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버림받은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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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티니 가디언즈의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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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슬의 길이│제1부
3. 사슬의 길이│제2부
4. 관문에서 | 제1부
5. 관문에서 | 제2부
6. 관문을 지나
7. 정원에서
8. 사냥에 나서다
9. 심장 그 이후 | 제1부
10. 심장 그 이후 | 제2부
11. 졸리온
12. 몰락 이후
13. 국왕
14. 광신 | 제1부
15. 광신 | 제2부
16. 단절
17. 피크룰
18. 숙청
19. 페트라
20. 자유 | 제1부
21. 자유 | 제2부



1. 개요[편집]


이 책 중 4개의 지식은 포세이큰 캠페인 중, 16개는 행성 곳곳에 숨겨진 물체에서 찾을 수 있다.


2. 사슬의 길이│제1부[편집]


"졸리온, 들어봐." 울드렌 소프가 속삭였다. "같이 검은 정원에 가자."

"아, 그렇습니까?" 까마귀 사이에서 저격수, 정찰병, 이야기꾼으로 유명한 '깃촉' 졸리온 틸이 울드렌의 곁에 엎드려있었다. 틸은 본인 신장의 배에 달하는 깔끔하게 손질한 패권 소총을 어깨에 견착한 상태였다. "아무렴 우리가 같은 욕조에 들어가서 토성 위를 떠다닐 거란 얘기도 돌던데요."

"진지하게 한 말이야, 졸."

"그대로 화성까지 가시면 먹은 진지가 체해서 돌아가시겠네요. 하하하하. 목표 거리 2,900미터. 풍속과 풍향?"

"풍성 21kph, 자네 기준으로 3시 방향. 북쪽에서 2도 어긋났잖아. 안그래도 보고 있었습니다. 진짜예요. 같이 가자니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걸."

"후회도 살아있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발포 준비됐습니다."

"쏴버려." 울드렌이 말했다. 패권의 총구가 불을 내뿜자 그 반동에 졸리온의 어깨가 들썩였다. 울드렌은 명중했는지 굳이 확인하지도 않았다. "큰 임무에 나갈 때마다 항상 함께했잖아, 졸. 자네가 없으면 안 돼. 그리고-" 울드렌이 손을 펼쳐 배출된 탄피를 드러내 보였다. 뱀처럼 빠른 속도로 공중에서 낚아챈 것이었다. "우리가 손쓰지 않으면 다른 수호자들이 나설 거야. 그렇게 되면 마라 누님이 까마귀의 일까지 그 작자들에게 맡기겠지."

졸이 오른쪽으로 몸을 뒤척여 울드렌을 응시했다. 까마귀의 지배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깃촉; 졸리온 틸은 실눈을 뜨고 한 손으로 탄창멈치를 '탁' 쳤다. 그러자 울드렌이 빠져나온 탄창을 낚아챘다. "누님분을 아주 쏙 빼닮으셨군요." 졸리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이가 있다면, 여왕님은 그런 치사한 짓을 할 때 그리 크게 웃진 않더라고요."

"내가 집안의 좋은 점은 다 물려받아서 말이야." 울드렌은 졸이 노리쇠를 움직여 약실에 들어간 탄환을 사출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 소소한 줄다리기는 대개 울드렌의 승리로 끝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졸이 반전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지금까지 정원에 들어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안에 뭐가 있을지 상상해봐."

"이름 없는 괴물들이 있겠죠?"

"지어준 사람이 없으니 이름 없는 괴물 아니겠어, 졸?" 아무도 들어가 본 사람이 없다니! 궁금하지 않아?

"아뇨. 대공님의 누님께서 금지하셨는데 궁금할 턱이 있겠습니까, 울드렌 님."

"그러니까." 울드렌이 운을 띄웠다. "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야." 게다가 각성자 백성들도 이런 손에 땀을 쥐는 무용담에 필시 흥분할 것이고 말이다. 마라는 백성에게 있어 영웅이란 존재가 얼마나 큰 의의가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왕은 없어선 안 될 존재로 그치지만, 영웅은 어떠한가? 그 영웅이 원하는게 무엇이고 언제 이기고 졌는지가 훤히 드러나지 않던가.

3. 사슬의 길이│제2부[편집]


그들의 출발은 어디까지나 비밀이었다. "아무도 모를 거야." 울드렌이 졸을 안심시켰다. "천정점에서 몰래 빠져나갈 거야. 설령 누가 눈치채더라도 그때쯤이면 우린 이미 자오선 만으로 진입하고 있을걸!"

"너무 자신이 넘치시는 거 아닙니까." 졸이 핀잔을 주었다. "우리가 출발할 즈음이면 그쪽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걸 도시 전체가 알아차릴 텐데요."

"그럴 일 없어."

두 사람이 우주선에서 내리자, 길을 구석구석 빽빽하게 메운 울드렌의 팬과 추종자들이 환호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울드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기색으로 쉼 없이 손을 흔들고,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면서도 울드렌의 마음속에서는 새카만 티끌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이유는 순전히 여왕과 제일 가까운 친척이란 확신과 공포 때문이었다. 왜 그가 계속 여왕의 규칙을 거스르는지 저 사람들은 생각해본 적이나 있을까? 왜 그가 매번 여왕을 떠나 멀리 여행을 떠나는지는?

울드렌은 누이의 인정을 원하고 있었다. 이는 울드렌 본인도 알고 받아들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울드렌이 바라는 인정은 여왕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가 계획하더나 쉽게 예견할만한 것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말이다. 그렇게 울드렌은 놀라움이 섞인 여왕의 감사를 원하고 있었다.

사슬의 길이를 확인하려면 그 사슬이 팽팽해질 때까지 멀어져야 길이를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울드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울드렌의 생각은 그러했다. 울드렌이 누이의 곁에 스스로 설 수 있는 진정한 자유. 그렇게 본인 의지에 따라 직접 선택할 자유를 얻지 않는 이상, 이 사슬은 그가 끊임없이 달려온 이 거리보다 여전히 더 긴 상태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4. 관문에서 | 제1부[편집]


울드렌 소프에게 수호자를 괴롭힐 기회를 주면 그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라스푸틴이 여행자를 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가 수호자들의 뇌리에 때려 박던 생각이었다. 줏대 없는 도덕성과 투덜댈 줄만 알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어린 신이 설치면 누구라도 질색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울드렌은 여행자의 말파리들이 싫었다. 수호자들은 독선적에, 자신감만 넘쳐대는, 자신들이 이해할 필요조차 없는 행성계에 나타난 냉담한 침입자나 다름없었다. 특히 그 점이 그는 제일 싫었다. 세상의 이치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능력이.

그래서 울드렌은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일을 수호자에게 일임했다. 피해를 주고 요격을 하는가 하면, 임무를 맡겨 사지에 보내기도 했고, 그 치들의 고스트를 지독한 악취가 나는 셀레노페놀에 처넣은 적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튼튼한 바위에 구멍을 뚫어 수호자들의 불쾌한 정찰 신호기를 묻어버리기도 했고, 그들을 속여 강력한 무기를 분해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울드렌도 총격전을 벌일 때마다 몸이 떨리는 공포를 전혀 느끼지 않고 전투에 임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함을 떨쳐낼 순 없었다.

