어 했는지 언론에다가 '밀란에 남고 싶었는데 갑자기 가서 좀 그랬다'라는 식의 기사도 나오는 편이다.에이전트인 미노 라이올라가 사실상 이적을 주도해서 이적했을때 한 달간 말도 안했다고.

이를 반영했는지 풋볼 매니저 2018에서 관계도에 좋아하는 구단이 AC밀란으로 설정 되어있다.[28]

2011/12 시즌: 44경기 35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2
32
0
28
6
챔피언스 리그
8
8
0
5
4
코파 이탈리아
3
2
1
1
0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0
1
0
합계
44
43
1
35
10


2.8. 파리 생제르맹 FC[편집]



2.8.1. 2012-13 시즌[편집]


파리 이적 후 특유의 전 소속 클럽 디스를 시전할 것이라 많은 해축팬들이 예상했지만, 예상 외로 밀란의 앞날이 잘되라고 말하는 등, 해축팬들을 데꿀멍시켰다. 밀란 시절이 이 선수에게도 각별했던 듯. 그럴만도 한 것이 실질적으로 커리어 사상 최대의 '실패' 라고 할만한 바르샤를 뒤로 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즐라탄에게 다시금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증명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된 계기가 AC 밀란에서의 활약이었기 때문이다. 파리 이적 후 프랑스 리그를 씹어드시고 계시는데 계속 해서 밀란 리턴 이적설이 뜨고 있다. 참고로 이적한 지 3개월도 안된 시점. 물론 찌라시일 뿐이며 일단 천문학적인 벌금을 물어야하는 베시민이 구단주인 밀란이 즐라탄의 이적료와 주급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밀란 매각설이 진지하게 흘러나오는 2015년 현재 프랑스 언론, 팬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는 즐라탄의 밀란 리턴설이 아주 진지하게 계속 새어나오고 있다.

파리 생제르맹 FC발렌시아 CF의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경기 막판에 퇴장당하였다. 그런데 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PSG 소속으로 유럽에 복귀한 데이비드 베컴에게 쏠려서..그야말로 들러리 신세가 되었다. 2-1의 아슬아슬한 리드인데다가 원정에서는 본인이 퇴장당함으로써 8강 무대를 밟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가 되었다.

그러나 항소가 받아들여져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골 1어시를 기록하면서 팀의 2-2 무승부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2차전에서 1-1 무승부, 원정골 규칙으로 탈락했다. 그래도 리그 우승, 리그 30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좋은 시즌을 보냈다. 그런데 우승 확정 후 라커룸에서 있었던 우승축하 파티 중 즐라탄과 레오나르두 단장의 말다툼이 생중계 중 포착되어 프랑스 전역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레오나르두 단장은 스트레스로 그날 밤 응급실에 갔고 이는 즐라탄의 악명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 되었다.

2012-13 시즌: 46경기 35골 1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리그 1
34
33
1
30
8
챔피언스 리그
9
9
0
3
7
쿠프 드 프랑스
2
2
0
2
0
쿠프 드 라 리그
1
1
0
0
0
합계
46
45
1
35
15


2.8.2. 2013-14 시즌[편집]


2013-1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32강 3차전 RSC 안데를레흐트 원정 경기에서 힐 킥 골, 중거리 슛[29] 골 등 무려 4골을 몰아치며 클래스를 입증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수많은 골을 득점하여 일시적이나마 호날두와 공동 득점 1위를 먹었으며 리그앙에서는 리그 득점왕을 달성. 리그 득점왕 대항마로 평가받던 에딘손 카바니는 즐라탄에게 밀려 자신의 본 포지션이 아닌 레프트 윙포워드 신세이고 라다멜 팔카오는 전반기에는 삽질을 거듭하고 한 술 더떠 겨울에는 태업성 플레이를 보이다 결국 부상으로 시즌 아웃당하면서 팔카오가 즐라탄의 거품을 벗겨줄거라던 팔카오 팬들을 데꿀멍시켰다.

그리고 2013년 연말 피파 시상식에서 푸스카스 상과 월드 베스트 11에 선정 되며 커리어 최초의 국제단체 수상을 하였다. 그동안 리그 내에서나 스웨덴 자체 수상에서야 리그 올해의 선수, 리그 베스트 일레븐, 스웨덴 올해의 선수 같은 타이틀은 밥 먹듯이 수상해봤던 즐라탄이지만 국제 유럽 무대 수상과는 꽤나 오랫동안 거리가 있었는데 선수 생활 중반기를 넘어 후반기에 들어선 시점에서 드디어 유럽 무대에서의 수상을 획득한 셈. 그 동안 국제 무대에서의 수상과는 지독하게 인연이 없던 즐라탄이었기에 이번 시즌을 계기로 드디어 즐라탄의 국제 무대에서의 운세가 트이나 하고 즐라탄 개인 팬들은 기대 중이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2차전에 출전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PSG는 1차전에서 3-1로 첼시를 완파해놓고서는 정작 2차전에서 첼시에 2-0 패배를 당하며 3-3 동률이나 원정골 우선 법칙으로 인해 4강 진출에 또 실패하는 비운을 맛본다. PSG에서 즐라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대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는 경기였다.

챔스는 아쉬웠지만 리그와 리그컵을 우승했고 시즌 41골을 넣으며 커리어 하이 시즌이 되었다.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한 뒤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AC 밀란이나 혹은 바르샤 그 이전의 즐라탄과는 스타일이 많이 달라진 편이다.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대단히 간결해졌고 자신의 최대 강점 중 하나인 킥력과 킥 정확성을 바탕으로한 상당히 효율적인 플레이를 구사하고 있다. 또한 신체 능력을 이용한 포스트 플레이는 여전하면서도 공격에 관여할 플레이메이킹은 전적으로 PSG의 2선과 3선 미들진에게 맡기고 자신은 거의 관여하지 않는 상황.

말 그대로 현재의 즐라탄은 득점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있는 상황이다. 이전처럼 프리롤로써 공격 전방위적인 측면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는 것. 그러나 그 대신 과거 쉬운 골을 자주 놓친다고 할만한 경우가 거의 없어졌으며 그 킥력과 신체 능력은 여전해서 여전히 아크로바틱한 골도 잘 넣는다.

사실 즐라탄의 이러한 스타일 변화는 신체 능력 변화에서 기인한다. 즐라탄은 본래 그 거구의 체격에도 불구하고 온 더 볼 상황에서의 첫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민첩성이 상당히 빠른 편에 속했는데 PSG에서의 12-13 시즌까지는 괜찮았으나 13-14 시즌부터 첫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민첩성이 대단히 둔해졌다.

또한 즐라탄의 드리블 패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리그앙 각 팀의 수비수들은 온 더 볼 동작 전환 상황에서 민첩성이 감퇴된 즐라탄에게서 볼을 좀 더 쉽게 탈취하기 시작했고 이로인해 결국 즐라탄은 자신의 드리블 시도 횟수를 줄이고 강력한 킥력과 여전히 사기적인 신체 조건, 킥 정확성을 바탕으로 플레이를 최대한 간결하게 시도했고 이러한 스타일 전환이 성공하여 원톱 자리를 노리는 카바니를 윙포워드로 제껴버린 채로 여전히 자신이 굳건히 PSG의 주전 원톱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고 싶어해 뛰어난 트래핑 실력을 과시할 요량으로 헤딩으로 볼을 처리할 상황에도 발부터 올리던 이전의 습성이 PSG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냥 이제는 헤딩으로 볼을 처리할 상황이면 헤딩으로 볼을 처리하는 편. 나이를 먹으며 신체적 민첩성이 죽었으나 그에 비례해 다음 상황에 대한 판단력이 대단히 높아져 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크게 문제시 되는 경우가 없으며 12-13~13-14 시즌의 즐라탄은 사실상 그의 커리어 하이라고 할 정도의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2013-14 시즌: 46경기 41골 1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리그 1
33
32
1
26
11
챔피언스 리그
8
8
0
10
0
쿠프 드 프랑스
2
1
0
3
1
쿠프 드 라 리그
2
2
0
2
0
트로페 데 샹피옹
1
1
0
0
1
합계
46
44
2
41
13


2.8.3. 2014-15 시즌[편집]


2014-15 시즌은 이전 시즌에 비해 약간 폼이 죽었다는 느낌. 물론 여전히 클래스가 살아있는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폼이 죽은 것은 시즌 초에 당한 부상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 즐라탄의 시즌 초 부상 때문에 팀은 시즌 중반까지 마르세유에게 리그 1위를 내주는등 삐걱거렸지만 즐라탄이 부상에서 복귀한 이후 다시 리그 앙을 씹어먹으면서 리그와 국내 컵대회 2개를 우승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부상 때문에 리그 24경기 19골로 3연속 득점왕에는 실패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8강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탈락했다.

2014-15 시즌: 37경기 30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리그 1
24
23
1
19
6
챔피언스 리그
6
6
0
2
0
쿠프 드 프랑스
3
3
0
4
0
쿠프 드 라 리그
3
3
0
3
1
트로페 데 샹피옹
1
1
0
2
0
합계
37
36
1
30
7


2.8.4. 2015-16 시즌[편집]


2015-16 시즌 즐라탄은 9라운드에서 마르세유에게 2골을 기록하며 파울레타의 PSG 역대 최다골 기록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러한 즐라탄의 활약에 힘입어 시즌 후반기까지 리그앙에서 27경기 무패를 기록하고 있다. 현시점 유럽 빅리그 중에 단 PSG만이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다. 심지어 바이에른 뮌헨도 분데스리가에서 패배를 했는데.. 이후 28라운드 리옹전에서 패배하면서 무패 행진은 마감되었다. 그래도 시즌 51경기 50골로 나이를 거꾸로 먹는 활약을 보였고 PSG 역사상 최고의 선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시즌 막판 즐라탄은 에펠탑 대신 자신의 동상을 세운다면 남겠다간지폭풍 발언으로 파리를 떠난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로 EPL 구단과 연결되고 있고 본인 스스로도 EPL 구단의 제의가 있다며 이적 가능성을 인정했으나 현재까지 행보는 오리무중인 상태다. 그러다 5월 13일 다음 경기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라며 자신의 SNS에 공식 발표하였다. PSG 고별전 예고 그리고 파리 생제르맹도 홈페이지에 그동안 헌신해줘서 감사하다며 소감을 올렸다. 오피셜 기사 이에 즐라탄의 다음 행선지에 자연히 관심이 쏠리게 되었는데, AC 밀란 복귀설, EPL 진출설, MLS 이적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2015-16 시즌: 51경기 50골 19도움
파일:Zlatan Ibrahimovic 2015 2016 230718.png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리그 1
31
29
2
38
13
챔피언스 리그
10
10
0
5
3
쿠프 드 프랑스
6
5
1
7
2
쿠프 드 라 리그
3
2
1
0
0
트로페 데 샹피옹
1
1
0
0
1
합계
51
47
4
50
19


2.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편집]


시즌 종료 후 다음 시즌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할 것이라는 소식이 여러 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유로 2016을 위해 스웨덴 국가대표팀에 합류한 이후 기자 회견에서 차기 행선지로 맨유로 이적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그저 웃음만 내보이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쯤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7월 1일(한국 시간), 즐라탄은 자신의 SNS 공식 계정으로 차기 행선지를 발표했다. 역시나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그리고 7월 2일 메디컬 테스트를 거쳐 공식 오피셜이 나왔다. 계약 기간은 1년+1년 연장 옵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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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알 시간이 됐다. 내 다음 행선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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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주제 무리뉴와 다시 한번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더불어 즐라탄이 극도로 싫어하는 펩 과르디올라가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한 상태라 그 어느 시즌보다도 맨체스터 더비가 뜨겁게 불타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여담으로 메디컬 테스트에서 맨유의 역대 최고 파워 테스트를 경신했다고 한다. #

그리고 본인이 등번호 8번을 원한다는 소식과 함께 8번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9번을 부여받았다. 원래 9번이던 앙토니 마르시알은 프랑스 국가대표팀에서 사용 중이며, 맨유에게는 의미 깊은 11번으로 변경했고 원래 11번이던 야누자이는 15번으로 변경되었다.


