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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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편집]
수만 년 전 현생 인류의 흔적이 이베리아 반도에 나타나며, 바스크어 및 이베리아어 등의 고히스파니아 제어 계열 언어들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지만, 로마 공화정에 정복당하기 이전의 역사는 미지에 싸여있다. 이들 이베리아 반도 토착민들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뒤 로마 제국에 편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로마 공화정 시기인 기원전 150년경에는 현대 포르투갈인의 먼 조상이 되는 루시타니아인들이 비리아투스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루시타니아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로마에 정복된 후 기원전 29년엔 루시타니아 속주가 설치되었고,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서고트족과 수에비족 등 게르만계 민족이 정착했고, 8세기경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아랍인, 베르베르인 일부가 건너와 현대 포르투갈인으로 발전했다.[1]
2. 중세[편집]
포르투갈의 기원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알폰소 6세(Afonso VI)가 자신의 딸 테레사 데 레온과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2] 에게 준 포르투갈 백국. 이후 그들의 아들 엔히크[3] 가 전쟁을 통해 공작으로 독립하고 레콩키스타 중 이슬람 왕조에 승리를 거둔 것을 계기삼아 본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아폰수 1세라 칭했다. 교황의 중재로 카스티야 왕국도 이를 인정하고 교황의 정식 인가를 받아 국제적으로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받게 되어 아폰수도 자칭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왕이 되었다.
참고로 이 포르투갈 백국은 현재의 포르투갈을 절반을 잘라서 그중 북쪽만 포르투갈 백국의 영토였으며 포르투갈 백국 시절에는 현재의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무어인의 영토였다.
3. 대항해시대[편집]
유럽에서도 서쪽 구석 끝에 위치했고 대서양 바다에 접근하기도 쉬워서 일찍부터 진출하려고 했다. 기존의 지중해-오스만 제국-동방 루트를 대체하기 위해서 15세기 초부터 엔히크 왕자의 주도 아래 아프리카로 탐험대를 보낸다.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희망봉을 발견하고 이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해 대박을 치게 된다. 한때는 교황의 중재 아래 스페인과 더불어 토르드질랴스 조약[4] 으로 세계를 분할할 정도의 해양 강대국이었다.
과거 주요 식민지로는 브라질, 아소르스 제도, 모잠비크, 앙골라, 상투메 프린시페,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동티모르, 마카오 등이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식민지인 브라질은 스페인의 콜럼버스가 신대륙(아메리카)을 발견하고 8년 뒤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발견했는데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나눈 선보다 동쪽에 있어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스페인의 경우는 소수의 콘키스타도르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대군조차 야전에서도 거뜬히 상대하고 심지어 스페인 군견 한 마리가 원주민 전사 세 명과 대등한 전투력을 지녔던(...) 반면 포르투갈의 경쟁 상대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맘루크 왕조 등 쟁쟁한 나라들이 많았다. 이런 나라들은 중앙집권화가 잘 되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웠으며, 소규모 탐험대가 어설프게 야전을 벌였다간 우수한 화기를 보유한 대군에게 포위당해 전멸당할 위험이 컸다. 그래서 포르투갈인들은 먼저 해안 거점 지역에 석조 요새를 건설하고 대포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영토를 넓혔다. 명나라에서는 젖은 화물을 말린다며 땅 하나를 빌려놓곤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영구 임대해 갔는데 그게 마카오다.
그래도 동방에서도 포르투갈 군대의 위력은 상당해서 불과 7백 명의 콘키스타도르들이 2만 명이 지키는 말라카를 점령하고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고 이것을 기점으로 명나라에 유럽식 화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페르낭 드마갈량이스도 포르투갈 출신.[5]
이때만 해도 포르투갈의 위상은 상당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로서 해상제국으로서의 위치는 스페인보다 한수 위였을 정도, 유럽의 한 사신이 동쪽으로 가다가 서남아시아 지방에 잠시 정박했는데 현지 군인 장교가 사신을 보더니 포르투갈어로 말을 걸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것은 당시 포르투갈어가 적어도 유럽과 중동에서는 국제어 중 하나의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1500년 무렵에는 인구도 1,000,000명 정도로 많지는 않았지만, 스페인과 다르게 유대인들을 추방하지 않고 명목상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해외 식민지 개척에 이용하고,[6] 군인들과 선원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는 서아프리카에서 수입해온 흑인 노예로 충당하였다.
