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오시리스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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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티니 가디언즈의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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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대 업적 지식
빛 업적 지식
황혼과 새벽 업적 지식
어둠 업적 지식



1. 개요
2. 무기
2.1. 학자
2.2. 별의 지평선
2.3. 태양의 눈
2.4. 소환자
2.5. 추방자의 저주
2.6. 내일의 답
2.7. 전령
2.8. 화성의 망치
2.9. 솔라의 상처
2.10. 샤유라의 분노
2.11. 리드의 후회
2.12. 아이샤의 포용
2.13. 확고한 의무
2.14. 고귀한 진실
2.15. 별의 지평선(6년차)
2.16. 전령(6년차)
2.17. 예상치 못한 부활
3. 4년차 방어구
3.1. 타이탄
3.1.1. 상처뿐인 상승 투구
3.1.2. 상처뿐인 상승 판금 흉갑
3.1.3. 상처뿐인 상승 건틀릿
3.1.4. 상처뿐인 상승 각반
3.1.5. 상처뿐인 상승 표식
3.2. 헌터
3.2.1. 상처뿐인 상승 가면
3.2.2. 상처뿐인 상승 조끼
3.2.3. 상처뿐인 상승 손아귀
3.2.4. 상처뿐인 상승 발걸음
3.2.5. 상처뿐인 상승 망토
3.3. 워록
3.3.1. 상처뿐인 상승 두건
3.3.2. 상처뿐인 상승 제의
3.3.3. 상처뿐인 상승 장갑
3.3.4. 상처뿐인 상승 장화
3.3.5. 상처뿐인 상승 완장
4. 5년차 방어구
4.1. 헬멧
4.2. 팔
4.3. 가슴
4.4. 다리
4.5. 직업
5. 4년차 장식
5.1. 빛나는 풍뎅이 의체
5.2. 변화의 바람
5.3. 패러다임의 전환
6. 5년차 장식
6.1. 호루스 의체
6.2. 숨죽인 울대
6.3. 매의 추적
7. 6년차 장식
7.1. 영웅의 자취
7.2. 용맹한 기억
7.3. 생존자의 여정



1. 개요[편집]


오시리스의 시험에서 얻는 무기의 지식이다.

2. 무기[편집]



2.1. 학자[편집]


해가 지지 않으면 철야도 할 수 없습니다.

솔라는 사냥감의 핵에서 빛이 뒤틀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굶주린 손을 빠르게 움직여 더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뽑아냈다. 솔라는 사냥감의 갈비뼈 사이로 힘을 밀어 넣었고, 뼈가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애원하는 상대를 무시하고 더 깊이 파고들었고, 그 안의 빛을 표면까지 끄집어내고 그 아래에 숨겨진 것을 찾아내기 위해 붙잡을 곳을 더듬어 찾았다.

"그래…" 솔라의 의지가 사냥감의 빛을 향해 발톱을 뻗는 것처럼 더 깊이 파고들었다. 피와 근육을 헤치고 그림자의 중심을 더듬었다. "…네 안에도 있구나."

솔라의 어깨 너머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고 사냥감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탄환은 상대의 관자놀이에 명중했고, 육체는 무너져 내렸다. 솔라의 비뚤어진 빛은 소멸했다.

"무슨 짓이야?" 크리미크-5가 그녀의 귀에 대고 거칠게 말했다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세인트-14의 목소리가 투기장의 오디오 채널에서 터져 나왔다. "그만!"

솔라는 한 걸음 물러섰다. 뒤쪽에서 물질 전송이 시작됐다. 돌아선 그녀는 장갑을 두른 거대한 형체가 눈앞에 나타나자 당황했다.

"네가 어떤 기이한 빛을 다루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워록, 이건 너무 지나쳤다."

"시험이 그렇게 약해진 건 몰랐군요."

"아니… 네 승리는 인정해 주겠다. 여긴 시련의 장이 아니야. 처벌은 필요 없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수호자를 고문하는 건 허용하지 않겠어."

"수호자 대 수호자 싸움이라면 폭력만이 중요한 거 아닙니까? 죽음을 통해 힘을 얻는 거죠."

"넌 수호자가 아니다." 세인트는 솔라를 등지고 돌아서서 크리미크-5에게 다가섰다. "동료가 어떤 자인지 잘 알아 두는 게 좋겠다."

크리미크-5는 소총을 메고 뜨거운 눈빛으로 솔라의 바이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는 무릎을 꿇고 부서진 수호자의 고스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런 일엔 관여하고 싶지 않아. 내 스타일이 아니야."

크리미크의 눈이 끔찍한 풍경을 확인했다. "더 빨리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솔라는 세인트-14의 빛이 그녀의 빛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좋아요. 다들 어차피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네들 전쟁에 행운을 빌어 드리죠."

솔라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세인트는 손을 들어 투구의 천 조각 표시로 가져갔다. "제페토, 나와 이 투사들을 소환해. 경기 끝났다."


2.2. 별의 지평선[편집]


가장 밝은 별도 언젠가 집니다.

사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측방으로 간다. 적은 뭐에 공격당했는지도 모를 거야."

"자만하지 마, 사디. 트레스틴과 내가 A 쪽을 압박하겠어. 저 망할 바퀴들이 우리 사선을 가로막고 있잖아" 야라의 입에서 걱정스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트레스틴이 끼어들었다. "크리미크가 저쪽 화력팀에 있어. 몇 주 전에 시련의 장에서 날 때려눕혔던 녀석이야. 그냥 그렇다고."

"번개를 막을 순 없어, 야라. 그냥 그게 이끄는 곳으로 가야지." 사디는 소리 내 웃기라도 할 것 같았다.

"멍청한 녀석."

"넌 멍청한 시체가 될 거야." 트레스틴이 덧붙였다.

"죽더라도 명예롭게 죽어라, 수호자!" 야라의 목소리가 그의 심금을 울리고, 사디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앞쪽에 있는 수호자와 눈을 맞추고 산탄총을 들어 올린 채 돌진했다. 기둥 쪽으로 번개 수류탄을 던져 측면을 방어했다. 융합 무기가 충전되는 독특한 회전음이 들려와 사디는 공중으로 도약했다.

"보고 있으면 좋겠네…"

사디는 온몸에 전류가, 주위에 전기가 흐르며 자신을 목표물에 연결하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융합 소총이 발사되고, 사디는 자신을 빛에 바쳤다. 전기 에너지가 신경망을 타고 흘러 온몸을 뒤덮자 그의 근육이 경련했다. 그는 번개가 되어 비명을 지르며 타오르는 제단을 가로질렀고, 투기장을 영광스러운 정전기의 빛으로 칠했다.

성스러운 음성이 그의 공격이 적중했음을 확인해 주었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멀리서 소총이 발사됐다. 아무도 듣지 못한 현실적인 충격음이었다.


2.3. 태양의 눈[편집]


"태양이 내 눈을 빼앗았으니, 태양이 내 눈이 되리라." —올스프링 우화

측면을 지키는 영예는 크리미크-5가 차지했다. 타오르는 제단을 지켜보기에 태양을 등진 지금 위치보다 더 나은 곳은 없었다. 그는 감시탑이었고, 어느 누구도 그의 경계를 피할 순 없었다. 퉁명스러운 무전 대화로 화력팀이 전진을 시작했다는 신호가 들려왔고, 그는 적의 움직임을 전달했다. 크리미크-5는 화력팀이 좋은 위치를 두고 다투면서 거칠게 움직이고 사격을 교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솔라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흉포함으로 이전 상대를 갈가리 찢었다. 크리미크는 이번을 오늘의 마지막 경기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준경 너머로 그녀를 바라봤다. 솔라가 움직이자 주위의 대기가 스산하게 아른거리면서 그녀의 실루엣이 번졌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머리 위로 탄환을 날려 상대를 엄폐물 뒤로 돌려보냈다.

"조금 더 가까이 조준해." 솔라는 어깨 너머로 태양을 노려봤다.

크리미크-5의 조준경이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엎드려."

이어폰에서 지직거리며 소리가 들렸다. 카타케의 목소리가 머리에 꽂혔다. "천둥충돌이다… 도와줘!"

카타케의 새된 목소리와 함께 번개가 그를 덮치고 세인트가 고함을 질렀다. 크리미크는 C 지점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걸 봤다.

"팀에 알린다. 난 횃대를 떠난다. 카타케를 대신하겠다."

그는 미끄러지듯 제 위치로 이동하여 믿음직스러운 장총을 들어 올렸다. 조준경에 불운한 타이탄이 포착됐다. 번개가 여전히 그의 방어구에 머무르며 빠직거렸다.

"네겐 참 끔찍한 운명이구나, 형제여." 사격이 명중하고 타이탄은 쓰러졌다.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카타케. 다음엔 잘해 줄게."


2.4. 소환자[편집]


불과 생명의 춤에 참여하세요.

그녀는 태양을 등진 채 조종간을 느슨하게 붙잡고 신호가 고정되기를 기다렸다. 트레스틴의 시선은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머나먼 가능성의 빛을 넘어 더 먼 곳까지 뻗어 나갔다. 측면에서 내리쬐는 별빛에 도약선의 그림자가 우주를 향해 뻗었다. 그냥 그랬다. 특별할 건 없었다.

수성은 잘 익은 육신에 감싸인 검은 구덩이처럼 태양풍의 폭풍에 휘말린 채 아래쪽에 떠 있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시험과 시련의 장에 지속적으로 뛰어들어 봤지만 죽음에 관한 호기심을 채울 수는 없었다. 이젠 어차피 아무 상관 없었다. 달 이후로는 그랬다. 모두 끝났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트레스틴의 귀환은 가식적인 준비였다. 나름의 방식으로 결론을 찾기 위한 살아 있는 장례식이었다. 그녀는 악의적인 분열에 감춰진 의미를 보기 시작했다. 전시장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근엄함을, 그 전장 안에 울려 퍼지던 말의 진실을 보았다. 끝이었다. 화해해야 할 시간이었다.

"세인트-14이 지켜볼 거야. 부담 갖지는 마." 사디는 건틀릿 판금에 꿰놓은 빛바랜 보라색 리본을 비틀며 손가락을 풀었다.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지." 트레스틴이 소리를 내지 않고 입으로 말하는 순간 야라의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들 기운 내라. 우리는 어둠을 가로막는 방벽이다. 우리는 수호자다. 물러설 수는 없어."

방벽. 얇디얇아 적의 조준경에 삼켜져 버릴 방벽.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겠지.

타오르는 제단… 대상 고정… 물질 전송 개시…


2.5. 추방자의 저주[편집]


변장한 축복입니다.

"오시리스의 시험에 잘 왔다!" 세인트-14의 우렁찬 목소리가 산사태처럼 제단 전체에 울려 퍼졌다.

카타케는 기둥을 향해 전진하면서 공포가 온몸을 휩쓰는 걸 느꼈다. 막강한 수호자들이 이 시험의 장에서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 봤지만, 지금은 전설 그 자체가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지도자들을 위한 시간. 하지만 그건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승리를 통해 거두어들인 보상과 리프의 안전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미래는 냉담하게 분노하며 두 가지 감정을 모두 무시했다. 지금은 미래를 바라볼 때가 아니었다. 거기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였다.

"그들 중 한 명이 통과했어… C 지점 쪽으로 떨어져 나갔다." 무전기에서 크리미크-5의 목소리가 지직거리며 들렸다.

"내가 간다." 카타케는 상대 팀의 측방 공격을 저지하려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카타케, 너 지금 내 시야에서 벗어났어."

그는 측면에서 돌진해 오는 산탄총을 든 타이탄과 눈이 마주쳤다. 카타케가 융합 소총을 들어 올리자 위잉 소리와 함께 소총이 깨어났다. 그 소리가 들렸는지 타이탄은 높이 도약한 후 충전된 운석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융합 에너지가 빠직거리며 방출되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상대는 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카타케는 달아났다.

"크리미크… 천둥충돌이다… 도와줘! 어서—"

천둥.

"좋았어!" 세인트-14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충돌 이후 그의 존재는 흔적만 남았다. 잔잔한 수면 아래, 미끼를 꿴 갈고리에 붙잡힌 뿌리였다. 질서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혼돈. 어딘가에서 고스트가 차분하게 윙윙 소리를 냈다. 조만간 빛이 다시 카타케를 채우고 그는 살아날 것이다.


2.6. 내일의 답[편집]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야라가 발사기에 로켓을 때려 넣었다. "상자가 너무 모자라잖아."

"사디가 쓰러졌다." 트레스틴이 야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은 혼자야."

그 말이 그녀의 입을 떠나기가 무섭게 공허의 빛으로 가득한 워록이 신성 차원으로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야라는 돌아서서 트레스틴의 머리 위로 로켓을 발사했다. 상대 워록은 공허 에너지의 오라를 손에 집중하여 초신성 폭발을 방출했다. 두 개의 투사체가 충돌했다. 공허와 불길이 서로를 찢고 바깥쪽으로 쏟아져 나오며 세 명의 투사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야라가 신음 소리를 내는 사이 시야가 걷히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자동 소총을 발사하는 듯한 혼란스러운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다리에 돌출되어 있는 딱딱한 파편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트레스틴… 응답해."

응답이 없었다. 야라는 모래와 미립자 속을 더듬어 무기를 찾으려 했지만 흩어진 돌과 잔해만 손에 잡힐 뿐이었다. 헬멧 바이저에는 무의미한 신호만 표시되고, 소용돌이치는 모래 속에서 열 신호가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녀는 바이저 옆을 때려 신호 간섭을 제거했다. 보라색 충격파가 모래를 밀어냈다. 트레스틴이 지친 모습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워록은 빛나는 손을 뻗어 트레스틴의 가슴 보호구 안으로 소용돌이 수류탄을 밀어 넣었다. 야라는 그녀의 눈 속에서 공허에 온몸이 휩쓸리는 모습을 보았다. 비명도 방어구가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소용돌이에 삼켜진 트레스틴이 갈가리 찢겨 흩어지는 모습만 보였다.

야라는 충격으로 굳어버린 정신을 흔들어 깨우며 보조 무기를 꺼냈다. 그리고 워록의 어깨에 탄환 한 발을 발사했다. 워록은 충격에 몸을 움츠리면서 공허에 뒤틀린 한쪽 손을 야라를 향해 펼쳐 불안정한 에너지를 방출했다. 권총 몸체가 엉망진창으로 부서졌다. "이제 그런 짓은 끝이다."

"너무 잔인하잖아. 그럴 필요는 없었어…"

"어차피 누구에게도 그럴 '필요'는 없어. 그걸로 무엇을 얻는지가 중요한 거지." 워록은 미소를 지으며 공허로 뒤틀린 손을 들었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2.7. 전령[편집]


나쁜 소식을 전달합니다.

오노르는 뚱한 기분으로 아이코라의 개인 도서관에 나타났다. 탑을 방문하는 건 싫었다. 눅눅한 저장고에서 멀리 떨어진 문이 없는 방에 들어섰어도, 왠지 방랑자의 유황 냄새가 풍겨 오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글을 쓰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드는 아이코라를 보니 짜증난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이렇게 보니 기쁘네." 그녀가 말했다.

"흥미로운 인사를 선택하셨군요. 전 '매우 심각한 문제' 때문에 소환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마음이 놓였다'고 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군. 이런 임무를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은 별로 없거든." 아이코라는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오노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습니까?"

"칭찬이었네.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는 건 아니야."

"불쾌한 임무를 맡긴다고 해서 입에 발린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코라."

아이코라는 한숨을 쉰 후 데이터 패드를 두드렸다. "오염된 수호자가 또 하나 확인됐네."

망토 안에 있는 오노르의 패드에서 띵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데이터 패드를 꺼내 스크롤하며 읽었다. "명령 불복종, 선봉대 비밀 유출… 평범하군요. 장기간에 걸친 고의적인 고문?" 그녀는 의문이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몰락자 민간인들이 구원의 가문에서 달아나고 있네." 아이코라가 진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녀의 화력팀 말에 따르면, 에라미스가 어둠과 어떻게 접촉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고 하더군. 동료들은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오노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자기 화력팀도 고문한 겁니까?"

아이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노르는 데이터 패드를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아직 유로파에서 어둠과 접촉하려 하고 있는 것 같네."

"그렇겠군요. 이제 선봉대에서 금지령을 해제했으니, 얼마든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힘의 유혹에 빠진 자들은 누구나 그럴 겁니다." 그녀는 날 선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말을 또 하고 싶지는 않지만, 선봉대는—"

"선봉대는 어둠을 탑에 받아들였습니다. 방랑자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미치는 곳에서, 수호자들이 그 힘을 사용하게 허락했죠. 그 외의 곳이라면, 절 보내서 처벌하고요."

"처벌이 아니네." 아이코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 말을 정정해 주었다. "구원이야. 먼저 그들에게 협조할 기회를 줘야 하네.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을 반성하고 인류의 편으로 돌아올 기회를 줘야지."

"지금까지는 아무도 그런 기회를 잡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럴 사람이 없는 건 아닐 거야."

"이 트레스틴이란 녀석은요? 과연 이번이라고 다를까요… 지금까지 몇 명이었습니까? 이제 제가 그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건, 그냥 절 먼저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만해." 아이코라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번 사건의 결과를 낙관적으로 전망하지는 않네. 앞으로의 일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어둠과 접촉한 사람이 전부 오염된다는 보장은 없어. 그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 한, 자네에게 내린 명령은 유효하네. 알아듣겠나?"

