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셔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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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 사상의 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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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별 내셔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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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홍기(중화인민공화국 국기)[1]
中國民族主義[2] / Chinese nationalism
1. 개요
2. 역사
2.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2.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3. 한족 민족주의
4. 중국 내셔널리즘 기반 외교정책
6. 중화민국 민족주의
7. 논란 및 비판
7.1. 국수주의적 태도
7.2. 약소국에 대한 패권주의
7.3. 외국에서의 시각
7.4. 중국 내부의 비판적 시각
8. 인물
9. 같이 보기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국에서 민족주의나 중화민족 개념은 혈통적 정체성에 더 초점을 맞춘 한국,일본에서 민족주의나 한민족,야마토 민족 개념과 달리 상대적으로 공민적 정체성에 더 초점을 둔다.[3] 다만 중국이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혈통을 강조할 경우 소수민족의 분리주의를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4]


2. 역사[편집]



2.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편집]


중국에서 초기 내셔널리즘은 청나라 말기 후술할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다. 쑨원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강조하였다. 신해혁명까지만 해도 이들은 멸만흥한을 외치며 청나라에서 한족의 국가를 독립시키려 하였으나 신해혁명이 너무나 손쉽게 이루어지자 말을 바꾸어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며 신해혁명과 동시에 독립한 티베트, 몽골중국의 당연한 영토라고 했다.[5] 중국국민당은 한족 뿐 아니라 모든 중국을 포용하기 위해 중국 국민주의(중국 내셔널리즘) 내지 중화민족주의를 내세웠다.[6]

2.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편집]


공산화 이후 중국 대륙에서 내셔널리즘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부터이다. 국공내전을 거친 끝에 중국 대륙1949년 마오쩌둥에 의해 공산화되었고, 사회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념은 금지된다. 중화민족주의도 반동적이라고 인식되어 장려되지는 않았지만 적극 탄압하지 않았다.[7] 이때까지만 해도 중화사상은 민간에 퍼져있던 일종의 동양 특유의 사회문화적인 자문화 중심주의에 불과했다.[8]

이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집권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 정부는 중화사상을 국시마냥 밀어주지 않았다. 중국의 국시는 사회주의였지 민족주의가 아니었으니... 그런데 중국의 이념적인 상황을 뒤집는 사태가 터졌으니, 다름아닌 1989년천안문 6.4 항쟁이었다. 중국인들은 1989년 베이징천안문 앞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중국 정부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운동가들을 전차로 밀어버리고 체포해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태 이후 중공정부는 '국민들이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네? 이젠 사회주의론 국민들 선동 못 시킬듯. 이렇게 된 이상 민족주의로 간다'를 시전하며 국가주의 및 중화민족주의를 중국 정부 차원에서 밀어주기 시작한다. 특히 1990년대에 집권한 장쩌민은 민족주의에 기반해 외부의 적도 설정한다. 바로 일본. 장쩌민이 지지율을 위해 내세운 반일감정은 중국을 최고의 반일국가로 만드는데에 일조했고[9], 이 반일 기류는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중이다. 물론 이전에도 미국, 대만, 일본, 한국 등에 대한 반감이 강하긴 했다. 다만 이는 사회주의 및 반자본주의에 기반한 감정이었지 민족적인 감정은 아니었다.[10]

이런 중화민족주의 및 자국주의는 시진핑 및 시진핑 정권의 중국공산당 주도 하에 더더욱 강조되는 중이다. 특히 시진핑 이전 시대에는 그저 권장 및 장려의 수준이었다면, 요즘은 이에 반대할시 탄압되는, 즉 강요의 수준까지 이르렀다.

현대 중화민족주의의 특이한 점은 보통 민족주의라고 하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자민족의 조상들이 이룩한 업적들을 강조하며 '우리민족 짱임'을 시전하는 형태인 반면, 역설적이게도 시진핑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오히려 자신들의 조상인 청나라가 근대에 당한 치욕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청나라 때 심한 굴욕을 당했고 서구 오랑캐들은 우리 중화의 정체성을 흐뜨려놓았다. 민족의 정기를 되찾고 다시 중화를 세계의 중심으로 놓자' 식의 논리를 펼친다는 것.[11][12] 이런 식의 선동은 최소한 1980년대에 강조되던 사회주의에 비하면 효과는 굉장했다. 특히 중공 국민들은 이에 열렬히 호응중이고, 이젠 심지어 자국을 오빠/형 등으로 부르며 중화인민공화국 자체를 연예인처럼 보는 기류까지 새로 생겨나는 중이다.