인도양의 해상 무역 루트를 노리고 자주 소규모 군사 원정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나 이슬람 토후국들과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에서 싸우기도 했고 동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해 발판으로 교역의 발판으로 삼은 뒤 오만과 호르무즈 해협을 잠시 정복하기도 했다.[7] 심지어 미얀마의 용병대장 필리페 드 브리투가 미얀마 남부에 자신의 국가를 세웠다가 나중에 미얀마에 쫒겨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말라카와 동티모르 지역도 점령하였고 스리랑카도 잠시 정복해서 장대한 해상 제국을 세웠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쳐들어간 적도 있지만 당시 인도는 무굴 제국 체제에서 악바르 대제 같은 명군인 황제들이 통치하고 무기나 병력 수, 장비, 사기에서도 절대로 뒤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포르투갈 원정군이 제압당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도 포르투갈군은 인도 남부의 소규모 제후국들이 다스리는 해안가 지방에 석조 요새를 건설하고 대포를 설치한 후 캘리컷이나 고아(인도)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인도를 점령한 후 캘리컷에서 유입된 커리가 포르투갈 요리에 흡수되었다. 바로 고아 지방에서 먹는 빈달루 커리로 커리 중 돼지고기가 들어 가는 유일한 커리다.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영향으로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둘 다 잘 안 먹고 양고기, 염소고기, 닭고기를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도 무역의 혜택을 보면서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자금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시작한 포르투갈 왕실에 의해 국가 산업이 변화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그렇게 큰 국가는 아니었는데 지나치게 원양 교역에 집착한 덕분에 국내 산업에 완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의 해외 무역은 수익률은 좋긴 했지만 인도로 떠난 상선의 반이 돌아오면 초대풍작일 정도로
이런 무역과 식민지 전쟁은 포르투갈처럼 내실이 탄탄하지 않은 규모가 작은 국가가 지속해나가기는 어려웠다. 지역 세력의 반발과 주변 국가들의 침공으로 몇몇 오지를 제외하고 알짜배기 땅은 점령했다가 도로 빼앗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포르투갈은 해외로 파견한 군인과 선원들의 생존율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선원들이 탈영하는 일도 흔했으며 심한 경우 포르투갈에서 새로 파견 나온 신병들이 식민지에서 먹을 게 없어서 현지인들에게 구걸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왕실은 무역으로 쓸어담은 부를 군인과 선원들을 보상하는데 쓰지 않고 부정 축재를 하니 국가도 피폐해졌다. 게다가 바다로 나간 남자들이 폭풍과 함께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나중에는 군대에 징집할 남성마저 조금 부족해졌다.[8] 포르투갈의 식민지 상당수는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한 현지인이 중추가 되어 운영되었는데,[9] 나중에는 심지어 포르투갈 본국을 지킬 병력조차 턱 없이 부족해져 식민지에서 온 흑인이나 해외 징집병으로 보충하지 않고는 국방이 불가능해졌다. 포르투갈은 이미 대항해시대부터 흑인 해방 노예와 본토의 백인 여성과의 출산이 일상적이었고 흑백혼혈이 많았으며, 인도계와의 혼혈도 꽤 이루어졌다.[10]
다른 한편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 가톨릭 강제개종 정책은 식민지에서 믿을 만한 병력이나 인원을 무상으로 징집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대신 에티오피아에서는 현지 오리엔트 정교회 기독교인들과 충돌하여 식민지를 내륙 일대로 확장하는데 실패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남인도 케랄라의 기독교인 공동체나 스리랑카 역시 포르투갈의 강압적인 종교 정책에 질려 네덜란드 쪽으로 투항하였다.