2.9.1. 2016-17 시즌[편집]


맨체스터의 신이 되겠다.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7월 31일, 즐라탄은 갈라타사라이 SK와의 스웨덴 투어에서 맨유 데뷔전을 치렀는데 경기 시작 4분 만에 안토니오 발렌시아의 크로스를 바이시클 킥으로 꽂아넣으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개막 1주일전 열리는 레스터 시티 FC와의 FA 커뮤니티 실드 경기에 선발 출전했는데 아직 호흡이 잘 맞지는 않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2선에서 루니가 잦은 턴오버를 범하는 등 제대로 된 패스가 연결되지 않아 최전방인 즐라탄이 고립되었고, 늘 그렇듯이 경기를 풀어주기 위해 2선 아래까지 내려오면서 특출난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80분경 발렌시아의 크로스를 헤더 결승골로 연결하여 중요한 순간에 본인의 클래스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골로 맨유의 승리와 함께 커뮤니티 실드 트로피를 획득하였다. 즐라탄의 29번째 트로피[31]이자,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 이어 잉글랜드에서도 트로피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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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본머스와의 1R에서는 중거리 슈팅으로 팀의 3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EPL 데뷔전 데뷔골. 그리고 이것으로 즐라탄은 챔피언스리그 데뷔전, 세리에 A 데뷔전, 라 리가 데뷔전, 리그앙 데뷔전, EPL 데뷔전에서 모두 골을 득점하는 진기록을 수립하였다. 이정도로 리그를 옮겨다니는 것도 드문 일인데다가, 옮기는 리그에서 족족 데뷔전 득점을 했다는 점에서 즐라탄의 클래스를 엿볼 수 있는 진기록이라 할 수 있다.

8월 20일 프리미어리그 2R 사우스햄튼과의 홈경기에서 전반 35분 웨인 루니의 크로스를 헤딩골로 연결하였고 후반 15분엔 루크 쇼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멀티골을 기록하였다. 팀의 승리를 이끌어내었다.

9월 10일 프리미어리그 4R 맨체스터 시티전에서는 아쉬운 경기력을 선보였다. 전반 41분에 클라우디오 브라보의 실책으로 얻은 애매한 기회에서 태권슛으로 득점을 올렸으나, 그것뿐이었다. 많은 득점 찬스가 있었지만 홈런, 소녀슛으로 죄다 날려먹었다. 교체투입된 래쉬포드가 쇄도하면서 날린 강력한 슈팅을 옵사이드로 무력화시키는 어이없는 위치선정은 덤. 사실상 스텟세탁만 한 셈이고, 복수한다던 펩에겐 1패만 더 적립했다. 홈런왕 즐병호라는 별명과 오발탄이라는 즐라탄과 어울리지 않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유로파리그 페예노르트 전에서는 후반전에 투입되었지만 강력한 프리킥을 제외하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팀의 패배를 지겨볼 수밖에 없었다.

9월 18일 프리미어리그 5R 왓포드전에서는 왓포드의 수비 미스로 두어번 중요한 골기회를 얻었지만 느린 속력과 상대방의 좋은 수비의 빠른 대처에 막혀버렸고, 레쉬포드의 크로스를 받고 다시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옆그물을 때려버렸다(...). 후반전 레쉬포드의 동점골에 기여하고 강력한 헤딩슈팅으로 골을 노려봤지만 상대편 골키퍼의 선방에 막혀버렸다... 결국 팀은 3:1 패배..

9월 24일 레스터 시티와의 프리미어리그 6R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루니 대신 후안 마타를 기용하여 좁은 공간에서 짧은 패스 연계를 통한 공격 전개와 빠른 역습을 활용한 역습 전술을 주된 공격 전술로 썼고, 즐라탄의 패스 능력과 넓은 시야가 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기존에 고립된 상태로 슈팅만 때리던 모습과는 다른 역할. 특히나 폴 포그바의 긴 패스를 훌륭한 제공권으로 받아내고 키핑하면서 공격의 방향전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기 후 무리뉴 감독도 '즐라탄이 공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급하면서 만족감을 드러냈다.

9월 30일 유로파 리그 2차전 루한스크 전에서 골을 기록하며 졸전을 펼치던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리그 7R 스토크 시티 전에서 몇차례 좋은 골기회를 모조리 날려 버리며 팀의 무승부에 일조했다. 파리 시절 보여준 그 좋은 골결정력은 다 어디로 간건지...

프리미어리그 8R 리버풀전에서는 공만 잡으면 오프사이드인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기다 상대팀 키퍼 카리우스의 실책덕에 나온 결정적인 찬스를 완전히 날려버리며 최전방 수비수(...)의 존재감을 빛냈다.

프리미어리그 9R 첼시전에는 홈런으로 끝난 두 개의 슈팅을 제외하면 경기에서 안보였다. 펠라이니가 중원에서 개박살나다 보니 위로 올라간 포그바도 공을이어받지 못하고, 이때문에 즐라탄이 내려와서 전개하려다보니 당연히 게임이 말려들어갔다.

리그컵의 맨체스터 더비에서 다시 한번 좋은 모습을 보이고 1어시도 기록했다. 맨유에서 가장 잘한 선수 중에 한 명이라고해도 될 정도.

그러나 프리미어리그 10R 번리전에서는 상대 골키퍼 톰 히튼의 미친선방에 막혀 다시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사실 즐라탄의 움직임이나 위협적인 슈팅, 제공권과 공격라인을 어우르는 연계력은 분명히 좋았다. 그런데 톰 히튼이 너무나도 위대한 선방을 보여버렸고 그 혼자 12개의 슈팅을 날렸음에도 무득점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하지만 즐라탄 본인의 폼도 안좋았었는대, 첫 슈팅을 때리는 마타의 꿀패스를 어이없이 선방으로 날려버렸고, 포그바의 좋은 크로스를 발끝만 대면 넣는걸 공중으로 홈런을 때리는등 확실히 넣어줄 기회도 놓친게 컸다.

유로파 리그 페네르바체에서도 골을 못 넣으며 부진을 이어갔다. 게다가 경기가 안 풀리자 제 성질을 못 이겼는지 상대 선수의 목을 잡는 추태까지 보였다.

프리미어 리그 11R 스완지전에서는 부진한 스완지를 맞아 멀티골을 기록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쏴올렸다. 스완지의 경기력이 매우 좋지 않긴 했지만, 시종일관 공중볼을 지배하고 2선과 3선까지 내려오며 훌륭한 스루패스를 찔러주며 전개하는 모습은 인상깊었다. 그 이전에 놓쳤던 쉬운 골도 이번에는 집어넣으며 딱히 아쉬움 없는 모습을 보였다.

프리미어리그 13R 웨스트햄을 맞아 초반 2분에 마크실수로 첫골을 먹혔다. 그러나 포그바의 크로스를 헤더골로 연결하며 득점에 성공했다. 그후에도 시종일관 웨스트햄을 압도하며 경기를 풀어나가서 무리뉴가 퇴장당한 이후에도 매서운 공격을 했으나 팀 전체가 결정력 부족으로 대차게 말아먹었다. 즐라탄도 직접 골문을 겨냥하기도하고 동료들에게 킬패스를 찔러주기도 했지만 결국 무승부로 끝이 났다. 그래도 동점골을 터트린 덕에 11월 동안 리그 3골 2도움으로 스텟만큼은 잘 쌓았다.

그리고 이어진 컵경기 웨스트 햄 전에서는 멀티골을 터트리며 팀의 승리를 견인했다. MOM급 활약은 미키타리안이 펼쳤지만 2경기 연속골을 터트려 폼을 끌어올렸다.

리그 14R 에버턴 전에서도 준수한 활약과 멋진 로빙 슛으로 선제골을 터트렸지만 펠라이니의 막판 반칙으로 PK를 내주고 팀은 리그에서 또 비기고 만다. 즐라탄 개인은 3경기 연속골을 터트려 훌륭한 폼을 보여줬지만 어째 팀은 하나씩 엇갈리는 중.

UEFA 유로파 리그 조별예선 최종전 조르야 전에서도 선발로 나서서 골을 기록하며 4경기 연속골을 터트렸다. 확실히 골결정력이 돌아와서 지금의 맨유에 큰 기여를 해주고 있다. 홀로 눈에띄게 경기를 지배하는 능력은 떨어졌지만 공격진에서 전두지휘하며 흐름을 이끌어주고 있으며 계속 골을 터트리며 승점을 보태주고 있다. 더 놀라운건 비록 활동량이 떨어지는 편이라지만 35세의 노장이 거진 전경기 풀타임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

12월, 리그 15R 토트넘 전에서는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크리스탈 팰리스 원정경기에서 전반전에서는 포그바의 골을 어시스트하고, 후반 막판 포그바의 패스를 받아 결승골을 기록, 팀의 2대1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웨스트브롬위치 알비온전에서는 경기 초반 헤딩골과 후반 초반의 중거리 슛으로 혼자 2골을 기록, 팀의 2-0 승리와 리그 3연승을 이끌었다! 게다가 어느새 리그 득점 3위까지 올라왔다. 리그 득점 선두인 디에고 코스타와도 2골차 밖에 나지 않고 최근 7경기중 6경기에서 골을 터트리며 물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날 2골을 포함해 최근 9경기서 10골 1도움을 기록하며 맨유의 10경기 무패 행진을 이끌고 있다.

리그 18R 선더랜드 전에서는 블린트의 골을 어시스트하고 본인도 결승골을 터트린 뒤 미키타리안의 원더골을 어시스트 하며 1골 2도움을 올렸다. 선더랜드의 골키퍼가 워낙 엄청난 기량을 과시하며 즐라탄을 포함한 맨유 선수들의 맹공을 모조리 막아냈기 때문에 골찬스를 많이 놓친 건 아쉽지만 절정의 폼을 보여주는 가운데 최고의 경기를 선보여 맨유팬들을 즐겁게 했다.

2016년 12월 31일, 프리미어리그 19R 미들즈보로전에서는 앙토니 마시알의 크로스를 멋진 발리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했으나 말도안되는 오심으로 취소당했다.. 하지만 후반 85분에 마시알의 동점골을 도우면서 2-1 역전승에 크게 기여했다.

다음 경기인 2017년 1월 3일에 펼쳐진 20R 웨스트햄전에서도 박싱데이의 여파로 많이 지친 모습이었지만 후반전에 에레라의 패스를 받아 득점을 기록하며 기록을 이어나갔다. 다만 위치는 오프사이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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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런 물오른 페이스에 힘입어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EPL 12월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2월 성적은 6경기 (5승 1무) 5골 3도움을 기록했다.

