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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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정강왕2년(888)[1]


파일: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png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1. 개요
2. 내용
3. 기타
4. 외부 링크
5. 국보 제47호



1. 개요[편집]


파일:쌍계사 대웅전 앞 계단 아래의 진감선사탑비.jpg
쌍계사 대웅전 앞 계단 아래의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지리산 산자락에 있는 쌍계사의 대웅전 앞 계단 아래에 위치한 흑대리석제 비신과 화강암제 귀부[2] 및 머릿돌로 구성된 비석으로, 통일신라 정강왕2년인 887년 7월에 세워졌다.[3]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쌍계사는 724년(신라 성덕왕 23년) 의상의 제자인 대비(大悲), 삼법(三法)이 창건한 사찰이며, 840년(신라 문성왕 2년)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가 쇠락한 절을 크게 일으켰다. 850년 진감선사가 입적하였고, 입적 후 37년이 지난 887년에 왕명을 받은 최치원이 글을 쓴 본 비석이 세워진 것이다.

본 진감선사탑비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 글을 쓴 4개의 비문[4] 중 하나로, 비문의 초반부에는 유교, 불교, 도교삼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음을 적었고, 중반부에 진감선사의 생애와 업적을 적었으며, 후반부에는 쌍계사의 명칭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 탑비의 건립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道不遠人, 人無異國)" 라는, 비석의 내용을 시작하는 문구가 잘 알려져 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1962년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편집]


파일: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현지 설명판.jpg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현지 설명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총 높이 약 3.6m, 비신의 높이는 약 2.1m이며, 세워진지 천년 이상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비석과 지붕돌의 일부가 깨지고 손상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현대까지 거의 온전하게 전해졌으며 비석에 적힌 비문도 역시 잘 남아있는 편이다. 비석이나 귀부는 당대 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비문의 문장과 글은 앞서 언급 됐듯이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작성했다고 비문에 밝히고 있으며, 글씨는 승려 환영(奐榮)이 새겼다고 비문에 적혔고, 서체는 해서체로 2,423자가 새겨져있다.[5]

파일:진감선사탑비 측면.jpg
진감선사탑비 측면
진감선사탑비는 신라 하대 선종에 큰 영향을 끼친 진감선사 혜소(慧昭, 774~850)가 입적한 뒤, 37년이 지난 887년(신라 정강왕 2년) 7월에 건립되었다. 다만 이를 진성여왕 원년 7월로도 볼 수도 있는데, 정강왕이 887년 7월 5일에 사망했고 진성여왕이 바로 다음 왕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확정하기 위해서는 일자까지 확인해야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비문에는 위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 비석의 좌측 부분이 훼손되어 있는데다가 여기에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적혀 있었어서 현재로썬 직접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1725년(조선 영조 1년)에 만든 목판에 비문의 내용을 옮겨 적어놨는데, 여기에 비문이 훼손 되기 전의 내용이 남아 있어 진감선사탑비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건립일이 '광계3년 7월 일(光啓三年七月日)'[6]로만 확인되어서 정확히 7월 며칠에 세웠는지 특정이 어렵다. 다만 이는 크게 중요한 지점은 아닌데, 하술할 탑비의 내용을 보면 탑비의 건립을 추진한 것은 헌강왕과 정강왕이기 때문이다.

본래는 진감선사의 사망 당시에 탑비를 세우려 했으나 진감선사가 생전에 자신의 탑비와 승탑을 남기지 말 것을 부탁하여 시행되지 않았다가 입적 후 30년이 넘은 후에야 탑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사망 후 30년도 넘게 시간이 지났음에도 탑비 건립이 논해질 정도로 진감선사가 신라 하대의 선종 불교에 영향력이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진감선사는 속성이 최씨로, 선조는 중국 산동 지방 사람이었는데 고구려-수 전쟁에 끌려가 싸우다 항복해 고구려인이 되었고, 고구려 멸망 후 보덕국을 거쳐 금마군(지금의 익산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파일:진감선사탑비 귀부.jpg
파일:진감선사탑비 전체.jpg
진감선사탑비 귀부
진감선사탑비 전체
진감선사탑비 자체를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검은 색 비신과 귀부, 그리고 비신 위에 얹어진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을 지탱하고 있는 귀부는 거북 모양으로 전형적인 신라 말기의 양식을 취했다. 거북의 머리는 용의 머리처럼 만들어졌고, 거북의 등은 큼지막한 육각형의 등무늬로 꾸며져 있는데 딱히 사실적이진 않고 간단하게 정형화된 육각형이다. 한편 거북의 다리는 아주 작게 만들어놔서, 거북의 전체적인 모습과 비교하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다. 또한 거북의 등에 직사각형 모양의 비좌가[7] 올라가 있는데, 비좌는 각 면을 구름 문양으로 장식했다.

파일:진감선사탑비 비신 전면.jpg
파일:진감선사탑비 비신 후면.jpg
진감선사탑비 비신 전면
진감선사탑비 비신 후면
세로로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비신은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서 진감선사탑비를 볼 때 눈에 잘 띄는데, 안타깝게도 일부분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버렸고, 군데군데 갈라진 부분이 있으며[8] 11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마멸된 부분도 있어서 다소 손상이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추가적인 손상을 막기 위해 보수를 했는데 비신을 둘러 싸도록 철재로 고정하여 보강해 놓은 상태다.

파일:진감선사탑비 머릿돌.jpg
진감선사탑비 머릿돌
비신 위에 올라가 있는 머릿돌의 전면 중앙에는 '당해동고진감선사비(唐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비의 명칭을, 전서체에 기반했으나 자형에 구애받지 않는 신묘한 필치로 쓴 것을 양각으로 새겼다.[9] 명칭 양 옆으로는 똬리를 튼 용이 각각 한 마리씩 위치하고 있으며, 용 주변으로 구름, 연꽃 등을 장식했다. 머릿돌 제일 위에는 연꽃받침 위에 보주(寶珠)를 올려서 마무리했다.

