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두앵(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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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벨기에의 제5대 국왕.
레오폴드 3세와 스웨덴의 아스트리드의 장남(둘째)이자, 알베르 2세의 형. 현임 국왕인 필리프의 큰아버지이자, 노르웨이의 국왕 하랄 5세와 이종사촌지간이다.
2. 생애[편집]
레오폴드 3세 국왕의 장남으로 출생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던 그는 1940년 아버지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아버지를 따라 스위스에 갔다. 이후 레오폴드 3세가 퇴위하자 1951년 6월 17일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의 모습은 일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90년 벨기에 의회에서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을때, 보두앵은 자신이 가톨릭교도라는 이유로 법안 공포를 거부한 바 있다. 이에 내각은 국왕 권한을 일시 중지하고 자체적으로 법안을 공포했다. 서명 거부나 국왕 권한 중지는 내각과 국왕이 합의하고 벌인 일이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일부 국민들에게 비판받았다.
보두앵은 상당히 감성적인 왕이었다고 전해지며, 1959년에는 벨기에령 콩고의 독립을 인정했다. 문제는 이 양반이 콩고 독립을 축하하는 콩고 의회 연설에서 콩고 독립은 무려 레오폴드 2세의 천재성과 용기로 시작된 작업의 정점이라고 묘사하며 벨기에의 콩고 지배를 옹호, 미화했다는 것이다(...)
이를 듣고 분노한 콩고 독립운동가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는 벨기에 식민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벨기에의 만행을 고발하는 연설로 맞섰고, 이에 기분이 상한(...) 보두앵은 후일 벨기에 정부의 루뭄바 암살을 최소 방관, 간접적 지원했다.
보두앵이 구체적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지만, 어쨌든 최소 알고는 있었다는 것이 공식 조사 결과. 참고로 루뭄바 암살은 시체를 아예 산으로 녹여 금니[1] 만 남기는 등 수법이 특히 잔혹하다고 비판받는다.
보두앵은 스페인의 귀족 파비올라(1928–2014)와 중매를 통해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생기지 않았는데, 왜 자식이 없는가에 대한 벨기에 국민들의 궁금증이 증폭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파비올라 왕후가 5번이나 유산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는데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008년에 파비올라 왕후가 공식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로는, 유산을 5번 하였고 그 중 하나는 사산이었다고. 자식이 없는 것에 큰 상실감을 얻지 않고 자선사업으로 그 상실감을 메꿨다고 한다.
결국 보두앵 국왕은 1993년 7월 31일 심장마비로 서거했는데, 왕위를 물려받을 자녀가 없었기에 후계는 그의 남동생인 왕세제 알베르 2세에게 넘어갔다.
해외로 도망간 아버지를 대신해 왕위를 이어받아 42년이나 재위하였고, 그 기간이 2차대전 후 유럽의 재건 기간부터 시작해서 벨기에의 현대화까지 치세가 이어진 후 끝났기 때문에 보두앵 재위 시절은 쇼와 덴노의 전후 쇼와 시절처럼 벨기에인들에게 추억의 향수로 남게 되었다.
3. 기타[편집]
벨기에의 경기장인 스타드 루아 보두앵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2]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92년에 한국에 방문 했었으며 이후 27년이 지난 2019년, 조카이자 現 국왕인 필리프가 방한했다.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 영역 빈칸 추론(31번) 문제에서는 보두앵의 죽음과 관련된 카트린 핑케나우어르와 베르나르 리메의 연구를 다룬 지문이 등장한다. 나쁜 소식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있지만 그 사건이 사람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공유됨에 따라 현실에 입각한 사고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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