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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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2. 상세
2.1. MBC 청룡 감독
2.2. 삼미 슈퍼스타즈 코치
2.3. LG 트윈스 감독
2.4. 삼성 라이온즈 감독
2.5. 인스트럭터 시절
2.6. 롯데 자이언츠 감독
2.7. 역대 감독 성적


1. 개관[편집]


롯데 자이언츠 시기와 이전의 시기로 평가가 갈린다. 1990년에는 LG 트윈스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팀을 우승시키면서 찬사를 받았다. 다음해 팀성적 하락으로 LG를 떠나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95년 말 삼성에 부임한다. 비록 삼성에서는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서 2000년대 삼성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시간이 지난 뒤에 오히려 평가가 상승했다.

그러나 롯데 자이언츠 시절에는 고의 태업 의혹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많이 일으켰고, 롯데 자이언츠의 암흑기를 개막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과 1년 반만에 팀을 멸망시키면서 4연속 최하위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압도적인 KBO 리그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된다.

야구인으로써의 백인천이 역대급 성공을 거둔 인물인지라 전반적으로 감독으로서의 역량 자체는 우수하다는 것이 중론이며 LG와 삼성 때에는 나름 준수한 감독으로 평가받지만, 롯데에서는 KBO 역사에 남을 부진과 태업으로 인해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큰 비판을 받는다.

2. 상세[편집]



2.1. MBC 청룡 감독[편집]


1982년 서울 연고의 MBC 청룡은 초대 감독으로 백인천을 선임한다. 계약 기간은 3년 이며 이 중 1년은 선수로도 활동하는 계약을 맺는다.

MBC 청룡 원년 감독(겸 선수)으로 취임 당시 그의 나이는 만 39세로 6개 구단 감독 중 가장 젊었다. 나이가 갓 40줄이 된 백인천을 감독으로 선임하다 보니 그보다 나이가 위인 인사를 코치로 데려오기가 어려웠던 터라 동년배인 이재환, 유백만 코치를 데려왔는데 이들은 시즌 내내 매사에 불협화음을 빚었다. 이재환은 경동고 시절 백인천과 배터리로서 호흡을 맞췄던 투수 출신이고 유백만은 부산상고로 학교는 달랐지만 동기생으로 실업야구 시절 노히트노런을 네 차례나 기록했던 명투수였다. 게다가 두 코치는 모두 투수 출신이며, 야수 출신인 백인천 감독이 선수로도 뛰는 점을 감안하면 야수 출신코치를 선임하지 못한 비효율적인 코칭스태프 구성이었다. 결국 MBC는 후기리그가 이어지던 7월 12일 충암고 감독 출신의 한동화를 수비 코치로 영입해 보강할 수 밖에 없었다. 수비전문가였던 한동화의 합류 이후 내야진의 조직력이 원활해지기 시작했고, 백업 플레이 실수 등에서 비롯되는 어이없는 실책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원년 백인천 감독은 전기 3위, 후기 3위 그리고 통합승률 또한 46승 34패로 전체 3위에 머물렸다. 코칭스태프 문제도 컸지만 선수단 구성에도 문제가 많았다. 서울 지역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드래프트에서 그 해 세계선수권으로 팀 합류가 불가능한 김재박이해창을 지명하였다. 서울지역 지명권을 공동으로 행사한 OB는 재빠르게 박철순을 지명했고 OB 우승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MBC는 하기룡과 이길환, 이광권이 마운드의 주축을 이뤘지만 확실한 에이스가 없다는 뚜렷한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청룡의 선수진이 크게 빈약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최소한 첫해만큼은 고전을 면하기 어려운 면면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백인천 1년 짜리 선수 계약은 1982 시즌 후 재계약을 통해 연장되는데 백인천/선수 경력 항목을 참고할 것.

1983년엔 전년도 국제대회 때문에 합류하지 못했던 김재박[1]과 이해창이 팀에 합류하면서 MBC의 내외야는 더욱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포수로는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차동렬[2]과 신인 박철영이 합류했다. 투수쪽에서는 신인 오영일의 가세로 하기룡 이길환과 함께 10승 투수 3인방을 구성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 마이너리그와 멕시코 리그에서 활약했던 이원국의 영입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시즌 시작 후 MBC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으며, 4월 20일부터 4연패에 빠지면서 4월 24일 7승 9패의 시점에서 프런트에 의해 일시적으로 감독직을 물러나게 된다. 선수로서도 .162의 타율로 부진에 빠져있던 상태라 4월 26일 구단에 휴식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즌이 한 달도 지나진 않았던 시점이라 갑작스러운 일시퇴진 및 휴식 요청에 의문점이 많았고 당시 신문기사에서도 사생활 문제[3]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결국 KBO 감독으로서 첫 번째 커리어는 이렇게 마감한다.

MBC청룡 감독 시절에는 워낙 강렬한 성격인지라 심판들에게도 좋지 못한 인상이었다. 1982년 8월 26일, 대구시민운동장에서 펼쳐진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 4회말 수비 도중 양 팀간의 충돌로[4]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는데, 주심이 김인식만 퇴장시키자 선수들에게 갑자기 덕아웃으로 들어오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 때 백인천 감독은 주심에게 자세히 설명할 것을 요구했고 이해가 가지 않자 주심은 그라운드에 들어올 것을 요청했지만 끝내 백인천 감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엔 KBO 몰수게임 1호 이후엔 5경기 출장정지와 100만원[5] 벌금을 징계를 받았다. 선수로서 백인천의 원년 4할 기록을 비난할 때 8경기 결장기록을 가지고 상대 에이스를 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데 이 중 5경기는 감독으로서 역할을 하던 중 출장정지 징계를 받은 것이다.


2.2. 삼미 슈퍼스타즈 코치[편집]


1983시즌 백인천은 꾸준히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MBC에서 김동엽을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복귀가 불발되었다. 그러던 중 전기리그가 마무리된 6월말 삼미 슈퍼스타즈의 요청으로 이적을 통해 삼미 선수 겸 타격코치로 계약을 맺었다. 원년부터 그 와 갈등을 겪었던 이재환이 이미 삼미 코치로 와 있었기에 삼미 내부에서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으나, 구단주의 강력한 의지로 결국 2군을 창설하면서 이재환을 내려보낸다.

구단주의 강력한 의지 덕분인지 삼미는 후기 시즌 쾌조의 출발을 보인다. 그러던 중 삼미와 계약한지 2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간통죄로 경찰에 입건된다. 사실 삼미 영입 이후 선수로서 성적은 안 좋았지만 타점 생산력이 높았고, 엄청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일본 출신 장명부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삼미는 이 때까지 후기리그 16승 8패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백인천의 구속 이후 9승 1무 8패를 기록하는데 그쳐 MBC에게 5게임차로 후기리그를 내주게 된다.

1983년말 석방된 백인천은 구단에 자진사임 의사를 알렸다. 그러나 1984년 삼미는 지난 시즌의 분발이 무색하게 디펜딩챔피언 해태와 함께 탈 꼴지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난 시즌 백인천 영입 효과를 봤다고 판단한 삼미는 전기리그 종료 후 백인천을 영입한다. 이 시즌 선수로서 백인천은 제한된 출장 기회와 만42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양호한 성적을 올렸으나, 기존 코칭스탭과 갈등이 심해 또 다시 반 년만에 퇴단하게 된다. 삼미를 인수한 청보에서 1985 후기리그에 타격 인스트럭터로 고용하였으나 마찰이 잦은 성격으로 여러 구단에서 기용을 꺼려 지도자로서 기회를 얻지 못했다.

2.3. LG 트윈스 감독[편집]


현역에서 물러난 백인천은 골프용품 관련 사업을 벌이며 야구계와는 잠시 거리를 두고 있다가 1990년, 배성서 감독의 후임으로 MBC 청룡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야구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청룡이 럭키금성그룹에 매각되며 LG 트윈스로 개명해 LG의 창단 감독이 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MBC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동시에 LG의 시대를 연 감독이었던 셈.

1989년 시즌 당시 청룡은 선수진 개개인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팀웍 부재로 그해 내내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백인천은 모래알 같던 팀웍을 재건하여 단 1년만에, 만년 꼴찌였던 팀을 페넌트레이스 -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팀으로 만들며 지도자로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잘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시즌 개막하기 직전 이광은, 신언호, 김기범의 줄부상에 교통사고에서 돌아온 김건우의 난조 등으로 인해 전력을 제대로 꾸리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개막전 OB에 2연패를 당한 뒤 5연승으로 선두에 올라가기도 했으나 곧바로 6연패와 7연패를 한 차례씩 기록하며 5월 중반~6월 초순까지 OB와 함께 꼴찌 다툼을 하고 있었다. 6월 초에는 14승 22패로 꼴찌까지 떨어지자 잠실구장에서 김동엽 전 감독의 복귀를 바라면서 일부 LG팬들의 퇴진 시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해태 원정에서 더블헤더 포함 3연전에서 싹쓸이 승리를 거두더니 마산 롯데 원정에서 승리, 8연승의 삼성을 상대로 2연승, 태평양 상대로 2연승으로 상위권 팀을 도장깨기 하며 8연승을 거두었다. 투수 쪽에서는 유망주로만 머물러 있던 문병권 김태원의 포텐셜이 드디어 터졌고 뒷문이 강해졌으며, 타격에서는 윤덕규, 박흥식, 김상훈, 최훈재, 김영직 등 막강한 좌타라인이 상승세의 원동력이었다.

이 당시의 멤버들을 보자면 김재박, 이광은, 김상훈 등 국가대표급의 내야진이 건재했고, 김태원, 김용수, 정삼흠, 문병권, 이용철, 차동철 등 선발진에 중견신인 김기범까지 포함된 마운드, 노찬엽, 박흥식 등이 버티는 외야진에, 특급 신인 포수 김동수, 노련한 포수리드의 심재원, 당시 신인으로 데뷔한 이병훈까지 가세한, 신구조화가 완벽한 팀을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구단에서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한 김재박, 이광은, 박흥식 등 노장들을 과감히 끌어안으면서 이들을 주력 주전으로 앞세워 성적으로 보여주는 리더쉽을 발휘하며 기존 MBC 팬심을 다시 잠실로 불러들였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5연패를 노리고 있었으나 1990 시즌의 LG는 1.5 게임 차이로 해태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페넌트레이스를 우승하는 감격을 누렸고, 해태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올라온 삼성에 여유있는 4연승을 거두며 마침내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리즈 1차전에서 13대0으로 LG가 거둔 승리는 아직까지도 역대 포스트시즌 단일 경기 최다 점수차의 승리다. 시리즈 전체 내내 백인천의 투수 운용은 삼성 타선을 꽁꽁 묶었는데 12승의 김용수를 1, 4차전에 배치하고 18승의 김태원을 2차전, 중고신인 김기범을 3차전에 넣었는데 삼성 타선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여기에 2차전 김영직, 이병훈 등 투입한 대타들까지 적중시키며 그야말로 신들린 듯한 운영을 하였다. 모 팀 팬들은 믿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을 사실이지만, 이 해 백인천 감독의 팀 운영은 개인의 모든 역량과 경험을 쏟아부어 대부분 옳게 적중시킨, 지도자로서 최고의 한 해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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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은퇴식에서 헹가레를 받는 백인천.# 그리고 그날 해태가 더블헤더 2차전에서 지면서 최초의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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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헹가래를 받는 백인천.

