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마르티네스/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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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몬트리올 엑스포스: 전설의 시작
4.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 역사상 최고의 임팩트
4.1. 1998년
4.2. 1999년
4.3. 2000년
4.3.1. 1999~2000년 2년간의 기록 평가
4.4. 2001년
4.5. 2002년
4.6. 2003년
4.7. 2004년과 그 이후


1. 개요[편집]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편집]



파일:external/cbsla.files.wordpress.com/284715.jpg

67경기/3선발 115이닝 10승 6패 2세이브
2.58ERA/147ERA+ 1.217WHIP 58BB/127K
2.95FIP 2.1fWAR/3.3bWAR

1988년 형인 라몬 마르티네즈가 있는 LA 다저스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한다. 이후 다저스 산하 도미니카 아카데미와 마이너리그를 거쳐 메이저리거로 데뷔했고, 1993년 LA 다저스에서 주로 불펜 투수로 10승 5패, 평균자책점 2.61라는 우수한 성적을 내고도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트레이드 됐다. 180cm도 안 되는 작은 키와는 상반된 강속구에 대해 부상의 의심이 컸기 때문이다.[1] 특히나 188cm의 비교적 큰 체구를 자랑했던 형 라몬이 다저스의 1선발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시절이었기에 더욱 비교되었다.[2] 페드로의 커리어 첫 승리는 1993년 5월 5일 뉴욕 메츠와의 경기였고, 다저스의 선발은 형 라몬 마르티네즈/메츠는 브렛 세이버하겐이었다. 이 경기에서 불펜으로 나온 페드로는 2이닝 0실점으로 승리를 얻었다.[3]

사실 몬트리올과 보스턴 시절을 생각한다면 다저스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일. 하지만 그 시절 다저스에는 대런 드라이포트를 비롯한 좋은 파이어볼러 유망주가 많았고, 2루수도 필요했다.[4]. 트레이드 상대인 딜라이노 드쉴즈 시니어[5] 는 겨우 25세였고, 이전 2년동안 .290의 타율과 40개가 넘는 도루를 기록한 전도유망한 2루수였다. 트레이드 당시 당장의 평가는 말할 것도 없이 다저스의 윈.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미 라소다는 이 트레이드를 다저스 역사상, 그리고 본인의 커리어 사상 최악의 실책으로 꼽았으며[6][7][8], 페드로도 이후로 다저스 측에는 영 섭섭한 인상을 받아 오랫동안 서먹한 관계를 유지했다.

페드로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를 "나는 1993년 시즌 방어율 2.61, 홀드 14개, 세이브 2개를 기록했고, 107이닝동안 119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내셔널리그 신인상 투표 9위에 올랐기 때문에 페드로 본인은 아주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성공적이긴 했지만. 여하튼 페드로는 당시의 상황을 "토미 라소다 감독에게 불펜 투수로서 잘했지만, 내년에는 꼭 선발로 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고 11월 중순, 다저스가 나를 선발투수로 뛰게 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만, 다저스의 선발이 아닌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선발투수로 말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자신의 데뷔 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애정은 남아 있는지 다저스의 정책이나 선수들에 대해서 신경 써주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2013년 클레이튼 커쇼가 디비전 시리즈에서 3일 휴식 후 등판했을 때 이러한 기용에 대해 비판하며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 올해처럼 코칭 스태프가 커쇼의 이닝 관리를 해 주지 않을 경우 커쇼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지금 커쇼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즐거움을 주는 선수 중 한 명이며, 우리 모두가 즐겁게 지켜보는 선수다. 이런 야구계의 보물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한다"라며 특유의 달변으로 커쇼를 걱정하는 발언을 했다.[9] 또한 워커 뷸러의 데뷔 시즌을 보고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극찬을 한 것은 덤. 다만 뷸러는 아직까지 페드로만큼의 임팩트를 남기지 못하는 중이다. 아마 '하얀 페드로'라 불렸던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처럼 커리어 끝까지 못 남길 가능성이 훨씬 크긴 하지만


3. 몬트리올 엑스포스: 전설의 시작[편집]



파일:external/cdn.bleacherreport.net/1793810_display_image.jpg

118경기 797.1이닝 55승 33패 20완투/8완봉
3.06ERA/139ERA+ 1.089WHIP 248BB/843K
3.17FIP 20fWAR/20.2bWAR


한편, 1993 시즌이 끝나고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보고 그처럼 되고 싶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대권에 도전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10] 당시 몬트리올은 에이스였던 데니스 마르티네즈의 부상과 FA가 겹쳐 즉시 전력감을 구하던 중이었는데 상술한 1993-94 오프시즌에 들라이노 드쉴즈와의 1:1 트레이드로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이 딜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됐다.

페드로는 1994 시즌부터 몬트리올에서 풀타임 선발투수로 생활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 시즌에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을 완전히 마치지는 못했지만, 시즌이 마감되기 직전까지 페드로는 11승 5패를 거두며 사이 영 상 페이스였던 에이스 켄 힐과 환상의 원투펀치를 이뤘다. 한마디로 선발 풀타임 첫 시즌 치고는 대단한 성적을 거뒀던 셈.[11]

하지만 몬트리올은 1994년 파업의 여파로 팀 전력이 급락하게 되면서 메이저리그 최약체 팀이 돼버렸고, 페드로도 고생을 많이 했다. 대표적으로 1995년 9이닝동안 출루를 단 한 차례도 허용하지 않고도 팀이 한 점도 뽑지를 못해서, 이후 10회에 2루타를 맞고 퍼펙트 게임을 날린 적도 있었다(10회 마운드에서 내려올 때의 투구수는 96개였다).

주요팀(Prime Team)이 보스턴 레드삭스라 몬트리올 시절의 비중은 적은 듯 보이지만, 1994 시즌 파업을 아쉬워하는 발언이라든지, 1997 시즌 사이 영 상 수상 등의 업적 등을 남겨서 그런지 몬트리올 지역 내에서의 페드로의 인기는 좋은 편이다. 실제로 2016년 4월 1일 몬트리올에서 열린 보스턴 레드삭스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시범경기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


파일:1997 올스타 페드로.jpg

1997년 올스타전 당시의 성적
페드로의 전설은 1997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7년에 17승 8패에 1.90ERA/219ERA+ 241.1이닝 13완투 305K/67BB 0.932WHIP fWAR 8.5 bWAR 9.0의 기록을 남기고 엑스포스 역사상 유일한 사이 영 상을 수상한다. 이 시즌 기록한 .184피안타율/.250피출루율/.277피장타율 모두 메이저 리그 전체 1위였다. 우완투수가 2점 이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300K 이상을 기록한 것은 1912년 월터 존슨 이후 처음. 다만 당시 팀이 약체였던지라 득점 지원이 적어서 상당히 불운한 시즌이기도 했는데, 이 시즌에는 8이닝 2실점 12K 패전 2회, 7이닝 1실점 ND/9이닝 1실점 ND 등 승을 얻을 만한데 못 얻은 경기가 4번이나 있었다. 이 시즌 8패 경기에서 59이닝 3.05 82K/24BB로 호투했는데 팀은 8경기에서 겨우 8점만을 지원했다. 또 6월 8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새미 소사를 3타석 연속 삼진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6월 30일에는 토론토와의 캐나다 더비에 나와 Pat Hentgen과[12] 완투 대결을 펼처 9이닝 1실점 10K로 승리했다. 올스타전에서도 6회에 올라와서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3구 삼진으로, 켄 그리피 주니어를 뜬공으로 잡은 후 마크 맥과이어를 삼진으로 잡고 내려갔다.[13]

1997 시즌은 페드로의 전설적인 전성기의 포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데, 페드로의 1997년~2003년 7년 fWAR은 무려 55.6으로 동기간대 투수 중 당연히 1위이며 [14] 타자를 합쳐도 2위이다.[15]

