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제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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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켰던 밴드 중 하나인 야드버즈가 전신이며, 야드버즈에서 마지막까지 몸담고 있던 지미 페이지가 1968년에 유능한 세션맨들을 영입하여 결성된 슈퍼밴드에 준하는 밴드이다.[6] 1969년 1월 역사상 가장 강렬한 데뷔 앨범이라고 불리는 1집 Led Zeppelin을 발매했고, 동년 발표한 Led Zeppelin II는 그 유명한 비틀즈의 Abbey Road와 빌보드 차트 경쟁을 했을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7] 이후 밴드가 해체된 198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록 밴드 중 하나로서 하드 록의 대중화와, 헤비 메탈 장르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드 제플린에 대해 잘 모르면 그저 가장 성공한 록 밴드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들은 하드 록, 블루스 록, 프로그레시브 록, 포크 록, 소프트 록, 레게 등 수많은 장르들을 시도한 록밴드였다.[8]
이들은 더 후, 크림,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딥 퍼플, 블랙 사바스 등의 밴드들과 더불어 블루스 혹은 블루스 록이 하드 록 및 헤비 메탈로 발전하는 데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초창기 헤비 메탈의 3대 밴드로 딥 퍼플, 블랙 사바스와 함께 꼽히는데, 그중에서도 레드 제플린은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밴드로서[9]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만큼 하드 록, 메탈 음악과 이 장르들의 영향을 받은 얼터너티브 록을 하는 밴드 중 이 밴드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밴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대표적으로 퀸이나 러시, 메탈리카, 너바나 같은 후대의 하드 록/메탈 및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은 레드 제플린의 곡을 커버하면서 연주 실력을 키우고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더 후 등의 밴드가 주도했던 1차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미국 내에서 미국 밴드들이 인기를 얻는 와중에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킨 밴드이기도 하다.
단순한 음악적 평가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영향력 역시 대단하다고 평가받는데, 멤버 개개인들의 최정상급 역량은 후일 록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드 록, 헤비 메탈 가창법의 역사가 로버트 플랜트 전후로 나뉘고, 지미 페이지는 리치 블랙모어, 에디 밴 헤일런과 함께 메탈 기타 연주법의 창시자로 불리고 있으며, 존 폴 존스의 베이스 주법은 존 디콘, 게디 리 등 후대의 수많은 베이시스트들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나 존 본햄은 현대 드럼의 주법을 전부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드럼계의 지미 헨드릭스'로 불린다.
레드 제플린은 음악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부분에서도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역대 음반 판매량이 공식적으로 약 3억 장 이상으로, 역사상 6번째로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이다.[10] 2인 이상의 그룹으로만 국한한다면 비틀즈에 이어 2위이며[11] , 약 2억 5천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으로 역대 음악 그룹 판매량 순위 3위를 기록한 핑크 플로이드와는 무려 약 5천만 장이나 차이가 난다. 또한 하드 록으로만 범위를 한정시킨다면, 약 2억 장의 판매량을 기록한 AC/DC를 제외한 나머지 밴드들은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성공하였으며, 특히 미국에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둬 현대까지도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록 밴드 순위에서 종종 1위에 오르곤 한다.[12] 또한 이들은 비주얼도 출중하였기에 활동 당시 롤링 스톤스와 함께 가장 많은 수의 그루피 부대를 끌고 다녔던 밴드였다.
해체한지 40년이 넘어가고 정규 앨범도 8장밖에 되지 않으며[13] , 활동 기간도 공백기를 제외하면 10년이 채 안 되는, 아티스트들 중에서도 굉장히 짦은 축에 속한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 제플린은 대중음악과 록 음악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밴드라고 평가받는다. 음악 평론가들에게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어느 리스트던간에 최고의 록 밴드를 뽑을때 다섯 손가락 밖으로 빠지는 일이 드물 정도로 높은 음악적인 평가를 받는다. 후술할 표절 논란 때문에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 음악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키고 하드 록과 메탈의 가장 상징적인 뮤지션으로서 영국은 물론 록 음악 그 자체를 대표하는 뮤지션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3. 상징[편집]
3.1. 밴드명[편집]
레드 제플린은 원래 "레드 제플린"이 아니었다. 전신인 야드버즈의 이름을 따서 "뉴 야드버즈"로 불렸었고, 심지어 1집을 다 녹음했을때도 밴드 명이 "뉴 야드버즈"였다. 그러나 야드버즈의 전 멤버이자, 지미 페이지의 친구이기도 했던 크리스 드레야가 해당 이름이 독창성이 떨어진다면서 반대하여, 새 이름을 물색하고 나섰다.
이후 지미 페이지, 로버트 플랜트가 더 후의 멤버였던 키스 문과 대화를 했을때, 짖궂은 성격의 키스 문이 "너네 밴드는 납으로 만든 풍선처럼 추락할거야"라고 하며 "Lead Balloon"을 언급했다. 그때 옆에 있던 존 엔트위슬이 "납으로 만든 비행선"(Lead Zeppelin)이라고 외치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밴드 멤버들이 그대로 이걸 밴드의 이름으로 붙였다.
여기서 "Lead"는 "Led"가 되었는데, 이는 미국식 영어의 발음 때문이었다. 영국식 영어로 "Lead"는 "레드"로 발음되었지만, 미국에서는 "리드"로 읽었기 때문에 지미 페이지가 미국 사람들이 밴드 명을 잘못 읽을 것을 고려하여 Lead에서 a자를 빼버렸다. 이후로 이 밴드명은 레드 제플린이 해체할 때까지 존속했다.
한국 팬들에게는 레젭으로 줄여서 불리며, 해외 팬들에게는 제플린(Zeppelin)으로 줄여 부른다.
