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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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하려는 것이다.
1960년 5월 3일, 과도내각 출범 후 발표한 5개 시정방침 中[7]
현 과도정부는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으로 물러나간 과거의 전제정권을 붕괴함에 있어서 강압과 폭력으로 만들어진 모든 법률을 폐기하고 불법적인 일체의 행위를 막는 혁명적 정치개혁을 민주적인 방법으로 단행하려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을 지낸 정치인.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으로서 헌정사 최초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후 3차 개헌을 통해 헌법 부칙에 따라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최초의 의원내각제 하 행정수반 국무총리가 되었다. 제4대 대선과 제5대 총선으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정식 취임할 때까지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으로서 과도내각을 이끌며 혼란 수습에 주력하였다.
2. 약력[편집]
- 189?. 서당 입학
- 1901. 양국서당[8] 입학
- 1904. 초량사립보통학교[9] 입학
- 1910. 초량사립보통학교 졸업
- 1910. 보성중학교 입학
- 1912. 보성중학교 졸업
- 1912.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과 입학
- 191?.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과 졸업
- 1917. 보성법률상업학교 법률과 입학
- 191?. 중국 상하이 우쑹 상선학교 수학
- 191?. 중국 난징 항해대학 수학
- 1918. 영국 런던 항해대학교 수학
- 1919.4.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원
- 1919.4. 임시의정원 의원
- 1920. 프랑스 거주 한국인 거류민 회장
- 1920. 미국 뉴욕 한인유학생회 회장
- 1922. 북미 거주 한국인 교민단 총단장
- 1923.6. 《3.1 신보》 사장
- 1932. 《태평양잡지》 발행책임자
- 1945.9.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
- 1945.9. 한국민주당 창당발기인
- 1945.11. 독립촉성중앙회 회원
- 1945.12. 경기도 경성부윤 부정 고문관
- 1946.2.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 비서관
- 1946.6. 민족통일총본부 10인협의회 위원
- 1948.5. 제헌 국회의원 선거 후보 (한국민주당, 부산부 을)
- 1948.5. 한국민주당 경상남도지구당 선거 총책임자
- 1948.5. 제헌 국회의원 (초선)
- 1948.5.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 1948.7. 초대 총무처장
- 1948.10. 제2대 교통부 장관
- 1948.10. 한국민주당 고문
- 1949.2. 민주국민당 고문
- 1949.3. 고려역도구락부 고문
- 1950.1. 학생정구연맹 고문
- 1950.11. 제3대 사회부 장관
- 1951.11. 국무총리 서리 겸직
- 1952.4. 제2대 무임소장관[10]
- 1954.5. 제3대 민의원 선거 후보 (무소속, 부산시 을, 낙선)
- 1957.12. 제8대 서울특별시장
- 1958. 한국YMCA재건위원회 위원장
- 1959. 제4차 한·일 회담 수석대표
- 1960. 한국YMCA 회장
- 1960.4. 제5대 외무부장관
- 1960.4. 수석국무위원 겸직
- 1960.4.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제1공화국)[11]
- 1960.6. 제6대 국무총리 (내각제 총리, 내각수반 - 허정 내각)
- 1960.6.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제2공화국)[12]
- 1960.8. 제4대 대통령 선거 후보 (간선, 무소속, 낙선)
- 1963.3. 신정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
- 1963.8. 국민의당 창당발기인
- 1963.10.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 (직선, 국민의당, 후보 사퇴)
- 1963.10. 국민의당 대표최고위원
- 1965.6. 민중당 최고위원
- 1966. 민중당 고문
- 1966.12. 야당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을 위한 위원회 추진위원
- 1969. 국토통일원 고문
- 1979.12. 국정자문회의 의원[13]
- 1981.4. 국정자문회의 의원 (재선)[14]
- 1988. 청조근정훈장 수훈
3. 생애[편집]
3.1. 초년기 ~ 해방 이전[편집]