파일:진감선사탑비 전면.jpg
진감선사탑비 전면
진감선사탑비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비석에 적힌 그 내용이다. 탑비의 비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진감선사의 선종 사상에 대해 최치원 본인이 그 의미를 밝힌 서문과 진감선사의 생애를 기록한 본문, 쌍계사의 유래와 비석을 세우게 된 과정 등을 밝힌 마무리 부분 그리고 진감선사에게 바치는 시이다. 최치원은 서문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ㅁㅁㅁ敎撰幷書篆額'라고 밝히는데,[10] 이를 해석하자면 '전(前)에 서국(西國)에서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承務郞 侍御史 內供奉)을 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던 신(臣)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쓰며, 제액[11]의 전자(篆字)를 씀.'으로,[12] 비문의 글과 글씨, 그리고 비석의 명칭까지 쓴 사람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이는 서예사적 측면에서 대단히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은 서문을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의 다름에 구애받지 않는다.(道不遠人人無異國)"라고 밝히면서 시작하는데, 유가, 불가, 도가 이 삼교의 사상이 겉으론 서로 다르지만 근본적으론 서로 통하는 바가 있으며 결국 하나의 길로 돌아간다는 만류귀종을 주장하며 진감선사가 이러한 경지에 이른 인물이라 평한다.[13] 본문에서는 진감선사의 생애와 관련 상황들을 자세히 기록하였고, 마무리 부분에서는 탑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상세히 밝혔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감선사가 입적하였을 때 문성왕이 탑비를 세우려 했으나, 결국 자신을 기리는 비를 세우지 말라는 진감선사의 유지를 따라서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문성왕의 대를 이은 헌강왕에게 신하들과 진감선사의 제자들이 이 비를 세울 것을 간청해서 그리하도록 명을 내렸지만 일이 제대로 진행 되기도 전에 헌강왕이 세상을 떴다. 이에 왕위를 계승한 정강왕이 이어서 건립을 추진했으며, 마침내 탑비가 887년 7월에 세워진 것까지를 비문에서 밝히고 있다. 문제는 헌강왕이 887년 7월 5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고 비석을 세운 시기가 887년 7월이라는 것까지만 확인되어서, 정강왕이 아직 살아있던 7월 5일 이전에 본 비석을 세운 것인지 아니면 헌강왕을 이은 진성여왕 원년(887)의 7월 경일지 불명확하단 것이다. 다만 이는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설령 실제로 비석이 세워진 시기가 진성여왕의 재위가 시작된 후인 7월의 어느날일지언정 실질적으로 비석은 헌강왕 때 완성된 것으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또한 진감선사탑비에서 비문의 내용 외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은 비석에 적힌 글씨 그 자체이다. 비문의 글씨는 해서체로 쓰여졌는데, 신품(神品)에 도달한 가히 명필의 솜씨로 평가 받으며,[14] 최남선은 이 비에 적힌 최치원의 필체를 가리켜 '구양순의 골격에 안진경의 살을 붙인' 글씨라 평가했다고 전한다.[15]

파일:쌍계사 대웅전 및 진감선사탑비 원경.jpg
쌍계사 대웅전 및 진감선사탑비 원경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비신은 안타깝게도 다소 손상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인데다, 최치원이 직접 비문의 글과 글씨를 쓴 탑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며, 진감선사의 생애와 더불어 당대 사회적 상황 등도 함께 전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료의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고, 당대 최고의 대문장가이자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최치원의 유려한 문장력과 예술적 경지에 오른 뛰어난 필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예사적으로도 의미가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치들을 인정받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었다.


3. 기타[편집]


진감선사탑비를 세우게 된 계기가 됐을 진감선사의 승탑[16] 유감스럽게도 존재가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승탑 옆에 탑비를 함께 세우는 편인데, 진감선사탑비는 쌍계사의 대웅전 앞 계단 아래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고 그 주변에 따로 승탑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쌍계사 경외에 승탑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진감선사의 승탑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승탑은 '하동 쌍계사 승탑'이라는 명칭으로 1963년 보물 제380호로 지정됐다.


4. 외부 링크[편집]




5. 국보 제47호[편집]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사망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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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본 유물의 제원을 밝히면서 제작시기를 '통일신라 정강왕2년(888)'이라고 해놓고서는, 막상 유물 설명 본문에서는 '진성여왕 원년(887)'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 =거북이 모양 비석 받침돌.[3] 혹은 진성여왕 원년으로 보기도 한다.[4] 이를 4산비문, 혹은 사산비명이라고 일컫는다. 진감선사탑비 외의 나머지 3개는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제315호)가 있다. 이 중 셋은 지금까지 비석 실물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대숭복사비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현전하지 않고 일부 파편만이 남아있다. 다만 숭복사비의 내용은 따로 후대 문인들이 기록으로 남겨 지금까지 전해진다. 현재 경주시 숭복사 터에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5]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6] 광계(光啓)는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로 885년부터 888년까지 사용됐다.[7] 碑座: 귀부에 비신을 끼워서 세우기 위해 홈을 파놓은 것을 가리킨다.[8] 1936년에 발생한 쌍계사 지진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균열이 생겼다고 한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10] ㅁㅁㅁ 부분은 정확히 판독되지 않는다.[11] 題額: 비석의 명칭을 새긴 부분을 뜻한다.[12] 해석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13]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15]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16] 고승의 승탑을 세우고 이를 기리기 위해 탑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