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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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시 북서쪽 하이뎬구에 위치한 황실원림. 총면적 2.9 km²에 달하며 베이징에서 현존하는 황실원림 중 건축규모가 제일 크고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중국 고전원림의 본보기이기도 한 이화원은 높이 60m인 만수산(萬壽山)과 면적 2.2 km²인 쿤밍호(昆明湖)가 있다.
중국 국가 AAAAA급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만수산은 원래 이름은 옹산(瓮山)인데, 베이징 서산(西山)의 지맥으로 처음에는 높이가 60 m도 안 되는 작은 언덕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 앞에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 호수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1153년 금나라 해릉양왕이 이곳 산기슭에 행궁을 짓기 시작했고,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대도(大都)로 천도하면서 대운하를 통한 조운을 원활히 하고 궁중의 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1262년과 1290년 두 차례에 걸쳐 도수감 곽수경에게 명해 옥천산의 샘물을 옹산 기슭에 막아 물을 끌어들여 서호를 준설 확대해 수역을 크게 늘리도록 했다. 이때 서호에서 파낸 흙은 옹산에 쌓아놓게 해 원래보다 크게 높아졌다.
1497년 홍치제가 유모 조성부인(助聖夫人)을 위해 옹산에 원정사(圓靜寺)를 지었지만 나중에 폐사되었다. 그 후 놀기 좋아하던 정덕제는 이곳에 호산원(好山園)이라는 행궁을 건축하고 옹산을 금산(金山)으로 개칭했다. 정덕제와 가정제는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천계제 시절 위충현이 호산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이화원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건륭제의 치세 때였다.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생모 효성헌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을 조영하도록 명령하고, 홍치제가 지었던 원정사 터에는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를 세우도록 했으며, 이듬해(1751) 옹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라 개칭했다. 청의원은 은자 480만 냥을 쏟아 부어 공사한 끝에 1764년 완공되었다. 청의원 내에는 '바다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이 있다'는 중국 신화를 바탕으로 곤명호 위에 남호도(南湖島), 단성도(團城島), 조감당도(藻鑒堂島)를 만들었고, 강남의 풍경과 원림을 좋아한 건륭제의 취향에 맞춰 항저우의 서호를 위시해 강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경승지를 모방해 이곳에 재현했다.
이로써 청나라의 황실원림으로 유명한 '3산 5원', 즉 창춘원(暢春園)·원명원(圓明園)·향산(香山) 정의원(靜宜園)·옥천산(玉泉山) 정명원(靜明園)·만수산(萬壽山) 청의원(淸漪園)을 형성해 장관을 연출했으나 도광제 때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재정이 쪼들리면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다가 1860년(함풍 10)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 3산 5원을 불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약탈해 청의원의 목조 건축은 전소되어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해군 경비를 유용[4] , 청의원의 중건을 개시해 1884년(광서 10)부터 1895년(광서 21)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양충화(頤養衝和)'의 뜻을 취해 청의원에서 이화원이라 개칭했다. 이렇게 무리를 해서 겨우 복구해놨지만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자업자득으로 패배했다. 1900년(광서 26) 또다시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훼손되었다. 이때는 청나라의 황혼기였으므로, 1902년 서태후는 베이징에 돌아온 뒤 전산(前山)과 원내의 동쪽 부분만 재보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이화원은 황실의 사유재산으로 남았다가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북평시가 접수해 공원으로 일반에 개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1951년부터 수차에 걸친 자금조달과 보수공사를 통해 원내의 대부분의 전각과 정원이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했다. 1961년 국무원은 이화원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에 불향각 내부가 홍위병들에게 훼손이 되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화원 자체는 무사했다. 이 때 훼손된 문화재도 이후 복원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역설적으로 청나라를 망하게 했던 건축물이 현재는 중국의 돈줄이다.
청말 민국초의 문학가, 고고학자였던 왕궈웨이는 곤명호에 투신자살하였다.
1983년 쇼브라더스를 나온 이한상 감독이 이화원이 불타는 과정과 함풍제의 최후와 서태후의 이야기를 담은 홍콩영화 <화소원명원>,<수렴청정>을 연출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한다. 이 영화는 양가휘의 데뷔작(화소원명원)이자 제3회 홍콩 영화 금상장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수렴청정)이기도 하다.
천안문 6.4 항쟁을 다룬 로예 감독의 영화 <여름궁전>의 원제도 이 이화원이다. 이화원의 영어 이름이 Summer Palace였고 그게 한국에 넘어오면서 역으로 여름궁전으로 번역된 것.
이화원은 여름에 간다면 평범하게 관람할 수 있지만 겨울에 가면 그렇지 않다. 엄청난 추위 때문에 호수가 전부 얼어붙는다. 그래서 빨리 건너가겠다고 다리 대신 그냥 호수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다.[5] 다리 밑을 그냥 지나갈 수 있는데, 유적을 파손하는 건 아니어서 그런지 공안이 달려와서 잡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스케이트나 썰매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6]
베이징 지하철 4호선 베이궁먼역, 베이징 지하철 시자오선 이허위안시먼역을 이용해 올 수 있다.
1. 개요[편집]
중국 베이징시 북서쪽 하이뎬구에 위치한 황실원림. 총면적 2.9 km²에 달하며 베이징에서 현존하는 황실원림 중 건축규모가 제일 크고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중국 고전원림의 본보기이기도 한 이화원은 높이 60m인 만수산(萬壽山)과 면적 2.2 km²인 쿤밍호(昆明湖)가 있다.
