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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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편집]
훗날 왕비가 되는 민자영은 1851년(철종 2년) 음9월 25일[1] 자시[2] 에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3] 에서 아버지 민치록(閔致祿)과 어머니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원래 민자영을 포함 남매가 1남 3녀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거의 외동딸로 컸다. 1858년(철종 9년), 아버지 민치록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는 유복한 생활을 했다. 왕비 간택 당시 고아였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모친 '감고당 이씨'는 명성황후가 간택된지 한참 뒤인 1874년(고종 11년), 민승호 암살 사건에 휘말려서 같이 죽었다.
민자영의 가계는 인현왕후의 큰오빠 민진후의 직계로 할아버지 민기현(閔耆顯)은 1800년(정조 24년), 별시 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하여# 종2품 이조 참판에 올랐으며, 아버지 민치록은 음보로 종4품 덕천군수·영천군수, 장악원 첨정(掌樂院 僉正)에까지 올랐다. 대과를 안 본 사람으로서는 꽤 높은 관직이다.
그러나 고종은 혼례당시 9살 연상의 영보당 이씨를 총애하고 있던 상태여서 명성황후보다 먼저 서장자인 완화군을 낳았다.
당시 풍양 조씨 세력을 대표하는 대왕대비 조씨와 실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깊은 뿌리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 조정은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가 아닌 관리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고, 그런 상황에 민자영의 여흥 민씨는 남연군 - 흥선대원군 2대에 걸친 혼맥으로서 충분히 강력한 아군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아내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먼 친척이기도 했고 집안 격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부친은 물론 친형제가 없어 외척 걱정도 덜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는 민승호도 대원군의 처남이었다.[6]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어머니, 부인, 며느리, 손자며느리가 모두 일가 친척, 남연군 - 흥선대원군 - 고종 - 순종 직계 4대가 모두 여흥 민씨 일가 친척들과 결혼한 것이다.
2. 중전 초기[편집]
원자가 졸하다
전교하기를,
"오늘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에 원자가 대변이 통하지 않는 증상으로
불행을 당하고 말았다. 산실청을 철수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일전에 삼가 묘사(廟社)와 비궁(閟宮)에 경건히 고유제를 지냈었다.
원자가 지금 이미 불행을 당하고 말았으니, 일로 보면 고유제만 거행해야 하겠지만,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예조 판서가 묘당에 가서 의논하여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곧바로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궁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 했고 이때부터 사이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야사에는 흥선대원군이 아기에게 산삼을 달여 먹였는데 죽고 중전 민씨는 이를 완화군을 책봉하기 위한 고의라고 의심해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됐다고도 한다.
1873년(고종 10년), 명성황후는 남편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게끔 흥인군 이최응, 조성하, 조영하 등 왕실 및 친족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다. 그리고 최익현 등을 포섭하였다.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퇴진을 요구하는 소(訴)를 지속적으로 올리도록 하여 결국 대원군의 퇴진과 고종의 친정을 이끌어냈다.
1875년(고종 12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의 국서 문제로 개항을 하느냐 마느냐 갑론을박한 끝에 고종은 개항을 결정해 근대적이고 불평등적인 강화도 조약이 강화도에서 정식 체결된다. 그리고 이어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영수호통상조약, 조독수호통상조약 등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서양 국가들과도 차례로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개항 후 외국인과 외국 문물이 밀려들면서 척화를 주장하는 이나 외래상권에 밀려난 이들의 불만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고종은 왕권의 강화와 국방을 위해 근대적인 서양식 군대를 창설할 필요를 느꼈다. 원래 있던 오군영에서 80명을 차출해 별기군을 새로 창설하고 기관포를 수입해 배치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국방비를 증액한 게 아니고 기존에 있던 것들에서 빼와서 편성했기 때문에 오군영 운영비를 충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882년(고종 19년)에 견디다 못한 오군영(구식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역적이 되지 않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추대했고, 그는 장남 이재면과 부인을 대동해 입궁했다. 이들은 제일 먼저 별기군을 창설한 민겸호와 김보현을 주살(誅殺)하고 왕비를 죽이려 했다. 왕비는 궁녀로 변장해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충청도 충주(장호원)까지 도망갔다.