오노르는 입을 꽉 다물고 그녀를 바라봤다. "앞으로의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녀석들이 어딘가에서 난동을 부리면, 어차피 다시 말씀하시겠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네. 이해할 수 있어."

오노르는 손을 내저어 아이코라의 걱정을 떨쳐 버렸다.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푸른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


2.8. 화성의 망치[편집]


불과 힘으로 벼려졌습니다.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네." 아이코라가 말했다. "이해할 수 있어."

도서관 반대쪽에서 오노르가 형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노르는 은신자 중 가장 성실한 요원으로, 오염된 수호자를 사냥하는 불쾌한 임무에 전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아이코라를 걱정시켰다.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오노르는 조금씩 야위어 갔다. 조금씩 짜증이 늘었다. 그 성전의 대가를 치르는 걸까? 그녀에게 휴가를 주지 못하고 또 한 번의 임무를 주는 것이 실수였을까?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오노르는 딱 잘라 말한 후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이코라의 걱정스러운 마음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빠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코라가 눈을 뜨자, 조금 전 오노르가 있던 자리에 세인트가 서 있었다. "아이코라 레이, 예고도 없이 와서 미안하—"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녀의 개인 도서관 위치를 아는 건 은신자뿐이었다. 아니, 지금까지 그렇다고 생각했다.

엑소는 당황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 난 물질 전송으로 왔는데." 그는 어색하게 대답한 후 다시 말했다. "미안하지만, 꼭 할 얘기가 있었다."

"아니요, 사과할 사람은 저예요. 자, 앉으세요." 그녀는 안락의자 위에 쌓인 책을 황급히 치웠다. "메시지는 받았어요. 두 번이나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요."

세인트는 자리에 앉았다. 거대한 체구에 의자가 너무 작아 보였다. "그래, 안타까운 일이지. 불안하기도 하고. 난 두려웠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창밖으로, 황금색으로 변한 오후의 태양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전투라면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의심할 건 아무것도 없어. 시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제는, 전혀 모르겠구나."

"알아요. 가끔은 이런 사건들이 전부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들려는 것만 같아요. 우리 자신의 능력까지요." 아이코라가 그의 곁에 앉았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시험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말고는 없죠."

"시험의 이름을 따온 원래 주인이 있잖나?" 세인트는 구슬픈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본인은 맡고 싶어 하지 않더군. 내가 물어보자마자 너무 바빠서 신경 쓸 틈이 없다고 했으니까. 나더러 지쳤으면 폐쇄해도 좋다고 하던데."

"뭐, 워낙 바쁜 분이죠. 기갑단과의 갈등이 시작된 후로 계속 세 번째 선봉대처럼 활동하고 계시니까요. 카이아틀과 합의한 후라면…"

"오해하고 있군. 그가 바빠서 다행이다. 바쁜 건 좋은 거지. 상실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는…"

"다르다고요?"

"아니. 그래,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는 좌절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일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난 나처럼 걱정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에 그런 일이 있으면 기록을 남겨 달라고만 하더군. 그런 데이터는 유용할 거라면서." 그는 경멸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을 뱉었다.

아이코라는 세인트를 바라보며 그가 조금 더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놀라지는 않았다. 오시리스는 실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자였고, 특별히 세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이번에 한 말이 평소보다 더 냉담하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세인트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는 불안해하는 듯했다. 오시리스에게 화라도 난 것 같았다…

"그간 겪은 일이 있는데 확실히 반가운 얘기는 아니었겠네요."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인트는 시선을 외면하여 그녀의 생각을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악의가 있는 건 아닐 거예요. 우린 어둠에 관해 너무 몰라요. 데이터는 언제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세인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을 통과한 햇살이 그의 투구를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이었다. "수호자들이 그걸 손에 넣으며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어야 해요. 오시리스가 어떻게 생각하든, 시험이란 화력팀을 훈련시키는 수단으로 시작된 것이며, 앞으로도 그런 역할에 머무를 거예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엑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가 맹세할게요."

그는 여전히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2.9. 솔라의 상처[편집]


파내면 흔적이 남습니다.

기다림은 거의 끝났다. 카드모스 마루를 기어오르며, 트레스틴은 알 수 있었다.

눈에 반사되어 증폭된 햇살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어느새 구름 위로 올라와 있었다. 고개를 숙여 바로 눈앞에 있는 바위산에 초점을 맞췄다.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다음 바위 위로 올라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무전기 너머에서 살라딘 경의 목소리가 잡음과 함께 들려왔다. "기갑단이 침입했다… 앞쪽에… 벡스다." 아무 말 없이 트레스틴의 고스트는 무전기를 껐다. 강철 군주의 명령을 수행할 사람은 이 근방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살라딘도 그들을 필요로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예전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들을 배신했다. 아니, 적어도 사디는 그렇게 외쳤다. "우린 어둠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이야, 이 배신자!"

그래, 마지막이지. 그러니 한 걸음 넘어서는 게 어떻겠나?

왜냐하면 그들의 안에는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확인해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을 부숴 열고 깊이 파고들어 확인했다. 하지만 거기엔 없었다. 유로파의 빙하 껍질 아래 묻힌 바다처럼 거대한 굶주림은 거기 없었다.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조류의 충돌이 끊임없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아무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해방되고 싶었다.

조만간 갖게 될 것이다. 조만간 자유로워질 것이다.

지친 근육이 떨렸다. 손을 위로 뻗자 마침내 눈이 잡혔다. 정상에 도달했다.

그녀는 잠시 경사면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뿌옇던 시야가 걷히자, 그녀는 헉, 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거기 그게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설원 위에서 검은 돌이 강렬한 대조를 이뤘다. 돌은 그녀의 심장 박동에 맞춰 맥동하는 듯했다. 그녀 안에서 이글거리는 욕망에 조율하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녀석." 야라였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작지만 간절한 또 하나의 굶주림이 그녀 안에 피어났다. 그건… 외로움이었을까?

그건 약점이다. 네 앞에 놓인 건 힘이다.

맥동이 강해졌다. 혈관을 타고 몰아치는 피의 힘을 느끼며, 그녀는 오벨리스크를 향해 걸으며 손을 뻗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거기 멈춰." 누군가 낯선 목소리로 트레스틴을 향해 말했다. 머릿속에서 들린 소리는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몇 미터 떨어진 곳에 검을 든 워록이 서 있었다. "당신이 트레스틴이겠지. 오노르라고 한다. 조용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트레스틴은 그녀를 본 후, 다시 오벨리스크를 향해 달렸다.

마지막으로 느껴진 건 강철이었다. 순수하고 차가운 강철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2.10. 샤유라의 분노[편집]


"하지만 이렇게 왔잖습니까. 이게 진정한 시작입니다…" —신 말푸르

//NS66CE_기록-C //금성-L2-정지궤도//

동력을 잃은 전쟁위성이 공허의 공간에서 죽은 듯 표류하며 환한 연두색으로 빛나는 금성 앞을 가로질렀다.

정지 궤도에 오른 NS66 어긋난 구름 도약선의 희미하게 빛을 밝힌 조종석에서 보는 금성은 우주의 어둠 속에서 깜빡이지 않고 또렷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닮아 있었고, 표류하는 전쟁위성은 그 안의 달갑지 않은 모래알 같았다. 의체를 잃고 금속 구체로만 남은 고스트가 조종석 한쪽 구석에서 외로운 금성을 가로지르는 전쟁위성의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지금 금성에서 허가된 선봉대 작전은 없어요." 고스트가 서늘한 파란색 눈을 수호자에게 돌리며 설명했다. "왜 그 사람이 저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워록 샤유라는 좌석에 기대앉았다. 낡은 가죽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고스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조종간 중앙에 있는 인간의 두개골만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눈구멍이 그녀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왜 저기 있는지는 아무 상관 없어." 샤유라는 두개골의 광대뼈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 골절이 발생한 부위를 어루만졌다. 산탄총 탄약이 적중한 흔적이었다. "중요한 건 그를 찾아내는 것뿐이야."

샤유라의 고스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금성을 바라봤다.

"언제 지구로 돌아갈 거예요?" 그가 물었다.

샤유라는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고, 대신 눈을 깜빡이며 반짝이는 시선을 다시 고스트에게 돌렸다. 고스트는 부드럽게 삐빅거리며 질문을 다시 생각했다.

"돌아가기는 할 건가요?" 고스트가 다시 물었다.

"아니." 샤유라는 단호히 대답했다.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 모든 사람이 날 버리거나 배신했어. 내게 남은 건 여행자뿐이야. 그리고 빛을 느끼기 위해 도시에 있을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하며, 샤유라는 손을 들고 손바닥 위에 이글거리는 불길의 장막을 불러냈다.

"실천의 불꽃이여, 날 인도하소서." 샤유라는 두 눈 가득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NS66CE_기록-D// 금성-IS-IA //

"보이나? 아직 보호되고 있다. 가치 있다."

빛의 가문의 문장을 지닌 키 작은 엘릭스니는 잔해로 뒤덮인 낮은 계단으로 서둘러 다가간 후 잠시 멈춰 서서 뒤따라오는 크롬 방어구의 수호자를 바라봤다. 엘릭스니는 수호자를 위아래로 살핀 후, 금성의 관목 위로 높이 치솟아 강렬한 위용을 자랑하는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 건물을 가리켰다.

"이건 제대로 된 아카데미라고 할 수 없어." 수호자는 올라가면서 말했다. 연무가 흐릿하게 낀 하늘은 위험의 징후 같았다. 반사 가면에 물방울이 맺혔다. 검은 두건이 나머지 원소로부터 그를 지켜 주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엘릭스니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네 개의 눈을 각각 따로따로 깜빡였다. "인간의 것 아니다. 모른다. 안에 기계 있었다."

"너희는 왜 가져가지 않는 거지? 괜찮은 물건을 회수해 가면 진급하거나 뭐 그러지 않아?" 수호자가 무너져 가는 건물을 향해 손짓하며 물었다.

엘릭스니는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거미의 은밀한 말을 지나치게 믿는 모양이군. 어서 가자. 가야 할 길이 멀—" 엘릭스니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는 기관단총 연속 사격에 온몸을 꿰뚫리며 축축한 외마디 비명만 마지막으로 외쳤다.

수호자는 망토를 휘날리며 핸드 캐논을 손에 들고 돌아섰다. 하지만 높은 절벽에서 내려오는 건 벡스나 몰락자가 아니었다. 검은색과 금색 방어구를 착용한 수호자가 활공하여 지상으로 내려섰고, 그녀의 기관단총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샤유라의 장화가 나뭇잎으로 뒤덮인 광장을 가볍게 두드리고, 그녀의 눈 없는 가면이 크롬으로 몸을 두른 헌터에게 고정되었다.

"이 녀석은 전투원도 아니었다고!" 헌터가 외쳤다.

샤유라는 천천히 수호자에게 다가갔다. "에라미스의 치맛자락 안에서 저자를 찾아낸 건가? 아니면 그녀가 죽은 후 어둠에 몸을 맡겼나?"

헌터는 물러나서 계단 위쪽으로 올라갔다. 핸드 캐논으로는 샤유라를 조준한 채였다. 그는 그녀의 방어구를 알아봤다. 시험 보상이었다. "당신, 누군지 알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어선 안 되는데. 선봉대가 언제 당신을 풀어 준 거지?"

"그러지 않았어. 그들이 적에게 문을 열어 주느라 너무 바쁘길래 내가 직접 나왔다." 샤유라가 기관단총의 총구로 죽은 엘릭스니를 가리켰다. "하지만 넌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겠지."

"탄창에서 몇 발 빠진 것 같은데." 수호자는 그렇게 맞받아치며 핸드 캐논으로 건방진 손짓을 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샤유라는 짧은 점사 두 번으로 그에게 여섯 발의 탄약을 박아 넣었다.

수호자는 무너져 내리고, 그의 총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잠시 후, 분노로 의체를 활착 펼친 그의 고스트가 형성되었다. "무슨 짓이에요?! 우리는—"

샤유라는 번개처럼 움직였고, 고스트 뒤에서 실체화되어 생생한 실천의 불꽃 검을 위로 휘둘렀다. 고스트는 공포의 비명을 내지르며 반짝이는 조각들로 산산이 흩어졌다.

계단 위에 쓰러진 헌터가 기침을 했다. 목덜미가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샤유라는 깨진 고스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기관단총으로 사냥감을 조준했다. "배신자." 그녀는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때문에 떨리고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헌터는 키들키들 웃다가 자기 피에 목이 막혀 콜록거렸다. "너도 드레젠보다 나을 게 없어." 그는 고통에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더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말푸르보다도 그렇고."

"나는 어둠의 요원을 처치했다." 샤유라는 말했다. 이번에는 헌터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샤유라의 목 안쪽에서 신물이 치밀어 올랐다.

"놈들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


2.11. 리드의 후회[편집]


"날 믿어." —오시리스로 변한 사바툰

천장등이 웅웅 소리와 함께 깜빡이며 깨어나 꽃 같은 분홍색 빛을 흩뿌렸다. 벽에 줄지어 늘어선 무기 선반에서 나방들이 이리저리 날아갔다.

리드-7은 허리를 숙이며 방으로 들어섰고, 가까스로 등 뒤의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벽장보다도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은 그 공간은 다양한 무기가 천장까지 쌓여 있는 무기 보관실이었다. 그의 엉덩이가 작업대에 스쳤다. 그 위에는 오시리스의 눈 표시가 새겨져 있는 검은색과 금색의 융합 소총이 놓여 있었다.

그는 작업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체중에 짓눌린 의자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융합 소총 주위에 널브러진 쪽지들에 휘갈겨 쓴 메모는 모두 친구인 샤유라의 글씨였다. 그 모든 것 위에 희미하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리드는 손에 든 융합 소총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시험에서의 탁월한 성적을 치하하려고 세인트-14이 그 무기를 샤유라에게 주던 때가 기억이 났다. 그리고 몇 달 후, 샤유라가 경기 도중에 제정신을 잃고 하마터면 다른 수호자를 진짜로 죽일 뻔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의 절망스러운 기분이, 분노가, 고통이 아직도 생생했다.

"샤유라 걱정은 하지 마라." 오시리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여전히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 트라우마는 내게도 익숙한 일이다. 내가 그녀를 보살펴 주고, 이끌어 주겠다."

리드가 융합 소총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녀에게 청명으로 돌아오는 길을 보여 줘라."

그의 손이 떨렸다.

"날 믿어라."


2.12. 아이샤의 포용[편집]


내 상처를 녹아내린 금으로 채워, 다시 온전하게 만들어 주세요.

그녀는 전에 여기 온 적이 있었다.

창백한 구름 가닥이 검은 에메랄드빛 소나무 숲 위를 맴돌았다. 여기에서는 새들도 지저귀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바람만 가지 사이를 스치며 휘파람을 불어 댈 뿐이었다. 숲에서 원자의 불길이 꽃을 피우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나무껍질을 핥았다. 이곳의 대지는 독이요, 대기는 폭력이었다. 인간과 비인간의 비명이 음울한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녀는 전에 여기 온 적이 있었다.

군체 노예 이십여 마리가 동굴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연체동물과 시체를 모두 닮아 아른거리는 유백색이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버둥거리며 죽음과 탄생의 비명을 목놓아 울었다. 샤유라는 불의 검을 단단히 붙잡고 제자리를 지키며, 밀려오는 키틴질과 뼈의 해일에 맞서 거칠게 포효했다.

그녀는 전에 여기 온 적이 있었다.

노예의 타오르는 불씨가 주위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썩어가는 병사의 파도를 막아낼 때마다 적의 수는 두 배로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적은 계속해서 그녀를 압박했고, 그녀는 등 뒤의 무너져 내리는 협곡으로 조금씩, 조금씩 밀려났다. 샤유라는 유일한 탈출로는 적을 돌파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등에서 불길의 날개가 솟아 나와 강렬한 열기의 파문을 방출하고, 그녀가 지나는 길에 검게 그은 노예를 남겼다.

그녀는 전에 여기 온 적이 있었다.

노예가 마침내 물러났다. 하지만 갈라선 적 병력 사이에서 거대한 기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승리가 아니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됐을 뿐이었다. 그녀의 검이 기사의 방패에 충돌하며 단번에 방패를 산산이 조각냈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꽂힌 검은 기사의 팔을 자르고, 가슴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전에 여기 온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빛이 물러나는 것을 느끼며, 지체 없이 기사를 반으로 가르고 머리를 몸에서 떼어냈다. 샤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음 숨결과 함께 눈부신 빛이 타올랐다. 섬광이 기사의 위쪽에 발현되었다. 그녀의 시야가 흔들리고 머리가 아찔해졌다. 익숙한 동시에 이질적인 그 형체는 고스트였다. 샤유라는 마치 수호자처럼 재구축되어 다시 태어나는 군체 기사를 보았다.

그녀는 전에 여기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샤유라는 짙은 당혹감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이건 군체 죽음의 의식이 아니었다. 여기는 타이탄이 아니었다. 샤유라는 몸을 굴려 기사의 다음 공격을 피하고, 방어구를 할퀴는 노예의 공격 범위로 들어섰다. 마지막 태양 에너지를 끌어내, 샤유라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의 기둥을 하늘로 끌어 올리며 기사를 집어삼켰다.

…이렇게는 아니었다.

기사의 망령이 불길 안에서 붕괴되고, 그 고스트가 다시 발현되었다. 샤유라는 앞으로 도약하여 검을 찔러 넣었고, 비명을 지르는 고스트를 그대로 숲 바닥에 내리꽂았다. 태양 오라가 깜빡이며 사라져 갔다. 연기와 증기가 그녀의 등과 어깨에서 피어올랐다.