3. 한족 민족주의[편집]


파일:나무위키+하위문서.png   하위 문서: 한족 민족주의


4. 중국 내셔널리즘 기반 외교정책[편집]



4.1. 하나의 중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하나의 중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화민족주의자들은 티베트 독립운동, 위구르 독립운동, 홍콩 독립운동, 대만 독립운동에 강하게 반대하며 하나의 강력하고 단결된 중국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4.2. 전랑외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랑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진핑 집권 이후 급부상한 중국의 공격적 민족주의 외교 정책이다.


5. N세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N세대(중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중화민국 민족주의[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범람연맹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는 국부천대 이후 대만 외에 실효적 점거를 하지 못한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일반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 인정받고 있어, 중국 내셔널리즘은 보통 중화인민공화국 내셔널리즘과 거의 동일시되기에, 중화민국의 중화주의적 내셔널리즘 정서는 따로 분류하는 경유가 많다.

7. 논란 및 비판[편집]



7.1. 국수주의적 태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국수주의/행태/중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2. 약소국에 대한 패권주의[편집]


중국이 제1등국의 지위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옛날부터 중국에는 '약한 자를 구하고 위태로운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 이와 같은 좋은 정책이 있었기에 수천 년 간 강대했을 때에도 안남, 버마, 조선, 시암 등의 소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바람이 동으로 불어오자 안남은 프랑스에 멸망당했고, 버마는 영국에 멸망당했으며, 조선은 일본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국이 만일 강대해진다면, 우리는 민족의 지위를 되찾을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 일대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만일 중국이 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세계에 있어서는 별 이익이 없으며 오히려 큰 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세계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지금 세계의 열강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만일 중국이 강해져서 열강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열강의 제국주의를 흉내내어 같은 길을 걷는다면, 그들의 자취를 그대로 밟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정책, 즉 '약한 자를 구하고 위태로운 자를 돕는다'는 정책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민족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약소 민족을 돕고 열강에는 저항해야 한다. 전 인민이 이 뜻을 단단히 정하지 않는 한 중국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 우리는 아직 발전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약한 자를 구하고 위태로운 자를 돕는다'는 뜻을 단단히 정해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차 강대해졌을 때 오늘날 몸으로 느끼고 있는 열강의 정치·경제적 압박에 의한 고통을 되새겨, 장래 약소 민족이 만일 이와 같은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제국주의를 소멸시켜 버려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치국, 평천하'인 것이다.

우리가 장차 '치국평천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주의와 민족의 지위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고유의 도덕과 평화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통일하고, 하나의 '대동의 치'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4억 인의 큰 책임이다. 여러분은 모두 4억 인민의 한 분자이다. 모두들 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주의의 참된 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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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1924년 3월 24일 연설

보다시피 쑨원의 주장 또한 중화의 덕(德)으로 주변국이 독립과 평화를 보장받았다는 전근대적 중화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을 읽어보면 이는 전통적 강대국인 중국이 상국 대접을 받는 것처럼 약소국을 보살피고 걸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가까운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3]