1896년 동래부 초량에서 출생하였으며 선교사의 영향으로 개신교도로 자라났다. 이동휘의 강연을 듣고 상경 후 보성중학교,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과를 거쳐 보성법률상업학교 법률과를 졸업하였다.[15]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프랑스로 유학갔다가 다시 미국 뉴욕으로 갔고 뉴욕한인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미국에서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활동을 도왔고 1923년 3.1 운동의 이름을 따 창간된 교포 신문 《삼일신보》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2년 귀국하여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3.2. 광복 이후 ~ 제1공화국[편집]
1945년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이승만 정부에서 교통부장관, 사회부장관, 6.25 전시 국무총리 서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952년까지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이후 재입각하지 않고[16][17] 정계에서 물러나 있다가 긴 휴식기 끝에 1957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18] 서울시장직이었기에 제헌 의원과 이승만 정부에서 장관 3번, 국무총리 서리 등 고위직을 지냈던 허정이 임명되자 거물시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서울시장 재임 중의 에피소드로, 야당 의원이 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오자 "깡패 같은 놈!"이라고 불같이 호통을 치면서 수위들을 불러 시청 밖으로 패대기쳐 쫓아낸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59년 5월 필라델피아 시장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 시카고 등 여러 도시들을 시찰하였다. 미국 방문 후 한국으로 귀국한 다음 날인 6월 12일 갑작스럽게 경질되었는데 이 배경에 서울시장으로서 자유당에 협조하지 않아 친야당 성향이라는 자유당 강경파의 공격이 있었다는 관측이 있다.#
1959년 8월 10일 한일회담 수석 대표로 임명되었는데 이 시기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 문제로 한일관계가 경색된 터라 회담의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3.3. 4.19 혁명과 허정 과도내각[편집]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의해 촉발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들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모두 사표를 제출하자 허정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무위원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받았다. 22일과 23일 이승만과의 만남에서 허정은 자유당에서 손을 떼고 부정 선거 책임자를 처벌하며 공무원과 경찰을 중립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각료직은 맡지 못하겠다고 거절했으나 결국 4월 25일 내무부장관에 이호, 법무부장관에 권승렬과 함께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27일 사임서를 대한민국 국회에 전달했다.
허정은 곽상훈 민의원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승만의 사임과 함께 자신도 사직하겠다고 하였으나 정부가 공백 상태에 빠진다고 만류하여 자리에 남았다. 허정은 대한민국 대통령과 대한민국 부통령의 부재라는 중대한 권력 공백 상황에서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의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여 과도내각의 수반으로서 혼란 수습에 주력하였다. 이른바 '허정 과도내각' 혹은 '허정 과도정부'다.
이를 위해 4월 29일 6명의 장관을 새로 임명하여 내각 공백을 일부 메웠고 5월 3일 과도내각 5대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혁명적 정치 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한다"는 허정 과도 정부를 대표하게 되는 유명한 표어가 등장하였다. 이 시정방침에서 반공주의의 재천명, 강압과 폭력으로 제정된 법률의 철폐, 우방국과의 우호 강화 등 혼란 수습을 위한 여러 방침들을 발표했는데 추후 혼란을 다시 불러오게 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바로 '부정선거 처리에 있어 처벌의 대상은 부정을 지시한 고위 책임자와 국민에게 학살 행위를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 때문에 추후 허정 과도내각은 부정 선거사범 처벌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수의 선거사범들조차 사법부로부터 국민 기대 이하의 가벼운 처벌을 선고받았고, 분노해 일어난 시위대에 의해 국회 회의장이 점령당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이는 군사 쿠데타의 빌미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허정 내각은 시정방침대로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여 불과 과도 내각 3개월 만에 헌법 개정 및 정권 이양에는 성공했다는 평가받는다.