"이렇게는 아니었어!"

"샤이!"

샤유라가 헐떡이며 퍼뜩 놀라 정신을 차렸다. 몸 아래로 부드러운 초록색 풀밭이 느껴지고, 꽃으로 뒤덮인 공원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지금 도시 한가운데에서, 여행자의 그림자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기관단총이 옆쪽 지면에 놓여 있었다. 지친 눈 아래로 흘러내린 눈물이 반짝였고, 검은 머리카락은 머리에 엉겨 붙어 있었다.

아이샤는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야생 동물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친구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리드-7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절망적인 침묵에 잠겨 있고, 다시 그의 뒤쪽으로는 도시 경비원들이 부채꼴 대형으로 샤유라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샤이?" 아이샤는 애원하듯 불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샤유라의 두 볼에 손을 올리고 친구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기를 알아보는 기색이 있는지 살폈다. 샤유라도 힘겹게 손을 들어 아이샤의 한쪽 손에 가져다 댔다.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훌쩍이는 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아이샤는 샤유라의 어깨를 감싸고 품에 안았다. "괜찮아질 거야." 아이샤는 샤유라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우리가 도와줄 사람을 찾아 줄게." 아이샤는 약속했다.

샤유라는 자기 자신도, 지금껏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도 믿을 수가 없었다. 빛은 어둠이요, 어둠은 빛이었다. 그 경계가 이제는 인지할 수 없는 수준까지 흐려지고 말았다.

그래도 포기하니, 마음은 평온했다.


2.13. 확고한 의무[편집]


"이걸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대뿐이야." —아이코라 레이

"고맙지만 사양할게." 아이샤는 작은 탁자 위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는 찻잔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리드-7은 걱정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몸을 굽혔다. 시장을 물들인 아침 햇살이 그의 위로 내려앉았다.

"예전 같지 않아…" 샤유라가 있어야 할 탁자의 빈 옆자리를 바라보는 아이샤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녀는 리드를 바라보았으나, 리드는 더 이상 아이샤를 보는 것이 아닌 그녀의 뒤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편을 돌아본 그녀는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아이코라 레이의 단호한 모습을 발견했다.

"좋은 일은 아니겠는걸." 리드가 자세를 바로잡고 탁자에서 팔꿈치를 떼며 말했다. 아이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괜찮으니 앉아 있게." 리드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자 아이코라가 말했다. 건장한 몸집의 엑소는 아이샤와 아이코라를 차례로 바라본 뒤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아이샤도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희를 찾아오신 이유가 있나요?" 아이샤가 물었다.

아이코라는 조용히 아이샤와 리드를 바라본 뒤, 마지막으로 빈 의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샤유라 얘기를 해야겠네." 아이코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샤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리드를 흘끗 보았다. 이거였나? 그녀는 속으로 원래 이렇게 빨리 판결 선고가 나는지 의문을 품었다.

침묵이 그들을 감돌고, 아이코라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샤유라가 석방될 걸세."

2.14. 고귀한 진실[편집]


"세상의 종말이야. 다른 선택지는 없네." —아이코라 레이

"나는 우리 선조들을 칭송합니다."

두꺼운 강철 보안 문이 열리자 밝은 로비가 이어졌다. 워록 샤유라는 수갑을 차고 무장한 두 프레임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했다.

"나는 내 화력팀을 칭송합니다."

아이코라 레이는 로비 중앙을 장식하는 청록색과 금색 모자이크 타일 위에 서 있었다. 구금 시설 프레임이 샤유라를 밀며 손목 구속을 풀어 주었다. 아이코라는 수치심과 의혹이 일렁이는 샤유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는가?" 아이코라가 물었다.

"나는 내 진실을 칭송합니다."

샤유라는 수갑 때문에 붉어진 손목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코라는 말없이 프레임들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하며, 계속 샤유라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해 있네. 그러나 치유도 정의도 없는 곳으로 자네를 몰아넣긴 싫네."

"나는 내 마음을 칭송합니다."

"압니다." 샤유라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아이코라는 그녀의 어깨를 꾹 움켜쥐었다. 아이코라의 손길에 샤유라는 아이코라의 시선을, 자신의 멘토가 보내는 눈빛을 마주 보았다. 그 눈빛에 자신과 같은 수치심과 의혹이 일렁이는 것을, 샤유라는 보았다.

"나는 인류의 사랑을 칭송합니다."

한동안, 둘은 침묵 속에 서 있었다. 둘은 서로를 이해했다. 공감이 전해졌다. "임시로 자네를 화력팀에 넘기겠다. 일부 긴급 작전만 해당하네. 상담을 계속하려면, 우제어 박사에게 알리게.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다시 정의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지."

"무엇보다도…"

샤유라의 어깨가 떨렸다. 아이코라는 그녀를 끌어당겨 짧게 안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샤유라가 속삭였다.

"나는 진실을 옹호합니다."


2.15. 별의 지평선(6년차)[편집]


불과 생명의 춤에 참여하세요.

그녀는 태양을 등진 채 조종간을 느슨하게 붙잡고 신호가 고정되기를 기다렸다. 트레스틴의 시선은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머나먼 가능성의 빛을 넘어 더 먼 곳까지 뻗어 나갔다. 측면에서 내리쬐는 별빛에 도약선의 그림자가 우주를 향해 뻗었다. 그냥 그랬다. 특별할 건 없었다.

수성은 잘 익은 육신에 감싸인 검은 구덩이처럼 태양풍의 폭풍에 휘말린 채 아래쪽에 떠 있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시험과 시련의 장에 지속적으로 뛰어들어 봤지만 죽음에 관한 호기심을 채울 수는 없었다. 이젠 어차피 아무 상관 없었다. 달 이후로는 그랬다. 모두 끝났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트레스틴의 귀환은 가식적인 준비였다. 나름의 방식으로 결론을 찾기 위한 살아 있는 장례식이었다. 그녀는 악의적인 분열에 감춰진 의미를 보기 시작했다. 전시장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근엄함을, 그 전장 안에 울려 퍼지던 말의 진실을 보았다. 끝이었다. 화해해야 할 시간이었다.

"세인트-14이 지켜볼 거야. 부담 갖지는 마." 사디는 건틀릿 판금에 꿰놓은 빛바랜 보라색 리본을 비틀며 손가락을 풀었다.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지." 트레스틴이 소리를 내지 않고 입으로 말하는 순간 야라의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들 기운 내라. 우리는 어둠을 가로막는 방벽이다. 우리는 수호자다. 물러설 수는 없어."

방벽. 얇디얇아 적의 조준경에 삼켜져 버릴 방벽.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겠지.

타오르는 제단… 대상 고정… 물질 전송 개시…


2.16. 전령(6년차)[편집]


파내면 흔적이 남습니다.

기다림은 거의 끝났다. 카드모스 마루를 기어오르며, 트레스틴은 알 수 있었다.

눈에 반사되어 증폭된 햇살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어느새 구름 위로 올라와 있었다. 고개를 숙여 바로 눈앞에 있는 바위산에 초점을 맞췄다.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다음 바위 위로 올라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무전기 너머에서 살라딘 경의 목소리가 잡음과 함께 들려왔다. "기갑단이 침입했다… 앞쪽에… 벡스다." 아무 말 없이 트레스틴의 고스트는 무전기를 껐다. 강철 군주의 명령을 수행할 사람은 이 근방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살라딘도 그들을 필요로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예전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들을 배신했다. 아니, 적어도 사디는 그렇게 외쳤다. "우린 어둠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이야, 이 배신자!"

그래, 마지막이지. 그러니 한 걸음 넘어서는 게 어떻겠나?

왜냐하면 그들의 안에는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확인해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을 부숴 열고 깊이 파고들어 확인했다. 하지만 거기엔 없었다. 유로파의 빙하 껍질 아래 묻힌 바다처럼 거대한 굶주림은 거기 없었다.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조류의 충돌이 끊임없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아무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해방되고 싶었다.

조만간 갖게 될 것이다. 조만간 자유로워질 것이다.

지친 근육이 떨렸다. 손을 위로 뻗자 마침내 눈이 잡혔다. 정상에 도달했다.

그녀는 잠시 경사면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뿌옇던 시야가 걷히자, 그녀는 헉, 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거기 그게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설원 위에서 검은 돌이 강렬한 대조를 이뤘다. 돌은 그녀의 심장 박동에 맞춰 맥동하는 듯했다. 그녀 안에서 이글거리는 욕망에 조율하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녀석." 야라였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작지만 간절한 또 하나의 굶주림이 그녀 안에 피어났다. 그건… 외로움이었을까?

그건 약점이다. 네 앞에 놓인 건 힘이다.

맥동이 강해졌다. 혈관을 타고 몰아치는 피의 힘을 느끼며, 그녀는 오벨리스크를 향해 걸으며 손을 뻗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거기 멈춰." 누군가 낯선 목소리로 트레스틴을 향해 말했다. 머릿속에서 들린 소리는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몇 미터 떨어진 곳에 검을 든 워록이 서 있었다. "당신이 트레스틴이겠지. 오노르라고 한다. 조용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트레스틴은 그녀를 본 후, 다시 오벨리스크를 향해 달렸다.

마지막으로 느껴진 건 강철이었다. 순수하고 차가운 강철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2.17. 예상치 못한 부활[편집]


"시공이 학사 논문이라면, 초월은 박사 논문 같은 겁니다." —파오라 자매

샤유라는 도금된 구리 냄비 안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분재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흙 아래에는 세로로 조각난 고스트의 조각이 묻혀 있었다. 나무는 그 조각을 감싸고 자라나고 있었다. 샤유라는 향에 불을 붙여 뿌리와 흙이 만나는 곳에 꽂아 두었다.

시장은 조용했다. 그녀는 갓 화분에 심은 나무를 들어 낮은 탁자 위에 내려놓고, 한때는 여행자가 보호했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보고 싶어." 부드러운 나뭇가지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샤유라가 속삭였다.

리드-7의 고스트 잔해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순간, 도약선의 조종석에 희생자들의 고스트가 엉망으로 흩어져 있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녀의 고스트는 목격자의 분노를 모면했다. 아이샤의 고스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아픔은 그녀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기적일 터였다. 샤유라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녀는 중심을 잡으려 노력했다.

"나는 내 화력팀을 칭송합니다."

"기도인가요?" 한 여자가 뒤에서 물어왔다. 샤유라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시장 가판대 사이로 낯선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지팡이처럼 생긴 월도를 들고 있었다. 월도의 디자인은 화려한 무늬의 로브와 잘 어울렸다. 낯이 익었다. 오시리스의 신도였다.

"…그런 셈이죠." 샤유라가 한발 늦게 대답했다.

로브를 걸친 여자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 샤유라."

낯선 사람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샤유라가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추모비를 흘끗 쳐다보고 일어났다.

"부탁이니 절 내버려 두세요."

"제 이름은 파오라 자매입니다." 로브를 걸친 여자가 말을 이었다. "오시리스의 추종자이자, 진실의 탐색자죠. 낙오자이기도 하고요." 마지막 칭호에 샤유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원하는 게 뭐죠, 낙오자 파오라?"

파오라 자매가 한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당신이 겪은 일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거의 하지 않을 제안을 하려고 하거든요."

샤유라가 눈썹을 찡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파오라는 대담하게 그 시선을 마주했다.

"바로 우정이죠."

3. 4년차 방어구[편집]



3.1. 타이탄[편집]



3.1.1. 상처뿐인 상승 투구[편집]


"충분히 튼튼한 투구를 쓴다면, 네 상처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 —리드-7. 엑소 타이탄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1 // 수성

엑소 타이탄 리드-7은 수성의 모래 위에 태양을 등지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리드와 그의 고스트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불줄기에 시선을 집중했다.

"늦네요." 리드의 고스트가 재잘거렸다.

"또야." 리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의 두 눈이 모래가 뒤섞인 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의 흔적을 따라갔고, 대기권에 돌입하는 한 쌍의 도약선이 눈에 띄었다.

"공개 통신 채널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어요." 리드의 고스트가 수호자 옆에 동동 뜬 채로 말했다. "충격에 대비하는 게 좋겠네요."

도약선은 낮게 강하하여 재진입 후 지면을 스쳤고, 모래 구름이 피어올라 칼로리스 첨탑의 고대 마당을 휩쓸었다. 리드는 고개를 돌려 지평선 반대쪽으로 멀어지는 도약선을 바라봤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믿고 싶어!" 통신 장치에서 소리치던 목소리가 물리적 공간에서 들려 오고, 리드의 워록 동료 샤유라가 지표면에 나타났다. 빠직거리는 에너지 고리가 샤유라와 또 한 명의 수호자, 헌터 아이샤를 중심으로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 나갔다. 샤유라는 뜨겁게 분노하고 있었다. 황금색 불길의 파문이 그녀의 얼굴 옆에 아른거렸다.

리드는 도착하는 동료들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성의 모든 사람이 하는 말보다 더 많은 말을 두 사람이 하고 있었다. 둘을 그냥 내버려 두고 당면한 임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높이 솟아오른 등대와 그 바깥에 모여든 수호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다들 그 유명한 오시리스의 시험에서 싸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고스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리드는 고스트의 의체를 부드럽게 두드려 안심시켰다. 하지만 친구들의 서로에 대한 불만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이런 논쟁이 처음은 아니었다. 에리스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일까? 선봉대가 케이드를 살해한 자를 추적해야 할까? 케이드는 너무 무모해서 죽은 것이니 그 또한 케이드 자신의 책임 아닐까? 그들의 의견 충돌은 언제나 서로에 대한 이해로 끝이 났다. 하지만 오늘은 사정이 좀 달라 보였다.

"이봐!" 리드는 돌아서서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가 나왔다. 밝은 붉은색 엑소는 자기 목소리에 놀라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 힐난하는 목소리가 워록과 헌터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리드가 손을 들어 어색하게 목 뒤를 긁었다. "부탁인데, 그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샤유라와 아이샤는 어색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날선 말은 나중을 위해 잠시 접어 두었다. 샤유라는 검을 꺼내 매서운 바람이 부는 마당의 수호자 무리를 가리키며 도전을 선포했다.

"좋아." 아이샤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건 사소하지만 리드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승리였다.


3.1.2. 상처뿐인 상승 판금 흉갑[편집]


"난 화력팀을 위해 죽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사는 건 생각도 해 본 적 없어." —리드-7. 엑소 타이탄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2 // 시험 투기장, 등대, 수성

리드-7은 팔이 관절에서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온몸에 누적되는 진동이 방벽을 계속 유지하다가는 전신이 조각나 흩어질 거라며 위협했다. 방벽은 그의 빛과 육신의 연장선이었다. 그런 몸의 일부를 몇 번이나 넓은 범위에 펼치고, 상대의 자동 소총이 쏟아내는 탄환을 튕겨내야 했다.

상대 팀에는 수호자 두 명만 남아 있었다. 세 번째 수호자의 유해는 경기장에 흩어져 지글거리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리드는 아이샤와 함께 궁지에 몰린 아군 수호자에게 얼마나 빨리 달려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설사 리드가 쓰러진다고 해도, 아이샤와 지금 어딘가에 있는 샤유라가 승리를 차지할 시간은 있을 것이다.

"아이샤?" 리드가 물었다. 방벽이 불안정해지면서 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커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건 분명했다. 아이샤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주먹에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이샤에겐 더 나은 생각이 있었다.

상대 수호자가 재장전을 하려고 엄폐물 뒤에 숨자, 아이샤는 공중으로 솟아올라 방벽을 뛰어넘었다. 리드는 반구가 붕괴되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제야 사지에 가해지던 압력이 사라졌다. 하마터면 무릎이 꺾일 뻔했다. 그는 아이샤가 환한 빛을 발하며 타오르는 바퀴처럼 몸을 회전시켜 응축된 플라스마로 만들어진 칼을 사방으로 흩뿌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리드에게는 불길과 연기를 피워 올리는 섬광처럼만 보였지만, 상대 수호자는 털썩 쓰러지고 아이샤가 그 옆에 착지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리드-7은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위쪽에서 샤이는 봤어?" 리드가 물었다.

"아니. 자꾸 투명해지는 놈이랑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있겠지." 아이샤가 대답했다. "가서 그 녀석을 찾고 빨리 경기를 끝내 버리자고."

아이샤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원자의 불기둥이 인근 벡스 구조물에서 솟아올랐다. 등대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기가 종료되고, 주위의 고스트들이 죽은 수호자들을 재구축하기 시작했다.

불길이 솟아올랐던 것과 같은 방향에서 비명이 터져 나와 아이샤와 리드는 빠르게 움직였다. 두 사람은 낯익은 벡스 구조물을 재빨리 통과했고, 고통스러운 비명이 두 번 더 주위를 가득 채웠다. 그 소리의 발생지에 도달했을 때, 리드는 우뚝 멈춰섰다. 샤유라가 검으로 다른 수호자의 면갑을 꿰뚫고 있었다. 상대방의 고스트가 당황한 비명을 내지르며 애처롭게 사유라와 그의 수호자 사이에 끼어들려 애쓰고 있었다.

아이샤가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드에게 들리는 건 귓속의 피가 흐르는 소리뿐이었다. 그의 피는 아니었다. 피의 기억, 겹겹이 쌓인 탄소 중합체 판과 플라강철 직물의 층 아래 깊은 곳에 숨겨진 무언가의 기억이었다. 오래전부터 그의 신경망에 도사리고 있던 무언가. 그 순간, 리드는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 돌 속에 얼어붙은 얼굴들을 기억했다. 이오에서 고통스러워 하던 그의 고스트 목소리를 떠올렸다.