이후 라이벌이 되는 뉴욕 양키스를 처음 상대한 것도 1997년 8월 30일이다. 페드로는 이 경기에서 완투를 하며 5피안타 2실점 10삼진을 기록하며 7:2로 승리했고, 전설적인 라이벌리의 포문을 열었다.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워싱턴 내셔널스가 된 지금, 두 팀의 역사를 통틀어서 투수 단일 시즌 프랜차이즈 기록을 아직까지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16]
프랜차이즈 기록
단일 시즌 ERA
1997년 1.90
단일 시즌 ERA+/ERA-
219/45
단일 시즌 탈삼진
1997년 305K
단일 시즌 bWAR
1997년 9.0
단일 시즌 fWAR
1997년 8.5
단일 시즌 RE:24
1997년 57.70
단일 시즌 WPA
1997년 6.4

4.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 역사상 최고의 임팩트[편집]



파일:bWAR P. martinez.png

203경기 1383.2이닝 117승 37패 22완투/8완봉
2.52ERA/190ERA+[17] 0.978WHIP 309BB/1683K
2.45FIP 51.9fWAR/53.8bWAR

보스턴에서 페드로가 기록한 7년치 bWAR은 랜디 존슨의 애리조나 8년치(52.6)보다 높고, fWAR은 랜디(54.8)보다 2.9 부족하다.

프랜차이즈 기록
단일 시즌 탈삼진
1999년 313K
단일 시즌 K/9
1999년 13.2047
단일 시즌 FIP
1999년 1.39
단일 시즌 fWAR
1999년 11.6
단일 시즌 K/BB
2000년 8.875
단일 시즌 H/9
2000년 5.309
단일 시즌 WHIP
2000년 .737
단일 시즌 ERA+
2000년 291
단일 시즌 RE:24
2000년 86.93
단일 시즌 WPA
2000년 8.1

FA를 앞둔 1997년 11월 보스턴 레드삭스칼 파바노와 토니 아마스 주니어의 1:2 트레이드를 통해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고, 그 뒤에 6년간 7500만 달러의 계약을 맺고[18] 진정한 전설로 등극한다.[19]


4.1. 1998년[편집]


1998년에는 19승 7패 ERA 2.89, 233.2이닝 67BB/259K bWAR 7.3/fWAR 5.7이란 성적으로 사이영상 2위를 하고 'Rocket who?'라는 환호를 받으며 로저 클레멘스 이후 제대로 된 에이스 투수를 보지 못했던 보스턴 팬들은 이 계약에 대해 환호했다.[20] 이 해에 커리어 첫 포스트시즌인 ALDS 1차전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하여 7이닝 3실점 8K 3.86ERA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 첫 승을 따냈다. 그리고 팀은 3연패하여 1승3패로 탈락.[21]

우수한 성적이기는 하지만 1997년에 비해서 거의 모든 지표의 성적이 급격히 하락했다. 특히 FIP가 3.40으로 폭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4.2. 1999년[편집]


1999년에는 2년 전에 선사했던 감동을 넘어서는 수준의 미친 활약을 했는데, 31경기 23승 4패 ERA 2.07 213.1이닝 313K/37BB fWAR 11.6 bWAR 9.8로 아메리칸리그 트리플 크라운[22]을 달성했다.

1999년에는 ERA+(조정평균자책점)[23]이 243, 00년에는 291[24]을 찍으면서 1914년 더치 레너드의 279를 약 80년만에 경신했다.[25] 또한 1999년, 2000년에는 리그 투수들의 평균 ERA가 각각 4.86-4.91로서 아메리칸리그 역사상 평균 ERA가 4번째, 3번째로 높은 타고투저의 시즌이었다. 페드로의 기록은 이러한 타고투저의 시즌에 나온 기록이라 더더욱 대단한 기록이었다. 사실 2000년의 1.74-3.70의 임팩트에 묻히지만 1999년 기록한 2.07은 유일한 2점대 ERA였고 AL 2위의 ERA는 3.44였다.[26] 세이버메트릭스의 관점으로 보면 FIP의 경우 1999년에 1.39를 찍었는데, 이는 라이브볼 시대 역사상 압도적 1위이고,[27] 데드볼 시대의 기록을 합쳐도 3위이다.[28] 의외로 2000년 FIP는 2.17로 그냥저냥(....)한 편.[29] 거기다 1999시즌 fWAR는 11.6[30]을 찍었는데 이는 투수 단일 시즌 fWAR 1위에 해당한다.[31][32] 한편 1999년에는 야구 역사상 최초로 규정이닝을 채운 풀타임 선발로서 K/9 13개를 넘기는 전인미답의 기록을 남겼다.[33] 31경기에 나와 10K+ 경기가 무려 19회, 15K+ 경기가 6회나(8이닝 15K 4번+9이닝 17K 1번+9이닝 16K 1번) 있었다. 단일 시즌 15K+ 6경기는 1974년 놀란 라이언과 1999년 페드로만 가진 기록이다.[34] 이 시즌에 .205피안타율/.248피출루율/.288피장타율을 기록했는데, 피안타율은 .003차이로 케빈 밀우드에게 밀려 MLB 전체 2위였지만 피출루율은 2위와 .010/피장타율은 2위와 .036의 차이를 내며 1위를 했다. AL만 보면 모두 1위.

2021년 디그롬이 고작 92이닝으로 4.9라는 fWAR을 기록하며 큰 찬사를 받았다. 이닝 치고는 매우 높은 수치라 그렇다. 그런데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1999년에 첫 89.2이닝(4월 5일~6월 4일)을 소화했을 때의 fWAR은 무려 5.2(역대 4위)였다. 애초에 연속되는 12경기의 fWAR을 계산했을 경우 1~10위의 6자리가 그의 것이고 1~4위(5.4-5.4-5.3-5.2, 모두 1999년)도 그의 것이다.#

1999년 9월 10일 보스턴 레드삭스는 같은 지구의 영원한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와의 게임이 있었다. 당시 삭스의 선발은 페드로 마르티네즈. 결과는 9이닝 1피안타 1실점 17K 완투승. 참고로 이때 1실점 1피안타의 주인공은 은퇴를 앞두었던 양키스의 칠리 데이비스. 뭐 페드로는 첫 타자 척 노블락을 몸에 맞는 볼로 내보냈긴 했지만, 이 경기의 피칭은 가히 퍼펙트 게임을 방불케 했으며, 1983년 7월 4일 양키스타디움에서 데이브 리게티가 레드삭스를 상대로 던진 노히터를 되갚아 줄 절호의 찬스였지만 아쉽게 무산된 점에서 레드삭스 팬들이 특히 안타까워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또한 1999년에 홈구장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의 선발투수로 나와 내셔널리그 MVP 3인 + 지난 시즌 70홈런 타자로 구성된 NL 올스타 1-2-3-4번 타자인 배리 라킨-래리 워커-새미 소사-마크 맥과이어를 차례로[35] 삼진으로 떡실신시키고, 맷 윌리엄스가 2루수의 느린 땅볼을 놓치는 실책으로 출루했지만 제프 배그웰을 또다시 삼진으로 잡으면서 동시에 도루하는 윌리엄스를 AL 올스타 포수 이반 로드리게스가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지었다. 당연히 올스타전 MVP는 페드로의 몫. 다만 이때의 영향인지 올스타전 다음 경기인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3.2이닝 9실점을 기록하며 부진했지만 승리했고 후반기를 8승1패로 마무리했다. 사실 1999년 전반기를 15승 3패로 끝낸 페드로는 쉬는 게 낫지 않겠냐는 팀의 의견을 만류하고 올스타전에 등판한 것이었고, 아니나다를까 후반기 첫 등판에서 부상을 당하고 시즌 29선발에 그쳤다.