3.2. 로고[편집]
멤버들의 심볼은 1971년 Led Zeppelin IV 앨범 발매와 동시에 공개되었다. 왼쪽부터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 존 본햄 그리고 로버트 플랜트를 상징한다. 영어로는 "Four Symbols"라고도 한다. 수수께끼 같은 디자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추측했지만, 페이지와 플랜트 둘 다 "별 의미 없고 그냥 멋있어보여서 쓴거다"(...)라고 답했다. 지미 페이지의 로고는 지미 페이지가 직접 디자인 했으며, 로버트 플랜트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존 폴 존스와 존 본햄은 고대 기독교의 삼위일체 상징에서 디자인을 따왔다.
이 두가지 로고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비행선 로고를 썼었다. 이는 1집과 2집의 초판 뒷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당 로고는 1집의 커버 디자인 후보였는데, 지미 페이지가 탈락시킨 것을 레이블사가 설득하여 재활용(...)한 것이다. 지미 페이지를 비롯한 모든 멤버들이 해당 로고를 싫어했기 때문에 3집에서 해당 로고는 버려지고, 이후 천사 로고가 사용되었다.
이 천사 로고는 위의 심볼이나 글씨체만큼 자주 사용되지는 않지만, 무척 간지가 나는 탓에 타투와 티셔츠, 머그잔 등에서 절찬리에 활용되는 중이다. 로고의 원본이 된 그림은 아폴론을 그린 것이었지만,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의 과거 종교 성향[15] 때문에 루시퍼를 나타낸게 아니냐는 헛소문이 돌았다. 이후 레드 제플린의 홈페이지가 개설되면서 해당 그림은 타락 천사인 이카루스를 형상화한것이라고 정정되었다.
멤버 심볼은 지미 페이지의 심볼이 알파벳 "Zoso"와 비슷해서 팬들 사이에서는 그냥 편하게 "Zoso"라고 자주 불린다. 또한 이 Zoso라는 명칭은 제목 대신에 이들의 심볼이 적혀있는 Led Zeppelin IV 앨범의 애칭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4. 멤버[편집]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4명이 합친 밴드로 평가받는다. 어느 정도냐면 멤버 전원이 각자의 분야에서 역량으로 TOP 5 안에 가뿐히 들어간다. 그중에서도 존 본햄은 무조건 1위에 선정되고 지미 페이지는 저평가를 받더라도 최소 세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꼽히며, 존 폴 존스나 로버트 플랜트도 록 음악의 범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무조건 들어간다.[16] 게다가 존 폴 존스는 베이시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키보디스트로도 올타임 레전드로 평가받는다.[17] 인간 흉기들의 모임인 더 후나 크림조차 레드 제플린에 비하면 멤버 개개인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 창립자이자 리더인 지미 페이지는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쇼팽과 같은 음악가의 클래식 곡까지 일렉트릭 기타로 편곡해 연주할 정도의 어마무시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넘사벽인 지미 헨드릭스를 빼면 지미 페이지 위에 있는 하드 록 기타리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18] 또한 메탈 계열 한정으로는 지미 페이지를 넘어서거나 동급인 기타리스트가 없다는 말도 나온다.[19]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뽑는 투표에서도 대체로 지미 페이지는 2위나 3위[20]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괜히 에릭 클랩튼, 제프 벡과 함께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 불리는게 아니다.[21] 하드 록의 기타 연주법은 지미 페이지의 전후로 나뉘며, 헤비 메탈의 기타 연주법도 이 사람이 없었다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대중음악 종사자이자 기타 연주자로서 그는 브라이언 메이나 앵거스 영 같은 전설적인 하드 록 기타리스트들보다도 더 방대한 영향을 끼쳤다.
- 존 폴 존스는 존 엔트위슬, 잭 브루스, 폴 매카트니, 브라이언 윌슨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베이시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천방지축으로 날뛰어다니는 3명의 연주를 조용히 뒷받침해줘 하나의 통일성 있는 곡으로 만들어준 것은 존 폴 존스의 영향이 컸다. 또한 베이시스트로서의 평가뿐만 아니라 키보디스트로서도 존 로드 등과 함께 최고의 하드 록, 메탈 키보디스트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수많은 악기들을 수준급으로 다루기에 폴 매카트니, 브라이언 존스, 브라이언 윌슨, 게디 리, 프린스와 함께 최고의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를 꼽을 때 항상 거론되는 전설적인 멀티 플레이어다. 이처럼 다양한 악기를 아우르는 그의 능력은 밴드의 3집에서부터 빛을 발했으며 그중에서도 4집, 5집, 6집 세 앨범이 위대한 앨범이 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 8집 앨범은 본인이 직접 주도권을 잡고 작곡하여 빌보드 200과 UK 차트에서 전부 1위를 차지할 만큼 작곡 능력도 뛰어나다.
- 존 본햄은 이견이 없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로 평가받는다. 드럼계에서 이 사람의 입지는 기타계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입지와 같다.[22] Moby Dick과 같은 곡을 들어보면 왜 그가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리스트에서 최고의 드러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본인의 친구인 키스 문과 함께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드러머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도 드럼을 음악의 주요 요소로 끌어올렸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드럼 연주법의 상당수를 정립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평가 받는다.
- 로버트 플랜트는 로니 제임스 디오, 믹 재거, 프레디 머큐리, 로저 달트리, 이안 길런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로버트 플랜트를 제외하고는 하드 록, 헤비 메탈 보컬의 역사가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수많은 록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의 팝 가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보컬이다. 맑은 미성을 바탕으로 굵직하게 긁어서 처리하는 중음과 날카롭고 선명한 두성으로 처리하는 고음이 트레이드 마크. 때문에 맑은 미성과 거친 탁성이 공존하는 모순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음역대 또한 매우 넓어서[23] 전성기 때는 0옥타브 대의 저음과 4옥타브 대의 고음을 안정적으로(!) 구사하였다. 1973년 이후에는 무리한 창법과 부족한 관리 때문에 목이 많이 나가서 1969~1972년에 보여줬던 마성적인 역량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이후 창법을 바꾸고 꾸준히 관리를 한 덕에 70이 넘은 지금까지 3옥타브는 손쉽게 넘나들고 가끔 4옥타브까지 내다지르는 놀라운 발성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플랜트-페이지의 일원답게 송라이팅에도 능했는데, 그는 특히 작사에 일가견이 있었다. Stairway to Heaven, Kashmir 등 레드 제플린의 대표곡들은 전부 그가 작사를 맡았는데, 이 곡들은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가사를 뽑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곡들이기도 하다.
