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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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54대 국왕.
시호는 경명왕(景明王). 휘는 승영(昇英). 제53대 신덕왕의 아들로 뒤에 왕위에 오르는 제55대 경애왕의 형이다.
2. 생애[편집]
2.1. 대야성 함락 및 옛 대가야 일대 상실[편집]
경명왕 2년(918년) 일길찬 김현승(玄昇)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를 진압했는데 신라 초기의 왕족으로써 왕위를 회복한 박씨와 오랜 기간 신라의 왕족이었다가 왕위를 빼앗긴 김씨 간의 알력을 알 수 있다. 이 반란 사건에 대한 책임 때문인지 919년 상대등과 시중을 한꺼번에 교체하는 인사 이동이 있었으며, 한편 양 가문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금입택을 보유한 유력 귀족이었던 각간 김대존의 딸을 왕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해에 그나마 간접 지배하며 영향력은 행사하던 거창 및 그 주변 20개 성을 후백제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고, 이로써 신라는 562년 진흥왕(제24대) 당시 처음 확보한 이래로 사비백제와 오랫동안 쟁패하다 660년도에 확고하게 확보했던 오늘날 경남 서부 일대, 즉 옛 대가야 영역을 약 260년만에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신라가 경애왕 때까지는 독자적인 군사작전은 벌일 여력이 있었던 만큼, 김씨들의 반란 탓에 경남 서부 일대 호족들을 미처 지원해주지 못한 원인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2] 이후 2년 뒤에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경명왕 4년(920년) 신라 최후의 보루로 후백제의 침공으로부터 방패 역할을 해주고 있었던 대야성이 끝내 후백제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앞서 두 차례에 걸친 대야성 전투에서 견훤의 공격을 김억렴의 분전으로 막아냈지만 끝내 대야성을 잃고 만 것이다.
그야말로 사실상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로 향하는 마지막 장벽이 사라져버린 격이었는데 대야성이 신라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태종 무열왕 문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현재로 따지자면 대야성이 뚫림으로써 광주대구고속도로 선상에서 대구와 경주를 방어할 수 있는 산맥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대야성이 있었던 경상남도 합천군 지역은 지리산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있는 소백산맥 최고봉 뒤쪽인데 여기가 뚫림으로써 소백산맥 일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전선이 경주 바로 앞에 있는 태백산맥 일대까지 밀려버리는 것이다. 전투기와 폭격기가 없는 전근대 시절의 전쟁에서 산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야성이 후백제에게 넘어간 이상, 서라벌로 향하는 관문은 소규모 성들밖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데, 927년 동생 경애왕이 경주 포석정에서 후백제군의 기습을 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
물론 선덕여왕(제27대) 재위기 때도 백제 의자왕의 맹공으로 한 차례 내준 적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삼국통일전쟁 당시 신라와 후삼국시대의 신라는 여러모로 사정이 달랐다. 신라가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안맺고는 당장 대야성이 함락된 시점에선 장기적인 외교력의 차원에서나 논하는 얘기지, 실질적인 군사전략상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김유신 당시 신라나 후삼국시대 당시 신라나 매한가지였음을 더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후삼국시대 신라에게 대야성 함락이 마지막 장벽으로 대두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후삼국시대 신라 같은 경우, 삼국시대 신라를 고(구)려, 백제, 당에게서 지켜주던 서방의 강력한 방어막인 추풍령 일대, 북방의 방어막 죽령 일대가 완전히 다 날아간 상태였고 김유신과 같은 뛰어난 명장도 없었던 게 원인이었다. 신라란 국가를 갑주 입은 전사로 비유한다면 추풍령과 죽령 일대는 갑주, 대야성은 방패, 김유신은 창인 격이었는데, 김유신같은 장수는 없었고, 추풍령은 후백제가 907년에 접수해갔으며, 죽령 일대는 그전에도 벌써 고려가 되기도 전인 태봉이 접수해간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대야성이 날아간다면, 신라란 나라는 외적의 침입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삼국시대에 신라를 통일에 성공하게 한 도구들은 이렇게 과거의 적들에게 모조리 다 넘어가 있는 환장할 상태였지만, 다행히 신라에겐 여력이 있었고, 그 상태에서 취할 신의 한수가 있었으며 그 수단은 전례가 없지도 않았다.