파일:가까운 자 없는 페드로(1999).jpg

주로 2위와의 격차가 컸다는 얘기는 2000년 시즌을 설명할 때 나오지만, 마르티네스는 이미 1999년에도 비슷한 레벨이 없는 선수였다.
1999년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지난 시즌에 이어 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1차전 4이닝 3피안타 무실점[36], 짐 토미가 2홈런을 기록하고 앞의 투수들이 3이닝 8실점으로 털리는 바람에 수세에 몰린 5차전에서 6이닝 0피안타 무실점으로 12:8 역전승을 이끌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악몽은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쉽. 물론 상대는 예상대로 그대로다. 덤으로 양키스의 선발투수는 그 유명한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 결과는? 7이닝 2피안타 12삼진 무실점[37]. 경기결과는 보스턴의 13-1 대승. 그런데 이 경기 빼고 보스턴은 전부 져서 1:4로 시리즈에서 탈락했다. 이 경기는 1999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 양키스가 포스트시즌에서 당한 유일한 패배였다. 즉 페드로는 1999년 포스트시즌에서 17이닝 5피안타 23K 무실점 ERA 0.00을 기록했다.


파일:external/michaeljlewis.files.wordpress.com/pedro-martinez-02.jpg
이 시즌의 최종 성적은 그야말로 너무 충격적이라 세상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며, 만장일치 사이영상은 물론이거니와 MVP 투표에서도 2위에 오른다. 다만 이 때 MVP 투표에서 8표로 1위표를 최다득표했지만 역사상 최초의 포수 20-20을 달성하여 7표를 받은 이반 로드리게스에 밀려 MVP 1위를 놓친 것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38]

이 해 4월 15일 화이트 삭스와의 경기에서 ERA 3.15를 기록했는데 이 다음 경기인 1999년 4월 20일 디트로이트와의 경기부터 2001년 9월 18일 양키스와의 경기까지인 78경기[39] 연속으로 2점대 ERA를 유지했다. 이 78경기 중 ERA가 가장 높았던 경기는 1999년 8월 19일 오클랜드전에서 기록한 2.52였다.


4.3. 2000년[편집]




[40]
2000년에는 시애틀과의[41] 첫 경기를 7이닝 0실점 11K로 시작하더니 5월 28일 양키스를 셧아웃 시키는 등 엄청난 경기력을 선보이고 ERA 1.74, ERA+ 291[42][43], 284K, WHIP 0.74, FIP 2.17, 피안타율 .167, 피출루율 .213, 피장타율 .259, 8.88K/BB, 4완봉 등 대부분의 지표에서 2위와 압도적인 격차를 벌리는 진기록을 세우며 아메리칸리그 최초로 2년 연속 만장일치 사이 영 상[44]을 차지했다. 이 시즌에 MLB 전체에서 1위를 한 지표는 ERA(+), WHIP, FIP, 피안타율, 피출루율, 피장타율, K/BB, H/9인데[45] 이 중 ERA+ 291은 1880년 이후 1위이며, WHIPㆍ피출루율ㆍ피안타율[46]은 역사상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이다. WAR을 살펴보면 bWAR은 11.7로 투타를 합쳐 1위이고 fWAR은 9.4로 랜디 존슨의 9.6을 이은 2위에 투타를 합쳐 3위이다.[47] 이 시즌에 ERA가 가장 높았던 경기는 클리블랜드와의 대결에서 기록한 1.81이었다.[48] 이 시즌의 주요 지표별 성적과 AL 평균, AL 2위, NL 1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91의 ERA+는 AL 2위와 차이가 158이었는데, 이는 2위와 최하위(37위)의[49] 차이(53)의 근 3배에 달한다. MLB 전체를 봐도 MLB 2위 랜디 존슨(181)과의 차이가 110인데 랜디 존슨과 최하위(89위, 75)의[50] 차이가 106이었다. 즉 AL만 보든 MLB 전체를 보든 1위와 2위의 차이가 2위와 꼴지의 차이보다 컸다.
2000년
ERA
ERA+
WHIP
FIP
탈삼진
K/9
피안타율
피장타율
피출루율
H/9
fWAR
bWAR
페드로
1.74
291
0.74
2.17
284
11.78
.167
.259
.213
5.309
9.4
11.7
AL 평균
4.92
100
1.49
4.83

6.3
.275
.443
.347
9.7


AL 2위
3.70
133
1.18
3.50
212
10.15
.227
.371
.291
7.5
6.4
6.2
NL 1위
2.58
181
0.99
2.53
347
12.6
.213
.325
.261
6.9
9.6
8.1
2000년의 AL은 타신투병급의 리그로, 규정이닝을 넘긴 37명의 선수들 중에서 딱 5명만이 3점대 이하의 ERA를 기록했고 4점대를 찍은 선수도 겨우 27명이었다.[51] 이런 리그에서 신화적인 활약을 했지만 페드로는 외로운 에이스였다. 이 시즌 페드로 다음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한 선발투수인 제프 파세로가 고작 130이닝 ERA 4.78, 그 다음인 형 라몬 마르티네스가 ERA 6.13, 그 다음이 ERA 5.11, ERA 5.05를 찍었고 팀 웨이크필드는 159.1이닝 5.48ERA를 찍고 타선도 AL 14팀 중 타율 13위, 총 득점 12위를 기록하며 팀이 전혀 페드로를 받쳐주지 못했고 결국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이 시즌 6패 한 경기에서의 ERA는 2.44였고 성적은 48이닝 13자책 8BB/60K WHIP 0.79였다.

이 시즌 페드로의 RE:24는[52] 레퍼런스 기준 86.93(역대 2위)/팬그래프스 기준 80.32(역대 1위)다. 레퍼런스 기준 1위인 1931년 레프티 그로브가 288.2이닝 87.84/팬그래프스 기준 2위인 1985년 드와이트 구든이 276.2이닝 70.42다. 이닝 차이를 감안하면 페드로의 수치가 비상식적인 기록임을 알 수 있다.


4.3.1. 1999~2000년 2년간의 기록 평가[편집]

  • 1999년 4월 15일~5월 18일에 7경기 연속 10K/8월 19일~9월 27일에 8경기 연속 10K를 기록했다. 9월 4일-10일에 각각 15K-17K로 2경기 32K를 잡았다.
  • 2000년 5월 6일-12일에는 각각 17K-15K를 잡아 다시 한번 2경기 32K를 기록했다.[53] 1999~2000년에 15K를 9번 잡았는데 0볼넷이 4번/1볼넷이 3번/2볼넷이 1번/3볼넷이 1번이었다.[54]

간단히 종합하자면, 이 2년은 뛰어난 전성기를 보낸 것으로 유명한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가히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시즌이자 현대 야구로 한정할 시 배리 본즈의 2001~2004 시즌과 함께 투타 통합 최고의 선수 시즌이다. 다만 본즈는 민낯이 드러난 이후 몰락하며 이 시즌이 진정한 현대 야구 최고의 시즌으로 남았다.[55]

1999년에 후반기 부상으로 29경기 등판에 그치는 걸 본 보스턴은 페드로의 등판을 철저하게 관리했지만, 또 다시 29경기 선발에 그쳤고 2001년에는 부상으로 시즌 중 절반을 날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미친 시즌을 남겼다는 점에서 모든 야구인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4.4. 2001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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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3번째 첫 6경기에서 65+삼진을 잡은 투수
2001년에는 전 시즌의 기세를 이어가며 7승 3패 ERA 2.39 163K 0.934WHIP를 기록했다. 이 시즌에는 후반기에 13이닝만 던지는 바람에 총 116.2 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했지만 bWAR 5.1, fWAR 5.5로 AL 투수 중 각각 6위, 5위를 했다.[bWAR] 그리고 탈삼진은 238.2이닝을 먹은 프레디 가르시아와 공동 9위를 찍었다. 또 양키스를 상대로는 6경기에 나와 38이닝 10실점 53K 2.37ERA를 기록하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 시즌 데릭 지터를 17타석 상대해서 무피안타 .063OPS로 완전히 학살해버렸다.