하지만 다음해인 1991년에는 구단과의 재계약 문제[6]와 선수들간의 사이가 벌어짐으로 인해 팀은 6위로 내려앉았고, 시즌 종료 뒤 이광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LG를 떠났다.[7] LG 감독에서 물러난 뒤 개인 사업 등 야구와는 거리를 두면서 몇 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2.4. 삼성 라이온즈 감독[편집]


그러다가 1995년 10월, 우용득의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복귀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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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그러나 삼성 부임 전부터 백인천 감독의 건강은 별로 좋지 않았다. 1996년부터 암흑기 전력이던 삼성을 각고의 노력끝에 추스려 1997년부터 슬슬 성적이 나기 시작했는데, 6월에 한번 뇌출혈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렇게 쓰러진 뒤 감독직을 유지를 하느냐 마느냐 설왕설래도 있었지만, 그래도 원래 의지가 강한 백인천이었던 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인천이 돌아와 보니 코치들끼리 파벌이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었고[9], 백인천은 이에 크게 실망하고 만다. 더불어 초반에 좋았던 성적도 3위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시즌 막바지인 9월 3일 LG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당시 삼성 선발 투수 정성훈이 초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구원투수로 전병호가 등판했다. 그런데 당시 포수는 낫아웃 사건으로 악명이 높은 김영진이었고,[10] 포수 출신이라 볼배합에 많이 관여하던 백인천 감독이 변화구 사인을 냈는데...배터리는 사인을 잘못 읽었는지 4번타자 심재학과 정면 승부를 선택했고 3점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전병호를 불러 백인천이 왜 내 사인대로 던지라는데 안 던지냐고 화를 내자 전병호는 던지라는 대로 던진 거라고 대꾸했고, 백인천은 격분하여 전병호의 뺨을 때리고는 다시 뇌출혈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백인천은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더블헤더 2차전은 감독 없이 경기를 치뤄야 했다. 결국 최측근인 수석코치 조창수가 감독대행을 맡으며 잔여시즌과 포스트시즌까지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종료 후 백인천은 감독직에서 사퇴하였다. 일명 전병호가 백인천을 보내버린 사건. 다만 이는 전병호가 새가슴 기질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형편 없는 투수리드로 악명 높은 포수 김영진의 잘못이 더 크다 봐도 무방하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백인천 감독이 크게 비난받진 않는다. 또한 김영진은 그 전의 낫아웃 사건만 봐도 공수주 모두 최악임을 인증했으니.

사실 퇴임 전까지 삼성에서도 MBC와 LG 시절 못지않게 여러모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백인천 감독은 삼성 감독 중에서 한국시리즈 최초의 우승을 기록한 김응용 감독과 최초의 통합 4연패, 정규시즌 5연패를 기록한 류중일 감독과 더불어 삼성팬들에게 있어서 이미지가 좋은 편. 무엇보다도 이승엽을 발굴한 것과 2년이라는 짦은 기간에 야수진의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단행해서, 이후 삼성이 타력을 바탕으로 최강 팀으로 군림하게 된 기초를 만들었다.아니.롯데 선수는 왜 발굴 안함?

이 시절에는 대부분 노쇠화한 30대 주전들을 제치고 젊은 신인급들만 데리고 스프링캠프를 일찍 시작하는 등 의도적으로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지금까지도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리빌딩 사례로 손꼽힌다. 선수 은퇴 후 미국에 건너가 있던 박흥식을 삼성의 타격코치로 데리고 온 것도 그의 업적. 자신의 양아들로 보자면 이만수,[11] 양준혁[12][13]을 위주로 한 기존 삼성 멤버들과 이승엽, 정경배, 김태균, 김한수, 신동주, 최익성, 김종훈[14] 등 젊은 선수들이 있었다. 백인천이 이 시절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기회를 줘가면서 기용한 선수들과 공격야구를 앞세운 화끈한 팀 컬러는 2002년의 첫 통합우승의 기반을 다져놓았고[15] 이후의 2005, 2006 시즌의 우승에도 그의 입김이 남아있다고 평가받는다.[16]

하지만 괜찮았던 평가와는 별개로 감독 생활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한 우여곡절이 많았다. 김성래, 이종두, 강기웅[17] 등 기존 노장 선수들과 마찰을 빚은 끝에 리빌딩을 명목삼아 이들을 방출시키거나 트레이드시켰으며, 전병호, 동봉철 등과의 마찰과[18] 짧은 커리어긴 했어도 외야수 전향 전에 포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포수 육성에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19] 자체는 오점으로 남는다.

삼성 감독 재임시기 있었던 사건으로는 압축 배트 의혹도 있었다. 1997년 5월 4일, 삼성과 LG의 대구 경기에서 삼성 타자들이 정경배의 연타석 만루홈런 등 27:5라는 무시무시한 점수를 내면서 LG 투수진을 떡실신시키자 다음 날 경기 도중 LG 트윈스 천보성 감독이 삼성 타자들이 사용한 미즈노사의 배트를 규정 위반인 압축배트라고 주장한 사건이다. 이날 경기 도중 백인천이 LG 주루코치이던 조 알바레즈와 멱살잡이까지 가는 난투를 벌이기도 했다. KBO는 해당 방망이를 목공소에서 절단해보고 이상이 없다고 했으나 LG 측은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했고 뜬금없게도 제3자인 쌍방울 감독 김성근이 정식으로 KBO에 공문을 보내어 결국 제조사인 미즈노에 배트를 보내서 의뢰까지 한 결과 배트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밝혀지게 된다. 또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사무국에서도 X-ray와 도료 검사까지 했으나 결론은 이상 없음이었다. 참고로 그 때 다른 구단들도 논란이 되었던 배트를 암암리에 구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병호 사건만 부각되지만, 부임 때부터 건강이 안 좋은 것도 있었고 압축배트 논란 때부터 건강문제가 본격적으로 심각해지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1996년 시즌 삼성의 전력이 약했었고, 1997 시즌에서는 뇌출혈로 인해 빠진 경우도 있어서 감독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때문이었는지 역대 삼성 감독들 중에서 두 번째로 승률이 낮다.(승률 0.488) 또한 두 번째 뇌출혈과 전병호의 뺨 사건까지 겹친 관계로 삼성은 1997년도에 4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정작 그 해에 열린 포스트시즌은 조창수 감독대행이 팀을 이끌었다. 이것 또한 삼성 시절의 백인천에게는 무척 아쉬운 일. 또한 백인천 감독에게 민폐를 끼친 선수들만 한 두명이 아니었으니(김영진[20], 최창양[21], 양용모[22]) 그래도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구단측에서부터 연봉도 후하게 주고 백인천의 양아들이라 불렸던 어린 선수들에게는 사비로 용돈까지 챙겨줄 정도로 헌신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썼던 것을 보면 삼성 감독 시절의 백인천의 노력을 엿보일 수가 있는 대목이다.

현재는 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리빌딩이 이루어진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김성근 부임으로 뎁스가 작살난 삼성은 이 시기 이후로 두 번째 전성기를 맞게 된다.[23] 약 3년만에 팀을 다시 강팀으로 꾸려낸 것은 리그 역사에 유례없는 고강도 리빌딩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러한 점 때문에 백인천은 삼성 팬들에게는 명장 취급받는 경우가 많다.

비록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라도 박혀 있었는지 이후 삼성은 그를 타격 인스트럭터로 다시 부르기도 했고[24] 여전히 백인천에 대한 삼성 팬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다. 특히나 김응용 이후 삼성 라이온즈에 부임한 감독들의 평가가 거의 전원 최악이기에[25] 더욱 고평가를 받을 여지가 있다.


2.5. 인스트럭터 시절[편집]


삼성 감독직에서 퇴임한 뒤에는 몇 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감독 시절 찾아온 뇌출혈 후유증을 치료함과 동시에, 간간히 프로 팀과 아마야구를 돌면서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다. 1998년에는 연세대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로, 2000년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한때 감독을 맡았던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이후 한화 이글스SK 와이번스의 인스트럭터로 초빙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2년 초 한화 타격 인스트럭터 시절 김태균의 스윙폭을 늘리려다가 2002 시즌을 말아먹는 원흉을 제공했다. 그외에 전년도에 주전 지명타자로 3할을 기록했던 김종석의 타격폼을 무리하게 뜯어고치려다가 타격이 망해버린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2002년 여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했었을 때처럼 우연히도 전임 감독이 우용득이었다.

2.6. 롯데 자이언츠 감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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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26]

백인천 감독이 다른팀들도 꼭 한번씩 맡아줬으면 좋겠다. 너무 억울하다.

롯데팬이면 생기는 생각들[27]


그러나 백인천의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은 '롯데 자이언츠의 영원한 금지어'[28]로 불리며,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감독, 나아가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받는다.[29][30] 또한 나아가 선수, 감독, 프런트를 통틀어서 KBO 리그 역사의 모든 종사자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31]

백인천 부임 시절 롯데는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약체 구단 중 하나로 불리며,[32] 그가 지나간 이후 롯데 자이언츠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 부임 직전까지 전대미문의 비밀번호였던 8888577을 찍으며[33] 약팀의 상징이 되어버렸고, '꼴데[34]'라는 멸칭까지 붙었다.