"졸리온!" 울드렌이 화난 어조로 읊조렸다. 동시에 내리막의 고블린이 타격 수류탄을 그가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졸리온, 자네 어딨나?"

아무 응답도 없었다.

수류탄의 폭발에 울드렌의 귀가 멍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발생한 오존이 그의 코를 강하게 자극하여 재채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고블린은 재채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발포해댔다. 융해되어 유리처럼 변한 파편이 그의 엄폐물에 튀었다. 그리고는 공중에서 깨지면서 청아한 소리를 내었다. 울드렌은 족히 300미터는 되는 오르막에 있었다. 수호자, 무장한 기갑단, 거기에 겁 없는 벡스까지 육탄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낱 필멸자들은 목표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벡스는 순간이동이 가능해 성가신 존재기도 했고 말이다. 울드렌은 자신이 열 마리의 고블린에게 포위된 건지, 아니면 한 마리뿐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탄환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왔다.


5. 관문에서 | 제2부[편집]


방산충 체액이 모래 바닥에 흩뿌려졌다. "처리했습니다." 무전 너머로 졸리온의 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저도 발각당한 것 같네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주듯이 기갑단의 박격포탄이 빗발쳤고, 소총의 총성이 들린 지점으로 지능탄이 날아갔다. 일반적으로 기갑단은 저런 병기를 벡스에게 낭비하지 않는다. 웬 백인대장이 순간이동할 일이 없는 표적에 장난감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졸리온이 무전 스위치를 딸깍여 무사함을 알리자 울드렌은 안도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울드렌은 헐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야에 정원의 관문에 들어왔다. 정원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거다. 들어가는 게 문제지.

그 순간 공기가 탁해졌다. 진공 상태의 자욱한 연기가 울드렌의 시야를 가렸다. 이윽고 강한 폭발과 함께 벡스 미노타우르가 나타났다. 울드렌이 욕설을 퍼부으며 교란 수류탄을 던지고 냅다 뛰었다.

"분명 더 좋은 방법이 있을 텐데." 그가 헐떡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 없나?"

"딱 하나 있는데 내키시진 않을 겁니다. 마하 20의 속도로 우주선을 관문에 들이박는 거죠."

"문이 활성화되지 않았잖아! 기갑단의 병기로 돌파한다고 해도 벡스를 꾀어 문을 열게 하는 일이 남는단 말이지!"

"그러려면 우리 개인 화기만으로 관문 군주를 죽여야 하는 거 아닙니-"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울드렌이 나직이 말했다. "나한테 기막힌 생각이 있거든." 이게 바로 울드렌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사신의 코털을 건드리고, 이빨을 드러낸 그 아귀로부터 날렵하게 빠져나오는 일 말이다. "교전 중단해. 은폐 도구가 필요할 것 같아. 그리고 운 없는 목표를 몇 개 고르는 거야…"


6. 관문을 지나[편집]


그들은 벌레처럼 화성의 사막을 기어서 가로지르고 있었다. 은폐 망토를 착용한 덕분에 겉모습은 가려진 상태였다. 서성이는 기갑단의 수확자들이 지평선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지난 여덟 시간 동안 졸리온은 즉각적인 대응 사격을 피하면서 기갑단 보병들을 소총으로 솎아내고 있었다. 한편 울드렌은 광분하는 전쟁망을 감청하며 막강한 병기들이 투입되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윽고 전쟁기계가 가동되어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졸리온이 울드렌의 발목을 만졌다. 그들은 손끝을 두드려 암호를 주고받았다. 거리는?

"50미터." 울드렌이 속삭였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벡스가 알았으면 진작에-"

그때 불현듯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아음속의 낮은 신음이 모래 바닥을 흔들었다. 무언가 강대한 존재가 그들 머리 위에 나타났다. "별거 아니야." 울드렌이 웅얼거렸다. 드디어 벡스가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망토를 벗어 던진 울드렌은 리볼버와 굴절 수류탄을 손에 쥐고 일어섰다. 곧이어 그는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다. 몰락자 소형선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둥근 톱니 모양의 검은 정원 관문이 화석 사막에 우뚝 서 있는 광경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관문은 무한한 에너지로 고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관문 앞으로 벡스 관문 군주의 가공할 윤곽이 나타났다. 금속과 정신이 한데 충돌하며 자의적으로 조립되어 비밀의 장소를 지킬 준비를 했다. 세례라는 측면에서 보면 벡스는 여기서 태어나는 셈이다. 축성을 받아 기계들이 정원 안에서 찾은 어느 끔찍한 목적을 섬기게 되는 거랄까.

"어이, 거기 덩치!" 울드렌이 소리쳤다. "이쪽이다!!"

차분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깃촉' 졸리온 틸은 소총을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발포하기 시작했다. 패권 소총의 총성에 뒤이어 큼지막한 탄피들이 사구에 뿌려졌다.

관문 군주는 그림자를 드리우며 거대한 위용을 선보였다. 울드렌은 함성을 내지르면서 관문 군주 발치의 모래 바닥에 두어 발을 빠르게 연사했다. "한 춤 춰보자고, 형씨." 울드렌이 고함쳤다. "근데 그럴 발재간은 있기나 해?"

한편 벡스 관문 군주 내부에서는 엄청난 알고리즘이 이 일시적인 장소의 표본을 구축하고 잠재적인 위협을 계산하고 있었다. 동시에 무기의 유용성과 다른 방향으로 그 위력을 사용하면 어떨지 저울질하고 있기도 했다. 울드렌이 아직 살아있는 건 순전히 그 계산 과정 덕분이었다.

사전에 조율되어있던 내장 마이크를 통해 그의 고함이 전달되어 기갑단의 전술 채널을 깨웠다. 기갑단은 졸리온이 낸 총성을 추적하여 대응 사격을 개시했다. 울드렌은 거대한 벡스에게 소리치더니 경쾌하게 몸을 까딱였다. "화성에 비가 올 거란다! 지금 자오선 만이 우기거든! 일기예보는 봤냐?"

울드렌은 냉큼 졸의 손을 붙잡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관문 군주를 향해 정면으로 질주했다. 곧 뭐가 들이닥칠지 벡스 기계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관문 군주는 기갑단은 차치하고 저 미생물이나 다름없는 티끌들이 관문을 통과할 지극히 미약한 가능성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끝내 관문 군주는 두 사람을 말살하고자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몸을 던져 관문의 문턱에 도달했고, 울드렌이 엄지가 부러지라 강한 힘으로 굴절 수류탄을 터뜨렸다. 위상적으로 시공간을 어그러뜨리는 완벽한 구체가 두 사람 주변에 나타났다. 울드렌은 졸리온을 부둥켜안고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보호막은 절대로 뚫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속 시간은 길지 않다. 더군다나 호흡에 쓸 산소도 한정되어있었다.

외부에서는 기갑단 함대 모함이 관문 군주에게 총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보호막이 사라지자 관문 군주는 죽은 다음이었고, 울드렌과 졸리온은 더는 화성에 있지 않았다.


