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행궁에서 넘어왔습니다.
용양봉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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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시대의 행궁.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32길(본동) 한강변에 있었다.
2. 이름[편집]
여기서 보이는 한강 이북의 산봉우리들이 마치 '용(龍)이 머리를 들며(驤) 솟아오르고 봉황(鳳)이 날아오르는 것(䎝) 같다'하여 '용양봉저정(龍驤鳳䎝亭)'이란 이름이 붙었다.
3. 용도 및 역사[편집]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참배하러 오갈 때 잠시 쉬어가기 위해 지었다.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 현륭원이 있는 수원으로 오가는 길목에는 한강이 있다. 정조 본인과 수행원 한두명 정도만 대동했으면 상관없겠지만 참배길에는 수많은 인원들이 왕을 모시기 위해 같이 따라와서 행렬을 이뤘다. 이들이 수월하게 강을 건너려면 배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 배다리를 설치할 시간에 기다릴 일종의 대기실 겸 휴게실로 건립한 곳이 바로 용양봉저정이다. 이때 쉬면서 점심 식사를 했기 때문에 '주정소(晝停所)'로도 불렸다.
다만, 단순한 휴식처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양에서 수원으로 갈 때는 쉬면서 행렬을 재정비하는 공간으로 썼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원행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포상을 하기도 했다. 또한 용양봉저정 앞 넓은 모래밭에서 시위 군병들의 군사 훈련 및 무예 시험을 열기도 했다.
용양봉저정의 위치는 노들나루 바로 앞이다. 조선시대에 노들나루는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였다. 한양 이남의 모든 조운은 몽땅 여기로 와서 취합한 후 한강을 건넜으며,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는 배를 탈 때 거의 대부분 이곳에서 탔다. 정조가 이곳을 원행길로 정한 것은 이곳이 수원으로 가는 빠른 길목이기도 했지만, 백성들의 통행이 많은 곳에서 자신의 효성과 위엄을 드러내려고 한 목적도 있었다.
정확한 창건 시기는 모르나 용양봉저정 안내판에 따르면, 정조가 현륭원을 수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원행을 시작한 1789년(정조 15년)에 짓기 시작해 2년 뒤인 1791년(정조 17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근처에 아예 배다리를 놓고 조운을 돕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세워졌다.
정조 시기 후에도 임금들이 한강 이남을 오갈 때, 이곳에 잠시 들러 머물거나 수행원들에 대한 포상 행사 등 행궁처럼 사용하면서 '노량행궁(鷺梁行宮)'으로도 불렸다.#
고종 때까지 왕실에서 사용했다가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이 유길준에게 하사했다. 유길준은 황제의 은덕에 감격하여 이곳에 머물지 않고 이름을 '조호정(詔湖亭)'으로 바꾸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에는 일본인 이케다(池田)가 소유하면서 이름을 '용봉정(龍鳳亭)'으로 바꾸었고, 일부 전각을 헌 뒤 용양봉저정 터를 포함한 대지 5,300여 평에 운동장, 식당, 목욕탕 등 오락 시설들을 두었다.
광복 이후에는 다시 정부에서 소유하면서 이케다가 만든 시설들을 철거했다. 1972년 5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받았다.
4. 건물[편집]
- 조선시대에는 정문과 누정 등 건물 2, 3채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정자 하나만 남아있다.
5. 여담[편집]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지정 이후 보호 결연을 맺은 중앙대학교 부속여자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청소해왔다고 한다.#
- 사육신공원이 근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