17세기에는 16세기 초에 이집트 지역의 맘루크 왕조의 해군을 격파할 정도로 강성했던 해군도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포르투갈이 구축한 교역망에 다른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이 진입해 포르투갈의 인도양 세력권은 약화되기 시작한다. 1612-1613년에는 스리랑카 동부 칸디 왕국의 해군 선단이 스리랑카 서부와 인도 남부의 포르투갈령 항구를 공격해 포르투갈이 패배하고 수십 척의 배가 손실되기도 했고 1622년에는 잉글랜드의 도움으로 사파비 제국에 호르무즈를 빼앗겼다. 17세기 중반에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완전히 수세에 몰려 현지의 조호르 술탄국과 연합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에 1641년 말라카가 점령되는[11] 등 소순다 열도의 플로레스섬과 티모르 섬 동부와 두 곳 사이의 소규모 도서 지역을 제외하면 모든 세력권을 네덜란드에 빼앗겼다. 1696-1698년에는 오만 제국이 동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 몸바사를 공격해 제주스 성채(Forte Jesus de Mombaça)를 함락하고 몸바사를 점령했다. 결국 18세기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인도 해안지대[12] , 소순다 열도 일부, 모잠비크 지역만을 식민지로 유지했다.
4. 이베리아 연합 결성과 해체[편집]
아비즈-베자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던 세바스티앙 1세가 국력을 총동원해서 무리하게 시행한 모로코 원정에서 후사 없이 전사했고 세바스티앙의 삼촌인 추기경 엔히크가 환속해서 왕위에 올랐지만 얼마 후 노환으로 죽어서 왕실 직계 혈통이 끊겼다. 이것을 노린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어머니 포르투갈의 이자벨이 포르투갈 공주라는 이유로 왕위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아비스 왕조의 방계 혈통으로서 왕위를 요구한 안토니우를 몰아내고 무력 합병해 이베리아 연합으로 편입시키고 압스부르구-필리프(합스부르크-펠리페) 왕조를 열어 자신이 포르투갈의 왕 필리프 1세로 즉위했다. 형식상 스페인-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이지만 그 지위는 스페인의 핵심인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아래였다. 그렇지만 이베리아 연합으로 흡수된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였던 리스본의 인구는 1600년에는 100,000명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많았을 정도였다.
이후 포르투갈의 독립 세력은 포르투갈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에게서 결국 독립했지만 국력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이때 동군 연합 시기 이전부터의 동맹이었던[13]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아서 안 그래도 친했던 영국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국력 자체가 압도적이지 않았고 반대로 영국은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서 17세기 이후의 포르투갈은 영국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14] 독립하고 나서부터는 인구가 다시 빠르게 증가해서 1700년 무렵에는 2,000,000명 정도가 되었고 1700년에 리스본의 인구는 170,000명에 달했지만 국력은 많이 증가시키지 못했다.
1755년 11월 1일에는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가 수도 리스본을 덮쳐 큰 피해를 입었다.(리스본 대지진) 이때 최소 3만 명이 사망했고 7만 명 가까이 피해자가 발생했는데 하필 이 날은 가톨릭의 축일인 만성절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리스본의 사창가는 대부분 무사했기 때문에 이 참극은 유럽 각지에서 종교적 신념이 약해진 계기 중 하나로도 많이 언급되는데 종교적 명절에 사망자 대다수가 독실한 신도에 많은 교회들이 무너진 반면에 더럽다던 사창가가 무사했으니 정말 신이나 예수가 있는 거냐며 유럽 각지에서 계몽주의 학자들은 "이것 봐라, 예수니 뭐니 믿어도 이건 뭐냐? 어디 좀 설명 좀 해봐라!" 라고 주장했고 유럽 각지에서 무신론도 널리 퍼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해서 교황청도 당황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어이없는 논리지만 그만큼 당시의 기독교 신앙은 실천적, 생활적인 측면이 강하기도 했다. 그래도 리스본은 다시 도시를 회복하고 1800년에는 인구가 180,000명이 되었다.