2001시즌은 전체적으로 2021년 제이콥 디그롬과 비슷한 시즌이라는 평을 받는다.[56]

4.5. 2002년[편집]


2002년 20승 4패 ERA2.26 239K 0.923WHIP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네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하는 듯했으나 데릭 로우와 표가 나눠진 데다 적은 이닝(199.1)을 기록하는 바람에[57] 배리 지토에 밀려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하면서 승률, 탈삼진, ERA, WHIP, FIP, 피안타율, K/9, 등 갖은 지표에서 1위를 독식하고도 사이영상을 수상하지 못한 첫번째 선수가 됐다. 이 시즌에는 4~5월을 29.1이닝 14실점 11자책 ERA 3.38로 시작하고 7월에도 35이닝 3.34ERA를 찍는 등 전반기에 뭔가 2% 부족한 모습을 보였지만 후반기에는 1.61ERA를 찍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 선발로 전환한 데릭 로우가 219.2이닝 ERA 2.58라는 우수한 성적을 기록해줘서 외로운 에이스 신세에서 나름 벗어났다.
  • 한편 6월 14일 애틀랜타전에서는 1999년 이후 처음으로 타석에 섰다. 3타석 서서 2K를 퍼주며 3아웃. 투수로서 경기는 8이닝 2실점으로 패하고 말았다.

4.6. 2003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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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ALDS 5차전에서 보여준 시즌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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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는 14승 4패 ERA 2.22 ERA+ 211 FIP 2.21 206K WHIP 1.04 bWAR 8.0/fWAR 7.4를 기록하고 ERA, 승률, WHIP, K/9, H/9, FIP, fWAR 등 많은 지표에서 1위를 했지만 역시 이닝이 186.2로 적었고 사이영상 3위를 했다.[58] 탈삼진의 경우 40이닝을 더 뛴 에스테반 로아이자에게 1K 차이로 밀려 2위를 기록했다. 승수가 겨우 14승인 것은 억울한 면이 있는데 ND였던 11경기의 성적이 66이닝 1.76ERA였다.[59] 이는 불운의 대명사 취급받는 2018년 디그롬의 13경기 1.62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9월 21일 클리블랜드 전에서 7이닝 0실점으로 7이닝 2실점의 클리프 리를 제압하고 승리했다. 4월 22일 텍사스 원정에서 박찬호와 붙었는데 6볼넷을[60] 내주면서도 7이닝 1실점으로 승리했다.[61]
  • 6월 11일 세인트루이스전에서는 1회에 구속 65마일과 95마일이 찍혔다.

팀은 1999년 이후 처음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고 페드로는 4경기에 나와 28.1이닝, 29피안타, 15실점, 23K, ERA 4.19를 기록하는 1999시즌에 비해 심하게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특히 ALCS 7차전에서 7이닝 동안 2실점만 허용하고 8K를 잡으면서 3이닝 4실점 1K의 로저 클레멘스를 강판시키고 8회를 5:2로 앞서는 상황에서 시작했지만, 제구와 구위가 급격히 흔들리며 동점을 허용하고 교체됐다. 결국 팀은 패했고, 이 사태에 페드로는 "더 던지겠다고 한 것도, 경기를 망친 것도 나다"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지만 리틀 감독이 해임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성적들과 비교해 보면 1997년 시작된 페드로의 역대급 전성기는 이때에 종료된다. 대부분의 지표들이 이때가 마지막 1위였고 ERA+ 200을 넘긴 것도 이때가 마지막이었다.[62] 냉정하게 보면 1999년부터 문제가 생긴 몸으로 2000년을 보내고 2001년에 부상으로 시즌 절반을 날렸을 때, 페드로의 절정기는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다만 너무나 높은 위치에 있었기에 좀 내려와도 티가 안 나는 것이었다.

4.7. 2004년과 그 이후[편집]


어찌됐던 간에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던 외계인이었지만 그의 몸에 비해서 과도한 무리를 했던 것이 결국 구위 하락과 잔부상으로 이어졌고, 2004년에는 bWAR이 5.5 fWAR이 4.9로 급락하면서 217이닝 16승 9패 ERA 3.90 61BB/227K의 부진한 성적을 거둔다. 사이 영 상 4위를 하고 대부분의 지표들이 10위 안에서도 상위권이었지만 그 어떤 지표에서도 1위를 하지는 못했다. 3.90의 ERA가 충격적이지만 당시 AL 9위였고 11명의 선수만 3점대 이하의 ERA를 기록했다. 10년 후인 2014년에는 30명의 선수가 3점대 이하를 기록했다.16승9패에 3점대 평자가 부진한거라니[63] 또 타자로서 역대 최고의 시즌이라고 평가되는 2004년 본즈를 3타석 상대하여 0볼넷 1삼진 타/출/장 0/0/0으로 잡아내는 위엄을 보여주기도 했다.[64] 클리블랜드와의 5월 6일 경기에서 CC 사바시아에게 7이닝 8K 2실점으로 승리하고 5월 11일에도 CC 사바시아에게서 7이닝 11K 2실점으로 승리했다. 8월 1일에는 이 시즌 사이 영 상 수상자인 요한 산타나와 대결해서 7이닝 2실점 1BB/11K로 8이닝 3실점 1BB/12K의 산타나를 상대로 승리 요건을 잡아놓고 내려갔지만 ND로 끝났다.



포스트 시즌에서는 ALDS에서 에너하임 에인절스와의 2차전에서 7이닝 3실점 6K로 그럭저럭 호투하며 바톨로 콜론에게서 승리했다. ALCS에서는 2차전에서 6이닝 3실점으로 패하고[65] 5차전에서는 6이닝 4실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이겼다. 7차전에서 작년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불펜으로 나왔지만 1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보스턴 투수들 중[66] ALCS에서 가장 많은 이닝(13IP)을 소화했지만 실점(9실점)도 가장 많은 묘한 시리즈였다.[67]

월드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나와 7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맛본다. [68]

또 지난 시즌까지는 두발이 모자 밖으로 나오는 일 없이 단정했지만 이번 시즌부터는 상단 프로필 이미지의 스타일처럼 변했다.

그러나 이 시즌의 부진으로 2003년까지 175였던 통산 ERA+도 168로 내려왔고, 보스턴에서의 ERA+ 평균도 216에서 190으로 내려왔다.[69][70] 정규 시즌에서의 ERA야 AL 자체가 ERA가 높은 데다가 탈삼진이 많고 그 시대는 원래 ERA가 더 높은 시대였다고 이해하더라도 포스트시즌에서 예전의 압도적이던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하자 페드로도 더 이상 최강의 선수가 아님이 밝혀지고 말았다.[71]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성기에도 시즌마다 먹어주는 이닝이 비교적 적은 편인데,[72] 이는 경기당 이닝을 적게 먹어서가 아니라 잔부상을 많이 당해서였다.[73] 가장 많이 등판했던 경기수가 04년의 33경기였고, 보스턴 시절 평균 출장 횟수는 30회 정도였다. 메이저리그의 경기수가 162경기니까 5선발 시스템하에서 일반적인 1선발이 등판할 수 있는 경기 수는 대충 33경기 정도인 걸 감안하면 적은 횟수이다. 이 적지는 않지만 2% 부족한 이닝은 페드로가 대부분의 지표에서 1위를 하고도 사이영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것에 큰 원인이 됐다.[74]

