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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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충청남도지사는 충청남도를 대표하고, 그 사무를 총괄하는 광역자치단체장이다.
심대평 전 지사가 국민중심당을 창당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후부터 민선 충청남도지사에게는 '충청도의 맹주'라는 별칭이 붙었고, 어울러 충청 대망론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심대평 이후로 안희정 전 지사가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이완구 전 지사도 언급이 꽤 되었는데 안희정 전 지사는 성폭행 사건 이후 정치적으로 몰락했고 이완구 전 지사는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지금은 이전보다는 사장되었다. 그나마 양승조 전 지사도 충청 대망론 주자로 어느 정도 언급은 되는 등 충청남도지사가 충청권 광역자치단체장들 중에서는 대체적으로 대권 주자로서 언급이 많이 되는 편이다.[1]
1910년까지는 관찰사(觀察使)라고 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충청남도 관찰사는 1910년 8월에 부임한 박중양(朴重陽)이다. 그러나 국권강탈 직전에 부임한 까닭에 그의 전임자인 최정덕 (崔廷德)을 마지막 관찰사로 보는 경우도 있다.
민선 7기까지는 이완구 전 지사를 제외하고 동부 출신 도지사가 대부분이였으나 김태흠 지사가 2번째로 민선 이후의 서부 출신 도지사가 되었다.[2]
1.1. 충청남도지사 선거 100% 적중 지역[편집]
충청남도지사 선거는 민선 이래 사퇴, 사망 등의 궐위로 인한 선거가 열린 적이 없기에[5] 8번의 전국동시지방선거만 실시하였다. 충청남도지사 100% 적중 지역은 아래의 7지역이다.
이 중에서 금산군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도 100% 적중한 100% 적중 지역이다.
한편 천안시의 경우 시 전체로는 역대 충청남도지사 선거에서 당선 결과를 모두 적중하였으나, 구를 갈라서 볼 경우 동남구, 서북구 모두 한 차례씩 빗나간 적이 있다.[6]
2. 목록[편집]
2.1. 일제강점기[편집]
충청남도지사라는 직함은 1919년 8월에 기존의 충청남도장관을 충청남도지사로 개칭한 것이 최초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충청남도장관을 포함했다.
2.2. 대한민국[편집]
2.2.1. 관선 1기[편집]
2.2.2. 민선 1기[편집]
2.2.3. 관선 2기[편집]
2.2.4. 민선 2기[편집]
3. 역대 선거 결과[편집]
3.1. 1960년[편집]
3.2. 1995년[편집]
3.3. 1998년[편집]
3.4. 2002년[편집]
3.5. 2006년[편집]
3.6. 2010년[편집]
3.7. 2014년[편집]
출구조사 결과에서는 경합으로 나왔으나 실제 개표에서는 안희정 후보가 한 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8.26% 차이로 정진석 후보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세부적으로 놓고 보면 안희정 후보는 예산군, 태안군, 부여군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승리했고, 특히 고향인 논산시에서 60%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했다.
3.8. 2018년[편집]
충청남도는 충청남도지사로써도 압도적인 지지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것은 물론 본인의 사람들을 국회와 중앙 정계에 입성시키는데까지 성공하며 지역을 확실히 휘어잡고 있던 안희정 전 지사가 몰락하면서 자유한국당도 기회를 잡을 수 있을만한 지역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안희정 전 지사의 몰락은 이번 선거 자체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양승조는 자신의 지역구이기도 했던 천안시에서는 71.49%의 득표율을 보이기도 했다.[22] 참고로 이 분도 이시종 못지 않게 선거 불패인데, 5전 5승이다.
충청남도는 선거 이전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직무 수행 평가에서 긍정의 비율이 부정 평가의 두 배를 상회할 정도로 높았던데다가 이인제는 후보로 나선 시점에서부터 보수는 물론 중도층까지 아우르기엔 부족하다는 평가가 존재했었고 본인도 유세에서 인물을 보고 뽑아달라는 주장을 했던 모습과는 달리 선심성에 가까운 공약과 양승조 후보를 향한 집요한 공격, 정권 및 여당 심판의 3박자 만으로 일관했고 충청남도의 현안 과제 응답에 대한 호응도도 가장 낮은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보수 텃밭인 부여군[23] , 청양군, 심지어 충청남도에서 가장 보수적인 예산군에서 조차 맥없이 밀리는 굴욕을 맛봐야만 했다. 이것도 모자라 자신의 지역구 주민에게 39.11%의 득표율을 받았다. 피닉제라 불리던 이의 완벽한 몰락이다.