모르겠나?

리드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빛에는 나약함만이 존재한다.

상대 팀 수호자가 고스트의 힘으로 되살아났지만, 수호자가 샤유라에게 하는 애원의 말을 미처 끝맺기도 전에 워록은 단칼에 그의 팔을 잘라냈다. 그리고 잔혹한 후속 공격으로 검을 그의 헬멧 상단에 꽂아 넣었다. 리드는 가슴이 죄어 오는 것을 느꼈다. 당혹감이 치밀어올랐다.

실패만이.

"샤이, 안 돼!" 아이샤가 소리치며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샤유라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샤유라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며, 수호자의 사체를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죽음만이 존재한다.

"샤유라! 경기 끝났어!" 리드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다. "경기 끝났다고!"

리드와 아이샤가 함께 달려들어서야 격분한 워록을 억제할 수 있었다. 샤유라의 목소리가 짐승 같은 포효로 갈라지고, 불길이 그녀의 팔을 따라 흘러내려 피로 얼룩진 검을 끝까지 뒤덮었다.

"안 돼! 안 돼! 그만! 안 돼!" 샤유라는 거칠게 포효하며 동료들에게 저항했다. 아이샤는 샤유라의 손목을 잡아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했고, 그 사이 다시 부활한 수호자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샤이," 아이샤가 애타는 목소리로 친구를 불렀다. "샤이!"

샤유라는 뜨거운 수성의 하늘을 향해 끝없는 비명을 질렀다.


3.1.3. 상처뿐인 상승 건틀릿[편집]


"화력팀은 가족이다. 하지만, 가족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지." —리드-7. 엑소 타이탄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3 // 시장, 탑, 최후의 도시

시장의 소음이 잡음처럼 배경을 가득 채웠다. 전기적으로 발생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수많은 유기체의 행동으로 인해 유발되는 것이었다. 리드-7은 지근거리에서 인간의 지루한 대화, 그 삶의 인상을 지켜보고 있을 때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언어와는 달랐다. 왠지 워록에게 들리는 우주의 소리가 그럴 것 같았다. 적어도 그는 워록이 그런 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은 마음을 달래 주었다. 리드는 시장에 있는 사람들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이오의 요람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공포스러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일을 너무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지금도 고스트를 통해 신음하던 어둠의 소리가 들렸다. 거기 집착하지 않으려, 그는 주의를 집중할 다른 일을 찾았다.

시장 전체가 사자들의 축제를 기념하는 장식으로 뒤덮여 있었다. 화려한 엔그램 모양 장식이 으스스한 나무에 걸려 있었다. 워록 오시리스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고스트가 깔깔대는 웃음 소리와 함께 천 싸개를 휘날리며 지나갔다. 조금 경박한 모습을 보니, 아이샤와 샤유라가 기다리는 신 군주국의 울타리 안쪽으로 돌아가는 리드도 왠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마셔." 리드는 김이 피어오르는 높다란 머그잔 세 개를 내려놓았다. 아이샤는 상냥하지만 조금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보내 주었다. "조심해," 그녀가 머그잔을 향해 손을 뻗는 걸 보며 리드가 말했다. "뜨거워." 그는 그런 뻔하지만 선의에서 비롯된 잔소리 때문에 '공격전 아빠'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네 거엔 계피가 들어 있어." 리드는 샤유라에게 말했다. 팔짱을 끼고 탁자 위에 얹은 팔에 얼굴을 묻은 그녀는 잠든 것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아이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리드를 바라보며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얘기가 잘 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슬론 때문에 심란한 건 알아." 껄끄러운 이야기였지만, 리드는 직접 공략하기로 했다. "그래도 사령관이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잖아. 우리도 할 수 있는 건 다했어. 괜히 자책하지 마—"

"고마워." 샤유라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몸을 조금 일으켜 두 손으로 머그잔을 잡고 뜨거운 사과주를 홀짝였다. 그녀는 머그잔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계피와 꿀, 사과, 마늘 내음을 들이마셨다.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잠시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아이샤와 리드는 잠시 숨을 돌리며 샤유라에게 시간을 허락했다. "나도 알아." 그제야 샤유라도 작고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슬론에 대한 말인지, 아니면 자기 행동에 대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리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샤에게 동의를 구했다. "레이트카와 그의 고스트에게 사과해야지."

"타이탄이었어." 한참이 지나서야 샤유라는 머그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드와 아이샤는 서로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그들은 샤유라가 나름의 속도로 하고 싶은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타이탄에 돌아간 것 같았어. 빛을 잃고 군체에게 둘러싸였을 때처럼. 어떤 기사가 있었는데… 아무리 죽여도 계속 되살아났어. 난 거기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잖아." 아이샤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샤유라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우린 빛을 되찾았고—"

"어둠이 다가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샤유라가 물었다. 물론 그녀는 리드도 아이샤도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빛을 잃을까? 혼자서?"

리드와 아이샤는 서로를 바라봤고, 엑소는 손을 뻗어 샤유라의 손을 잡은 아이샤의 손 위에 자기 손을 더했다. 기운을 북돋을 연설도, 단호한 말도, 냉철한 위로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존재감으로 그녀의 트라우마를 달래 주려 했다.

그걸로 충분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3.1.4. 상처뿐인 상승 각반[편집]


"모든 걸 다시 해볼 수 있다면, 내 인생을 다시 한번 걸어 볼 수 있다면, 모든 걸 바꿔 볼 텐데." —리드-7. 엑소 타이탄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4 // 공동 건물 옥상, 페러그린 구역, 최후의 도시

"행성계 전역의 수호자들이 도착하고 있어요. 헌터들까지 돌아오고 있네요."

리드-7의 고스트는 지난 30분 동안 1분마다 그에게 상황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는 지붕 가장자리의 난간에 도달한 이후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행자가 움직이는 건 원래 상당한 경계심을 느낄 만한 일이었지만, 여행자가 등대처럼 빛의 파동을 방출하는 모습은 타이탄의 인공 심장을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고스트는 아직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샤와 샤유라는 아래층 테라스에 있어서, 리드는 그들의 말을 듣지는 못하고 몸짓만 볼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긴장한 모습이었고, 샤유라가 특히 심했다. 하지만 리드가 아무리 그들을 지켜보고 싶다고 해도 지금은 여행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행자의 갈라진 껍질 안쪽으로부터 분출되는 청백색 빛의 이글거리는 파동, 그 파장이 그의 온몸을 뒤덮는 기분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건 여행자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인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그의 희망을 증명해 주는 일이었다. 그는 샤유라도 그걸 보길 바랐다. 그의 신념에 공감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볼 때마다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리드." 그의 고스트가 다섯 번째로 그를 불렀다. 리드는 그제서야 자기 이름을 알아듣고는 불안한 침묵과 함께 고스트를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해요.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건 수호자를 향한 호소였다. 불확실성과 무력감의 호소였다. 그의 고스트조차 다가오는 해일이 그들을 모두 휩쓸어 버릴지, 붕괴 직전 최후의 순간이 이런 기분이었던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순간, 리드의 머릿속에는 샤유라와 아이샤뿐이었다. 그는 그들을 바라봤다.

아이샤는 두 눈이 경외감에 휘둥그레져서 여행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샤유라는 테라스 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행자가 두근거리는 심장처럼 고동치고 눈부신 빛의 섬광을 내뿜는 순간에도, 그녀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빛이 덮쳐오는 순간, 리드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건 그의 화력팀이었다. 그의 가족이었다.

빛이 스러지고 광학 센서가 조정을 마치자, 그는 감동하여 시뮬레이션된 눈물을 흘렸다. 여행자는 다시 온전해진 모습으로, 도시 위에 달처럼 걸려 있었다. 그 순간 리드의 신념은 다시 확인되었다. 하지만 샤유라가 환호에 휩싸인 도시를 벗어나 멀어지는 모습을 보자 그의 믿음은 다시 흔들려야 했다.


3.1.5. 상처뿐인 상승 표식[편집]


"네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혼자서는 짊어질 수 없는 무게라는 게 있는 법이지." —리드-7. 엑소 타이탄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5 // 시뮬레이션된 등대, 탑, 최후의 도시

"내 도약선 조종석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다고." 안전한 탑에서 실행 중인 등대의 시뮬레이션에 하급 벡스 융합체의 빠직거리는 파동과 함께 나타난 아이샤가 말했다.

"그래서 늦은 거야?" 리드-7은 은근히 놀리는 투로 물었다. 아이샤는 주위를 둘러보며 두 팔을 활짝 폈다.

"샤유라도 늦었잖아?"

"오고 있어. 우리가 떠난 후에 스트레인저의 야영지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야?" 리드가 물었다. 아이샤는 마당 반대쪽 등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이샤의 긴장한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두 시간.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구원의 가문이 어떤 벡스 폐허 근처에 말뚝을 박고 있길래,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거든." 아이샤는 그렇게 설명하며 손가락 두 개를 목으로 가져가 방어구의 목깃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헬멧이 나타났다.

리드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그는 유로파 이야기는 잠시 접어 두고 물었다. 아이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리드의 설명을 기다렸다. "시뮬레이션 말이야. 세인트의 작은… 전장이, 진짜 같아."

"진짜야. 내 말은, 우리 말이야. 그 공간은… 글쎄, 마법 같다고 할까? 하지만 너와 나, 수호자들은, 우리는 그냥 우리잖아. 위험도 시뮬레이션이지만, 그렇다고 그 영향이 실제가 아닌 것도 아니라고. 세인트라면 그 외의 방식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아이샤가 그렇게 말하며 리드를 곰곰이 바라봤다. "너, 설마 무한의 숲으로 들어간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리드가 재빨리 대답했다.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안 들어가. 벡스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가 거미 떼들이 있는 곳에 있다고 생각해봐. 난 벡스랑 있을 때 그런 느낌이라고. 왠지 몰라도 그냥 그래."

샤유라가 걷는 모습 그대로 시뮬레이션 공간에 실체화되는 바람에 아이샤는 하려던 말을 입속에 삼켰다. 샤유라는 그대로 리드와 아이샤를 지나쳐 등대를 향해 걸었다. "가자."

샤유라의 퉁명스러운 모습에 리드와 아이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문제에 관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5 // 시뮬레이션된 시험 투기장, 시뮬레이션된 등대

리드의 어깨가 상대 팀 수호자와 강하게 충돌했다. 그 충격으로 상대의 가슴에 있는 모든 뼈가 부러지고, 그는 그대로 벽을 뚫고 날아갔다. 리드는 몸을 빙글 돌렸고, 아이샤가 핸드 캐논을 발사하여 스펙트럼 칼날 두 개를 뽑아 들고 다가오는 상대 팀 수호자의 가슴을 관통하는 모습을 보았다. 리드는 그녀가 힘을 억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즐겨 사용하는 불과 육체의 힘 없이 무기만 발사하고 있었다.

"샤유라는 어디 있지?" 리드는 정찰 소총을 재장전하면서 물었다. 아이샤는 두 손가락으로 통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경기가 시작된 이후 계속 그 각성자 워록을 쫓았어. 저쪽으로 따라간 것 같아." 아이샤가 말했다. 그녀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이제 3 대 1이야. 가자."

리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이샤를 쫓아 달렸다. 마지막으로 샤유라가 혼자 떨어졌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생생했다.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시험에 참여하지는 않았어야 했다. 화력팀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고 싶은 샤유라의 고집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마침내 샤유라를 찾아냈을 때, 그녀는 아직 살아 있는 각성자 수호자 앞에 서 있었다. 상대는 헬멧이 부서져 눈 한쪽이 드러나 있었다. 그 수호자는 샤유라를, 화염에 뒤덮인 그녀의 검을 바라봤다. 아이샤와 리드는 경기를 끝낼 샤유라의 결정타가 빗나갈 경우 그녀를 지원하기 위해 화기를 조준했다. 하지만 리드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샤유라의 시선은 아래쪽 수호자를 향해 있지 않았다. 상대의 고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이?" 아이샤가 물었다. 긴장한 목소리가 떨렸다.

샤유라는 검을 휘둘러 고스트를 때리고 땅에 떨어뜨렸다. 수호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고, 샤유라는 재빨리 보조 무기를 꺼내 그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고스트가 빽빽 울었다. 다행히 조금 손상되기만 한 모양이었다. 샤유라는 보조 무기를 다시 집어넣었다.

"샤이!" 리드가 외치며 정찰 소총을 버리고 그녀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샤유라는 손바닥에서 강력한 충격파를 내뿜어 그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고스트를 향해 돌아서며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갑자기 날카로운 냉기가 그녀의 팔과 다리를 휘감아 올렸다.

리드의 눈앞에서 짙은 남색 얼음이 샤유라의 다리를 뒤덮어 그녀의 불길을 꺼뜨리고 팔과 검을 모두 꽁꽁 얼렸다. 깃털 같은 얼음 조각이 그녀의 몸에서 일어서며 냉기가 퍼져 나갔다. 리드는 재빨리 아이샤를 바라봤다. 내뻗은 그녀의 손바닥에서 냉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샤유라로부터 고스트를 구했다. 하지만 그녀가 사용한 힘이 빛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로서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3.2. 헌터[편집]



3.2.1. 상처뿐인 상승 가면[편집]


"최초의 속삭임으로부터, 난 그 말이 진심임을 알았어." —아이샤, 인간 헌터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2-01 // 수성

수성의 희박한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클래식 AFv2 옥타비안의 전면 창에 불길이 피어올랐다. 아이샤가 이미 수백 번 경험해 봤던 도약이었다. 그녀는 느긋하게 콘솔에 발을 올리고 등대로 향하는 우주선은 자동 조종에 맡겼다.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고 오면 안 됐어." 통신 장치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샤는 손가락 하나를 까딱했고, 그러자 고스트가 그녀의 화력팀원인 샤유라의 도약선과 오디오 채널을 연결했다.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샤유라. 좋든 싫든, 우리는 공동 전선을 구축해야 하잖아." 아이샤가 대답했다.

"그러면 그렇게 행동하든가!" 샤유라가 버럭 쏘아붙였다.

아이샤는 깍지 낀 두 손을 뒤통수에 올리고 눈을 들어 조종석 위를 바라보며 좌절로 가득 찬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슬론이 선택한 일이야." 이미 너무 많이 했던 이야기였다. "그녀가 어떤지는 너도 알잖아. 슬론이 탈출을 거부하면, 이 행성계의 누구도 그녀를 움직이게 할 수 없어. 머무르는 것도 떠나는 것도, 전부 그녀의 선택이라고."

"8초 후에 전송 범위에 진입합니다." 아이샤의 고스트가 갈등을 중재하려는 듯 끼어들었다. 그는 하나뿐인 파란색 눈을 힐긋 움직여 콘솔의 방향 표시기를 가리켰다. 그녀는 고스트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눈앞에서 밀어냈다.

"지도자는 실수를 하지." 샤유라의 목소리가 통신 장치에서 지직거리며 들리고, 아이샤의 전면 창에서 불길이 걷히며 수성 표면의 모래 반점이 드러났다.

"전송 범위에 들어왔습니다." 아이샤의 고스트가 재잘거렸다. 그녀는 알았다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자발라는 몰라. 그는 지금 선봉대 지도자 두 명 몫의 일을 하려 애쓰고 있다고. 나도—" 샤이의 말이 뚝 끊어지고, 아이샤의 육체는 소용돌이치는 빛과 에너지의 매트릭스 안으로 사라졌다.

아이샤는 등대의 외부 마당에 다시 나타났다. 엑소 동료 리드-7이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믿고 싶어!" 샤유라가 전기 폭발과 함께 물질 전송을 마치며 말을 끝맺었다. 샤유라는 뜨겁게 분노하고 있었다. 황금색 불길의 파문이 그녀의 얼굴 옆에 아른거렸다.

"슬론이 선택한 일이야!" 아이샤는 리드를 따라 등대 쪽으로 가면서 샤유라만큼 격앙된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사령관은 후퇴하라고 했지만 그녀가 거부했다고! 그걸 사령관 탓으로 돌리면 안 되지!"

샤유라는 몸을 돌려 아이샤를 바라봤다. 그녀 주위에 피어오르던 화염이 위쪽으로 폭발하듯 솟구쳤다. "그도 모두를 이끌고 싶다면, 자기 결정에 대한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이봐!" 리드-7의 말은 그걸로 충분했다. 밝은 빨간색 엑소는 어색하게 체중을 옮겼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이샤와 샤유라는 동료의 갑작스러운 질책에 입을 다물었다.

리드는 손을 들어 목 뒤에 얹었다. "부탁인데, 그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샤유라와 아이샤는 어색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샤유라는 날선 말은 잠시 접어 두고 검을 꺼냈다. 그리고 등대 밖, 매서운 바람이 부는 마당에 있는 수호자 무리를 가리켰다.

"좋아." 아이샤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지금의 대화를 끝낼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3.2.2. 상처뿐인 상승 조끼[편집]


"신념을 잃으면, 자신의 일부도 잃는 셈이지." —아이샤, 인간 헌터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2-02 // 시험 투기장, 등대, 수성

자동 화기에서 연이어 발사된 탄환이 리드-7과 아이샤를 보호하는 강렬한 보라색 반구에 맞고 튕겨 나갔다. 상대 팀에는 수호자 두 명만 남아 있었다. 세 번째 수호자의 유해는 여기저기 흩어져 지글거리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아이샤?" 리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샤의 주먹에 불길이 피어오르고, 그의 방벽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더 나은 생각이 있었다.