전반기까지의 평가는 새로운 감독의 이유있는 베테랑 영입이라 평할 수 있다. 새로 부임한 무리뉴 감독은 4-2-3-1, 4-1-4-1, 4-3-3 등 다양한 전술을 실험하였는데, 즐라탄 특유의 노련함과 경험이 이러한 실험들에 큰 힘이 되고 있다. 4-2-3-1 포메이션에서는 수비를 교란시키고 넓은 시야를 이용한 패스로 2선에 기회를 만들어주었으며, 4-1-4-1 포메이션에서는 특유의 빠른 발과 득점력을 십분 발휘하고, 4-3-3 포메이션에서는 훌륭한 연계 능력으로 래쉬포드 등과 부지런히 스위칭하며 기회를 만든다. 무리뉴 감독은 이러한 즐라탄의 성실성에 대해 '즐라탄은 득점을 하던 하지 못하던 팀에 꼭 필요한 선수이고, 즐라탄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 팀에 왔는지 이유를 알고 있다.'며 즐라탄에 대한 애착을 항상 드러내고 있다.

2017년 1월 16일 프리미어리그 21R 리버풀전에서는 포그바의 파울로 페널티킥 득점을 당하고 패색이 짙어지던 차에 후반 83분 발렌시아의 크로스를 멋진 헤더로 골로 연결하며 어김없이 해결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양팀의 추가 득점없이 무승부로 끝난건 아쉬운 점.

이후 리그에서는 3연속 무승부에 본인 또한 득점이 잠시 끊기기도 했는데, 2월 6일 레스터 시티전에서 추가골을 터트리며 팀의 3-0 완승에 기여했다. 이 골로 즐라탄은 리그 15골 (시즌 20호골)로 EPL 득점 공동 2위에 열 시즌 연속 20골 이상 득점을 기록하게 되었다.

2017년 2월 17일 유로파리그 32강 1차전 AS 생테티엔과의 홈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주 주말에 열린 FA컵 16강 블랙번전에서는 교체 투입되어 역전 결승골을 터뜨리며 맨유의 8강행에 보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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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6일 EFL컵 결승전에서 사우스햄튼에게 멀티골을 터트리면서 3-2 승리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2골이 선제골과 결승골이기에 순도가 어마어마했다. 3~4일 간격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일정으로 맨유 선수들이 지친 티가 많이 난 경기였으나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전방에서 버텨줬고 결국 88분에 극적인 헤더 결승골을 터트리면서 클래스를 증명했다. 꾸준한 자기 관리를 보여주었던 즐라탄이었지만 경기 종료 직전 녹초가 된 모습을 보일 정도로 대단히 격렬하고 힘든 경기였다.

2017년 3월 4일 리그 27R 본머스와의 홈 경기에서는 시즌 최악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후반전 결정적인 PK 기회 조차 상대 키퍼의 선방에 막혔고 팀은 1-1로 비겼다.

이 때까지만 해도 즐라탄은 큰 부상없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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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7년 4월 21일 안데를레흐트와의 유로파 리그 8강 2차전 경기에서 90분 풀타임을 뛰었으나 후반전 종료 직전, 공중 경합 과정에서 착지하다가 발을 잘못 디뎌 오른쪽 다리가 역방향으로 꺾여버리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 경기에서 또 마르코스 로호가 부상을 당하면서 무리뉴 감독은 이에 대해 너무나 착잡하다고 언급했다. 아직 강팀과의 경기가 많이 남은 상황에서 유나이티드는 최고의 득점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다. 완치 시기는 대략 2018년 초라고 영국 언론이 보고했다.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무릎인대 부상으로 발표되었으며, 여러 언론을 통해 은퇴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그러나 즐라탄 본인의 SNS를 통해 이번 계기를 통해 더욱 강해져서 돌아오겠다. 포기하는 것은 내 선택사항에 없다며 은퇴설을 일축했다. 자기관리가 굉장히 철저한 모양이다. 여담으로 그의 무릎은 치유 속도가 엄청 빨라 의사가 즐라탄의 무릎을 보고 연구해보고 싶다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의사들에게서 강한 무릎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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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5일 맨유가 유로파리그 우승을 거머쥠으로써 그의 커리어에 첫 유럽대항전 트로피가 추가되었다. 비록 부상으로 인해 직접 뛰지는 못했지만 시상식에 같이 참석해서 메달을 수여받았고 고국에서 열린 유럽대항전에서 친정팀인 아약스를 상대로 본인의 첫 우승을 차지했으니 감회가 남다를 듯.

PSG 시절과 비교하면 경기당 득점이 많이 감소했으나 이는 팀의 수준과 조직력이 낮아지기도 했고, 맨유의 예전 선수들 역시 즐라탄에게 전 소속팀과는 다른 곳이다. 더 많은 것을 해줘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밀란 시절과는 다르게 팀의 수준이 그대로 순위표에 드러났다. 즐라탄이 잔류할지는 알 수 없지만 잔류한다면 즐라탄을 보좌할, 좀더 득점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선수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즌이 끝난 후 맨유는 즐라탄과의 연장 계약을 추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이번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친 즐라탄이지만 이제 나이가 35살이 넘었고 한번 부상을 당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맨유는 즐라탄이 떠난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전폭적으로 즐라탄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선수 계약이 종료 될지언정, 즐라탄은 맨유 캐링턴 훈련장에 남아 재활 치료에 전념 할 듯 보인다.

결국 2017년 6월 10일자로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오피셜 그러나 계약은 만료되었어도 맨유 측은 즐라탄이 다음 시즌 중에 인대 부상이 완치가 되어 있다면 단기 연장 계약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넌지시 이야기했다. 그가 없었다면 맨유는 더 큰 위기에 빠졌을 것을 감안했을 때 즐라탄은 맨유에게 여전히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이다. 즐라탄 또한 맨유와의 재계약에 긍정적인 반응이어서 여건만 조성되면 차기 시즌도 맨유에서 볼 가능성이 높다.

최종 기록 46경기 출장 28골 9어시스트로 마감.[출처]

맨유와의 계약이 종료된 후 알려진 근황은, 꾸준한 재활 훈련 모습과 자신의 에이전트인 라이올라와 같이 있는 사진이 여러 장 올라왔었다. 그로 인해 부상 복귀 후 겨울 이적 시장에서 맨유와의 단기 계약, 혹은 AC밀란이나 LA 갤럭시 등 타 리그로의 이적설이 나왔었다. 시간이 지나 8월엔 타 리그로의 이적 소식이 흐지부지 넘어가는 분위기고, 놀라운 부상 회복 속도를 보여 오히려 겨울이 아닌 여름 이적 시장에서 복귀할 수 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무리뉴 역시 인터뷰에서 즐라탄과의 계약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일관해왔으며, 아디다스가 계약이 발표되지도 않았음에도 등번호 10번이 마킹된 즐라탄의 유니폼을 판매하기 시작해 맨유 복귀가 매우 유력해졌다.

2016/17 시즌: 46경기 28골 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7
1
17
5
유로파 리그
11
9
2
5
3
FA컵
1
0
0
1
0
EFL컵
5
4
1
4
1
커뮤니티 실드
1
1
0
1
0
합계
46
41
5
28
9


2.9.2. 2017-18 시즌[편집]


2017년 8월 24일 맨유와 1년 계약을 발표했다. 등번호는 9번에서 루니의 이적으로 공번이 된 10번을 받았다. 현재 부상 회복 속도를 보아 당초 시즌 중반이 아닌 빠르면 10월 말에서 11월 정도로 복귀가 앞당겨질 전망이며, 챔피언스 리그 32강 조별 리그 스쿼드에는 당초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으나, 스쿼드 명단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12월 2일에 아스날 원정으로 복귀 날짜가 잡혔다가 11월 19일 뉴캐슬 전에 교체 출전으로 2주 정도 빠르게 복귀했다.

현역, 그것도 빅클럽의 주전 축구 선수라기에는 많은 나이, 십자인대 부상, 장기간의 휴식 등등으로 사실상 은퇴의 위기에 처했다는 시각이 많았으나 15분의 짧은 교체 출전 시간 동안 수차례 위협적인 찬스를 동료에게 만들어 주거나 즐라탄 특유의 환상적인 발리 슈팅을 시도하는 등, 예상 외로 폼이 상당히 준수해서 많은 해축팬들이 기겁하게 만들었다.

12월 21일 리그컵에서 프리킥 골을 넣었지만 경기력은 그다지였으며 팀은 2부 리그 팀에게 패배했다.

12월 27일 리그 번리전에서 즐라탄과 루카쿠가 동시에 선발로 나왔다. 여러 사람들의 기대와 의구심이 드는 조합이었지만 경기 결과만 놓고 보자면 실패라 할 수 있다. 이 조합의 문제는 의외로 즐라탄에게 있었다. 저번 시즌 즐라탄은 전반기엔 기복이 조금 있었지만, 적응 후에는 2선까지 내려와서 연계에 도움을 주고, EPL 득점왕 경쟁을 할 만큼 장기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맨유에서 가장 믿음직한 스트라이커였다. 하지만 부상 이후 스피드, 경합 능력이 더욱 떨어지자 즐라탄의 장점은 살아나지 못하고 단점만 부각되어, 안 그래도 영향이 큰 인대 부상과 노쇠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활약으로 보면, 맨유가 즐라탄과 재계약을 한 것은 실수로 보인다. 부상 이후에 복귀 경기에서 잘한 것 말고는 폼이 최악이다. 이 와중에 즐라탄 & 루카쿠를 공존시킨다고 세컨톱으로 써 보기도 했는데 너무 민첩성이 떨어지고 수비 가담도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플레이메이킹을 어느 정도 하는 즐라탄이라지만 전문 플레이메이커에 비교할 바는 아니다 보니 기회 창출 능력도 영 아쉽다. 나이도 나이인 데다가 지난 시즌 큰 부상의 여파가 상당히 컸던 걸로 보인다. 결국 다시 1개월 추가 부상을 끊었다. 무리하게 조기 복귀를 한 여파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리뉴는 직접 이번 시즌 종료 후 즐라탄이 맨유를 떠날 것이라 얘기했다. 차기 행선지는 맨유 이적 전부터 이적설이 나돌던 MLS의 로스앤젤레스 갤럭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2018년 3월 23일, 맨유는 즐라탄과의 계약을 해지하였음을 공식 발표함으로써 클럽을 떠나게 되었다.

맨유에 있을 때 특유의 거친 입담으로 팀 내외 팬들의 빈축을 샀고 일부 팬들은 즐라탄의 사자 발언을 빈정거리면서 야옹탄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32]

2017/18 시즌: 7경기 1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5
1
4
0
0
챔피언스 리그
1
0
1
0
0
EFL컵
1
1
0
1
0
합계
7
2
5
1
0


2.10. 로스앤젤레스 갤럭시[편집]


맨유에서 제안한 코치직을 거절하고 현역 연장의 의지를 보여 미국 진출을 선택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2년 계약에 연봉은 150만 달러(약 16억원)라고 한다. 기존 연봉 1900만 파운드(약 280억)에서 무려 90% 이상의 삭감을 감수하고 현역 연장을 택했다.

한편 은퇴 전 미국에서 뛰겠다고 아내와 약속한 것도 LA행에 영향을 준 모양이다.#


2.10.1. 2018 시즌[편집]


3월 31일 데뷔전 엘 트라피코에서 LAFC에게 3-0으로 끌려가던 갤럭시의 역전을 이끌어냈다. 3-2로 아직 따라가던 상황에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있던 LAFC 수비라인과 골키퍼를 엿먹이는 무려 35미터짜리 발리슛으로 MLS에서도 데뷔전 데뷔골을 작렬했고, 애슐리 콜의 크로스를 헤더로 집어넣으며 데뷔전에서 팀의 동점골과 역전골을 집어넣었다.

