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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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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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강서구 을)
제12대
김영배
남재희

제13대
남재희


제14대
최두환



대한민국 제11대 노동부 장관
남재희
南載熙 | Nam Jae-hee


파일:남재희 장관.jpg

출생
1934년 1월 18일 (90세)
충청북도 청주군
(現 충청북도 청주시)
본관
의령 남씨
재임기간
제11대 노동부장관
1993년 12월 22일 ~ 1994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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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변문규
자녀
3녀
학력
석교국민학교 (졸업)
청주중학교 (졸업)
청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소속 정당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0, 11, 12, 13
약력
한국일보 기자
국민일보 기자
조선일보 기자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
조선일보 문화부장
조선일보 정치부장
조선일보 편집 부국장
하버드 대학교 언론연구원
조선일보 논설위원
서울신문 편집국장
서울신문 이사
관훈클럽 총무
신문편집인협회 운영위원장
서울신문 주필
제10대 국회의원 (서울 제11선거구[1] /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 정책연구실 차장
민주공화당 안보국방위원회 위원장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민주정의당 정책위원회 의장
제11대 국회의원 (서울 제8선거구[2] / 민주정의당)
민주정의당 서울특별시 지부 위원장
제12대 국회의원 (서울 제8선거구[3] / 민주정의당)
민주정의당 정책위원회 의장
제13대 대통령 선거 민주정의당 중앙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제13대 국회의원 (서울 강서구 을 / 민주정의당)
제13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장
제11대 노동부장관 (문민정부)
호남대학교 객원교수

1. 개요
2. 생애
3. 성향
4. 선거이력
5. 소속 정당
6. 저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기자, 정치인, 관료이다.


2. 생애[편집]


1934년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학교(25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재학 시절 이강석이 서울대 법학과에 부정하게 편입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졸업 후 한국일보, 민국일보[1],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에서 기자로 일하였다. 조선일보에서 정치부장, 서울신문에서는 편집국장, 주필로도 활동했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 분구 전)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영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소장파 국회의원으로서 박찬종, 오유방, 정동성 등과 정풍 운동을 주도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자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고병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민주당 김영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 때 현장에 있었다. 다만 분위기가 격양된 상황에서 남 의원이 술잔을 집어던지며 사건을 확산시켰다는게 문제. 결국 술잔에 맞아 부상당한 장성이 이단옆차기를 날리는 바람에 얼굴 이마에 부상을 당하였다.

전두환 정권 때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을 두 번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강서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당 최두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4년 노동부(현 고용노동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96년 지역구를 이신범에게 물려주고 이듬해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후로는 진보 정치인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2016년 5월에는 문재인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주 만나는 대상으로 주목받았다.


2020년부터 대외활동이 줄더니 2021년 4월 진행된 위의 인터뷰 이후로는 대외활동이 없다. 나이가 고령인지라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3. 성향[편집]


권위주의 정권에 참여하였고 꾸준히 보수정당에서 활동하였지만, 개인의 정치성향은 오히려 중도진보에 친화적인 상당히 기묘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민정당 국회의원 시절에는 "체제내 리버럴"이라는 평가를 들었으며, 정계를 떠난 뒤에는 점진적인 개혁과 시민계몽운동을 통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을 교정하자는 "페이비언(Fabian) 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2]

4.19 직후 민국일보 정치부 기자시절 혁신정당을 담당하면서 안면을 트게 된 구 혁신계[3] 인사들[4]과 평생동안 친분을 쌓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향이었을뿐 진보적인 활동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유신독재 정권에 영입돼 이후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이라는 보수우파정당에서만 활동한다. 하지만 이 시절에도 혁신계 인사들과의 교류는 계속되었고, 정계 은퇴 이후에는 오랜 세월 관찰한 구 혁신계의 역사에 관해서 여러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남재희 본인은 한 인터뷰에서 만일 자기가 10년만 더 일찍 태어났으면,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을 따랐을 것이며, 10년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진보정당 운동에 투신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예춘호와 사돈 사이다. 남재희가 민주정의당 의원으로 있던 시절, 사돈 관계(남영숙(1961년 11월)-예종영)를 맺었는데 당시 예춘호는 전두환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된 재야인사여서 화제가 됐다. 남재희의 회고에 따르면 불이익은 커녕 전두환으로부터 축하와 함께 두둑한 축의금까지 받았다고 한다.[5]

박정희는 진검승부를 하는 검도선수, 전두환은 축구부의 주장, 노태우는 개인기에 신경쓰는 테니스 선수라고 평한 바 있다.

