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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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 哲仁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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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철종의 황후
철인장황후 | 哲仁章皇后


조선 고종조 대비
명순대비 | 明純大妃



파일:철종 예릉.jpg

예릉 전경
출생
1837년 4월 15일(음력 3월 23일)
조선 한성부 북부 순화방 김문근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일대)
사망
1878년 5월 31일(음력 5월 12일)
(향년 42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양화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예릉(睿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851년 11월 5일 ~ 1864년 1월 4일
조선 대비
1864년 1월 9일 ~ 1878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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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신 안동 김씨[1]
부모
부친 영은부원군 김문근
(永恩府院君 金汶根, 1801 ~ 1863)
모친 흥양부부인 여흥 민씨
(興陽府夫人 驪興 閔氏, ? ~ 1872)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남동생 - 김병필(金炳弼, 1839 ~ 1870)[2]

배우자
철종 장황제
자녀
슬하 1남
아들 - 이융준(李隆俊, 1858 ~ 1859)
전호
효휘전(孝徽殿)
존호
명순휘성정원수령
(明純徽聖正元粹寧)
휘호
경헌장목(敬獻莊穆)
시호
조선: 철인왕후(哲仁王后)

대한제국: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1. 개요
2. 생애
2.1. 사후
3. 가계
3.2.1. 배우자 / 자녀
4. 여담
5. 대중매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왕비.

본관은 장동(安東), 시호는 명순휘성정원수령경헌장목철인왕후(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哲仁王后). 추후 대한제국 고종 때에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로 추존되었다. 그렇지만 사람들한테는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 혹은 명순대비(明純大妃)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장동 김씨 세도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 김씨헌종의 첫번째 비인 효현왕후 김씨에 이어 세 번째로 장동 김씨로서 왕비가 된 인물이다. 순원왕후에게는 조카 뻘인 친척.[1] 1851년(철종 2년) 9월 25일, 15살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되어 철종가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정전에 나아가 책비례를 행할 때의 교명문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관저(關睢, 시경(詩經) 주남의 편명)가 왕도(王道)의 터전이 되었으니 주남(周南)의 교화가 집안과 나라를 다스렸고,

곤상(坤象)이 건원(乾元)에 화협하였으니 주역[羲經]의 점괘에 내외(內外)를 바로잡았다.

이에 어진 보좌(輔佐)의 아름다운 덕은 바로 인륜(人倫)의 시작이다.

이에 이장(彝章, 떳떳한 글)을 상고하여 곧 옥책문(玉冊文)을 선포한다.

그대 김씨는 충량(忠良)한 화벌(華閥)의 후예요, 시례(詩禮)의 세가(世家) 명문(名門)이다.

견매(俔妹, 하늘에 비유할 여인상)의 아름다운 명성이 일찍이 드러났고, 성모(聖母)의 휘음(徽音)을 계승하기를 생각하였다.

단아(端雅)하고 근신(謹愼)하며, 유순하고 온공(溫恭)하였다.

자나깨나 좋은 짝을 구하였는데 하늘이 즉위(卽位)의 초두에 짝을 맺어 주었고,

숙덕(淑德)을 간택하여 장추전(長秋殿,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에서 중궁(中宮)의 자리에 오름이 마땅하였다.

이에 지극히 존엄함에 짝하게 되어 마침내 주량(舟梁)의 예(禮)를 거행하였다.

(중략)

이에 사신(使臣)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과 행 용양위 대호군(行龍驤衛大護軍) 서좌보(徐左輔)를 보내어

절(節)을 지니고 예(禮)를 갖추어 왕비로 책봉하노라. 아! 오직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곤위(壼闈)에 임하고,

효경(孝敬)으로 가르침을 받들게 하라. 계명장(鷄鳴章)의 경계를 마음에 새겼으니, 만기(萬機)의 내조(內助)에 힘썼고,

자손(子孫)이 번성하여 후예(後裔)가 천억(千億)으로 늘어나리로다.

방유(芳猷, 아름다운 모책)를 모두가 송축하니, 큰 복록(福祿)이 길이 편안할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모두들 알지어다."

하였다.

철종실록》 3권, 철종 2년(1851년, 청 함풍(咸豊) 원년) 9월 25일 (정축) 1번째기사

본래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비가 없던 철종에게 자기 집안의 사람을 왕비로 맞아들이도록 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단지 가문의 이해를 위해 간택되었을 뿐, 정작 왕후 본인은 한 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말수가 적고 기분의 좋고 나쁨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며 대왕대비 신정왕후왕대비 효정왕후를 극진히 모셔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남편 철종1863년(철종 14년) 승하한 이후 고종 때에는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또한 '명순(明純)'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858년(철종 9년), 남편 철종과의 사이에서 외아들 원자(元子) 이융준을 소생으로 두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에 급작스런 열병으로 6개월 만에 향년 2세로 요절했다.