데뷔골 이후에도 2골을 더 넣었지만 그후 3경기에선 경기력이 저조했다.

5월 21일 MLS 11라운드 몬트리올 임팩트전에서 상대 선수의 빰을 가격하였으며 그 전에 본인의 발이 밟힌 것을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는 척 헐리웃 액션까지 취했는데[33] 비디오 판독 끝에 레드 카드를 받아 퇴장당했다. 결국 5경기 출전 정지가 확정되었다. 또한 5경기 연속 무득점이라는 부진을 면치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후, 한 경기 출전 정지로 징계가 경감되었고 그 이후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서인지 다시 한 번 각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징계 이후 첫 경기였던 FC 댈러스 전에서는 3:0으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두 골을 집어넣었고, 6월 10일에 있었던 레알 솔트레이크전에서는 베테랑 수문장인 닉 리만도를 상대로 헤더로만 두 골을 집어넣으면서 갤럭시의 승리를 캐리하며 폼을 끌어올린 모습을 보여줬다.

확실히 6월부터 즐라탄이 감을 되찾았다. 리얼 솔트레이크전서 2골을 넣은 것을 시작으로 산호세 어스퀘이크(2골), DC유나이티드(1골), 콜롬버스 크루(1골)을 기록하면서 4경기 연속 득점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7월 21일 리그 20라운드 필라델피아 유니언과의 원정 경기에서 선발 출전하여 후반 18분 결승골을 터뜨려 소속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이브라히모비치는 이 날 경기에서 결승골 뿐만 아니라 1-1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면서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현재 이브라히모비치는 현재 리그 15경기에 나서 12골을 넣으면서 리그 득점 4위에 이름을 올린 상황이다.[34]

7월 29일 올랜도 시티전에서는 3골과 1도움을 기록하면서 4-3 역전승을 이끌었으며, 16경기 15골 6어시로 미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9월 15일 토론토 FC전에서 환상적인 슛으로 통산 500번째 골을 달성했다. 막장 수비로 인한 팀 내분과 감독 경질이라는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준 골.

시즌 27경기 22골 10도움을 기록하면서 DC 유나이티드의 웨인 루니를 제치고 MLS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11월부터 AC 밀란 복귀설 등 유럽 빅클럽 이적설이 돌았지만, ESPN 광고에 출연하는 등 미국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지 12월 18일에 LA 갤럭시와 재계약을 하면서 MLS에 잔류하게 되었다. #


2.10.2. 2019 시즌[편집]


2019년 11월에 LA 갤럭시와 계약이 종료되는데, 본인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자신을 원한다면 언제든 돌아갈 것임을 밝히며 전 소속팀에 대한 애정을 내보였다. 로멜루 루카쿠의 판매 이후로 공격진 뎁스에 취약점을 보이는 맨유에게도 경험 많은 즐라탄의 재합류는 UEFA 유로파 리그 등의 대회를 위한 나쁘지 않은 옵션이 될 것이다.

또한 스승 주제 무리뉴가 새로이 부임한 토트넘 핫스퍼로의 이적설도 새어나오고 있다. 토트넘은 페르난도 요렌테를 내보낸 후 해리 케인 외에는 1군 전문 스트라이커가 한 명도 없는데, 이브라히모비치가 합류한다면 케인의 부담도 덜 뿐더러 본인도 UEFA 챔피언스리그 등에서 많은 출전 기회를 잡게될 수 있다. 또한 맨유에서 활약한 전적이 있기에 리그 적응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리뉴 감독이 직접 해당 이적설은 부인했고, 가장 유력한 행선지로는 전 소속팀인 AC 밀란이 거론되고 있다.

시즌 최종 기록은 31경기 31골 8도움으로 리그를 제패했고, 팀의 우승경쟁에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11. AC 밀란 2기[편집]


2019년 12월 27일, AC 밀란으로의 이적이 성사되었음이 공식 발표되었다. 8년만에 밀란으로의 리턴이다. 어째된 게 세리에 A가 점점 들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곳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계약 기간은 2019-20 시즌 종료까지며, 1년 연장 옵션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1월 초, 메디컬테스트를 통과하면서 곧바로 입단식을 가졌다. 등번호는 21번을 받았다. 21번을 고른 이유에 대해 여러 예측이 있었는데 전에 쓰던 11번에 10년을 더한 것이라는 썰과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약자 Z I를 따와 21번이라 정했다는 썰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 번호는 즐라탄의 아들이 남은 번호 중에서 골라준 것이라고 한다.


2.11.1. 2019-20 시즌[편집]



파일:Players-19-20-Ibrahimovic.png

2019-20 시즌
등번호
21
통계
대회
경기

도움
세리에 A
선발 16
교체 2
10
5
코파 이탈리아
선발 1
교체 1
1
0
합산
20
11
5

2020년 1월 6일 18R 삼프도리아 전에서 교체 출전하여 세리에 및 AC 밀란 복귀전을 치렀다. 나이가 무색하게 경기력은 훌륭했다.

1월 12일 19R 칼리아리 전에서 테오 에르난데스의 패스를 받아 논스톱으로 왼발 슈팅을 가져가 세리에 복귀골을 신고했다. 이 외에도 후반 막바지에 오프사이드로 선언되긴 했지만 골문을 한번 더 가르기도 했으며, 경기 내내 전방에서부터 상대 수비진을 흔들었고, 오랜만에 밀란이 공간 확보를 통한 공격 전개를 가능하게 하며 2-0 완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즐라탄은 이 날 복귀골로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에 모두 골을 넣은 진기록을 세웠다.[35]

즐라탄이 오기 전까지 AC밀란은 역사상 최악의 부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임 감독 지암파올로의 이해할 수 없는 전술과 선발진, 그리고 뒤를 이어 부임한 스테파노 피올리의 무색무취한 전술. 게다가 선수들의 연령대가 전체적으로 어려 멘탈적으로 부족한 모습이었다. 전 시즌엔 리그 탑클래스 공격수였던 피옹텍이 무려 전반기 필드골이 1골에 그치며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던 차에 즐라탄의 복귀는 밀란의 가장 좋은 처방전이었다. 쉽게 포기하던 멘탈리티가 치열하게 바뀌었다.

게다가 전방에서 수비수들을 끌고 다니는 즐라탄 덕분에 다른 공격진들의 움직임이 살아났다. 특히 레앙, 카스티예호, 레비치 등 전에는 주전에 밀려있던 자원들이 부활하며 상당히 공격적인 팀이 된 것도 즐라탄의 공이라 할 수 있겠다. 덕분에 밀란은 연승 행진을 거두고 있다. 이제 곧 4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존재감은 유럽 빅리그에서조차 확실히 크고 뛰어나다.

23R 밀라노 더비에서 선발출전 하여 전반 40분에 팀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한 데 이어 전반 종료 직전에 헤더로 득점하며 전반에만 1골 1도움을 기록했으며, 후반전에는 시도했던 헤더가 골대를 맞추는 등 경기내내 맹활약 했지만 팀은 후반전에만 인터 밀란에게 내리 4실점을 하며 2:4로 역전패 당했다. 그래도 즐라탄은 이 날 득점을 통해 밀라노 더비 최고령 득점 기록을 갈아치웠다(38세 129일).[36]

27R 제노아 전에서는 후반전에 만회골을 넣었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오히려 이 날 즐라탄은 득점 기회가 상당히 많았음에도 살리지 못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시즌이 중단되었고, 이탈리아를 비롯해 전세계가 혼란에 빠지자 즐라탄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바이러스가 즐라탄에게 오지 않으면, 즐라탄이 바이러스에게 가겠다."라는 말을 했고, 10만 유로[37]를 기부했다. 나중에 진짜로 갔다.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할 것이라 선언했다.# 기존에는 현역 연장과 은퇴를 두고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인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리그 재개에 따라 은퇴를 번복할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AC 밀란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서 재계약을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풋볼 이탈리아는 즐라탄이 올 시즌 끝으로 AC 밀란을 떠난다고 선언했으며, 스웨덴으로 돌아가 함마르뷔 IF로 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30R 라치오 전에서는 PK를 통해 1골을 기록했다.

31R 유벤투스 전에서 후반에 0-2로 끌려갔으나 PK 포함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기세를 끌어올렸고, 팀은 4-2로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11년 만에 호날두와의 맞대결에서 승리를 따냈다.

33R 파르마 전에서는 AC 밀란 소속으로 100번째 경기를 치렀다.

35R 사수올로 전에서는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이번 시즌 세리에 17경기 출전, 8골을 넣었다. 또한 소속팀인 AC 밀란은 리그 재개 이후 10경기에서 7승 3무로 무패행진을 달리고 있다.

37R 삼프도리아 전에서 피지컬을 적극 활용해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4-0 완승을 이끌었다. 비단 골이 전부가 아니었는데, 즐라탄은 이 경기에서 79분을 소화하면서 출전 선수들 중 가장 많은 4회의 슈팅과 4회의 키패스에 더해 드리블 돌파 2회와 공중볼 획득 2회를 성공시키면서 공격 전반에 걸쳐 높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날 멀티골을 통해 즐라탄은 밀란과 인테르에서 각각 50골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40세의 나이가 무색한 멋진 활약을 펼치며 진정한 도전이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37R 기준으로 리그 17경기 출전 중 15경기에 선발 출전해 9골 5도움을 올리고 있다. 총 출전 시간은 1,275분으로 91분당 하나의 공격포인트을 기록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불혹을 앞두고 있음에도 신체적인 강인함을 유지하면서 17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들 중에서 가장 많은 경기당 공중볼을 획득[38]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밀란은 즐라탄이 출전한 17경기에서 10승 5무 2패에 37득점 20실점을 기록하고 있다. 즐라탄이 없었던 20경기[39]에서 밀란은 8승 4무 8패(승점 28점)에 23득점 26실점을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즐라탄의 존재가 밀란에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즐라탄이 오고 나서 경기당 승점은 1.4점에서 2.1점으로 0.7점 상승했고, 경기당 득점은 1.2골에서 2.2골로 경기당 1골을 더 넣고 있다. 승률 역시 40%에서 58.8%로 올라갔다.

칼리아리와의 리그 최종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지만 한 골을 넣으면서 시즌 중반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리그 10호골을 달성했다.

파일:20200901_101617.jpg

즐라탄 합류 이후 리그에서 성적을 따지면 무려 2위일 정도로 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전에 없었던 지지 않는 멘탈리티로 무장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고 내려와서 패스를 받아주거나 전방에서 공중볼 다툼을 해주는 등 여러 역할을 해주었다. 젊은 선수 위주로 팀을 꾸리려던 랑닉이 차기 감독으로 예상되었으나 너무 좋은 성적으로 인해 피올리가 다음 시즌도 감독을 맡게 되었고 그에 따라 즐라탄도 남을 확률이 높아졌다. 다음 시즌에도 활약이 계속된다면 밀란의 리그 성적도 기대할만 하다는 것이 팬들의 생각.

8월 31일, AC 밀란과 1년 더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서 등번호도 예전에 밀란에서 달았던 11번을 다시 배정받았다.