상대 수호자는 재장전을 하려고 엄폐물 뒤에 잠깐 숨었고, 아이샤는 공중으로 똑바로 솟아올랐다. 붕괴된 방벽의 잔해가 열 기류에 휘말려 그녀의 발목 주위에서 휘돌았다. 상대 수호자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을 때, 아이샤의 두 손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응축된 플라스마로 만들어진 십여 개의 칼이 그 수호자와 주위의 모든 것을 찢고 녹아내린 구멍들만 남겨 놓았다.

수호자는 풀썩 쓰러졌다. 아이샤가 망토를 펄럭이며 그 곁에 내려앉았다. 리드-7은 지친 모습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위쪽에서 샤이는 봤어?" 리드가 물었다.

"아니. 자꾸 투명해지는 놈이랑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있겠지." 아이샤가 장갑에서 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가서 그 녀석을 찾고 빨리 경기를 끝내 버리자고."

아이샤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원자의 불기둥이 인근 벡스 구조물에서 솟아올랐다. 등대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경기는 끝났다. 그들의 승리였다.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와 아이샤와 리드는 빠르게 움직였다. 두 사람은 낯익은 벡스 구조물을 재빨리 통과했지만,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고통스러운 비명이 두 번 더 들려왔다. 그 소리의 발생지에 도달했을 때, 아이샤는 샤유라가 검으로 다른 수호자의 면갑을 꿰뚫은 모습을 보았다. 상대방의 고스트가 당황한 비명을 내지르며 애처롭게 사유라와 그의 수호자 사이에 끼어들려 애쓰고 있었다.

"샤이?" 아이샤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샤유라는 죽은 수호자의 머리에서 검을 뽑아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드는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쪽에 머물렀다.

아이샤가 보는 앞에서 상대 수호자는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그가 샤유라에게 하는 애원의 말을 미처 끝맺기도 전에 워록은 단칼에 그의 팔을 잘라내고 검을 헬멧 상단에 꽂아 넣었다.

"샤이, 안 돼!" 아이샤가 소리치며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샤유라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샤유라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며, 수호자의 사체를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샤유라! 경기 끝났어!" 리드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다. "경기 끝났다고!"

샤유라는 자신을 잡아끄는 화력팀원들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짐승 같은 포효로 갈라지고, 불길이 그녀의 팔을 따라 흘러내려 피로 얼룩진 검을 끝까지 뒤덮었다.

"안 돼! 안 돼! 그만! 안 돼!" 샤유라는 거칠게 포효하며 동료들의 구속에 저항했다. 아이샤는 샤유라의 손목을 잡아 검을 다시 휘두르지 못하게 했다.

"샤이," 아이샤가 친구를 불렀다. "샤이!"

샤유라는 뜨거운 수성의 하늘을 향해 끝없는 비명을 질렀다.


3.2.3. 상처뿐인 상승 손아귀[편집]


"더 할 수도 있었어. 더 했어야만 했어." —아이샤, 인간 헌터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2-03 // 시장, 탑, 최후의 도시

탑의 천막 아래 울타리 안쪽에서, 샤유라와 아이샤는 원형 탁자 주위에 흩어져 있는 진홍색과 다홍색, 금색 쿠션 위에 앉아 있었다. 등 뒤 얼음으로 덮인 격자 너머로 저무는 해가 밝게 타올랐다. 화려한 사자들의 축제 장식이 머리 위에 걸려 있었고, 천막 밖에는 지금도 새로운 장식이 내걸리고 있었다. 격동의 시간을 헤쳐 나온 공동체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 아이샤는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샤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샤는 길 반대쪽 음식 가판대에 줄을 서 있는 리드-7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이코라하고는 얘기해 봤어?"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워록은 머리를 벅벅 긁고는 한숨을 쉬었고, 그대로 엎드려 탁자에 이마를 얹었다.

"아니." 한참 뜸을 들이던 샤유라가 대답했다. "얘기할 거야. 미안."

"에이, 아니야." 아이샤는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앉아 샤유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였다. "그러지 마. 다들 참 많은 일을 겪었잖아. 시합을 시작하기 전에 네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나도 알았어야 했어. 괜히 싸워서 미안해. 소리 질러서 미안하고."

샤유라는 곁눈질로 아이샤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커튼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수호자가 임무에 부적합해질 수 있을까?" 샤유라는 탁자에 엎드려 먹먹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내가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 샤유라는 고개를 들지 않고 솔직히 인정했다. 아이샤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친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 아이샤가 말했다. "그래서 아이코라에게 얘기해 보라는 거야. 그녀라면 알 테니까. 이해할 테니까."

샤유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샤유라의 둥글게 굽은 등 너머로, 아이샤는 커다란 손에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여러 개 들고 돌아오는 리드의 모습을 보았다.

"마셔." 리드는 탁자에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이샤는 상냥하지만 조금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보내 주었다. "조심해," 그녀가 머그잔을 향해 손을 뻗는 걸 보며 리드가 말했다. "뜨거워."

"네 거엔 계피가 들어 있어." 그는 샤유라에게 말했다. 그녀는 탁자에 묻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아이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리드를 바라보며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얘기가 잘 되진 않았다.

"슬론 때문에 심란한 건 알아." 리드가 말했다. "그래도 사령관이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잖아. 우리도 할 수 있는 건 다했어. 괜히 자책하지 마—"

"고마워." 샤유라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몸을 조금 일으켜 두 손으로 머그잔을 잡고 뜨거운 사과주를 홀짝였다. 그녀는 머그잔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계피와 꿀, 사과, 마늘 내음을 들이마셨다.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잠시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아이샤와 리드는 잠시 숨을 돌리며 샤유라에게 시간을 허락했다. "나도 알아." 그제야 샤유라도 작고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슬론에 대한 말인지, 아니면 자기 행동에 대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리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샤를 바라봤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했다. "레이트카와 그의 고스트에게 사과해야지."

"타이탄이었어." 한참이 지나서야 샤유라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리드와 아이샤는 서로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녀가 나름의 속도로 하고 싶은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타이탄에 돌아간 것 같았어. 빛을 잃고 군체에게 둘러싸였을 때처럼. 어떤 기사가 있었는데… 아무리 죽여도 계속 되살아났어. 난 거기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잖아." 아이샤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샤유라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우린 빛을 되찾았고—"

"어둠이 다가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샤유라가 물었다. 물론 그녀는 리드도 아이샤도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빛을 잃을까? 혼자서?"

리드와 아이샤는 서로를 바라봤고, 엑소는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아이샤가 붙잡은 샤유라의 손 위에 커다란 손을 얹었다. 리드의 침묵은 안정을 의미했고, 아이샤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감사를 표했다. 그들에게 가족이라곤 세 명의 화력팀원이 전부였고, 아이샤는 이렇게 약해진 순간 가족의 힘만으로 어둠을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혹시 그러지 못하더라도, 경험할 가치가 있는 여정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3.2.4. 상처뿐인 상승 발걸음[편집]


"달아날 곳은 없어." —아이샤, 인간 헌터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2-04 // 공동 건물 옥상, 페러그린 구역, 최후의 도시

여행자는 최후의 도시 위에 달처럼 떠올라 갈라진 껍질 안쪽으로부터 푸른 빛의 고리를 방출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지붕과 거리, 발코니를 가득 채웠다. 다들 하늘을 올려다 보며, 지금껏 경험한 적 없고 아마 앞으로도 다시 볼 일 없을 장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라스에서 헌터 아이샤와 그녀의 각성자 워록 동료 샤유라는 시대의 변화를 지켜봤다.

"시카고 기억해?" 아이샤는 여행자의 실루엣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샤유라는 말 없이 그렇다는 소리를 냈다. "난 우리가 무덤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이샤가 말을 이었다.

여행자로부터 빛이 파문을 일으키며 번져 나와 머나먼 해안의 파도처럼 두 사람을 뒤덮었다. 아이샤는 눈을 감았다. "기억나네… 우린 모두 여행자를 비난했어." 얼굴을 더듬는 빛을 더 많이 느끼고 싶었다. "우릴 되살리고, 우리 손에 총을 쥐어 주고, 죽고 또 죽는 저주를 내렸으니까."

샤유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잠시나마 아이샤는 그게 아쉽지 않았다. 침묵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공허함에, 그녀를 이해하지 않고 그녀도 이해할 수 없는 우주적인 힘에 대한 지긋지긋한 소속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눈을 뜬 그녀를 기다리는 건 여전히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그리고 도시 사람들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했다. 장기적인 영향력은 아직 확신할 수 없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기억나." 샤유라는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아이샤는 그녀를 바라봤다. 놀랍게도 샤유라는 여행자가 아니라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버려진 기분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샤유라가 목이 메어 오는 듯 덧붙였다.

아이샤의 시선이 다시 여행자에게로 향했다. 여행자는 두근거리는 심장처럼 고동치며 눈부신 빛의 섬광을 내뿜었다. 아이샤는 공격이라도 받는 것처럼 긴장했지만, 빛의 파동이 그녀를 뒤덮고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빛이 스러지고, 아이샤는 불가능한 것을 보았다. 가울을 파괴하느라 조각났던 여행자가 다시 온전해져 있었다.

도시 전체에서 왁자지껄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아이샤는 샤유라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한 순간, 당혹감이 그녀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아이샤는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환호하는 군중 사이로 사라지는 샤유라의 모습을 보았다. 아이샤는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유감스럽게도 샤유라가 느끼는 공허한 적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2.5. 상처뿐인 상승 망토[편집]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아이샤, 인간 헌터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2-05 // 시뮬레이션된 등대, 탑, 최후의 도시

"내 도약선 조종석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다고." 안전한 탑에서 실행 중인 등대의 시뮬레이션에 하급 벡스 융합체의 빠직거리는 파동과 함께 나타난 아이샤가 말했다.

"그래서 늦은 거야?" 리드-7이 묻자 아이샤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거짓 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벌려 긴장감을 감췄다. "샤유라도 늦었잖아?" 그녀는 따지듯 대꾸했다.

"오고 있어." 리드는 그렇게 말한 후, 조금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떠난 후에 스트레인저의 야영지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야?" 아이샤는 등대의 선명도를 살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어깨를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돌렸다.

"한두 시간."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구원의 가문이 어떤 벡스 폐허 근처에 말뚝을 박고 있길래,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거든." 아이샤는 긴장을 감추려 손가락 두 개로 목을 눌렀고,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헬멧이 나타나 얼굴을 가렸다.

리드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그는 유로파 이야기는 잠시 접어 두었다. 아이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몰랐다. "시뮬레이션 말이야. 세인트의 작은… 전장이, 진짜 같아." 그가 덧붙였다.

"진짜야. 내 말은, 우리 말이야. 그 공간은… 글쎄, 마법 같다고 할까? 하지만 너와 나, 수호자들은, 우리는 그냥 우리잖아." 아이샤는 주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위험도 시뮬레이션이지만, 그렇다고 그 영향이 실제가 아닌 것도 아니라고. 세인트라면 그 외의 방식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너, 설마 무한의 숲으로 들어간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리드가 재빨리 대답했다.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안 들어가. 벡스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가 거미 떼들이 있는 곳에 있다고 생각해봐. 난 벡스랑 있을 때 그런 느낌이라고. 왠지 몰라도 그냥 그래."

아이샤는 손가락을 오므린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시 리드 생각을 한 후 고백할 용기를 끌어모았다. 그때 샤유라가 걷는 모습 그대로 시뮬레이션 공간에 실체화되었다. 그녀는 그대로 리드와 아이샤를 지나쳐 등대를 향해 걸었다. "가자."

샤유라의 퉁명스러운 모습에 리드와 아이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문제에 관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2-05 // 시뮬레이션된 시험 투기장, 시뮬레이션된 등대

"샤유라는 어디 있지?" 리드는 경기 중에 정찰 소총을 재장전하면서 물었다. 아이샤는 두 손가락으로 통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경기가 시작된 이후 계속 그 각성자 워록을 쫓았어. 저쪽으로 따라간 것 같아." 아이샤가 말했다. 그녀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이제 3 대 1이야. 가자."

마침내 샤유라를 찾아냈을 때, 그녀는 아직 살아 있는 각성자 수호자 앞에 서 있었다. 상대는 헬멧이 부서져 그의 눈 한쪽이 드러나 있었다. 그 수호자는 샤유라를, 화염에 뒤덮인 그녀의 검을 바라봤다. 아이샤와 리드는 경기를 끝낼 샤유라의 결정타가 빗나갈 경우 그녀를 지원하기 위해 화기를 조준했다. 리드가 자동 소총을 내리기 시작했고, 그의 당혹감이 아이샤에게도 느껴졌다. 샤유라의 시선은 아래쪽 수호자를 향해 있지 않았다. 상대의 고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이?" 아이샤가 물었다. 긴장한 목소리가 떨렸다.

샤유라는 검을 휘둘러 고스트를 때리고 땅에 떨어뜨렸다. 수호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고, 샤유라는 재빨리 보조 무기를 꺼내 그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고스트가 빽빽 울었다. 다행히 조금 손상되기만 한 모양이었다. 샤유라는 보조 무기를 다시 집어넣었다.

"샤이!" 리드가 외치며 정찰 소총을 버리고 그녀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샤유라는 손바닥에서 강력한 충격파를 내뿜어 그를 쓰러뜨렸다. 아이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리드를 돌아본 후 다시 샤유라를 바라봤다. 공포와 의혹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아이샤는 눈을 감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선택했다.

짙은 남색 얼음이 샤유라의 다리를 뒤덮어 실천의 불길을 꺼뜨리고 팔과 검을 모두 꽁꽁 얼렸다. 깃털 같은 얼음 조각이 그녀의 몸에서 일어서며 냉기가 퍼져 나갔다. 아이샤가 내뻗은 손바닥에서 냉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깃털 같은 결정 조각이 그녀의 건틀릿에서 조금씩 자라났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샤는 그 순간 샤유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큰 배신인지도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친구들도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

3.3. 워록[편집]



3.3.1. 상처뿐인 상승 두건[편집]


"나는 흐려지지 않은 눈으로 본다." —샤유라, 각성자 워록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1 // 수성

깨진 유리에 비친 반영은 서로 어긋나 일그러진 여러 조각으로 나뉜다.

워록 샤유라는 부서진 중앙 콘솔 화면에 비쳐 수많은 일그러진 조각으로 나뉜 자기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 수성 대기권에 진입합니다." 그녀의 고스트가 재잘거렸다. 고개를 들자 조종석 외부에 휘몰아치는 불길과 함께 곡면을 그린 유리에 그녀의 뒤틀린 얼굴이 보였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반영도 진실하지 않았다. 어떤 모습도 완벽하게 정확하지 않았다.

"리드는 벌써 기다리고 있어요." 고스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샤유라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내면의 무언가가 불안한 손가락으로 자꾸만 그녀를 잡아끌었다.

"아이샤에게 채널을 열어 줘." 샤유라가 말했다. 그녀의 고스트는 잠시 주저하다가 알았다는 투로 삑 소리를 냈다. 조종석이 갑자기 휑뎅그렁하게 느껴졌다. 왠지 우주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그녀의 고스트가 가까이 다가왔다. "연결됐어요."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고 오면 안 됐어." 샤유라가 목이 메어 오는 것을 느끼며 공허를 향해 말했다.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샤유라. 좋든 싫든, 우리는 공동 전선을 구축해야 하잖아." 팀원인 아이샤가 둥근 호를 그리는 수성의 대기권 반대쪽에서 대답했다.

"그러면 그렇게 행동하든가!" 샤유라가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고함이 입술을 떠나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 말투로 이야기한 건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취소하지는 않았다.

"슬론이 선택한 일이야." 그에 비해 아이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가 어떤지는 너도 알잖아. 슬론이 탈출을 거부하면, 이 행성계의 누구도 그녀를 움직이게 할 수 없어. 머무르는 것도 떠나는 것도, 전부 그녀의 선택이라고."

"지도자는 실수를 하지." 샤유라도 더 잘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말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전송을 준비하고 있어요." 샤유라의 고스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도 전송 범위에 진입했어요."

샤유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을 꿀꺽 삼켰지만, 분노가 계속 차올라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황금색 불길의 흔적이 팔을 따라 피어올랐다.

"자발라는 몰라. 그는 지금 선봉대 지도자 두 명 몫의 일을 하려 애쓰고 있다고. 나도—" 샤유라의 말이 끊어지고, 그녀와 고스트는 충전된 입자의 소용돌이에 진입한 후 수성의 타오르는 표면 위, 칼로리스 첨탑의 그림자 아래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믿고 싶어!"

"슬론이 선택한 일이야!" 아이샤는 샤유라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그 옆에는 세 번째 화력팀원인 리드-7의 타이탄 방어구가 진홍빛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령관은 후퇴하라고 했지만 그녀가 거부했다고! 그걸 사령관 탓으로 돌리면 안 되지!" 아이샤는 계속해서 말하며 샤유라의 분노에 불씨를 피졌다.

샤유라는 몸을 돌려 아이샤를 바라봤다. 그녀 주위에 피어오르던 화염이 위쪽으로 폭발하듯 솟구쳤다. "그도 모두를 이끌고 싶다면, 자기 결정에 대한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이봐!" 리드-7이 마침내 소리쳐 끼어들었다. 넓은 어깨의 엑소는 어색하게 체중을 옮겼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이샤와 샤유라는 침묵 속에 그를 바라봤다.