1878년(고종 15년) 5월 12일, 42세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폐결핵으로 승하하였다.

대비전께서 승하하다

대비 전하(大妃殿下)께서 승하(昇遐)하였다.

고종실록》 15권, 고종 15년(1878년, 청 광서(光緒) 4년) 5월 12일 (신유) 2번째기사


대비전의 상사를 발표하는 의식을 명정전에서 거행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성의와 효성이 부족하여 오늘 인시(寅時, 오전 3시~5시)에 대비전(大妃殿)께서 양화당(養和堂)에서 승하(昇遐)하셨으니 끝없는 슬픔을 어디에 비기겠는가?"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궁성을 호위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거애(擧哀, 초상난 것을 발표함) 장소는 명정전(明政殿)으로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15권, 고종 15년(1878년, 청 광서(光緒) 4년) 5월 12일 (신유) 3번째기사

조선 왕실의 마지막 '대비(大妃)'이다. 철인왕후 다음의 왕비들인 명성황후순명효황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그 다음인 순정효황후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후의 황후다.


2.1. 사후[편집]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 경내에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 예릉(睿陵)이다. 추후 대한제국 고종 때에 이르러 남편 철종철종 장황제(哲宗 章皇帝)라는 대한제국 황제추존됨에 따라, 그녀 역시 철인왕후에서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로 같이 추존되었다.


3. 가계[편집]



3.1. 친가(안동 김씨)[편집]


  • 고조부: 김성행(金省行)
  • 증조부: 김이장(金履長)
    • 조부: 목사(牧使) 김인순(金麟淳)
    • 조모: 정부인 신씨(貞夫人 申氏)
      • 백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김수근(金洙根)
      • 백모: 정부인 조씨(貞夫人 趙氏)

  • 아버지: 영돈령부사 증 의정부 영의정 영은부원군(領敦寧府事 贈 議政府 領議政 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
  • 어머니: 흥양부부인 민씨(興陽府夫人 閔氏)
    • 오빠: 좌의정 예조판서 효정공(左議政 禮曹判書 孝貞公) 김병필(金炳弼)


3.2. 시가(전주 이씨)[편집]




3.2.1. 배우자 / 자녀[편집]




4. 여담[편집]


  • 철인왕후는 조선대비들 중 유일하게 왕대비가 되지 못한 대비였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원칙적으로 선왕의 정실 부인인 대비(大妃)의 정식 명칭은 왕대비(王大妃)이다. 하지만 보통 줄여서 대비라고 부르는 것. 따라서 인수대비(소혜왕후), 소성대비(인목왕후)[2] 등의 정식 존호는 인수왕대비, 소성왕대비인 것이다. 그런데 조선 말기로 오면서 순조,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으로 추존하면서 왕실여성 웃어른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철종 대에는 선선선대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선선대 왕비(추존 문조비 신정왕후 조씨), 선대 왕비(헌종비 효정왕후)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대왕대비 위 혹은 대비(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비(왕대비) 아래에 '대비'라는 단계를 새로 만들었고 선대 왕비들의 서열이 '대왕대비' - '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의 3단계로 재편된 것이다. 그래서 효정왕후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 인원왕후, 정순왕후 등 이전 왕비들이 대비(왕대비)로 존봉된 것과는 다르게 '대비'로 존봉받았다. 그런데 철종 또한 젊은 나이에 대왕대비(신정왕후), 왕대비(효정왕후)보다[3] 먼저 승하하면서 철인왕후도 왕대비가 아닌 어정쩡한 '대비'의 칭호를 받았다. 게다가 고종이나 신정왕후보다 일찍 승하왕대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대비(大妃)'로만 남았다.[4]



5. 대중매체[편집]