7. 정원에서[편집]


울드렌과 졸리온은 우거진 하얀 가지들을 지붕으로 삼아 서로를 얼싸안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비가 쉬지 않고 쏟아졌다. 울드렌은 비가 정확히 어디서 내리는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 위의 녹색 안개 어딘가에서 오는 걸까? 어쨌든 비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쏟아지기만 했다. 정원의 깔끔한 표면을 적도처럼 가르는 양 꽃밭 사이의 균열 바닥에서 울드렌과 졸리온은 고개를 들어 빗물을 받아마셨다.

"여기선 모든 게 자라는군요." 졸리온이 중얼거렸다. "손톱 한번 보십시오."

울드렌이 자신의 손을 살펴보았다. 끔찍하게도 울드렌의 손톱은 손가락에 닿는 모양새로 자라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손톱이 다시 뿌리로 돌아가는 흉측한 순환을 완성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끔찍하면서도 초월적인 의미에서, 갓난아기의 비명처럼 아름다웠다. 마치 울드렌에게 이 정원에서 일어나는 신선하고 은밀한 비밀들을 알려주는 느낌이 들었다. "지저분하군." 울드렌이 말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자네도 용서해주리라 믿네만. 비가 영 그치질 않는걸. 이만 움직일까?"

"그러죠." 졸리온이 스멀스멀 움직이는 덩굴을 움켜쥐고 몸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덩굴이 그의 손목을 휘감으려 했다. 작은 이빨 모양의 돌기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졸리온은 덩굴을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뭔가 웅얼거리면서 팔을 뿌리쳤다.

"괜찮아?"

"아직은요." 졸리온이 투덜댔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균열 밑으로 한참을 더 내려갔다. 머리 위로는 녹색 안개가 소용돌이쳤고, 꽃잎과 비옥한 검은 토양으로 이뤄진 축축한 퇴비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구부러진 뿔이 자란 너르고 납작한 딱정벌레들이 바닥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울드렌은 딱정벌레 한 마리를 집어 뒤집어 보았다. 딱정벌레는 속이 텅 비어있었다. 아래쪽에서 보니 그냥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졸리온이 고사리를 뿌리째 뽑아 보이자 회로판을 연상시키는 금속 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젖은 마이크로칩처럼 생긴 아주 작은 물체들이 노출된 토양 속에서 꾸물거렸다.

"별로 마음에 드는 동네는 아니네요." 졸리온이 속삭였다. "지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졸리온이 말한 지상은 정원의 표면이었다. 붉은 꽃밭이 머나먼 메사까지 펼쳐진 잘 관리된 구역 말이다. 하지만 울드렌이 보기에 지상에는 벡스가 너무 많았다. 벡스는 여기서 정원을 가꾸고, 흙을 운반하고, 벽을 만들고, 돌과 빛으로 된 고대의 구조물을 만들고 있었다. 이 정원을 길들일 요량으로.

"생명이라." 울드렌이 읊조렸다. "자네 말이 맞아, 졸. 여기서는 모든 게 자라는군…"

울드렌은 이 장소를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여행자의 불사신 전사들이 내세우는 편협하고 이분법적인 독단에 맞지 않아 뿌리뽑히고 타파된 다른 모든 것들처럼 정원이 똑같은 최후를 맞게 둘 수 없었다. 흥분에 사로잡힌 울드렌이 호탕하게 웃으며 진흙을 헤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울드렌 님." 졸리온이 뒤에서 그의 이름을 크게 소리쳤다. "뭘 찾으시는 겁니까?"

"나도 몰라!" 그가 답했다. "그래서 굉장한 거야! 나도 모르겠거든!"


8. 사냥에 나서다[편집]


두 사람은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기갑단 병사를 추적해 꽃밭을 지났다. 그렇게 그들은 다친 군단병의 압력 지혈대에서 새어 나온 검은 기름의 자취를 뒤쫓았다. 울드렌은 냉정하고 사나운 분노를 원동력 삼아 움직였다. 정원에서 전쟁이라니. 얼치기 기갑단 원정대가 이 정원에 하찮고 가증스러운 전쟁을 몰고 왔다. 죽어 마땅한 놈들. 정원이 스스로 가꿔나갈 수 있도록 두어야 하거늘. 안 그런가? 알아서 비밀스러운 과실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둬야 하는데…

지형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붉은 꽃들은 사라지고 짧고 촘촘한 풀밭이 나타났다. 연이어 바람이 부드러운 말들을 속삭였다… 기본적인 구문을 갖춘 문장이었다. 그 억양이 마치 음악처럼 귀를 간지럽혔다. "정신을 파고드는군요." 졸리온이 속삭였다. 그는 전염성이 강한 의식에 잠식되는 사태를 경계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하지만 울드렌이 앞서나가 뒤얽힌 관목을 가볍게 헤집고 밑의 계곡으로 내려가자 졸리온이 말끝을 흐렸다. 벡스가 있다. 이곳에 벡스가 있다. 그것도 이끼에 뒤덮인 고블린과 미노타우르 수십 마리가 조각상처럼 가만히 서서 일종의 로봇 헨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비정상적인 청명함으로 희미하고 유령 같은 선율을 노래했다. 울드렌은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알았다.

기갑단 군단병은 돌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었다. 울드렌은 살금살금 바닥을 기어 전진했다. 상처에 깊이 신음하는 군단병이 그의 존재를 눈치챘을 땐 이미 헬멧에 칼이 드리워진 상태였다. 칼은 헬멧의 끄트머리 바로 위에서 밑에 가려진 부드러운 조직을 겨누고 있었다. "꼼짝 마." 울드렌이 울루란트어로 말했다. "입 다물고 있어. 원자 단위까지 베는 칼이거든."

"말 안 해도 알아." 군단병이 모국어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눈앞에 바로 보이거든. 이게 면도해주는 거랑 뭐가 달라."

"여기가 어딘지 알기나 해?"

"이 세상 최악의 장소가 아니면 뭐겠어?"

"그거야 네놈이 여기 공기 내음을 못 맡아서 그런 거지." 울드렌이 말했다. "달콤하거든. 아주 강력한 꽃가루 냄새가 진동한다고. 여긴 왜 온 거야?"

"단언컨대 우리가 제발로 찾아온 건 아니야. 체액 로봇들이 우리를 납치한 거지."

들려왔던 속삭임에는 희미한 울루란트어 문법이 배어있었다. 그런 연유에서 울드렌의 의심은 확신이 됐다. 여긴 추상적인 패턴이 생존권을 놓고 다투는 현장이다. 서로를 포식하여 자기 자신을 복제하고자 싸우는 것이다. 벡스가 노래를 부르는 이유도 정원이 그들의 노래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기 위함이리라. 하물며 지금 이 대화조차도 공기에 양분을 불어 넣고 있었다. "저것들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대체 무슨 목적이길래?"

"놈들은 여기 기도하러 온 거다. 자신을 그릇으로 삼아서 말이야. 놈들은 사상 최악의 존재들이다. 존재 자체를 먹어치우는 자식들이라고."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아?