이 4명은 핑크 플로이드나 퀸처럼 대학교 밴드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비틀즈나 더 후처럼 고등학교 밴드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야드버즈 해체 직전 지미 페이지가 밴드를 살리기 위해 당시 영국에서 실력을 인정받던 세션맨들을 영입하여 모인 것이었기에 각각 출생지도 다 다르다.[24] 즉 슈퍼밴드에 준한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슈퍼밴드가 짧게는 하루에서,[25] 길게 가도 3년을 채우기가 어려운데, 무려 12년 동안이나 유지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26] 멤버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최상이었기 때문에, 멤버들의 역량은 매우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하며 통일성도 갖추게 된 것이다.
레드 제플린은 퀸, 핑크 플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영국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미들클래스 출신의 록밴드인데,[27]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 모두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상당히 부유한 어린 생애를 보냈으며, 특히 로버트 플랜트는 원래 회계사를 준비했을 만큼 머리도 좋았다. 밴드 멤버들중에서 워킹클래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존 본햄 뿐이다.
4.1. 플랜트-페이지[편집]
5.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평가와 영향력[편집]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평가와 영향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인기[편집]
언론에 의도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멤버들 개개인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역량, 헤비하면서도 세대를 아우르는 하드 록, 하드 록 외에도 다양한 장르들을 시도했던 점 등 때문에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장 인기있는 록밴드로 자리잡고 있다. 활동 당시 밴드의 별명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밴드’였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했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메탈 음악에 빠지는 젊은 세대들이나 기타라는 악기를 접하고 록 음악을 접하는 이들에게 록 음악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연주를 보여주는 밴드 중 하나인 레드 제플린은 정말 아이돌같은 인기를 가지고 있다.[28]
1970년대 레드 제플린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해, 1970년대 총 앨범 판매량을 정산할때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다.[29] 이는 퀸, 핑크 플로이드, 폴 매카트니 등 1970년대에 인기 있던 다른 음악가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다.[30] 하드 록/메탈 계열 밴드 중에서 레드 제플린은 독보적인 음악 판매량 1위이다. 흔히 3대 클래식 메탈로 불리는 밴드중 레드 제플린을 제외한 블랙 사바스와 딥 퍼플의 앨범 판매량을 합쳐도 레드 제플린의 절반밖에 되지 않을 정도다. 하드 록 계열 밴드중 판매량 2위인 AC/DC의 앨범 판매량이 약 2억 장인데 레드 제플린의 앨범 판매량은 약 3억 장으로 AC/DC를 무려 1억 장 차이로 상회한다. 또한 레드 제플린은 정규 앨범이 고작 8장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15장의 정규 앨범이 있는 핑크 플로이드와 퀸, 그리고 23장의 정규 앨범이 있는 롤링 스톤스보다도 약 1억 장 정도나 더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 특히 미국에서의 인기가 엄청났기에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기도 했다.[31][32]
70년대에 활동한 밴드라 베이비 부머 세대들에게만 인기가 높을 것 같지만,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헤비한 사운드를 선호하는 현 젊은 세대들에게도 높은 인기를 자랑한다. 비틀즈, 퀸 등과 함께 현 세대들에게 인기 있는 록밴드 top 3 안에는 꼭 들어간다. 심지어 인터넷 투표나 잡지 독자 투표에서는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퀸이나 핑크 플로이드는 물론이고 영향력과 시기상 레드 제플린보다 선배인 비틀즈나 롤링 스톤스보다도 더 많은 표를 받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2018년 월스트리트 저널의 통계 산출에 의해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록밴드' 순위를 매겼는데, 레드 제플린은 여기서 2위를 기록했다.[33]#
단순한 대중적 인기 뿐만 아니라 록 전문가들 중에서도 팬들이 아주 많다. 어느 리스트에나 레드 제플린은 위대한 아티스트 top 20 안에는 무조건 들어가며, 하드 록이나 메탈로만 한정할때는 1위를 하는 경우가 잦다. 또 록 밴드로 한정할때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다음의 위치를 핑크 플로이드와 라디오헤드와 함께 3위 자리를 노린다. [34] 또한 음악가들 중에서도 팬들이 아주 많은데, 자세한 것은 후술할 ‘유명한 팬들’ 문단 참조. 그런만큼 메탈, 하드록 입문자들에게 추천 아티스트로 많이 언급된다. 유명한 영화인 스쿨 오브 락에서도 주인공이 록 음악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35]
영국 밴드이지만 미국에서 더욱 큰 성공을 거뒀고, 지금도 영국보다는 미국에서 더 큰 사랑을 받는 밴드이다. 헤비 메탈의 역사를 거론할때도 영국 음악계에서는 대체로 블랙 사바스를 메탈의 시초로 보지만, 미국에서는 레드 제플린을 메탈의 시초로 보는 의견이 더 많다. Led Zeppelin IV 역시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미국인들의 레드 제플린 사랑은 유별나서, 20대들을 대상으로 한 "인기있는 록밴드" 투표에서도 언제나 3위권 안에 들고, 미국의 케이블 음악 채널 VH1이 조사한 "최고의 하드 록 밴드" 투표에서도 레드 제플린이 압도적인 표차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이는 1980년대 미국에서 건즈 앤 로지스나 밴 헤일런, 메탈리카 등 여러 헤비 메탈 밴드들이 아주 큰 인기를 끌었던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퀸은 미국에서는 인기가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영국에서는 매우 인기있는 밴드다. 당연하지만 영국에서의 레드 제플린 인기도 매우 높은데, 이를 반영하듯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폐회식 당시 다음 개최지인 런던을 소개하는 무대에서 지미 페이지가 초대받아 Whole Lotta Love를 연주하기도 했다.