남편 철종부터 사극에 잘 등장하지 않는데다가 설령 철종이 등장하더라도 조연 또는 단역 수준으로 세도정치 시기 고통받는 민초들에 초점이 맞춰졌을 때 잠깐 얼굴만 비춰지거나 고종의 즉위 직전에 골골거리다가 사망하는 역할로만 나온다. 그러한 입지로 인해 철인왕후도 사극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자주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2020년~2021년까지 방영된 tvN 드라마 《철인왕후》에서 남편과 함께 주인공으로 재조명된 건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임금님의 첫사랑 철인왕후.jpg}}} ||
  • 1975년 TBC 드라마《임금님의 첫사랑》에서는 아역엔 최유리가 연기했고, 성인 역은 전영선이 연기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역을 연기한 전영선의 성인 연기 데뷔작이며, 아역인 최유리의 연기가 화제를 모았다. 해당 드라마에서 철인왕후는 첫사랑인 양순이를 못잊어 하는 철종을 걱정하며 양순이를 뒤에서 도와주는 모습이 나온다. 드라마 철인왕후 이전에 방영된 사극들 중에서 철인왕후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풍운 철인왕후.png}}} ||
  • 1982년 KBS 드라마 《풍운》에서는 배우 조남경이 연기했다. 큰 비중은 딱히 없으며 원자 이융준을 잃고 슬픔에 빠진 모습과 왕실 사람들과 함께 새로 중건한 경복궁을 둘러보는 모습이 나온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왕조 오백년 철인왕후.jpg}}} ||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11부 대원군에서는 배우 채유미[5]가 연기했다. 철종(최수종)의 비가 되었으나 첫날 밤부터 양순이(신윤정)를 잊지 못하는 철종에게 소박맞는다. 그래도 항상 남편 철종을 생각하며 걱정하는데 철종이 죽기 직전에 조 대비(고두심)가 대보(大寶)를 챙겨 나가려 하자 "아직 전하가 살아있는데 이럴 수 없다"면서 눈물로 막지만 힘에서 밀려 실패했다. 고종(김홍석) 즉위 이후에는 간간히 왕실 어른 1 정도의 단역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와는 달리 1880년대에도 살아있는 것으로 나온다.[6] 대한제국 시기까지 생존했던 헌종왕비 효정왕후가 등장하지 않은 것을 보아 효정왕후포지션도 철인왕후가 담당한 듯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철인왕후(드라마 명성황후).jpg}}}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철인왕후 김소용 인수타그람.png}}} ||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소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8 21:29:53에 나무위키 철인왕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김조순김수항의 아들인 노론4대신 중 한명인 김창집의 4대손인데, 철인왕후의 아버지인 김문근은 김창집의 동생인 김창협의 5대손이다.[2] 흔히들 인목대비로 알고 있는데 정식 존호는 소성왕대비이고 '인목'의 존호왕후에 붙은 것이다.[3] 효정왕후도 처음에는 대비로 존봉되었지만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 김씨1857년(철종 8년)에 승하하자 신정왕후와 함께 1단계씩 올라가서 왕대비로 존봉받았다. 게다가 효정왕후는 73세의 나이로 1903년(광무 7년)에 승하하여 대한제국 수립까지 보고 황태후 칭호를 들었다. 철인왕후도 생전에 두 대비 중 1명이 승하했다면 1단계 올라간 왕대비로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신정왕후는 무려 83세까지 생존해 불과 명성황후보다 불과 5년 전에 승하하여 '조선 역사상 제일 장수한 왕비'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철인왕후가 일찍 승하한 탓도 있지만 동서(신정왕후)와(신정왕후의 남편 익종과 철인왕후의 남편 철종은 같은 항렬이고 더군다나 철종순조양자가 되어 족보상으로는 익종과 동복 형제이다.) 조카며느리(효정왕후)가 유독 장수하여 최소한 12년은 더 살아야 선선선대 왕비의 죽음을 보고 승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4] 이와 비슷한 사례가 조선성종 연간에 있었다. 세조비 자성대왕대비(정희왕후) 윤씨와 성종의 모후인 인수왕대비(소혜왕후), 예종비 인혜왕대비(안순왕후) 이렇게 대비 3명이 함께 생존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 하지만 인수대비인혜대비는 동서지간이고 인수대비의 남편이자 성종의 생부인 도원군(의경세자)은 세자 시절 이른 나이에 요절했으므로 공식적으로 즉위한 적이 없어 특별히 명칭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성종이 즉위할 때 대왕대비 정희왕후성종정통성왕실의 서열을 고려하여 인수대비인혜대비보다 위에 두는 것으로 결정하여 자성대왕대비 > 인수왕대비 > 인혜왕대비의 서열이 확정되었다.[5]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9부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후궁이자 철종의 증조할머니 숙빈 임씨 역.[6] 갑신정변, 경복궁에 처음 전기가 설치되었을 때에도 나온다.[7]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를 모티브로 하는 가공의 가문.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