"씨앗을 보고 알았지." 군단병이 말했다. "넌 안 보이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군단병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본인의 헬멧에 달린 긴급 의무용 해제 버튼을 후려쳤다. 곧이어 압력 밀폐 장치가 깨지면서 둥근 형태의 검은 젤이 쉬이익 소리와 함께 분사됐다. 끝내 군단병은 풀썩 쓰러졌다. 군단병의 헬멧이 그의 넓은 무릎 위로 굴러떨어졌다.

젤로 된 막 밑으로 보이는 그의 두개골은 작은 구멍이 무수히 뚫려있어 흡사 딸기의 질감을 떠올리게 했다. 기갑단의 살점에 박힌 수천 개의 조막만 한 씨앗이 번들거렸다. 울드렌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 피부를 쓸어내렸다.

"울드렌 님." 졸리온이 무전을 보냈다. "지금 대공님 표정, 정말 별로예요."

"이 정원에 비밀이 있나 보군." 대공이 대꾸했다. 씨앗이 오밀조밀하게 박혀 온기를 발산하는 군단병의 뒤틀린 두개골에 비해 울드렌은 본인의 내장 마이크가 차갑고 무기적으로 느껴졌다. 살에 엉성하게 결합한 느낌이었다. "수많은 비밀이… 녀석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어, 졸리온. 정원이 자신의 비밀을 놈의 몸속에 기르고 있다고."

"그딴 거 알게 뭐랍니까?" 졸리온이 쏘아붙였다. "대공님.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도 저 녀석들이랑 똑같은 꼴 되기 전에 어서요!"

졸리온이 비밀을 두려워하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미지의 세계가 그에게는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지극히 합리적인 반응이다. 아주 이성적이고 말이다. 졸리온은 실로 훌륭한 정찰병, 군인, 생존자의 표상이었다.

한편으로 울드렌은 마라가 이 검은 정원을 보고 얼마나 감탄을 해댈지 계속 상상이 됐다. 그녀를 여기로 데려온다면 어떨까? 함께 이 장소를 살펴본다면 어떨까?


9. 심장 그 이후 | 제1부[편집]


"누님, 꽃을 뽑아왔습니다."

여왕의 수행원들이 울드렌 앞에서 좌우로 갈라섰다. 탄복에 젖은 시선들이 울드렌의 얼굴, 상처, 그의 손에 들린 화분에 심어진 꽃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그중 일부는 울드렌이 광인으로 보였는지 무기로 손을 뻗었으나, 머잖아 눈앞의 사람이 각성자의 대공이자 여왕의 한없이 넓은 아량과 총애를 받는 울드렌 소프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름은 아스포델리아라고 합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꽃을 누이에게 바쳤다. "검은 정원에서만 자라는 겁니다… 이젠 아니겠지만. 꽃을 여기 우리의 땅에 심읍시다. 장담하는데 별 탈 없이 뿌리 내리고 잘 자랄 겁니다. 우리 민족의 두 근본을 백성들이 떠올리는 촉매가 되어줄 겁니다."

섬뜩하게도 찰나의 순간이나마 마라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내 그녀는 미소 지으며 손짓을 보냈다. "우리 동생이 검은 정원을 방문하고 무사히 생환했구나. 앞으로 나오너라." 마라는 꽃잎을 한 장 떼어 손끝에 올려 보였다. 그리고는 들어서 불빛에 비춰보았다. "정말 아름다워. 일린, 잘 돌보도록."

마라가 꽃을 넘겼다. 울드렌은 항의하려다 속으로 삼켰다. 그는 누이가 직접 꽃을 심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 이후 사석에서도 마라는 가만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울드렌은 기억나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고했다. "혹시 심장을 봤니?" 마라가 부드럽게 물었다.


10. 심장 그 이후 | 제2부[편집]


"심장…" 울드렌은 여왕의 질문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잠시 후 울드렌의 기억은 혼란에 빠졌다. 그는 가시가 돋아난 숲을 질주하고 있었다. 가지와 작은 돌기에 뺨에 생채기가 났다. 커다란 무른 과일들이 그의 어깨에 '철퍽' 소리를 내며 부딪혔고, 과하게 익은 과육이 터져 나왔다. 부풀어 오른 무거운 고스트처럼 생긴 과일들이 말이다. 울드렌은 숨을 참아가며 두꺼운 거미줄 아래에서 졸리온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언쟁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심장박동이… 아니, 그의 심장박동이 맞긴 한 건가? 다른 사람의 심장박동인가?

울드렌은 거주 건물에 있었다. 그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울드렌은 검은색과 하얀색 체크 무늬로 된 타일 바닥이 특징인 세탁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검은 깃털을 휘날리는 까마귀들이 부리를 딱딱거리면서 건조기 속에서 몇 번이고 자빠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편 덩치 큰 늙은 여성 기갑단이 그의 왼편에 있는 욕조에 앉아 쇠솔로 등을 문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복부에 알리스 리의 얼굴이 있는 벡스 고블린은 계산대 뒤에서 세제를 팔고 있었다. "울드렌." 그녀가 말했다. "몸에 구멍이 났네." 여성 기갑단이 동의하듯이 끙 소리를 냈다. 울드렌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의 손에는 완벽한 원형의 검은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울드렌이 돌린 건조기는 시간이 다 되었지만, 까마귀들은 여전히 물기가 남은 상태였다.

"울드렌." 마라가 그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다른 사람한테 손도 안 대는 누이가. "심장을 봤느냐니까?"

아무래도 정원에 심장이 있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 모양이다. "벡스가 정원에 바글거렸습니다." 울드렌이 답했다. "정원은 벡스가 원하는 걸 주고 있었습니다. 벡스가…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성장시키고 있었죠."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잖아." 마라가 쌀쌀맞게 말했다.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었다. 울드렌이 마라의 지적을 받는 건 정말로 특이한 일이었다.

"정원의 심장이 뭔지는 몰라도…" 울드렌이 서성이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씨앗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랄 수 있게 남겨진 씨앗이요. 마치… 미광체의 한 일면처럼 말이죠. 아니면…" 어떤 생각이 울드렌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덫일 수도 있겠죠. 자신이 이해 못 하는 것을 찾아 파괴하는 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일지도 모르겠군요."

수호자를 노린 미끼 말이다. 여행자의 회복에 이정표를 남기려는 미끼가 아닐까.

"그러게 가지 말라고 했잖아." 마라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라가 망토를 꽁꽁 둘러맸다. "넌 나에게 헌신하지 않느냐?"

"누님." 울드렌이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넌 날 거역하는구나."

그랬군요. 울드렌은 생각해보았다. 그래, 별다를 것 없는 거였어. 놀라움이라곤 전혀 주지도 못 하는 이런 것들에 신경이나 쓰이겠어요?

난데없는 지독한 외로움이 울드렌을 덮쳐왔다.


11. 졸리온[편집]


무기고에서 졸리온을 봤을 때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믿기 어려울 만큼 무정하고 수치스러운 추태를 부렸는지 깨달은 울드렌은 경악하며 큰 소리로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안녕." 울드렌이 멋쩍게 말했다. 그는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원에서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졸리온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여왕에게 졸리온의 공을 치하하는 말도 꺼내지 않았을뿐더러 그의 용기를 기리는 연회도 열어주지 않았다. 하물며 그 모든 일을… 겪은 이후로 밤에 잠은 잘 자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울드렌은 졸리온을 잊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졸리온이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어제 사격장에 안 나오셨더군요."