2.2. 고려와의 동맹[편집]
치세 중 역사적인 사건이 하나 터지는데 918년 태봉에서 왕건의 쿠데타가 일어나 궁예가 축출되고 고려가 건국된 것이었다. 경명왕은 잘 나가던 견훤을 제쳐두고 내부 반란에 시달리던 왕건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920년 고려와의 국교 수립은 여태껏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지방 반란 세력으로 간주하고 교류를 하지 않았던 기존 30여 년간의 신라 정부의 입장을 버리고 처음으로 고려를 신라와 대등한 하나의 나라로 인정한 일대 사건이었다. 기록에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이 때 신라는 고려와 군사적인 동맹 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해서는 경명왕의 실책이라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는데 910년대까지는 여전히 전국 각지에 경주의 신라 정부에 충성하는 반독립적인 호족들이 제법 있었고, 그 원동력은 통일신라에게 수백년 간 한반도를 통치했던 나름의 유서깊은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명왕의 이 판단으로 인해 신라는 후삼국 중 하나로 전락했으며 상징성을 크게 잃어버렸다. 게다가 후삼국시대 동안 신라 스스로 후백제군의 공격을 막아냈던 것과 달리 이제 고려군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더이상 신라 중앙 정부가 작은 호족 세력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해의 진례성에 견훤이 쳐들어오자 경명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진례성은 친신라 성향 호족 소율희의 세력권이었다. 소율희 본인이야 그냥 넘어간 듯하지만 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아직 친신라 성향을 유지 중이던 다른 여러 호족 세력들은 이럴 바에는 차라리 고려에 종속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경명왕 이후 크고 작은 호족들이 신라를 버리고 고려 쪽으로 투항하는 사례가 급증하게 되었다. 신라-고려 수교 직후 920년 강주 장군 윤웅이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922년에는 하지성 장군 원봉, 명주 장군 순식[4] , 진보성 장군 홍술, 923년에는 명지성 장군 성달, 경산부 장군 양문 등이 고려에 항복했다. 결과적으로 경명왕의 일방적인 친려 정책은 이후 동맹으로 굳어져 견훤이 신라를 기습 공격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대야성이 날아간 상태에서 저항하려면 그나마 죽령 일대를 장악한 고려와 우호 관계를 맺는게 최선이었다. 그러지 않고 알량한 자부심이나 내세우면서 죽령 일대를 장악한 고려를 계속 반란군 취급이나 하면 곧 다가올 결과는 견훤에 의한 서라벌 초토화였다. 실제로 경애왕 시절 왕건이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약간 고삐를 늦춰버리자 이 일은 실제로 벌어지고 만다.[5] 이때 고려를 정식 국가로 인정한 920년도에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부산까지 죄다 밀어붙여 제패했었던 절체절명의 상황이 또 다시 이목을 끈다. 이때 견훤은 부산에서 불시에 북쪽으로 서라벌로 찔러들어올 수도 있었지만, 경덕왕(제35대) 당시 부산에 왜병이 상륙해서 서라벌을 침공할 것을 대비해 대대적으로 갖춰놓았던 요새 및 정예군 배치 등이 영 마음에 걸렸는지 회군하기로 결단한다.[6] 신라 입장에선 서라벌 함락이 목전까지 왔던 순간이었다.
훗날 왕건과 견훤이 주고받은 국서에서 존왕을 논하는 내용을 볼 때 왕건은 견훤을 그 군주를 배신한 후한의 동탁이나 전한의 왕망 따위로 치부하면서 주나라격인 국가를 제대로 받들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있으나 그걸 갖고 당시 왕건이 명목상 경명왕의 신하를 자처하는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보긴 어렵다. 견훤이야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원신라 지역 출신 신라 정규군 군인이었던 빼박 신라 국왕의 신하였고, 후세인이 보기에도 딱하게 느껴질 정도로 백제 국왕이 된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신라 대장군이 되고 싶어했던 반면, 왕건은 신라한테 별로 받은 것이 없었고, 구태여 칭신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7] 당시 정말로 절박한 건 신라였지, 결코 고려는 아니었다. 여기서 확인되는건 대야성을 잃은 것이 확인되자 곧바로 왕건의 고려를 통크게 인정한 경명왕의 빠른 형세 판단인데 외교적 감각과 전략적 판단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고려를 인정해서 죽령 일대의 고려군을 아군으로 만들면 대야성과 추풍령 일대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었고 대야성 자체가 신라는 지키기 쉬운 반면, 후백제는 유지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던 덕택에 대야성 수복도 노려볼만 했다.
이렇게 고려와 신속한 화친을 한 덕에 후삼국 통일 이후 신라 왕가인 진골 박씨와 김씨들이 고려가 500여 년 후 멸망할 때까지도 문벌귀족으로 남을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는 반대되는 평가도 있다. 경주 김씨들은 고려 개경 왕씨 왕가와의 통혼을 통해 주요 파벌 세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경명왕의 손자인 박욱은 고려에서 대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개국공신 신숭겸의 딸과 혼인하기도 했다.