중전이 충주로 피난을 간 당시, 임오군란을 일으킨 오군영 병사들은 중전과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전엔 해산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흥선대원군은 중전이 난리 중에 죽었다고 임의로 선언하고 국모로서 국장(國葬)을 선포하고 병사들을 해산시킨다.[8]
한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명성황후와[9] 측근들은 밀사 윤태준을 고종에게 보내 자신들의 생존을 알린다.[10] 이들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장에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는 한성부 왕십리 근처에 모여있던 오군영 병사들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서울 전체를 장악했다. 민씨들은 조정으로 바로 복귀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기습 납치되어 톈진(天津)으로 끌려간다. 위기는 곧 기회. 민씨들은 완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개화파들에게도 약간 자리를 허락한다. 이들은 청나라 식의 근대화인 양무운동 모델을 따라 국정을 개조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근대화를 책임지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된 것이다.
3. 온건개화파 중용[편집]
남편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그동안 대원군 섭정시기 종친 무관 남인 등의 세력을 등용했기 때문에 고종과 왕비 민씨는 자기 지지세력이 필요했다. 당연히 믿을 사람은 민씨 척족과 기존 대원군 정권시절 찬밥이던 기존 세도정치 시절 안동 김씨를 비롯한 원로 관료들과 척사파들이었다. 즉, 척화파가 다시 힘을 얻었다.
조정에서는 개화파의 리더격인 우의정 박규수가 1877년(고종 14년)에 사망하고 이유원이 영의정에서 스스로 사직하고 물러나자 위정척사파가 더욱 힘을 얻었는데, 개항한지 5년이 지난 1881년(고종 18년)에 고종이 다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선포하는 지경이었다. 이때 청나라와 이홍장의 압력으로 일본과 근대적인 수교 이후 서양열강과의 수교를 강권하였기에 1882년(고종 19년)에 가서야 개화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이는 명성황후나 고종의 본뜻이 아니라, 임오군란을 강경 진압하고 서울을 장악한 청나라의 압력이 크게 작용한 것에 가깝다.
온건개화파로 분류되는 김기수나 김홍집은 수신사로 파견되었을때도 모든 서양사절 접견 권유를 격렬하게 거부하고, 일본이 제공한 공장 병영 철도 전신국등의 시찰기회를 갖은 핑계로 번번히 거부 하였다.[11] 김홍집이 이홍장과 청나라의 공식 정책을 설명한 《조선책략》을 들여오자 그제서야 위정척사와 단절하고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동양의 우월한 정신문명은 그대로 두고 철갑선과 화포 정도등 물건만 사서 쓰자'는 동도서기론을 적극 지지하였다.
보빙사의 대표이며 중전 민씨의 조카 민영익을 온건 개화파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으나, 민영익은 민씨 척족과 조정의 여론대로 친청파였으며 개화에 어느정도 선을 그어 급진개화파에게 숙청 1호로 꼽힌 사람이었고, 보빙사로 파견되었을때 시찰보다 경전 독서에 힘썼다. 배멀미가 난다는 이유로 미국 대통령이 태워준 해군함정에서 프랑스 민간선박으로 도망가려다가(...) 나라망신 시키지 말라는 보빙사 통역 포크 소위[12] 의 경고를 받을 정도였다.
개화를 추진하면서 정부는 자금이 필요했고 청과 일본이 국내 재정문제에 영향을 주었다. 자금이 필요했고 매관매직도 모자라 조선왕조 최초로 매과 즉 과거 합격증까지 팔았다.(여기엔 디플레이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청전을 금지시킨 탓도 있다.) 매관매직도 모자라 조선왕조 최초로 매과 즉 과거 합격증까지 팔아치웠을 정도. 그럼에도 재정은 항상 모자라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는데 당시 군사들 월급을 줘야 할 선혜청 당상이 중전 민씨의 친정오라버니 민겸호였으니 고종과 왕비 민씨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임오군란이 마무리되고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 내정간섭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파견했다. 이 때 내한한 재정고문 묄렌도르프가 새로운 화폐 주조 안건을 고종에게 올렸다. 일본 화폐(엔화)를 도입해 영향력을 높이려던 급진개화파는 흥선대원군 때 당백전의 발행으로 비정상적인 물가상승을 겪었던 부작용을 들어 일본의 차관을 얻고 금본위제를 주장했다. 둘 다 장단점이 있었고 고종은 둘다 실시해서 당오전을 발행하게 하는 한편 차관도입을 약속한 김옥균을 일본으로 보내 차관을 받아오게 했으나 차관 문제에 대한 일본 측과의 합의된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협상 결렬로 결국 실패한다.