백인천의 60년이 넘는 기나긴 야구 인생 동안 일본프로야구 선수로서의 활약, KBO 리그에서의 유일무이한 타율 4할, LG의 첫 우승, 이승엽 발굴 등 선수로도 지도자로도 뛰어난 업적들을 다수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국내야구 갤러리 같은 야구 관련 사이트들에서 그의 이름 석자를 언급하는 것이 간혹 꺼려지는 결정적인 이유로, 당연히 그의 야구 인생에서도 최대의 오점으로 평가받고 있다.[35] 이 시기의 부진으로 인하여 그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백골퍼가 탄생하였으며, 당시 롯데 팬덤은 그를 아예 마왕에 비유할 정도로 민심이 극악에 달했었다.

일반적으로 백인천 정도로 업적을 세운 인물은 한국 야구사 최고의 위인 중 하나로 칭송받아야 하나 백인천은 업적에 비해 칭송 정도가 낮은데,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로 해설자 시절 요시 그란도시즌 밈, 또 하나이자 가장 큰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 백골퍼 시기[36]. LG 트윈스 시절의 끔찍한 부진으로 인해 리그 역사상 최악의 감독 2위로 자주 꼽히지만 선수 시절과 코치 시절의 활약으로 인해 엄연히 한국 야구의 전설로 평가되는 이순철의 경우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LG 골수팬들에게는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이 팀 팬들이 이순철 해설 경기는 아예 소리를 끄고 볼 정도로 극도로 증오하지만, 어쨌든 여전히 해설 위원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며, 2010년대 중반에 구시대적 혹사로 가뜩이나 망쳐져 있던 한화를 더 망치면서 몰락한 김성근도 일본에서 멀쩡히 지도자 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것을 감안하면[37][38] 백인천이 얼마나 롯데 시절 문제를 많이 일으켰는지 알 수 있으며, 이 시기의 나쁜 의미로서의 임팩트로 인하여 백인천의 감독 커리어에서 팀 첫 우승을 안겨준 LG 시절과 이승엽을 발굴하고 556 탈출 기반을 확립한 삼성 시절이 묻히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백인천의 롯데 감독 시절만큼 비판받은 스포츠 종사자는 전 세계, 전 종목을 통틀어봐도 거의 흔치 않다.[39][40]

이 시기 백인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팀을 암흑기로 빠트리는데 고의성이 보였다는 것이다. 즉, 다른 감독들은 잘 해보려다가 능력 부족으로 망한 것과 달리 이 쪽은 막 나가기로 결정한 2003년부터는 아예 제멋대로 팀을 운영하며 완전히 롯데를 망쳐버렸다. KBO 리그 역대로 자신들이 맡은 소속팀을 나락으로 추락시킨 감독들의 이름이야 각 팀 팬들을 중심으로 많이 거론되지만, 롯데빠들이 아닌 타 팀 팬들조차도 리그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 하면 누구든 독보적으로 백인천부터 가장 먼저 거론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보통 대부분 근 몇 년간 최악의 감독을 꼽으라면 자신이 응원하는 팀 감독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41] 올타임 넘버원이라고 하면 누구든 롯데 시절 백인천부터 가장 먼저 1순위로 꼽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LG 시절과 삼성 시절 이후로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42][43] 오죽하면 백인천이 태업하지 않고 제대로 본인의 능력을 통하여 여러 업적을 세워 백인천에 대한 평가가 좋은 LG와 삼성의 팬들도 "롯데 시절의 백인천은 완벽히 논외이며, 정상 참작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 심하게는 롯데 부임 시기 백인천을 이름만 백인천이고 실제로는 '백골퍼'인 아예 다른 사람 취급하기도 할 정도로 롯데 시절에만 극도로 부진했던 것이다.

특히 중립적인 언론까지 나서서 단순히 통솔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도 아니고, 팀에 대한 관심이 하나도 없다며 직접적으로 대놓고 비판한 사람은 롯데 자이언츠 시절 백인천만이 유일하다. 프로야구는 순위제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하위권 감독이 되기 마련이지만, 의도적으로 골프 등 야구 외적인 요소에 더 신경을 많이 쓰며 하위권으로 팀을 처박은 감독은 백인천 뿐이다. 즉, 성적은 둘째 치고 팀에 대한 관심보다도 다른 일에 더 신경쓰는 공개태업을 한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졸장들보다도 더욱 큰 비판을 받는다. 게다가 후술할 백인천의 롯데 시절 행보나 전술했던 백인천의 LG, 삼성 시절 업적 등을 종합해보면 그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태업을 해서 팀을 망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참고로 상술한 평가를 받은 프로스포츠 감독은 백인천이 롯데 감독직에서 경질된 지 20년 가까이 대한민국 프로스포츠계에서 단 한 명도 없었다.[44] 이로 인하여 현재는 야구계에서 떠난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롯데빠들은 백인천이라는 이름 석자만 나와도 극단적인 분노를 표출하며, 심지어 백인천의 그 동안의 업적들을 언급하는 것도 롯데빠들 앞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 취급받는다.

일단 스포츠에서 감독들이 실패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최소한 잘 해 보려는 생각은 있었는데, 자신의 능력이나 지도력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은 선수단이나 프런트와의 불화가 원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선수들이 부상이나 사고 등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거나, 팀 사정상 감독이 원하는 선수나 환경을 지원받지 못하는 등 감독 본인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요인으로 실패하는 경우도 상당하다.[45]

그러나 백인천 감독은 앞서 말했듯이 개인 지도력은 나쁘지 않았는데, 본인의 고의적인 태업으로 인해 리그 역사상 가장 나쁜 성과를 만들어버렸다. 지금까지도 태업이라는 비판을 받는 전 세계 스포츠 역사에서 거의 흔치 않은 감독이며, 이 때문에 롯데를 끝으로 감독 커리어가 영구히 끝장난 것은 물론 롯데빠들에겐 최악의 금지어로 전락했고, 그 임팩트가 워낙 커 타 팀 팬들에게 있어서도 역대 최악의 야구 감독이라고 하면 누구든 백인천부터 가장 먼저 언급할 만큼 거의 망한 감독의 밈이 되다시피 해버렸다.

2001년, 김명성 감독이 시즌 도중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우용득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나름 팀을 이끌었고, 시즌 막바지까지 4강 싸움을 한 성과를 인정받아 이듬해인 2002년 상반기, 롯데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타 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약했던 전력 탓에 시즌 초반부터 꼴찌에 허덕였고, 급기야 6월 들어 13연패를 기록하자, 롯데 구단은 2002년 6월 21일, 우용득 감독을 전격 해임하고 당시 각 팀을 돌아다니며 타격 인스트럭터를 하고 있던 백인천을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공교롭게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부임할 때도 전임 감독이 우용득이었다. 계약 기간은 잔여 시즌을 포함해 2004년까지 2년 6개월에 계약금과 연봉 포함 총 7억원의 조건이었다.

6월 26일, 취임식과 함께 부임하자마자 사실상의 시즌 포기를 시사했다. 그래도 그때는 어차피 팀이 지속적인 연패로 인해 압도적인 꼴찌로 내달리던 시점이었던지라[46] 일찌감치 포스트시즌은 물 건너간 상황이였다. 때문인지 백인천은 부임 직후 "남은 시즌은 젊고 가능성 있는 선수들 위주로 기용하며 내년 시즌을 대비하는 기간으로 삼겠다."라고 선언하였다. 그 말과 함께 남은 시즌 동안 실제로 여러 선수들을 기용하면서 본인의 선언을 지켰다.[47] 뭐 일단 이미 조져져서 더 이상은 도저히 손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인들이라도 대신 출장 시키면서 그들의 전력을 분석하는 것까지야 충분히 의도는 좋지만, 문제는 이후 그가 행한 여러 정책 실패와 오판들이 상식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선 6월 26일 경기마저 패해 연패가 16까지 늘어난 것이야 그렇다고 치지만[48], 취임 후 한 달도 안 된 7월 21일에는 바로 전 시즌 100타점을 기록한 팀의 주포인 거포 조경환과 나름 준수했던 외국인 좌완투수 대니얼 매기SK로 보내고, 그제껏 유망주에 불과했던 윤재국박준서를 데려오는, 지극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트레이드를 하기도 했다.[49] 다만 이 트레이드는 매기가 SK에 가서 혹사의 여파인지 완전히 망가지고 데려온 선수들도 잘 한 건 아니지만, 정작 조경환도 가서 잘 한 건 아니라서 그냥 서로 폭망한 트레이드.

사실 취임 당시에는 아주 이해 못할 정도의 조치는 아니었다. 위에 썼던 것처럼 2002년의 롯데는 백인천이 새로히 지휘봉을 잡기 직전까지 15연패를 했고, 펠릭스 호세의 부재, 조경환의 부진 등 이미 최하위 팀으로 박살나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어느 누가 와도 우승은 커녕 가을야구조차 못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니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답시고 무리하게 선수를 혹사하는 등의 뻘짓을 하는 대신 이제 남은 기간 동안은 리빌딩에 쏟고 다음 해인 2003년부터 다시 가을야구권에 진출하겠다는 포부가 그나마 정상적인 상황이었다.[50] 그러나 이후 백인천의 행보들은 가을야구 진출을 위한 리빌딩은 커녕 태업과 기행이었고, 일반적인 야빠들과 야구인들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수준의 기행들을 다수 저질러 팀 기반을 말 그대로 박살내버렸다.

KBO 리그의 다른 감독들은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평가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지만, 롯데 자이언츠 시절 백인천만큼은 10개 구단의 모든 팬들이 아무런 이론 없이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하며, 정상참작의 여지조차 전혀 없을 정도로 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참히 박살내 버렸다. 물론 흔히 백인천 다음 가는 최악의 감독으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LG 트윈스 시절 이순철에 대해서도 이 발언이 거짓은 아니기는 하지만, 백인천의 롯데 시절과 이순철의 LG 시절을 비교해 보았을 때 기행의 수준이나 정책 실패 정도의 차이가 워낙에 커서[51] 그나마 다른 감독들이 등장해도 재평가되지 않는 감독 둘로써 같이 묶는 거지 실제로 행적을 비교하면 이순철을 백인천이랑 엮는 것도 이순철 쪽에 굉장히 미안하게 보일 정도로 백인천 쪽의 실책이 압도적으로 더 스케일이 크다는 것이 중론이다.[52][53]

선술하였지만, 롯데 백인천은 그냥 승부욕 자체라고는 하나도 없고, 대놓고 팀을 작정하고 망친 유일한 사례라서 다른 실패한 감독들을 백인천과 같은 사례로 엮는 것은 곧 그 감독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이 길이길이 남을 만행들의 여파로 전임 우용득의 실책들은 그냥 잊혀졌다.

