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률(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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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성하(星河), 본관은 성주(星州).
2. 생애[편집]
1941년 9월 26일 전라북도 남원군(현 남원시) 대강면 옥택리에서 아버지 이교환(李敎煥, 1914. 6. 29 ~ 1979. 12. 31)과 어머니 문화 류씨 류효남(柳孝南, 1912. 10. 14 ~ 1992. 9. 25)[4] 사이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37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김중태, 박범진 등과 함께 학내써클 민족주의비교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다.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2차 발표문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버지니아주립대학교 조교수,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1977년 6월부터는 외무부 산하 외교안보연구원 부교수 겸 연구부장직을 수행했으며, 1978년 유신정우회 3기로 제10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0년 신군부가 조직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하였다. 1981년 민주정의당 부대변인 겸 사무총장 보좌역에 임명되었으며, 1983년 4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민주정의당 정세분석실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방위원회 간사, 민주정의당 정책위원회 국제담당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86년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이 되어 전국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7월 정무제1장관에 임명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각각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고 서초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모두 박찬종 후보에게 패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을 맡았으며,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 민정계 출신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광노의 후임으로 국회사무총장에 임명되어 3년간 재임하였다.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초구 갑 지역구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박원홍에게 밀려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6대 총선 때에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참여 전력 때문에 시민단체가 선정한 낙천 대상에 포함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에 공천 신청을 하였다가 탈락하고 남원시-순창군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이강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체류하다가 2008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