5. 브라질의 독립과 포르투갈 내전[편집]
나폴레옹 전쟁 시기 진격해 오는 프랑스군에 의해 본토의 점령이 눈앞에 닥쳐 오자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조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수도를 옮기면서 브라질 왕국이라는 새로운 왕위를 만들어 포르투갈-브라질 연합 왕국을 결성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브라질이 살 만하자 눌러 앉아 있던 국왕 주앙 6세는 왕이 안 돌아 오자 분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본국 분위기를 보고 이것을 달래기 위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브라질에 남아 있었던 아들 페드루는 이 기회를 틈타 브라질 제국으로서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1822년) 자신은 브라질 제국의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약해진 포르투갈은 독립을 선언한 브라질을 어떻게 저지할 힘이 없었고 결국 브라질의 독립을 허용했다. 1820년 포르투갈의 인구는 3,300,000명으로 성장해 있었지만 브라질은 그보다 인구가 더 많아져 있었다. 이것은 브라질의 천연 자원과 노예 노동으로 부를 얻던 포르투갈에게 피해를 주고 식민지 건설에도 결정타를 날리는 사건이었고 브라질 독립 이후 포르투갈 왕국은 국제적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1822년 주앙 6세에 의해 포르투갈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어 포르투갈은 입헌군주정이 된다. 그런데 주앙 6세의 사후 브라질 황제이던 페드루 1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잠시 계승해 페드루 4세가 되었다가(재위 1826년 3월 10일-1826년 5월 2일) 곧 딸인 마리아 2세에게 양위했다. 페드루 4세는 짧은 집권기 동안 주앙 6세의 헌법을 개정하고 물러나서 포르투갈 정계의 중재자 역할을 했는데 문제는 페드루 4세가 당시의 포르투갈 기준으로는 꽤 자유주의적인 군주였고 포르투갈의 지배층은 페드루의 상상 이상으로 보수적이라는 것이었다. 1826년 헌법은 국왕이 주도한 것이었는데도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 분립과 양원제 의회의 창설, 국왕의 권한 제한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국왕 절대주의를 지지하던 지주와 귀족 계층은 과거 절대왕정의 복원을 요구하며 자유주의자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1828년 2월 외유 중이던 보수주의자 동 미겔 왕자가 귀국하자 절대주의자들이 미겔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양원제 의회는 해산되고 1828년 5월에는 중세적인 전통 의회 코르트스(Cortes)가 소집되어 코르트스의 의결에 따라 동 미겔은 포르투갈 국왕 미겔 1세(재위 1828년-1834년)가 되었다. 1826년 헌법은 무효화되었고 절대주의 복고가 일어났다. 사태를 지켜보던 자유주의자들은 1828년 5월 18일 자유주의의 중심지이던 포르투에서 마리아 2세와 페드루 4세(브라질의 페드루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봉기한다.
내전은 초기에는 절대주의 성향이던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재위 1808년, 1813년-1833년)의 도움으로 미겔 1세 측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영국이나 스페인으로 망명을 갔다. 브라질의 페드루 1세도 브라질 국내 사정 때문에 아들에게 양위하는 등 절대주의 복고로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영국이 개입해 막강한 해군력으로 자유주의자들을 지원하였다. 결국 영국-자유주의자들의 연합이 승리를 거두고 내전은 1834년 마리아 2세가 복위하고 아버지 페드루 4세가 섭정이 되는 형태로 끝난다. 페드루 4세는 헌정을 부활시키고 나서 1834년 9월 24일에 죽었고 이후부터 마리아 2세의 치세(~1853년)에 입헌 정치가 계속된다.
수년간 진행된 내전에서는 포르투갈의 인적, 물적 자원이 막대하게 소모되었고 외세인 영국, 스페인, 브라질이 포르투갈 내전의 향방과 국내 정치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이후에도 포르투갈은 영국의 강한 영향권하에 놓였다. 한편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래도 포르투갈의 인구는 서유럽의 다른 국가처럼 계속 증가해서 1870년에는 4,400,000명이 되었다.