"자네 정도면 감적수 따윈 필요 없잖아?" 울드렌이 가볍게 농을 던졌다. 하지만 농담은 단호하게 무시당하고 말았다. "내가 요새 좀, 그게…" 꿈을 꾸고 있었거든. 울드렌은 꿈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열성적으로 기원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며 자신의 추측이 진실이기를 절박하게 기원하며 확답을 찾아 헤맸다. 그 정원이야말로 각성자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지구에는 빛의 원천이 있다. 그 눈부신 등불은 앞으로도 점점 더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각성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작금의 상태로는 턱도 없다. 마라의 환영과 민족의 기원에 얽힌 진실도 유실되고 도시 태생의 철학가들이 내세우는 단조로운 철학에 희석될 게 뻔하다. 수호자들은 찾는 모든 걸 죽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검은 정원이 여행자의 대척점이라면? 만약 각성자가 그 정원에서 어둠과 빛의 절묘한 균형을 새롭게 찾을 수 있다면? 빛이 환해지고 그림자가 깊어지자-

졸리온이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네." 울드렌이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방금 뭐라고 했나?"

"말씀드렸다시피 정원에서 있었던 일 있잖습니까."

"그래!" 울드렌은 졸리온이 정원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혐오와 공포를 느끼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긴 하다. 하지만 그 너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 잊기 전에 우리가 본 걸 전부 기록으로 남겨두는 편이 좋겠지. 진작에 안 물어본 내 불찰-"

"울드렌 님. 전 우리가 본 걸 누구도 알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 울드렌의 속에서 작은 온기의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물론이지. 굳이 다른 사람까지 알 필요는 없으니. 우리만의 비밀로 하자고. 알겠지?"

"제가 본 광경이 기억에서 사라지면 원이 없겠네요." 졸리온이 말했다. 그는 소총 공이를 더듬다 놓쳐버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공이는 그의 의자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졸리온은 공이를 주우러 가지 않았다. "근데 전 비밀 같은 건 안 지킨단 말입니다."

울드렌이 잠시 그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말에 담긴 심오한 진실이 차가운 바람처럼 그를 강타했다. "하긴 자네가 비밀을 안 지키긴 하지." 졸리온은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무슨 혈통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명사수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울드렌의 까마귀로서 그는 위험한 정찰 임무에 수차례 투입됐지만, 엄밀히 말해서 비밀 요원은 아니었다. 울드렌은… 그의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내일은 사격장에 나오실 겁니까?" 졸리온이 물었다.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어조였다. "몇 번 사격하는 것도 괜찮지 싶습니다만."

"내일은 안 돼." 울드렌이 말했다. "할 일이 있어." 울드렌은 자기가 오라클 엔진을 정원에서 가동하려고 하면 마라가 어떻게 반응할지 벌써 상상하기 바빴다. 여러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마라도 궁금해하리라.


12. 몰락 이후[편집]


그녀는 이제 없다. 울드렌은 끝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내고 있다. 그는 미래가 싫었다. 두려움이었다. 그는 미래의 공허함이 두려웠고 마라가 없는 영원한 고독을 상상할 수 없었다. 화성의 균열 가장자리로 휘청거리며 나아간 울드렌은 낭떠러지가 자신을 부르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과 함께하자고. 모든 걸 끝내자고. 장소의 열기에 그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울드렌은 낡은 까마귀 드론의 죽은 동체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갈비뼈가 눌리고 허파가 흉골에 맞닿아 숨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우주선을 고치려면 드론이 필요했다. 한 번도 싫었는데. 화성을 떠나야만 한다. 그녀를 찾아야 한다.

까마귀 드론의 육중한 무게가 울드렌의 손과 무릎을 짓눌렀다. 환영이 울드렌의 시야에 아른거렸다. 별들과 환히 빛나는 전령들이 날아올라 고리 차원과 끔찍한 빛의 장벽을 통과하던 순간이 보였다. 그리고 드레드노트가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던 순간도 보였다. 누이의 비밀스러운 계획이 결국 밑천을 드러냈던 그 순간이 말이다. 그 순간 모든 소리가 멈췄고, 울드렌은 이럴 순 없어- 절규를 터뜨렸다. 하지만 누이와 함께 죽겠다는 영혼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굴절 보호막으로 손을 뻗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죽은 벡스의 그림자 아래로 기어가 휴식을 취했다.

울드렌은 정원의 관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칸도르 섬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가 각성자의 또 다른 길을 봤던 바로 그 장소였다. 왜 마라는 한 번도 그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을까?

울드렌은 마라의 말을 경청해왔는데 말이다. 환각의 갈망이 한층 깊어졌다. 하지만 그 콧노래와 속삭임이 들려왔다. 머릿속의 별빛이 주는 황홀경…

한 무리의 까마귀 드론이 울드렌의 추락 지점을 찾아 전투기를 수리해 놓았다. 울드렌의 전투기가 궤도 속도 절반에 도달했을 즈음 기갑단의 포가 그를 요격했고, 결국 그대로 헬라스 분지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울드렌의 까마귀들은 죽었고, 전투기는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그리고 누이도 이제 없다. 울드렌의 누이는 떠나갔다. 지금까지 울드렌은 누이를 따랐다. 자신의 모든 아랫사람도 그녀를 따랐다. 여왕께서 계획을 세워뒀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항상 계획을 세워두었다.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도시라 해도 그녀에겐 필시 수많은 사람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나은 계획이 있을 터였다.

어떻게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반드시 돌아가야 해. 길을 찾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하지만 울드렌에게 그럴 힘이 있을까? 더는 백성의 지지를 받던 용사가 될 수 없다. 각성자의 목적.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한 백성의 신뢰를 다시 돌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누이의 계획에 대한 백성의 신뢰도 마찬가지다. 더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세상은 껍데기만 남은 시체와 하등 다를 게 없으니. 수호자들의 행보가 남긴 흉터다. 기갑단 요새는 부패의 악취가 진동했다. 살점과 뼈, 망가진 방어구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래밭은 산산이 조각난 벡스의 몸체로 그득했다. 이곳이 바로 죽음의 현장이다. 죽음과 전쟁의 현장. 여행자의 잣대에 휘둘리는 전쟁. 애초에 잣대를 쥔 여행자의 꼭두각시들이 일으킨 전쟁인 것이다.

그런 울드렌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그는 그 무언가를 없애고자 눈을 깜빡이고 비벼댔다. 그런 와중에도 울드렌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다. 피부 아래의 희미한 별빛을 느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울드렌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그에게 말할 것이다.

울드렌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13. 국왕[편집]


울드렌이 마침내 켈 앞에 끌려왔을 때, 그는 이미 수 주에 걸쳐 학대와 구타, 달음박질 고문을 당하고 축사와 같은 환경에서 생활한 끝에 온순하게 변해있었다.