2.11.2. 2020-21 시즌[편집]



파일:Ibrahimovic-Large.png

2020-21 시즌
등번호
11
통계
대회
경기

도움
세리에 A
선발 18
교체 1
15
2
UEFA 유로파 리그
선발 3
교체 2
0
1
코파 이탈리아
선발 2
1
0
UEFA 유로파 리그 예선
선발 1
1
0
합산
27
17
3

2020년 9월 22일 리그 1R에서 멀티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9월 24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자가격리 후 10월 10일 음성 판정을 받았다.

이후 복귀전 10월 18일 4R 인테르와의 밀란더비 전에서도 멀티골을 기록하였다. 첫 번째 골은 페널티킥이 키퍼에게 막혔으나 튀어 나온 곳을 다시 차넣어 득점했고, 두 번째 골은 크로스를 원터치로 때려박아 넣어 득점에 성공했다. AC 밀란은 2:1로 승리했다.

10월 27일 5R 로마 상대로 PK를 포함해 멀티골을 기록했지만 팀은 3:3으로 비겼다. 좋은 경기력이었으나 로마가 마지막 동점골을 넣을 때 세트피스 수비 미스를 저지르는 바람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활약을 보였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40세에 가까운 나이가 무색하게 리그에서 나왔다 하면 2골씩 넣어주는 중. 세리에 A 득점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어 해외축구 팬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1월 1일 6R 우디네세 전에서 프랑크 케시에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였고, 오버헤드킥으로 아크로바틱하게 결승골을 넣으면서 1골 1도움으로 팀의 2대1 승리를 견인하였다.

우디네세 전 이후 모든 압박과 책임감은 내가 떠맡을 테니, 후배들은 그냥 믿고 우리의 길을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며 엄청난 리더쉽을 선보였다. #

11월 9일 베로나 전에서 PK를 실축하긴 했지만 후반 추가 시간에 극적인 헤더 동점골을 넣으면서 팀을 패배에서 구해냈다.

11월 23일 8R 나폴리 전에서 멀티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자가격리로 결장한 2경기를 제외한 6경기 연속 득점, 4경기 멀티골을 넣으면서 리그 10골로 득점 선두로 올라섰다. 하지만 이날 후반 34분 부상으로 교체되었다. 햄스트링 부상으로 알려졌으며 구단과 팬들의 걱정이 쇄도하고 있다.

결국 2020년 안에 복귀하지 못했다.

1월 19일 칼리아리전에서 페널티킥으로 선제골, 52분 멀티골을 기록했다.

아탈란타전에서는 전방에서 고립되었고 찬스도 살리지 못하며 밀란 복귀 후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다.

코파 이탈리아 8강 인테르전에서 전반 31분 선제골을 기록했지만 전반전 막판 로멜루 루카쿠와 서로 욕설과 박치기를 하며 격렬하게 싸우다가 경고를 받았다. 후반 13분 상대 역습을 저지하는 파울로 경고 누적 퇴장을 당했고, 팀은 후반전에 2골을 허용해 역전패하며 탈락했다. 루카쿠와 말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인종차별로 의심되는 패드립을 한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40]

이 때, 전반전 종료 후 로멜루 루카쿠는 동료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즐라탄을 찾아가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루카쿠의 성장 과정을 보면 벨기에에서 심한 인종차별을 당한 것에 대한 울분이 쌓여 있고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매우 강하게 박혀 있는데, 이런 선수가 인종차별과 가족에 대한 욕이 섞였다고 생각되는 말을 들으니 더욱 분노했을 수 있다. 두 선수는 이미 맨유에서 같이 뛴 적이 있고 이전부터 루카쿠가 즐라탄을 높게 평가해 왔던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 상황이다. 일단은 두 선수 모두 경기장 내에서의 행위로 인해 1경기 출전정지 징계를 받았고, 인종차별적 언사를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축구협회가 추가 조사를 했으나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이후에는 그냥 해프닝으로 끝났다.

2월 들어서 리그 복귀하여 크로토네 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4-0 대승에 기여했다. 연 나이로 40세에 리그 11경기에 나와 14골을 비롯하여 16골을 기록하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활약 중. 이날 기록한 골은 본인의 클럽 통산 500번째 , 501번째 골이었다.

세리에 A 22R 스페치아전과 23R 밀라노 더비에서는 팀이 전체적으로 부진하면서 득점없는 패배를 기록했다.[41] 유로파리그 32강 1차전 즈베즈다전 홈경기에서는 벤치에서 쉬었고 2차전 원정에서는 후반전에 투입되었다. 합산 스코어 3:3 , 밀란이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16강에 진출했다.

유로파리그 16강 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인데 즐라탄이 2017년 맨유 시절 유로파리그 우승을 견인한 적이 있는지라 맞대결이 관심을 모았으나 24R 로마전에서 허벅지 부상으로 교체아웃된 뒤 3주간 회복기를 가질 것이 발표되었다. 팀은 24R에서는 이겼지만 유로파 16강에서 탈락하고 리그 3경기에서 1승 1무 1패를 기록했다.

리그 28R 피오렌티나전에서 복귀하여 선발 풀타임을 뛰었고 전반 9분만에 골을 넣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만일 파올로 말디니가 원한다면 재계약할 것이라고 답했다.

29R 삼프도리아전에서는 풀타임 침묵했다.

30R 파르마전에서는 전반 7분 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활약했으나 후반 15분 레드카드를 받았다. 세리에 A 3353일만의 퇴장이며 그는 주심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낯설다 라고 말했고 주심은 욕설을 내뱉고 퇴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FIFAUEFA의 규정에 따르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가 도박 관련 기업과 금전적 이해 관계로 얽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4월 14일, 즐라탄이 스포츠 베팅 회사인 ‘Bethard’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2] 만약, 즐라탄의 위반 사실이 확인될 경우 10만 유로의 벌금과 함께 최대 3년 동안 축구에 관한 모든 활동 정지 처분이 내려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와중에 AC밀란은 즐라탄과의 계약을 2021-22 시즌까지 연장했다. 40살의 노장이지만 현재까지 리그에서만 15골, 시즌 전체 17골 2도움을 기록했으니 밀란 입장에서는 도저히 놓아줄 수 없는 듯.

34R 베네벤토전에서 복귀해 선발 풀타임을 뛰었으나 공격 포인트는 올리지 못했다.

35R 유벤투스전에서 선발 출장했고 후반 21분 무릎 부상으로 레비치와 교체되었다. 재활을 위해 최소 2주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나중에는 생각보다 심각한지 6월까지 휴식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결국 이번 시즌 밀란이 아탈란타전에서 승리하여 리그 준우승 및 8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극적으로 성공하여 즐라탄 본인한테도 비록 후반기에 부상으로 고생했을지언정 불혹의 나이가 무색하게 밀란의 준우승 및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크게 기여한 선수 중 1명으로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2.11.3. 2021-22 시즌[편집]


등번호
11
통계
대회
경기

도움
세리에 A
선발 11
교체 12
8
3
UEFA 챔피언스 리그
선발 1
교체 3
0
0
합산
27
8
3

부상에서 회복한 이후 3R SS 라치오와의 홈경기에서 교체 투입한지 7분만에 신발끈을 묶다가 시즌 첫 골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또 부상을 당했다.

리그 8R 엘라스 베로나전을 앞두고 드디어 복귀하였다. 후반 막판 교체투입되었고 득점은 하지 못했으나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 FC 포르투전에서는 후반 이른 시간 교체 출전하였으나 드리블, 패스가 모두 끊기며 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활동량이 거의 없어 계속 오프사이드에 걸리는 장면이 많았다. 심지어 볼경합중 상대의 머리를 차버리며 위험한 장면도 연출했다. 경기도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리그 9R 볼로냐 FC전에서는 올시즌 처음으로 선발 출전해서 경기 초반 하파엘 레앙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좋은 출발을 했으나 이후 경기력은 최악이었다. 수많은 턴오버를 기록한데다 느린 스피드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2:0으로 앞서가는 상황에서 세트피스 자책골을 기록해 2:2까지 동점을 허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 베나세르의 골로 앞서갔고 경기막판 즐라탄도 골을 기록하며 4:2로 승리했다. 참고로 이 날 기록한 자책골은 세리에 A 최고령 자책골이다.

리그 10R 토리노 FC전에서는 후반 늦은 시간 교체 출장했고 시간이 짧아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리그 11R AS 로마전에서는 프리킥 선제골에 페널티킥을 얻어내는 등 대활약을 하며 밀란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외에도 레앙의 골을 어시스트하고 본인도 멀티골을 넣는듯 했으나 두 장면 모두 아쉽게 오프사이드 판정이 났다.

FC 포르투전에서는 후반 교체 출장하여 골을 넣었으나 골장면에서 테오 에르난데스의 오프사이드로 골이 무산되었다.

인테르전에서는 풀타임을 소화했으나 후반의 날카로운 프리킥 정도를 제외하면 별 활약이 없었다.

피오렌티나전에는 전반전 최악의 결정력을 보이며 경기를 질질 끌려가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후반전에는 훌륭한 결정력을 보여주며 날카로운 감각으로 멀티골을 터트렸다. 또한 자책골로 연결된 헤딩슛까지 했다. 하지만 수비에 많은 문제를 보여 무려 4골을 내준 밀란은 패배하고 말았다.

챔피언스리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에서는 후반에 교체로 출장하여 위협적인 장면을 여러번 만들었다.

사수올로전에서는 풀타임 출전에도 불구하고 좋은 모습을 전혀 보이지 못했고 부진했다. 팀도 패배.

제노아 CFC전에서는 가까운 거리 프리킥을 기가 막히게 차넣으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이후 후반 이른 시간에 펠레그리와 교체되었다.

챔피언스 리그 리버풀전에서는 공격수로써 아무런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매우 심각하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과거부터 즐라탄은 챔스에 약했는데 이번에도 조별 4위라는 굴욕적인 순위와 함께 챔스에서 광탈했다. 물론 즐라탄은 밀란을 챔스에 복귀시키고 리그에서도 잘하고 있지만 이번 챔스도 광탈해 이제는 리그에서 양학만 해야하는 시기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역시 즐라탄은 챔피언스 리그에 약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

우디네세전에서도 선발출장했으나 홀로 고립되며 경기에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가끔 오는 찬스도 전혀 살리지 못했다. 그런데 후반 막판 즐라탄의 주특기인 아크로바틱한 슛으로 동점골을 기록해 팀의 패배를 막았다. 이 골로 즐라탄은 메시 호날두에 이어 역대 3번째로 유럽 5대리그 300호골 기록을 달성했다. #

SSC 나폴리전에서도 풀타임 출장했으나 경기 관여도가 너무 약했다. 경기도 패배.

엠폴리전을 앞두고 또다시 부상이 터지며 결장하게 되었다.

AS 로마전에서 복귀하여 후반에 교체출장했다. 레앙의 골을 돕는 패스를 연결해주었다. 그러나 후반 막판에 얻은 페널티킥을 실패하며 골을 기록하는데 실패했다. 페널티킥을 너무 자주 실패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밀란의 PK를 전담하는 프랑크 케시에가 네이션스컵으로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피올리의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베네치아전에서는 선발출장하였고 전반 초반 레앙의 완벽한 어시스트를 밀어넣으며 골을 기록했다. 이후 베네치아 수비진의 패스미스로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했으나 골을 넣지 못했고 튕겨나온 공이 테오의 슛으로 이어저 수비수의 팔에 맞으면서 PK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전경기 PK 실패 때문인지 PK는 테오가 시도해 골을 넣었고, 이후 후반 중반에 올리비에 지루와 교체되었다.