6. 현대[편집]
국내에서 공화파와 왕정파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카를루스 1세 국왕과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가 암살된 뒤 어린 마누엘 2세가 즉위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10년 혁명에 의해 당시 국왕이었던 마누엘 2세가 퇴위하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혁명이 일어난 1910년 포르투갈의 인구는 6백만 명으로 증가했지만 서유럽 전체에서 인구 증가는 일어났고 다른 나라들보다 국력은 오히려 뒤쳐지고 있었다. 설상가상 공화국이되고 나서 분열된 정치권의 반목은 정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15] 세계 대전 참전의 뒷감당에 실패해 촉발된 인플레이션과 집권 세력 간의 정치적 혼란이 끊임없던 상황 속에서 결국 1926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노조와 공산당조차 정권을 지지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쿠데타 정권은 성공적으로 정권을 전복했다. 그 후 1933년까지 포르투갈 국가독재라는 헌법 공백기가 존재했다가 경제학 교수 출신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를 총리로 한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설립된다. 살라자르는 3F 정책을 비롯한 우민화 정책을 적극 실시하여 포르투갈의 문맹률을 급격하게 높여 버린다. 그러면서도 경제학 교수 출신이기도 해서 협동조합주의 경제 정책 등으로 살라자르 마음대로 산업을 통제하고 성장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강력한 디플레이션 정책과 부채 지불, 건전한 예산으로 매년 포르투갈의 재정은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프랑스 등의 식민제국들의 식민지들이 서서히 독립하면서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의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에 대항해 포르투갈군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50년 포르투갈의 인구는 850만 명이었는데 서유럽에서는 빠르게 증가한 편이었지만 다른 지역의 엄청난 성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격차가 커져 갔다.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대륙의 3개 포르투갈령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식민지 독립 전쟁(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막고 식민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식민지 독립 운동 진압에 막대한 군비를 쏟아 부으면서 포르투갈의 국력을 조금씩 소진하고 있었다.[16] 살라자르는 1968년 뇌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집권하다가 쓰러지자 실각당했다. 살라자르가 물러나고 카에타누가 총리직을 이어 받은 이후에도 독재 정권과 식민지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74년 청년 좌파 장교들에 의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면서 독재 정권이 결국 붕괴되었고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새로 들어선 정부는 아소르스 제도, 마데이라 제도, 마카오를 제외한 그때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 카보베르데 같은 국외 식민지들을 포기하고 이들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국외의 넓은 땅을 포기하면서 영토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남은 식민지 중 하나였던 마카오도 1999년 12월 중국에 반환했다. 이로써 500년 지속된 포르투갈 식민제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한편 경제적으로도 성장에 집중해서 90년대 초~중반에 선진국에 진입하는데 성공했고[17] 한 동안 국내 산업이 막장세를 달려 가던 브라질로부터 이민자가 들어오는 등의 호황을 누리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화 위기를 맞아 경제가 급속히 안 좋아지면서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처럼 심각한 혼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현재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중에 있다. 이웃 스페인보다 체감 경기는 조금 낫고 실업률과 청년 실업률이 스페인보다 양호한 편이다. 다만 이건 노동 인구가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등으로 빠져나간 영향도 크다. 2010년대 전반기에만 60만명이 빠져나갔고 출산율도 1명대 초반으로 떨어져서 사회 전체의 고령화도 가속화되어가는 중. 그래도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동티모르에서 노동 인구를 인도해 오는 것으로 어떻게든 막아 보고 있다.[18] 2014년 이후부터는 원자재 가격 하락의 여파로 브라질과 앙골라의 경제가 급속히 침체되면서 이민 행렬은 잠시 줄어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시이기는 하고 없던 일자리가 생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상태가 좋아지기 위해서 많은 정책을 펴고 있다.