강대한 국왕의 켈이 명료하면서도 장황하게 자신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었다. 울드렌. 몰락한 가문의 대공. 열등한 동생. 스콜라스에게 패배한 자. 드렉보다 하찮은 바릭스에게 눈이 멀어버린 자. 함대를 사지로 몰아넣은 자. 각성자 종족 최후의 귀족.

울드렌이 고개를 들어 켈을 보았을 때, 더는 진실을 말할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국왕의 켈이 울드렌을 불렀다.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무너진 가문의 몰락한 통치자. 마지막 켈.

"그대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소." 켈이 울드렌에게 말했다. "망가지고 상처 입은 존재여. 그대는 긍지가 없소. 그렇기에 꼭 해야 할 약조를 하더라도 잃을 게 없지. 몰락자의 황혼이 찾아왔소. 우린 깃발을 내려놓아야 하오."

궁중 곳곳에서 불만이 섞인 신음과 을러대는 소리에 굴하지 않고 국왕의 켈은 울드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대에게 충성을 바치겠소." 켈이 말했다. "몰락과 수치를 겪은 그대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약점을 얻었소. 엘릭스니에게 깃발을 찢으라고 그대가 말씀하시오. 우리 모두 서로에게 굽혀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시오. 경쟁을 관두지 않으면 우린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사멸해가는 종족을 위해 나서주겠소? 또 다른 죽어가는 종족의 대공이여?"

울드렌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병력과 우주선, 자원을 얻어 수색을 시작할 것이다. 모든 것을 걸고, 생존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찾아낸 건 다름아닌 울드렌 본인이다. 늘 그랬듯이.

울드렌은 마음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 누이는 아직 살아있다. 그런 누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동생을 필요로 한다.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던 울드렌에게 마라의 목소리가 명료하게 들려왔다. 과거 무중력 난투극 속에서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을 때 나타났던 그 당시처럼 말이다. 마라는 저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전부 제자리를 찾으리라. 이제 그가 그녀를 마중 나갈 것이다. 전부 제자리를 찾으리라.


14. 광신 | 제1부[편집]


누이의 침묵이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다.

온 태양계가 전쟁의 상흔에 신음하고 있다. 울드렌은 한도 끝도 없는 격통, 마비, 얼굴이 절로 구겨지는 고통에 시달리며 광기의 도가니 그 이상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강력한 빛을 느껴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다지도 강렬한 고통 역시 처음이었다. 누이와 함께한 세월만 몇백 년이 넘는다. 그런데 그녀가 없다고 이렇게나 빨리 무너질 줄이야…

왜 마라는 울드렌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 걸까?

울드렌을 둘러싼 리프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깨어진 소행성과 금이 간 주거지들이 밝게 빛나는 잔해 파편을 흘려댔다. 진공 속에서 햇빛을 받는 잔해보다 황량하고 아름다운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리프는 거대하다. 정말 거대하다. 하지만 밀집되어있기도 하다. 리프의 구조물과 주민들은 광활한 우주와 다르게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오릭스와 붉은 군단은 리프에 커다란 구멍을 여럿 내놓았다. 아아, 울드렌이 트라우우그의 부서진 군단이 트로이의 목마라는 사실을 페트라에게 알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동포를 여행자에게 넘기는 대리 지휘관을 도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작은 페트라는 늘 마라의 인정을 바랐다. 언제나 여왕의 환심을 못 사서 안달이었다. 하지만 페트라는 마라가 무엇을 진정 높이 여기는지 몰랐다. 그녀는 누이의 신뢰를 얻고자 어려운 길을 선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렇기에 마라는 페트라에게 입을 열지 않았다.

문제는 요즘 울드렌에게도 일언반구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는 호위선의 선체 잔해를 발로 걷어찼다. 근래 들어 울드렌과 국왕의 가문 몰락자들은 소행성대를 습격하며 지구로 향하는 우주선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리프를 좀 더 불안정하게 만들 요량에서였다. 울드렌은 자신의 백성들을 살해했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사무쳐 밤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누이도 불가사의한 대의를 위해 수천 명의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마라 역시 매번 자신의 동포를 제물로 바치곤 했다. 그녀에게 각성자란 계획에 쓸 체스 말일 뿐. 이제 계획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는 건 울드렌의 몫이다.

"누님!" 그가 별빛을 올려다보고 외쳤다. 이제 와서 빌기엔 지나치게 멀리 와버렸다. 너무 많은 일을 행했다. 울드렌은 마라에게 해답을 요구했다. "전 화나지 않았습니다. 누님께서… 그들을 구하겠다며 스스로 희생한 것도 용서합니다. 하지만 물음에 답은 해주셔야 하잖습니까! 제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긴 한 겁니까? 누님을 찾는데 가까워지긴 한 거냐고요?"

울드렌은 국왕의 가문을 동맹으로 포섭했다. 그의 상습적인 리프 습격에 페트라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녀는 수호자들과 협력하는 대신 자신의 시민들을 지키고 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울드렌이 마라에게 가까워지긴 했는가? 그는 과연… 자기 자신을 믿고 이 과업을 해낼 수 있을까?

울드렌에겐 마라를 놀라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누이가 계획을 다시 조정토록 하고 싶었다.

마라가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예지했다면 울드렌에게도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누님!" 울드렌은 지속적인 오른쪽 눈의 통증을 참아가며 눈을 깜빡였다. "누님, 정녕 저를 버리셨습니까?"

그때 무언가 답을 보내왔다.


15. 광신 | 제2부[편집]


짤막한 속삭임이었다. 희미한 위로의 말이면서 떨리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울드렌, 나의 구세주…

그는 목소리를 뒤쫓았다. 추진기를 어찌나 난폭하게 썼는지 몸에 화상은 물론이요 멍까지 들 정도였다. 요동치는 호위선에서 아래쪽 소행성으로 내려와 보았다. 파괴된 서비터와 섕크의 잔해로 보아, 여기서 있었던 전투는 패배로 끝났음이 여실했다. 수호자들이 몰락자 부대를 습격했던 모양이다.

그때 울드렌의 화학 감지기가 에테르의 자취를 감지했다. 그는 자취를 뒤따랐다.

이윽고 그는 흔적의 근원을 찾아냈다. 한 몰락자 집정관이 흙먼지 속에 쓰러져 있었다. 무참한 태양 불꽃에 지져진 관통상 사이로 에테르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황금 총에 당한 것이 명백했다. 울드렌은 흙먼지에 찍힌 수호자들의 발자국을 살피면서 노골적으로 혐오를 토했다. 수호자들은 급히 자리를 떠난 게 확실했다. 보나 마나 채광 부대와 같이 내려온 소형선들을 찾아 다른 지점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울드렌은 집정관의 부상을 살펴보았다. 치명상이다. 집정관은 울드렌의 손길 아래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울드렌은 진심으로 손을 써주고 싶었다. 뭐든 좋으니 불쌍한 병사의 죽음을 편안히 해주고픈 마음이었다. 일부 호사가들이 말하는 누이의 힘이 그에게도 있었더라면. 극히 일부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이것이 울드렌의 소원이었을까? 저 불쌍한 병사를 구하는 게 그의 소원이란 말인가?

그렇다! 진실로 그러했다!