스페치아 칼초전에서는 선발출장하여 여러차례 기회를 맞이했으나 번번히 막히거나 빗나가며 기회를 날려버렸다. 우세한 경기에서 골이 들어가지 않으며 경기에서도 패배했다. 최근 들어 좋은 경기를 보여주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이제는 진짜 끝났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몸이 생각만큼 따르지 않는 상황으로 보인다. 당연히 이번 시즌이 끝나면 방출해야한다는 반응이 많아지는 중.

유벤투스전에서는 경기 초반부터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더니 27분 정도를 뛰고 지루와 교체되었다. 경기 이후 아킬레스건 부상이 확인돼 장기 부상이 불가피해졌다. 즐라탄이 부진에 이어 부상까지 연이어 나오는 중이라 밀란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나폴리와의 리그 28라운드 경기에서 드디어 복귀하였다. 후반 늦은시간 교체로 출전하여 딱히 활약은 없었다.

엠폴리와의 경기에서도 후반 교체출장했으나 별다른 활약은 없었다.

칼리아리전에서도 교체 출장했으나 크게 돋보이는 장면은 없었다.

볼로냐전에서도 교체출장했으나 다소 평범했으며 특별한 활약이 없었다.

토리노전을 앞두고 또다시 부상을 당하며 경기를 결장하게 되었다.

라치오전에서 복귀하여 후반 이른시간에 교체출장을 했다. 경기력이 완전하진 않았으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경기 막판 토날리에게 이어지는 완벽한 헤딩패스로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피오렌티나전에서도 후반에 교체출전했으나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계약이 끝나는데도 아직까지 재계약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또한 즐라탄은 인터뷰에서 본인은 부상 때문에 앞으로의 커리어가 불투명하다고 한 적도 있다. 현지에서는 AC 밀란이 11년만의 세리에A 우승에 가까워진 만큼 즐라탄 역시 과거 디르크 카윗의 케이스와 유사하게 소속팀의 우승과 함께 동시에 현역에서 은퇴할 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사수올로를 3대0으로 이기는 상황에서 교체로 출전했다.

시즌 내내 부상에 신음하며 경기를 거의 소화하지 못했지만 19-20 시즌부터 팀의 기둥 역할을 하며 어린 선수들을 이끌었다. 이번 시즌에도 즐라탄의 존재는 팀에 강력한 정신력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결국 밀란에서 우승하며 AC 밀란을 우승으로 이끌겠다는 본인의 말을 지키는 폭풍 간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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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데토를 차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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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밀란의 우승 세레모니에서 시가를 물고 입장하는 즐라탄스러운 쇼맨쉽을 보여줬는데 우승 직후 라커룸에서의 연설도 화제가 되었다. #

이후 무릎 수술때문에 약 7~8개월간 아웃이 확정되었고 복귀한다해도 2023년 1월이기 때문에 현재 은퇴를 선언할수도 있다고 한다.

이후 밀란과 6개월간 재계약에 서명할수도 있다고 했었으나 파브리지오 로마노 기자에 따르면 17일 곧 즐라탄이 며칠 내로 AC 밀란과 새로운 계약에 합의할 예정이고 계약 기간은 1년이며 연봉은 150만 유로(약 20억 원)라고 말하였고 재계약 이후에는 유럽 5대 리그에서 호아킨 산체스, 디에고 로페스, 윌리 카바예로, 잔루카 페골로등과 함께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가 될 예정이다.

2.11.4. 2022-23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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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3 시즌
등번호
11
통계
대회
경기

도움
세리에 A
4
1
0
합산
4
1
0

2023년 6월 30일까지 계약을 연장하였다.[43] 대신 부상으로 반 시즌간 뛰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여 저렴한 연봉에 골과 출전 등에 따라 보너스가 나오는 형태로 재계약하였다. 밀란은 이전처럼 즐라탄의 경기력뿐만 아니라 젊은 선수들의 멘토가 되어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전반기에는 뛰지 못하기 때문에 챔피언스 리그 예선 스쿼드에서 제외되었다.

2023년 1월 24일 현지 언론등에서 계약이 끝나는 6월 기존의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재계약을 하지 않고 현역 은퇴를 할 전망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은퇴와 동시에 AC 밀란 엠버서더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한다.

23년 2월 토리노 FC전에서 드디어 소집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너무 긴 공백탓에 현실적으로 좋은 폼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밀란의 성적이 역대급이라 할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라 이런 분위기를 쇄신해 주기를 기대받고 있다.

23년 2월 24라운드 아탈란타와의 홈경기에서 드디어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후반 올리비에 지루와 교체투입되어 20여분이 안되는 짧은시간 동안 8개의 패스를 포함하여 특유의 돌려차기 동작을 보여주는 등 폼을 끌어올렸다. 밀란이 쓰리백으로 포메이션을 바꾼뒤 상승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즐라탄의 존재가 팀을 더 단단하게 만들거란 기대가 이어지고 있다. 즐라탄은 41세 146일의 나이로 경기에 출전하면서 종전 기록 보유자였던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의 41세 25일을 넘고 세리에 A 역대 최고령 출전 기록을 다시 세웠다.

25라운드 피오렌티나전에서는 지고있는 상황에서 후반 교체로 출장했다. 영향력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폼이 회복되지 않아 둔한 모습이었다.

26라운드 살레르니타나전에서는 후반에 교체로 출전했으나 슛이 아쉽게 들어가지 않는 등 다소 아쉬운 경기를 했다. 결과는 무승부.

27라운드 우디네세전에서는 지루의 경고누적으로 선발 출전을 했다. 이경기에서 PK득점에 성공하며 41세 166일의 나이로 득점에 성공하며 세리에 A 역대 최고령 득점자가 되었다. 이전 기록 보유자는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로 41세 25일이었다. 그러나 경기력 측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후반에 교체되며 밀란의 대패를 지켜봐야했다.

A매치 기간에 국가대표팀에서 또다시 부상을 입어 2주 정도 결장이 예상된다.

레체전을 앞두고 훈련에 복귀했다. 그러나 훈련 도중 또다시 종아리에 문제가 발생하며 시즌 아웃 가능성이 생겼다. 결국 이번 시즌에도 거의 경기에 나서지 못해 은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2.12. 은퇴[편집]


"GOD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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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시로에서 보내는 밀란 팬들의 고별 메시지 플랜카드


결국 2023년 6월 4일, 현역 은퇴 선언을 하게 된다. 당일에 열리는 38라운드 엘라스 베로나와의 홈 경기가 끝난 후 밀란 팬들 앞에서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과의 고별식에 산 시로는 눈물 바다가 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즐라탄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 출신의 어머니가 있어 세 국가대표팀의 관심을 받았지만 본인이 나고 자란 스웨덴을 선택하였다. 2001년 1월 31일, 득점 없이 비긴 페로 제도와의 노르딕 풋볼 챔피언십 2000-01 친선 대회에서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에 처음 출전하였다. 2001년 10월 7일, 그는 3-0으로 이긴 아제르바이잔과의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예선전에서 처음으로 주요 대회 경기에 출전하였고, 첫 득점에도 성공하였다.

이후 스웨덴의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고, 스웨덴은 16강에서 새내기인 세네갈에 패해 탈락하였다. 즐라탄은 두 차례 교체 출전하였는데, 아르헨티나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88분에, 세네갈과의 16강전에서 76분에 교체 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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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은 스웨덴이 참가한 UEFA 유로 2004의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하였다. 그는 5-0으로 승리한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켰고,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는 훌륭한 기량을 선보이다 막판에 백힐 치핑으로 동점골을 득점하였고,[44] 이 골은 대회 최고의 골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네덜란드와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했으며, 여기서 패한 스웨덴은 짐을 싸야만 했다.

2006년 월드컵 예선에서, 그는 2004년 9월 6일 몰타와의 원정 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7-0 승리를 견인하였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스웨덴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했지만 즐라탄은 월드컵 내내 부진에 빠지면서 득점포는 침묵하였고, 스웨덴은 독일과의 16강전에서 패하였다.

그는 2006년 9월 6일, 리히텐슈타인과의 유로 2008 예선전에 차출되었으나, 경기 이틀전에 크리스티안 빌헬름손과 올로프 멜베리와 함께 호텔을 떠나 나이트클럽을 방문하며 통금 규정을 위반하였다. 비록 세 선수 모두 알코올을 섭취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라르스 라예르베크 감독에 경기 출전도 못하고 귀가 조치가 내려졌다. 멜베리와 빌헬름손은 호소하지 않았으나, 즐라탄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아이슬란드와 스페인과의 이어지는 다음 예선전에 불참하였다. 그는 2007년 2월 7일의 이집트와의 친선경기에 참가하는 것도 거부하였으나, 1달 후인 스스로 추진한 보이콧을 3월 28일의 북아일랜드 전에서 철회하였고, 스웨덴은 이 경기에서 패하였다. 그는 12번의 예선 경기에서 단 한번도 득점하지 못하였다. 이브라히모비치는 2007년의 "스웨덴 올해의 축구 선수"에게 주어지는 굴드볼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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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08 명단에 발탁된 즐라탄은 2008년 6월 10일, 그리스와의 조별리그에서 득점하며 2년간 지속된 A매치 무득점 침묵을 깼고, 스페인과의 나흘 뒤 경기에서도 득점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이 러시아에 패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면서 대회를 2골로 마무리했다.

2009년 6월 10일, 4-0으로 이긴 몰타와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예선전에서 한 골을 득점하였다. 2009년 9월 5일, 그는 2-1로 이긴 헝가리와의 예선전 경기에서 팀의 두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스웨덴은 덴마크, 포르투갈에 밀려 조 3위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자신의 3번째 월드컵 출전은 안타깝게도 무산되었다.

유로 2012 지역예선을 앞두고, 즐라탄은 스웨덴 국가대표팀에 복귀하면서 주장 완장을 받았다. 그는 산마리노와의 경기에서 21,000명의 홈 팬들이 모인 가운데 팀의 5번째, 6번째 득점을 하였고, 팀은 6-0 대승을 거두었다. 스웨덴은 이 경기에서 60분간 10명으로 싸웠다. 그는 핀란드와의 다음 예선전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5-0 대승을 견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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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3번째 유로 대회가 되는 UEFA 유로 2012 조별리그 1차전 우크라이나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득점하였다. 그는 이후 2-0으로 이긴 프랑스와의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오른쪽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그대로 바이시클 킥으로 처리했는데, 이 골은 조별리그 최고의 골로 선정되었다.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앞서 두 조별리그 경기에서 패한 스웨덴은 8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또한 유일하게 8강에 진출하지 못한 선수들 중 유로 2012의 올스타 팀에 이름을 올렸다.

2012년 10월,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과의 2014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0-4로 밀리고 있는 와중에 팀의 첫 만회골을 득점하였고, 이 경기에서 4-4 무승부를 거두었다. 독일이 경기에서 4골을 앞선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2012년 11월 14일 잉글랜드와의 국가대표 A매치 경기에서 후반 90분 환상적인 25미터 오버헤드킥으로 쐐기골을 장식하며 한경기 4골을 기록했다.


''Oh my god insane goal! I just saw! The most insane goal I have ever seen on a football pitch! Incredible! Incredible Zlatan Ibrahimovic! World! World class!''

세상에 엄청난 골이에요! 축구장에서 본 가장 대단한 골입니다! 엄청납니다! 엄청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세상에! 월드 클라스예요!