리드는 손을 들어 목 뒤에 얹었다. "부탁인데, 그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샤유라는 자신에게 닿는 아이샤의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어 친구의 차분한 표정에 맞추고 마지못해 동의했다. 하지만 그녀 안에 피어오르는 분노의 불씨는 꺼지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등대 밖, 매서운 바람이 부는 마당에 있는 수호자 무리를 가리키며 도전을 선포했다.

"좋아." 아이샤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샤유라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3.3.2. 상처뿐인 상승 제의[편집]


"내 빛에 대한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샤유라, 각성자 워록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2 // 시험 투기장, 등대, 수성

타이탄의 액화 메탄 바다가 신 태평양 생태도시의 기울어진 선체에 부딪혔다. 허리케인처럼 강한 바람이 불어와, 얼어붙을 듯한 물보라를 무너져 내린 보행로의 구부러진 금속 테두리에 흩뿌렸다. 안개 속에서 원자 불꽃의 섬광이 피어나 생태도시의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의 비명이 불가능의 바다 위로 메아리쳤다.

군체 노예 떼가 에어로크에서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물어뜯으며 서로를 타고 넘었다. 그들은 황금색 불길의 등대에 이끌린 나방처럼, 액화 메탄으로 뒤덮이지 않은 모든 표면 위에서 버둥거리며 달렸다. 샤유라는 밀려오는 키틴질과 뼈의 해일에 맞서 자리를 지켰다. 불타오르는 검을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비명을 지르며 몰아치는 죽음의 무리를 베어 넘겼다.

노예의 타오르는 불씨가 주위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썩어가는 병사의 파도를 막아낼 때마다 적의 수는 두 배로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군체의 해일에 짓눌려 요동치는 바다 위에 걸린 통로 가장자리로 조금씩, 조금씩 밀려났다. 노예가 물러나자, 그녀는 잠시 쉴 기회가 온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에어로크에서 거대한 기사가 뛰어내렸다. 승리가 아니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됐을 뿐이었다.

반 걸음 정도 물러서며, 샤유라는 유일한 탈출로는 적을 돌파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불길의 날개가 등에서 솟아나와 강렬한 열기의 파문을 남기며 주위의 노예를 밀어냈다. 그녀의 검이 기사의 방패에 충돌하며 단번에 방패를 산산이 조각냈다. 후속 공격이 기사의 팔을 자르고, 검은 가슴까지 파고들었다.

샤유라는 홱 돌아서서 남은 노예를 바라봤다. 그녀 안의 빛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기지 못하면 적에게 제압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테이코-3와 화력팀에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군체의 손에 죽은 뒤 다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눈부신 고통이 샤유라의 등을 때렸다. 시야가 흔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놓친 녀석이 있었던가? 방어구 아래로 흐르는 피의 온기를 느끼며, 샤유라는 고개를 돌려 다시 태어난 군체 기사를 보았다. 검이 그녀의 피로 덮여 있었다.

헬멧 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샤유라는 짙은 당혹감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군체 죽음의 의식은 언제든 알아볼 수 있었고, 지금 그녀는 그들의 함정에 들어와 있었다. 샤유라는 몸을 굴려 기사의 다음 공격을 피하고, 방어구를 할퀴는 노예의 공격 범위로 들어섰다. 마지막 태양 에너지를 끌어내, 샤유라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의 기둥을 하늘로 끌어 올리며 기사를 집어삼켰다.

어느새 재구축된 기사의 망령이 불길에서 나타났다. 샤유라는 앞으로 도약하여 그 얼굴에 검을 찔러 넣으며 바닥에 쓰러뜨렸다. 태양 오라가 깜빡이며 사라져 갔다. 연기와 증기가 그녀의 등과 어깨에서 피어올랐다.

"샤이?"

살아남은 노예 중 하나가 인간의 목소리로 말했다. 샤유라는 기사의 얼굴에 박힌 검을 뒤틀어 빼고는 끓어오르는 초록색 피를 통로에 흩뿌렸다. 기사는 무시무시한 초록색 불길을 내뿜으며 재구축되기 시작했지만, 기사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적의 팔을 잘라내고 잔혹한 후속타로 머리 꼭대기에 검을 꽂았다.

노예는 울부짖었다.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마지막 실천의 불줄기가 그녀의 팔과 검을 타고 뒤틀리며 흘러내렸다.

"안 돼! 안 돼! 그만! 안 돼!" 샤유라는 거칠게 포효하며 노예의 구속에 저항했다.

"샤이," 노예는 친구의 목소리로 소리쳤다. "샤이!"

샤유라는 불가능의 바다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3.3.3. 상처뿐인 상승 장갑[편집]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 —샤유라, 각성자 워록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3 // 시장, 탑, 최후의 도시

죄책감과 수치심이 스펙트럼 칼날처럼 샤유라의 뱃속에서 뒤틀렸다. 진홍색 울타리로 둘러싸인 신 군주국 구역 아래에 앉아, 그녀는 탁자 표면의 나뭇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의 숨소리는 유난히 시끄러웠고, 주위 군중의 소음은 물속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 먹먹하게 뒤틀렸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

샤유라에게 들리는 건 자기 숨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팔꿈치를 탁자에 얹은 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현재에 머무르려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그녀의 정신은 과거에 집착할 것을 요구했다.

"아이코라하고는 얘기해 봤어?"

새로운 죄책감의 칼날이 미끄러지듯 몸을 파고들었다. 샤유라는 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이 바싹 말랐다. 여기까지 올 힘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더 무가치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아니." 한참 뜸을 들이던 샤유라가 대답했다. 머릿속이 아직 뒤죽박죽이라 대답이 늦었다. "얘기할 거야." 그녀는 아이샤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며 약속했다. "미안."

"에이, 아니야." 아이샤는 그렇게 말하며 샤유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몸이 접촉하자 샤유라는 현재의 이 순간으로 돌아왔다. "그러지 마. 다들 참 많은 일을 겪었잖아. 시합을 시작하기 전에 네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나도 알았어야 했어. 괜히 싸워서 미안해. 소리 질러서 미안하고."

아이샤의 애처로운 목소리는 왠지 도움이 됐지만 그만큼 가슴도 아팠다. 샤유라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그녀 자신의 결함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느끼며 패배감에 젖어 몸을 웅크렸다. 자신은 더 작아지고, 죄책감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샤유라는 곁눈질로 아이샤를 보며, 친구의 얼굴에서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을 함께 읽었다. "수호자가 임무에 부적합해질 수 있을까?" 샤유라는 탁자 위에 엎드려 먹먹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아이샤는 대답했다. 그녀가 주저하고 있다는 사실이 따끔한 아픔을 남겼다.

"내가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 샤유라는 용기 내어 인정했다. 그 말이 입술을 통과하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이샤의 팔이 어깨를 감싸는 것이 느껴지자 맥박이 조금 차분해졌다. 샤유라는 따뜻한 친구의 품에 몸을 묻었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 아이샤는 그렇게 말했고, 한순간, 샤유라도 그 말을 믿었다. 잠시나마 의혹과 죄책감의 칼날이 무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래서 아이코라에게 얘기해 보라는 거야. 그녀라면 알 테니까. 이해할 테니까."

"마셔."

샤유라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제야 리드-7의 관절에서 나는 쉬잇 소리와 방어구가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워."

"네 거엔 계피가 들어 있어." 리드가 말했다. 샤유라는 온 힘을 끌어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슬론 때문에 심란한 건 알아." 리드가 말하자 걱정스러운 마음에 샤유라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가 뭔가 다른 말을 했지만, 들리는 건 귓속을 울리는 피 소리와 가슴 속에서 천둥처럼 쿵쾅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가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 같아, 샤유라는 어정쩡한 대답을 내놓았다. "고마워." 그녀는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와 계피 향기가 코를 찔렀다. 처음 탑의 수호자가 되어 처음으로 아이샤와 리드를 만났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샤유라는 몸을 조금 일으켜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잡고 뜨거운 사과주를 홀짝였다. 행복했던 시절의 향기를 들이쉬었다.

"나도 알아." 그제야 샤유라도 작고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안다는 건지 자기도 몰랐지만, 그들이 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미안해."

"우리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리드는 대답했다. "레이트카와 그의 고스트에게 사과해야지." 수호자 레이트카의 이름을 듣자 샤유라의 뱃속 죄책감의 칼이 뒤틀렸다. 그녀는 계피와 사과 향기를 다시 들이쉬었다. 이들은 친구들이라는 걸 기억하려 했다. 이들이 바로 가족이라고, 그녀는 인정했다.

"타이탄이었어." 한참이 지나서야 샤유라는 인정했다. 그 진실의 의미가 두려웠지만, 자신의 무시무시한 환각을 너무 깊이 파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타이탄에 돌아간 것 같았어. 빛을 잃고 군체에게 둘러싸였을 때처럼. 어떤 기사가 있었는데… 아무리 죽여도 계속 되살아났어. 난 거기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잖아." 아이샤가 말했다. 샤유라는 자신의 손 위에 다른 손이 놓이는 것을 느꼈고, 아이샤가 손바닥을 꼭 잡아 주는 것을 보았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우린 빛을 되찾았고—"

"어둠이 다가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샤유라는 알고 싶었다. 하지만 리드도 아이샤도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빛을 잃을까? 혼자서?" 생태도시에서 혼자 죽어갈 슬론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리드가 아무 말 없이 아이샤의 손에 자기 손을 더했다.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3.3.4. 상처뿐인 상승 장화[편집]


"나는 주저 없이 운명을 향해 걷는다." —샤유라, 각성자 워록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4 // 공동 건물 옥상, 페러그린 구역, 최후의 도시

바람에 실려 목소리의 화음이 전해졌다. 숭배하는 목소리도, 공포에 질린 목소리도, 당황한 목소리도 있었다. 대화의 모자이크는 샤유라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소음이었다. 그녀는 테라스 끝자락에 앉아 거리를 가득 채운 채 고개를 들어 천상에 자리 잡고 침묵하는 신의 그림자를 지켜보는 구경꾼들을 바라봤다.

여행자 아래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 순전히 절망과 망상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여기가 지구상 유일하게 안전한 피난처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붉은 군단과 지금의 어둠으로 인해 그런 주장의 진위가 불확실해졌음에도, 그들은 절망적인 희망에 매달렸다. 사람들은 전능한 신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환상에 매달렸지만, 샤유라 생각에, 진짜 위험은 오히려 여행자가 나타난 이후 도래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아이샤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샤유라의 생각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샤유라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무관심해도 괜찮은 대화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이샤는 시카고에 대해, 기억에 대해 계속 말했다. 샤유라는 난간을 붙잡고 여행자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처럼 하늘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기억나." 샤유라는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그녀 내면의 공포에 시카고의 폐허 아래에서 화력팀이 함께 경험한 어두운 시절의 기억이 덧칠해졌다. "그때의 버려진 기분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샤유라가 목이 메어 오는 듯 덧붙였다. 가울이 빛을 훔쳤던 날, 그들이 고향으로부터 너무나도 먼곳에 있던 그때, 그들은 사냥꾼에서 사냥감이 되었다.

샤유라는 말하지 않은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절망과 버려진 기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어떤 기회라도 받아들이고 싶었던 기분을 기억했다. 그 절망의 순간은 이런 어둠 속에서 끝나진 않았지만, 다른 수호자들은 어땠을지 궁금했다. 몰살과 구원이라는 선택에 직면하면,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 조용한 깨달음의 순간, 여행자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여행자 안에 빛이 차오르고, 그제야 샤유라는 고개를 들어 침묵하는 신을 바라봤다. 빛의 파동이 그녀를 감쌌다. 죄가 사하여지는 것만 같았다.

도시가 빛에 휩싸이고 무심한 신의 그림자 아래에 있는 모두를 공포와 믿음이 감싸는 사이, 샤유라는 군중들 속으로 사라졌다. 여행자의 거창한 힘을 보지 않고도 그녀는 해야만 하는 일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데 필요한 건 시간이 아니었다.

샤유라의 길은 명확했다.


3.3.5. 상처뿐인 상승 완장[편집]


"내게 남은 상처 하나하나가 살아남은 시험의 흔적이다." —샤유라, 각성자 워록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5 // 시뮬레이션된 등대, 탑, 최후의 도시

공허 속에는 오직 침묵만이 존재했다.

샤유라의 도약선 조종석 내부에 서리가 맺혔다. 날숨이 차가운 안개로 나타났다. 고스트 의체 조각이 콘솔 위에 흩어져 있었고, 얼어붙은 조각이 각각 반짝였다. 워록은 깨진 중앙 항해 패널에 비친, 조각나 깨진 자기 반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간 정기 시험 경기에 늦었어요." 샤유라의 고스트가 어깨 위에서 재잘거렸다. 그녀는 부서진 자신의 반영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혹시… 돌아오실 때 우주선이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게 온도를 높여 둘까요?"

샤유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잠시 꼭 감은 후 다시 떴다. 그리고 고스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추위는 날 깨워 줘." 샤유라는 주문을 외듯 말했다. 그녀는 죽은 고스트의 조각난 의체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준비됐어."

샤유라는 빛의 티끌과 에너지 줄기로 산산이 조각나 성큼성큼 걷는 모습 그대로 수성의 시뮬레이션에 재구축되었다. 그녀는 리드와 아이샤를 지나쳐 등대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모두 의미가 담겨 있었다. "가자."

샤유라는 앞쪽에 있는 다른 수호자 무리를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자기와 같은 각성자 워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익히 들어 본 사람이었다. 샤유라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신을 달랬다.

그녀는 전념했다.

시뮬레이션 재구성 기록 // LA-01-05 // 시뮬레이션된 시험 투기장, 시뮬레이션된 등대

리드-7의 머리가 벡스 건축물의 방벽 뒤로 사라져 정찰 소총의 조준경에서 벗어났다. 소총을 손에 든 각성자 워록은 무기를 내리며 투덜거렸다. 그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공중을 활공하며 더 나은 위치를 찾았다. 그때 다른 누군가가 그를 덮쳐 아래쪽 지면으로 내동댕이쳤다.

그 충격에 워록은 철컹 소리와 함께 정찰 소총을 떨어뜨렸다. 그는 황금색 보조 무기로 전환한 후 한쪽 무릎을 꿇고 일어섰지만, 굽은 검 옆면에 맞아 총은 옆으로 날아갔다. 샤유라는 불의 날개를 타고 공중에서 천천히 강하했다. 그녀는 칼날을 상대의 손에서 목으로 옮겼다.

"계속해." 사냥감이 말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 하지만 샤유라는 경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건 시험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였다.

"네가 유로파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샤유라는 워록에게 말했다. "네가 빛의 배신자라는 걸 알아." 처음에 그는 부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잔뜩 긴장하여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워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에리스와 얘기해 보지 않았잖아. 넌 몰라—" 워록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샤유라가 달려들어 칼자루로 그의 얼굴을 때려 헬멧을 깨뜨리고 상대를 쓰러뜨렸다.

워록은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더듬었다. 그리고 거센 분노에 사로잡혀 샤유라를 올려다봤다. "불법도 아니잖아! 선봉대도—"

"난 선봉대를 대신해서 온 게 아니야." 샤유라는 고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불길이 검을 따라 흘러내렸다. "난 빛을 대신해서 왔다."

워록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온몸으로 그녀의 힘이 대수롭지 않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난 네가 두렵지 않아. 어서, 경기를 끝내라."

"너 때문에 온 게 아니다." 샤유라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이제 그는 공포를 느꼈다.

아이샤와 리드가 잠시 후 나타났다. 두 사람 다 총을 들고 샤유라를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보며 비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워록의 곁에 떠 있는 고스트를 바라봤다.

"샤이?" 아이샤가 물었다. 긴장한 목소리가 떨렸다.

샤유라는 검을 휘둘러 고스트를 때리고 땅에 떨어뜨렸다. 수호자는 입을 벌리고 큰 소리로 애원했지만, 샤유라는 재빨리 보조 무기를 꺼내 그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손상되었지만 살아남은 고스트가 빽빽 울었다. 그녀는 보조 무기를 다시 집어넣고 고스트를 바라봤다.

"샤이!" 리드가 소리쳤다. 그가 뒤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샤유라는 고개를 돌려 손바닥에서 강력한 충격파를 내뿜어 리드를 쓰러뜨렸다. 그녀는 다시 고스트를 바라보며 검을 들어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때 심우주의 섬뜩한 냉기가 다리를 타고 피어올랐다.

샤유라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녀의 폐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시공 에너지의 수정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이샤와 눈을 맞추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목도했다. 그녀의 세계가 얼음과 어둠으로 뒤덮이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빛을 저버리고 어둠을 품고 있었다.

샤유라의 얼굴에 떠오른 배신감이 얼음 속에 얼어붙었다.


4. 5년차 방어구[편집]



4.1. 헬멧[편집]


"그녀의 도약선에는 사망한 고스트가 가득했다. 그 중 일부는 파편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정확히 얼마나 사망했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선봉대 보안 보고서에서 발췌


지구 // 최후의 도시 // 구류 시설 //

워록 샤유라는 베개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양손을 무릎에 얹고 있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도시의 소음과 새 소리, 휘파람 같은 바람 소리가 그녀를 둘러쌌다. 하지만 베개 아래에 풀은 없고, 그저 차가운 콘크리트뿐이었다. 샤유라를 둘러싼 네 개의 홀로그램 화면에는 여행자의 그림자 아래에 자리 잡은 최후의 도시 중앙 정원, 그 차분한 평온의 장소가 현실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나는 우리 선조들을 찬양합니다." 샤유라는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내 화력팀을 찬양합니다."