즉, 현대 중국의 패권주의는 쑨원, 더 나아가 전근대의 중화사상에 기반한 역대 중국 왕조의 그것과 비교해도 크게 변질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쑨원 생전에도 이를 왜곡, 변형해서 중국 군벌들이 각 지방의 소수민족을 박해한 전적이 있었고 쑨원 사후에 더 심해졌다. 현대 중국의 외교정책은 역대 중화제국보다 오히려 고대 이집트, 고대 중국의 상나라나 고대 중동의 아시리아 제국, 대항해 시대 이전 아메리카 대륙의 아즈텍 제국 및 잉카제국, 근대의 독일(정확히는 독일제국과 나치독일) 및 일본제국에 더 가깝다. 그래서 중국을 싫어하는 입장에서는 중국의 패권주의적인 태도를 중화제국주의로 칭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파일:external/i.huffpost.com/o-KBS-570.jpg[14][15]
대인이라면 군자의 면모를 보이고 을 베풀어야 함에도 오히려 소인배적인 행보만 보여주고 있으니 따를 리가 없다. 전근대 중국은 천자국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황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상당히 신경썼다. 그래서 과거 강대국에게 충성 및 우호의 의미를 지닌 조공도 황제국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제후국이 바친 조공보다 더 가치가 높거나 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자국 백성들이 주변국에 민폐를 끼치면 오히려 가중처벌을 했다. 이는 중화사상의 영향도 있었지만 유교의 종주국이라는 특성상 덕치를 근본으로 삼았고 항상 주변국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16] 특히, 그 상대가 조선 같은 제후국인 경우에는 오히려 국가가 자국 백성에 대한 보호를 포기했고, 자체적으로 처벌하고 나중에 보고를 올리라는 식으로 처리했다. 심지어 청나라도 역모, 밀수 등을 제외한 일은 조선에서 처리하도록 조치했다. 그만큼 중화제국들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모범을 보일 수 있게 노력했다. 그런 만큼 조선에서는 명 초기 때까지 남아있던 순장 풍습이나 공녀 요구에 대한 비판을 해도 중국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17] 그래서 당시 조선에서는 명이 국운이 기운 걸 알면서도[18] 차마 명나라를 내치자는 주장이 삼전도의 굴욕 전까지 거론되지 않았다.[19]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한 마디에 민족주의의 과격화를 막던 인문학과 유교가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한 사상적 아노미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문화 우월주의와 타국을 향한 갑질과 천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영토 확장이 거의 불가능하여 영향력 확장 정도만 가능하고, 또 그런 것은 방향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의 중화사상은 패권주의와 다름없는 형태가 되었다. 현재 남중국해 등지에서 이뤄지는 분쟁이나 한반도에 대한 압박은 겉으로 보면 자원을 놓고 벌이는 충돌이지만, 실제로는 이들 나라를 장기적으로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어 제국 주변의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팽창이 목적이라면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더욱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도련선 전략도 그 일환중 하나이다.[20]

이 중화사상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교되는 이유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달리 중국은 상전처럼 위에서 군림한 채로 일방적으로 찍어내리는 듯한 외교방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도 국익을 위해서는 강경하게 나올 때도 많다. 그러나 민주주의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만큼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찍어 내리지는 않는다. 여러 제제나 무력시위를 하는 등 강경책과 경제적 이익 제공하거나, 원조를 해주는 등 온건책을 당근과 채찍처럼 병행해서 쓴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받아 들이고, 서방 세력에 합류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지급한다. 무력 시위나 개입은 최후의 수단에 가깝다.

반면 중국은 대국이자 상국인 자신의 나라를 중심으로 옛날 제후국이였던 국가가 중화 세계에 편입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옛 중화제국의 세력권으로 여겨지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외교적으로 고압적이고 일방적이다. 이 점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교되는 중화사상의 특징이다. 사실 미국 역시 자국의 세력권인 중남미, 중동 등지에서는 지극히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패권을 휘두르고 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반중감정이 강한 것처럼 중남미 지역에서는 반미감정이 강하다.[21]

하지만 중국은 남미 일대에서 나타난 미국의 만행을 능가하는 막무가내식 고압적인 태도와 각종 이권만 가져가고 과한 책임을 부여하려하는 얌체적인 모습을 보여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중남미나 중동 일부 국가[22], 아프리카 등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국가들도 점차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반중 감정이 전통적으로 중국과 교류했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더욱 심하다.