잔부상이 많다는 단점과 점차 하락하는 구위를 보고 보삭스 GM 테오 엡스타인은 재계약을 제시하지 않았고, 결국 FA를 통해 뉴욕 메츠로 팀을 옮기게 된다. 이후 페드로의 대안으로 온 선수는 조시 베켓.[75]

이 당시 뉴욕 양키스의 보스 조지 스타인브레너브라이언 캐시먼 GM의 반대[76]를 무릅쓰고 페드로 마르티네스 영입전에 끼어들 것을 지시하여 굉장한 이슈를 낳았는데, 뉴욕 양키스 팬들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양키스를 적대시한 투수를 영입하려는 것은 자존심도 없는 짓"이라며로저 클레멘스는 잊었나 봐요? 페드로와 사인하지 말 것을 원했고, 뉴욕의 왕 데릭 지터 역시 양키스의 주적인 페드로가 레드삭스에 잔류하길 바란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페드로가 레드삭스 시절 보여준 양키스에 대한 적개심은, 뉴욕 양키스의 라이벌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아니라 페드로 마르티네스라는 말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본격 우주전쟁[77]

외계인은 밤비노(베이브 루스)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떠났다. 아, 물론 양키스와의 라이벌 관계는 해설위원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5. 뉴욕 메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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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경기 486.2이닝 32승 23패 4완투/1완봉
3.88ERA/109ERA+ 1.159WHIP 137BB/464K
3.69FIP 9.8fWAR/8.1bWAR

정든 보스턴을 뒤로 하고 페드로는 2005년 뉴욕 메츠로 이적하였다. 히스패닉이 많은 뉴욕 퀸즈 지역을 연고로 하는 메츠로서는 페드로를 통해 히스패닉 계통의 팬들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78] 다저스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마이크 피아자[79]와 동료로서 재회했다.

이적 첫해인 2005년에는 양키스와의 5월 22일 경기에서 7이닝 1실점, 6월 24일 경기에서는 8이닝 2실점 호투를 하는 등 시즌 15승 8패, ERA 2.82, 217이닝 208K, WHIP 0.95를 기록하며 커리어 마지막으로 WHIP와 K/BB에서 1위를 하는 등 그럭저럭 이름값에 맞게 활약을 했다. bWAR은 7.0으로 NL 3위, MLB 4위를 했다. 8월 9일 샌디에이고와의 경기에서 박찬호와 오랜만에 대결했는데 5이닝 5실점으로 패하고 말았다.[80]

그런데 점점 잔부상이 생기기 시작하며 부상자 명단에 자주 오르기 시작했다. 2006년 9승 8패에 마이크 피아자에게 3홈런을 주는 등 부진하며 4.48의 자책점을 기록한다. 이렇게 폭망하는 중에도 5월 20일 양키스와의 경기에서는 7이닝 0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페드로는 떨어진 명성을 되찾기 위해 이듬해 스프링캠프 부터 절치부심했으나 만회하지 못했다.

2007, 08년 두 시즌 다 부상때문에 풀타임을 소화하지 못했고, 그 2년동안 기록한 승수는 고작 8승에 머물렀다. 에이스급 투수를 생각하고 계약한 메츠였지만 첫해 빼고는 그다지 활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메츠 입장에서는 실패한 계약이었다. 한국의 대중과 언론들은 외계인 페드로가 드디어 지구인으로 귀화했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표현했다. 결국 냉정히 말하면 흑역사.

한편 2006년 6월 27일~29일 인터리그 시리즈에서 메츠의 보스턴의 펜웨이파크 원정이 잡혔는데, 27일에 첫 경기에서는 펜웨이 파크에서 경기에 앞서 페드로에 대한 특집 영상을 제작하여 방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28일의 등판에서는 3이닝 8실점(6자책)으로 무자비하게 털렸다(...) 그래도 공수교대 때마다 팬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고, 팬들이 환호하면서 다가가면 웃으면서 맞아주기도 했다. 당시 보스턴 팬들의 반응 페드로는 메이저리그 커리어에서 모든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딱 한 팀에게만 승리가 없는데, 바로 보스턴 레드삭스다.

그래도 메츠에서도 인터리그에서 자주 만나는 양키스를 상대로 4경기에서 27.2이닝을 투구하며 1승 1패 ERA 2.92의 좋은 성적을 찍어서 양키스 팬들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대성불패랜디 존슨 2루타 폭격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쿠옹이 기립박수를 받으며 교체될 때 페드로와 목례를 하는 모습을 알 것이다.

페드로의 누적 성적이 절대 부족하지 않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을 들게하는 원인이 동 기간대의 매덕스, 글래빈, 랜디 같은 존재들 때문인 것도 있는데, 2006년부터의 부진이 가장 크다. 페드로는 2005년까지 bWAR 84.2, fWAR 80.2를 기록했지만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고작 bWAR 1.9, fWAR 4.2를 기록했다. 사실상 2005년까지 14년만의 성적으로 평가받는 셈.


6. 필라델피아 필리스[편집]


시즌 오프 후 메츠는 부상 우려가 짙었고 결국은 실패한 계약이 된 페드로를 재계약하지 않았으며, 페드로는 졸지에 실직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09년 WBC에 도미니카 공화국 대표로 참가하여 건재를 과시했건만, MLB 팀들의 러브콜은 감감무소식, 시즌 중반까지 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기로에 몰렸지만 다행히 09년 7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년 계약에 성공하며 현역복귀의 꿈을 이룬다. 사람들은 부상으로 인해 떨어진 구속과 나이 때문에 복귀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노련미와 절묘한 코너웍으로 상대 타자를 농락하며 필리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일조한다.

9월 3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왔는데 무려 2008년 사이영상 수상자이자 2009년 사이영상을 수상할 팀 린스컴을 상대했다. 7이닝 1실점 0BB/9K를 찍으며 7이닝 2실점 1BB/11K의 린스컴을 상대로 승리를 따냈다. 당시 린스컴은 작은 체구와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하얀 페드로'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짦고 굵게 최고의 투수로 활약했는데 페드로는 린스컴을 보며 닮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고 젊은 시절의 자기보다 2배 더 낫다는 칭찬[81]을 했다. 인터뷰어가 진짜 2배 낫냐고 물으니 자기는 7년 차까지 사이영상을 못 받았는데 린스컴이 두 번째 시즌이자 첫 풀타임 시즌 만에 벌써 사이영상을 받았음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사이영상을 언제 처음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했다.[82]


2009년 기록은 9게임 출장, 5승 1패 자책점 3.63. 포스트시즌에서도 역투했으나 팀을 우승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NLCS 2차전에서 7이닝 무실점이라는 10년 전의 ALCS가 생각나는 완벽한 투구를 했지만, 박찬호의 블론 세이브로 팀은 1:2로 패배하고 만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클리프 리에 이어 월드시리즈 2선발로서 2차전에서 데릭 지터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4K를 뽑아내며 6이닝 2실점 8K로 호투했으나 하락세를 타던 마쓰이 히데키에게 홈런을 맞더니 구원등판한 박찬호분식회계를 하며 6이닝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6차전에도[83] 나왔지만 4이닝 4실점으로 패배를 막진 못했다. 특히 양키 스타디움에서 마쓰이 히데키에게 2회초 선제 투런을 맞은 것이 컸다.[84] 페드로가 뛰는 내내 경기장이 Who's Your Daddy!로 시끌벅쩍했었다. 두 팀뿐만 아니라 언론들도 악의 제국 시절의 양키스를 계속해서 찍어누르며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페드로가 37세가 돼서도 또 양키스와 대결한다는 것에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2차전에서 페드로는 강판되면서 쓴웃음을 짓는데, 당시 양키 팬들의 야유는 엄청난 위압감을 자랑한다. 보스턴 팬 중에서는 45번 저지를 입고 페드로를 응원하러 간 용자도 있었다고. 이때 페드로를 구원하러 등판한 투수가 다름아닌 박찬호.