집정관의 상처를 동여매는 와중에도 그의 두 눈은 동정 어린 눈물로 타올랐다. 울드렌의 손길은 빠르고 자상했다.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수호자들을 증오하는 만큼 더욱 비통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눈물이 집정관의 상처에 뚝뚝 떨어짐과 동시에 울드렌의 손에 묻은 에테르가 서서히 기운을 더하며 새카맣고 유독하게 변해갔다. 울드렌은 그걸 느낄 겨를도 없었다.

결국 그는 뒤로 물러나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팠다. 이렇다 할 표식도 없던 헬멧에 가려져 있던 네 개의 죽은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눈에는 놀란 기색이 만연했다. 집정관이 쉰 목소리로 한 단어를 게워냈다. 죽음의 환각이 남긴 망가진 조각이었다. 저승에서 자신을 맞아주러 나오길 바란 사람을 부른 것이리라. "아버지?"


16. 단절[편집]


울드렌은 깨달았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든, 자신이 하는 일이 올바른지 모르겠던지 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중요한 건 울드렌이 원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마라를 찾아 구하고 싶다면, 진실로 올바른 행동을 하고 싶다면, 의도가 올바르고 강인하다면 길을 찾을 것이다. 단지 자기 자신을 믿기만 하면 된다. 무의미한 분석도, 고통스러운 후회도 이제 끝이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각성자는 아름다운 피조물이다. 반드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 비밀은 안전하다.

"누님?" 울드렌이 벽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최근 그는 희열이라기도 애매한 감정에 젖어 잠을 너무 많이 자고 있었다. 일어나는데 한 시간, 방어구를 찾아 입는데 또 한 시간을 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예전에는 삶이 쉽지 않았던가?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지 않았던가? 울드렌의 내면에 있던 불꽃은 사라졌다. 마라의 신뢰를 얻을 가능성이라는 불꽃이 말이다. 다시금 불꽃이 필요하다.

고향으로 오너라. 벽이 울드렌에게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왕관을 쓸 때가 되었느니라…

울드렌은 번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울드렌은 멍하니 누워있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이 다시 생겼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각성자 백성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울드렌은 자신을 환영하고자 몰려든 인파가 보고 싶었다. 그는 왕위를 물려받겠노라는 연설을 하고 싶었다. 마라를 구해야 한다며 흉포성을 드러내 백성에게 공포와 동요를 심어주고 싶었다. 각성자는 너무 오랜 세월 생존에 목을 맸던 것이 사실이다. 울드렌은 사람들에게 더는 생존에 급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끝이 다가오고 있으며, 길고 긴 계획의 끝이 다가온다고 선포할 것이다.

그는 범선의 함교로 향했다. "리프에서 별다른 소식은 없나?" 울드렌이 큰 소리로 캐물었다. 섕크가 울드렌의 귀에 어느 소리를 들려주었다.

페트라의 목소리였다. 대신할 필요가 없는 자리를 감히 대신하려고 드는 그 페트라 말이다. "케이드, 목표가 크레이터로 진입했어. 내 화력팀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야. 누구든 좋으니까 있으면 불러들여."

수호자들. 페트라가 수호자들과 협력하고 있다. 마라가 이런 걸 원했을까? 울드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혹시 그가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각성자들이… 각성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것은 아닐까? 누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여행자의 최면에 넘어간 것은 아닐까…?

"베스티안 전초기지로 항로를 설정해라." 울드렌이 눈을 문대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침투용 은폐 소형선을 준비하도록. 페트라의 숨통을 끊–"

"뭐 하시는 겁니까?" 국왕의 가문에 속한 대장이 사나운 어조로 따지고 들었다. "국왕의 가문은 각성자들의 현 영토 상황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개입하면 틀림없이 수호자들이 꼬일 텐데요…"

불복종이라니. 그녀라면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울드렌이 말했다. 그는 신중하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유지했다. "그래. 그렇지." 다시금 눈이 가려워졌다. 이윽고 울드렌은 자신에게 새로운 욕망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새롭고도 맹렬한 욕망이.


17. 피크룰[편집]


울드렌이 구한 집정관은 피크룰이라는 자였다. 그는 울드렌은 아버지이자 신처럼 숭배했다. 비로소 울드렌은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는지 이해했다.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몰락한 동포의 미래를 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절대로 얻어낼 수 없는 미래를. 피크룰은 몰락자가 어떻게 기계에만 의존하다 불구가 되었는지, 심연으로 뛰어들어 멸종을 통한 재탄생으로 새로운 종족으로 거듭나기는커녕 전통만을 추구했는지 소상히 가르쳐주었다.

"동감이야." 울드렌이 피크룰에게 말했다. 그는 강철 주괴를 깎아 작은 갤리선 모형을 만들고 있었다. "피크룰, 흔히들 우린 어둠과 빛 사이의 얇은 선 위에서 살아간다고들 해. 근데 우리 민족은 매번 손쉽게 탈선으로 이끌리곤 했어."

"각성자가 어떤 미래를 맞을 거로 생각하십니까?" 피크룰이 그에게 물었다.

어떤 미래라니? 마라를 찾아 구출한 다음을 말하는 건가? 울드렌은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수백 년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을 각성자의 사회 테두리에서 머물렀다. 도전자들을 격퇴하고, 염탐하고, 잠입하고, 마라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마라의 계획과 무관하면 뭐가 됐든 무가치하다.

울드렌 자기 자신조차도.

"다 죽든 말든 알 게 뭐야." 울드렌은 꿈에도 몰랐던 비정함을 드러내며 말했다. 백성을 구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 아니었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마라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들을 파멸시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계획의 도구라는 점을 제외하면 각성자는 어떤 가치도 없었다. "행여 일부라도 살아남게 된다면… 가치 있는 자들이 살아남겠지."

울드렌은 각성자의 멸종을 원했던 것일까? 그게 그의 진정한 염원인가?

"할 일이 생겼다." 그가 피크룰에게 말했다. "국왕의 가문은… 그래, 이제 내 계획에 장애물일 뿐이야. 놈들을…" 울드렌이 칼을 꺼내 긋는 시늉을 했다. "치워야겠어."

자신의 칼을 바라보던 피크룰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검은 에테르가 안개처럼 그의 얼굴 주변에서 소용돌이쳤다. "때가 되었습니까? 드디어 그들에게 미래를 보여주러 가는 겁니까?"


18. 숙청[편집]


"끝까지 명예를 모르는군." 한때 국왕의 켈이었던 자가 헐떡거렸다. "믿음도 없는 거짓된 자로다. 우리를 거대한 기계로부터 지켜줬던 건 그대 누이의 의지다, 울드렌 소프. 그녀는 고결한 혈통의 권리에 따라 늑대들에게 도전했다. 하지만 그대는… 그대는 그림자와 오물 속을 누비는구나. 자신의 흠 뒤에 숨는 꼴이 드렉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네놈이 그런 얘기를 하니 웃기는군." 울드렌이 조롱했다. 그는 속으로 알면서도 조소를 일삼았다. 저 쓸모없는 존재는 그리 당해도 마땅하다. 국왕의 켈은 무엇을 원했던가? 과거로의 회귀. 더 많은 서비터. 더 많은 기계. 더 많은 과거의 산물. 울드렌은 멸종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안다. 뼈만 남더라도 그 뼈가 뒤에 남긴 살점보다 훨씬 더 강한 의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피크룰."