미국의 경우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주도해오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단순히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때문에 고립정책을 추구하던 도널드 트럼프 시절조차 기존과는 다른 정책으로 마찰은 있었을지언정 외교적으로 친미국가는 대우를 해 주었다. 즉, 갑질은 할지언정 최소한 갑질에 대한 대가는 줬고, 이 때문에 주변국들 입장에서도 자국민을 상대로 내밀 명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주변국들의 자주국방과 경제를 무시한 채 무조건 중국을 따르라고 일방적으로 압박하는 데다가 그 태도나 형식도 미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압적이며, 주변국 입장에서 자국민들을 설득하는데 필요한 명분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미국의 견제책이 되어줄 국가로 생각했던 중남미 국가나 허울만 좋아보이는 중국의 식민지 정책인 일대일로를 통해 경제를 상승시킬수 있다고 기대했던 아프리카 등 초기에 친중이던 지역들 조차 얼마 되지 않아 전부 반중으로 뒤돌아섰다. 실제로 자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일대일로에 참여했던 아프리카 국가들 상당수가 중국에 진 채무로 인해 국가재정이 파탄이 나고, 빚을 변제하기 위해 각종 이권을 넘기는 등 중국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자 독재 정권이 아닌 국가들은 대부분 친서방으로 돌아서고 있다.

베트남 전쟁을 예로 들자면, 이 전쟁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예시로 정말 자주 등장하는 전쟁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중국보다는 낫다는 점을 보여주는 전쟁이기도 하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직접적인 원인은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반전 시위이다. 이건 독재국가 중국에서는 꿈도 못꾸는 일이다. 즉 미국은 정부의 침략 전쟁을 시민들이 나서서 억제하는 것이 가능한 문민통제 민주국가인데 비해, 중국은 정부나 독재자의 행보에 시민들이 제동을 걸려고 하면 철권으로 다스리는 독재 국가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동아시아 패권을 넘볼만한 국력을 지녔음에도 미국-한국, 미국-일본처럼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진정한 동맹국이 없는 상황이다. 근처의 우호국이라면 공공의 적인 미국을 견제하려는 불편한 동맹국 러시아[23], 중국에게 의존해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북한, 그나마 핵이라도 갖고 있는 파키스탄 정도가 있고 그 외에는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같은 후진국 정도 뿐이다. 친중 성향이 있었던 말레이시아스리랑카 같은 곳도 2020년대 들어 일대일로 등의 악영향으로 옛날만 못한 상황이다.[24] 제아무리 초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지역강국들의 협력 없이는 세계 패권을 쥘 수 없다. 즉, 근현대의 중화사상은 전통적인 중화사상과 결이 다른 민족주의, 패권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시진핑의 장기집권 이후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속된다면 중화사상도 '중화 파시즘'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향후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전철을 밟는 시나리오마저 허황된 얘기가 아니다.[25]

사실 이미 중국의 군국주의화는 가시화될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 해마다 군사 퍼레이드의 규모가 점점 화려해지고 커지고 있으며, 예전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전략 역시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을 상대할 때 빼고는 완전히 사라졌다.[26] 또한, 중국의 국민들 역시 이전에 비해서 훨씬 자국우월주의 성향이 강해졌다. 칭기즈 칸 같은 타민족의 영웅을 중화민족 영웅으로 삼거나 고구려 같은 찬란한 역사를 가진 주변국의 역사를 자국의 문명이라 주장하는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27] 신화나 고대 사료 특유의 과장된 비유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기는 등 점점 폐쇄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7.3. 외국에서의 시각[편집]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력이 점차 부상하며 시진핑 집권 이후 심화된 중국인들의 국뽕은 타국에서 중국인들 이미지 망치는 큰 문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당장 옆나라 일본만 가도 이놈의 중화사상 때문에 중국인 혐오가 생긴 일본인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미국이나 캐나다같은 이민자가 많은 국가에서도 일부 중국인 때문에 이미지가 썩 좋지 않다. 덩달아 같은 아시아인인 한국인들까지 엿 먹이고 있다. 특히 같은 동아시아 국가 사람들은 더더욱 심하다. 길가다 물어볼 게 있어서 동아시아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중국어로 물어 본다던가,[28] 새치기 역시 번번히 일어난다. 물론 단순히 무개념 중국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언어의 경우 중국이라는 나라가 인구도 많고, 북미국가는 중국인이 많을테니 동아시아인은 무조건 중국인이라는 잘못된 시각[29]에서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 게임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심각한데, 영어로 말하라고 해도 끝까지 한어 병음으로만 채팅을 치면서 타국 유저들의 게임 진행에 어려움을 주는 중국 유저들 때문에 게임상에서도 중국인들을 기피하는 풍조가 생기고 있으며, 불법 프로그램으로 타국 유저들을 괴롭히는 악질적인 중국인 핵 유저들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만 게임을 즐기는 정상적인 중국인 게이머들까지 피해를 받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중화사상을 간직한 중국인들 때문에 엄한 중국인들까지 피해를 보는 것.