"나는 내 진실을 찬양합니다."

"나는 내 마음을 찬양합니다."

"나는 인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을 진정으로 믿습니다."

그 말이 진득한 시럽처럼 입을 채우고, 죄책감이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턱이 파르르 떨리고,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입이 바싹 말라 삼킬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 선조들을 찬양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나는 내 화력팀을 찬양합니다."

턱이 마구 떨렸다.

"나는 내 진실을 찬양합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내 마음을 찬양합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이, 인류의—" 그녀는 무너졌다. 암송이 흐느낌으로 변하고, 샤유라는 베개에서 미끄러져 내려 바닥에 앉았다. 어깨가 들썩였다. 그녀는 무릎을 가슴에 당겨 안고, 다리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눈을 감아도 텅 빈 눈구멍으로 바라보는 죽은 수호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목숨을 구걸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총을 겨눴다.

그리고 자신의 진실을 찬양했다.


4.2. 팔[편집]


"우리는 금성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수호자와 엘릭스니 또한 그녀의 소행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사망한 고스트 중 어떤 것이 해당 수호자의 것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선봉대 보안 보고서에서 발췌

달 // 폭풍의 대양 // 빛의 닻 //

"선봉대도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군사 재판을 열지는 않을 거야."

리드-7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융합 소총을 느슨하게 들고, 버려진 달 기지의 문간에 서 있었다. 여전히 연기를 피워 올리는 군체 노예의 사체가 기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별로 위로가 안 되잖아." 리드의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샤가 그를 어깨로 밀친 후 정찰 소총의 총구를 앞세우고 들어와, 남은 대상은 없는지 수색했다.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샤이가 선봉대 감방에 갇혀 고통받는 꼴을 볼 수는 없어. 자칫하다가는 우리가 전부…"

"죽고 말 거라고?" 리드-7이 대신 말을 맺었고, 아이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야, 아이샤. 일단 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올라올 수 있어."

"이게 바닥이 아니라고?" 아이샤가 놀리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폭발해 버린 창문 하나에 다가가 달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거대한 리바이어던의 실루엣을 향해 손짓했다. 진홍색 악몽 줄기가 소용돌이치며 피어올라 그 함선의 열린 아귀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 꼴을 보면 빌어먹을 바닥이 확실하다고. 선봉대도 우릴 여기에 내팽개치고, 새로운 빛에게나 어울리는 정찰 임무에 투입하고 있잖아?!"

"그렇다고 우리에게 휴가를 줄 수도 없는 거잖아. 물론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긴 하지만." 리드가 애원하듯 말했다. "우린 계속 활동하면서 선봉대에 기여해야 해. 빛의 군체가 발사 기지를 공격하는 바람에 이미 새로운 수호자를 너무 많이 잃었다고. 이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더 잃을 순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지."

아이샤는 깨진 창틀에 한 팔을 얹고 기대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녀는 속삭였다. "그래."


4.3. 가슴[편집]


"도약선 기록을 보면 그녀는 금성과 달, 리프, 그리고 지구의 몇몇 장소를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투항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는 화성이었다." -선봉대 보안 보고서에서 발췌

달 // 폭풍의 대양 // K1 교감 지구 //

몰락자 반달이 쓰러졌다. 그의 얼굴이 있던 곳에 뚫린 빛나는 구멍에서 에테르 증기가 피어올랐다. 검푸른 피가 상처 주위로 번지며 지글거렸다.

"처리 완료." 리드-7이 금속 계단 꼭대기에서 외쳤다. 그의 융합 소총 총열에는 마지막으로 발사한 탄환의 에너지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가 아래로 내려가고, 아이샤는 그 뒤를 따르며 정찰 소총을 어깨에 멨다.

"벽에서 배선을 뜯어내는 것 같던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고스트 두니아를 꺼냈다. "여기 시스템을 확인해 봐. 뭔가 다른 짓을 하고 있던 건 아닌지 알아봐야 해."

"알겠어요." 두니아는 재잘거리며 대답한 후 컴퓨터 단말기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아이샤는 리드의 반짝이는 눈이 반달의 사체에서 흘러나오는 에테르에 고정된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두니아를 흘긋 본 후 서둘러 리드의 곁으로 갔다. "이봐," 그녀는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고, 그는 퍼뜩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난 괜찮아." 그는 거짓말을 하며 부드럽게 팔을 뺐다.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아이샤는 사체를 내려다본 후 다시 눈을 들어 리드를 바라봤다. "이건 샤이가 금성에서 했던 일과는 달라." 그녀는 그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 말은 지나치게 단정적이었다.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데?" 그는 단검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그들은 벽에서 배선을 뜯고 있었어, 아이샤. 누군가를 해치려는 건 아니었다고!"

"놈들이 먼저 우릴 쐈잖아."

"우리라도 얘기부터 했어야지!" 리드가 외쳤다.

"아이샤?" 두니아가 방 건너편에서 재잘거렸다. 두 수호자 모두 고스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미안한데," 아이샤는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언제 얘기를 했어야 한다는 거야? 놈들이 수류탄을 던지기 전이야 후야?"

"아이샤?" 두니아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경계하는 목소리였다.

"어떻게든 할 수 있었겠지! 뭐든 할 수 있었을 거야!" 리드는 소리를 지르며 아이샤에게 다가갔다. "우린—"

"아이샤!"


4.4. 다리[편집]


"고스트 유해의 신원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화력팀원과 실제 파트너들에게 확인된 사항을 통보하고 있다.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인다." -선봉대 보안 보고서에서 발췌

달 // 폭풍의 대양 // K1 교감 지구 //

붉은 빛이 두니아의 검은색과 금색 의체를 비췄다. 작은 고스트의 푸른 외눈이 오르내리며, 위쪽에 떠올라 있는 초현실적 형체를 쫓았다.

아이샤와 리드는 두니아의 짹짹거리는 경고음에 총을 겨누며 돌아섰다. 하지만 로브를 걸친 악몽이 앞쪽에서 아른거리는 모습을 본 두 사람 다 제대로 조준조차 할 수가 없었다. 둘 다 그 모습에 완전히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아이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둘 중에 누가 나만큼 엉망진창인지를 두고 싸우는 거야?" 샤유라의 악몽이 뒤로 물러서는 두니아에게서 진홍빛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너희가 살인자 친구만큼 엉망진창이 되는 일은 없겠지."

아이샤는 당황하여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찰 소총을 잡은 손이 떨렸다. "샤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거친 속삭임에 불과했다.

샤유라의 악몽은 둥실 떠올라 아이샤와 리드에게 다가왔고, 두니아가 자기 수호자 뒤로 몸을 숨긴 후 물질전송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은 죄책감," 악몽이 흥얼거렸다. "다음은 수치심, 그다음은 부정. 그 패턴은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녀는 그들을 꾸짖듯 손가락을 휘둘렀다. "너희가 언제쯤 날 잊을까? 언제쯤 새 워록을 찾아 샘을 만들어 내라고 부탁할까? 내 존재를 잊게 될까?"

"샤— 샤이, 그— 그게 무슨—" 아이샤는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때 리드의 금속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그의 표정에 공포가 아니라 결의가 가득한 게 보였다. 그제야 에리스의 말이 떠올랐다. 달에서 악몽이 낯익은 얼굴이나 귀에 익은 목소리로 찾아왔을 때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리스가 가르쳐 줬던 것이 생각났다.

아이샤는 샤유라의 악몽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미안해."


4.5. 직업[편집]


"회의가 해산된 이상, 이게 재판에 넘어가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봉대 보안 보고서에서 발췌

지구 // 최후의 도시 // 구류 시설 //

"치유의 첫 과정은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알아요, 어려운 일이라는 거."

사이다 우제어 박사는 데이터 패드를 옆에 내려놓고는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몸 앞쪽에 두 손을 모았다. 한쪽 손에는 구슬을 꿴 작은 사슬이 감겨 있었고, 여행자의 모습으로 만든 작은 뼈 부적이 오른손바닥을 누르고 있었다."샤유라, 법원에서 당신의 행동을 유죄로 판단하든 그러지 않든, 당신은 자신의 양심이라는 법정에서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해요."

우제어 박사 건너편에서, 샤유라는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우제어 박사 뒤쪽의 좁은 창문 밖으로, 하늘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여행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감방 안에 투영된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다.

"저들에 대한 판결은 누가 내리지?" 샤유라는 턱으로 창밖을, 여행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우제어 박사는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로 여행자를 바라봤다. 부적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글쎄요." 그녀는 그렇게만 답했지만, 그 질문은 그녀의 마음에 남아 오늘 밤 침대에 누울 때 다시 떠오를 것이다. "전 신이 아니라 인간의 건강을 보살피는 사람이니까요."

"어쩌면 여행자는 우리가 부끄러워서 버린 건지도 몰라. 우리가 자기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수치스러워서." 샤유라는 작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우제어의 데이터 패드에 알림이 깜빡여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샤유라는 한숨으로 침묵을 채웠다.

"그런지도 모르죠." 우제어 박사는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어쩌면 그냥 요즘 우리에겐 희망이 부족한 건지도 몰라요. 괜찮으시면 상담 시간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은데요. 그리고 손님을 몇 분 모셔도 괜찮을까요?"

샤유라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방어적이고 부끄러워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몸을 조금 세웠다. 우제어 박사는 그녀가 긴장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용서에 관해 얘기할 때는, 우선 용서를 받아 보면 도움이 돼요." 우제어 박사는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샤유라는 데이터 패드를 흘긋 보고는 다시 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리드-7과 아이샤가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샤유라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거부하려던 목소리가 증기처럼 사라졌다.

샤유라는 아직 믿을 수 있는 게 하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가족이었다.

5. 4년차 장식[편집]



5.1. 빛나는 풍뎅이 의체[편집]


빛의 등불이 되는 고스트를 위한 의체입니다.

탑 격납고는 원래 조용한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오늘의 소음은 그야말로 기록적인 수준이었다. 화력팀들이 연이어 여러 전장으로 떠나면서, 쉬잇 소리와 함께 도약선의 발진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다행히 세인트-14의 목소리는 모든 소음을 뚫고 전달되었다. "잘 왔다, 수호자 제군!" 여느 때처럼 회색 비둘기 옆에 선 그는 밝은 목소리로 시험 참가자들을 환영했고, 그들 모두가 옛 친구인 양 반갑게 인사했다.

하지만 쾌활해 보이는 모습 뒤에는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피라미드가 출현하고 그의 안에 있는 어떤 끈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 같았다. 최근 시험에서 발생한 사건 이후로 그의 긴장감은 매일 조금씩 커졌고, 필연적인 파열점을 향해 꾸준히 솟아올랐다.

사고는 전에도 있었다. 수호자들끼리 충돌할 때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그런 분쟁을 통제된 환경 내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인트는 최근 들어 자기가 정말로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혹의 구름이 내려앉으려던 순간, 군중이 갈라지며 그 가운데에서 낯익은 황금색 두건을 쓴 인물이 나타났다. 곁을 지켜 주던 사기라가 없으니 왠지 어깨가 축 처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단호한 걸음과 깊은 골이 팬 이마는… 여느 때와 똑같았다.

"오시리스!" 세인트가 외쳤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란 몇몇 사람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오시리스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방향을 바꿨다.

"뭐야?" 오시리스가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세인트가 재빨리 대답했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아, 그래… 사소한 일이 좀 있었지. 지금은 통제하고 있지만…" 그는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더듬거렸다. "메시지를 보냈는데, 받지 못했나?"

오시리스는 초조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은 메시지를 너무 많이 받아서 말이야. 시급한 일이었나?"

세인트는 움찔했다. 시급한 일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시험 때문에 그랬어. 네 이름이 걸린 시험이니까… 너도 이렇게 돌아왔으니, 이제부터는 네가…"

"아, 내가 다시 시험을 맡아 주기를 바라는 건가." 오시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아. 이제 지쳤다면 폐쇄해도 좋아."

"뭐? 아니야!" 세인트는 그런 말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지쳤다는 게 아니야. 걱정 돼서 그러지! 그러니까 일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제야 주위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그는 오시리스에게 손짓하여 함께 우주선 안으로 들어갔다.

오시리스는 팔짱을 끼었다. "지금 살라딘 경이 기다리고 있어. 기갑단 문제가 시급해서 말이지.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건 알지만…" 세인트는 목소리를 낮췄다. "시험에서도 전쟁이 벌어졌어. 수호자들이 너무 지나치게 날뛰고 있다고. 어둠을 이용하는 녀석도 있고."

"정말인가?" 오시리스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걸로 뭘 하는데?"

세인트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안에서 더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끈이 한 번 더 당겨졌다. 한참이 지나 그가 말했다. "이런저런 일을 하지."

"흥미롭군." 오시리스는 생각에 잠겨 볼을 문질렀다. 허리춤에 찬 데이터 패드에서 띵, 소리와 함께 알림이 표시되었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며 화면을 바라본 후, 다시 세인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또 그런 일이 있으면 기록을 남겨 줘. 그럴 수 있겠지?"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세인트의 강철 같은 팔이 앞으로 뻗어 그의 팔꿈치를 잡았다.

"이게 다 실험일 뿐이야?" 세인트는 최대한 목소리를 억누르려 했지만 실패했다. 더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응답을 기다렸다. 계속되는 침묵 속에 조바심이 났지만, 최선을 다해 동료의 시간을 존중해 주었다. "그러면 나는 뭐지? 그저 조수인가? 사기라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만해." 오시리스가 거칠게 말을 뱉으며 팔을 잡아뺐다. "다시는 그녀 얘기를 하지 마. 알겠어?"

세인트는 후회에 휩싸여 물러났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했다. 뭐든 말해서 상황을 바로잡아야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가 미처 답을 떠올리기 전에 오시리스가 먼저 말했다. "시험을 계속하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데이터를 수집할 배짱이 없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야 해. 그게 우리 생존의 열쇠니까. 그것만이 우리가 모두 생존할 수 있는 길이니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멀어져 갔다.

세인트는 군중 사이로 사라지는 오시리스를 바라봤다.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줄이 끊어지고 남은 상처의 고통뿐이었다.

얼마 전 들었던 아이코라의 말이 머릿속에 다시 울려 퍼졌다. "…오시리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사실이 아니었다. 세인트는 그를 잘 알았지만, 사기라보다 더 잘 알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제 사기라가 없으니…

오시리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같았다.


5.2. 변화의 바람[편집]


"산들바람이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은 없어. 그냥 이끄는 곳으로 몸을 맡길 뿐이지." —아만다 홀리데이

"다시 집으로, 다시 집으로, 지기티 직." 아만다는 공중의 우주선들을 뚫고 도약선을 탑으로 인도하며 노래를 불렀다. 부조종사 좌석에서 까마귀가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격납고에서 착륙할 지점을 찾았다. "아버지께서 부르시던 노래야." 남은 건 세인트-14의 회색 비둘기 옆 아주 좁은 구역뿐이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라는 걸 알려 주시던 아버지만의 방법이라고 할까. 그때 우리에게 집이란 움직이는 표적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녀가 숙련된 솜씨로 좁은 구역에 착륙하는 모습을 보며 까마귀는 휘파람을 불었다. "멋진 전통인데." 그녀가 엔진을 끄는 사이 그가 말했다. "직접 만드신 노랜가?"

"아닐 걸." 그녀가 계단으로 통하는 에어로크를 열었다. "암흑기나 붕괴 이전의 노래 같은 거에서— 왜 이래!" 착륙 장치 아래에서 까마귀가 갑자기 그녀를 잡아당겨, 아만다는 소리를 질렀다.

"저기 봐." 그는 작은 소리로 말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던 아만다는 그제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세인트와 오시리스를 보았다. 오시리스의 매서운 눈빛과 세인트의 자세를 보면,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여 오시리스의 말을 엿들으려 했다.

"다시는 그녀 얘기를 하지 마…"

"젠장." 아만다는 중얼거렸다. 까마귀가 그녀를 바라봤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그녀는 그렇게 속삭인 후 세인트를 향해 걸어 나갔다. 타이탄은 오시리스가 군중 속으로 사라진 지점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녀는 인기척을 눈치채지도 못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몸을 움찔한 후 부끄러운 듯 쿡쿡 웃었다. "홀리데이 양! 전투기를 타고 무사 귀환한 모양이군. 좋아… 좋아. 당연히 승리했겠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좀 어떠세요? 당신도 지금 쉽지 않은 싸움을 하고 계신 것 같던데요."

"싸움?" 그는 군중을 다시 흘긋 바라봤다. "아, 아니야. 이건… 재구축이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알겠어요. 힘 쓸 일 있으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아셨죠?"

"그러지. 고맙다, 홀리데이 양." 세인트는 아만다 뒤에 나타난 까마귀에게 손짓했다. "이건 누구지? 조금 마르긴 했지만 움직임에 힘이 느껴지는군. 헌터일 것 같은데."

까마귀는 당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만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쪽은 까마귀라고 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친근한 태도로 그의 등을 철썩 때렸다. "기갑단과 관련된 첩보를 맡고 있죠. 까마귀, 이쪽은 세인트-14이야. 그러니까… 음, 대단한 분이신데, 일단 지금은 오시리스의 시험을 운영하고 계셔."