2.3. 치세[편집]
한편 만약의 지원 가능성을 대비해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는 등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던 모습이 보이지만 당시 후당 또한 쇠락해가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도움은 되지 못했다.[8] 그리고 신라 사신과 강주(지금의 진주시) 호족 왕봉규의 사신이 후당까지 동행한 것을 볼 때 남해 바다에 세력을 갖춘 왕봉규의 협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봉규가 신라의 절대적인 충신은 아니라지만 경남 서부를 장악한 왕봉규를 견훤의 침략을 받아낼 탱커로 삼기 위해 우호관계를 맺어둘 생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왕봉규는 이 때까지는 신라 조정에 협조적이었으나 나중에 경애왕 시대에 친후백제로 갈아탔고, 고려군이 대신 때려잡는다.
한편 921년 2월에 말갈의 일파인 달고가 신라의 북쪽 변경에 쳐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 근처 삭주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왕건 휘하의 장수 견권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이들을 물리치는데, 이후 경명왕은 보답의 의미로 사신 편에 편지를 띄워보내기도 했다. 신라가 고려와 맺은 동맹이 조금의 결실을 보았던 셈이다. 이와 동시에 당시 발해의 한반도 내 영역, 즉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사실상 아예 무너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9]
《삼국유사》 <선도성모>조의 기록. 진평왕(제26대)처럼 매사냥이 취미였던 듯하다.[10] 신라 토착 여신인 선도성모 신앙을 엿볼 수 있다.제54대 경명왕(景明王)은 매사냥을 즐겼다. 일찍이 이 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리고는, 신모에게 기도를 하였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께 작위를 봉해드리겠습니다.”
금세 매가 날아와 책상 위에 앉았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으로 봉하였다.
《삼국유사》 <흥륜사 벽화보현>조의 기록. 불교 설화적인 성격이 강한 기록이나 보현보살 등 불교계에 박씨 왕실이 힘을 실어줘 종교적인 권위를 통해 당시 신라의 어려운 상황을 좀 완화해보려고 했었던 것 같다. 선덕여왕 때 불교계를 밀어줬던 것과 비슷한 것이다.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 홍륜사(興輪寺)의 남문과 좌우의 낭무(廊廡, 궁궐이나 종묘의 정전(正殿) 아래에 동서로 붙여 지은 건물)가 불에 탔지만 미처 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화(靖和)와 홍계(弘繼) 두 승려가 시주를 받아 수리하려고 하였다. 정명(貞明) 7년 신사(서기 921년)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神)이 이 절 왼쪽 경루에 내려와 10일 동안 머물렀는데 전각과 전탑, 풀과 나무, 흙과 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뒤덮었으며, 남쪽 연못의 물고기와 용이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면서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옥과 비단과 곡식 등의 시주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장인들도 제 스스로 찾아와 공사를 하니 며칠 만에 완성하였다.
공사가 다 끝나 천제가 돌아가려고 했는데 두 승려가 아뢰었다.
“천제께서 만일 궁으로 돌아가려 하신다면, 거룩하신 천제의 얼굴을 그려 지성으로 공양하여 천제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또한 천제의 진영을 여기에 모셔 두어서 길이 인간 세상을 보호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천제가 말하였다.
“나의 원력(願力, 부처에게 빌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마음의 힘)은 저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오묘한 교화를 두루 펼치는 것만 못하니, 이 보살의 모습을 그려서 경건하게 공양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두 승려는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의 상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금까지도 이 화상이 남아 있다.
실제로도 전대 왕들이 그랬듯 당대 민중에게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선종 고승들을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당시는 왕건이나 견훤도 진철 대사, 경보 선사 등 이름높은 선승을 자기 지역으로 초빙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종교적 영향력 확보에 일종의 경쟁이 붙어있는 상태였다. 아무튼 경명왕의 이런 노력은 전국 각지의 고승비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과거 진성여왕(제51대)이 초빙하려다 실패한 진경 대사를 서라벌로 초빙하는 데 성공했는데, 진경 대사는 김해 출신으로 신라 조정에 우호적이었고, 친불교 성향이었던 김해부 호족 소율희와의 연계성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효공왕과 낭공 대사 사이의 전례로 보아 정치적인 조언자 역할도 맡았을 수 있다.
기록에는 위와 같이 믿기 힘든 기록이 나오는데 모두 망조의 기운이다. 924년에 승하해서 황복사 북쪽에 장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불교식으로 화장했다는 설도 있다. 경주 시가지 남쪽의 배동 삼릉이 경명왕의 왕릉으로 전해진다.918년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의 개가 울어 3일 동안이나 독경을 하며 쫓아냈지만 반나절도 못되어 다시 울었다고 하며, 927년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다. 또한,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가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갔다.
