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국-베트남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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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동아시아 국가 [[대한민국|{{{#!wiki style="display: none; display: i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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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동남아시아 국가 [[베트남|{{{#!wiki style="display: none; display: i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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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삼각관계.
국력에 따라 대한민국은 지역강국,[1] 중국은 강대국,[2] 베트남은 중견국으로 평가받는다. 경제개발 수준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 중국은 신흥공업국,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된다.
2. 역사[편집]
2.1. 고대 ~ 냉전 시대[편집]
: 고대엔 한중 간 충돌이 잦았다. 한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전한 무제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은 당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또한 당나라는 고구려·백제 멸망 이후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어 신라와의 나당전쟁으로 이어졌다.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한 발해는 건국 초기에 당나라 산둥 반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통일신라와 발해 모두 당나라와 무난한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많은 신라인/발해인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거나 당나라와 무역을 하며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 후삼국시대의 최종 승자 고려는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북방 유목민족 국가들과는 숱한 전쟁을 치렀지만 중원의 송나라와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광종 치세엔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고려 말 중원에 들어선 명나라와는 갈등을 빚어 고려 우왕이 랴오둥 반도 침공을 기획하기도 했으나 이것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조선 건국으로 이어졌다. 고려와 달리 조선은 명나라에 철저히 사대하였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에서 명나라는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했고, 이 때문에 전후 조선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란 이후 명나라가 급격히 쇠퇴하고 청나라가 부상하면서 조선은 외교적으로 매우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광해군은 어느 정도 중립적인 외교를 추구했지만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즉위한 인조는 친명배금(親明排金) 외교로 회귀했고, 결국 청나라를 자극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촉발하였다. 인조가 청 황제에게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항복 의식을 치른 후 한중관계는 강압적인 주종관계로 변했고, 조선의 지배층은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했지만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고수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제국과 밀착해 대한제국을 수립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열강으로 떠오른 일본 제국은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해 식민지로 삼았고, 1930년대부턴 중국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중화민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한중 양국은 항일(抗日)을 위해 연대하였다.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한반도에선 남북에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들어섰다. 중국에선 국공내전 끝에 대륙엔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건국되었고 중화민국은 타이완 섬으로 옮겨 갔다. 1950년 6.25 전쟁에서 중국은 임진왜란 때와 유사하게 순망치한을 내세우며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했고, 이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된 상태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되어 오늘날까지도 남북분단이 지속되고 있다. 전후 중국은 북한과 이른바 혈맹 관계로 발전했고, 한국은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적대하였다.
: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함에도 근대까진 양국 간 접점이 적었고, 공식적인 외교 관계도 없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민국은 미국과 함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나 1975년 북베트남이 적화통일에 성공하여 관계가 단절되었다. 다만 한국 성씨 중 화산 이씨가 베트남에서는 국성이기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한국인 중에서 화산 이씨 한정으로 자국 국민으로 인정한다.
: 기원전 202년 중국 대륙에 전한이 건국되었고, 기원전 196년 전한의 고제(유방)는 남월의 무제(조타)를 남월왕(南越王)으로 봉하여 중월 양국 간 조공·책봉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기원전 111년 전한의 무제가 남월을 침공해 멸망시키고 해당 지역에 9군을 설치함으로써 천여 년에 걸친 중국의 베트남 지배가 시작되었다. 전한에 복속된 이후에도 베트남인들은 쯩 자매의 반란 등 지속적으로 중국에 저항하였고, 이 때문에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중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현대에 들어서 베트남 북부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중국 대륙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사회주의 국가인 양국은 긴밀한 협력 관계로 발전하였다. 특히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이 베트남 인민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통일 후 반중 정책을 펼치는 베트남에 분노한 덩샤오핑이 베트남을 침공하여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했으나 이 또한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2.2. 탈냉전 시대[편집]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1990년 독일 재통일, 1991년 소련 붕괴가 이어지며 50여 년에 걸친 미소 냉전이 종식되자 대한민국은 1992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고, 동년 12월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과도 수교했다.
2.3. 신냉전 시대[편집]
3. 경제[편집]
중국과 베트남은 냉전 시기부터 지금까지 사회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20세기 후반 공산당 정권이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는 개혁·개방을 단행해 성공적인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대한민국도 이들과 체제는 다르지만 군사독재 시대에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하다.