조선일보 근무시절 방일영, 방우영 형제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남재희는 방일영을 가리켜 도량이 큰 관후장자라고 평가하였다.


4.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1[a]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45,426 (28.81%)
당선 (1위)
초선[6]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8[a]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76,786 (36.09%)
재선[7]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75,132 (22.69%)
당선 (2위)
3선[8]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서 을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25,198 (31.32%)
당선 (1위)
4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26,356 (29.91%)
낙선 (2위)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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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남재희 10대.jpg


파일:남재희 11대.jpg

10대 총선 (서울 11[1])
11대 총선 (서울 8[2])

파일:남재희 12대.jpg


파일:남재희 13대.jpg

12대 총선 (서울 8[3])
13대 총선 (서울 강서구 을)

파일:남재희 14대.jpg


14대 총선 (서울 강서구 을)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정당|
]]

1963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63
탈당

[[국민의당(1963년)|
파일:국민의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

1963 - 1964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64 - 1973
탈당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73 - 1980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80 - 1981
정당 해산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1 - 1990
창당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합당[9]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997 - 2004
합당[10]
정계 은퇴

[[무소속|
무소속
]]

2004 -
탈당

6. 저서[편집]


  • 모래위에 쓰는 글 -1978
  • 정치인을 위한 변명 -1984
  • 양파와 연꽃: 체제 내 리버럴의 기록 -1992
  • 일하는 사람들과 정책: 문민정부 노동부 장관 시절의 기록들 -1995
  • 언론ㆍ정치 풍속사:나의 문주 40년 -2004
  •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 -2006
  • 김두관의 발견 -2012
  •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 -2014
  • 진보열전 -2016
  • 시대의 조정자 -2023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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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
이경식정재석홍재형나웅배한승수강경식임창열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한완상이영덕이홍구김덕나웅배권오기
외무부장관
한승주공로명유종하
내무부장관
이해구최형우김용태김우석서정화강운태조해녕
재무부장관
홍재형박재윤
법무부장관
박희태김두희안우만최상엽김종구
국방부장관
권영해이병태이양호김동진
교육부장관
오병문김숙희박영식안병영이명현
문화체육부장관
이민섭주돈식김영수송태호
농림부장관
허신행김양배최인기강운태정시채이효계
상공자원부장관 → 통상산업부장관
김철수박재윤안광구임창열정해주
건설부장관
허재영고병우김우석
정보통신부장관
윤동윤경상현이석채강봉균
환경부장관
황산성박윤흔김중위정종택강현욱윤여준
보건사회부장관 → 보건복지부장관
박양실송정숙서상목이성호김양배손학규최광
노동부장관
이인제남재희이형구진념이기호
건설교통부장관
이계익정재석오명추경석이환균
해양수산부장관
신상우조정제
정무제1장관
김덕룡서청원김윤환김영구주돈식김덕룡신경식홍사덕
정무제2장관
권영자김장숙김윤덕이연숙
총무처장관
최창윤황영하서석재김기재조해녕김한규심우영
과학기술처장관
김시중정근모구본영김용진권숙일
공보처장관
오인환














[1] 1962년 경영난으로 폐간되었다.[2] 페이비언(Fabian)은 19세기말 영국의 지식인들이 결성한 정치단체로 폭력혁명을 배제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사회를 바꾸자는 주장을 내걸었다. 이들은 노동당(영국) 창당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후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기반이 된다.[3] 1970년대까지는 현재의 진보진영을 혁신계라고 불렀고, 진보는 발전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실제 1956년 대선에 출마한 진보당 조봉암의 선거구호는 "혁신만이 살길이다''. 진보가 정치용어로 자리잡은 것은 1990년대 들어서 노회찬진보정치연합을 만들면서 부터이다.[4] 김철(1926), 고정훈 등등[5] 전두환은 원래 화끈한 현질과 쇼맨쉽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세력을 키운 사람이다. 무슨 일이 있을때마다 두툼한 돈봉투를 받았는데, 자기 생각보다 0이 하나 더붙어 있어서 놀랐다는 증언을 남긴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a] A B 강서구[6] 신민당 김영배 후보와 동반 당선[7] 민주한국당 고병현 후보와 동반 당선[8] 신한민주당 김영배 후보와 동반 당선[9]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0]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