피크룰의 뒤에는 부서진 서비터와 죽은 몰락자들이 쌓이고 쌓여 에테르로 뒤덮인 무더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피크룰은 조용히 그 거대한 덩치를 과시하며 앞으로 나왔다. 그의 머리 장식이 그림자와 연기로 된 바닥에 불똥을 흩뿌렸다. 피크룰의 손에는 두 자루의 충격 단검이 들려있었다.

"우린 우리와 같은 부류의 마지막 생존자다." 울드렌이 켈에게 말했다. "나의 누님은 사라졌다. 너의 거대한 기계라는 사상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차이점이 뭔지 아느냐?" 피크룰이 경청하고자 몸을 들이밀었다. "누님은 돌아오실 것이다."

경멸의 남작의 집정관은 빠르게 네 번 베어 국왕의 켈의 팔을 절단했다. 울드렌은 새롭게 드렉이 된 자의 허리띠에 붙어있던 국왕의 가문 인장을 잡아 뜯어 모두가 볼 수 있게 치켜들었다. "국왕의 가문은 죽었다."

"국왕 폐하 만세." 피크룰이 경건한 어조로 말했다.


19. 페트라[편집]


그 후로 울드렌과 피크룰은 잠시 헤어졌다.

피크룰은 유혈이 낭자하는 과업을 이어나갔다. 마치 망치가 거미의 형상을 바꾸듯이 그는 몰락자 사회를 바꿔나갔다. 한편으로는 유용한 인재들을 끌어모았다.

울드렌은 마라를 찾아 외로운 여정을 다시 떠났다. 그는 먼 과거를 추억했다. 까마귀들과 정찰을 하던 과거를. 분노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젊은 해적과 정찰을 나갔던 그 기억을 떠올렸다…

어쩌면 페트라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도적 소굴에서 페트라와 재회하게 되었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마라였으면 이렇게까지 추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궁창 중에서도 시궁창에서 범죄자와 정보를 거래하다니…

"우리 종족도 얼마 안 남았어." 울드렌이 페트라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페트라의 수치심을 본 울드렌은 그녀에게 이미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다. 페트라는 구할 수 없다.

그날 밤, 울드렌은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어둠 속에서 마라가 그를 찾아왔다. 울드렌의 비애를 들은 것이다. 울드렌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이가 자신의 의지와 지혜를 발휘하여 그를 굽어살피고 있었다. 울드렌은 전부 괜찮아질 거란 확신이 섰다.


20. 자유 | 제1부[편집]


"인정해! 당신이 누님을 꿈의 도시에 가뒀잖아!"

"그런 적 없어." 일린이 말했다. "여왕님은 갇히지 않았어, 울드렌. 승하하셨지."

울드렌은 이제 진실을 안다. 그는 상황을 바로잡고 싶었다. 어찌나 강렬하게 바라는지 이 열망을 좇는 일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간과하고 있었다. "마녀답게 거짓말만 늘어놓는군." 독기 어린 울드렌이 쏘아붙였다. "누님은 살아계셔!"

일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올 줄 알았어." 일린이 조용하고 차분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당신의 패배야, 울드렌."

"내가 올 줄 알았다고? 그런데 날 찾지도 않았단 말이야? 누님이 계셨으면 그 죄를 물어 눈을 뽑으셨을 거다."

"여왕님은 이제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아, 울드렌. 당신도 마찬가지고."

끓어오르는 분노만으로도 일린을 죽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라가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울드렌은 알고 있었다. 누이는 그의 곁에 있다. 물리적인 형체는 없을지언정 확고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울드렌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아른거린다. 거의 다 되었다, 마라가 속삭였다. 나를 풀어다오, 울드렌 소프…

"광기에 사로잡혔군." 일린이 혐오가 뒤섞인 연민을 드러냈다. "여왕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을 때 나도 똑같이 될 뻔했어. 어째서… 그것과 함께 다니는 거지? 뭘 어쩌려고 온 거야?"

"결착을 지으러 왔다." 울드렌이 대답했다. 심지어 그는 미소까지 지으려 했다. 진솔한 말이었으니까. 울드렌은 사실대로 말하고 있었다. "누님을 놀라게 하려고 했던 내가 어리석었어. 우린 모두 누님의 계획 속에서 존재해, 일린.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도 누님의 허락이 있어서야. 난 누님을 구할 거야. 내가 구해줘야 하니까. 누님이 내 죽음을 원하시는 날이 오면… 죽을 거야. 그리고 누님께서 각성자를 위해 세우신 원대한 계획이 완성되면, 각성자도 사라질 거다.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보상이야. 우린 누님에게 모든 것을 신세 졌으니까. 우리의 정해진 목적 이상으로 살아가는 건… 옳지 않아. 날 믿어. 누님이 없는 인생이… 더 끔찍하니까…"

울드렌은 목이 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도무지 형언할 수가 없었다.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마라는 울드렌이 하염없이 바랐던 비통한 염려와 부드러운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울드렌은 리프에 투항했다.


21. 자유 | 제2부[편집]


그들은 타격대 하나를 통째로 투입하여 울드렌을 호송했다. 탈출 지점에서 울드렌과 간수들에게 합류했을 때 한 저격수의 눈이 휘둥그레져 그를 바라봤다. 흡사 질문을 던지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저격총을 지닌 키가 큰 사내였다. 그의 가는 눈은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또한 수려한 얼굴까지. 언젠가… 울드렌이 그에게서 뭔가 원했던 적이 있지 않던가? 뭔가 중요한 것을? 울드렌은 무심코 눈을 문지르며 그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이에 사내는 얼굴을 구겼다. 그러나 울드렌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고대의 감옥 하부에 숨겨진 착륙장으로 데려갔다. 울드렌의 격리 유닛이 쉬익 소리와 함께 열리자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을 가진 엑소와 무기를 꺼내든 여성의 광채와 은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페트라 본인이었다.

그녀는 침묵을 지킨 채 서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살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울드렌은 알았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수고 많았다."란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았다.

"여왕님께서 말을 걸던가요?" 페트라의 말은 무뚝뚝하고 직설적이었다. "무슨 말을 들었죠?"

울드렌은 눈을 감고 마라의 목소리를 온몸으로 포용했다. 울드렌은 페트라의 권력 중심부에 있었다. 그녀는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이 감옥만큼은 소중하게 지켜냈다. 반면 울드렌은 속절없이 묶여있었다. 그러나 굴욕을 견디는 인내심, 패배를 통한 생존과 같은 힘은 일찍이 울드렌의 누이라도 가지지 못했던 힘이다.

"누님께서…" 그가 머리를 들어 페트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가 몸을 움찔했다. 페트라는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무기를 겨누고 울드렌을 응시했다. 엑소가 앞으로 나와 그의 머리에 검은 자루를 뒤집어씌웠다. "누님께서 말씀하셨다…"

"풀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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