3.4. 국무총리 취임 ~ 말년[편집]
1960년 6월 15일 3차 개헌으로 수석국무위원 신분이었던 허정은 헌법 부칙에 따라 국무총리에 자동으로 취임했다. 이 개헌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면하게 되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돌고 돌아서 제5대 국회의원 선거로 국회가 구성되기 전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을 다시 맡게 되었다. 이 때의 지위는 대통령 권한대행+국무총리+외무부장관+한일회담 수석대표.# 1961년 5.16 군사정변과 뒤이은 군정에 반대하여 1963년 국민의당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하여 정치 일선에 복귀하였으나 곧 물러났다가 1969~1984년까지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고문도 지냈고, 1980년 국정자문위원이 되었으며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82년 청와대의 홀에 약 20명의 원로가 모여 앉아 서로 잡담을 하고 있는데 의전실장이 대통령께서 나오시니 "모두 앞으로 나와서 줄을 지어 서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허정은 벼락같은 소리를 냈다 한다. "무엇이 어째? 줄을 서라고? 내가 이럴 줄 알고 안 나오려고 했다!"하고 외치자 모두가 어리둥절하여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Y씨[19]
가 "대통령께서 나오시는데 줄을 지어 서야 할 것 아니오?"라고 하자 허정은 더 큰 소리를 질렀다. "당신 혼자나 나가서 서시오!" 이렇게 되니 누구 한 사람 나가서 서려고 하지 않았다. 비서들이 몇번씩 들락거리고 나서야 전두환 대통령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원로들이 앉은 자리에서 모두 일어섰고 대통령이 창가로 돌아다니면서 위촉장을 한 사람씩 전달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위촉식이었으며 나는 근래에 이런 기골[20] 있는 인물을 처음 보았다.
류달영, 회고 "나의 인생 노트"
198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청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1988년 9월 18일에 92세로 사망하여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묻혔다. 저서에 자서전 《내일을 위한 증언》이 있다.
4. 선거 이력[편집]
5. 기타[편집]
- 허정 총리는 헌정사상 대통령제 하 국가원수로서의 지위, 의원내각제 하 상징적 국가원수로서의 지위, 대통령제 하 내각수반[25] 으로서의 지위, 의원내각제 하 정부수반의 지위를 모두 거쳐본 유일한 인물이다.
- 대통령제 하 내각수반으로서의 지위: 국무총리 서리 겸 사회부장관으로서 1번,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으로서 1번
- 대통령제 하 국가원수로서의 지위: 첫 번째 대통령 권한대행 기간
- 의원내각제 하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 제6대 국무총리 재임기
- 의원내각제 하 상징적 국가원수로서의 지위: 두 번째 대통령 권한대행 기간
- 농촌 지역의 금융 기관, 농산품 유통 및 매매 관리를 전담하는 농협을 설립하는 데 기여한 중요 인물이다. 농협은 본래 1958년에 생긴 협동조합과 농업은행으로 서로 전혀 관계 없이 일을 처리하던 조직이었으나 1961년을 기점으로 2개의 조직이 통합 및 신설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허정 혼자만 한건 아니고 박정희 정부와 당시 민주당 계열의 합작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는 금융 부문과 농업 부문으로 다시 나뉘어 있다.
- 1974년 1월 4일 MBC <정치인 탐방>에선 MC인 임홍빈 경향신문 논설주간에게 규칙적이고 정확한 생활과 운동으로 정정한 모습을 유지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의 장수 비결이기도 했다. 그는 아침 5시에 기상, 운동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독서를 하고, 친구들과 교제를 하는 등 일상생활을 하고 밤 10시에 취침했다고 한다.
-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제6공화국까지 격동의 시기를 지나온 사람이었다. 굵직한 사건만 경술국치부터 8.15 광복, 4.19 혁명, 5.16 군사정변, 12.12 사태 등 여러 차례의 쿠데타 및 민주화와 죽기 전날 개최된 1988 서울 올림픽까지 지켜본 사람이었기에 '국로'(國老)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 허정은 역대 서울시장들 중에서는 고건과 더불어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서울시장, 장관까지 다 해본 단 둘뿐인 인물 중 하나이다. 심지어 고건조차 안 해본 대통령 후보와 당대표까지 했기 때문에 진짜로 대통령 빼고 어지간한 건 다 해본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5년 KBS 광복 40주년 대하드라마 <새벽>에서는 배우 김기진이 연기했다.
- 1994년 2월 20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서는 배우 박해상, 4월 10일자에서는 이종만이 각각 연기했다.
7. 저서[편집]
- 《雩南 李承晩》 - 太極出版社. 1970.
- 《내일을 위한 證言 : 許政回顧錄》 - 샘터사. 1979.