7. 역대 국가수반[편집]
7.1. 역대 국왕[편집]
7.2. 역대 대통령[편집]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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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현 포르투갈인들의 유전적 요소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선사시대 부터 북아프리카, 중동-레반트 지역에 살고 있었던 민족이 포르투갈을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왔었다. 고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과 형질이 유사한 민족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고 있었던 셈이다. 현 포르투갈인의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은 북아프리카인, 켈트인과 소수의 게르만인의 혼혈이라 볼 수 있다.[2] 프랑스 왕국의 부르고뉴 공작 앙리의 아들로 프랑스어로는 앙리 드 부르고뉴가 된다. 부르고뉴 공작은 원래 프랑스 카페 왕조의 로베르 2세의 막내아들 로베르의 후손으로 카페 왕조의 방계 왕족이다.[3] 엔히크 드 보르고냐로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 엔히크 공작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엔리케라는 표기도 많이 보인다.[4] 포르투갈어로 읽었을 때의 발음.[5] 그러나 이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한지라 대서양과 대부분 스페인 땅인 아메리카 대륙을 건너 아시아로 간다는 마젤란의 항해 계획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이로 인해 포르투갈이 독점한 인도항로를 대신해 새로운 동양과 무역로를 개척해 이익을 보고 싶었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후원을 받았다.[6] 특히 브라질[7] 잠시라고는 해도 거의 150년 간이었다. 나중에 오만 내륙 지방의 이슬람 제후와 오스만 연합군에게 밀려서 모조리 빼앗긴 뒤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지역도 남부 모잠비크 지역을 제외하곤 대부분 다 뺏긴다. 이후 오만이 오만 해상제국을 세워서 서구 열강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지배한다.[8]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인도양 해상 무역을 장악한 네덜란드 공화국의 경우 이웃 독일어권 국가들에서 온 빈농 출신 이민자들로 선원을 충당한 덕분에 이런 문제가 별로 없었다.[9] 일례로 포르투갈령 스리랑카의 경우 2만 대군을 동원할 때 포르투갈 본토 출신 병력은 천여 명 정도에 나머지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스리랑카 현지인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 남인도인 용병으로 메꿨다.[10] 고안 가톨릭, 콘칸인 문서 및 오늘날 포르투갈 본국으로 간주되는 아소르스 제도 문서 참조[11] 1606년에도 네덜란드-조호르가 말라카를 침공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때는 포르투갈이 수비에 성공했다.[12] 이마저도 그리 안정적이지 못했다. 18세기 중반 포르투갈령 인도는 마라타 동맹의 침공으로 4년간(1737-1741)의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가운데 1739년 아라비아해에서 포르투갈의 중요 거점이었던 바사잉(Baçaim, 오늘날의 바사이)이 마라타에 점령당했다.[13] 공식적으로 동맹이 체결된 것은 1386년부터로 이미 이때부터 계산해도 현재까지 유지되는 세계 최장 기간의 동맹 관계지만 포르투갈 건국시기와 대 이슬람 레콩키스타가 한창이던 1186년 리스본 공략전에서도 잉글랜드인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인 십자군의 원조가 전투의 승리와 함께 성공적인 건국을 이뤄낸 것을 생각하면 양국의 동맹 관계는 거의 900년에 가까운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14] 그래도 포르투갈이 영국에 끼친 결정적인 문화적 영향이 하나 있다. 바로 홍차 문화.[15] 얼마 후 이웃나라 스페인도 왕정 폐지 후 혼란이 심해진다.[16] 모잠비크와 앙골라는 남부 아프리카 일대에서 백인 지배 체제의 기득권 유지를 노리던 아프리카의 백인 지배국이었던 남아공과 로디지아가 포르투갈을 지원하여 포르투갈군이 남아공과 로디지아 백인 정권의 지원, 묵인하에 앙골라, 모잠비크의 식민지 독립군들을 진압하며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했지만 기니비사우에서는 모잠비크와 앙골라에 개입하며 포르투갈을 도왔던 남아공이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으면서 현지의 식민지 독립군이 포르투갈군을 크게 압박하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17] 그런데 포르투갈은 이로부터 30여 년이나 지난 2024년 현재까지도 '선진국의 최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8] 실제 브라질의 출산율은 1명대 후반 수준으로 그리 높다고 볼 수는 없는 수치지만 앙골라(2017년 5.6), 모잠비크(2017년 4.92), 동티모르(2017년 4.09)는 출산율이 아직도 2명대를 훌쩍 넘는다. 그러니까 이들 국가의 교육 수준이 향상된다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19] 공동[20] 공동[21] 브라질 제국의 황제로서는 페드루 1세. (재위 1822년 ~ 1831년)[22] 복위[23] 공동[24] 사임[25] 암살[26] 강제 사임[27] 군부[28] 군부[29] 군부[30] 사회당[31] 사회당[32] 사회민주당[33] 무소속(사회민주당 소속이나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당원 자격을 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