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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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이양호(1918)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면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충청북도 청주에서 성장한 그는 대한민국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대위 시절 공군비행학교 당직사령으로 근무하던 날 전도봉 당시 소위가 주동이 되어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제21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재임: 1992년 9월 8일 ~ 1993년 5월 27일)과 공군본부 고문(재임: 1993년 5월 27일 ~ 1993년 5월 29일), 제25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재임: 1993년 5월 29일 ~ 1994년 12월 24일)과 공군참모총장 직무대리(재임: 1994년 3월 3일 ~ 1994년 3월 8일), 그리고 제32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재임: 1994년 12월 24일 ~ 1996년 10월 18일)을 역임한 그는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최초의 비육군이자 공군출신 합동참모의장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2.1. 공군 시절[편집]
1937년 6월 16일에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면(현 증평군 증평읍)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학교(29회) 졸업 후 1956년에 공군사관학교(8기)에 입학했고 1960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1988년 공군교육사령관, 1989년 공군작전사령관을 역임한 뒤 1992년에 공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참모총장 임기를 마치면 전역하였을 것인데...
2.2. 합참의장 시절[편집]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이 하나회 군맥(軍脈)을 숙청하면서 다수의 대한민국 육군 장성들이 동시에 예편하자, 비육군 출신으로는 최초로 합동참모의장이 되었다.[1] 이 과정에서 육참총장, 해참총장까지 교체되는 바람에, 이양호 대장보다 1기수 후임이라 할 수 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김동진 대장이 후임 육참총장으로 임명됐고, 해참총장에는 김홍열 소장(!)이 중장 진급과 함께 임명되었으며, 공참총장에는 조근해 중장이 대장으로 승진되면서 임명되었다. 김홍열 중장은 군인사법 상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하려면 최소 1년을 경과해야 하기 때문에 1년 뒤 대장으로 진급할 때까지 예하 해병대사령관과 계급이 같았다.
합동참모의장으로서 1994년 국군의 평시 작전통제권 환수를 마무리하고, 같은 해 12월 국방부장관이 되었다.[2]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2.3. 국방장관 시절[편집]
1996년 7월 16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NLL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것으로 정전협정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북한이) 넘어와도 상관없는 것이다."라는 발언을 해서 천용택 새정치국민회의 의원한테 강한 비판을 받았다.[3] 인터넷 기사 발언 당일 뉴스
1996년 경전투 헬기사업인 KLH사업과 관련해 대우중공업에서 1억5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법원에서 특가법 뇌물수수로 징역4년과 1억 5천만 원 몰수형을 선고받으며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증거가 적다는 이유로 관련된 검사들은 본인 및 가족한테 폭력적인 행동들을 취했고, 증거위조를 하였다고 밝혀지며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되었다.
2000년에는, 국방장관 재직 시절에 추진된 '금강-백두' 정찰기의 도입이 무기 로비스트인 린다김이라는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는 강한 의혹 때문에 다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장애인복지사업을 추진하였으나 2020년 5월 28일 긴 투병 끝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3. 기타[편집]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당시에 당직사령을 맡은 사람이 이양호 대위였다. 당시 해병대 소위 주동자 중에 한 명은 전도봉 소위[4] 였는데 이들이 군생활을 이어가면서 1994년에 각각 국방장관과 해병대사령관이 되어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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