중국 국가 AAAAA급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2. 역사[편집]
2.1. 금나라와 원나라[편집]
만수산은 원래 이름은 옹산(瓮山)인데, 베이징 서산(西山)의 지맥으로 처음에는 높이가 60 m도 안 되는 작은 언덕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 앞에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 호수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1153년 금나라 해릉양왕이 이곳 산기슭에 행궁을 짓기 시작했고,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대도(大都)로 천도하면서 대운하를 통한 조운을 원활히 하고 궁중의 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1262년과 1290년 두 차례에 걸쳐 도수감 곽수경에게 명해 옥천산의 샘물을 옹산 기슭에 막아 물을 끌어들여 서호를 준설 확대해 수역을 크게 늘리도록 했다. 이때 서호에서 파낸 흙은 옹산에 쌓아놓게 해 원래보다 크게 높아졌다.
2.2. 명나라[편집]
1497년 홍치제가 유모 조성부인(助聖夫人)을 위해 옹산에 원정사(圓靜寺)를 지었지만 나중에 폐사되었다. 그 후 놀기 좋아하던 정덕제는 이곳에 호산원(好山園)이라는 행궁을 건축하고 옹산을 금산(金山)으로 개칭했다. 정덕제와 가정제는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천계제 시절 위충현이 호산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2.3. 청나라[편집]
이화원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건륭제의 치세 때였다.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생모 효성헌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을 조영하도록 명령하고, 홍치제가 지었던 원정사 터에는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를 세우도록 했으며, 이듬해(1751) 옹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라 개칭했다. 청의원은 은자 480만 냥을 쏟아 부어 공사한 끝에 1764년 완공되었다. 청의원 내에는 '바다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이 있다'는 중국 신화를 바탕으로 곤명호 위에 남호도(南湖島), 단성도(團城島), 조감당도(藻鑒堂島)를 만들었고, 강남의 풍경과 원림을 좋아한 건륭제의 취향에 맞춰 항저우의 서호를 위시해 강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경승지를 모방해 이곳에 재현했다.
이로써 청나라의 황실원림으로 유명한 '3산 5원', 즉 창춘원(暢春園)·원명원(圓明園)·향산(香山) 정의원(靜宜園)·옥천산(玉泉山) 정명원(靜明園)·만수산(萬壽山) 청의원(淸漪園)을 형성해 장관을 연출했으나 도광제 때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재정이 쪼들리면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다가 1860년(함풍 10)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 3산 5원을 불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약탈해 청의원의 목조 건축은 전소되어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해군 경비를 유용[4] , 청의원의 중건을 개시해 1884년(광서 10)부터 1895년(광서 21)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양충화(頤養衝和)'의 뜻을 취해 청의원에서 이화원이라 개칭했다. 이렇게 무리를 해서 겨우 복구해놨지만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자업자득으로 패배했다. 1900년(광서 26) 또다시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훼손되었다. 이때는 청나라의 황혼기였으므로, 1902년 서태후는 베이징에 돌아온 뒤 전산(前山)과 원내의 동쪽 부분만 재보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2.4.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편집]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이화원은 황실의 사유재산으로 남았다가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북평시가 접수해 공원으로 일반에 개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1951년부터 수차에 걸친 자금조달과 보수공사를 통해 원내의 대부분의 전각과 정원이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했다. 1961년 국무원은 이화원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에 불향각 내부가 홍위병들에게 훼손이 되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화원 자체는 무사했다. 이 때 훼손된 문화재도 이후 복원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3. 주요 건축[편집]
3.1. 전산(前山)[편집]
3.2. 후산(後山)[편집]
3.3. 동제(東堤)[편집]
3.4. 남호도(南湖島)[편집]
3.5. 서제(西堤)[편집]
4. 기타[편집]
역설적으로 청나라를 망하게 했던 건축물이 현재는 중국의 돈줄이다.
청말 민국초의 문학가, 고고학자였던 왕궈웨이는 곤명호에 투신자살하였다.
1983년 쇼브라더스를 나온 이한상 감독이 이화원이 불타는 과정과 함풍제의 최후와 서태후의 이야기를 담은 홍콩영화 <화소원명원>,<수렴청정>을 연출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한다. 이 영화는 양가휘의 데뷔작(화소원명원)이자 제3회 홍콩 영화 금상장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수렴청정)이기도 하다.
천안문 6.4 항쟁을 다룬 로예 감독의 영화 <여름궁전>의 원제도 이 이화원이다. 이화원의 영어 이름이 Summer Palace였고 그게 한국에 넘어오면서 역으로 여름궁전으로 번역된 것.
이화원은 여름에 간다면 평범하게 관람할 수 있지만 겨울에 가면 그렇지 않다. 엄청난 추위 때문에 호수가 전부 얼어붙는다. 그래서 빨리 건너가겠다고 다리 대신 그냥 호수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다.[5] 다리 밑을 그냥 지나갈 수 있는데, 유적을 파손하는 건 아니어서 그런지 공안이 달려와서 잡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스케이트나 썰매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6]
베이징 지하철 4호선 베이궁먼역, 베이징 지하철 시자오선 이허위안시먼역을 이용해 올 수 있다.
5. 같이보기[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17:59:41에 나무위키 이화원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4] 해군 경비가 유용되었다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당시 청의 1년치 예산의 30%인 은 3천만 냥을 마구 쏟아부은 건 비판의 대상.[5] 베이징의 겨울 추위는 한국이랑 차원이 다르다. 위도상 신의주보다도 살짝 높은 곳에 있다.[6] 오히려 베이징 시민들의 겨울철 스케이트 장소로 애용된다. 외국 여행사이트를 보면 겨울에 베이징에서 할 만한 것으로 추천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