"정말인가? 이거 재미있군." 까마귀는 그렇게 말하며 세인트와 팔뚝을 맞잡았다. "다들 시험이라고만 얘기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시리스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타이탄은 헬멧 뒤쪽을 문질렀다. "그는 워낙 중요한 일들에 많이 관여하고 있어서, 난 그냥 도울 수 있는 걸 돕는 거지."

"그냥 돕기만 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아만다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그분도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네요."

"남을 돕는 일을 빚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친구. 우리는 누구나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밴시만 빼고. 그 친구는 확실히 내게 미광체를 빚졌어."

"그렇죠." 아만다가 대답했다. "선행에 가격표를 붙여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모든 일이 공평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전투에서 동료가 쓰러지면, 상대가 힘을 되찾을 때까지 부축해 줘야 하는 법이다. 너 자신까지 상처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야.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만다는 까마귀를 바라본 후 다시 세인트를 바라봤다. "뭐, 그렇게 말씀하시면…" 한참이 지난 후, 그녀가 말했다.

세인트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이제 아이코라를 만나러 가야겠다. 늘 그렇듯이, 만나서 반가웠다, 홀리데이 양. 그쪽도, 비쩍 마른 까마귀 친구." 그리고 그는 작별 인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멀어졌다.

"만나서 반가웠다." 조금 늦었지만, 까마귀도 말했다.


5.3. 패러다임의 전환[편집]


이 초고속 주행은 혁명입니다.

"다시는 그녀 얘기를 하지 마." 오시리스가 엑소 타이탄에게 쇳소리로 따졌다. 시끌벅적한 격납고의 소음 위로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십여 미터 떨어진 도약선의 그림자 아래서 까마귀와 홀리데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막 도약선에서 하선한 그들은 까마귀의 뛰어난 반사신경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말다툼에 직접 휘말릴 뻔한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첩보 활동을 한 덕분인지, 사적인 대화에 대한 그의 육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능력이 현장에서뿐 아니라 집에서도 쓸모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젠장." 오시리스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홀리데이가 중얼거렸다. 까마귀는 그녀를 바라보며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저 엑소는 누구지? 다시는 얘기하지 않아야 할 '그녀'는 또 누구지? "나중에 얘기해 줄게."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한 후 은신처를 빠져나왔다.

"홀리데이!" 까마귀가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그녀는 벌써 엑소의 곁에 서서 상냥한 태도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선택지를 검토했다. 일이 아무리 수월하게 진행된다 해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긴장의 연속이었다. 탑에서 가면을 쓰는 수호자는 많지 않았다. 그도 어서 가면을 벗고 싶었지만, 그가 얼굴을 내보였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면을 쓰고 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수상해 보일 것이 분명한 만큼, 언젠가는 누군가 그에 대한 의혹을 제기할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저 엑소는 헬멧을 쓰고 있었고, 홀리데이도 그 사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얼마 전 까마귀의 가면을 받아들인 것처럼.

게다가, 영원히 가면을 쓰고 있는 것과 그림자 아래에 숨어 있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수상하겠는가? 까마귀는 태연해 보이려고 애를 쓰며 계단 아래에서 나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홀리데이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힘 쓸 일 있으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아셨죠?"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미처 짐작해 볼 틈도 없이 엑소는 그를 돌아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누구지? 조금 마르긴 했지만 움직임에 힘이 느껴지는군. 헌터일 것 같은데."

까마귀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고민하고 있던, 전혀 수상쩍지 않은 인사말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목이 죄어 오는 느낌에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홀리데이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이쪽은 까마귀라고 해요. 기갑단과 관련된 첩보를 맡고 있죠." 그녀가 말했다. "까마귀, 이쪽은 세인트-14이야. 그러니까… 음, 대단한 분이신데, 일단 지금은 오시리스의 시험을 운영하고 계셔."

오랜만에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워졌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깜짝 놀란 표정이 두 사람에게 드러났을 테니까. 물론 그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존경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그리고 뒤엉킨 해안에서는 경멸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하지만 둘 중 어느 쪽도 지금 쾌활하게 그의 팔뚝을 잡은 타이탄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첩자의 본능이 다시 한 번 그를 구했다. "정말인가? 이거 재미있군." 까마귀는 조금 더 강한 힘으로 상대의 팔뚝을 맞잡으며 말했다. "다들 시험이라고만 얘기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시리스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타이탄은 멋쩍게 쿡쿡 웃으며 물러섰다. "그는 워낙 중요한 일들에 많이 관여하고 있어서, 난 그냥 도울 수 있는 걸 돕는 거지."

"그냥 돕기만 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홀리데이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그분도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네요."

까마귀는 세인트를 바라봤다. 오시리스가 누군가에게 빚을 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남을 돕는 일을 빚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친구. 우리는 누구나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밴시만 빼고." 그는 두 사람에게 윙크라도 하는 듯한 태도로 덧붙였다. "그 친구는 확실히 내게 미광체를 빚졌어."

까마귀는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웃었다. 놀랍게도, 그는 세인트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렇게 서글서글한 사람이 오시리스 같은 위협적인 인물과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그는 홀리데이가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홀리데이의 말을 들었다. "…모든 일이 공평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갑자기 세인트의 태도가 달라졌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는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전투에서 동료가 쓰러지면, 상대가 힘을 되찾을 때까지 부축해 줘야 하는 법이다. 너 자신까지 상처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야.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의 어조가 까마귀의 머릿속에 큰 울림을 남겼다. 세인트와 오시리스가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기 등 뒤를 지켜 줄 누군가가 있다는 자신감과 안도감을 느낀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같은 대의를 위해 누군가와 함께 싸운다는 건? 가슴이 아릴 만큼 알고 싶었다.

"늘 그렇듯이, 만나서 반가웠다, 홀리데이 양. 그쪽도, 비쩍 마른 까마귀 친구." 세인트는 그 말을 남기고 멀어져 갔다.

까마귀는 어깨가 떡 벌어진 타이탄이 아무렇지도 않게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만나서 반가웠다." 그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늦어서 이제는 듣는 사람도 없었다.

홀리데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까마귀는 날선 눈빛을 그녀에게 던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지금이라도 설명하려는 걸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술잔을 앞에 놔야 얘기할 마음이 생길 것 같은데. 이번엔 당신이 쏘는 거지?"


6. 5년차 장식[편집]



6.1. 호루스 의체[편집]


아무리 많은 조각으로 갈라졌든, 당신은 언젠가 다시 온전해질 겁니다.

세인트-14의 도약선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쪽, 오목하게 들어간 전등이 윙윙 소리를 냈다. 헐거워진 밸러스트에서는 가끔씩 철컹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워낙 작아서 평상시에는 탑 격납고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금속성 소음은 왠지 벌레 소리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여명을 아직 한참 남겨 둔 이 시간의 격납고는 무척이나 조용했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외로운 시간이었다.

세인트는 자기 우주선 아래 계단에 앉아, 커다란 손으로 책장이 접힌 일지를 들고 있었다. 표지에 새겨진 황동색 눈을 보면 오시리스 것이 분명했다. 섬세한 자물쇠가 내용을 감추고 있었다. 세인트가 엄지손가락으로 자물쇠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부술 수 있었지만, 그건 오시리스의 사생활에 대한 심각한 침해였다. 그래도, 괜한 유혹에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세인트의 고스트 제페토가 그의 어깨 위에 나타났다. "연락이 왔어요." 그녀는 일지를 흘긋 내려다본 후 비난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타이탄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연결해 줘." 세인트는 말했다.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세인트." 미스락스의 목소리가 제페토를 통해 명료하게 들려왔다. "네가… 응답할 줄은 몰랐다. 우리 둘 다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군."

"그래," 세인트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의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가… 필요하다고 했지, 미스락스?"

"방금 보급품이 들어왔다." 미스락스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세인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 손으로 일지를 쓰다듬었다. 제페토가 그를 쿡 찌르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일지를 한쪽에 내려놨다. "내가 도와주지." 그는 말했다. "네가 가리키는 걸 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겠지?" 그는 지친 듯 웃으며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얘기군. 아이도도 널 다시 만나길 기대하고 있다." 미스락스는 상냥하게 말했다. 세인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계단에서 일어섰다. 제페토가 재빨리 다가와 빠직거리는 빛줄기로 일지를 세인트의 집으로 전송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친구." 세인트는 어깨너머로 말했다. 제페토가 그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한 말인지, 미스락스에 한 말인지 아리송했다. 그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둘 모두에게 한 말이었다.


6.2. 숨죽인 울대[편집]


"남아 줘서 고마워요."

방어구를 벗고, 리넨 옷에 감싸인 채 살균된 병상에 누운 오시리스는 가냘프고 여려 보였다. 세월이 그의 얼굴에 새긴 주름은 수성의 참호보다 더 깊었다. 그의 가슴이 느릿한 호흡과 함께 오르내렸다. 병상을 둘러싼 의료 장비가 비추는 빛이 그를 창백한 푸른빛으로 물들이고, 눈두덩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한 인간의 초라한 잔재 같았다.

그에 비하면 세인트-14은 태산이었다. 오시리스의 병상 곁에 앉은 타이탄은 마치 액막이 석상처럼 누워 있는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세인트-14은 자기 손에 얹혀 있는, 아기처럼 작은 오시리스의 손을 바라봤다. 세인트의 가슴에는 공포와 의혹, 말하지 못한 사랑이 가득 차 있었다. 결국 하지 못했던 말을, 다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인트는 오시리스의 손을 들어 그의 손마디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있어 줘서 다행이야." 의무실 문간에 나타난 까마귀가 말했다. 세인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오시리스를 돌아봤다. 까마귀는 동정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도 이해한다."

"아니야." 세인트의 목소리는 먹먹했다. 까마귀는 세인트의 감정이 변화하는 걸 느꼈다. 그건 분노가 아니라 방어적인 태도였다. "자세히 얘기해 봐. 저 위에서…" 그는 손가락을 들어 지구 위 궤도에 떠 있는 리바이어던을 가리켰다. "네 의혹이, 네 수치가— 살아났다고?"

까마귀는 요동치는 기억에 정신이 팔려 잠시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 그는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도와주러 가지 않는 거야." 세인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위에서, 오시리스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난… 이제 무언가 다른 존재가 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어."

까마귀는 세인트의 눈을 피했다. 둘 사이에 손에 잡힐 듯 불안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까마귀는 앞으로 나서 가만히 세인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가 엑소의 눈을 들여다봤을 때, 거기 떠오른 건 비난이 아닌 연민이었다.

세인트는 까마귀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를 잡아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넌 참 좋은 새야. 고마워."


6.3. 매의 추적[편집]


"인간의 그림자. 언뜻 엿본 꿈."

어둠이 숨결처럼 내 안에 밀려들고, 생각할 때마다 확장된다. 얼마간, 어둠은 들어오는 것만큼 빈번하게 빠져나갔고, 덕분에 나는 위압적인 바다 위로 머리를 내밀고 상공을 뒤덮은 잔인한 폭풍과 멀리 떨어진 희망의 해안을 엿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바다만 남고, 진실한 것은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세 개의 눈을 모두 감는다. 온몸을 동그랗게 말고, 내 외골격을 방패로 세계를 지킨다. 나는—

아니. 나는 인간이다. 무르고 약한, 껍질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빛도 없다. 파도가 나를 덮친다. 무겁게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저지할 수 없는 파도가. 익사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헤엄쳐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온몸에 갑주를 두르고 있다 해도 심연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 내게 승산이 있겠는가?

나는 부서진 돌 방파제에 떠밀려 올라온다. 사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원한다, 원한다, 원한다… 무엇을? 내 안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갈망의 구덩이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내 몸이 내 것이었다면 나는 기어서라도 뭍으로 올라갈 것이다. 이 굶주림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내 아래 세상이 붕괴된다. 돌은 한순간 유사가 된다. 나는 생각을 앞서는 공포로 버둥거리고, 모래는 그만큼 더 빨리 나를 삼킨다. 나는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하고, 내 손은 무언가에게 붙잡힌다—

세인트?

내 손가락이 허공을 스치고, 발톱이 내 손을 움켜쥔다. 음울하게 익숙한 모습을 뒤집어쓰고, 수천의 희생을 온몸으로 과시하면서, 그것이 내 육신과 정신을 찢는다. 나는 거짓으로 날카로워진 그 발톱을 알고 있다. 그 지식을 내 신경이 접속된 심장으로부터 도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수천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아른거리고, 부서진 채 자유 낙하하며 나 자신의 무한한 반영을 언뜻 엿본다. 일부는 금색으로 빛나고, 일부는 역겨운 초록색으로 타오르고, 또 일부는 눈에 띄자마자 흐릿하게 사라진다. 그중 어느 게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하나는 그녀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녀인지도 모른다. 내 감각이 거짓을 말한다.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낭랑하게 심연에 울려 퍼지는 말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소리는 달콤하다. 날개가 펄럭거리는 것만 같지만, 해시계의 윙윙거림은 길을 알려 주지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7. 6년차 장식[편집]



7.1. 영웅의 자취[편집]


"우리 둘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지." —아이샤

"다른 무엇보다 이것을 진정으로 믿습니다."

샤유라는 기도를 끝내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무릎 꿇은 자세로 한때 여행자가 떠 있던 최후의 도시 위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숙소의 여백을 따뜻하게 채웠지만 그녀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뺨에 와닿는 빛이 반갑지 않았다. 과분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우제어 박사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고스트가 샤유라의 어깨를 가볍게 쿡쿡 찌르며 부드럽게 재촉했다. 샤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노력은 곧 실패로 돌아갔다. 턱이 떨렸다. 그녀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고스트는 부드럽고 슬픈 재잘거림을 내다 그녀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모습을 감췄다.

방은 조용했지만 샤유라의 머릿속은 벌집처럼 윙윙거렸다. 집중하기에는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의심과 불안감, 수치심과 후회가 뒤섞인 시끄러운 소음이었다. 그녀는 몸을 뒤로 젖혀 무릎을 가슴께에 붙인 뒤, 원치 않는 태양빛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 우주가 자신을 보지 않길 바랐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우제어 박사는 그것이 생존자의 죄책감이라고 상기시켜 줄 터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 이상이었다.

이건 정의가 아니었다.


7.2. 용맹한 기억[편집]


"당연히 다쳤지. 하지만 그게 우리 일이야. 우린 수호자야.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죽는 거야." —리드-7

"저게 뭐든 간에 우리가 막아야 돼!"

통신을 통해 아만다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치직거리며 들려왔다. 리드-7은 고스트에게 눈짓한 뒤, 홀리데이의 매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만다의 뒤로 대형을 이루자 샤유라와 아이샤도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앞에서 여행자로부터 뻗어 나오고 있는 빛줄기는 태양보다도 밝았다. 계기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항행 장치는 이 광선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별빛이라는 표시를 띄웠다. 우주선이 그의 조종을 거부했다. 리드는 자동 조종 장치를 껐다.

"자유 비행해, 항법 장치가 고장 났어." 그가 화력팀에게 외쳤다.

"자유 비행 확인." 아이샤가 통신으로 대답했다.

"우리도 바로 뒤에 있어, 대장." 샤유라도 확인했다.

리드는 조종간을 꽉 쥐었다. "홀리데이, 이끌어 줘."

"차단 대형. 어디 한번 요란을 떨어 볼까." 홀리데이가 공격팀에게 무전을 했다. 리드-7이 매 아래에서 전속력으로 나는 동안 아이샤와 샤유라는 홀리데이의 측면으로 이동했다. 리드가 수동 조준을 활성화하자 앞 유리에 십자선이 떠올랐다. 그는 여행자의 빛 속에 갇힌 형상을 추적했다. 불가능한 실루엣이 우주의 공허 속에 떠 있었다.

목격자는 흰 들판 위 어둠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꽤 먼 거리인데도 리드는 목격자가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준경의 십자선이 고정되는 순간, 리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엑소자아의 감각 기능이 편두통처럼 마구 욱신거렸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고스트를 쳐다보았다. 고스트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미 죽은 채였다. 세상이 마구 갈라지며 조각났다.

그리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7.3. 생존자의 여정[편집]


"한 생명이 죽으면, 다른 생명이 태어나 그 자리를 차지하지. 그게 균형이다. 그것이 자연이다." —리드-7

아이샤가 가속 페달을 느슨하게 하자 참새의 엔진이 서서히 멈췄다. 주변의 소나무 숲은 여전히 적막했다. 유일한 소음은 생태도시 상층부의 삐걱거리고 끽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머리 위 부서진 돔 사이로 메탄 비가 내렸다. 아이샤는 가장자리를 손으로 연마한 가느다란 붉은 금속이 달린 새 실끼우개 귀걸이를 조심하며 헬멧을 벗었다.

"네가 직접 올 줄은 몰랐어." 숲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슬론을 본 아이샤는, 확연히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을 받아들이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녀의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굴복자 에너지도, 빛을 받는 그녀의 눈동자도.

아이샤는 마음을 다잡고 참새에서 내려, 순식간에 슬론과의 거리를 좁히고 덥석 슬론을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슬론이 뻣뻣한 차렷 자세로 굳었다. 잠시뿐인 포옹에도, 감정의 메아리는 그녀를 마음 아리는 그리움으로 가득 채웠다.

아이샤는 한 발짝 물러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만나고 싶었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만나서—말하고 싶었어."

슬론은 아이샤를 정말 오랜만에 만난 것이었지만, 아이샤가 이렇게 흔들릴만한 이유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드가 죽었어."

슬론은 그 아픔을 통해 여전히 자신이 인간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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