4. 문화[편집]
3국 모두 고대 한나라 때부터 한자문화권의 일원이다. 한자문화권에는 중화권(중국+대만), 한반도(대한민국+북한), 베트남, 일본이 속하는데 이 중 일본은 유교의 영향력이 약해 다소 이질적인 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은 전통적인 면에서 일본보단 중화권, 베트남과 더 많은 문화적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3]
5. 관련 문서[편집]
- 대한민국/외교
- 베트남/외교
- 중국/외교 / 중국-다른 아시아 국가 관계
- 한자문화권
- 대한민국/역사
- 베트남/역사
- 중국/역사
- 대한민국/경제
- 베트남/경제
- 중국/경제
- 대한민국/문화
- 베트남/문화
- 중국/문화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남아시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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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 인도와 함께 강대국의 최소로 봐야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지중해 일대에 일정부분 패권을 행사하는 이탈리아와 남아시아의 유일무이한 패권국인 인도와는 달리 대한민국은 미중러일 4강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입지로 인해 역내 5위에 머물러 지역강국 정도로 여겨진다.[2] 미국 다음가는 확고한 2위 자리를 수성중이며 다른 강대국들인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과는 체급을 달리한다.[3] 다만 현대 한국 문화는 중화권, 베트남보다 일본과 더 비슷한데, 이는 한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정치 체제/경제 체제에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보단 민주주의/자본주의 국가인 일본과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적인 부분을 떠나 언어와 관련해서 한국어는 중국어, 베트남어보다 일본어와 훨씬 비슷하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주어-목적어-동사 순에 성조가 없는 반면 중국어와 베트남어는 주어-동사-목적어 순에 성조가 있다.[4] 고려의 무신정권 시대처럼 이원적 구조였던 때도 있긴 했으나 백여 년에 불과한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다.[5] 12세기 가마쿠라 막부 성립 이후 19세기 에도 막부 종식까지 700여 년간 천황(상징적 국가원수)과 쇼군(최고실권자)이 정통성과 실권을 나누어 갖는 이원적 구조였고, 현대에도 쇼군이 내각총리대신으로 바뀌었을 뿐 이러한 구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6] 지방 절도사들이 군웅할거하던 중국의 오대십국시대, 고려의 무신정권 시대처럼 무인(武人)이 지배층이던 시기도 있긴 했으나 일반적으론 위진남북조시대~수당시대의 문벌귀족, 송나라의 사대부, 고려의 문벌귀족 및 신진사대부, 조선의 양반처럼 문인(文人)이 사회 지배층으로 자리했다.[7] 에도 막부 시대 일본에도 사농공상의 구분이 도입되었으나 한국, 중국, 베트남에 비해 상인의 힘이 강했다. "오사카의 상인이 대노하면 전국의 다이묘가 벌벌 떤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일본엔 미쓰이 그룹, 스미토모 그룹 등 이 시대부터 이어져온 재벌들도 존재한다.[8] 헤이안 시대에 도입되어 잠깐 시행된 적이 있으나 율령제가 붕괴된 이후엔 한번도 시행된 적이 없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과거 제도가 유지되었던 한국, 중국, 베트남과 대조된다.[9] 官學; 전근대에 한자문화권 국가에서 운영한 교육기관으로 주로 유학을 가르쳤다. 고구려의 태학, 수나라~청나라와 고려 및 베트남의 국자감, 신라의 국학, 발해의 주자감, 고려~조선의 성균관, 향교 등이 있었다.[10] 헤이안 시대에 과거 제도가 도입되면서 '대학료'(大學寮)라는 관학이 설치되었으나 일본에선 사학(私學)이 대세였기에 관학은 하급 관리를 양성하는 데에 그쳤다. 그마저도 헤이안 시대 말기 율령제가 붕괴되고 과거가 더 이상 시행되지 않으면서 관학도 기능하지 않게 되었고, 1177년 대학료가 화재로 전소된 이후엔 재건조차 되지 않았다.[예시1] 박정희, 김대중, 모택동, 등소평, 호지명 등.[11] 한국의 김씨+이씨+박씨(=인구의 45%). 중국의 왕씨+이씨+장씨(=인구의 20%). 베트남의 응우옌+쩐+레(=인구의 58%).[예시2] 풍신수길, 이등박문, 안배진삼 등.[12] 일본에서 제일 많은 성씨인 사토는 인구의 2%도 되지 않는다.[13]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매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었다. 그러나 한국은 2000년대부터 좁은 국토를 소모하는 매장 문화가 문제시되며 화장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중국의 경우 1956년 마오쩌둥이 '장묘문화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인민이 사후에 화장할 것을 의무화하였다. 다만 한국은 정계/재계에서 여전히 매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21세기 들어서도 김대중(2009년 卒), 김영삼(2015년 卒), 신격호(2020년 卒), 이건희(2020년 卒) 등 매장된 유력 정치인/기업인이 흔한 반면 중국은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시중쉰, 장쩌민 등 대부분의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 화장되었다. 정작 화장을 의무화한 마오쩌둥은 박제되었다[14]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화장이 매우 익숙하다. 덕분에 장례 방식에서 화장이 99.97%라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현대 일본에선 매장이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의 구성원만을 위한 특권으로 남아있기에 한국과 달리 아베 신조 같은 최고위급 정치인도 당연히 화장되었다.[15] 전통적으로 조상 숭배 경향의 유교식 제사를 지내왔다. 다만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현대 중국, 베트남에선 한국에 비해 제사가 크게 간소화되었고, 북한에선 아예 금지되었다.[16] 유교식 제사가 아닌 신토+불교식 제사를 지내며, 유교와 달리 매년 지내는 것이 아니라 33년간 총 8번만 지낸다.[17] 중화 질서를 주도한 중국과 매 왕조가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한반도 및 베트남과 달리 일본은 중화 질서에 편입되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야마타이국(→후한/위나라), 아스카 시대/나라 시대/헤이안 시대(→수나라/당나라), 무로마치 막부(→명나라) 정도만이 중국에 조공했다. 하지만 헤이안 시대 중엽에 들어 당나라가 쇠퇴하고 일본의 율령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일본은 외부와의 교류를 중단하고 국풍 문화를 추구하였다. 13~14세기 가마쿠라 막부는 송나라/고려 등 주변국과 일절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고, 16~18세기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국교를 정상화했지만 청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 19세기 중엽 출범한 일본 제국은 1871년 청일수호조규를 맺어 청나라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1895년 청일전쟁 승리 후 청나라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케 하며 중화 질서를 무너뜨렸다. 이러한 경향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미국에 대적하는 G2로 부상한 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친미/친서방 국가이지만 대중국 경제 의존도가 매우 높은 대한민국,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이념적으로 궤를 같이하는 베트남은 현실적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 친중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외교적으로 반중 기조를 거의 항상 유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