한편 의외로 빌보드 핫 100에서는 신통찮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내 인기는 한참 아래였던 퀸도 빌보드 핫 100 1위 곡은 2개를 냈고, 핑크 플로이드도 1개의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냈는데, 레드 제플린의 빌보드 핫 100 최대 기록은 Whole Lotta Love가 기록한 3위였다. 이는 레드 제플린이 싱글 발매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하더라도 제한적으로 발매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36] 레드 제플린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 초중반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빌보드 경쟁이 그 어느때보다 치열했던 시기 한 가운데에 껴있음을 감안해야한다.[37] 그중에서도 레드 제플린이 전성기를 누린 1970년대 초중반은 1980년대 중반과 더불어, 레전드급 아티스트들의 차트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다. 핑크 플로이드, 퀸, 롤링 스톤스, 더 후, 제네시스, 스티비 원더, 데이비드 보위, 비 지스, 딥 퍼플, 윙스, 밥 딜런, 폴 사이먼까지 대중음악 그 자체를 만든 뮤지션들이 그야말로 폭탄처럼 명반과 명곡을 쏟아내던 시기가 바로 1970년대 초중반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터 그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앨범 판매량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해 싱글 발매를 무척 꺼리던 경향이 있었다.[38]
또한 몬머스 대학교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의 레드 제플린은 계층별로 취향이 가장 크게 갈리는 밴드 중 하나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레드 제플린은 미국 우파, 공화당 지지자들로부터 매우 인기있는 밴드이다.[39] 더욱 특기할 만한 건 레드 제플린은 남성 팬의 수가 여성 팬에 비해서 압도적이고, 60세 이상의 팬은 거의 없지만 20대 팬의 수가 상당하다는 점이다.[40] 참고로 AC/DC가 레드 제플린과 거의 일치하는 결과를 보였다.
레드 제플린은 역사상 3번째로 많은 RIAA 다이아몬드(1,000만장) 인증 판매고를 올린 앨범을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총 5회이며 Led Zeppelin II, Led Zeppelin IV, Houses of the Holy, Physical Graffiti, Led Zeppelin Boxed Set이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았다. 참고로 1위는 9회를 올린 가스 브룩스, 2위는 6회를 올린 비틀즈이다. 이 외에 2회 이상의 RIAA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은 아티스트가 별로 없다.[41]
7.1. 한국에서의 인지도[편집]
세계적으로는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세대를 가리지 않고 레드 제플린의 인기가 높으나, 록 불모지인 국내에서는 롤링 스톤스, 더 후, U2만큼은 아니더라도 해외에 비해 인지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이는 레드 제플린의 활동 시기인 1970년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인 사회 정책으로 인해 레드 제플린의 곡이 철저히 검열당했으며, 후술하겠지만 내한 공연조차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레드 제플린의 각종 히트곡들이 방송 프로그램들에 자주 쓰이며 젊은 세대에서의 인지도가 올라갔으나[42][43] , 세계적으로는 상업적 수준과 인기가 레드 제플린보다 낮은 퀸, 핑크 플로이드보다도 국내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이는 단지 검열 때문만은 아니며, 레드 제플린의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가 한국인의 취향에 잘 맞지 않는 탓도 크다. 언급한 퀸의 경우 워낙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지만 블루스 색채는 거의 띄지 않으며, 핑크 플로이드는 한국인들의 한의 정서와 묘하게 잘 맞는 음악을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나름의 인기를 끌었던 것을 생각하면, 레드 제플린의 낮은 국내 인기가 단지 검열 탓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더욱이 동시기에 활동하던 딥 퍼플과 비교해 볼때도, 세계적인 위상을 보면 레드 제플린이 넘사벽으로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딥 퍼플의 인지도는 나름 괜찮으며 두 밴드를 라이벌로 취급하는 경향도 있다. 물론 딥 퍼플도 록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밴드이긴 하지만, 레드 제플린과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것. 록 밴드의 자유로운 활동이 억압되던 당시 국내 여건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국내에서 레드 제플린의 인기는 다른 록 밴드들과 비교해봐도 이례적일만큼 높지 않은건 사실이다.
그렇기에 현역 당시 아시아 투어를 할 때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수많은 밴드들처럼 일본까지밖에 오지 않았다.[44]
이처럼 일반인들이나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 인지도는 낮을 수 있지만 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밴드들 중 하나인 만큼 한국의 록덕후들은 뼛속까지 잘 알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서는 모르면 간첩 취급을 받는 밴드이기도 하다. 또한 70년대와 80년대 팝 음악을 향유하던 세대들에게는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45] 대한민국 록 음악 계보의 2세대인 시나위, 부활, 백두산 같은 메탈, 하드 록 밴드들에게는 성서처럼 받들여지는 밴드이며, 특히 김태원은 지미 페이지의 기타 연주를 보면서 음악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각종 예능, 영화에 Immigrant Song이 BGM으로 자주 삽입되었으며, Stairway to Heaven, Whole Lotta Love, Rock and Roll, Black Dog같은 곡들은 유명 팝 아티스트들과 국내 가수들도 많이 커버한 곡인지라 록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노래이기에, 레드 제플린의 히트곡들을 들려주면 젊은 세대들도 아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말하자면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 개봉 전의 퀸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46] 현재 떡밥만 나오고 있는 레드 제플린의 전기 영화가 제작되어 국내에 개봉한다면 퀸처럼 국내 인지도가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47]
또한 밴드 인지도 자체는 낮지만,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은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는 몰라도 개별 멤버들은 알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기타를 배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 바로 지미 페이지이며[48] , 드럼을 배우는 사람들은 전부 존 본햄이 확립한 주법들을 배운다.[49] 로버트 플랜트는 헤비 메탈 보컬의 대명사로 꼽히며, 존 폴 존스의 베이스 라인은 하드 록, 블루스 록을 연주하면서 한 번은 연주하고 넘어가야 할만큼 중요하다보니[50] 알 사람들은 다 아는 편이다.