게다가 리빌딩을 한다면서 여러가지 무리수들을 일삼았는데, 그게 오히려 독만 되어서 성적은 고사하고 성과도 전혀 안 나오게 되었다. 당최 리빌딩이라는 것도 팀 전력 상승의 기반을 마련해야 성공적 리빌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쪽은 전력 상승의 기반은 커녕 성적도 꼴찌에 전력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훼손된 전력으로 인하여 이미 시즌 전부터 가을야구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백인천 감독은 2003년에 전력 보강이나 운영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하려는 시도는 커녕 아예 대놓고 팀을 망치려고 작정한 듯이 대놓고 막나가는 행보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현재까지도 KBO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롯데 감독이던 시절의 온갖 만행들을 정리하자면,

  • 일단 경기 개시 이전에 골프 치고 와서 경기 도중 졸거나 잠을 자는 것부터 시작해서 기자들과의 회견에서는 자기 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와 야구 관련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안 하고 골퍼인 자기 아들 이야기와 골프 이야기만 줄창 했다.[54] 이러한 행보로 인하여 그 유명한 백골퍼 혹은 백골프라는 별명이 탄생했다. 기자들이 이를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팬심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 직전 시즌 다승왕 손민한이 항명을 하자 한화 이글스의 포수 채상병과 트레이드 하려다가 제지 당하자 "그러면 손민한을 포수 시켜야 하나?"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가, 진지하게 에이스를 포수전환 하려고 했다고 오해한 팬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었다.[55]

  • 제리 로이스터 감독 이전에도 롯데 감독이 자기가 아는 용병을 영입한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 중 하나가 백인천 감독이었다. 영입한 선수는 투수 모리 가즈마(森一馬)[56]와 외야수 보이 로드리게스. 이 두 선수는 골수 롯빠들에게도 상당히 낯선 이름들인데, 당연지사인 것이 먼저 전자는 시즌도 시작하기 전에 퇴출, 또 후자는 차마 시즌 전에는 퇴출 못하겠는지 7경기 출장하고 퇴출을 당해 버렸으니...당연히 모두 투타 최고 기록. 이에 대해서 모리 가즈마는 백인천 감독의 친구 아들, 보이 로드리게스는 NPB에서 1년 뛰었기 때문에 백인천도 알고 있고 영입할 수 있는 선수라서 영입했다는 설까지 돌았다. 사실인지는 불명이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진짜 답이 없는 상황. 두 선수가 퇴출된 이후 영입된 로베르토 페레즈마리오 엔카르나시온[57]이 모두 그럭저럭 활약해주어서 앞의 두 용병들은 더더욱 묻혔다. 말 그대로 흑역사 감독에 흑역사 용병들.

  • 위의 두 용병과 더불어 재일동포 선수인 포수 김영화(일본명 미쓰야마 히데카즈光山英和) 또한 백인천이 영입한 선수인데,[58] 일본 프로야구에서 십수년간 뛰긴 하였으나, 38살의 노장이라서 이미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으며, 포수임에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59] 그러고 받은 연봉은 무려 1억 5천만원. 결국 겨우 7경기만 뛰고 1년만에 방출되어 팀을 떠났으며 그대로 은퇴했다. 이 후 2019~2022년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수비코치 겸 배터리코치, 2023년부터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코치를 맡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잠깐 뛰었던 투수 이계원(일본명 하시모토 게이橋本啓)를 영입하기도 했으나 1군 출전 기록 없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이후 오사카에서 정형외과를 개업했다.

  • 2002년에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이대호최준석의 체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체중 감량을 요구했다. 문제는 살 빼랍시고 한 것이 쪼그려뛰기 및 오리걸음이었다는 것. 결국 이들의 무릎은 아작나고 말았다.[60] 이 시기 무릎 부상으로 인한 운동량 부족으로 당시 90~100kg 정도이던 이대호와 호타준족 포수였던 최준석의 체중은 급격히 불어나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대호는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서 SK 와이번스[61], 현대 유니콘스[62], 두산 베어스[63]와 독단적으로 트레이드를 시도했지만, 모두 구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64]

  • "김주찬30-30 클럽도 가능한 선수다."라며 스윙폭을 크게 만들게 하여 한동안 부진에 빠뜨렸다. 부진 정도를 넘어 2003년은 1할 타자로 전락시켜 선수의 장래에 물음표를 달게 만들었을 정도. 다만 이 점만큼은 무조건 백인천만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게, 김주찬은 2015년에도 부상으로 풀타임을 뛰지도 못했는데 18홈런을, 2016년에는 2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는 등 장타툴을 나름 보여주기도 했다. 보는 눈은 있었지만 감독 본인에게는 키워낼 능력이 없었거나, 아니면 선수 본인이 그 당시에는 아직 재능을 살리지 못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봐야 할 듯. 다만 김주찬이 저 성적을 기록한 시기는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타고투저 시기로, 당시 타자들 대부분의 클래식 스탯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시기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프로 입단 첫 해의 고효준"얘는 선수도 아니야."라는 말과 함께 1년 만에 방출해버렸다[65]. 이후 고효준은 제구가 나쁘고 폭투가 많기는 해도 좌완이라는 희소성과 구위를 무기로 SK로 가서 10승을 찍는 등 전천후 스윙맨으로 활약을 하다 KIA를 거쳐 2017년 시즌 종료 이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1라운드 6순위로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로 다시 돌아왔다.

  • 타자로 뛰던 이명호투수로 전향시키려고 하다가 실패했으며, 결국 이명호는 타자로 재전향하나, 얼마 안 가 방출되며 은퇴했다. 물론 좌완 사이드암 투수가 희귀함을 감안해야 하긴 했어도...

  • 경기 전 훈련하는 한 선수를 두고 "저 새X는 내 말대로 안하는 새X인데 왜 여기서 훈련하고 있어? 2군 내려보내!"라고 노발대발한 일화 또한 유명하다. 즉, 본인 팀 1군 명단조차 관심을 하나도 안 가져서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소리.

  • 과한 혹사 역시 맹비판을 받을 만한 일이었는데, 2003년에 당시 유망주 투수였던 양성제, 변인재 등을 지나치게 굴리며 어깨를 아작내게 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이 선수들은 전부 조기에 은퇴를 했으며,[66] 손민한, 이정훈, 김사율 등은 선발과 중계를 가리지 않고 자주 출전했다. 심지어는 전날 구원투수로 나온 선수를 선발등판 시킨 전적도 있었다. 이렇게 선발과 구원의 보직을 마치 손바닥 뒤집듯 파괴하는 주먹구구식으로 투수 운영을 했다. # 이러한 마구잡이 기용의 여파로 2003년 롯데는 8개 구단 중 유일한 5점대 팀 평균자책점과 구단 역사상 최악의 조정방어율(ERA+)를 기록하는 치욕을 당했다.

  • 이 외에도 박정태를 특이한 타격폼 때문에 2군에 박아뒀다는 말이 있는데, 박정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통념과는 다르게 사실이 아니다. 사실 2002년의 박정태는 부진 때문에 시즌 초반 2군에 내려갔던 것이며, 오히려 백인천의 조언으로 타격폼을 약간 손본 것이 엄청난 효과를 봐 9월에 월간 MVP를 따 낼 정도로 부활했다. 이듬해 박정태가 구단과 FA 갈등을 겪는 시점임에도 인터뷰에서 "끝난 줄 알았던 나를 다시 일으켜준 백인천 감독이 너무 고맙다."는 말을 했고, 백인천이 경질되었을 때도 유감을 표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백골프의 망나니짓들이 커버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 외에 차마 눈 뜨고 못 봐주겠는 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의 엔트리 남발과 롯데빠들의 속을 아주 뒤집어 놓는 질떨어지는 인터뷰까지 남발했다. 이 때문에 제대로 분노한 열린 롯데빠들은 백인천 퇴진 운동까지 벌였다. 백인천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냐면, 위처럼 "백인천이 다른 팀 감독도 했으면 좋겠다. 너무 억울하다."라는 롯데팬들의 절규어린 짤방까지 다 나왔을 정도다. 가히 종신감독 드립의 원조라 할 만하다. 때문에 그 관중 흥행이 좋다는 사직 야구장은 끝내 시즌 막판 유료 관중 69명이라는 참혹한 신화를 쓰고 만다[67]. 2003 시즌도 처참함은 여전했는데, 먼저 개막전 패배를 시작으로 화끈하게 12연패로 시작하더니, 시즌 중후반 들어 또다시 기나긴 15연패로 내몰렸는데도 끝까지 뻐팅기는 등 양심이라곤 전혀 없는 행각을 보였다.

결국 2003년 8월 5일, 더 이상 참다 못한 구단에 의해 전격 경질되었다. 참고로 경질 당일에는 박현승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하면서 연패를 끊었다.

이로써 백인천 감독은 롯데 시절의 부진으로 인해 감독 취급도 못 받는 인물로 불명예스럽게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백인천은 퇴진하는 그 순간까지도 "롯데는 향후 10년 동안 가을야구 못 할 것이다."라는 악담을 내뱉었는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저주라기보다는 스스로 박살낸 팀에게 한 말이니 확인사살에 가깝다. 정작 롯데는 2008 시즌부터 2012 시즌까지 5시즌 연속으로 가을야구를 했으므로 백인천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백인천이 롯데 감독을 맡았을 때 2군 감독이었던 이재환[68]은 대실패의 원인을 세대 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서 2시즌 동안 총 163전 41승 119패 3무, 승률 .256삼미 슈퍼스타즈의 0.188의 뒤를 잇는 찬란한 성적으로 본인 포함 역대 롯데 감독들 중 압도적인 최하위 승률을 기록했다. 전년보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할 2003년에 개막 12연패, 시즌 중반 15연패를 하고, 2002/2003년에 롯데가 각각 97패/91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받게 된 결정적 요소가 된 건 덤이다. 이때 나온 2년 연속 90패 이상은 롯데 말고는 어느 팀에도 없는 상당히 치욕적인 기록이다. 133경기 체제에서 단일 시즌 90패 이상 기록은 1999년 쌍방울 밖에 없다. 다른 90패 팀은 144경기로 늘어나서야 나왔다.[69]

만일 저 연패가 조금이라도 더 갔거나 자신이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마지막으로 지낸 팀 마냥 한 시즌 100패를 하거나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면 가뜩이나 많이 힘들던 롯데빠들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씻을 수가 없는 상처가 더해졌을 것이다. 여기에 위에서 말한 대로 선수단 붕괴+흥행 참패까지 더해져 넘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준의 완벽한 삼위일체까지 만들어졌으니...