전성기 시절 커리어 조정 ERA 170이 넘었던 것에 비하면 메츠 시절 이후의 부진으로 154까지 내려간 상태이다. 다만 이 기록으로도 2위는 하고 있다.[85]

[1] 몇 년 후 페드로의 충격적인 전성기를 생각한다면 트레이드가 삽질이었겠지만, 괴물같던 전성기에도 잔부상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판단 자체는 옳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저스는 메이저리그 구단들 중에서도 유망주의 신체조건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단 중 하나다.[2] 이 신체 조건 차이 때문에 유망주 시절에는 라몬의 평가가 훨씬 더 좋았다. 라몬은 페드로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더라도 어깨 부상 이전에는 리그 최고의 선발투수 중 하나였지만, 너무 이른 부상으로 인해 멸망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부상이 늦게 온 페드로가 훨씬 대성했다.[3] 참고로 적 팀 패전 투수는 그렉 매덕스의 형인 마이크 매덕스였다.[4] 93년 다저스의 주전 2루수였던 조디 리드는 시즌을 마치고 밀워키 브루어스에 FA로 입단했기 때문에 다저스는 2루수가 공석이었다.[5] 추신수와 함께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뛰던 딜라이노 드실즈의 아버지.[6] 결과적으로 드쉴즈는 다저스에서 타율 .240-출루율 .350-도루 30개 내외의 평범한 선수가 되버리면서 다저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결국 1997년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FA 이적을 했다. 그리고 다저스는 블라디미르 게레로의 형이자 1997년에 신인이었던 윌튼 게레로가 신인왕 페이스였다가 코르크 배트 사건으로 나락에 떨어지고, 후반기에 에릭 영 시니어의 영입으로 그간의 문제를 해결했다.[7] 당시 라소다는 단장이 아니라 감독이었지만, 당시는 지금보다 감독의 영향이 막강했던 시대였다. 감독의 영향이 줄어들었던 때는 머니볼의 성공 이후 세이버매트릭스에서 감독의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이다. 라소다가 깊게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저런 말을 한 것이다. 다만 라소다는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다저스의 부사장을 역임할 만큼 프론트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므로 다른 감독들과는 팀에 공헌한 역할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8] KBO 리그에서 이와 비견될 만한 트레이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2011년 7월 31일 박병호송신영의 맞트레이드.[9] 실제로 페드로 역시 체구가 작지만 전성기 시절 무리한 이닝이팅을 해서 롱런에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페드로의 우려대로 2022년 현재 커쇼는 2년 연속 120~130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등 정말로 문제가 생긴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다.[10] 당시 클로드 브로쉬 구단대표와 댄 두켓 단장이 중심이 된 '팀 재건 3년 계획'의 마지막 실행 시즌인 1994 시즌을 앞둔 상황이었다.[11] 페드로는 결국 레드삭스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보긴 했지만, 그 이전까지 엑스포스의 1994년 시즌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2004 월드시리즈 우승 인터뷰 때 '이제는 (엑스포스가 워싱턴 DC로 연고지 이전을 하여) 몬트리올에서 메이저리그 경기가 열리지 않지만,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와 벅차오르는 마음을 몬트리올에 전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12] 아쉽게도 로저 클레멘스는 7월 1일 경기에 나왔다.[13] 참고로 페드로의 1997년은 엑스포스/내셔널스 프랜차이즈에서 유일한 규정이닝 1점대 ERA 기록이기도 하다. 이후 이 기록을 깰 후보로 스티븐 스트라스버그가 지목되었으나 그동안 1선발로는 활약하다 2019년에 200이닝을 돌파하고 2020년부터 드러누웠으며, 또 다른 후보로 맥스 슈어저가 지목되었으나 아쉽게도 1점대 ERA는 실패했다.[14] 2위는 랜디 존슨의 54.5이다. 임팩트의 상징은 페드로지만 의외로 랜디 존슨과 차이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랜디옹은 페드로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 임팩트에 더해서 페드로가 99년 이후 항상 한 두번씩 등판을 걸러가며 딱 30경기 언저리를 뛸 때에 부상 하나 없이 풀타임 선발로서 240-260이닝을 일상적으로 던져대는 미친 체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15] 1위는 배리 본즈 63.7이다. 물론 배리 본즈는 약쟁이이므로 말살된 기록이라 의미 없다.[16] 물론 대부분의 기록들은 맥스 슈어저가 가지고 있지만, 페드로가 1위인 기록들 역시 다수 있다.[17] 참고로 MLB 역사상 모든 투수들을 합해도 ERA+ 190이 넘어간 "'시즌"'은 단 67번 뿐이다. 7시즌 통산 ERA+ 190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기록인지 감이 올 것이다.[18] 지금에야 연봉 천 만 달러 투수가 드물지 않지만 97년도 당시엔 초대형 계약이었다. 이 계약으로 이 전까지 MLB 연봉 1위였던 알버트 벨을 밀어내고 새로운 연봉 1위 선수로 등극한다.[19] 보통 사이 영, 로저 클레멘스와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는다. 다만 사이 영은 고대 투수고 클레멘스는 약쟁이인 데다가 양키스 경력이 있기에 보통 최근의 보스턴 팬들은 최고의 보스턴 투수를 꼽을 때 페드로를 꼽는다.[20] 많은 이들이 레드삭스가 하향세인 클레멘스를 버리고 페드로를 샀다고 하지만, 실제 이 두 선수의 사이엔 97년 한 해 동안 댄 듀켓 단장이 나쁜 놈으로 불리던 시기가 존재한다. 이 당시 클레멘스가 토론토에 가서 화려한 부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21] 이때 인디언스의 마무리 투수 마이클 잭슨은 2~4경기에서 3연속 세이브를 거뒀다.[22] 랜디 존슨이 탈삼진을 무려 364개(...)나 잡는 바람에 메이저리그 트리플 크라운은 달성하지 못했다. 2002년에는 랜디 존슨이 24승 5패, 334K, ERA 2.32를 기록하면서 네셔널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는데 메이저리그 트리플 크라운은 페드로가 ERA 2.26을 달성했기 때문에 실패. 재밌게도 서로간에 메이저리그 트리플 크라운 달성을 한번씩 방해한 셈이 되었다.[23] 리그 평균 투수를 100으로 환산했을 때의 상대 점수. 보통 시대와 구장이 다른 투수들을 비교할 때 자주 사용한다.[24]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이 시즌에 페드로는 리그의 보통 수준의 선발투수보다 3배 정도 잘 던진 것이다.[25] 이 때는 데드볼 시대였으며, 레너드는 레드삭스 소속으로 MLB 역사상 가장 낮은 시즌 ERA 0.96를 찍었다. 페드로가 1.74를 찍고 291을 찍었다는 것에서 이 스테로이드 시대의 무지막지한 타고투저를 실감할 수 있다. 