종합하자면 레드 제플린은 더 후, U2, 롤링 스톤스만큼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극도로 낮은 밴드는 아니지만, 록 불모지인 한국답게 세계 시장에서만큼 인기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앨범이 아닌 곡으로 록밴드들에 입문하는 한국 특성상 Stairway to Heaven, Babe I'm Gonna Leave You, Immigrant Song 등의 명곡들은 인기가 많은 편이다. 또한 젊은 록 팬들한테도 인기가 많은 해외와는 다르게 레드 제플린은 주로 7080 록덕후 세대들에게 인기가 많으며, 국내의 젊은 세대들은 일부 히트곡들을 제외하면 밴드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곡도 이게 레드 제플린의 곡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록 음악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70년대와 80년대에 라디오 혹은 빽판으로 록 음악을 듣던 세대들에게는 록밴드 중에서도 레드 제플린, 퀸,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의 음악을 좋아하고 즐겨 들었다는 증언들이 많다.
7.1.1. 내한 공연[편집]
활동 당시부터 현재까지 생존한 레드 제플린의 멤버 3명이 단체로 내한 공연을 했던 적은 없으나, 내한 공연이 개최될 뻔했던 적은 있다. 1970년대 중반, 즉 레드 제플린의 전성기 시절 한 회사에서 레드 제플린의 내한 공연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한국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정부는 레드 제플린이 청년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험한 밴드라며[51] 멤버들이 머리를 전부 밀고 오면 내한 공연을 허가해준다며 엄포를 놓았으며[52] , 당연히 레드 제플린의 처음이자 유일한 내한 공연 추진 시도는 이렇게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었다. 만약 레드 제플린 급의 거대 밴드가, 심지어 전성기 시절에 내한 공연을 했다면, 한국 록 음악의 역사 역시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53]
그런데 2019년 9월 2일 레드 제플린 멤버 중 처음으로 존 폴 존스가 기습적으로 내한 공연을 개최하였다. 존 폴 존스 본인이 결성한 2인조 밴드 ‘선스 오브 치폴레’의 동북아 투어 일환으로 내한 공연을 한 것인데, 심지어 유료 공연이었던 일본 공연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무료로(!) 공연을 열었다.[54] 개최된 내한 공연은 이메일로 미리 예약한 100명의 관객들만 관람할 수 있었으며, 셋리스트를 미리 정한 것이 아닌 즉흥 연주로 진행되었다. 내한 당시 존 폴 존스는 “한국에서 공연할 수 있게 되어 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공연이 끝나고 존 폴 존스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사진도 찍는 등 국내의 레드 제플린 팬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다른 멤버들의 내한 공연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나, 2020년 코로나 19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다른 멤버들의 내한 여부는 불투명해졌다.[55]
7.2. 유명한 팬들[편집]
8. 시도한 음악 장르[편집]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시도한 음악 장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밴드 관련 인물[편집]
10.1. 밴드 관계자[편집]
- 피터 그랜트 (Peter Grant)
- 에디 크라머 (Eddie Kramer)
- 조지 치언츠 (George Chkiantz)[65]
- 앤디 존스 (Andy Johns)
- 힙노시스 (Hipgnosis)
10.2. 투어 및 세션 멤버[편집]
- 제이슨 본햄 (Jason Bonham)
- 필 콜린스 (Phil Collins)
- 마이클 리 (Michael Lee)
- 토니 톰슨 (Tony Thompson)
- 폴 마르티네즈 (Paul Martinez)
- 이언 스튜어트 (Ian Stewart)
10.3. 기타 관련 인물[편집]
- 크리스 드레야 (Chris Dreja)[71]
- 데이비드 주니퍼 (David Juniper)
크리스 드레야와 마찬가지로 야드버즈 소속 멤버였으며, 현재까지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둘은 지미 페이지와 사적으로 친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지미 페이지, 제프 벡, 에릭 클랩튼을 엮어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는 한국에서만 통용된 어휘이다. 이 세 명은 레드 제플린 해체 후 세계 투어를 함께 다니는 등 야드버즈 소속으로 같이 협업도 했었고, 야드버즈 재결성 공연 때 언제나 함께 라인업으로 서는 사람이기도 하다. 에릭 클랩튼과 지미 페이지는 1960년대 후반 레코딩 문제로 잠깐 사이가 멀어졌지만, 이후 원만하게 잘 해결됐는지 현재까지도 공식 석상에서 같이 나오는 등 잘 지내는 관계인 듯하다.
- 키스 문 (Keith Moon)
동료 밴드였던 더 후의 드러머이다. 키스 문은 1960년대부터 지미 페이지와 사적으로 친했으며,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와 함께 음악 활동을 하기도 했다. 또한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 이름을 지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지미 페이지뿐만 아니라 레드 제플린 멤버 전체와 친했기에 1977년에 레드 제플린 공연에 게스트로 참석하여 존 본햄과 함께 드럼을 연주하기도 했다.
11. 기타[편집]
- 걸작 코미디 영화이자 모큐멘터리(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계의 레전드급 작품으로 치는 롭 라이너 감독의 1984년작 영화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 (This Is Spinal Tap)에서 레드 제플린이 여러 번 패러디된다. 이 영화는 Spinal Tap이라는 가상의 헤비 메탈 밴드를 설정해 놓고[72] 그게 마치 실존 밴드인 척 다루며[73] 그 밴드의 역사를 회고하는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록음악계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하여 웃음을 주는 게 목적이라서 여러 실제 유명 록밴드들의 일화와 디테일들을 이 가상 밴드에 이입시켜서 패러디하고 있는데, 70년대를 대표하는 록밴드인 레드 제플린 역시 여러 번 패러디된다.
그리고 스파이널 탭의 전 드러머가 광란의 파티 중에 과음하다가 토사물에 목이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물론 존 본햄의 그리 깔끔하지 않은 사망 과정을 대놓고 패러디한 것. 근데 그 영화속 드러머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의학적 검사 결과 드러머 자신의 토사물이 아닌 다른 멤버들의(!!!) 토사물이 목을 막아서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져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나온다. 70년대를 주름 잡았던 공룡급 인기 록밴드들의 방탕한 쾌락문화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로 과장해서 풍자한 장면인데, 아무리 풍자 코미디 영화라고 해도 고인의 사망까지 코미디의 대상으로 삼는 건 심하다는 느낌도 드는 장면이다.