정치제도는 일당독재이긴 하되 과두정으로 그나마 권력의 견제가 이뤄지던 것을 시진핑이 사실상 일인독재로 후퇴시켜 버렸으며, 그 전에 애초부터 민주주의가 정착된 주변국들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배울 생각 따윈 전혀 없다. 철학은 이미 청나라 시절부터 남발된 문자의 옥으로 후퇴하고 있던 상황에서 문화대혁명까지 일어나고 계속적으로 탄압을 해 온 결과 유교 문화의 헤게모니는 이미 한국과 대만에게 넘어갔고,[30] 예술도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휩쓴 뒤에도 지속적으로 검열을 해대니 문화·예술이 심각하게 지체되어 대중문화는 일본 문화와 후발 주자인 한류가 중국 대륙을 휩쓸고 있는 처지이다. 그나마 다 지난 과거 일이라 검열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예산을 많이 부을 수 있는 사극 정도만이 주변국에 먹히는 수준.[31]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적극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며[32]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푸틴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반중 친러 행보를 나아감에 따라 중국이랑 대립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조치로, 미국은 결코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다. 민주당이 트럼프의 정책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고 있지만 중국 견제에는 동참할 정도다. 동아시아는 현재 미중러 3국의 패권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인데, 이곳에서 만일 미국이 패권을 내려놓게 된다면 동아시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나토와 중동질서가 상당히 어지러워진다. 더욱이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패권을 반 강제적으로 내려놓게 된 영국의 위상이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눈뜨고 똑똑히 보았다. 미국은 세계대전처럼 본토가 철저히 박살나는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동아시아(최소 일본)에서의 패권을 포기할 수가 없다.[33][34] 동아시아 패권의 포기는 연쇄작용을 일으켜, 유럽과 중동, 나아가 전 세계에서의 패권에 심각하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 공산당의 교육과정은 지나치게 애국심을 강조하는데, 여기에 중화사상까지 곁들여지니 필연적으로 중국 국민들의 과격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자기들이 이 꼴을 만들어 놓고 뒤늦게서야 국민들에게 자제를 부탁하는 블랙 코미디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35] 이는 중국 정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을 계기로 중국도 서방 세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중국의 젊은층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눈으로 보게 되었고 체제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 시대처럼 단순히 사회주의만으로는 인민 통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를 더하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최근 중국 젊은이들 중 일부 극우층에서는 '중국은 평화롭게 지냈으나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과 일본에게 무수한 침략과 약탈을 당했다.'는 자학사관이 깃들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러니 이제 강대국이 된 중국이 되갚아줄 차례다.'라는 이상한 방식의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최근 쯔위 사태 역시 중국 정부 차원에서는 조용히 처리하려 했으나, 이런 국수주의 사상에 물든 젊은이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바람에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만의 항의로 양안문제가 크게 대두되었고, 중국 정부의 입장이 상당히 난처로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안문제와 남중국해 문제, 미중무역전쟁으로 인해 동아시아 내에서 미국과의 패권 싸움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7.4. 중국 내부의 비판적 시각[편집]