참고로, 역대 롯데 자이언츠 감독들은 통산 승률이 5할 5푼 이상인 감독이 전무하고, 그나마 5할 이상 되는 감독들조차도 손에 꼽을 정도로 수가 몹시 적은데, 그 명단이라곤 제리 로이스터성기영[70], 양승호, 조원우[71]까지 고작 네 명에 불과하다.[72] 더구나 롯데의 유일한 우승 감독인 강병철조차도 통산 승률이 5할 아래이다. 백인천 퇴진 이후 한동안 롯데빠들 사이에서는 백인천이 사직구장 들어오면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백인천이 롯데 감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2002년 ~ 2003년 프로야구의 승률의 인플레는 심각했는데, 6할 승률 팀 2개가 2년 연속으로 나왔다. 2002년에는 삼성과 KIA가, 2003년에는 현대와 KIA가 6할 승률을 달성했다. 이 당시에 6할로 2위 찍은 KIA는 이종범의 복귀와 더불어 김진우, 신용운, 홍세완 등 많은 수의 신진 선수들, 그리고 김성한 감독의 감까지 잘 맞아 떨어져서 그런대로 강한 편이었지만,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한 바람에 딱히 그 시대를 대표할 정도의 강팀이라 보긴 어려웠다. 여기에 롯데가 KIA전 18연패를 했으니 말 다했다. 추가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2003년에 119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상기된 백인천의 롯데 재임 시절의 패수와 딱 일치한다. 여기에 더 깊게 파고들자면, 디트로이트의 2003년 승률인 .265는 2002년 롯데의 승률과 일치한다.

단일리그제인 KBO에서 6할 승률 팀이 2개였던 적이라곤 저 시절을 제외하면 1995년, 2009년, 2014년, 2019년[73], 2022년 다섯 번 밖에 없다. 저 다섯 시즌의 6할 팀은 각각 LG,[74] SK, 넥센, 그리고 SK와 키움[75] 등이었는데, 1995년의 LG는 그 해 한국시리즈가 좌절되었어도 1997, 98년에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일명 '신바람 야구'로 기억되는 당대의 강팀이었고,[76] 2009년의 SK는 그 해 대이변을 일으킨 KIA에 밀렸던 감이 있지만 그 해 시즌 막판 19연승을 올리며 연승 신기록을 세우기도 하는 등 김성근 체제의 SK는 한 시대를 풍미한 최강팀으로 불렸던 팀이었다. 그리고 2014년의 넥센은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 시즌에서도 무시무시한 타선을 자랑했다. 2019년의 경우도 SK는 디펜딩 챔피언이었던데다가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다가 막판에 미끄러져 승률은 같았음에도 상대전적에서 1위 두산에게 밀린 거였고, 키움 또한 실질적 전력차는 우승팀 두산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고, 시즌 내내 두산과 2위 싸움을 벌인 강팀이었으며 2022년의 SSG는 시즌 처음부터 끝까지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KBO 역사상 첫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LG는 지속적인 외부 FA보강과 더불어 수년간 모았던 유망주들이 한꺼번에 터졌음에도 SSG 때문에 2위였다. 즉, 저 6할을 기록한 팀들은 역사적인 강팀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나 09 SK와 19 키움은 당해 sWAR 총합 1위팀이며 LG는 19~22 시즌 동안 통산 승률 1위였다.

해임되고 5년 후인 2008년, 롯데가 한창 주가를 올릴 때 '롯데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겠는가?'란 질문을 모든 방송 해설가들에게 한 적이 있는데, 다른 해설가들은 모두 '한다'라고 대답한 반면 백인천만 유일하게 "한국야구를 보지 않아 모르겠다."란 대답을 했다. 이 해 롯데는 3위를 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스윕을 당해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하지 않은 셈.

선술했듯이, MBC - LG 시절과 삼성 시절에는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았으나 롯데 시절에는 사실상 1년 약간 넘는 다소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이와 같은 최악의 개막장 행보들로 인하여 순식간에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단단히 낙인찍혔다.



어느 정도 부진이 예고된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왜 이렇게까지 심하게 망가졌는지 이해가 도통 안 가는 수준이라 여러 이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설로는 삼성 말기에 온 뇌출혈 후유증+노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로 이렇게 되었다는 설이다. 실제로 뇌혈관 질환이 오면 심하게는 식물인간이 되거나 반신불수가 오지만, 가볍게 온 사람은 성격 변화 혹은 지적 능력 감퇴 등의 증상이 온다. 여느 스포츠 감독들이야 다 그렇지만, 특히 직업적 능력인 야구감독은 그 중에서도 스트레스를 매우 받는 직업으로, 재발 위험성도 있는지라 이러한 후유증을 회복할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천 자신이 이런 자리를 냉큼 수락했다는 게 문제다. 물론 급한 불 빨리 끈답시고 이런 준비도 덜 된 사람을 급하게 앉혀 놓은 구단 측도 문제지만...

  • 두 번째 설로는 구단이 2002 시즌 중 우용득을 성적 부진으로 경질시킨 후 백인천에게 "제발 좀 와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부탁한 뒤 구두로 여러가지 이런저런 약속들을 했었는데, 막상 백인천이 감독직을 수락하고 나자 이 약속들을 지키지 않았고, 그 후 구단 프런트가 경기 운영 면에서 월권행위를 저지르자 백인천이 이렇게 할 바에 차라리 경질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 다만 사임과 달리 경질 시에는 구단이 잔여 연봉을 지급해야 하는데, 구단에서는 그 돈조차도 주기 싫어서 "그럼 차라리 당신이 알아서 사퇴하쇼!"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바람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결국 대판 싸웠고, 이후 백인천이 그럼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고 마음먹은 뒤 상기된 개막장 짓들을 고의로 했다는 설이다.[77] 사실 엘지에서도 1990년 당시 우승한 직후임에도 불구, 프런트들에게 한 요청 사항들이 모조리 묵살된 것은 물론 구단에서도 이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 1년만에 구단과 관계가 틀어지면서 중도 하차한 전례가 있기에 가뜩이나 강성으로 악명 높은 롯데 프런트와의 관계야 오죽했을까 싶기도 하다. 유승안의 증언에서도 보여지듯이 본인의 야구 철학이나 생각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도 없는 성격이라고 한다.

저 두 가지가 그나마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이긴 하지만, 안 그래도 나이도 너무 많아진데다 현장을 떠난지도 너무 오래 되었고, 야구 환경도 크게 바뀌었고, 게다가 건강 이슈도 있어 2000년대에 감독직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부호가 붙어 있던 마당에 구단과의 갈등 끝에 말 그대로 성적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고의로 그렇게 했다는 평가가 다수다. 사실 아무리 명감독이라도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면 막장이 되는 점이야 비단 야구 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들의 감독들도 다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백인천은 거기에 감독으로서의 의무 포기까지 더한 셈이다. 거기에 뇌출혈 후유증까지 덧붙여졌으니 이게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

또한 백인천 특유의 고강도 리빌딩 스타일도 롯데 시절 무리수에 한몫했다. 백인천의 경우 삼성 시절에도 강력한 리빌딩 기조를 통해 팀을 뿌리부터 갈아엎어 강팀으로 만들어냈고, 이 과정에서 본인 특유의 비타협적인 성향을 통하여 엄청난 속도의 리빌딩을 해냈는데, 롯데 시절에는 이미 뇌출혈로 판단력이 다소 저하된 상황에서 온갖 무리수를 자행했고, 리빌딩 시도가 계속 실패한데다 구단과의 갈등까지 합쳐져 2003년부터는 골프 얘기나 실컷 하며 일부러 팀을 버렸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즉, 다른 팀 감독들은 덜 개간된 땅에 무턱대고 농작물을 심고 가꾸려다가 그 성과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고 비유할 수 있는 반면 백인천의 롯데는 땅을 개간한답시고 무대포로 다 들이엎었는데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농사일을 시작할 만한 날씨 조건이 도무지 나오지 않자 농사일 시작은 커녕 배째로 일관해서 땅은 안 그래도 엉망이 됐는데 어떤 작물도 얻지 못하고 농사조차도 짓기 어려워진 상태가 돼버린 걸로 비유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백인천은 롯데 팬덤 사이에서 롯데를 망친 죄금지어를 넘어선 범죄자로 취급당하고 있으며, 그래서 "롯데가 하나의 국가였다면 백인천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이었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인식이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당장 백인천은 2006년 당시 야갤러들이 정한 로나쌩 클럽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정도인데, 이는 롯데를 망쳐서 모든 팀을 로나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이유이다.[78]

게다가 백인천은 이미 현장을 떠난지 아주 오래된 80대의 야구 원로로, 요즘 시대에 새롭게 유입된 현대 야구팬들이나 백인천이 현역 야구인이었을 때 어린이였거나 청소년이었던 팬들이라면 세대 차 때문에 인지도가 낮아져서 잘 모를 가능성이 높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롯데 감독을 맡은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롯데 팬들에게 허구한날 까이고 있다. 게다가 20년이 지나면 보통은 '뭐 그런 사람도 있었지' 정도의 가벼운 반응이 많지만, 상당수의 올드 롯데 팬덤은 여전히 백인천의 백자만 들려도 비정상적인 분노를 표출하며 엄청난 저주를 퍼붓는 것이 대다수일 정도로 이 시기 백인천에 대해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위에서도 언급되었듯 한국 야구사를 통틀어 한 손 안에 들 정도의 업적을 남겼음에도 롯데 시절 1년의 과오만으로 젊은 야구팬들에게까지 '백골퍼'로 불리며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 조롱받고 있다. 즉, 이 시기 1년의 과오로 백인천은 본인의 찬란한 야구 인생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거대한 치욕을 남긴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롯데에서의 1년은 여러 의미에서 최악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대호의 은퇴사 때도 이대호가 롯데에 있었을 때의 전직 감독들인 우용득, 양상문, 강병철, 제리 로이스터, 조원우, 허문회에 대해서는 전부 감사하다고 언급됐지만, 유이하게 백인천과 양승호[79] 두 사람은 은퇴사에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롯데 팬들도 많이 있는 곳에서 그의 이름 석자를 대놓고 언급하는 것은 큰 실례로 평가되기에 구단의 누구도 언급하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2.7. 역대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82
MBC 청룡
80
46
34
0
3위
-
1983
16
7
9
0
1위[80]
-
통산
96
53
43
0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0
LG 트윈스
120
71
49
0
1위
우승
1991
126
53
72
1
6위
-
통산
246
124
121
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6
삼성 라이온즈
126
54
67
5
5위
-
1997
86
45
36
5
4위
4위
통산
212
99
103
10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2
롯데 자이언츠
71
18[81]
53
0
8위
-
2003
92
23
66
3
8위
-
통산
163
41
122
3