그밖에도, 공연 중에 무대에 웅장한 스톤헨지 모형을 멋지게 등장시키려다가 일이 꼬여버려서 코미디가 되는 장면은, 레드 제플린의 1977년도 미국 오클랜드 공연 때 스톤헨지 석상 모양의 모조품을 무대에 등장시켰던 것을 패러디한 것이다.
- 밴드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전용기까지 따로 있었다. 해당 기체는 보잉 720의 "Starship" 기체로 본래는 레드 제플린의 전용기가 아니었지만 1973년경 레드 제플린이 3만달러 정도를 주고 기체를 빌려 전용기로 타고 다녔다. 이 기체는 라이벌 밴드였던 딥 퍼플은 물론이고 롤링 스톤스와 올맨 브라더스 밴드 등 여러 거대 록밴드들이 타고 다녔다. 1977년 레드 제플린 멤버들을 태우고 마지막 비행을 했으며 이후 결함이 생겨 루턴 공항에 보관되어져있다가 1982년 해체되었다.
- 더 후의 보컬인 로저 달트리가 레드 제플린을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 꼽은 것과 달리, 기타리스트인 피트 타운젠드는 레드 제플린을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레드 제플린이 메탈 음악에 대한 더 후의 업적들을 전부 가로채갔고 하드한 드럼과 베이스 등 여러 부분들에서 더 후를 따라했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그러나 정작 피트 타운젠드는 지미 페이지와 친한 사이이며 존 폴 존스, 존 본햄과는 음악 활동도 같이 했던 적도 있다(…).
츤데레?사실 본인도 레드 제플린을 음악적으로만 싫어하는 거지 멤버들과의 우정이 싫다는 건 아니라고 밝혔다.
-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즈는 레드 제플린의 광팬까진 아니라고 하지만, 지미 페이지와의 우정 때문에 레드 제플린의 콘서트를 자주 보러 왔었다고 한다. 키스 리처즈와 콤비를 이루는 믹 재거도 지미 페이지와 친했지만 상술하였듯이 레드 제플린의 팬인것도 있어서 콘서트를 자주 보러 갔었다고.
- 2012년에 결성되고 2017년에 데뷔한 미국 미시간 주 출신 록밴드 그레타 반 플릿이 레드 제플린의 재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음악 스타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보컬의 목소리가 로버트 플랜트와 너무 비슷해서.. 그래서인지 플랜트도 인터뷰에서 이들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했었다.
- 교통 사고를 많이 당한 밴드이다. 로버트 플랜트가 총 3번, 존 본햄이 총 2번의 교통 사고를 당했다.
- 과거 문희준이 한 라디오 방송에서 “레드 제플린이 누구예요?”라고 발언했다가 논란이 되어 대중들에게 대차게 까였던 적이 있다. 당연히 레드 제플린을 진짜로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고, 문희준이 이러한 질문을 하면 이윤석이 레드 제플린에 대해 설명해주는 컨셉으로[74] 방송을 진행했던 것이다. 당시 문희준은 안티가 어마어마하게 많았기에 이러한 방송 컨셉으로도 욕을 먹었던 것.
- 레드 제플린의 곡들은 저작권료가 비싸기도 하고, 밴드 멤버들이 대중매체에 밴드의 곡들이 쓰이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대중매체에 레드 제플린의 원곡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인지도가 인지도인 만큼 언급 자체는 굉장히 많이 된다. 대표적으로 각종 마블 영화들부터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그리고 CONAN같은 토크쇼들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 롤링 스톤스, 더 후, 퀸 등 동시대의 밴드들이 전성기 시절 라이브 공연의 영상 자료를 많이 남긴 것에 비해 레드 제플린은 전성기 시절 라이브 영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75] 심지어 밴드의 역량이 가장 최정점이라고 평가받던 1971년도에 찍었던 라이브 영상은 아예 없으며, 그나마 다른 년도에 찍은 영상들도 죄다 멤버들이 지쳤던 투어 막바지에 찍었다(…). 이는 “레드 제플린의 라이브는 그저 그렇다”는 현대의 편견에 기여하는데 큰 원인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레드 제플린의 역량 최정점 시절인 1971년의 라이브를 감상할 수 있는 공식 음원 자료는 BBC Sessions의 디스크 2밖에 없으며, 그 외의 나머지 자료들은 전부 부틀렉으로밖에 없다.[76]
- 유독 로스엔젤레스 공연에서 퀄리티 좋은 라이브 실력을 뽐냈다.
- 데뷔 50주년을 맞아 전용 플레이리스트 프로그램을 출시했다.
- 1969년 1월 Let It Be 세션 당시 신인 밴드였던 레드 제플린이 무려 비틀즈 멤버들에 의해 거론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닌 것이, 리더 지미 페이지는 유능한 세션맨이자 야드버즈 소속 멤버였기에 영국 음악계에서 이미 유명한 뮤지션이었고 더 후, 롤링 스톤스, 제프 벡, 에릭 클랩튼 같은 유명 뮤지션들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기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소식을 접했을 수 있다. 물론 레드 제플린 데뷔 이후 해당 영상에서 점심 타령을 하던(…) 조지 해리슨은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친해지게 된다.
글린 존스[77]
: 너 지미 페이지 앨범 들어볼래?조지 해리슨: 지미 페이지?
글린 존스: 이번에 새로운 그룹에서 앨범 냈어.
조지 해리슨: 지미 페이지는 야드버즈 멤버 아니야?
글린 존스: 맞아.
(중략)[78]
가 드러머인데 얘도 개쩔어.
- 눈에 띄는 신인들이나 뮤지션들이 보이면 ‘제2의 레드 제플린이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이나 언론들이 평하기도 한다. 이런 타이틀로 불렸던 밴드로는 러시가 있다.[80][81] 현재는 위에 언급된 그레타 반 플릿이라는 밴드가[82] 미국의 레드 제플린으로 불리고 있다.