사실 중국인도 사람인지라 자정 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중국 공산당에서 검열하고 중국공산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국수주의자들이 신변 위협을 가할 뿐. 쉬샤오둥, 천추스, 하오하이둥이 좋은 예.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실제로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천안문 6.4 항쟁을 통해 한 번 폭발하기도 했다.[36] 자신들의 자랑스런 나라가 현실에서 죽을 쑬수록 이 현상이 최근의 경제위기 때문에 자연스레 고쳐질 확률이 높다. 쉬샤오둥은 이 사태를 어이없어 했는데 왜 태권도를 우리나라(중국) 것이라고 하냐고 화낼 정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라는 재앙으로 인해 상하이 봉쇄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2022년 중국 제로 코로나 반대 시위 같은 일도 터지면서 빠른 교정에 들어가고 있다. '어차피 죽을 거 목소리라도 내고 죽자'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다. 실제로 코로나 발생 이후 진실을 요구하는 대륙인들과 고발의 목소리가 VPN을 타고 외부로 나오고 있다. 아예 TIME지에도 "CHINA'S TEST"(시험받는 중국)이라고 나올 정도. 당연히 검열을 통해 차단과 탄압을 하고 있지만 빠져나가는 법에 도가 튼 중국 네티즌들은 계속 한 수 앞을 지나가며 중국 당국을 엿먹이고 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갑골문을 쓰는 사례가 있을 정도.

최근들어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나오는 중국 정부의 국수주의적 정책 및 주변국을 향한 문화 참탈, 자국의 문화 규제 역시 최근 들어 급격하게 강해지는 자국민의 중국 정부를 향한 강한 불신감으로 인하여 나오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즉, 강한 문화 왜곡과 규제, 배외주의 등으로 아예 중국인들의 눈과 귀를 막고 세뇌를 시켜서 반발을 잠재우려고 한다는 것. 중국 내 포털 사이트 댓글창이나 중국 내부 커뮤니티를 보는 사람들은 대충 알겠지만, 중국 경찰이 24시간 감시하는 곳임에도 중국 정부를 욕하는 글들이 상당히 많이 올라오며 그 비중이 최근들어 크게 늘었다.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사상통제를 심각하게 하는 나라임에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인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치달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8. 인물[편집]


  • 쑨원
  • 마오쩌둥 - 논란의 여지 있음.[37]
  • 마잉주
  • 시진핑
  • 위안스카이
  • 자오리젠 -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공보부 부부장인데 거침없는 언행과 트위터 사용으로 전랑외교의 상징격인 인물이다.
  • 장쉐량
  • 장제스 (장제스의 학설)

9. 같이 보기[편집]