사실상 페드로의 2000년은 1968년 밥 깁슨의 ERA 1.12 ERA+ 258과 함께 투수 개인으로선 최고의 시즌이었다 할 수 있다. 2011년에 1880년 팀 키프(Tim Keefe)의 293 기록이 발견되어 페드로는 2위로 밀리게 되었다. 그런데 팀 키프가 데드볼 시대 당시 세운 기록에 해당 시즌에 키프가 채운 이닝이 겨우 105이닝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페드로가 1위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월터 존슨이 1913년에 346이닝동안 ERA+ 259를 기록한 것은 어떻게 해석할 터인가? 월터 존슨이 지금의 투수들과 비슷한 수준인 200~250이닝만 던지면서 컨디션을 조절했더라면? 팀 키프의 기록이 공식기록으로 인정받는 것은 그가 그 당시 규정이닝을 돌파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의 기록이 사실상 2위라는 둥 폄하받을 이유는 하등 없다. 그렇다고 해서 페드로의 기록 또한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팀 키프는 데드볼 시대에 가장 압도적인 시즌을 보낸 투수, 페드로는 라이브볼 시대에 가장 압도적인 시즌을 보낸 투수인 것이다.[26] 2008-09년의 아메리칸 리그의 ERA 평균은 각각 4.35, 4.45이었다. [27] 라이브볼 시대 2위 1984년 드와이트 구든이 1.69로 전체 14위이고, 3위인 2014년 커쇼가 1.81로 역대 24위이다.[28] 데드볼 시대까지 합치면 1위가 1908년 크리스티 매튜슨의 1.28, 2위가 1910년 월터 존슨의 1.37이다.[29] 사실 2.17 정도만 돼도 라이브볼 시대 30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기록이다.[30] 투타를 합쳐 역대 공동 14위. 1942년 테드 윌리엄스와 동일하다.[31] fWAR 기준 1942년 이후 투타를 합쳐 오직 페드로와 2001, 2002, 2004 배리 본즈만이 약을 빨면서 fWAR 11.6을 넘겼다. 2000년 이후 투수로는 랜디 존슨이 2001년 10.4를 기록한 것이 최고이다. 정리하자면 현대 야구 최고의 청정 선수 시즌으로 평가받아도 무방하다.[32] 한편 2022년의 애런 저지가 페드로의 fWAR을 넘길 수 있을지 주목받았고, 게다가 팀도 페드로의 라이벌 뉴욕 양키스 소속인지라 더욱 주목받았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경기를 결장하며 트리플 크라운과 fWAR 11.5로 페드로의 그것에 0.1 차이로 뒤지고 말았다. 그래도 62홈런을 치는 등 시즌 자체는 역사적인 시즌이긴 하다.[33] 2020년 기준 단 3명만 달성했다.[34] 라이언은 이 중 3경기가 연장 경기였다.[35] 당시 타순대로 시즌 최종성적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라킨 .293 .390 .420 12HR 75RBI 30SB, 워커 .379 .458 .710 37HR 115RBI, 소사 .288 .367 .635 63HR 141RBI, 맥과이어 .278 .424 .697 65HR 147RBI.[36] 이 경기는 데릭 로우가 4이닝 3실점으로 무너지면서 졌다.[37] 클레멘스는 2이닝 동안 첫 투구가 3루타로 뜨고 1루수의 실책도 겹쳐 아웃이 안타가 되는 등 6안타 5실점으로 부진하며 강판당했다.[38] 당시 투표를 돌아볼 때, 이반 로드리게스의 퍼포먼스가 워낙 강렬한 임팩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MVP를 따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포수로서 20-20은 워낙 전대미문의 대사건임에 분명하고 부상만 없었다면 30-30까지 노려볼 기세였다는 점, 포수로서 140경기 이상 출전했다는 점에서 MVP로서 손색이 없는 위대한 업적이지만, 사람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왜 하필이면(…) 페드로를 제쳤나고. MVP 1위표는 페드로가 제일 많이 받았지만 뉴욕의 조지 킹 같은 사람들이 "투수는 MVP를 타선 안 된다"는 논리로 아예 표 자체를 안 주는 바람에 졌다. 근데 조지 킹 같은 경우 데이빗 웰스 같은 투수들에게는 정작 MVP 표를 던진 사람이라 이중잣대로 말이 많다. 혹시 인종차별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고, 페드로 역시도 한 인터뷰에서 MLB에 만연한 인종차별적 인식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이후 저스틴 벌랜더클레이튼 커쇼가 페드로에 상당히 못 미치는 성적으로도 MVP를 수상한 걸 보면 그런 의심을 품을 만하다.[39] 1999년 포스트 시즌 3경기 포함[40] 특유의 써클 체인지업. 삼진당하는 타자는 당대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었던 프랭크 토마스이다.[41] 9월 3일 시애틀전에서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4타석 무안타 3K/0BB를 먹였다.[42] AL 2위였던 로저 클레멘스의 기록이 3.70이었는데 MLB 전체에서는 13위였고 2위 ~ 12위가 NL 투수들이었다. 1위와 2위가 평균자책이 두배가 넘게 차이가 났다. 여담으로 박찬호는 이때 MLB 평균자책점 8위ㆍ탈삼진 3위를 기록했다.[43] 심지어 불펜투수의 기록을 합쳐도 롭 넨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페드로보다 ERA가 낮은 투수가 없었다.(50이닝 이상 기준). 게다가 ERA+(조정방어율)는 페드로가 더 높았다! 이 시즌 롭 넨은 68경기 66이닝을 던졌고, 페드로는 29경기 217이닝을 던졌다. 평균 7이닝 이상을 던진 선발투수가 당대 최고의 불펜투수보다 높은 ERA+를 기록했다는 건 단순히 '엄청나다'다는 말 따위로 표현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야구의 상식 자체를 깨버리는 수준의 기록이다. 참고로 MLB 2위였던 랜디 존슨이 181.[44] 내셔널리그에서 2년 연속 만장일치 사이영상을 탔던 샌디 코팩스와 94, 95년의 그렉 매덕스에 이어 메이저리그 사상 3번째. 그러나 이 해에도 MVP는 1~4위 제이슨 지암비, 프랭크 토마스, 알렉스 로드리게스, 카를로스 델가도에 이어 5위에 머물고 만다. [45] 탈삼진ㆍK/9ㆍHR/9ㆍ승률ㆍBB/9는 2위이다.[46] 이 기록은 2020년 단축시즌 버프를 먹은 트레버 바우어가 가져갔다.[47]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fWAR로는 9.5로 투타 2위고 bWAR로도 10.4 2위이다.[48] 자책점별 기록은 0자책 10경기 10승(4완봉), 1자책 7경기 4승 2패, 2자책 5경기 3승 1패, 3자책 5경기 1승 3패이고 4자책 1경기ㆍ6자책 1경기는 승패가 없었다.[49] 규정 이닝을 소화한 37명의 투수 중 37위.[50] 규정 이닝을 소화한 89명의 투수 중 89위.[51] 2010년 AL은 3점대 이하만 24명이었다.[52] 원래 타자용 스탯인 RE:24를 투수 입장에서 막아낸 실점/득점이 기대되는 상황에서 막아낸 실점 같은 개념으로 적용하는 스탯. 탈삼진처럼 누적되는 스탯.[53] 17K/1BB 1실점 완투패-15K/0BB 완봉승.[54] 현역 최고의 탈삼진 투수 맥스 슈어저의 통산 15K 경기가 6번이고, 벌랜더/디그롬은 1번씩밖에 기록해보지 못했다.[55] 실제로 2022년 애런 저지가 WAR 11을 기록하기 전까지는 페드로의 WAR 11에 도달한 청정 선수는 23년 동안이나 전무했다.[bWAR] 5를 넘긴 역대 시즌 중 가장 적은 이닝으로 넘긴 기록이다. 이 기록을 2021년 디그롬이 달성할 했다.[56] 디그롬은 평균자책점이 1.0이고, 페드로는 평자점이 2.3인데 왜 WAR이 비슷하냐면 디그롬이 뛰던 2021년은 완전한 투고타저였고 페드로의 2001년은 타고투저였기 때문이다.