아크로바틱을 넘어서 예술의 경지를 찍은 이 골을 보며 대중들은 벌써부터 FIFA 푸스카스상을 점치고 있으며 즐라탄 인생골이라는 드립들도 나오고 있는 중. 그리고 2014년 1월 13일에 네마냐 마티치네이마르 주니오르를 제치고 수상자로 확정됐다. 그런데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 기괴한 골을 많이 넣었던 선수다. 키 190cm를 넘는 피지컬과는 다르게 엄청난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특유의 장점. 혹자들은 호날두의 사이즈 업 버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디테일하게 스타일이나 성향을 보면 다르지만 어쨌든 좋은 피지컬과 훌륭한 유연성으로 현역들 중 가장 다양하게 신체부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사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에는 포르투갈, 덴마크 등에 밀려 아깝게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스웨덴의 대진운은 계속 최악이었다. 2002년에는 잉글랜드와 겨우 비기고 아르헨티나에게 있는대로 시달린 끝에 간신히 비겨서 16강에 진출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에게 힘을 다 뺀 스웨덴은 첫 출전국이자 아프리카의 듣보잡인 세네갈에게 일격을 얻어맞았고, 2006년에는 잉글랜드와 또 같은 조가 되어 고생하더니 16강에서는 그 독일에게 걸려 또 탈락했다. 거기에 2010년 지역 예선에서는 포르투갈, 덴마크와 같은 조가 되어 간발의 차이로 조 3위가 되어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더니 2014년 월드컵에서는 포르투갈보다도 더 센 독일이 걸린 데다가 아일랜드, 오스트리아까지 걸려서 최악의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다. 그러고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플레이 오프에 진출했건만 상대가 포르투갈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역시 독일,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등과 더불어 두 대회 연속 지역 예선 죽음의 조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2014년 대회 때는 2010년 대회 때와는 달리 꽤나 분전했으나 문제는 세계 축구 전체에서 상위 5위권 안에 든다는 독일도 스웨덴의 상대인지라 본선 직행은 이루지 못하고 플레이오프로 떨어졌다. 다만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맹활약으로 그 독일을 상대로 4-4 무 재배를 쳐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로 떨어졌는데 상대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포르투갈. 지역 예선에서 두 대회 연속으로 만난 악연이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입장에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눌러야 산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기자회견에서 '포르투갈을 이길 자신 있다. 이것은 단지 호날두와의 개인적인 대결이 아니다. 그리고 내 모든걸 쏟아부어 반드시 이기겠다.' 는 필사의 각오와 다짐을 보여줬다.

호날두의 선제골로 꺼져가는 본선의 불씨를 살리려 스스로 2골이나 넣는 기염을 토했지만, 그 직후 호날두가 내리 2골을 더 넣으며 해트트릭까지 터트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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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플레이오프는 상당한 명승부로 치러졌는데 특히 2차전은 월드컵 본선 토너먼트에서 나와야 했던 경기라는게 총평. 1차전이야 서로 눈치만 보느라고 상당히 수비 위주의 재미없는 경기였지만 2차전은 두 영웅들의 크레이지 모드가 작렬한 경기. 결국 승자가 모든 걸 다 가지고 갔다. 즐라탄과 호날두의 일기토 같은 경기라고 평하는 의견도 있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승패를 갈랐던 건 누구의 졸병들이 더 강한가였다.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호날두가 역전에 성공한 것은 포르투갈 중원의 세명(무티뉴, 메이렐레스, 벨로소)이 미드필드를 장악한 것이 컸다. 특히 2:1로 뒤지던 상황에서 나온 무티뉴의 두번의 킬패스가 결정적이었다. 그에 반해 즐라탄을 보좌할 스웨덴 선수단은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기량도 떨어졌기에 결국 스웨덴은 포르투갈을 넘어서지 못했다. 과거 잘나가던 시절에 비해 선수단의 질적 하락으로 대표팀이 약해졌기에 즐라탄의 고군분투로만은 한계가 분명했다.

즐라탄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유로 2016이 그의 국가대표 마지막 커리어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여기서 엿을 먹어버렸으니 즐라탄은 결국 비운의 선수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이후 인터뷰에서 즐라탄 본인도 국가대표 은퇴를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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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14년 9월 5일 에스토니아와의 A매치에서 2골을 득점하면서 대표팀 통산 50골을 기록, 스웨덴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 반열에 올라섰다. 이 기록은 무려 70년 만에 경신된 것으로 그동안 헨릭 라르손과 같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도 이루지 못한 대업이다. 이것으로 즐라탄은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수로 자리매김하며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즐라탄은 기록 경신 이후 유니폼 아래 입고 있던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신 덕분입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셔츠를 보이며(위 짤방) 자신의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2014년 9월 8일 유로 2016 예선 오스트리아와의 원정 경기에 출장하였다. 이로써 100경기에 출장을 달성하며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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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16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덴마크를 상대로 1,2차전에서 총 3골을 퍼부으며 합계스코어 4:3 승리로 조국의 본선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원정에서 열린 2차전에서 멀티골을 터트렸는데, 2번째 골은 정말로 기가막힌 프리킥골이었다. 본선 24강에서 그의 조국 스웨덴은 벨기에, 이탈리아, 아일랜드와 한 조라는 만만치 않은 조편성에 걸렸다. 그나마 24강에서 16강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에 조 3위로 16강에 올라서는 것이 목표였지만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될 수 있는 곳에서 결국 팀은 졸전 끝에 조 꼴찌로 탈락하고 말았다. 즐라탄 또한 상대의 집중마크 수비로 별다른 활약 없이 팀의 탈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유로 2016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말했던 즐라탄은 조별 리그 종료 이후 예정대로 스웨덴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은퇴하고 난 후 스웨덴 대표팀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지역예선에서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연달아 누르는 이변을 보이고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였다. 즐라탄은 플레이오프 직전 인터뷰에서 스웨덴이 월드컵에 진출한다고 해도 대표팀 복귀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후배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는 모양새이기도 하고, 스웨덴 대표팀이 유럽 지역예선 내내 탄탄한 조직력을 무기로 이변을 이뤄냈기에 오히려 즐라탄의 합류가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2018년이 되자 즐라탄이 대표팀이 그립다면서 내가 빠진 월드컵은 월드컵이 아니다고 인터뷰하며 대표팀 복귀 의지를 보인 발언을 했는데, 마침 스웨덴이 3월 평가전에서 전력이 떨어지는 루마니아를 상대로 0:1로 패하고 공격진이 평가전 동안 달랑 1골이라는 극악의 공격력을 보이자 즐라탄의 대표팀 복귀도 생각해볼만 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스웨덴 대표팀 얀 안데르손 감독은 '즐라탄의 월드컵 출전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즐라탄이 감독과 만나 대표팀 복귀를 논의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 월드컵 출전 의사를 밝히면서 그의 독불장군식 행동에 안데르손 감독이 상당히 불쾌함을 표시한 것이다.[47] 또한 대표팀 선수들도 즐라탄의 복귀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면서 동료들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살필 수 있었다.

결국 4월 26일, 스웨덴 축구 협회안데르손 감독의 의견을 받아들여 즐라탄의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명단에 발탁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발표하면서 스웨덴 국가대표팀 복귀는 무산되었다. 결국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인터뷰를 했는데, 많은 현지 축구 여론들은 즐라탄의 무임 승차와 1년도 안된 말 바꾸기에 대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다.

월드컵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꾸준히(...) 언플을 하여 점점 추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조국에 대한 애정은 있어서 F조의 승부 예측을 말도 안되는 스코어로 점치긴 했다. 그가 없는 스웨덴은 조별 리그를 1위로 뚫고 16강에서 스위스를 잡고 8강까지 진출해서 스웨덴은 즐라탄이 없어도 메이저 대회에서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사실 현재 스웨덴 대표팀의 플레이 스타일은 즐라탄과 매우 동떨어져 있긴 하다. 즐라탄은 피지컬을 이용한 압도적인 전방 싸움에 강점이 있다면 지금의 스웨덴은 수비적인 플레이를 하다가 기회를 확실히 잡아 역습을 노리는 스타일을 선호하기 때문에, 즐라탄과는 완전히 상극이다.


3.1. 은퇴 번복[편집]


2020년 11월 2일, 국대 유니폼을 입은 사진을 첨부해서 오랜만이야 (Long time no see) 라는 트윗을 올려 국대 복귀가 아니냐는 설이 돌았다. 나중에 즐라탄이 "그냥 나는 스웨덴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려고 한 것이다." 라고 해명하자 스웨덴 축구협회 회장은 "그는 나쁜 취미를 갖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인데 증거 없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라고 불편한 심경을 표현했다. 그런데...


2021년 3월 6일, 국대 은퇴를 번복하며 5년만에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였다. 안데르손 감독에 의하면 2020년 11월 복귀설이 있었을때 이미 대화가 있었다고 하였다. #

2022 월드컵 유럽지역예선에서 복귀하였다. 3월 25일 조지아와의 복귀전에서 선발로 출전해 1도움을 기록하고 후반 39분까지 뛰며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28일 코소보전에서도 선발 1도움을 기록하고 후반 22분까지 뛰었다.

UEFA 유로 2020 명단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지만 소집 명단 발표 직전에 무릎 부상을 당해 선발되지 않았다.

2022 월드컵 유럽지역예선 11월 일정이었던 조지아전에서는 크게 부진했다. 오프사이드도 많았고 공격 기회는 센터백 구람 카시아에게 여러 번 막혔다. 후반전 초반에 에밀 포르스베리의 크로스를 재치있게 가슴을 사용해 밀어주었으나 공 낙하지점까지 쇄도하던 빅토르 클라에손의 임팩트가 아쉬우면서 골로 연결되지 않았다. 한편 스웨덴은 이후에 수비 불안으로 2골을 헌납하고 패배했는데 경기 진행 중 싸인을 받으러 온 즐라탄의 팬이 경기장에 난입해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역예선 마지막 경기 스페인전에서는 73분 교체투입되어 별다른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추가시간 누군가 뒤에서 밀친 척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어깨로 가격하여 부상입히려는 악의적인 플레이로 경고를 받았다. 이후 사후징계로 1경기 출장정지를 받아 플레이오프 1차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빠진 스웨덴은 체코에게 상당히 고전하며 연장 승부 끝에 간신히 1-0으로 체코를 제압하고 2차전 폴란드를 상대로 본선행 단두대 매치를 갖게 되었다. 3월 30일 폴란드와의 플레이오프 패스 B 결승에서는 후반 33분에 교체투입되었으나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고 0 : 2로 패배하며 결국 조국의 예선 탈락을 막지 못했다.

2023년 3월, 유로2024 예선을 앞두고 발표된 스웨덴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예선 조별리그 1라운드 벨기에전 후반 28분에 알렉산데르 이사크와 교체투입되었다. 그러나 경기 후 부상이 발견되어 2라운드 아제르바이잔전에는 결장했다.