10.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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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27 22:18:10에 나무위키 중국 내셔널리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중화민국(대만)의 청천백일만지홍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영어권에서도 현재는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은 Taiwan, 중국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China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2] 정체자 표기 기준. 간체자로는 中国民族主义[3] 때문에 중국의 내셔널리즘은 중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중시하면서도 은근슬적 중화민족주의를 내새워 한족 내셔널리즘으로 이끌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4]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내셔널리즘'이라는 표현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는 민족주의가 종족 민족주의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영어인 내셔널리즘으로 지칭하는 것이다.[5] 이는 후일 몽골의 독립을 보장한 소련이 중국 군벌들과 협상을 할때 난항을 겪게 만드는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봉건적이라고 매도 당하던 군벌들마저도 중국 내셔널리즘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단지 이권이 된다면 열강들에게 손을 빌릴 뿐.[6] 이 방식도 골때리는 것이 소수민족의 기원을 무조건 한족 내지는 한족의 방계민족으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만약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안정된 정부였다면 현재 중국의 역사왜곡중국국민당이 주도하고 있었을 것이다.[7] 사실 마오쩌둥도 민족을 정치적 홍보에 일부 사용했지만,그냥 민족공동체를 중시하는 동양 특유의 분위기에 맞춰서 별첨되는 정도였다. 마오쩌둥의 반대편에 서있던 동시대의 동양의 지도자인 장제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또한 비슷하게 민족을 정치분위기에 끌어들였다.[8] 중화민국 시대에는 군벌로 분열되어 있었고,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 중국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을 때에도 중화 우월주의라기보다는 침략자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적 스탠스에 더 가깝다.[9] 장쩌민 이전 중국은 그 난징 대학살조차 딱히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일본에는 반미 반자본주의에 기반한 반감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관심이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제1주적은 일본이 아닌 대만이었다. 북한의 주적이 다름아닌 한국인 것과 똑같은 맥락.[10] 예를 들어 옛 중국의 항일매체에는 공산군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으며, 국민군은 일본군과 더불어 빌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대표적으로 뮤지컬 동방홍이 있다) 반면 요즘 중국의 항일매체에는 국민군이 주역이 되는 경우도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이전까지 중국인들의 국민군에 대한 인식은 '일본보다도 중공을 적대시한 반동주의자들의 군대'였던 반면, 요즘 중국인들의 국민군에 대한 인식은 '이념은 다를지언정 함께 일본에 저항한 엄연히 우리 민족의 군대'로 바뀌어가는 중이다.대만군 의문의 1패 게다가 모 항일 드라마에는 미군이 일제에게 고문받는, 즉 그때는 미군도 일본에게 고통받은 피해자였다는 생각을 들게할만한 장면도 나오는데, 일방적으로 친러 및 반미 성향을 띄었던 옛 중공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11] 사실 이런 식의 피해자 의식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는 중국만의 일은 아니다. 당장 러시아의 국가주의 역시 '우리는 서방의 침략의 피해자며, 그들을 몰아내고 우리의 조국을 지키는 것이 신성한 의무이다'라는 것을 핵심 논리로 내세우며, 한국 역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고 불리우는 경향이 있으며, 일본 넷우익 역시 피해자 행세를 하기를 좋아한다.(물론 일본 제국은 아예 피해자조차 아니지만). 도한 서구의 대안 우파 역시 무슬림이나 외부 집단에 의해 화이트 제노사이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우월감'에 의존하는 국뽕 프로파간다에서 '피해의식'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로 변하고 있는 신세대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뽕국까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방어기제 및 반동 때문인지, 타자를 비난할 때는 타자가 거만하다고 비판하기보다는 '열폭한다'식으로 비난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12] 미중 무역분쟁을 비롯한 갈등으로 인해 신냉전 구도가 잡히며, 드라마틱하게 당시 개입했던 국가들 중 러시아 정도를 제외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과 다시 각을 세우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다만 청나라 시절 동아시아를 아우르던 중화사상, 혹은 아시아주의와 같이 타국이 동조할만한 허울뿐인 명분도 없는지라, 오직 중국만을 위한 선동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당장 한국의 경우에도, 문재인 전 대통령이 한국과 중국을 어우러지게 하자는 맥락에서 중화사상을 언급하였다가 한국이 통째로 뒤집어진 전례가 있어, 실리를 위해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막자는 정도가 친중 의견의 주요 명분이다.[13] 한국에선 이 중화사상이라는 대목 때문에 쑨원을 무슨 한국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자 같은 국수주의자로 곡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쑨원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내세워 청나라를 무너뜨린 혁명가이므로 국수주의와 질 나쁜 민족주의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다.[14] 저 말도 맹자에 나오는 소국은 대국을 섬겨야 한다는 논조를 빗대어 한 말로 보인다. 