총계
717
317
38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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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2 시즌 막바지에 합류해 세 경기에 나오긴 했다.[2] 원년 롯데의 주전 포수였던 차동렬은 심재원, 한문연, 김호근이 보강되면서 자리가 없어진 상태였고 마침 MBC에서 김재박의 본격 가세로 역시 자리가 사라진 정영기를 내주고 차동렬을 데려왔다.[3] 당시 백인천과 살던 부인은 재일 한국인이었는데 한국 정착 문제와 시부모 봉양 문제 등을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이 부인과 매우 안좋게 결별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사유가 간통이었다.[4] 4회말 삼성 라이온즈의 공격, 2루수는 김인식...1루에는 배대웅이었다. 암튼 삼성 라이온즈 다음 타자가 유격수 땅볼로 치자 6-4-3 더블플레이...이때 배대웅은 출루를 더 하기 위해 김인식에게 강하게 태클을 하였고 김인식은 당연히 쓰려졌다. 그때 배대웅은 사과를 하기 위해 김인식에게 다가갔고 욱한 김인식은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치고 말았다. 훗날 방영된 히스토리 후에서 김인식 감독은 "배대웅과 같이 퇴장시켜야 되는데 왜 나만 퇴장시키냐"라고 억울했고 상황상은 같이 퇴장시키는게 맞다[5] 지금도 어느 정도 액수가 크지만 당시 100만원은 상당한 수준.[6] 백인천의 증언에 따르면 MBC 시절 맺은 감독 계약은 표면상으로는 2년이었지만, 실제로는 1+1 계약이었다고 한다. 백인천 본인은 첫 해 통합우승을 차지했으니 당연히 좋은 조건에 재계약할 줄 알았는데, 프런트 직원에게 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1+1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는데도 프런트는 사태를 무마시키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백인천이 미국인 코치 영입에 반발해서 깽판친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고...[7] 이광환 감독은 MBC 청룡의 잔재를 지우기 위해 대대적인 선수단 개혁을 감행했는데, 이로 인해 팀을 나간 선수가 김재박, 윤덕규, 김상훈 등이다.[8] 사실 비슷한 시기에 백인천을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시도했던 팀들이 몇 있었다. 1994년 OB 베어스선수단 항명파동으로 인해 퇴진한 윤동균 감독의 후임으로 백인천을 영입하려다가 막판에 김인식으로 선회했고, 1995년 말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출범한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 감독으로 백인천을 선임하려고 했으나 백인천이 삼성 감독으로 가는 바람에 김재박에게 감독직을 맡겼다.[9] 결국 백인천의 팀선배였던 장훈의 절친인 김응용이 전부 정리해버렸다.[10] 김영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같은 해 8월 23일,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홈 경기에서 팀이 1:4로 앞서던 9회초 2아웃에서 장재중의 헛스윙 삼진으로 낫아웃이 됐을 때 자동 아웃으로 착각했다가 6:4로 역전패하는 원인을 제공한 바 았다. 그 당시 장재중이 바운드 볼에 스윙 삼진이 됐을 때 김영진은 팬서비스를 한답시고 관중석 쪽으로 공을 던져버렸고 뒤늦게 백인천 감독이 김영진에게 1루로 송구하라고 외쳤지만, 공은 이미 관중석으로...[11] 당시 리빌딩을 위해 강기웅, 김성래, 이종두 등 노장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전노장이었던 이만수만큼은 대타, 지명타자, 1루수 대수비 등으로 기용하며 기회를 여러 차례 준 바 있다. 이후 이만수는 백인천이 물러난 1997년 시즌 후, 그대로 방출되어 은퇴했다.[12] 다만 양준혁에게는 그의 타격 폼을 보고 형편없다고 까기도 했다. 양준혁 본인도 이렇게 좋은 소리는 못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밑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했었다. 물론 자신의 수제자이승엽을 더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었겠지만...[13] 일례로 백인천과 이승엽, 양준혁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백인천 감독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이승엽과 양준혁의 타격폼을 바꾸자고 대답을 했는데 양준혁의 경우 타격폼이 심플하지 않고 어려웠지만 이에 불구하고 타율 3할을 칠 수 있었던 비결은 양준혁이 야구에 대해 센스가 있고 파워가 있었다는 점이다. 백인천 감독은 양준혁을 보고 타격폼을 바꾸면 타율 4할도 노려볼 수 있었고 홈런도 50개를 쳐서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승엽은 타격폼 변경을 하기로 했고 양준혁은 망설여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백인천 감독도 양준혁의 타격폼을 건드리면 독이 되지 않을까 망설였다고 결국 고심 끝에 양준혁의 타격폼을 그대로 내버려뒀다. 백인천 감독이 이를 언급하면서 그 때를 생각하면 두고두고 참 아쉬워했다고 한다. 양준혁이 잠시 슬럼프에 빠졌을 당시 그 때 당시 백 감독의 말대로 타격폼을 수정했으면 어땠을까 하며 말한 적이 있다고.[14] 1997년 시즌 중 롯데 투수 박동희와 함께 트레이드되었던 선수다. 박동희는 망했지만 김종훈은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다.[15]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엔트리를 보면 알겠지만 백인천이 감독 시절 중용했던 젊은 선수들 중 일부는 삼성 선수단의 핵심으로 굳건히 자리했다. 김한수는 2002년 당시 주장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었고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이승엽은 6차전 9회말 기적의 동점 홈런을 쏘아올렸으며 김종훈은 쏠쏠한 존재감을 뽐냈고 먼 길을 돌아 다시 고향팀에 돌아온 양준혁도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시기 삼성에 없었던 정경배, 김태균, 신동주, 최익성 등 선수들도 다른 팀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16] 다만 선동열 감독 재임 시절 이뤄낸 2005~2006년 한국시리즈 2연패는 기존의 공격야구 대신 탄탄한 불펜진을 앞세워 투수력으로 우승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백인천 시절 주축 선수들인 양준혁, 김한수, 김종훈 등이 여전히 건재하던 시절이었다 보니 백인천의 입김이 남아있다는 평가가 있다.[17] 강기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약골로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고강도 훈련을 선호한 백인천과 마찰이 있었다. 결국 1996년 시즌이 끝나고 강기웅은 쫓겨나듯이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명언을 남기고 현대 선수단 합류를 거부, 은퇴를 한다. 삼성 타선의 리빌딩 등 다른 쪽에서 좋게 보는 백인천 감독이지만, 강기웅 팬 한정으로 백인천 감독을 좋게 볼 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론이 있다면 강기웅은 주전 2루수로 잘 뛰다가 백인천 감독이 부임하기전인 1995년에 이승엽과의 충돌로 발목부상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다음 시즌인 1996 시즌에 겨우 1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며 팀 내 입지도 좁아져 있었고 노쇠화 기미가 보이던 시절이었다.[18] 다만, 동봉철의 경우 선수 본인의 기량 하락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19] 삼성에서 10년이 넘도록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하며 삼성 왕조의 핵심을 꿰찬 진갑용도 원래는 OB(현 두산) 출신이다. 결국 삼성은 이만수가 1993년 주전에서 밀려난 이후 심각한 포수난을 겪게 되는데 포수난의 한가운데 시점이 바로 백인천의 재임기다. 1990년대 중반 삼성은 김성현박선일을 돌려쓴 후 김영진이라는 신예 포수를 기용했다가 폭망했는데 사실 김영진을 중용했던 감독이 바로 백인천이었다. 김영진의 폭망 이후 삼성은 1998년 해태에서 정회열을 데려오고 1999년 두산에서 진갑용을 데려와야 했다. 결국 진갑용이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차고 나서야 오랜 포수난 역사를 끝냈다.[20] 낫아웃 사건의 그 포수가 맞다.[21] 실제로 백인천 감독이 최창양의 행동거지를 보고 1년에 6승 이상 못한다고 해서 했는데, 최창양은 정말로 1년에 6승 이상도 못 했다고 한다.[22] 새벽 4시까지 술을 먹고 오다가 백인천 감독한테 딱 걸렸다고 한다.[23] 이 전성기는 길게는 2015년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김성근 이상의 빌런인 안현호의 등장으로 팀이 90년대 중반 이상으로 심각하게 박살나버렸으며, 백인천같은 리빌딩 전문가도 등장하지 않고 홍준학 체제가 지속되며 9968837이 발생했다. 물론 안현호-홍준학은 백인천 본인의 롯데 시절과 비견되는 단장이기 때문에 저렇게 팀이 작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24] 이 당시 김용희 감독을 견제하려고 불렀다는 말이 있다. 당시 2군 감독도 김성근이었다.[25] 류중일을 제외한 선동열, 김한수, 허삼영, 박진만 전원 김성근만큼의 평가를 받거나, 그보다도 혹평받는다. 백인천의 경우 상당한 리빌딩을 이루어내 삼성을 다시 강팀으로 만들고 나아가 우승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삼성 역대 감독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26] 현재는 그가 퇴임한지 20년도 다 되었지만, 골수 롯데빠들은 아직도 이 얼굴만 보면 몹시 짜증나고 화나고 열이 뻗친다고 한다. 참고로, 백인천이 감독을 하던 시절 태어났거나 새로히 유입된 아이들은 2020년대 기준으로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즉, 백인천이 롯데 감독을 한 지도 매우 오래 되었다는 이야기.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저 당시 백인천은 약 60세 정도였고, 현재는 팔순이 넘은 엄청난 고령이다.[27] 사진에 없는 12번과 13번은 현재 사진을 찾을 순 없지만 남은 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선동렬이 TV에 나오면...반사적으로 TV를 끈다.(은퇴한지가 언젠데...)', '마찬가지로 삼성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오면 괜히 그 사람이 공을 던질 것 같다.'[28] 일단 롯데 팬들이 선수와 지도자, 행정가 다 통틀어서 팀 역사상 가장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인물을 꼽으라 하면 명실상부 백인천부터 가장 먼저 1위로 꼽힌다. 