2.4. 후손들[편집]
경명왕이 독보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게 있다면 별로 오래 산 것도 아닌데 아들이 무려 8남이나 있었다는 부분이다. 다만 왕위는 아우 경애왕에게 이어졌는데 많은 아들을 두었음에도 아우한테 왕위를 물려준 것 때문에 쿠데타나 왕위계승 문제가 엮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11]
사실상 신라의 실권이 있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는 동생 경애왕은 한때 암군의 결정판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나름대로 신라를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재평가받는다. 일단 결과만 놓고 보면 동생에게 물려준 건 아들들에게 물려주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경명왕의 여덟 아들들은 사실상 현대 박씨(朴氏)의 근간이 되었다. 경명왕의 장남인 밀성대군 박언침은 밀양 박씨, 차남인 박언성은 고령 박씨, 3남은 함양 박씨, 다음 4남부터 8남까지 죽산 박씨, 무안 박씨, 춘천 박씨, 순천 박씨, 충주 박씨, 상주 박씨, 월성 박씨 등 수많은 박씨들의 시조가 되어 오늘날의 박씨를 한국 3대 성(姓)에 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경명왕이다.[12] 다만 이때의 신라는 일종의 비상대비체제로 돌아가던 나라였음을 잊어선 안 된다. 경명왕의 아버지 신덕왕은 헌강왕(제49대)의 큰사위였다지만, 신라가 보통 상황이었으면 결코 왕이 되지 못할 처지였다. 그럼에도 왕이 된 건 어디까지나 능력을 인정받아서였다. 속편하게 장자 계승제를 지킬 처지가 아니었고, 그걸 관철하고자 했다면 경애왕 전에 가장 먼저 김씨들로부터 이의가 들어왔을 개연성이 높다. 다만 전화 위복으로, 때문에 서라벌 함락 당시 견훤에게 적극적으로 탄압받는 사태는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3. 기타[편집]
- 대한민국의 보물 제363호인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비문>은 경명왕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비문이 남아 있는데, 보통 다른 고승비가 '신하된 누구누구가 왕명을 받아 썼다'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반면 이 비문은 임금이 직접 지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내가 지었다(余製)'라고 짧고 당당하게 적혀 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닌 게, 당시 고승비(高僧碑)의 비문을 쓰는 일은 신라에서나 고려에서나 최치원이나 최언위 같이 한문에 능숙한 지식인들한테 부탁하는 게 보통이었다. 경명왕이 별다른 업적이 없는 임금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저 비문에 새겨진 나름 유려한 문장을 보아 그 개인적으로는 꽤나 학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학식이 많다는 것과 정치를 잘 한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문제기도 하고[13] 애초에 왕이 되기 전부터 나라 꼴이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던데다 본인은 요절하기까지 했으니 여러모로 답이 없긴 했다. 조조와 반대로 난세보단 치세에 태어났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를 유형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 이 비석을 직접 지어준 것 자체가 정치적 우군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기 때문에 전혀 의미가 없는 행동도 아니었다.
- 《삼국유사》 기록에서 그의 왕비는 장사택(長沙宅)이라고 적혀 있는데, 역사학계에선 이게 시호가 아니라 '장사택 출신'이라는 의미로 보고 있다. 장사택은 금입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 각간 김대존이 금입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력한 진골 가문 사람임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5.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경명왕 본기>
一年秋七月 경명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위응을 상대등으로 삼고, 유렴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현승이 반역하여 사형을 당하다
二年夏六月 태조가 즉위하다
二年秋七月 아자개가 태조에게 항복하다
三年 사천왕사 소상의 활줄이 끊어지다
三年 김성을 각찬으로 삼고, 언옹을 사찬으로 삼다
三年 태조가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기다
四年春一月 왕과 태조가 우호를 닦다
四年春二月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四年冬十月 태조에게 원군을 요청하다
五年春一月 진평왕의 보대를 찾다
二十三年 논하여 말하다
五年春二月 견권이 말갈족을 물리치다
五年夏四月 경도에 강풍이 불다
五年秋八月 황충과 가뭄이 발생하다
六年春一月 원봉과 순식이 항복하다
六年春一月 홍술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七年秋七月 성달과 양문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七年秋七月 김락과 김유경을 보내 후당에 조공하다
八年春一月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八年春一月 왕봉규가 후당에 공물을 바치다
八年夏六月 후당에 조공 간 김악이 조의대부시위위경에 제수되다
八年秋八月 왕이 죽다