그러나 맹자는 대국도 힘에 취해 패권을 휘둘러야 하는 것이 아닌 소국을 인(仁)으로써 섬기고 존중해야한다고 주장했다.[15] 오직 어진 자야만이 대국으로써 소국을 섬길 수 있으니 이러므로 탕왕께서 갈(葛)을 섬기셨고, 문왕께서 곤이(昆夷)를 섬기셨습니다. (惟仁者爲能以大事小,是故湯事葛,文王事昆夷.) - 맹자 양혜왕 하편 -[16] 즉, 화의 민족인 중국인이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 민폐를 저지르는 것 자체가 중화민족의 격을 훼손시켰다는 의미이다.[17] 현재의 한국에서도 미국이 크게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친미 기조를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8] 이때는 남명이나 동녕 왕국 등 자칭 명나라를 잇는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19] 그나마 광해군이 명나라와의 관게에서 적당히 발을 빼려 했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하면서 무산되었다. 다만 광해군의 외교정책과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현재 주류적인 학계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 청은 끝내 자력으로 장성을 넘지 못했고, 병자호란도 보급상황 등을 고려하면 도박에 가까웠다. 오히려 당대의 지식인들은 명이 청에게 멸망당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20] 제1~3도련선으로 나뉘는데, 제1도련선은 한반도를 제외한 서태평양 연안 지역, 제2도련선은 한반도를 포함하고 일본 열도까지 영향권 하에 두는 서태평양 전역, 제3도련선은 미국의 하와이 외곽까지 뻗어나가 태평양을 반분하는 것이다.[21] 그런 반미감정의 반작용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미국과 동맹을 맺은 한국과 일본이 존재하듯이, 최근 중남미 국가들이 중국과 동맹을 맺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22] 요르단, 레바논, 터키 등.[23] 러시아는 공공의 적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가 중국에 협력하는 이유는 냉전 때와는 달리 미국 홀로 상대하기에는 국력에서 한참 밀리기 때문이다. 중국과 손을 잡아야 힘의 균형이 맞는다. 그리고 러시아에 있어 중국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여실없이 드러났다. 자만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고전하자 중국에 물자 지원을 요청했고, 서방이 대러제재를 가하는 중임에도 중국은 되려 교역로를 확충하여 러시아에 지원을 해주었다.[24] 중국이 설령 동맹국을 만들려고 해도, 일방적으로 퍼주는 관계가 아닌 이상 어렵다. 그나마 파키스탄 정도가 인도에 대한 견제라는 점을 지렛대 삼아 동맹국으로 기능하고 있으나 러시아는 일본 문제를 제외하면 아시아 패권에 아주 큰 관심은 없고, 일본과 한국은 굳이 친미가 아니더라도 나름의 영역권을 추구하는 국가라 중국의 패권에 협조할 가능성이 적다.[25] 현재 중국의 군사력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압도하는 수준인만큼 정말 중국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철을 밟게 된다면 그 피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떠한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 될 것이다. 현재 중국의 국력을 당시로 비유하면 독일과 소련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26] 중국 역시 미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이 존재하지 않으면 경제가 붕괴되며, 동시에 미국이라는 가상적국이 존재하지 않으면 내부 불만들이 모조리 중국 공산당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이유로 아직까지는 미국을 상대로는 꼬리를 내리고 있다.[27] 실제로 차이나 머니로 옥스포드에서 출간한 그림책에 고구려 시절 영토를 중국 영토로 표기 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항의하자 출판측에서는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의견이라며 거절했다 한다.[28] 영어로 중국어를 못한다고 하거나 중국인이 아니라고 말해도 끝까지 중국어로 말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단순히 영어를 못해서 그러는 거라고 핑계대기도 뭐한 것이, 이런 케이스는 보통 자신이 영어를 못해서라기보단 "이 나라 사람들도 중국어를 알아듣겠지?"라는 마인드에서 나오는 무례이기 때문.[29] 이건 비단 중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 인종•민족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북미에서 동양인들한테 멋대로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은 인종•민족 불문하고 널렸다. 가끔 가다 동양인들도 그런다(...). 한국인들도 예외가 아니다.[30] 어느 정도냐면 공자를 비롯한 유교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의 학자들이 한국으로 넘어와서 연구를 하며, 이황, 이이를 비롯한 조선의 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성리학을 연구한다. 이유는 각종 왕릉, 사찰과 함께 홍위병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유교 서책이었기 때문. 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공자의 묘 또한 문화 대혁명 때 파괴되었다.[31] 오죽했으면 사극이 너무 넘쳐난다는 이유로 금지령을 내렸을 정도이다.[32] 대만과 대놓고 교류하는것은 덤.[33] 미국에 있어서 동아시아, 특히 일본의 경우 일본을 포기하면 대 동아시아 최전선이 넓디넓은 태평양 너머의 하와이가 되기 때문에 미국의 대 동아시아 최후의 마지노선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갈 경우 한국이나 대만은 몰라도 일본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34] 하지만 지금은 상대가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라서 한국과 대만의 지정학상 중요성이 예전보다 훨씬 더 커진 상황이라서 역시나 함부로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35] 웃기게도 이런 상황은 중국이 그토록 흑역사라고 여기고 있는 홍위병의 탄생과도 유사점을 보인다.[36] 그때도 자오쯔양, 후야오방, 탱크맨 등 이건 아니다, 바뀌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은 있었다. 덩샤오핑59식 전차로 밟아버렸지만.[37] 현 중국 마냥 대놓고 장려한 것은 아니기에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자이지 민족주의자는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영어권에서 중국 내셔널리스트로 분류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