그리고 2023년 6월, 현역 은퇴 선언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대표팀에서도 다시 은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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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20:55:18에 나무위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선수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79년 유러피언컵 준우승을 거둔(우승은 노팅엄 포레스트 FC) 팀으로 역대 스웨덴 구단에서 가장 화려한 챔피언스 리그 성적을 거둔 팀으로 UEFA컵 우승 2회(1982,87년)을 거둔 IFK 예테보리와 더불어 스웨덴 리그 명문이었었다.[2] 즐라탄은 자서전에서 자신에게 바르셀로나 시절 경험한 스페인의 훈련방식은 자신에게 너무나 맞지 않았으며, 기량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3] 본인 말에 따르자면 반할은 쿠만 감독에 비해 너무 거만했으며 사사건건 간섭해서 싫었다고 한다.[4] 사실 두번째 시즌인 2005-06 시즌 즐라탄의 실제 활약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경쟁상대가 다름아닌 델피에로다보니 유벤투스의 레전드를 후보로 밀어낸 걸 용납하지 못한 팬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5] 새로 부임했던 파비오 카펠로가 델피에로를 내친 것과도 연관된다. 카펠로가 독불장군인 건 축구계 상식수준. 뭐 그래도 알레가 부상과 슬럼프로 골골댔던 건 사실이다.[6] 부언하자면 튀랑은 호나우도와 바티스투타를 엿먹이던 프랑스 역대 최강의 수비수, 칸나바로는 발롱도르까지 받은 수비수, 부폰은 현실계 역대 최강 골키퍼였으며 그리고 셋 다 지금도 역대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7] 시합은 안나가고 숙소에서 혼자 엑스박스를 했다고 한다. 참다못해 데샹 감독이 올라와 나가자고 했는데도 안나갔다고 한다.[8] 만치니는 리버풀에게 패배하고 사임을 발표했다. 후에 번복하는 듯한 인터뷰를 했지만 사임은 예정된 일이었다.[9] capocannoniere, 세리에 A 득점왕을 의미[10] 2005-06 시즌 칼치오폴리로 획득한 타이틀까지 포함하면 리그 4연패.[11] 이때 재미있는 비하인드가 있는데, 당시 리그 마지막 1경기만 앞두고 득점 순위로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마르코 디 바이오가 23골, 디에고 밀리토가 22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최종전 도중 즐라탄과 디 바이오가 1골씩, 밀리토가 2골을 넣어 세 명의 공동 1위 수상으로 끝날 것이 예상되었으나, 즐라탄이 경기 종료를 10분 남겨두고 발꿈치로 원더골을 넣어 결국 단독 득점왕을 차지했다.[12] 공격 파트너인 훌리오 크루스, 에르난 크레스포, 아드리아누들이 즐라탄 만큼의 파괴력을 내지 못했으며, 즐라탄이 빠지면 공격루트가 마이콘의 오른쪽밖에 없을 정도로 단조로워졌다.[13] 덤으로 이탈리아 클럽 사상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여담으로 4강 상대가 바르셀로나였다. 어찌 보면 친정팀의 참교육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셈이다.[14] 다만 밀란 시절 이전까지 즐라탄 헤더 능력은 절대 완벽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바르샤 시절에도 머리로 날아오는 공도 발로 받으려 한다고 까였을 정도다.[15] 바르샤는 에투가 무시무시한 스피드와 섬세한 라인 조절 능력으로 상대방의 뒷공간을 파고들며 상대 라인을 교란시키면 날개들이 난동을 피우는 것이 단골 패턴이었고, 인테르는 스네이더가 오기 전에는 즐라탄의 볼키핑과 마이콘의 오버래핑을 통해 공격을 풀어 나갔다.[16] 여기서는 조금 논란이 있는 것이, 즐라탄은 아스널과의 어웨이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2:0을 만들었지만, 과르디올라가 즐라탄을 65분경 교체한 이후 오히려 바르사는 아스널에게 2골을 얻어먹으며 2:2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메시가 4골을 넣은 것은 2차전인 캄프 누에서의 홈경기이다. 다만 1차전에서 2골을 넣긴 했지만 날려먹은 기회가 수두룩한게 함정이다.[17] 바르샤 시절 과르디올라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무려 6개월 동안이나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도 하고 즐라탄은 과르디올라가 자신을 대놓고 피했다고도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다. 1년 전 이맘 때 즐라탄 데려오고 좋아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 격세지감이다. 솔직히 펩은 즐라탄과 메시가 어느 포지션에서 뛰든 서로 도와주는 플레이를 원했지만 즐라탄이 많은 활동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적응하지 못했다. 물론 이 부분은 즐라탄 본인만의 주장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펩은 이 당시의 일은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18] 말 그대로 무시. 몇 주 동안 눈도 안 마주치고 대화를 일부러 피하거나 같은 방에 있기도 싫어했으며 즐라탄의 허벅지 부상에도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었다고 한다.[19] 비야레알과의 경기에서 고작 5분만 뛰게 해놓고 교체를 해버리자 그 때 분노가 폭발했다고 한다.[20] 내한 당시 인터뷰에서도 “항상 내가 넘버원이라고 생각한다”며 메시와의 비교에서 자신이 밀리지 않음을 강조하기도 했다.[21] 사실 이시기에 보리엘로와 훈텔라르가 있긴 있었으나 보리엘로는 호비뉴가 오자마자 도망치듯이 로마로 가버렸고 훈텔라르는 즐라탄이 오면서 바로 이적했다. 밀란이 얼마나 즐라탄을 믿었는지 알수있는 부분.[22] 즐라탄은 바르셀로나를 떠난 이후 펩을 말할 때 철학가라고 언급한다. 그 이유는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비하하는 말이다.[23] 실제로 2010년대 이후 리그 우승팀이 아닌 올해의 선수 수상자는 17-18 시즌 마우로 이카르디 밖에 없다.[24] 실제로 시즌 직후 골닷컴에서 세리에 A 베스트 11을 뽑았는데 거기에 즐라탄의 이름은 없었다. 쉽게 말해 10-11 시즌 리그로 한정하면 에투, 카바니, 디 나탈레가 즐라탄보다 잘했으면 잘했지 못하진 않았다는 소리다. 특히 에투는 시즌 전체적으로도 즐라탄보다 공격포인트를 20개나 더 기록했고 FIFA 발롱도르 투표에서 8위에 오르며 즐라탄보다 훨씬 좋은 시즌을 보냈다.[25] PSG는 보기와는 달리 주급 체계가 상당히 건실한 편인데 PSG에서 유이하게 이러한 주급 체계를 깨면서 엄청난 고액 주급을 받는 딱 두 선수가 있다. 바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티아고 실바. 일반적인 주전 선수가 한화로 주급 약 1억 안팎을 수령하는 PSG에서 즐라탄은 거의 4억이 넘는 주급을 수령하고 있고, 실바 역시 약 3억 가까이 수령하고 있다. PSG에서의 그 둘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 다른 선수들도 이에 대해 딱히 불만이 없는 것을 보면 이 둘의 실력이 대단하다면 대단하다.[26] 사실상 공격과 수비의 기둥을 없애버린 밀란은 12-13 시즌 부터 그 댓가를 치루게 되었다. 엘 샤라위라는 유망주와 파찌니, 발로텔리가 있어서 그나마 공격진은 땜빵이 가능했다고 치지만 수비진은... 이 사상 최악의 이적은 밀란팬들에게 베를루스코니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게 했을 정도로 지금까지 안 좋은 의미로 회자가 된다.[27] 그래서인지 즐라탄 특유의 스킬인 전 소속팀 까기에서 유일하게 까이지 않았던 구단이 바로 AC 밀란이었다.본인 페이스북에서도 좋아하는 페이지에 떡하니 AC 밀란 페이지가 있었으니...지금도 가끔 언론에 밀란이 잘되길 빈다.라던가 밀란에 있던 시기는 최고의 시즌이라는 등 좋은 추억거리로 남긴듯..[28] 17까지는 유벤투스와 아약스였는데 비중이 줄어들었다. 말뫼도 상승.[29] 중거리 슛이 정말 예술이다. 영상[30] 하지만 맨유는 즐라탄의 입단소식을 팬들에게 알리기 위해 수십억의 예산을 들여 깜짝쇼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즐라탄이 먼저 SNS에 이걸 올리는 바람에 큰 손실을 보았고, 맨유 경영진은 분노했다고 한다.[31] 원래는 31번째지만, 유벤투스 FC에서의 리그 우승 2회가 칼치오폴리로 인해 삭제되었다.[출처] 스쿼카[32]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퍼거슨 이후로 즐라탄이 떠나고 솔샤르가 감독으로 부임할 때까지도 숱하게 많은 영입 중 즐라탄만큼 해 준 영입생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복귀이전까진 브루노 페르난데스에딘손 카바니 정도밖에 없었고, 이후 나락으로 추락한 맨유와 미국에서 날아다니다 친정 팀으로 복귀해 스쿠데토를 차지한 즐라탄을 비교하며 떠나고 나니 정말 맨체스터의 신이었다는 농담도 나오고 있는 중이다.[33] 한국에서는 상남자 즐라탄의 새해 인사(...)라는 움짤로 유명하다.[34] 1위는 현재 MLS 신기록인 6개의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22골을 집어넣은 베네수엘라 국대 출신의 조세프 마르티네즈.[35] 세계최초. 이 기록은 단 4명만이 달성한 기록인데, 나머지 세 명은 이동국엠레 벨로조글루, 로케 산타 크루즈이다.[36] 기존 기록은 스웨덴의 전설 닐스 리드홀름의 38세 43일.[37] 한화 약 2억원.[38] 경기당 4.65개[39] 2019년 17경기+부상 결장 3경기[40] 본인은 SNS를 통해 "즐라탄의 세계에서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강력하게 부인했고, 포그바 등 즐라탄과 뛰어본 경험이 있는 동료 선수들은 즐라탄은 인종차별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옹호했다. 다만 보도에 의하면 즐라탄은 "빌어먹을 부두교 의식이나 해 당나귀야!" 라고 먼저 공격했고, 이것이 서인도제도 출신 흑인 노예들의 종교를 비하한 인종차별성 발언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다. 해당 발언이 사실이라면 설령 즐라탄 본인에게 인종차별의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인종차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특히 최근에는 사람의 의도가 어떻든 사용해서는 안 되는 언어(대표적으로 세계인 비하명칭에 해당하는 말들)들은 써서는 안 된다고 규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에 더 위험하게 해석될 수 있다. 거기다 루카쿠가 맨유로 이적할 때 루카쿠의 어머니가 부두교 의식에 의지해 맨유로 가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말이 있어, 가서 부두교 의식이나 하라는 말은 그의 어머니까지 공격한 것으로 루카쿠는 받아들였을 것이다.[41] 밀라노 더비에서 결정적인 헤더를 두 차례 날렸으나 전부 한다노비치의 슈퍼세이브로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42] 즐라탄의 회사인 Gameday Group PLC는 Bethard의 유일한 주주이다. 즐라탄은 Gameday Group PLC 주식을 10%가량 갖고 있다.[43] AC Milan, 2022년 7월 18일, URL[44] 이때 헤딩으로 막으려다 실패한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태권도 뒷발차기를 날리는 즐라탄의 모습은 단연 압권.[45] 기사 [46] 참고로 이 사진 가슴에 써져 있는 건 you made it possible[47]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도 아니고, '나도 러시아에 간다. 축구협회가 나한테 전화해서 복귀 의사를 묻더라. 내가 월드컵 가고 싶으면 가고, 아니면 안간다.' 식으로 마치 대표팀에서 복귀 의사를 타진한 것처럼 언론 플레이를 했다. 아무래도 은퇴했다가 본선 진출하니까 복귀하겠다 밝히기엔 모양새가 좋지 않아 여론몰이를 시도한 듯.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를 꺾고 본선 진출해 환호를 받던 스웨덴 대표팀에게 언론 플레이는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눈총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