8. 둘러보기[편집]
[1] 초명은 허성수(許聖壽)[2] 본인의 자택에서 오후 1시 15분경 숨졌다.[3] 국무총리 서리 겸직 (1951년 11월 6일 ~ 1952년 4월 9일)[4] 수석국무위원 겸직. (1960년 4월 25일 ~ 1960년 6월 14일) 수석국무위원직은 3차 개헌과 동시에 국무총리직으로 도로 회귀했고, 허정은 헌법 부칙에 따라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국무총리에 자동 취임하였다. 때문에 대한민국 헌정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의 지명 및 인준 과정 없이 헌법에 따라 자동 취임한 총리가 되었다. 즉 유일하게 국가원수가 공석인 상태에서 취임한 총리이다. 당시의 내각수반이라는 직함은 관습적으로 쓴 이름이었을 뿐 법률상의 직함은 아니었다.[5]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60년 4월 27일 ~ 1960년 6월 15일)[6]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60년 6월 23일 ~ 1960년 8월 8일)[7] 당일 조선일보 기사 참조[8] 洋國書堂. 영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초량동의 한 교회에 지은 서양식 학교.[9] 現 초량초등학교[10] 이윤영과 공동 재임[11] 전임자 이승만의 하야로 외무부장관으로서 1개월 18일간 권한대행. 6월 15일 개헌으로 권한대행 종료.[12] 아직 대통령 선거가 열리지 않아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으로서 1개월 15일간 권한대행.[13] 최규하 정부[14] 전두환 정부[15] 이기붕과 보성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였다.[16] 허정은 서리(서리제 폐지 이후는 내정자)에서 바로 정식 총리가 되지 않았다가, 공백기를 거쳐 나중에 정식 총리가 된 유일한 총리다. 역대 총리 서리나 총리 후보자는 1. 인준안이 가결되어 바로 정식 총리가 되거나(인준), 2. 인준안이 부결되어 총리의 꿈을 그대로 접거나(낙마) 둘 중 하나밖에 선지가 없기 때문이다. 서리나 내정자에 그쳤다가 나중에 다시 총리가 된 사례는 허정 총리가 유일하다.[17] 물론 훗날 허정이 총리로 취임한 근거는 4.19 혁명 이후 "기존의 수석국무위원은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국무총리가 되어 국무총리의 직무를 수행한다."라는 제2공화국 개정헌법의 부칙이었다. 이 부칙 때문에 허정 총리는 헌정 사상 유일하게 국가원수의 지명이 아닌 헌법에 따라 자동 취임한 총리라는 진기록을 세웠다.[18] 허정 이전의 서울시장 5명은 모두 (서울특별시장 취임 당시 기준으로) 국회의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경력이 미약했다. 초대 김형민 시장은 미국 유학을 다녀와 평범한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존 리드 하지와의 인연으로 갑작스럽게 잠시 서울시장을 맡게 되었고 윤보선, 이기붕은 서울시장이 정치 데뷔 무대였다. 김태선 시장은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낸 경찰공무원이었고 치안국장 외에는 서울특별시장 1, 2차 임기 중간에 내무부장관 고작 1달 맡은 게 다였다. 고재봉 시장도 경무대 비서실장과 서울특별시 부시장 외에는 특별한 경력이 없었다.[19] 윤치영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윤치영이 민주공화당 초기 시절부터 당의장으로서 박정희와 함께하기도 하였으니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을 존대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크게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이승만을 같이 모셨던 허정과는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하니 설득력 있는 말이다. 혹자는 윤보선이라는 주장도 하지만 대통령까지 지냈던 그가 전두환에게 존대를 할 까닭이 없고 윤보선 자신이 허정과는 원래 막역한 친구 사이기도 하였고 신군부에서 자신을 존대하고 잘 대해준 까닭으로 친정부인사가 된 것을 생각해보면 윤치영이 확실하다.[20] 천하의 전두환 앞에서도 이렇게 강직한 모습을 보인 허정 총리는 그 성품에 걸맞게 키도 아주 장신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을 보고 추측하면 대략 173~178cm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니 전두환보다도 더 컸다.[21] 범일동, 좌천동, 수정동, 초량동, 영주동[22] 범일1동, 범일2동, 범일3동, 범일4동, 범일5동, 좌천1동, 좌천2동, 수정1동, 수정2동, 수정3동, 초량1동, 초량2동, 초량3동, 초량4동, 초량5동[23]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였음[24] 윤보선 후보와 단일화 선언.[25]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이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겸하므로 대통령제의 총리는 정부수반이 아니라 내각수반이다. 그러나 의원내각제에서는 총리가 정부수반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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