이인제는 정치 입문 이래 처음으로 내리 2연패를 당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의 고향인 충청남도에서만 2연패다. 당장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신의 출생지이자, 4선 지역구이기도 했던 논산시·계룡시·금산군 국회의원 후보로 나와서 직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에게 꺾였던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후보에게 패배를 당하는 굴욕을 겪었지만 불과 1% 차이였다. 하지만 이번엔 출신지는 물론 위에서 언급한대로 예산군에서도 털리면서 참패를 당했다.
3.9. 2022년[편집]
일부 여론조사에서 접전이 나왔고 더불어민주당에서도 박빙 승부로 승리를 기대했으나 현역 프리미엄을 업고도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후보가 큰 표차로 패했다. 홈스테이트 효과를 거의 못받은 양승조와 홈스테이트 효과를 크게 받은 김태흠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양승조 후보는 지역구 4선 의원을 지낸 천안시에서 표차를 거의 벌리지 못했고, 심지어 천안시 서북구는 투표율도 충청남도 최저를 기록하며 양승조 후보를 도와주지 못했다. 반면 김태흠 후보는 지역구였던 보령시에서 62.6%이라는 압도적 득표율을 기록했고, 투표율도 충청남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리며 소위 고향빨을 든든하게 받았다. 김태흠 후보는 충청남도지사 최초의 서부권 출신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더욱 고향표를 결집시켰다. 지방선거는 결국 집토끼를 누가 더 투표장에 데리고 가느냐의 싸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부분.
그밖에 전통적으로 더불어민주당에 엄청난 몰표가 쏟아지던 아산시 배방읍과 탕정면에서도 양승조 후보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했다. 양승조 후보는 배방읍에서 3천표, 탕정면에서 1300표밖에 이기지 못하면서 아산시 구시가지와 농촌표를 만회하지 못했고 결국 아산시 전체에서 김태흠 후보에 2300표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4년 전에는 아산시에서 무려 35%나 이겼고 심지어 3달 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재명 후보가 승리하며 텃밭임을 과시하던 아산시에서조차 패했으니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
충청의미래당 후보로 나선 최기복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으나, 최기복 후보의 존재감이 심각하게 없었기에 판도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미미했다.
4. 역대 정당별 전적[편집]
5. 역대 후보별 순위[편집]
- 사퇴, 사망, 등록 무효 후보 제외.
6. 생존 중인 전직 민선 충청남도지사[편집]
- 심대평 (1995년 7월 1일 ~ 2006년 3월 24일 재임, 민선 1-3기, 1941년 4월 7일 출생, 83세)
- 안희정 (2010년 7월 1일 ~ 2018년 3월 6일 재임, 민선 5·6기, 1964년 12월 1일 출생, 59세)
- 양승조 (2018년 7월 1일 ~ 2022년 6월 30일 재임, 민선 7기, 1959년 3월 21일 출생, 65세)
7. 도정 지표[편집]
8. 관련 문서[편집]
[1] 대전광역시장들은 상대적으로 정치적 중량감이 부족하고 충청북도지사들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스타일의 관료 출신이 많은 것도 한몫했다.[2] 심대평-공주시, 이완구-청양군, 안희정-논산시, 양승조-천안시, 김태흠-보령시. 아직 서북부의 당진시, 서산시, 태안군, 아산시 출신은 나오지 않았다.[3]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국민중심당 이명수 후보가 출마하면서 금산에서 초접전이었는데, 결국 이완구(38.5%)가 이명수(37.3%)를 간발의 차로 누르고 금산에서 1위를 가져갔다.[4] 당진시(당시 당진군)에서는 안희정과 박상돈 후보 간 피말리는 접전이 벌어졌다. 개표 마지막에 와서야 안희정 23,524표 vs 23,496표 박상돈으로 28표 차로 안희정이 당진에서 이겼다. 득표율로는 안희정 40.91% vs 40.86% 박상돈.[5] 다만 심대평, 이완구, 안희정 전 지사들은 잔여임기를 1년 미만으로 남기고 사퇴했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6] 동남구는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서북구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빗나갔다.[7] 마지막 관찰사이자 초대 도장관.[8] 4대 도장관. 1919년 8월부터 도지사.[9] 창씨개명으로 마츠무라 모토히로(松村基弘)라는 이름으로 활동.[10] 창씨개명으로 야마키 후미히로(山木文憲)라는 이름으로 활동.[11] 창씨개명으로 마스나가 히로시(増永 弘)라는 이름으로 활동.[12] 선거 당시 당적.[13] 선거 당시 당적.[14] 선거 당시 당적.[15] 선거 당시 당적.[16] 20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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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당.
200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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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
2006.3.24. 지사직 사퇴.[17] 결과적으로 관선, 민선 합해 14년 반을 재임한 셈이다.[18]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반발하여 2009년 12월 3일 사퇴했다.[19] 201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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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신설 합당.
20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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