그리고 후임 감독들 중에서도 백인천을 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백인천이 떠난지 10여 년이 지난 후 2015년 이종운 감독이 각종 기행들과 더불어서 롯데를 8위로 만들면서 한 시즌도 다 못 채우고 해임된 바람에 제2의 백인천 관련 드립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주류와 화제가 되지는 못했고 또한 백인천에 비비기에는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종운은 신장개업이지만, 백인천은 이전까지는 감독으로서 그럭저럭 성적도 잘 냈고, 이승엽을 포함한 인재를 발굴해 세대교체를 한 성과가 있었는데, 롯데에서만 고의적으로 완벽하게 팀을 추락시켰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 게다가 이종운/평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나마 이종운은 선수 보는 눈만큼은 좋은 편이라는 장점이라도 있지만, 백인천은 김주찬의 호타준족으로서의 가능성을 본 것만 제외하면 롯데 감독 시절 어떠한 면에서 봐도 장점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2021년, 허문회 감독이 감정적인 운용, 지나친 양아들 양산으로 10위를 한 뒤 시즌 초에 짤리면서 백인천과 진지하게 비교하는 여론이 생기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단장과의 감정적인 갈등을 이유로 팀을 망쳤다는 평가가 많지, 고의적인 태업을 한다는 평가는 없다.[29] 백인천의 역대 최악의 감독 자리는 이론이 없다. 역대 최악의 감독 논쟁은 애초에 백인천 말고 대놓고 고의적으로 팀을 말아먹은 인물이 없기에 전무하다. 심지어 다른 종목 감독들까지 싹 다 통틀어 봐도 성적은 부진했을지언정 고의적으로 팀을 작살낸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다른 감독들 중에서는 성적이 부진하고 팀 운영 비전도 부적절하며 투지도 결여된 모습이 자주 나오나, 백인천의 사례처럼 대놓고 태업임을 인터뷰에서 인증한 사례는 없었다. 국가지도자들에 비유하자면 전술한 사례들을 폴 포트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하다고 할 때 백인천은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30] 단순히 프로 스포츠 리그 통틀어서는 전 종목을 아울러 현재까지도 적수가 거의 없다고 평가받는다.[31] 백인천은 부임 20년이 지나고 야구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사실상 일반인으로 말년을 보내고 있는 현재까지도 롯데 자이언츠 올드팬들에게 있어서 단연코 최악의 인물 1위로 꼽히며, 롯데팬들의 그에 대한 증오는 상상을 초월한다. 또한 타 팀 팬들은 자신들의 팀의 종사자 중 노답 중 상노답인 인물들을 롯데 시절 백인천과 비교하곤 하는데, 이는 곧 그 종사자가 자신의 팀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대놓고 팀을 망친다는 소리를 하는 것으로, 그 종사자에 대한 할 수 있는 최악의 모욕을 한 것과 같다.[32] KBO 리그 역사상 가장 낮은 승률을 기록한 구단 순위를 매기면 삼미 슈퍼스타즈 다음가는 평가를 받는 팀이 해체 직전의 쌍방울 레이더스와 백인천 부임 시절 롯데 자이언츠이다. 그 다음 순위를 2000년대 중후반 KIA 타이거즈, 2010년대 초반과 2020년대 초반 한화 이글스가 잇는다. 또한 백인천 부임 시절 롯데보다 평가가 낮은 팀들은 전부 20세기 팀들이라, 백인천의 롯데 자이언츠는 자연스럽게 21세기 KBO 리그 최악의 약팀으로 불린다.[33] 물론 백인천 부임 바로 전 해였던 2001년에도 꼴찌였지만, 애초에 2001 시즌은 4위와도 고작 두 게임차였다. 백인천이 2002년부터 태업으로 팀을 말아먹으며 암흑기를 연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보통 한화 암흑기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류현진, LG 암흑기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박용택이라면, 롯데 암흑기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이 백골퍼가 된다. 선술한 두 명은 암흑기 때의 팀을 이끈 리그 올타임 레전드들이지만, 백인천은 리그 올타임 레전드급 졸장(...)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마침 백인천 역시 유일무이 4할로 선술한 두 명 못지않게 리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어쨌든 롯데에서는 그렇다는 것.[34] 찌 롯의 약자[35] 사실 선수 시절의 커리어는 대한민국의 기라성 같은 레전드들 사이에서도 준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고, 감독으로서도 비록 선수 시절의 명성에는 못 미치더라도 LG와 삼성 시절에는 나름 준수한 감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다만 오히려 종전의 팀들에서는 감독 일을 아주 잘 했는데, 차후에 롯데에서 태업을 했다는 의혹을 증폭시켜 더욱 평판이 나빠진 것이기도 하다.[36] 사실 요시 그란도 시즌 밈도 해설하다가 기묘한 말을 가끔씩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기에 적어도 까이진 않는다. 대표적으로 박노준인사이드 파크 호텔이 있다.[37] 김성근 전 감독의 경우도 이미 오랜 기간 동안 특유의 '정신력 야구'를 통하여 한국 야구계에서 독보적인 인지도와 인기, 성과를 다 잡았던 덕분에 정작 야구계에서는 아직도 존경받고 있다. 단지 나이도 많고, 한화 감독으로서 일으킨 각종 논란과 실패로 인해 지도자 생활을 더는 못 할 뿐이다. 게다가 김성근은 2023년 현재 야구 예능 프로그램인 최강야구 감독을 하고 있다.[38] 사실 김성근은 30여 년 동안 많은 감독 생활을 하면서 불명예스럽게 경질되어서 팀을 떠났을지언정 프런트와 극한의 대립을 일으켰을 때도 최고위층인 구단주를 언제나 두둔하고 감사와 존경함을 표현하는 등 언론플레이에 능하기도 하여 실제 OB·삼성·한화 등에서 감독이 될 때 프런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룹 총수의 지시로 감독으로 영입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것도 감독으로서 성과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실제 김성근은 약팀이라 평가받았던 태평양, 쌍방울 감독을 맡아 창단 첫 가을야구 진출, LG 감독을 맡아 KBO 한국시리즈 준우승, SK 감독을 맡아 4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한국시리즈 3회 우승, 정규시즌 22연승의 대기록의 커리어가 있었기에 감독 말년 한화에서 비상식적인 운영 및 혹사로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불명예스럽게 경질되었음에도 일본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고문으로 무려 5년 동안 활동하다가 여든이 되어서야 은퇴하였다. 이처럼 백인천이 롯데 감독으로서 태업에 가까운 행동을 하지만 않았어도 단순히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명예스럽게 야구인으로서 생활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나아가 몇 년은 더 야구계에서 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에 백인천과 함께 KBO 최악의 감독 순위권에 거론되는 이순철도 LG 감독으로서 희대의 흑역사를 쓴 후에도 KIA 코치 및 해설위원으로서 멀쩡히 활동하고 있다. 물론 백인천도 몹시 많아진 나이 때문에 일본 야구 해설을 하다가 은퇴했지만, 백인천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야구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롯데 팬들의 엄청난 혐오감이 한몫했다. 그만큼 백인천이 롯데 팬들에게 차지하는 위상은 어마어마한 것이다.[39] 굳이 따지자면 FC 바르셀로나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 전 회장이 있는데, 재임 당시 경영 문제로 자팀 선수진 전원에게 맹비난받으며 선수들이 이 팀을 나가겠다고 원성을 했고, 지역 언론에게 '노진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아예 지역 언론에게 풍자를 당했으며 결국 경영 실패로 사임 이후 팀 레전드 리오넬 메시가 이적하고, 엄청난 재정 악화가 발생하는 등 온갖 문제를 일으키며 백인천급으로 까이고 있다.[40] 그리고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태업을 하는 가장 대표적인 선수로 앤서니 렌던이 떠올랐는데, 렌던은 거액 계약을 맺고서는 에인절스에서 성적도 영 좋지 못한 것은 물론 2023년에는 뚜렷한 신체적 부상 징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장하지 않고 코칭스태프에게도 연락이 잡히지 않으며 태업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프로스포츠 관련 직업은 대중들의 시선을 받고, 단순 부진만으로도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수 있는 자리이기에 이런 특수 사례 말고는 태업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백인천은 무려 책임이 막중한 직책인 감독직에서 태업을 했으니, 성적도 매우 좋지 않고 욕을 들어먹었던 것.[41] 흔히 거론되는 이순철, 김한수, 염경엽(다만 이 쪽은 2023년 한국시리즈에서 LG를 장장 29년만에 우승시키면서 이 사례에서 이제는 빼자는 의견이 많다.) 등의 사례를 말한다. 한화김성근의 경우 예외적으로 지나친 혹사와 그 동안의 일들이 나쁜 의미로 재조명받으면서 한화 팬덤 내 뿐만이 아니라 타 구단 팬덤들에게도 비판받았다. 가끔은 성적 부진으로 단 1년만에 잘린 송일수와 나름 괜찮았던 성적에도 불구하고 프런트와의 불화로 한 시즌도 다 못 채우고 자진사퇴 형식으로 해임당한 손혁 두 사람이 더는 업적(?)을 쌓지 못해서 생각보다 임팩트가 없다는 글이 올라오고는 하는데, 백인천도 총 재임 기간은 2002년 6월 ~ 2003년 8월로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허삼영이 2022년 7월, 1승 13패를 기록하자 롯데 시절 백인천과 성적에서 비교하는 여론이 생겼지만, 그조차도 태업은 아니었기에 진지하게 비교되는 수준은 아니다.[42] 실제로 삼성 시절 이후로 뇌졸중 문제가 있었는데, 경질 이후 18년 후인 2021년에 이 문제가 심해져서 병세가 상당히 악화된 상태라고 한다. 롯데 시절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인 모습들을 여럿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한국 야구계에 세운 업적이 큰 인물이라서 쾌차를 비는 사람이 많지만, 롯데 감독 시절의 업보로 인하여 여전히 롯데 팬덤은 이미 야구계를 떠난지 한참 되어서 80이 넘어 노쇠해진 현재도 백인천의 백자만 들어도 치를 떨 정도이다.[43] 여담으로, 흔히 말하는 올타임 넘버 2는 선술했듯 LG 시절 이순철이 가장 많이 언급된다. 3위부터는 각 팀 팬들에게 의견이 갈리는데, 삼성 팬덤은 2017년 김한수 혹은 2022년 허삼영을, 두산 팬덤은 2014년 송일수를, SSG 팬덤은 2020년 염경엽을 내세우는 편이다. 