청나라식(양무운동)이 아니라 일본식(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개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급진개화파는 좁아진 입지를 벗어나기 위해 갑신정변[13] 을 벌이지만 정변 개시 3일 만에 청군의 진압으로 실패[14] 하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1894년(고종 31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온건개화파 치하의 조선은 기존 체제를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재외 공사관도 설치했다. 주미 공사관, 주일 공사관을 시작으로 주요 10개 국에 정식으로 외교 사절을 보냈다. 민씨 척족 등을 비롯한 온건개화파는 전신 설치, 발전기 도입, 경인선 부설 및 지하 자원 조사 등에 나섰고 나름 성과도 있었다. 교육도 개혁했다. 성균관 개설 과목에 초보적인 경제학, 영어, 과학 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젊은 관료들을 서구식으로 재교육하는 육영공원도 만들어 가르쳤다. 남녀 가리지 않고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중전에겐 여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15] , 고종 부부에게 커피를 처음 소개한 마리 손탁[16] 등 외국인 친구들까지 생겼다.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 등은 덕수궁과 인천 제물포 등에 서구식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울 정동에 손탁호텔이 문을 연 것도 이 때다.
그러나 신분제, 양반 면세 제도 등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조선의 서구 근대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아울러 갑신정변 건도 있어 과감한 정책 제안이나 시도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동안 '영약삼단' 등 청나라의 내정간섭은 날로 심해졌고, 일본도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었지만 뒤에서는 딴 짓을 했다. 일본이 갑신정변 주모자들(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을 숨겨주고 있는 것도 끊임없이 작고 큰 외교 마찰을 일으켰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개화정책으로 재정이 빈약해지며 관리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주지못했고 이들은 착복으로 이어진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행이 원인이었다. 진압하러 간 관군이 전투에서 연일 패배하며 동학군이 서울로 차츰차츰 북상하자 청군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 이에 응한 청나라 군은 아산만으로 상륙하고 요청하지 않았던 일본군은 텐진 조약을 빌미로 인천으로 기습 상륙한다. 일본군까지 상륙하는 걸 보고 놀란 정부는 우리 영토에서 전쟁이 날까봐 급히 동학군과 화약을 맺어서 해산을 유도해 주둔 명분을 없애고 양군에게 철수하라 권고하지만 일본군은 오히려 톈진 조약을 무시한 채로 고종과 중전 민씨가 거주하고 있는 경복궁을 불법으로 점령하고는 아산에서 청군을 공격해 청일 전쟁을 기어코 일으킨다. 이후 김홍집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이들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17] 을 추진한다.
4. 청일전쟁 이후 친러정책[편집]
1895년(고종 32년), 일본이 끝내는 이겨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타이완 섬을 일본에 할양하고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따라 들어온 급진개화파들이 내각에 참여, 온건개화파와 함께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한편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합세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하도록 하게 하는 삼국간섭이 일어난다. 고종 부부는 러시아를 매우 주목하게 됐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수시로 접촉을 가졌다. 이때 온건개화파 주요 인사들을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서울 정동으로 다니다보니 정동파라고 불리기도 했다. 러시아 역시 온건개화파 인물들은 물론 중전에게까지도 갖가지 선물을 보내며 환심을 샀다. 명성황후의 사치에 대해 말이 많은데, 이때 받은 선물들도 상당히 있어 사치벽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5. 을미사변[편집]
일본 정부에서는 러시아에게 조선을 완전히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반러 여론을 조성한다. 일례로 청일 전쟁 몇 년 전인 1891년(고종 28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18] 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교토에서 일본 순사인 츠다 산조(津田三蔵,1855~1891)의 암살 시도로 중상을 입는 일이 있었고[19][20] 이에 따라 일본의 향후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 내각은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일본군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죽임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고자 한다.
이에 당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고종과 중전 민씨가 나름 일본과 거리를 두려하자, 자신의 후임 공사로 온 前 일본군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면서 시해할 음모를 꾸민다.
