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분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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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11대 국왕. 칭호는 이사금. 기록상으로는 한국사 최초의 태손(太孫)이다.
성은 석씨. 외모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따르면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9대 벌휴 이사금의 장남이었던 석골정과, 김구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선왕 내해 이사금(제10대)이 비록 차남 석이매의 아들이라 순서에서 밀리지만 백부인 석골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조분 이사금은 내해 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석씨와 혼인해서 내해 이사금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3][5]
아이혜부인과의 사이에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뒀고, 후에 들인 왕비 박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뒀다. 장녀 명원부인의 남편은 석우로이고[6] 차녀 광명부인의 남편은 미추 이사금(제13대)이며, 차남 석걸숙의 아들은 기림 이사금(제15대)이다. 박씨의 아들은 유례 이사금(제14대)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2. 생애[편집]
대외 전쟁이 활발했는데 조분 이사금 본인의 업적보다는 전쟁을 주도했던 석우로의 일이 많다. 훗날의 이사부나 김유신처럼 전쟁이 날 때마다 불려가는 정도.[7] 석우로는 서불한(이벌찬의 별칭)까지 오르고, 병마사도 해봤으며, 조분 이사금의 큰사위였기 때문에 다음 왕위 계승자로 유력했으나 결국 조분 이사금의 친동생인 첨해(첨해 이사금)가 다음 왕이 되었다.
231년 석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8] 을 정벌하고, 236년 골벌국[9] 을 병합해 경상북도 일대를 거의 장악하고 내륙 일대까지 신라가 깊숙히 진출하게 되었다. 232년과 233년에 두 차례 왜군의 침입을 막고, 245년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왔다는 기사가 있다. 왜, 백제, 가야와는 종종 투닥거렸지만 이것이 기록에 있는 고구려의 첫 신라 공격인데 고구려군이 북방에서 침입하자 조분 이사금은 석우로를 보내 막게 했으나 고구려군에게 패배하고 마두책(馬頭柵)으로 퇴각하여 방어한다. 다행히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는데 석우로는 몸소 나무를 해서 불을 피워 군사들이 장군의 배려에 감격해 사기가 올랐다고 하고 고구려군도 퇴각한다. 그런데 244년부터 247년 사이 고구려는 조위의 장수 관구검과 국운을 건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고구려가 이 시기 신라 방면을 공격했는지는 의문이 있다. 고구려는 당시 비류수 전투에서 동천왕이 수도 국내성도 버려가며 도망을 하고 있었는데 위군에 대항할 군대도 모자란 판국에 과연 신라쪽을 쳐들어갈 여유가 있었는지는 몹시 회의적이다. 244년경 옥저와 동예 일대가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영향을 받은 것을 보아 신라측 기록도 비류수 전투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242년에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인 고타군에서 희귀한 벼이삭을 바친 기록이 있어 이 무렵에 안동 지역이 신라에 복속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삼국전투기>에서는 중국의 위나라와 고구려가 맞붙은 비류수 전투를 설명하기 앞서 한반도 정세를 간단히 소개할 때 잠시 등장한다. 포니테일에 콧수염 조합의 간지 캐릭터인데 아마도 모델은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선덕여왕>의 비담인 듯하다. 감문국과 골벌국 정벌은 주변 국가들을 병합했다는 식으로 뭉뚱 그려져 기술되었다.
4.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조분 이사금 본기>
一年春三月 조분 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夏六月 연충을 이찬으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기다
一年秋七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二年秋七月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다
三年夏四月 왜인이 금성에 쳐들어오자 왕이 물리치다
四年夏四月 큰 바람이 불다
四年夏五月 왜병이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다
四年秋七月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워 이기다
六年春一月 나라 동쪽으로 가 백성을 보살피다
七年春二月 골벌국왕 아음부가 항복해 오다
八年秋八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十一年 백제가 서쪽 변방을 침범하다
十三年 풍년이 크게 들고,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十五年春一月 이찬 우로를 서불한으로 삼다
十六年冬十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자 우로가 나가 싸우다
十七年冬十月 동남쪽에 흰 기운이 일어나다
十七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八年夏五月 왕이 죽다
석우로가 승리한 전쟁이 엄청나게 많다. 재위 16년(245년)에 신라는 처음으로 북쪽 국경에서 고구려와 접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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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벌휴 이사금이 사망할 당시인 196년에 조분 이사금이 아직 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역산하면 180년대 전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삼국사기》에 벌휴 이사금의 태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3] 전대 왕의 자녀들 중에서 남녀간의 성별을 따지지 않고, 순서에 의거하여 즉위하며, 왕이 사망했을 때 전 왕의 자녀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면 왕의 자녀보다 왕의 다음 순서가 되는 동생이 왕위 계승 1순위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승은 신라사 전체에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부분적으로는 적용해 볼 수 있다.[4] 비록 즉위하지는 못했지만 벌휴 이사금의 장남으로 동생인 석이매보다 정통성을 가진 인물이었다.[5] 비슷한 예로 법흥왕(제23대)은 자기의 딸을 동생에게 시집보냈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다음 왕인 진흥왕(제24대)이었다. 이에 따르면 내해 이사금 사망 이후 석골정[4] 의 아들 석조분이 다음 계승 1순위인데 사촌지간인 석내해와의 왕통 계승에서 자녀들과의 분쟁이 발생될 소지가 있었기에 석내해의 딸과 혼인을 하여 이를 방지한 것으로 보인다. 조분 이사금 사후 동생 석첨해가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자 조분 이사금의 사위인 석우로보다 먼저 즉위한 것과 첨해 이사금 시기에 석우로가 왜군에게 죽는 것을 보면 기록에는 없지만 분쟁의 여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6] 《일본서기》에 따르면 석우로가 왜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자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과 함께 왜국의 대사를 속여 대사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한다.[7] 조분 이사금이 하는 일이 없었던건 아니고, 232년 왜군이 경주에 쳐들어왔을 때 한 번은 왕이 친정해서 기병을 활용해 크게 이기기도 했고, 235년에는 나라 동쪽을 돌아다니며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했다.[8]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가 된다.[9]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