[57] 사실 만장일치 사이 영 상을 탄 99-00 페드로도 당대 에이스들에 비하면 적은 편인 210이닝대에 그쳤음을 감안하면 단순히 이닝이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200이닝이 채 못 되는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20승에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만장일치 사이 영 상에 MVP까지 석권한 2014년 커쇼의 유일한 약점으로 지적된 것이 바로 198.1이닝으로 200이닝에 근소하게 못 미치는 이닝수였는데, 하물며 이 때는 2002년이다. 세이버메트릭스는 커녕 투승타타가 지배하던 시기인 것이다.[58] 사이영상은 266이닝 22승 3.25의 로이 할러데이가 받았는데 할러데이의 bWAR은 8.1/fWAR은 7이었다.[59] 대표적으로 이 시즌, 첫 2경기를 각각 7이닝 1실점 8이닝 1실점으로 해줬는데 팀이 2번 다 졌고 ND였다.[60] 페드로의 1경기 최다 볼넷은 7볼넷이다.[61] 박찬호는 7이닝 4실점.[62] 볼삼비와 WHIP는 2005년에 1위를 한번 했다.[63] 외계인의 시점에서 부진하다는 거지 일반적인 투수가 저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으면 준수한 성적이다. 2004년도 MLB 역사에서는 타고투저의 시대였다보니 조정 ERA도 124로 준수했다. 참고로 당시엔 요한 산타나가 만장일치 사이영상을 받았고, 경쟁자들 역시 커트 실링, 마리아노 리베라, 조 네이선, K-ROD였던 마당이라 페드로도 사이영 표를 하나 받기도 했다.[64] 이때 본즈는 본즈답지 않게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65] 이 게임은 졌지만 구위와 구속, 제구가 꽤 좋았다.[66] 양키스의 존 리버는 14.1이닝.[67] 그래도 보스턴 선발들 중에서 ERA는 두 번째로 낮았고(6.23) 이닝도 가장 많았으니 그럭저럭 했다고 할 수 있다. 실링은 6.30.[68] 이 경기에 3타석 들어서서 1BB/2K라는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첫 타석은 가만히 있다가 삼진, 두번째는 휘두르다 삼진, 세번째는 볼넷. 출루를 하자 자기도 놀랐으며 1루의 푸홀스와 웃으며 얘기를 했다.[69] 이 외에도 당시 대부분의 지표에서 현역 1위였지만 메츠로 가면서 다 놓쳐버렸다.[70] 참고로 MLB 역사상 모든 투수들을 합해도 ERA+ 190이 넘어간 "'시즌"'은 단 67번 뿐이다. 7시즌 통산 ERA+ 190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기록인지 감이 올 것이다.[71] 여전히 우수한 선수이긴 했지만 97년 각성한 후로는 사실상 최악인 ERA+124를 찍었다.[72] 옆동네에서 본좌놀이하던 랜디 존슨과 비교되는 점. 랜디는 디백스에서 리그를 지배하던 4년 동안 1,030이닝, 1년에 평균적으로 250이닝 정도를 소화했다.[73] 오죽하면 8이닝 3실점 패배를 기록했을 때 시즌 최악의 피칭이라 혹평을 당했을까...[74] 물론 세이버매트릭스가 대중화되지 않은 구시대적 관점이 지배하던 시기였던 점도 있다. 이후의 슈퍼에이스들은 200이닝을 채우지 못해도 MVP를 기록한 적도 있고, 180이닝만으로 손쉽게 사이 영 상을 타곤 했다.[75] 보스턴은 과거 로저 클레멘스를 토론토로 보낸 후 1년간 욕을 바가지로 먹고 페드로를 영입했다. 테오 엡스타인이 단장이 된 이후 2004년 저주를 깨는데 성공하지만 페드로의 하향세와 함께 부진했던 데릭 로우 모두와 재계약을 포기했고, 그들 대신 영입한 선수가 데이빗 웰스와 맷 클레멘트, 웨이드 밀러인데 이들은 망했고, 팬들에게 잠시 비난받다가 단장직을 때려치기까지 한다. 그렇게 테오가 때려쳤다가 복귀하기까지의 공백기간에 이 트레이드가 단행되었는데, 이 트레이드로 핸리 라미레즈아니발 산체스가 말린스로 갔다. 물론 지금은 로웰과 베켓의 활약으로 07년 또다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여 우승과 유망주를 맞바꿨다는 추억으로 남았지만, 유격수 포지션이 보스턴에게 고질적인 약점이 된 것은 물론 베켓의 포스는 과거 로켓과 외계인 두 위대한 에이스에 미치지 못하는 점은 영 안타깝다. 다행히 베켓이 2011년 제대로 각성했고 팜에서는 존 레스터클레이 벅홀츠도 자라나긴 했다만.[76] 이제 곧 몸이 망가질 것이라 오래 못 간다는 것으로, 이는 안타깝게도 당시에 야구계의 주류 의견이었으며 (이후 서술하지만) 실제로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레드삭스가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페드로를 포기했던 것이며, 메츠의 오마 미나야 GM이 어메이징한 욕을 듣는 것이다.[77] 페드로와 싸우고 있는 사람은 당시 양키스 코치 '뽀빠이' 돈 짐머. 싸움의 발단은 2003년 ALCS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카림 가르시아에게, 로저 클레멘스매니 라미레즈에게 빈볼을 던진 것. 이 후에 인터뷰에서 페드로가 'Who is Karim Garcia?'라고 말해서 굴욕을 줬다.(이 글 맨 밑에 전문이 나와있다.) 참고로 당시 돈 짐머의 나이는 72세. 탬파베이 레이스 고문으로 재직중이던 2014년 4월경 심장수술을 받았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며 6월 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78] 덤으로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해체되며 메츠의 단장으로 영전한 오마 미나야도 히스패닉이라, 메츠에서의 첫 FA 영입인 페드로와 카를로스 벨트란을 필두로 재임기간동안 카를로스 델가도, 모이세스 알루, 요한 산타나등 빅네임에서 훌리오 프랑코, 올랜도 에르난데스 등 땜빵성 영입에 이르기까지 히스패닉계 선수들을 꽤나 많이 영입했다.[79] 당시 둘의 신경전을 정리한 영상. 피아자는 다저스 시절 페드로의 형 라몬 마르티네즈와 불화도 있었고, 다저스와 재계약 문제로 대립할 때 페드로 규모의 계약을 요구하며 페드로의 신경을 긁었으며, 타자로서도 페드로를 매우 잘 공략해냈다. 헤드헌팅으로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았던 페드로도 몇 차례 피아자를 맞췄고... 그래도 메츠에서는 동료로서 딱히 불화를 일으키지는 않았다.[80] 박찬호는 5.2이닝 2실점 승.[81] 이 말은 페드로가 마음에 드는 투수들을 칭찬할 때 자주 써먹는다. 워커 뷸러의 경우도 그랬다. 물론 둘 다 젊은 시절의 페드로의 성적에는 압도적으로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을 기록했다.[82] 사실 페드로는 6년 차인 1997년에 NL 사이영상을 받았다. 7년 차면 1998년으로 보스턴에서의 첫 시즌인데 그 시즌엔 사이영상을 못 받았다.[83] 두 경기 모두 양키 스타디움 게임이었다. 양키스 팬들은 페드로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로 흥분상태였고 폭스 스포츠의 중계진은 1999년ㆍ2003년ㆍ2004년 ALCS를 중계했던 조 벅 사단이어서 페드로를 칭찬하며 격려하는 말을 많이했다.[84] 이는 지난 2차전에 이어 페드로 상대 연타석 홈런 기록이었는데, 페드로 선수 생활 내내 단 한 번도 특정 타자에게 3연타석 홈런을 맞은 적이 없어 그 다음 타석에서 히데키가 그 첫 번째를 노릴 수 있었으나 실패. 그래도 시리즈 내내 잘했던 히데키는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된다.[85] 1위는 클레이튼 커쇼이며 현재 2022년까지 통산 조정 ERA 157을 기록하고있다. 아직 현역이라 커쇼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이 순위가 바뀔 수도 있지만 최근 폼만으로 보았을때 잘하면 은퇴할 때까지 1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커쇼의 포스가 페드로에 못 미친다는 인식을 깨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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