고종은 일본 교관들이 양성한 훈련대의 충성심을 의심해 해산 방침[21] 을 통보하자 일본은 그 결정의 배후로 지목된 명성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1895년(고종 32년) 10월 8일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 등을 동원해 경복궁을 새벽에 공격한다. 일본군과 경찰이 시위대를 몰아내고[22] 같이 온 일본 낭인들이 건청궁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시체를 불태워버린다.
12년 전 임오군란 때 중전 민씨를 업고 서울 탈출을 도왔던 홍계훈은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장(연대장급)이었는데 이 때 광화문에서 전사했고[23] 시위대는 연대장 현흥택과 미국인 군사 고문 다이의 지휘 하에 일본 측과 맞서 싸웠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일본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은 처음엔 조선인들의 내부 소행이라 개소리를 시전했지만, 러시아 기술자 사바틴, 미국 교관 다이를 비롯해 외국인 목격자도 많았다. 그들은 곧 미우라 공사와 낭인들을 체포해서 법정에 세웠다가 증거불충분+춘생문 사건을 빌미로 방면했다.[24] 물론 일본은 이 사건 자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며, 발생 당시 세간의 관심도 그리 받지 못했다. 또한 2009년 전까진 일본의 모든 언론기관이 을미사변에 대해선 함구하고 거론하지 않았다.
6. 사후 추숭과정과 황후 "책봉"[편집]
이틀 뒤인 1895년(고종 32년) 음8월 22일, 을미사변으로 재집권한 김홍집 친일내각은 고종 왕명을 사칭해 중전을 폐서인하는 가짜 조칙(詔勅)을 발표한다.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중에
왕후(王后) 민씨(閔氏)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짐의 정령(政令, 정치상의 명령과 법령)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 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리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난해 12월에 종묘(宗廟)에 맹세하기를, ‘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씨는 오래된 악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것없는 무리를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 대신(國務大臣)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며 또한 짐의 나라의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하여 변란을 격발시켰다.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하여 임오년(1882)의 지나간 일을 답습하였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이 가득차 선왕(先王)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는 것이다. 짐이 할 수 없이 짐의 가문의 고사(故事)를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하였다.[25]
-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8월 22일 (경인) 1번째기사
8월 23일 왕태자(순종)가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올리자, 김홍집은 10월 10일 왕후로 복위시켰다.[26]
왕후 민씨의 위호를 회복시키고 조령을 격소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왕후(王后) 민씨(閔氏)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키고
이달 8월 22일 조령을 격소(繳銷)하라."
하였다.
-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10월 10일 (정축) 1번째기사
원래 시호(諡號)는 금방 결정되는 게 아니긴 하지만, 그녀는 현 조선의 군주의 아내였음에도 장례 일정이 2번이나 중단되는 바람에 죽은지 2년 뒤에야 시호를 받았다. 1895년(고종 32년) 10월 22일 김홍집 내각은 그녀의 시호를 '순경왕후(純敬王后)'라고 올렸는데, 이후 아관파천이 발생해 김홍집 친일내각이 붕괴하자 고종은 장례 일정을 중단했다. 1897년(고종 34년) 1월, 조정에서 김홍집 내각이 올린 건 시호로 쓸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자 고종은 시호 후보를 새로 올리라고 했고, 시호 삼망(三望) 후보 중 하나인 '문성왕후(文成王后)'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3월 2일에 '문성'이 정조 대왕의 정식 시호에 쓰였다는 이유로 취소하고, 시호 후보 중 하나였던 '명성(明成)'을 쓰기로 한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성왕후'로 시호가 정해졌을 것이나, 문제는 그녀의 장례를 준비하는 도중에 장지(葬地) 근처에서 유해가 발견되는 등의 일 때문에 장례 일정이 또 중단되었다는 것이다.[27]
그 해 10월 12일,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에 즉위하면서 그녀를 황후로 추숭(追崇)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책봉"이 맞다. 예를 들어, 고종이 중전 민씨를 대한제국의 황후로 책봉할 당시 "명성황후책봉금보"가 내려졌다.[28]
고종은 임오군란 때에 경복궁을 빠져나와 여주와 충주로 피신했다가 명성황후가 환궁한 경험이 있었다. 반면 일본은 친일파 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통해 빨리 장례를 치름으로써 혹여라도 중전 민씨가 살아서 경복궁으로 환궁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고종은 공식적으로 중전의 승하를 공식적으로 발표·선포하지 않은 상태로 차일피일 미루고 아관파천을 해버렸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중전은 완전히 사망한 사람이 아닌 상태였다. 말그대로 "대행왕후"의 상태. 고종은 황제 즉위식 이후에 명성왕후를 대한제국 황후로 책봉하는 책봉례를 거행하고 책봉금보를 제작하였고 이를 추후 종묘에 안치하였다.