11.1. VS놀이?[편집]
레드 제플린이 워낙 상업적, 음악적으로 성공했던 밴드였다보니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레드 제플린과 다른 밴드를 비교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당장 구글에서도 Led Zeppelin을 검색하면 VS놀이의 결과물(…)들이 연관 검색어에 뜰 정도…
11.1.1. 핑크 플로이드와의 비교[편집]
서구권에서 가장 많이 비교되는 밴드는 핑크 플로이드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고, 비슷한 수준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으며, 출신지와 출신 계급까지 같기 때문이다.[83] 또한 두 밴드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기네스북에 등재된 네 개의 밴드 중 하나라는 공통점도 있다.
두 밴드는 비슷한 점도 많았지만 다른 점도 많았다. 먼저 레드 제플린은 지미 페이지가 야드버즈를 이어 나가기 위해 유능한 세션맨들을 영입해서 결성한 슈퍼밴드에 가까웠지만, 핑크 플로이드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끼리 만든 스쿨 밴드에서 출발했다. 또한 레드 제플린은 하드 록, 블루스 록, 헤비 메탈, 포크 록, 인도 및 중동 음악 등 수많은 장르의 음악을 추구한 반면, 핑크 플로이드는 사이키델릭 록이 발전한 형태의 프로그레시브 록[84] 을 추구했다는 점 역시 다른 점이다. 이렇듯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듯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밴드가 차트에서 비슷한 수준의 성공을 거뒀단 사실 때문에 해외 리스너들과 심지어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는 비교의 대상이 된다.
이를 반영하듯 구글에서 Led Zeppelin vs 혹은 Pink Floyd vs라는 검색어를 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연관 검색어가 상대 밴드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극성 레드 제플린 빠들과 극성 핑크 플로이드 빠들은 한 쪽을 찬양하면서 한 쪽을 까내리기도 하지만[85] , 사실 두 밴드의 멤버들은 서로 친한 사이이며 서로의 콘서트도 자주 보러 갔다고 한다.[86]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는 음악 스타일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당대에 라이벌 취급을 받지는 않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음악적인 평가나 위상 모두 거의 동급으로 평가받는다.
11.1.2. 딥 퍼플과의 비교[편집]
자국인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내 그리고 일본에서는 보통 딥 퍼플과 비교된다. 모두 70년대에 활동한 하드 록 및 블루스 록 기반의 메탈 밴드이고, 두 밴드 모두 아시아권에서는 클래식 록을 처음 접할 때 많이 추천되는 밴드이기 때문이다.
이 두 밴드가 비교되는 것은 둘 모두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경계선에 있는 음악을 했지만 둘의 음악은 사실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의 경우 주로 블루스 같은 흑인 음악에 뿌리를 둔 밴드였기 때문에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보다는 즉흥성에 초점을 두었고, 또한 네 명이 온전히 통일되어 하나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멤버들이 자신의 기량을 따로따로 분출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반면 딥 퍼플은(Mark 2 기준) 흑인 음악 계열이 아닌 클래식, 즉 백인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리치 블랙모어나 존 로드는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수업을 받았고, 이안 길런 역시 아버지가 성악가였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었다. 클래식 음악은 개개인의 개성 발현보다는 합주하는 인원 전체의 조화를 훨씬 중시하기 때문에 딥 퍼플의 경우 개인주의적 성향보다는 공동체주의적 성향을 지녔고, 멤버 다섯 명이 완전히 합을 맞춰 통일된 사운드를 만드는 경향이 강했으며[87] , 즉흥 연주는 최대한 자제되었다.[88] 거기에 기타 솔로를 강조했던 레드 제플린과는 달리 기타와 키보드가 서로 솔로를 주거니 받거니하는 방식을 강조했던 것까지, 거의 공통점이랄 것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양쪽 팬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비교는 심한데, 한국 내에서 레젭 팬들과 딥 퍼플 팬들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록 커뮤니티 내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기도 했고, 음악적인 성향도 비슷했으며 록 음악 팬들 특유의 록부심까지 겹쳐 일어난 일. DP팬은 LZ가 약쟁이들이고 표절곡 투성이에 라이브의 연주 실력도 좋지 않다고 까며[89] , LZ팬은 DP가 리치 블랙모어가 성격이 나쁘고 멤버들 간의 불화가 심하며 시기별로 멤버 실력과 곡 수준 차이가 많이 난다고 깐다. 종종 나이 지긋이 먹은 레젭 팬과 딥 퍼플 팬이 인터넷 게시판에서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서로를 욕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물론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90] 이쪽도 위의 핑크 플로이드와 마찬가지로 각 밴드의 멤버들은 서로 친한 사이이며, 심지어 존 본햄과 리치 블랙모어는 엄청난 절친이다.[91] 또 이건 딥 퍼플 시절 이야기는 아니지만 리치 블랙모어가 Rainbow로 활동할 당시 만들었던 대곡 Stargazer를 만들었을 때도 레드 제플린의 Kashmir를 듣고 영감을 얻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이 70년대 당시 라이벌이었다는 평가는 70년대 초반에 국한된다. 아시아에서 딥 퍼플의 위상이 엄청났기에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레드 제플린이나 블랙 사바스와 엮는 관점이 많아졌지만, 두 밴드가 가장 잘 나가던 70년대 당시에도 레드 제플린은 딥 퍼플보다 10배 이상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92]
미국시장에서는 현재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을 동급으로 보지는 않는다. 국내 또는 일본에서는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을 비교하는 글이 수두룩하지만, 구글에서 영어로 레드 제플린 vs 딥 퍼플을 검색해도 어느 밴드의 기타 리프가 더 낫냐 정도의 영상들은 존재하지만 밴드 자체의 위상이나 업적을 비교하는 글은 많지 않다.