그러나 다른 10개 구단 팬들에게는 일반적으로 한화 시절 김성근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김성근 감독 본인이 해 왔던 투수 혹사를 2010년대에 한화같이 뎁스가 약한 팀에 더 심하게 시행해서 현 시점 한화의 팜 멸망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44] 그러나 2023년 위르겐 클린스만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부임하여 중립적인 언론까지 팀에 대한 관심이 하나도 없다며 그를 십자포화하고 있고, 의도적으로 부업 등 본인 직책 외적인 요소에 더 집중하는 등 이 시기의 백인천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어 큰 비판을 받고 있다.[45]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이후로는 국내 선수층은 괜찮은데 비싸게 데려온 외국인이 드러누우면서 아깝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경우도 생겼다. 물론 해당 선수 입장에서야 아프고 싶어서 아픈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감독의 심정은...[46] 이 시즌(2002년)에 롯데는 승률 0.265, 역대 최다패 타이기록인 97패를 기록했고, 정규리그 1위 팀 삼성 라이온즈와는 승차가 무려 48.5경기, 바로 위에 있는 7위 한화 이글스와의 승차도 26경기 차이났을 정도로 압도적인 최하위를 기록했다. 어떻게 1위 ~ 7위보다 7위와 8위 팀 승차가 더 크다냐?[47] 백인천 덕택에 1군 데뷔를 경험한 선수들만 자그마치 열댓명에 이르렀을 정도다.[48] 후일 KIA 타이거즈가 2010년 6월 18일부터 7월 8일까지 져 16연패 타이기록을 세운다. 그 유명한 잠실 KIA팬의 난이 이것 때문에 터졌다. 이를 뛰어넘는 기록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8월 25일부터 10월 5일까지 17연패와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18연패, 한화 이글스의 2020년 5월 22일부터 6월 12일까지의 18연패.[49] 정확히는 SK 쪽에서 용병 투수 페르난도 에르난데스까지 받아오는 3:2 트레이드였으나, 이미 에르난데스는 전년도 혹사로 인한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상태였기 때문에 트레이드에 포함된 건 어디까지나 구색 맞추기용이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에르난데스는 롯데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방출되었다.[50] 당시 롯데가 얼마나 심각했었냐면 용병 두 명이 일찌감치 퇴출되고 다른 팀들은 3명이나 보유하고 있는데도(2001년과 2002년에는 3용병 2출전이었다.) 유일하게 2명만 보유했었으며, 팀 전력에서 도움이 되는 명선수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삼미의 18연패를 깰 최악의 상황이 오면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51] LG 시절 이순철은 선수 보호 실패와 FA 실패, 육성 실패와 베테랑 방출 등 비판받는 감독들이 저지르는 행위 전부를 저질렀으며, 운용 능력도 매우 나빴다. 요즘으로 치면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김한수가 저지른 실책을 극대화시킨 것에 가깝다. 그러나 이순철의 경우 일반적인 졸장들이 저지르는 실책들을 극대화시킨 것이라면 백인천 쪽은 태업으로 인하여 발생한, 일반적인 야빠들이라면 예측하기도 힘들 정도의 기상천외한 실책들을 다수 저질렀으므로 심지어 이순철의 실책을 직접 경험하고 백인천을 팀의 첫 우승 감독으로 인정하여 존경하는 여론이 많은 LG 팬들조차 역대 최악의 감독을 꼽을 때 이순철을 그나마 롯데 시절 백인천과 동급으로 놓지, 그 이상 취급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백인천의 롯데 시절 실책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52] 공교롭게도 최악의 감독 중 1/2위를 다투고 있는 백인천과 이순철 둘 다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 협회(한은회)에서 같은 한솥밥을 먹고 있다.[53] 이걸 거꾸로 말하자면 백인천은 아예 감독의 본분을 망각하고 골프나 치는 등 대놓고 태업했지만, 이순철은 그러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천 다음 가는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고, 역시 부임 20년이 다 된 지금에 와서도 역대 2위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잦으니 해설위원이나 선수로써는 확실히 레전드이고 코치로써도 준수하지만 이순철도 감독을 할 그릇만은 되기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54] 이런 행보를 보여준 감독은 리그 역사상 백인천 뿐이다.[55] 그때의 트레이드 시도는 그 당시 재임 중이었던 이상구 단장에 의해 무산되었다. 관련 기사. 다만 포수 전향을 권유했다는 것에 대해 당시 롯데 코치였던 김용철금시초문이라며 부인했다.[56] 일본 사회인야구팀 선수. 현재는 미에 현 사회인야구단의 선수 겸 코치를 맡고 있다.[57] 한국 등록명은 이시온. 약물의 후유증으로 2005년 10월에 사망했다.[58] 한국프로야구는 1983년부터 재일동포 선수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할 수 있었다. 과거에 장명부김일융 등이 이 규정으로 KBO에서 뛴 바 있다. 다만, 백인천이 롯데 감독을 맡았던 2003년 즈음에는 이미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기에 재일동포 선수를 쓸 일도 딱히 없어졌고, 또한 쓸만한 재일동포 선수도 쉽사리 찾기 힘들어 대부분의 팀이 굳이 재일동포 선수를 데려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2003년 당시 KBO리그에서 뛴 재일교포는 김영화 외에도 고지행(삼성), 이일의(LG) 등이 있었다.[59] 김영화가 세운 38세 포수 데뷔전 기록은 역대 최고령 기록으로, 이후 십수년간 깨지지 않다가 십여년 후인 2021년, 이대호가 깨게 된다. 다만, 김영화와 달리 이대호는 토종 한국인이고 야수진을 모두 소모한 덕에 경기 후반 교체로 출장한 것이다.[60] 살 빼는 것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 차후임자 강병철은 이대호에게 산악 러닝을 통한 체중 감량을 진행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실제 이대호는 이후 MLB, NPB 시절에도 체중 감량을 꼭 하고 시즌을 시작했다.[61] 당시 SK 단장은 김강민, 박재상 카드를 검토했다고 한다.[62] 김재박 감독에게 트레이드를 제안했다고 한다. 김시진의 말에 의하면 송신영이나 신철인과의 맞트레이드를 추진하려고 했다는데, 현대가 조용준 카드도 고려하였다는 설이 있다.[63] 양승호 전 두산 코치에 의하면 2003년에 문희성이 사직 경기에서 홈런을 치자 경기 후 백인천 감독이 이대호를 줄테니 문희성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만약 이 트레이드가 성사됐다면 롯데 역사 최악의 호구딜이 될 뻔 했는데, 문희성은 그저 그런 대타 요원이었다가 2006년에 은퇴했기 때문이다.[64] 사실 이게 롯데 팬들이 백인천이라면 치를 떠는 가장 큰 이유라고 봐도 무방하다. 팀 성적이야 롯데 프론트의 막장 운영으로 인해 백인천이 감독이 아니었다고 해도 크게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장 백인천이 부임 당시 이미 롯데는 15연패 중이었고 승률도 2할대였다. 그러나 이대호나 손민한마저도 팀에 없었다면 암흑기는 더 길어졌을 게 확실하다.[65] 당시 아예 제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정확한 방출 사유는 심장 박동 불규칙으로 인한 건강 이상.[66] 변인재는 2002 시즌에 5경기, 2003년에 26경기 출장해서 미미한 활약 끝에 2004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팀에서 정리되다시피하여 쫓겨났으며, 양성제는 2003 시즌 50게임, 2004 시즌에 불과 2게임 출장을 끝으로 줄곧 2군에만 있다가 2009년 7월 21일 자로 김장현과 함께 웨이버 공시되었다.[67] 이날 롯데 유니폼이나 모자, 스프라이트 티셔츠 등을 입고 오면 무료로 입장시키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실제 입장객은 200명 남짓밖에 안 될 정도로 이 작전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68] 1992년 롯데의 우승 당시 수석코치였다. 이재환은 2002년 백인천의 취임과 동시에 2군 감독으로 다시 롯데에 돌아왔지만, 결국 백인천이 해고될 때 같이 해고되었다.[69] kt가 창단 1,3년차인 2015, 2017년에 90패를 했고 2019년 롯데, 2020년과 2022년 한화, 2020년 SK가 90패를 했다. KBO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찍을 뻔한 2020년대의 한화 이글스도 2년 연속 90패는 면했다.[70] 이 쪽은 비록 단 한 시즌에 불과하지만...[71] 정확히 딱 5할.[72] 사실 한화도 정식 감독들 중 5할 승률 이상 되는 감독은 김영덕 단 1명만이 유일하다. 다만 한화는 벌써 역대 감독만 20명에 달하는 롯데와 달리 장기집권한 감독이 많아서 이보다 좀 적은 11명의 감독이 거쳐갔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김영덕은 구단 역사상 최전성기인 빙그레 때 감독이라 이글스에서의 성적이 5할대 후반이다.[73] 이 시즌은 3개 팀이 6할 승률을 기록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때도 롯데가 꼴찌를 한 시즌이다.[74] 정규시즌 2위였으나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4패로 탈락하면서 최종순위는 3위.[75] 키움은 6할 승률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승률 인플레 때문에 두산과 SK에 밀려 정규시즌 3위에 그쳤다. 이후 SK를 플레이오프에서 스윕 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최종순위는 2위.[76] 심지어 8월 27일까지는 6경기차 1위였고 OB와 엎치락뒤치락 한 끝에 아쉽게 1위를 놓치고 말았다. 후술하는 2019년 SK의 선행 사례.[77] 지금이야 2년 7억이면 초보 감독들이 받는 연봉이지만 당시에는 국내 감독 중 최고 대우 수준이다.[78] 참고로 명예의 전당에는 롯데전 연승 기록의 선동열, 로나쌩 클럽 초대 회장 성준이 백인천 제외 멤버이다.[79] 재임 내내 포스트시즌에 항상 가서 로이스터와 더불어서 롯데 팬들에게 평판이 좋았던 인물이지만, 고려대학교 감독 시절 뇌물을 받은 입시 비리로 인해 전과자가 된 것 때문에 이미지가 심하게 나빠져서 부득이하게 언급을 꺼린 것으로 추측된다.[80] 시즌 초 사퇴. 이 해 청룡은 후기 리그 우승, 통합 승률 1위를 기록.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81] 백인천의 통산승률이 5할에서 내려앉은게 이 시점이다. 참고로 롯데시절을 제외한 통산성적은 총 553전 275승 264패 11무로 승률은 0.507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