《고종실록》 36권, 광무 원년(고종 34년 양력 10월 12일자) 실록에 분명히 "추숭 또는 추존"이 아니라 "책봉"이라고 명시되어있다. 후일 《고종실록》 편찬감독관으로 일본인들이 참여했음에도 해당 단어인 책봉(冊封)이라는 단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빈전에 나아가 황후 책봉의 고유 별존를 지내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황후(皇后)를 책봉한 것에 대한 고유 별전(告由別奠)을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1897년, 대한 광무(光武) 원년) 10월 12일 (양력) 2번째기사
일본의 압력을 받지 않은 시기에 조선의 관리에 의해 기록된 고종황제 즉위식을 기록한 의궤인 《대례의궤》에도 분명히 고종은 황궁우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후 저녁이 축하연을 개최하였고 다음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한 후에 왕비를 황후로 책봉하는 책봉례를 거행하였다고 기록하였지, 추숭 또는 추존례를 거행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수가 있다.
즉, 고종은 중전 민씨를 법적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대한제국 황후로 임명한 것이다.
이는 조선의 상장례 예법상 사망 후 3년 시묘살이가 끝난 후에야 정식 사망으로 처리한 관습에서도 유래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서 조선후기의 삼정의 문란이 극심할 때에도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 군포를 비롯한 각종 세금을 물릴 수 있었던 것 또한 3년 시묘살이 관습에서 유래한 실시간 호적정리가 이뤄지지 않았고, 조선에서는 중앙정부 차원의 호적조사 및 정리를 매년하지 않고 특정 간지가 도래하는 년도에만 집중적으로 호적조사와 정리를 실시한 탓도 있다
현재와 같은 사망신고 처리기한을 정한 것은 순종황제가 즉위한 직후(1907년)에 실시한 것으로서, 《순종실록》에는 "사망한 자는 사망한 날로부터 1주일 이내로 경성경찰서에 신고한도록 하라"는 칙음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순종황제의 칙음 선포 이전에는 조선시대 때 사망신고 기간을 특별히 정해놓은 것이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렇기에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승하한지 2년이 지났어도 법적으로는 사망자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취급이 가능했고 또한 그러한 법적 신분으로 황후에 추존이 아닌 책봉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즉위식과 황후책봉례가 끝나고 며칠 뒤에 장례 일정이 재개된다. 그리고 11월 6일에 시호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쓰겠다고 했고 22일에 이 시호가 정식 공표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명성황후 민씨'로 불리게 된다. 이후 존호 등이 추가되어, 그녀의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가 되었다.
대행 황후의 지문의 어제 행록을 내리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명(明)’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 ‘성(成)’이라고 하였다. 올리는 시호는 ‘명성(明成)’이라 하였고,
능호(陵號)는 ‘홍릉(洪陵)’이라고 하였으며, 전호(殿號)는 ‘경효(景孝)’라고 하였다.
(중략)
-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1897년, 대한 광무(光武) 원년) 11월 22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광무 원년) 11월 22일, 명성황후는 서울 청량리 밖 홍릉에 매장되었는데, 미국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방한했을 때 수행원들과 함께 이 능을 먼저 방문했었다. 그런데 앨리스와 그 수행원들이 이 능의 석물에 올라타서 인증샷을 찍는 사태(큰 결례)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뒷날 1919년에 남편 고종이 붕어하자 천장(이장)하여 남편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의 홍릉(洪陵)에 합장되었다. 그리고 청량리 홍릉 자리에 들어선 것이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묘로 이를 '영휘원'이라고 부르는데 '구 홍릉'이라는 지명 역시 있으며, 이 주변에는 수목원이 있고 근처에 세종대왕 기념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