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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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화엄사
1. 개요[편집]
화엄사에 소재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들을 소개하는 문서.
2023년 현재, 화엄사 내에는 5건의 국보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2.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편집]
자세한 내용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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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은 국보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불국사 다보탑에 비견될 만한 이형(異形)의 석탑인데 원통전 앞에도 비슷하게 생긴 사자탑이 있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이 탑은 각황전 옆쪽에 나있는 108계단을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석탑과 앞에 있는 좀 작은 석등인 효대(孝臺)는 연기조사(緣起祖師)가 만들었다고 한다. 석탑의 형식만큼이나 특이한 것은 석탑과 효대 내부에 각각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석상이 있다는 점이다. 석탑 안에 서있는 것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이며 효대 안에서 석탑을 향해 꿇고 예배하는 것이 연기조사라 전해지고 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효심을 감동스럽게 표현한 예술품으로 화엄사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를 각황전보다 이 석탑을 꼽는 사람도 많다.
의천도 이곳을 소재로 슬픈 시 한 수를 지었다.
寂滅堂前 多勝景 [1]
적멸당 앞에는 빼어난 경치도 많은데,吉祥峰上 絶纖埃 [2]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彷徨盡日 思前事 [3]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들 생각하니薄暮悲風 起孝臺 [4]
날은 저무는데 효대에 슬픈 바람 이누나- 대각국사 의천
참고로 석탑 앞에 사람(보살)이 서있거나 꿇고 있는 양식은 평창 월정사 구층석탑,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11년 기단부가 침하되어 탑이 기울면서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여 해체 후 보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 2016년에 탑을 해체, 2018년 5월부터 보수 작업과 재조립에 들어가 2021년 9월 모든 작업을 마치고 다시 공개되었다.#
3.1. 국보 제35호[편집]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호남 제일의 사찰답게 많은 부속 건물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보물 제132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 제133호),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4. 구례 화엄사 각황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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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지자 이후 재건하면서 숙종이 직접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을 지어 편액까지 하사하였다.[5] 각황이라는 말은 부처의 별명으로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인데 이에 대한 설화는 문서 참조.
불타기 전 건물의 명칭인 장육전은 불경에 부처의 몸이 장육금신(丈六金身), 즉 키가 1장 6척에 색은 금빛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하였다. 그 이름대로 불상의 높이가 1장 6척에 달하는 '장육상'을 만들어 봉안했다고 한다. 장육전 건물은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의상대사가 3층 구조에 정면, 측면 7칸[6] 규모로 건립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이 공격하여 화엄사의 건물들이 모두 불탈 적에 장육상 또한 사라졌다. 원래 각황전 외벽은 석벽이고 화엄경문 글자 10조 9만 5048언을 새겼다고 하는데 이 또한 함께 깨졌다고 한다.[7]
이후 다른 건물들은 1636년(인조 14년)에 다시 복구하였지만, 각황전 건물은 그 규모 때문에 1699년(숙종 25년)에야 공사를 시작하여 1703년(숙종 29년)에 완성하였다. 각황전 상량문 기록을 보면 재건에 동원된 인부는 3015명이었으며 연잉군(훗날의 영조)과 숙빈 최씨가 대시주자로 참여한 것으로 되어있다.[8]
각황전 내부에는 보물 제2139호에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즉 3구의 불상과 4구의 보살상이 있다. 이 불보살상들은 17세기 남부지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조각승 색난(色難)과 그의 제자들이 참여한 작품으로 각황전 재건에 왕실이 참여하다보니 최고 수준의 기술로 조각됐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관음보살-아미타불-보현보살-석가모니불-문수보살-다보불-지적보살로 배치돼있다.
장육전 자리에 재건한 각황전은 옛 화엄사 대웅전보다도 더 크고 대단해서 전국에서 손 꼽힐 만한 중층 사찰 건물이다. 누각은 아니기에 2층은 없지만, 천장이 아주 높아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아주 높고 두꺼운, 그것도 심하게 휜 통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진 기둥들 여러 개가 놓여진 모습도 인상적이다. 천장의 형태도 인상적인데, 가장 중심에 있는 천장은 바닥과 평행하게 놓여있지만 외각의 천장들은 지붕을 따라 비스듬하다. 이러한 천장을 빗천장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건축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는 어렵다.
1768년(영조 44년)년에 자운선사가 수리한 적이 있는데, 이때는 인부 980명을 동원하였다. 1847년(헌종 13년)에는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벽도 쓰러지려 하는 등 큰 손상을 입어 어사에게 요청하여 수리했다고 한다. 이후 1885년(광무 22년)에도 수리한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는 기둥이 내려앉아 건물이 기울고 지붕이 파손되어 조선총독부에서 해체수리를 했다. 1936년부터 준비하여 41년까지 수리하였고, 총감독은 유명한 한국 고건축 학자였던 후지시마 가이지로. 해체 당시 마루널을 벗겨내었더니 신라 시절 건물 초석이 있었고, 검게 그을린 임진왜란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소석 사이의 전돌역시 산산조각 났고 뒷벽과 좌우 벽을 가득 채운 화엄경석의 작은 파편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 의상의 필적도 검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고..
근대에 와서 원래 대웅전에 있던 불상을 각황전으로 가져다 놓은 사진이 있다.
현재의 각황전은 높은 기단 위에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정면 7칸(26.8 m), 측면 5칸(18.3 m), 높이 15 m로 사찰로써는 상당히 크지만 역시 경복궁 근정전보다는 작다. 칸 수는 더 많기 때문에 가끔 근정전보다 크다는 잘못된 소리가 나온다.[9] 천장도 특이하게 처리한 편이다.
4.1. 국보 제67호[편집]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육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5.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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