이는 비교적 전성기가 짧았던 딥퍼플에 비해 레드 제플린은 70년대 내내 정상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11.1.3. 블랙 사바스와의 비교[편집]
블랙 사바스는 레드 제플린보다 조금 더 헤비하고 스트레이트한 음악으로 헤비 메탈을 정립한 밴드이고, 70년대 활동기에는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에 월등히 밀리지만, 현재는 올타임 록 밴드를 꼽을 때 20위권 안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음악적인 영향력을 떠나서 당대의 인기나 위상으로 비교해 볼 때, 블랙 사바스 역시 딥 퍼플보다는 높지만 레드 제플린보다는 확연히 한 단계 아래로 평가받는다.
11.1.4. 그 외[편집]
이 외에도 해외에서는 데이비드 보위, 아이언 버터플라이, 더 후, 롤링 스톤스 등의 아티스트들과도 VS놀이를 하며 심지어 비틀즈까지 소환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다만 비틀즈는 음악적인 위상 면에서 넘사벽 수준이기에, 비틀즈와는 음악적인 면모가 아닌 상업적인 인기 측면에서만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93] 롤링 스톤스 또한 인기는 레드 제플린보다는 낮았지만 음악적 영향력 면에서는 레드 제플린보다 더 높은 밴드라고 평가받기에, 보통 레드 제플린은 데이비드 보위, 닐 영과 더불어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밥 딜런 다음가는 아티스트로 평가받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또한 국내에서는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를 퀸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이는 퀸의 인기가 높은 국내에서만 이루어진다.[94] 다만 각주로 서술된 몇몇 부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비교들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에, 이러한 VS놀이가 진지하게 밴드들 간의 우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12. 레드 제플린에 대한 언사[편집]
나는 헤비한 음악을 좋아하고, 이런 음악을 ‘록 음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는 레드 제플린을 좋아한다. 이들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미 페이지는 개쩌는[95] 기타리스트이다.
나는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와 1960년대부터 알고 지냈다. 그리고 약 10년 뒤 그들은 (레드 제플린이라는) 매우 훌륭하고 성공적인 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레드 제플린의 콘서트를 보러갔을 때가 생각난다. 우레와도 같은, 아주 훌륭한 라이브였다.
레드 제플린은 최고의 밴드이며, 로버트 플랜트는 현 시대에서 가장 독창적인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현재 그들이 누리고 있는 성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관리구조나 음악, 이미지까지, 그들은 록 밴드의 청사진이었다.
레드 제플린의 1집을 들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훌륭하고, 단단하고, 아주 헤비한 로큰롤 밴드다. 그들이 만든 곡에서 촌스러운 곡은 하나도 없다.
레드 제플린은 이미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있던 밴드였다. 우리는 그들처럼 노래를 쓰고 싶었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고 싶었으며 행동도 그들처럼 하고 싶었다.[96]
나는 지미 페이지가 정통 블루스를 연주했다기 보다는 로커빌리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가 연주하는 스타일을 즐긴다. 레드 제플린과 제프 벡, 그리고 나 사이에는 아무런 경쟁 관계도 없다. 그저 독특하고 훌륭한 다른 스타일을 연주할 뿐이다.
내가 새 노래를 작곡하면 얼마 안 가 레드 제플린의 노래 중 정확히 내 노래와 같은 스타일의 곡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한다.
내가 처음으로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들었을 때 차를 세우고 노래를 끊임 없이 계속 들었다.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4인조 밴드이다.
레드 제플린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그들이 환상적이고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초창기의 우리는 크림, 지미 헨드릭스와 공연을 하면서 발전했지만, 제플린은 전혀 다른 단계로 밴드를 발전시켰다. 여기에 제플린의 힘이 있다.
레드 제플린의 공연을 처음 보러갔을 때가 기억난다. 존 본햄이 드럼 솔로를 시작하자, 그 사운드의 압박에 프레디와 나는 엎어 자빠졌다.
레드 제플린에 대해 많이 언급한 적은 없지만, Physical Graffiti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이다.
내게 있어서 진정한 로큰롤은 존 본햄이 죽고, 레드 제플린이 해체되면서 끝났다.
지미 페이지는 기타리스트로서 매우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좋아한다. 또한 나는 레드 제플린이 시도했던 (음악적) 실험들을 정말 좋아한다.
만약 당신이 미국에서 자랐다면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그리고 롤링 스톤스의 영향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음악이 항상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난 어릴적 가톨릭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가톨릭 학교에서 내가 믿던 유일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레드 제플린이었다.
나는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에 어마어마한 열렬함을 가지고 있으며, 레드 제플린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가 단 하나의 밴드와 잼을 할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레드 제플린을 택하겠다.
조나단 데이비스 (Korn의 리더)
13. 투어[편집]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라이브 투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개별 문서가 존재하는 곡[편집]
분류:레드 제플린 노래 참조.
15. 디스코그래피[편집]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1. 싱글[편집]
싱글 자체를 거의 발매하지 않았고, 그나마 발매된 싱글도 죄다 제한적으로만 발매했기에 싱글 차트에서는 죽을 쑨 것으로 유명하다.[98] 어느 정도냐면 당대 최고의 히트곡인 Stairway to Heaven조차 싱글로 발매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물론 마찬가지로 최고의 히트곡인 Whole Lotta Love나 Immigrant Song은 싱글로 발매하긴 했으나, 상술했듯이 극히 제한적으로만 발매하였다. 그렇기에 심지어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보다도 싱글 성적이 안 좋다.[99]
레드 제플린이 싱글 발매를 거의 안 했던 이유로는 196~80년대의 빌보드 핫 100이 지금과는 달리 레드오션이었던 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매니저인 피터 그랜트와 지미 페이지가 싱글 발매가 앨범 판매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싱글 발매에 극도로 부정적이었던 점도 컸다.[100] Black Dog의 싱글 발매도 원래 예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부가 수익금을 벌기 위하여 발매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발매한 몇 안 되는 싱글도 상술했듯이 제한적으로만 발매되었다. 오히려 그러고도 빌보드 핫 100에서 4위를 차지한 Whole Lotta Love가 정말 대단한 것.
15.1.1. 미국 빌보드 핫 100[편집]
15.1.2. 영국 차트[편집]
15.1.2.1. 11위~30위[편집]
- Whole Lotta Love (21위,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